[한국의 명목ㅣ청송 관리 왕버들] 잔가지 사이로 겨울바람이 지나고 몸통의 붉은 기운은 잔설 녹여
사진·장국현, 사진작가 | 글·장은재, 효성가톨릭대 교수
소설가 김주영 선생의 고향이자 소설 <객주>의 주무대인 경북 청송군 진보면 소재지 시골장터에서 청송군청 방향으로 31번국도 따라 자동차로 20분 정도 가면 파천면 관리 721번지(도로변)에 옛 전설을 간직한 천연기념물 왕버들 한 그루가 서 있다. 여름이면 무서울 정도로 잎이 무성하고, 가을이면 아름답고 웅장한 수형을 보이다가 잎들을 모두 떨어뜨려버리고 나목으로 겨울을 지낸다.
만약 무성한 잎들을 달고 있다면 눈의 무게에 의해 가지가 부러지는 설해를 입을 것이다. 자연환경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거목의 지혜에 놀라울 뿐이다. 작가는 지나가는 구름을 향해 손짓하고 있는 것처럼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나목의 잔가지를 잘 표현했다. 잔가지 사이로 바람과 함께 겨울은 지나간다. 잔설이 녹으면 다시 잔가지 사이에 붉은빛이 도는 고운 연노란 싹이 돋아나는 봄이 올 것이다.
▲ 눈을 장식처럼 얹고 있는 왕버들 줄기
▲ 수많은 가지로 겨울바람을 맞이하는 왕버들.
몸통 줄기에서 보여 주는 울퉁불퉁한 근육질은 열정을 느끼게 하고, 수피의 붉은 기운은 쌓인 잔설을 녹여 봄을 재촉하는 것 같다. 천연기념물 193호로 지정된 왕버들은 소나무와 함께 전설이 전해 오고 있다. 조선시대 신분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한 청춘 남녀의 사랑이야기다.
옛날 채씨 성을 가진 처녀가 늙으신 아버지를 모시고 살았다. 임진왜란을 당하여 나라에서 채노인에게 징집 명령이 내려졌다. 같은 마을에서 머슴살이를 하고 있는 청년이 찾아와서 평소 사모하는 처녀에게 자기가 대신 출정하겠다고 했다. 이 말에 처녀는 감동해 전쟁이 끝나고 돌아오면 총각과 백년가약을 맺을 것을 아버지의 허락을 받고 약속했다. 출정을 앞둔 전날 밤 우물가에서 총각은 어린 왕버들 한 그루를 처녀에게 보이면서 우물가에 심어 놓고 가겠으니 날 보듯 고이 길러 달라고 했다. 그후 전쟁은 끝났으나 총각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버지는 딸이 처녀로 늙어가는 것이 안타까워서 다른 사람과 정혼을 서둘렀다. 이 사실을 안 처녀는 명주 수건으로 총각이 심어 놓고 간 왕버들 나뭇가지에 목을 매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처녀가 죽은 얼마 후 왕버들 옆에는 소나무 한 그루가 자랐다. 마을 주민들은 그 소나무가 처녀가 일편단심 그 총각만을 기다리다 그리움에 사무친 넋이라 하였다.
지고지순한 사랑은 세월에 묻혀 사라지고 없지만 지금도 왕버들과 우물 터는 남아 있다. 이런 애달픈 전설을 간직한 왕버들은 살아 숨 쉬는 문화유산이다.
청송 관리 왕버들(靑松官里의 왕버들) | |
지정종목과 번호 |
천연기념물 제193호 |
지정일 |
1968년 3월 4일 |
소재지 |
경상북도 청송군 파천면 관리 721외 17필 |
종류 / 분류 |
식물 (쌍떡잎식물 > 버드나무목) |
[요약] 왕버들은 버드나무과에 속하는 나무로 우리나라를 비롯해 일본, 중국 등지의 따뜻한 곳에서 자란다. 버드나무에 비해 키가 크고 잎도 넓기 때문에 왕버들이라 불리며, 잎이 새로 나올 때는 붉은 빛을 띠므로 쉽게 식별할 수 있다. 나무의 모양이 좋고, 특히 진분홍색의 촛불같은 새순이 올라올 때는 매우 아름다워 도심지의 공원수나 가로수로도 아주 훌륭하다.
청송 관동의 왕버들이 얼마나 오래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높이가 10.2m, 근원둘레는 7.14m, 흉고둘레는 6.5m에 달한다. 본래는 굵게 자란 나무였으나, 벌집을 꺼내기 위해 서쪽 가지를 자른 후, 그 부분이 썩어 들어가 현재는 대부분 죽은 상태이다. 주변에 지름이 1m 정도 되는 오래된 소나무가 있다.
