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에게 사랑받은 창덕궁
◈조선시대 궁궐의 역사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조선시대의 5대 궁궐은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경운궁) 그리고 경희궁(경덕궁)이다.
태조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1392년)하고 나서 수도를 지금의 서울인 한양으로 옮긴 뒤 제일 먼저 종묘와 사직 그리고 궁궐인 경복궁을 세웠다(1394년). 그리고 3대 태종 때(1405년)에는 경복궁의 동쪽에 창덕궁을 창건했다. 이로써 정궁 경복궁에 이어 이궁 창덕궁인 양궐 체제가 확립되었다. 그러나 임금들은 경복궁보다 창덕궁에 거처하는 것을 더 선호했다. 그리하여 많은 임금들이 창덕궁에서 거처하면서 함께 거처하는 식구들도 늘게 되었다. 따라서 성종 때 이르러서는 세분의 대비를 위해서 창경궁을 세우게 된다. 그러나 창경궁은 원래 수강궁(세종대왕이 상왕 아버지 태종을 위해서 지은 곳)이라는 곳에 몇 개의 건물을 더 만들어 붙여진 이름이었다. 창경궁은 창덕궁 옆에 위치하여 창덕궁의 부속 역할을 많이 하였다.
그 후 1592년 임진왜란으로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이 모두 불타 없어지게 된다. 일 년 정도의 시간이 지난 뒤 선조는 창덕궁을 재건하게 된다. 이는 경복궁이 풍수지리학적으로 길하지 못하다는 판단에서 그런 것이었다. 그리하여 창덕궁은 1610년 광해군 때 다시 지어져서 마지막 황제에 이르기까지 270여년간 경복궁을 대신하여 정궁의 역할을 하고 창경궁은 1616년에 복원되었다.
반면 덕수궁(경운궁)은 원래는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후손의 집이었으나 그 후 선조가 임진왜란 당시 임시로 거처하는 행궁(왕이 궁궐을 떠나 잠시 경유하는 궁)으로 사용하였다. 그 후 광해군은 이곳에서 즉위한 후 경운궁이라 이름 지어 7년간 왕궁으로 사용하였다('덕수'란 말은 궁궐 자체의 이름이라기 보다는 그 궁궐에 사는 고종에게 붙여진 이름이다. 1907년 일본의 압력에 의해 타의적으로 붙여진 이름이 덕수궁이다). 광해군은 즉위한 후 인왕산 아래, 지금의 사직단 뒤편에 인경궁, 그리고 그 앞쪽 지금의 새문안길가에 경덕궁(경희궁이란 이름은 영조대에 바뀐 이름이다)을 지었다. 그러나 광해군은 몇 가지 무리한 정책으로 인하여 왕이 된지 15년이 되는 1623년 인조반정으로 왕위에서 쫓겨나고 인조가 왕이 된다. 인조는 광해군대에 지었던 인경궁을 헐어다 창덕궁과 창경궁을 보수하였고, 경덕궁은 그대로 두어 이궁으로 사용하였다. 이로써 창덕궁과 창경궁이 정궁이 되고 경덕궁(경희궁)이 이궁이 되는 새로운 체제가 성립되어 조선 후기 내내 지속되었다.
