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서울·경기 여행

창경궁이야기 1

약초2 2011. 11. 14. 15:17

서울, 궁궐로 빛나다!

 

서울은 아름답고 활기찬 도시이다. 짧은 기간 동안 큰 성장을 이룬 최첨단 도시이면서도, 전통과 현대가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다. 궁궐은 서울에서 만날 수 있는 다양한 전통문화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고 잘 보전된 문화유산이다.

 

▲경조오부

 

▲수선전도

 

▲서울성곽지도

 

600여 년 전에 개국한(1392년) 조선 왕조는 서울을 수도로 정했다. 서울은 수려한 산(내사산<낙산, 인왕산, 남산, 북악산>, 외사산<용마산, 덕양산, 관악산, 북한산>)에 둘러싸여 있고 강과 하천이 흘러 사람이 생활하기에 편리하며, 한반도의 중심에 자리 잡아 한나라의 수도로서 적합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서울을 수도로 정한 뒤에는 곧바로 궁궐을 짓고 종묘와 사직을 세웠으며, 도성과 성문 등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 필요한 시설들을 마련했다. 서울은 이로부터 오늘날까지 600년이 넘게 우리나라의 중심도시가 되고 있다.

서울도심에는 넓은 도로와 고층 빌딩이 가득하다. 하지만 백여년 전만 해도 서울은 왕과 왕실가족이 거쳐하는 궁궐을 중심으로 나라의 모든 활동이 이루어지는 전통도시였다. 최고의 인재와 물산이 궁궐과 왕실이 있는 서울로 모여 들었고, 이를 바탕으로 서울에는 품격 있는 왕실문화가 발달했다.

궁궐은 나라 경영의 중추가 되는 소중한 장소이다. 서울에는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 등 조선시대의 다섯 궁궐이 있다.

궁궐은 아니지만 왕실의 사당인 종묘도 조선 왕조의 정신적 근간으로서 궁궐 못지않게 중요시되었다. 이들 궁궐과 종묘는 한 나라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장소이기에, 당대 최고의 규모와 기술로 지어졌다.

창덕궁과 종묘는 전세계가 주목하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언제 어느 때 찾아도 자연의 아름다움과 깊은 역사 전통의 향기를 전해주는 서울의 궁궐. 서울의 궁궐은 우리가 살아온, 또 오래도록 살아갈 터전 서울을 가장 서울답게 하는 자랑이요, 힘이다.

 

왕실 이야기 듣는 창경궁

 

1963년 1월 18일 사적 제123호로 지정되었다. 1484년(성종 15) 당시 생존하였던 세 왕후(세조· 덕종· 예종)의 거처를 위해 옛 수강궁 터에 지은 것이다. 이때 지은 집이 명정전· 문정전· 수녕전· 환경전· 경춘전· 인양전· 통명전과 양화당· 여휘당 및 사성각 등이다. 전각의 이름은 서거정(徐居正)이, 정전(正殿)인 명정전의 상량문은 김종직(金宗直)이 지었다.

 

그러나 창건 당시의 전각은 임진왜란 때 모두 소실되고, 1616년(광해군 8)에 재건된 뒤에도 몇 차례의 화재가 있어, 그때마다 내전이 불탔기 때문에 지금 남아 있는 것은 대체로 임진왜란 후에 재건한 명정전을 비롯한 그 회랑과 그 앞문인 명정문,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 등 외전과, 1834년(순조 34) 다시 지은 숭문당· 함인전· 환경전· 경춘전· 통명전· 양화당· 집복헌·영춘헌 등의 내전으로 나눌 수 있다.

 

궁의 배치를 보면, 동쪽 한가운데에 ‘凸’자 모양으로 불룩하게 나온 중심부분에 있는 중층삼간누문(重層三間樓門)인 홍화문을 들어서면,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금천(禁川) 위에 놓인 옥천교가 있고, 이를 건너면 명정문과 좌우 행랑채가 있다. 이 문을 지나면 널찍한 뜰이 나오고, 그 일직선상의 중층으로 된 기단 위에 명정전이 있다. 홍화문 좌우의 행랑이 이 명정전까지 계속되면서 울타리를 이루어, 창경궁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명정문은 홍화문보다 높은 지대에 있고, 명정전은 명정문보다 한층 더 높은 곳에 있는데, 이러한 예는 창덕궁과 개성(開城)의 만월대에서 볼 수 있다.

