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경궁 둘러보기
홍화문(弘化門) (보물 제384호)
창경궁의 정문으로 조선조 성종 15년(1484)에 창건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현재의 문은 광해군 8년(1616)에 재건된 것이다. 이 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층 우진각지붕의 건물이며, 기둥 위에 짜여진 공포는 다포식으로 조선초기 양식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 특이하다. 문의 가구형식은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과 비슷하나 고주의 사용방식이 약간 다르게 되어 있어 주목된다. 이 건물의 외관은 전체적으로 짜임새가 굳세고 장중미를 보이면서 친근감도 갖게 된다.
명정전 (국보 제226호)
조선 성종 15년(1484)에 창경궁이 조성되고, 그 정전으로서 명정전이 세워졌다. 이곳은 임금님이 신하들의 조하(朝賀)를 받거나 국가적인 행사가 거행되었던 곳으로 1544년 인종이 이곳에서 즉위하였다. 명정전은 경복궁이나 창덕궁의 정전과는 달리 남향이 아닌 동향이다. 이는 창경궁의 지세에 따른 것이다. 그후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광해군 8년(1616)에 복원되어 오늘에 이른다. 다른 궁의 정전과 같이 이중의 월대를 두어 그 위에 건물 기단을 마련하고, 큰 사각 주초 위에 원형의 운두 높은 주좌(柱座)를 조각하여 초석을 배열하였다.
월대의 형식은 다른 궁의 것과 달리 지형에 맞추어 전면 동쪽과 북쪽 일부만을 이중단으로 하고, 건물 좌우와 뒷편에서는 1단으로 하였다. 평면으로 보아 정면 5칸, 측면 3칸에 후퇴(後退)를 한 단층 팔작기와지붕으로 겹처마이다.
평주 위에는 모서리를 많이 굴린 창방이 놓이고 운두가 낮은 평방 위에 다포계 양식의 외삼출목, 내사출목의 공포를 짜았다. 건물 사면은 모두 꽃살창으로 돌려져 있는데, 그 위로는 교살창이 있다. 내부 바닥에는 전(塼)을 깔았고, 뒤편 중앙부에는 왕좌인 용상이 있는데 그 뒤로 일월도의 병풍이 놓였다.
그 위로는 닫집으로 짜은 보개(寶蓋)가 있고 천정의 중앙부에는 한층을 접어올린 쌍봉문(雙鳳紋)이 있는 보개천정을 장식했으며, 그 주위는 우물반자를 하였다. 단청은 모로단청을 하고, 특히 천정판에는 화려한 연화문의 반자초 단청(丹靑)을 시문했다.
월대의 전면에는 명정전 어간에 맞추어 중앙에 삼도의 이중계단이 놓였다. 가운데 어계의 폭은 2.4미터이고, 양측 협계(挾階)의 폭은 각 1.3미터이다. 상하 계단은 모두 6단씩으로, 어간의 답도(踏道) 석판 중앙에 사분심엽형(四分心葉形) 윤곽을 양각(陽刻)한 후 그 안에 날개를 활짝 편 한쌍의 봉황을 조각해 장식했고, 챌판에도 당초(唐草)와 보상화(寶相華), 운문(雲紋) 등을 정교하게 조각하였다. 하층 계단 앞에는 명정문과 연결되는 어도가 있고 좌우에 24개의 품계석(品階石)이 있다.
문정전
문정전은 창경궁 창건 때 편전으로 건립되었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명정전과 함께 중건하였다. 1930년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朝鮮古蹟圖譜」에 실린 명정전 정면 사진에 동측면의 일부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그때까지 이 전각이 존속했던 것으로 알 수 있으나, 그후의 자세한 기록은 찾아 볼 수 없다.
1984년부터 시행한 복원을 위한 발굴조사에서 건물의 기단과 동쪽에 두 곳, 서쪽 한 곳의 계단이 확인되었는데, 기단의 규모는 남북 20미터, 동서 18미터였다.
1986년 창경궁 중창공사 때 중건되었는데, 발굴조사와 문헌 고증에 의하여 네모기둥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 내삼출목, 외이출목, 단층 팔작집(38평)으로 겹처마이며 남향하여 세웠다.
이 건물의 서쪽에서, 숭문당 남쪽면으로는 경사진 자연지세를 이용하여 남북 방향으로 아름다운 2단의 화계(花階)를 꾸몄고 동쪽행각사이에는 문정문이 있다.
숭문당
이 건물은 조선 경종 때 건립되었으며, 순조 30년에 큰 불로 소실된 것을 그해 가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崇文堂'의 현판과 '日監在玆'라 쓴 게판은 영조의 어필이다. 영조는 특히 학문을 숭상하고 영재를 양성하였는데, 이곳에서 친히 태학생을 접견하여 시험하기도 하고 때로는 주연(酒宴)를 베풀어 그들을 격려하기도 하였다.