이 왕버들과 옆에 서 있는 소나무에는 다음과 같은 애틋한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한 총각이 마을 처녀와 결혼하기 위해 처녀의 아버지 대신 군대에 갔다. 그러나 그 총각이 돌아오지 않자 처녀는 왕버들에 목을 매었는데 그 곁에서 소나무가 자라났다고 한다. 이 나무는 마을을 보호하고 지켜주는 서낭나무로 매년 음력 1월 14일에 나무 아래에서 마을 제사를 지내왔다. 특히 이 제사 때 사용한 종이로 글씨를 쓰면 명필이 된다는 말이 있어 제사가 끝나면 서로 다투어 종이를 가져갔다고 한다.
청송 관동의 왕버들은 우리 조상들의 전설과 문화가 배어있는 오래된 나무로서 문화적·생물학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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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98) 청송 관리 왕버들
그이처럼 떠나버린 만세송, 그녀처럼 기다리는 왕버들
나무가 있는 아름다운 풍경을 만나면 사람들은 사진을 찍는다. 이 같은 자연스러운 행동을 스위스 태생의 영국 작가 알랭 드 보통은 책 ‘여행의 기술’에서 ‘아름다움을 소유하려는 본능적 욕구의 발현’이라고 했다. 덧붙여 그는 아름다움을 제 안에 온전히 담는 방법으로 순식간에 완성되는 사진보다 데생이 더 효율적이라고 강조했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긴 시간 동안 바라봐야 하기에 자연스레 마음 깊숙이 풍경을 담아둘 수 있다는 데에 근거한 이야기다. 그는 마침내 “그림을 배우기 위해 자연을 보라고 가르치기보다는 자연을 사랑하기 위해 그림을 그리라.”는 존 러스킨의 말을 인용하며 아름다움을 소유하는 방법에 대한 에세이를 마무리했다.
▲ 전쟁터에서 돌아오지 않는 임을 그리워하던 처녀의 한을 담고 서 있는 경북 청송 관리 왕버들.
●사라진 청송 지역의 자랑, ‘만세송’
“이 자리에 왕버들과 함께 서 있던 소나무가 청송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소나무라는데 그게 없으니 아무래도 허전해요. 더구나 청송 지역의 상징이 소나무라잖아요.”
시간의 흐름을 그림에 담아내는 젊은 화가 이장희(39)씨가 청송 관리 왕버들에 내려앉은 세월의 흔적을 그림에 담아낸 뒤 던져 온 이야기다. 천연기념물 제193호인 청송 관리 왕버들은 그의 이야기처럼 바짝 붙어 있던 ‘만세송’과 함께 바라보는 느낌이 독특한 나무였다. 왕버들과 소나무를 그리 잘 어울리는 조합이라고 할 수야 없지만 이 마을에서 두 나무의 어울림은 절묘했다.
넓은 품을 가진 왕버들 곁에서 소나무는 곧게 뻗은 줄기가 훌쩍 솟구친 채 개울가로 가지를 늘어뜨리고 서 있었다. 왕버들이 초록 잎을 내려놓으면 소나무의 푸름이 도드라졌고 봄이 돼 왕버들에 물이 오르면 소나무는 생명이 약동하는 소리가 잦아든 채 다소곳이 왕버들 가지의 반대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마치 잘 어울리는 한 쌍의 부부처럼 자연스럽고도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문화재청에서 왕버들 앞에 천연기념물임을 알리는 근사한 입간판을 세우자 청송군에서는 ‘만세송’(萬歲松)이라는 소나무의 이름을 또렷이 새긴 비석을 소나무 앞에 보란 듯이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청송의 자랑이기도 했던 만세송이 싹둑 잘린 밑동만 남긴 채 왕버들 곁을 떠났다. 뎅그렇게 만세송 표지석만 남아 을씨년스럽게 느껴지는 풍경이 화가의 눈에 거슬렸던 모양이다.
●전쟁터에서 돌아오지 않는 임 그리워
“2008년 봄이었죠. 만세송에 좀나무병이 들었어요. 반드시 살릴 생각으로 대여섯 달 동안 애를 썼지만 방법이 없더군요. 할 수 없이 베어냈지요. 만세송 표지석은 진작에 철거하려 했는데 아쉬움이 남아 미적거리다가 여태 그대로 두게 된 겁니다.”