 

그후 1907년 순종이 덕수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기자 이곳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꾸며 오락장으로 삼았는데, 1910년(융희 4) 이름을 창경원(昌慶苑)으로 고치고, 벚꽃나무를 잔뜩 옮겨 심어 일반에게 휴식처로 공개하여 오다가 1983년 12월 30일 창경궁으로 복귀하였다. [출처: 네이버백과사전]

 

[소개]

창경궁은 성종 14년(1483)에 세조비 정희왕후, 예종비 안순왕후, 덕종비 소혜왕후 세분의 대비를 모시기 위해 옛 수강궁터에 창건한 궁이다. 수강궁이란 1418년에 세종이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의 거처를 위해서 마련한 궁이다.

 

창경궁은 창덕궁과 연결되어 동궐이라는 하나의 궁역을 형성하면서, 독립적인 궁궐의 역할을 함과 동시에 창덕궁의 모자란 주거공간을 보충해주는 역할을 하였다. 성종때 창건된 창경궁은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으로 모든 전각이 소실되었고, 광해군 8년(1616)에 재건되었다. 그러나 인조2년(1624) 이괄의 난과 순조30년(1830) 대화재로 인하여 내전이 소실되었다. 화재에서 살아남은 명정전, 명정문, 홍화문은 17세기 조선시대 건축양식을 보여주며, 정전인 명정전은 조선왕궁 법전 중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보유 문화재현황]

 

국보 1점

- 제226호 명정전

 

보물 7점

- 제384호 홍화문

- 제385호 명정문 및 행각

- 제386호 옥천교

- 제818호 통명전

- 제846호 풍기대

- 제851호 관천대

- 제1119호 팔각칠층석탑

 

등록문화재 1점

- 제83호 대온실

[출처: 창경궁 홈피: http://cgg.cha.go.kr/]

 

[역사]

년도

내용

1418

(세종 즉위년 11월초 3일)

상왕전(태종)신궁으로 수강궁 영건

1483(성종 14년)

수강궁터에 창경궁 영건

1592(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소실

1616(광해군 8년)

명정전, 문정전, 환경전, 인양전, 공사청, 홍화문 등 중건

1623(인조 원년)

인조반정시 저승전 소실

1624(인조 2년)

이괄의 난으로 통명전, 양화당, 환경전 등 소실

1633(인조 11년)

통명전, 양화당, 환경전, 함인정 등 중건

1670(현종 11년)

건극당 건립

1777(정조 원년)

자경전 건립

1779(정조 3년)

월근문 건립

1790(정조 14년)

통명전 화재

1830(순조 30년)

환경전 화재로 함인정, 경춘전, 숭문당, 영춘오행각, 빈양문 소실

1834(순조 34년)

통명전, 여위당 등 중건

1857(철종 8년)

선인문, 동북소부장청, 위장소, 주자소, 대청판당 등 60여칸 화재

1877(고종 14년)

창경궁 수리

1909(순종 3년)

창경궁내 동ㆍ식물원 개설

대한민국

1950.6.25

동란으로 폐원

1954

서울 수복으로 개원

1963.1.18

사적 제123호 지정

1983.7.1

복원공사를 위하여 공개 폐지

1983.10

동ㆍ식물원 일부를 남서울대공원에 인계

1983.12.30

창경궁으로 환원

 

◈창경궁의 역사

 

대왕대비, 대비 등 임금의 가족들이 머물던 궁궐 - 창경궁

창경궁은 원래 1418년 세종이 상왕인 태종을 모시기 위해 지은 수강궁이 있었던 곳으로, 성종 14년(1483년)에 대왕대비와 대비를 모시기에 부족한 궁궐을 보충하기 위해 수강궁터에 새로이 창경궁을 창건하였다.

창경궁은 한 때 2,000칸이 넘는 대규모의 궁이었는데 서울의 다른 궁궐과 같이 임진왜란 때 불탔다가, 광해군 때인 1616년 다시 지었다가 제 모습을 찾았다. 통명전도 이때 같이 재건되었으나, 인조 2년(1624년) 이괄의 난과 정조 14년(1790년)때 다시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순조 34년에 다시 지어졌다.