정면 4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기와집으로 홑처마이며, 지형에 따라 앞면에만 방형의 장초석을 사용하여 누각처럼 세웠다. 기둥 위에는 간단한 초익공의 공포를 짜았고, 기둥 사이에는 화반 없이 굴도리 밑에 장여를 받고 있는 소로만을 끼워 장식하였다.
평면으로 보아 전후와 남쪽에 퇴간을 두고 마루를 깔았으며, 가운데칸의 마루와 동선을 연결시켰고 그 좌우에 방을 놓았다.
빈양문
숭문당 북쪽에 연접되어 있는 이 문은 치조공간(외전)과 연조공간(내전)을 연결하는 통로의 개폐 기능을 갖는 문으로 명정전의 뒷면 중앙 어칸 앞으로 설치된 복도를 따라가다 이 문을 나서면 바로 내전으로 들어서게 되어 북쪽으로 함인정, 경춘전, 환경전이 눈에 들어온다. 이 문은「궁궐지」에 간단한 규모가 기록되어 있고 1986년 중건공사 때 발굴 조사를 토대로 재건하였다
함인정
이곳에는 원래 성종 15년에 지은 인양전이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뒤 인조 11년(1633)에 인경궁의 함인당을 이건하여 함인정이라 한 것이다. 이곳은 특히 영조가 문무과거에서 장원급제한 사람들을 접견하는 곳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기와집으로 겹처마이며, 기둥 위에는 이익공의 공포를 짜았고, 주간에는 화반 두 개씩을 놓았다. 내부에는 모두 우물마루를 깔았는데, 내진주(內陳柱)로 구획된 마루는 한 단 높게 처리하여 그 위로는 우물천정을 하고 사방둘레의 퇴간(退間)에는 연등천정을 하였다
경춘전
이 전각은 창경궁의 내전으로 성종 14년에 건립되었다. 그후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광해군 8년에 재건하였으나, 순조 30년에 불탄 것을 그 34년에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른다. 이 경춘전은 정조와 헌종이 탄생한 곳이며, 현판은 순조의 어필이다.
정면 7칸, 전후퇴칸을 포함해서 측면 4칸 단층 팔작기와집으로 겹처마이며, 네모기둥 위에는 이익공의 공포를 짜고, 기둥간에는 두세 개씩의 화반을 놓았다. 네면에는 모두 세살문을 달았고 그 위에 교살창을 하였다. 좌우엔 온돌방과 중앙3칸은 마루를 깔았는데 양측으로 각 2칸과 전후퇴칸은 연등천정을 하고 우물천정을 하였다
환경전
이 건물은 성종 15년에 건립되었으며,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광해군 8년에 중건하였다. 그 후 순조 30년(1830)의 큰 불로 소실되었던 것을 그 34년에 중수하여 오늘에 이른다.
이곳은 창경궁의 한 내전으로 왕이 늘 거동하던 곳이며, 중종이 이곳에서 승하했고, 효명세자(익종으로 추존)가 승하했을 때는 빈궁(殯宮)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정면 7칸, 측면 4칸의 단층 팔작기와집으로, 겹처마이며 기둥 위에는 이익공의 공포를 짜고 기둥간에는 두세 개씩의 화반을 놓았다. 건물의 내부에는 모두 우물마루를 깔았고, 외진평주(外陳平柱)와 내진고주(內陣高柱)를 배열하여 퇴량을 걸고 그 위로는 연등천장을 하고 안쪽으로는 우물반자를 하였다. 대량(大樑)은 내진고주 사이에 걸었다.
통명전
통명전은 창경궁의 연조 공간으로 명정전 서북쪽에 있으며, 왕과 왕비가 생활하던 침전의 중심 건물이다. 창경궁 창건 때 세워졌는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재건이 되고, 다시 이괄의 난과 정조 때 화재를 입었다.
지금의 건물은 순조 34년에 중건된 것이다. 남향한 전면에는 월대를 두고 양모서리에는 청동제 드므를 놓고 그 북쪽에 외벌대 기단 한 단을 두어 건물을 세웠다.
정면은 7칸이고 측면이 4칸인 이익공계(二翼工系) 건물로 겹처마에 팔작지붕을 하였다. 지붕 위에는 용마루가 없는 것이 특징이고, 전후퇴칸을 두었다.
북서쪽 일부의 방을 제외하고는 건물 내부 바닥에 모두 우물마루를 깔았는데, 정면으로 보아 양측에 2칸씩 방을 꾸몄음이, 1984년의 발굴조사에서 연도지(煙道址)가 노출됨으로써 확인되었다.
양화당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파천하였던 인조가 환궁하면서 이곳에 거처한 일이 있으며, 고종 15년(1878) 철종비 철인왕후가 이곳에서 승하하였다. 현판은 순조의 어필이다.