조선 후기의 정궁으로 쓰이던 창덕궁은 고종 초년에 경복궁이 중건(1868년)되자 그 지위에 변동이 생긴다. 경복궁이 다시 정궁의 지위를 회복하고 창덕궁와 창경궁은 이궁으로 쓰이며 그때까지 이궁으로 쓰이던 경희궁은 빈 궁궐이 되었다. 고종은 경복궁과 창덕궁으로 오가면서 생활하였다. 고종대에 왕이 궁궐을 옮기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1894년 국내에서는 농민전쟁이 일어나고 대외적으로는 이를 핑계삼아 청나라와 일본이 우리나라에서 전쟁을 벌이는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고종에게 압박을 가하여 고종은 경복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겼다가 두 달도 못돼 다시 경복궁으로 옮기는 불안정한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은 이른바 갑오경장(옛날식의 정치제도를 서양의 법식을 본받아 고친 일)을 실시하게 하는 등 계속 우리나라에 압력을 가하였다. 고종과 그 비인 명성왕후는 러시아의 힘을 빌려 일본을 막아보려 했지만 오히려 일본은 일본공사 마우라의 지휘아래 일본군인, 자객들을 동원해 경복궁에서 명성왕후를 살해한다. 이를 을미사변(1896년)이라 한다. 이렇게 압박을 가하는 일본을 외국의 힘으로 막아보려 고종은 같은 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다. 이를 아관파천이라 한다. 이로써 정궁인 경복궁이나 이궁인 창덕궁은 모두 빈 궁궐이 되고 만다. 다시 돌아오라는 국민들의 여망의 따라 고종은 1년 만에 궁궐로 돌아온다(1897년). 그러나 고종은 경복궁도 창덕궁도 아닌 월산대군의 후손의 집을 확장, 대대적으로 보수하라는 명을 내리고 경운궁이라고 칭하고 그곳으로 환궁한다. 고종은 경복궁에서 왕비가 일본인들에 의해 참혹한 최후를 맞았던 기억을 되살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새로운 곳을 택한 것이다. 고종은 경운궁으로 돌아간 뒤 대한 제국을 선포하였다(1897년). 그러나 경운궁은 1904년의 대화재로 인해 거의 모든 전각들이 소실되었다가 1905년~1906년에 대부분의 전각들이 복원되었다.
한편 경희궁은 광해군 때 지어진 뒤 여러 왕들이 태어나고 즉위식을 갖는 등 이궁으로서 역할을 하다가 20세기 초에 들어오면서 일제의 강점으로 뜯겨나가고 헐리고 해서 그 정확한 때를 알 수 없으며 오직 궁궐지의 기록에 의해서 찾아볼 수밖에 없다.
일제 강점기 때 수난을 당한 궁궐은 비단 경희궁뿐이 아니었다. 일제는 경복궁 흥례문 자리에 조선총독부를 설치하였으며 창경궁에는 동물원과 식물원을 개설하여 일반인에게 관람하게 하면서 격하시켜 '창경원'이라 부르게 하였다.
이렇듯 조선의 5대 고궁은 국가의 흥망성쇠에 다라 그 운명을 같이 해온 우리 역사의 동반자이다. 시대가 변하여 차차 원래의 모습으로 보수, 복원되어가고 있지만 지나온 그 역사는 궁궐 각 건물의 공간 안에 현존한다. 그러기에 고궁 탐방은 단지 휴식을 취하고 볼 것을 즐기는 눈요기가 아니라 우리 선조들의 숨결을 함께 느껴볼 수 있는 역사 현장으로의 초대가 되는 셈이다.
[창덕궁 홈피에서 발췌 http://www.cdg.go.kr/bulletin/view01.htm?TbCode=10&TopsFlag=&evt=&Page=1&Mode=&mode=&Num=1047&bbsSchOpt=0&bbsSchTxt=]
▣후원 특별관람
관람코스: 함양문→부용지권역→의두합→불로문→애련지권역→연경당→존덕정권역→옥류천→돈화문
후원 관람동선
(약4km 정도로 1시간 40분 정도 소요된다)
창덕궁 입장료(\3,000)와 후원 입장료(\5,000)을 모두 매표해야 후원을 감상할 수 있다.
1.함양문
-창경궁의 동명 돌계단 위에 위치하며 창덕궁과 연결된 문이다.
함양문의 모습(함양문을 통해 창경궁으로 갈 수 있는데 매표를 한 후 입장할 수 있다)
우측은 창경궁, 좌측은 후원 가는길이다.
2.부용지(芙蓉池)와 부용정(芙蓉亭)
-조선의 궁궐 연못은 천원지방(天圓地方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 사상에 의해서 조성되었다.
부용지도 땅을 상징하는 네모난 연못 속에 하늘을 상징하는 둥근 섬을 만들었다.
연못의 동남쪽 모퉁이 돌에는 뛰어오르는 형상의 물고기 한 마리가 새겨져 있다.
부용정(1792년 건립)은 十자형을 기본으로 하되, 남쪽으로 양쪽에 한 칸씩 보태 다각을 이루고 있는 독특한 형태의 정자이다.
1795년 정조는 사도세자와 혜경궁의 회갑을 기념하여 화성에 다녀온 뒤 너무 기쁘고 즐거워서 부용정에서 규장각 신하들과 낚시를 즐겼다는 기록이 있다.
아쉽게도 현재 부용정은 보수공사중(2011.10.14~2012.04.10)이라 볼 수가 없었다.