 

창경궁에서 창경원 그리고 다시 창경궁이 되기까지

일제강점기에 창경궁은 다른 어떤 궁보다 큰 수난을 겪었다. 1907년 이후 일본인은 창경궁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면서 많은 건물들을 헐어버렸다. 그리고 이름도 ‘창경원'으로 다시 지었다. 따라서 1909년부터 1984년까지 창경궁 자리에는 우리나라에 처음 생긴 동물원인 ‘창경원'이 있었다.

 

1980년대에는 민족문화의 창달과 전통문화 유산의 발굴, 보존 등을 위한 정부와 국민 사이에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많은 유적이 조사, 정비되었다. 1981년 정부는 ‘창경궁 복원 계획'을 정하고 1983년에는 10월 130여 종의 900여 마리의 동물들과 591종 2177분의 식물을 서울대공원으로 옮겼다. 그리고 1984년 8월까지 동물원 시설 등을 철거하였다. 창경궁 중건 공사는 1985년 시작되었고 1986년 준공되었다.

 

◈창경궁의 특징

 

▶건물의 방향이 동쪽 - 태후가 거처하는 곳

창경궁의 특징은 정문부터 동향이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건물들이 동쪽을 향하고 있다. 이렇게 궁을 동향으로 한 이유는 태후가 거처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증보문헌비고》라는 옛 책에 의하면 예로부터 태후가 거처하는 곳은 반드시 동쪽에 있었다. 때문에 성종이 세 분 대비를 모시기 위해 창경궁을 지을 때 당연히 동쪽을 향하여 궁을 지은 것이다. 동향한 궁궐의 정문인 홍화문을 들어서면 금천이 북에서 남으로 흐르고 이 개천 위에는 금천교인 옥천교가 놓여 있다. 옥천교를 건너면 정전의 정문인 명정문에 이르고, 이 문을 들어서면 높은 월대 위에 서 있는 정전인 명정전과 마주하게 된다. 동서로 길게 뻗은 월랑은 홍화문과 명정문의 남북 양쪽에서 뻗어 나온 월랑과 합쳐져 'ㅂ'자 모양을 이루면서 정전의 좌우 앞쪽을 둘러싸고 있다. 명정전의 남서쪽에는 편전인 문정전과 그 월랑이, 북서쪽에는 많은 내전과 행각들이 자리 잡고 있으며 나머지 수천 간의 전각과 행각 등은 일제에 의해 철거되었다. 이 궁궐의 전체적인 배치는 창덕궁처럼 지형의 높고 낮음을 그대로 두고 꼭 필요한 곳만을 골라 집터를 잡고 정원을 꾸민 것이 특징이다. <동궐도 東闕圖>(국보 제249호)를 통하여 1830년대의 창경궁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편전이 사각기둥으로 건축된 이유

조선시대의 대부분의 궁의 편전의 기둥은 둥근 기둥을 사용했다.

그런데 궁을 다시 지을 때 문제가 발생했다. 공사가 거의 마무리 되고 있던 때에 문정전은 편전이므로 둥근 기둥을 해야 하는데 이미 옛날의 주춧돌에 맞추어 네모기둥을 만들어 놓았을 때 이를 발견했다. 임금은 둥근 기둥으로 다시 지을 것을 명했으나 신하들이 반대를 하였다. 신하들의 생각은 옛터를 헐어서도 안되고 공사에 필요한 돈과 인력이 이중으로 들어가는 것을 낭비라 여겼기 때문이다. 임금은 신하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편전의 기둥을 그냥 사각 기둥으로 짓도록 허락했다.

 

 

창경궁 [昌慶宮]

 

서울특별시 종로구 와룡동에 있는 조선시대 궁궐.