정면 6칸, 측면 4칸의 단층 팔작기와집으로 겹처마이며, 세벌대의 장대석 기단 위에 네모기둥을 세우고 초익공계 포작(包作)을 짜았다. 기둥간에는 화반(花盤)없이 굴도리 밑에 장여를 받고 있는 소로만을 끼워 간결한 장식을 하였다.
건물의 내부에는 좌우엔 온돌방과 중앙3칸은 마루를 깔았고, 전면 중앙의 2칸에만 툇마루를 창 없이 개방하였다. 외진평주와 내진고주 사이에는 퇴량을 걸었고, 그 위로는 연등천장을 하고, 안쪽으로는 우물반자를 하였다. 대들보는 내진고주 사이에 걸리었다.
영춘헌·집복헌
영춘헌은 내전 건물이며 집복헌(集福軒)은 영춘헌의 서행각으로 초창 연대는 알 수 없다. 집복헌에서는 영조 11년(1735)에 사도세자가 태어났고 정조 14년(1790) 6월에는 순조가 태어났으며 정조는 영춘헌에서 거처하다가 재위 24년(1800) 6월 승하하였다.
순조 30년(1830) 8월 1일 오전 화재가 발생하여 환경전, 경춘전등과 함께 소실되어 순조 34년 장남궁을 헐어다 그 재목으로 재건하였다.
1983년 동물사 본관에 있던 창경원 관리 사무소가 동물사의 철거로 인하여 이곳으로 옮겨 임시 관리 사무소로 사용되다가 1986년 중건 공사 때 창경궁 관리 사무소를 신축하고 이 건물은 변형된 부분을 보수하였다.
영춘헌은 본채 5칸이 남향하여 ㅡ자형을 이루고 본채의 좌우와 뒷면으로는 행각이 둘러져 있어 ㅁ자형을 이루었으며 서쪽으로 ㅁ자형의 행각이 이어져 맞붙어 있다. 주위 건물과 비교해 볼 때 통명전, 경춘전, 환경전 등은 이익공식이고 양화당은 초익공식인 데 비하여 영춘헌은 기둥의 높이도 낮고 익공의 끝을 몰익공식으로 둥글게 굴려 초각하였으며 행각은 더욱 간결하게 굴도리집으로 처리하여 각 건물의 격을 엿볼 수 있다.
풍기대
이 풍기대는 영조 8년(1732)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풍기대 위의 구멍에 깃대를 꽂고 그 깃대에 기를 달아 바람의 방향과 속도를 재던 것으로, 방향은 24방향으로 측정하였다.
전체 높이는 228.1센티미터인데, 하부대석 높이는 92.4센티미터, 상부 팔각주의 높이는 135.7센티미터이다
성종태실
양화당의 동북쪽 구릉지 숲속에 위치하고 있다. 태실은 4각형의 지대석 위에 석종형(石鍾形)의 몸체를 놓고 8각형의 지붕돌을 얹었으며 상륜부(相輪部)는 보주로 장식하였다.
태실비는 태실 동쪽에 있는데 귀부(龜趺)와 비신(碑身), 이수를 갖추고 있고 비신 앞면에는 "성종대왕 태실"이라 새겨져 있다. 이들은 원래 조선 제9대 성종의 태를 묻은 곳인 경기도 광주군 경안면에 있었던 것인데 1928년 전국에 있는 조선 역대 임금의 태실을 대부분 서삼릉으로 이봉하면서 원래 경기도 광주군 경안면 태전리에 있던 성종태실을 이곳으로 옮겼다고 전한다.
성종은 세조 3년(1457) 덕종의 둘째아들로 태어나 예종의 뒤를 이어 1469년 13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다. 그 뒤 25년동안 왕위에 있으면서 「경국대전」의 반포 등 조선의 문물 제도를 완비하는 데 힘을 기울였으며 특히 창경궁을 창건한 임금이기도 하다.
춘당지
춘당지는 1909년에 조성된 원지(苑池)이다. 두 개의 연못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위의 것이 1,107평방미터, 아래 것이 6,483평방미터이다. 연못 속의 섬(366평방미터)은 1986년에 조성한 것이다.
춘당지가 있는 이곳은 원래 연산군이 서총대(瑞총臺) 앞 대지를 파다가 중종반정으로 중단한 곳이다. 그 후 권농장(勸農場)의 논이 있었는데 연못으로 만들었다.
팔각7층석탑 (보물1119호)
춘당지 옆에 세운 탑이다. 일제 강점기 이왕가박물관을 만들 때 만주(滿洲)에서 가지고 온 상인으로부터 매입하여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몸돌에 “遼陽重/ 開山都/ 綱挺玉/ 巖壽塔”의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으며, “大明成化六年庚寅歲秋七月上澣吉日造”라고 기록되어 있어 1470년(성종원년)에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8각의 평면 위에 7층의 탑신을 세운 석탑으로 전체 모습은 라마탑의 형태와 비슷하다.