‘군목’(郡木)으로 보호하던 나무를 잃게 돼 아쉽다며 청송군청 문화관광과의 문화재담당 우용훈(52)씨도 안타까움을 털어놓았다. 군청에서는 만세송에서 받은 솔씨로 후계목을 키워 만세송이 서 있던 자리 옆에 심어놓았지만 아직 어린 나무에 불과한 탓에 살아있을 때의 만세송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
만세송의 부재가 더 안타까운 것은 왕버들과 한 쌍을 이루며 전해 오는 전설 때문이기도 하다. 옛날 이 마을에는 채씨(蔡氏) 성을 가진 처녀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그의 아버지가 전쟁터에 나가게 되자 처녀를 좋아하던 한 총각이 아버지 대신 전쟁에 나가기를 청했다. 전쟁이 끝나고 돌아와 혼사를 치르겠다는 약속을 전제로 한 제안이었다. 아버지의 허락을 받은 총각은 처녀와 이별 인사를 나누며 이 자리에 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전쟁이 끝나고 돌아올 때까지 나무를 보며 자신을 잊지 말라는 당부와 함께 심은 나무가 지금의 관리 왕버들이다.
처녀는 혼인을 위해 목숨까지 던진 총각의 열정에 감동해 그를 기다리며 왕버들을 정성껏 보살폈다. 나무는 부쩍부쩍 자랐고 얼마 뒤 전쟁은 끝났다. 그러나 날이 가고 달이 지나도 총각은 돌아오지 않았다. 처녀는 타오르는 그리움을 견디지 못한 채 그새 훌쩍 자란 나무에 목을 매 목숨을 끊었다. 처녀가 죽은 자리 곁에는 얼마 뒤 소나무 한 그루가 자라나 처녀의 한 많은 죽음을 지켜주었다. 만세송이 그 나무다.
전설처럼 왕버들과 만세송은 처녀 총각이 살아생전에 이루지 못한 인연을 나무가 되어 이루는 듯한 형상으로 오랫동안 사이좋게 그 자리를 지켜 왔다.
●원래 크기의 절반을 잘라낸 고통도 겪어
마을 어귀 길목에 서 있는 당산나무로 사람들이 정월대보름에 꼬박꼬박 당산제를 지낸 왕버들은 문화재청에서 공들여 관리하고 있다. 키 10.2m, 가슴높이 줄기둘레 6.5m에 이르는 관리 왕버들은 특히 사방으로 뻗은 가지에서 돋은 푸른 잎이 무성해 단아하고 무척 건강해 보인다.
그러나 이 나무 역시 만세송 못지않은 시련을 겪었다. 나무는 원래 이보다 훨씬 컸다. 1967년에 관리 왕버들의 키는 지금의 두 배 가까운 18m나 됐다고 한다. 당시 서쪽으로 난 큰 줄기에 들어찬 벌집을 제거하고 썩은 줄기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나무 줄기의 상당 부분을 잘라내야 했다. 그로 인해 키가 반으로 줄어들었지만 그나마 몇 차례의 수술로 건강은 회복할 수 있었다. 줄기 중심부에는 여전히 당시의 고통을 간직한 수술 흔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다.
나무 앞에 서면 전쟁터에서 돌아오지 않는 임을 그리워하던 꽃다운 처녀의 얼굴이 아른거리고 처녀의 한을 달래듯 솟아오른 한 그루의 소나무도 떠오른다. 줄기의 절반을 잘라내야 했던 수난은 물론이고 곁에 붙어 있던 만세송을 떠나보내며 왕버들이 겪었을 이별의 깊은 통증도 느껴진다.
나무줄기를 따라 흩어진 시간의 흐름을 고스란히 담아내려 애면글면하는 화가의 마음속 통증까지 더불어 느낄 수밖에 없는 관리 왕버들의 가을 풍경이다.
글 사진 청송 고규홍 나무칼럼니스트 gohkh@solsup.com
▶▶가는 길:경북 청송군 파천면 관리 721. 중앙고속국도의 서안동나들목으로 나가서 안동시 길안면을 지나 지방도로 914호선을 이용해 동쪽으로 16.5㎞ 남짓 가면 청송군에 닿는다. 국도 31호선과 만나는 청송교차로가 나오면 직진해 교차로를 건넌 뒤 달기약수탕 방면으로 좌회전한다. 개울을 건너서 청송시외버스터미널 방면으로 좌회전하여 1.7㎞ 더 간다. 언덕을 넘으면 마을이 나오고 교차로 모퉁이의 빈터에 나무가 있다. 나무 바로 앞에는 자동차를 세울 수 없으므로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서 자동차를 세우고 걸어 나오는 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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