사적 제123호. 이 궁궐에서 장조(莊祖)· 정조(正祖)· 순조(純祖)· 헌종(憲宗) 등 여러 왕들이 태어났다. 조선시대 5대 궁궐 가운데 다른 궁궐은 모두 남향하고 있으나 이 궁궐만은 풍수지리설에 의해 동향하여 있다. 본래 태종이 아들 세종에게 임금자리를 물려주면서 자신이 거처할 궁궐로 지은 수강궁(壽康宮)에서 시작되었다. 그후 1484년(성종 15) 이 수강궁 자리에 새로이 별궁인 창경궁을 건립했다.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된 것을 1616년(광해군 8) 다시 세웠다. 이때 동향으로 세워졌던 명정전(明政殿)을 남향으로 고쳐야 한다는 김일손의 상소가 있었으나 도감(都監)에서는 만약 남향으로 할 경우에는 경복궁·창덕궁·창경궁·종묘의 내청룡으로 이어지는 맥이 함춘원(含春苑)의 남쪽 지맥을 끊게 된다면서 그대로 둘 것을 주장했다고 한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으로 소실된 많은 전각들이 1633년에 중건되었다. 1656년(효종 7)에 요화당(瑤華堂)·난향각(蘭香閣)·취요헌(翠耀軒)·계월각(桂月閣) 등 4개의 전각을 지어 효종의 네 공주들을 머물게 했다. 1909년에는 일제가 강제로 궁 안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든 다음 일반인들에게 관람시켰으며, 1911년에는 박물관을 짓고 이름을 창경원(昌慶苑)으로 격을 낮추어 불렀다. 1984년 일제에 의해 철거되었던 문정전(文政殿)과 월랑(月廊) 등을 복원하고 정비하면서 다시 이름을 창경궁이라고 했다.

 

동향한 궁궐의 정문인 홍화문(弘化門)을 들어서면 금천(禁川)이 북에서 남으로 흐르고 이 개천 위에는 금천교(禁川橋)인 옥천교(玉川橋)가 있다. 옥천교를 건너면 정전의 정문인 명정문(明政門)에 이르고, 이 문을 들어서면 높은 월대(月臺) 위에 서 있는 정전인 명정전과 마주하게 된다. 동서로 길게 뻗은 월랑은 홍화문과 명정문의 남북 양쪽에서 뻗어 나온 월랑과 합쳐져 'ㅂ'자 모양을 이루면서 정전의 좌우 앞쪽을 둘러싸고 있다. 명정전의 남서쪽에는 편전인 문정전과 그 월랑이, 북서쪽에는 많은 내전과 행각들이 자리 잡고 있으며 나머지 수천 간의 전각과 행각 등은 일제에 의해 철거되었다. 이 궁궐의 전체적인 배치는 창덕궁처럼 지형의 높고 낮음을 그대로 두고 꼭 필요한 곳만을 골라 집터를 잡고 정원을 꾸민 것이 특징이다. 〈동궐도 東闕圖〉(국보 제249호, 고려대학교 박물관)를 통하여 1830년대의 창경궁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출처: 다음 백과사전]

 

동궐도 [東闕圖]

 

 ▲동궐도

 

▲동궐도 중 일부분

창덕궁을 조감도 형식으로 그린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궁궐도. 작가 미상.

국보 제249호(1989.08.01 지정). 비단 바탕에 채색. 세로 273㎝, 가로 576㎝.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동궐은 창덕궁의 별칭으로 조선왕조의 정궁인 경복궁의 동편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연접해 있는 창경궁도 함께 그려져 있다. 제작 당시 2벌을 만든 듯 이 그림과 크기와 기법이 동일한 〈궁궐도〉(보물 제596호, 동아대학교 박물관 소장. ※보물 제596호 궁궐도가 형식, 기법, 크기 등이 동일한 것으로 판명되어, 1995년 6월 23일 보물 제596호를 지정해제하고 국보 제249호 동궐도로 승격지정함.)가 있는데, 〈동궐도〉가 궁궐 안팎의 나무와 언덕, 산의 묘사에서 원체풍으로 좀 더 정교하게 다루어져 있다. 제작 시기는 순조 26년 조영된 전사(田舍)와 순조 30년 소실된 경복전이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1826~30년 사이로 추정된다. 당시 창덕궁과 창경궁 안에 실재하던 모든 전당과 누정, 교량, 연못, 담장, 나무, 주변의 경관들이 약간 옆에서 비껴 내려다본 평행투시도법의 시점과 계화 (界畵) 기법에 의해 입체적으로 정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당시 화원들의 뛰어난 계화 기법을 엿볼 수 있을 뿐 아니라 광대한 두 궁궐의 전체 모습과 더불어 각 건물마다 전각이름이 명기되어 있어 고궁 복원이나 궁궐 연구 등에도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동궐도는 천, 지, 인의 3벌이 그려졌었으며, 현재 2벌만이 고려대학교와 동아대학교 박물관에 각각 보관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고려대학교에서는 원래 내려보던 모습 그대로 접어 보관해왔으나, 동아대학교 측에선 병풍작업을 하여 오히려 가치를 떨어뜨리게 되어 고려대학교의 동궐도는 국보로, 동아대학교의 동궐도는 보물로 지정되는 웃지 못할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 해체 작업을 거친 동아대학교의 동궐도까지 원 형태로 복원되어 같은 국보로 지정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국립고궁박물관에 가면 판넬 복사본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 시대 창경궁은 일제에 의해 창경원으로 개조되었다. 창경궁에 동.식물원을 개설하면서 창경원이라 이름붙인 것이다. 창경원 공사는 1907년에 시작되었으며 1909년에 동. 식물원이 개원식을 가졌다. 창경원이라 이름 바뀐 것은 1911년의 일이다. 1924년부터 야간 공개가 시작된 창경원은 당시 서울 시민의 밤벚꽃놀이의 명소이기도 하였다.