대온실(식물원)
1909년 목재와 철재, 그리고 유리로 지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온실이다. 건축당시 동양최대의 규모였으며, 열대지방의 관상식물을 비롯한 희귀한 식물을 전시하였다. 1986년 창경궁 복원공사를 계기로 자생목본류를 중심으로 야생화와 함께 전시하고 있다. 현재 대온실은 2004년 2월 6일에 등록문화재 제83호로 지정되었다.
관덕정
이 정자는 춘당지 동북쪽 야산 기슭에 있는 사정(射亭)으로 인조 20년(1642)에 취미정(翠微亭)이란 이름으로 창건되었으나 현종 5년(1664)에 지금의 이름으로 개명하였다 한다.
「예기(禮記)」에 "활쏘는 것으로 덕을 본다. 쏘아서 정곡을 맞추지 못하면 남을 원망치 않고 제몸을 반성한다."라는 것에서 이름한 것으로 풀이된다. 정면 1칸, 측면 1칸에 초익공계 양식이며 팔작지붕으로 된 정자 건물로 화강석 기단 위에 각초석을 놓고 각주를 세웠으며 내부 바닥은 우물마루를 깔았다.
구조상 특이한 것은 측면에 비해 정면이 2배 정도 넓으나 같은 한 칸씩으로 구성되어 정면 중앙부에 수장폭 크기의 간주를 세우고 좌우 4분의 1지점에 각각 대들보를 올려 놓았다.
대량머리는 외부로 빠져나오지 않고 내부에서 창방 위에 얹혀 있는 상태이고 네귀의 기둥 위에서만 창방의 뺄목을 익공으로 조각하였다.「동국여지비고」에서는 "창덕궁, 창경궁 후원에 상림십경(上林十景)이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관덕풍림(觀德風林)이다"하였다.
관천대
이 관천대는 소간의(小簡儀)를 설치하여 천문을 관측하던 곳으로, 「書雲觀志」에 보면 숙종 14년(1688)에 조성된 것이다. 원래 창덕궁 금마문 밖에 있던 것을 일제 때 창경궁으로 옮겨 왔다.
높이는 2.2미터, 넓이는 2.4*2.3미터이며, 주위에는 돌난간을 돌렸다. 대의 중앙에는 높이 99센티미터의 관측기를 설치하는 작은 대가 있고, 그 위에 넓이 73.4*52.6센티미터, 두께 24.5센티미터의 또하나의 판석이 있다. 여기에 남북방향으로 관측기를 고정했던 5개의 구멍이 파여 있다.
선인문
홍화문에서 이어진 궁 담장의 남쪽 곧 창경궁 동남쪽 담장에 있는 궁문이다. 이 문은 성종 15년에 초창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광해군 8년에 재건하였는데 철종 8년(1857)에 다시 소실되어 고종 14년(1877)에 복원하였다. '동궐도'에 보면 현재의 월근문과 같이 솟을지붕의 외관을 갖추고 있었으나 고종 때 재건하면서 지금의 형태로 건립되어진 것으로 보인다.
「동국여지비고」에 의하면 이 문의 예전 이름은 서린문(瑞燐門)이라 하며 동궁의 정문이었는데 조정의 신하들이 이 문으로 출입하였다 한다
함양문
과학의 문
과학의 문은 해방이후 1971년 9월 창경원시절 월근문 동쪽으로 '국립과학관'이 준공된 이후 창경궁과 담장을 쌓고 창경궁과 과학관사이에 만들어진 문입니다. "과학의 문" 현판은 박정희 대통령이 친필로 쓴 것입니다.
월근문
홍화문 북쪽에 있는 이 문은 정조가 그 부친 사도세자의 묘(廟)인 경모궁에 수시로 참배하기 위하여 정조 3년(1779)에 건립하였다. 정조가 매달 초하루 경모궁에 참배하러 거둥할 때에는 반드시 이 문을 경유하였기 때문에 월근문(月覲門)이라 이름하였다 한다.
집춘문
창경궁 동북쪽 담장에 있는 궁문으로 서울 문묘가 마주 바라보이는 곳에 있다. 현재 이 문 외부 지역에는 민가가 들어서 있어 출입문으로는 사용하지 않고 있다.
「동국여지비고」에 의하면 이 문은 후원의 동문으로, 태학(太學) 서쪽 반교(泮橋)와 제일 가까워 역대 임금들이 태학으로 나갈 때에는 이 문을 경유하였다 한다. 초창은 창경궁 창건 때인 성종 때이나 현재의 건물은 조선조 말기에 건립된 것으로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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