보수공사중인 부용정 가림막에 걸려 있는 부용정 사진
3.기오헌(寄傲軒)과 의두합(倚斗閤)
기오헌과 의두합은 효명세자가 지은 건물로 단청을 칠하지 않은 소박한 건물이다.
효명세자는 아버지인 순조의 명으로 대리청정을 하면서 안동 김씨의 세도를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노력했다. 이때 본보기가 되는 사람이 할아버지인 정조였으므로 주합루 뒤쪽에 집을 짓고 이곳을 나라 일을 생각하는 장소로 삼았다.
효명세자는 1830년 대리청정 3년 만에 22세의 젊은 나이에 죽었다. 후에 익종(翼宗)으로 추존되었다.
4.불로문(不老門)
-불로문은 하나의 통돌을 깍아 세운 문으로 임금이 무병장수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불로문
5.애련지(愛蓮池) 권역
-숙종 18년(1692년)에 만들어진 연못과 정자이다. 숙종은 애련정기(愛蓮亭記)에서 「연꽃은 더러운 곳에 있으면서도 변하지 않고 우뚝 서서 치우치지 아니하며 지조가 굳고 맑고 깨끗하여 군자의 덕을 지녔기 때문에 이러한 연꽃을 사랑하여 새 정자의 이름을 애련정이라 지었다」고 밝히고 있다.
6.연경당(演慶堂)과 선향재(善香齋)
-궁궐지에 의하면 1828년(순조28년) 왕세자였던 효명세자가 사대부 집을 모방하여 궁궐 한에 지은 120여칸 민가형식의 집이다.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따라 주인대감의 일상거처인 사랑채와 안주인 등 여성들의 공간인 아채로 나뉘어져 있다. 선향재는 서재로 이용되었다.
7.존덕정(尊德亭)과 폄우사(貶愚榭)
-존덕정(1644년 건립)은 육각정자 형태로 겹지붕이 특이하다. 내부에는
'萬川明月主人翁自序'라는 정조의 글이 새겨진 현판이 걸려있다. 옛날에는 다리 남쪽에 일영대(日影臺)를 설치하여 시각을 측정했다고도 한다.
폄우사는 순조의 세자 효명세자가 독서하던 곳이다. '砭愚'란 어리석음을
경계하여 고쳐준다는 뜻이다.
8.옥류천
-옥류천은 창덕궁 후원 북쪽 깊숙한 곳에 흐르는 개울을 가리킨다. 인조 14년(1636년)에 커다란 바위인 소요암을 깎아 둥근 홈을 만들어 옥과
같이 맑은 물이 바위 둘레를 돌아 폭포처럼 떨어지게 만들었다. 임금과 신하들이 여기에 둘러앉아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지었다.
근처의 소요정(逍遙亭), 태극정(太極亭), 청의정(淸漪亭) 등과 함께 후원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치를 간직하여 많은 임금들에게서 특히 사랑받았던 곳이다.
소요암에는 인조의 玉流川이라는 어필 위에 숙종의 오언절구시가 새겨져 있다.
飛流三百尺 폭포는 삼백척인데
遙落九天來 멀리 구천에서 내리네
看是白虹起 보고 있으면 흰 무지개 일고
飜成萬壑雷 골짜기마다 우뢰소리 가득하네
옥류천
숙종의 오언절구시가 새긴 바위
옥류천의 작은 연못(가운데 태극문양이 새겨져 있다)
9.돈화문(敦化門: 보물 383호)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의 모습
-창덕궁의 정문으로 1412(태종12년)에 처음 지어졌다. 지금의 돈화문은 1609년(광해군 원년)에 다시 지은 것으로 현재 남아있는 궁궐 정문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敦化는 『中庸』의 大德敦化에서 가져온 것으로 '(큰 덕은 백성등을) 가르치어 감화시킴을 도탑게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조선 시대에는 이층 문루에 종과 북이 있어 시각을 알려주었다고 하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여행이야기 > 서울·경기 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래포구와 소래습지생태공원을 찾아서 (0) | 2012.10.22 |
---|---|
왕에게 사랑받은 창덕궁 사진(2011.11.29) (0) | 2011.11.30 |
창경궁이야기 2 (0) | 2011.11.14 |
창경궁이야기 1 (0) | 2011.11.14 |
국립수목원에 다녀오다 3-3 (0) | 2011.10.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