 

[조선일보 기사]에 나온 창경궁 옛이야기

 

[조선일보에 비친 「모던 조선」]

경성시민이 손꼽아 기다린 「밤의 환락장」 창경원 「야앵(밤 벚꽃놀이)」

 

“봄! 도회지의 봄! 꽃! 창경원의 벚꽃! 이것을 차저 몰려든 시골 손들로 서울 장안은 요즘 사람사태가 났다.

 

노리터 노리터마다 꽃바다! 거리거리마다 사람물결! 서울 장안은 한때의 꽃덕택을 입어 ‘인플레이션’ 세월을 만난듯 와글와글 하고 있다.” 조선일보 1936년 5월 3일자가 전한 창경원 벚꽃놀이 기사다.

 

일제가 조선을 병합한 이후, 일본 벚꽃놀이 풍습이 들어오면서, 봄만 되면 경성 시민은 창경원과 장충단 공원, 혹은 멀리 우이동이나 인천, 월미도, 개성으로 꽃놀이를 떠나는 게 유행이었다.

 

일제는 1907년 일본의 상징꽃 같은 벚꽃을 창경궁에 심었으며, 1911년엔 ‘궁(宮)’이 ‘원(苑)’으로 격하되어 창경원이 시민들 꽃놀이터의 하나가 됐다. 1924년 4월 20일, ‘창경원 야앵(夜櫻·밤 벚꽃놀이)’이 처음 실시되면서 조선의 봄 꽃놀이 문화는 완전히 바뀌었다.

 

‘야앵’은 단순히 밤에 벚꽃 구경만 하는 게 아니었다. 휘황찬란한 오색 전등의 ‘일미네이?V(illumination)’ 아래, 이왕직(李王職·조선왕실 사무 담당 기구)이 주관하는 아악과 양악 연주, 기생들의 검무, 야외 영화상영과 ‘라듸오’ 공개 무대가 펼쳐지는 조선 유일의 ‘종합엔터테인먼트’ 장소였다.

 

▲ 밤 벚꽃놀이 기간 중 인산인해를 이룬 창경원 문 앞 모습.

조선일보 1928년 4월 23일자에 실린 사진이다.

 

망국의 한이 서린 곳임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람들은 너도나도 창경원에서 먹고 마시고 놀았다. ‘창경원 야앵’은 ‘30만 경성시민이 손꼽아 기다리는 밤의 환락장’(1929년 4월 15일자)을 넘어,‘어마어마한 시골관광단이 창경원으로!’ 몰리면서 ‘장사군들은 돈궤짝을 바라보고 만족’하는(1936년 5월 3일자) 조선 최대 축제로 자리 잡았다.

 

보통 일주일가량 이어진 ‘야앵’ 기간 동안, ‘꽃에 미친 어머니, 미아 45건’(1932년 4월 28일자), ‘당신의 나들이를 엿보는 도적, 꽃구경도 좋지만 문단속도 철저히’(1934년 4월 17일자), ‘야앵표 파는 곳에 소매치기가 우글우글’(1939년 4월 19일자) 같은 사건· 사고도 비일비재했다.

 

‘야앵에 미처난 군중이 일주일 밤낮동안 16만여명(1932년 4월 28일자)’에 달하는 등, 입장객이 폭증하자 이왕직은 1935년부터 입장료를 10전에서 20전으로 배나 올렸다. 그러자 첫날 입장객이 3000명에 그쳤고, 이튿날에도 6000명에 불과, ‘창경원 야앵’ 신화는 깨지는 듯했다. 그러나 요란한 전등불과 각종 공연의 유혹을 뿌리칠 수는 없었다. 사흘 만에 다시 전과 같은 북새통을 이룬 것이다.

‘창경원 밤벚꽃놀이’는 광복 후에도 서울 최대의 관광 이벤트로 이어지다가 1984년 일제 잔재를 청산하는 창경궁 복원 공사가 이뤄지면서 60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벚나무도 어린이대공원과 여의도 등으로 옮겨졌다.

 

 

[경향신문 기사]에 나온 창경궁 옛이야기

1960~70년대 ‘밤 벚꽃놀이’의 명소였던 창경원. 시골 노인들까지 동물원 원숭이 구경하러 상경하던 곳. 그러나 1984년 일제 잔재인 벚꽃과 동물원을 내보내고 창경궁 이름을 되찾았다. 벚나무 대신 조선 소나무로 위엄을 갖춘 왕궁으로 변모한 것이다.

 

상춘인파 창경원에만 3만명 몰려

 

1976년 3월의 마지막 주말이었던 28일, 전국적으로 활짝 갠 화창한 날씨에 많은 시민들이 서울 시내 각 고궁과 근교 유원지를 찾아 하루를 즐겼다. 특히 창경원에는 약 3만명의 인파가 몰려 새로 들여온 기린 가족 등 동물들을 보며 하루를 즐겼고 춘당지(春唐池) 보트장엔 연인들이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등 크게 붐볐다. 상춘객들은 앉을 자리가 없어 동물원 앞까지 몰려 앉아 점심 도시락을 먹기도 했다.

 

▲ 봄을 맞아 창경궁을 찾은 사람들로 창경궁 앞은 매우 붐볐다.

 

▲ 서로 먼저 입장권을 사려고 창경궁 매표소 앞에서 씨름하는 사람들 <1976>

 

밤 벚꽃놀이 창경원 활짝

 

1965년의 창경원 밤 벚꽃놀이는 4월 15일부터 시작되었다. 밤 벚꽃의 정취를 더하기 위해 창경원에는 5색 초롱불이 빛났다. 20도를 넘나드는 화창한 날씨에 첫날이었던 15일 밤 벚꽃놀이를 즐기러 천여명의 상춘객이 몰려 꽃그늘에서 밀어를 나누었고 창경원 춘당지에서는 보트 놀이가 한창이었다. 벚꽃과 상춘객을 비추었던 보름달은 밝기만 했다.

 

 

▲ 창경궁에선 상춘객들이 밤 가는 줄도 모르고 봄꽃에 흠뻑 취했다.

 

“막 내리는 74년” 창경원 동물원

 

온 겨레와 함께 해 온 창경원 동물원의 정겨운 숨결이 1983년을 끝으로 74년의 역사를 멈추었다. 우리나라의 근현대사를 쭉 함께 해 온 만큼, 창경원 동물원의 동물들도 우리 민족이 가진 전쟁과 식민지 시대의 애환을 담고 있었다. 2차 대전 말 일제에 의해 창경원의 맹수들은 모두 독살되거나 굶어 죽었고 6.25가 터지면서 동물들도 학살과 약탈, 추위와 굶주림 등으로 또 한번 전쟁의 비극을 겪기도 한 것이다. 이와 같이 파란만장한 역사를 가진 창경원 동물원은 역사의 막을 내리고 130종 801마리의 동물들과 함께 훨씬 좋은 환경인 과천 서울대공원으로 이사했다.

 

 

▲ 과천 서울대공원으로 이동하고 있는 창경궁의 코끼리 <1984.4>

 

창경궁을 옛 모습으로

 

1984년 창경원을 창경궁으로 복원하기 위한 공사가 진행되었다. 지난 1909년 궁 안에 동물원이 들어서면서 덕지덕지 억지분칠을 당해온 창경원은 경내의 동, 식물원, 위락시설 등 모든 콘크리트 구조물을 뜯어내고 1985년 말에 순수한 고궁으로 다시 태어났다. 이 철거 작업으로 동, 식물원, 놀이터, 매점 등 일체의 시설물이 철거됐고, 명정전 왼쪽에 임금님이 집무하던 문정전과 회랑을 복원됐다. 공중열차, 하니문카, 케이블카 등 놀이시설도 민간인에게 매각돼 6월까지 치워졌다. 보기 좋지 않게 널려있던 나무들을 잘라내고 느티나무, 홰나무 등을 심어 궁궐 분위기를 한껏 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