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자전거여행

[자전거 전국해안가 일주여행(2)] 역사의 고장, 강화도 해안일주 2-5[끝]

약초2 2010. 4. 5. 21:22

(4편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동막해수욕장의 모습

 

 

 분오리돈대 설명문

 

 

 분오리돈대에서 바라본 모습

 

 

 분오리돈대에서 바라본 모습

 

 

 분오리돈대 내부 모습

 

 

 분오리돈대 내부 모습

 

 

 분오리돈대에서 바라본 동막해수욕장 모습

 

 

 

자전거를 세우고 안전장치를 채우고는 분오리돈대 위로 올라간다.

분오리돈대 위에서 바라본 강화도 남쪽 바다가 물이 빠져 드러난 갯벌과 얕은 바다와 깊은 바다의 영역이 잘 보인다.

 

 

 길화교 입구의 모습

 

 

 

분오리돈대를 내려와 다시 진행을 한다.

함허동천입구를 지나고 얼마간 진행을 하니 다리(길화교)가 나온다. 다리를 건너니 삼거리가 나와 우측으로 진행을 한다.

 

 

 후애돈대의 모습

 

 

 후애돈대의 설명문

 

 

 후애돈대 내부 모습

 

 

조금 진행을 하니 후애돈대(後崖墩臺)가 나온다.

후애돈대를 지나니 가천의과대학이 나온다.

 

가천의과대학앞에 이르니 드디어 자전거도로가 나온다.

이제 편하게 진행을 한다.

 

 

 섬안교교차로를 지나 바라본 모습

 

 

 직선으로 곧개 뻗은 도로와 나란히 이어지는 자전거도로 모습

 

 

 갯벌사이의 물길 모습

 

 

섬안교교차로에서 우측으로 접어든다. 끝이 보이지 않는 직전도로를 따라 한없이 진행을 한다. 우측의 갯벌이 멋지게 보여 잠시 사진도 찍어본다.

 

너멍골입구에서 휴식을 한다. 이제 피곤이 몰려온다.

다행히 얼마 남지 않은 것에 위안을 삼고 다시 진행을 한다.

 

 

 쉼터에 설치되어 있는 강화도 관광지도 모습

 

 

관광안내도가 설치되어 있는 쉼터에서 커피 한잔을 사먹으며 잠시 쉬면서 재충전을 한다.

다시 힘을 내 마지막 구간을 달린다.

 

초지대교 입구 삼거리에서 횡단보도를 건너 진행한다.

 

 

 갯벌 사이의 물길이 멋지다

 

 

 사적 225호인 초지진 모습

 

 

초지대교 입구 삼거리에서 11분을 진행하니 삼거리가 나와 우측으로 진행을 하는데 끊어졌던 자전거도로가 다시 시작된다. 이곳 자전거도로는 차량과 완전히 분리되어있다.

 

20여분 진행하다 다시 쉼터가 나와 10여분을 쉬고 다시 출발한다. 쉼터마다 강화외성(사적452호) 안내판이 세워져 있는게 눈길을 끈다.

초지진입구, 덕진진입구, 광성보입구, 오두돈대입구, 화도돈대입구를 차례로 지나간다. 이제 해도 떨어진지 오래됐지만 가로등이 있어서 그렇게 어둡지는 않다.

 

  

 초지진에서 바라본 초지대교의 모습

 

 

강화초지대교 [江華草芝大橋]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초지리(草芝里)와 경기도 김포시 대곶면 약암리(藥岩里)를 잇는 아치형 4차선 다리로, 길이 1.2㎞, 폭 17.6m의 4차선 교량인데, 1999년 6월부터 인천광역시가 공사를 맡아 2002년 8월 28일 개통하였다.

 

1995년 10월부터 민자유치사업으로 추진되다가, 1999년 6월부터 인천광역시가 공사를 맡아 2002년 8월 28일 개통하였다. 시공은 한솔디앤씨(주)이, 감리는 동일기술공사(주)가 맡았고, 총 590억 원의 사업비가 들었다. 길이 1.2㎞, 폭 17.6m의 4차선 교량으로, 하루에 3만 5000대의 교통량을 처리할 수 있다.

교각(橋脚:기둥)은 12개이며, 아치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교각 건설공법은 조수 간만의 차가 심하고 물살이 빨라 이를 견뎌 낼 수 있도록 거대한 우물통공법을 적용하였다. 즉 강재로 제작한 우물통을 해상 크레인을 이용해 바다에 집어넣고, 콘크리트를 타설한 뒤 그 내부를 굴착해 바다 밑 암석에 2m 정도까지 심는 공법을 채택하였는데, 교각 지름은 16m, 높이는 30m, 무게는 5,000~6,000톤이다. 그 밖에 자전거 전용도로와 인도도 함께 건설되었다.

 

이 다리의 개통으로 서울특별시 강서구와 경기도 부천시·김포시 등 수도권 서부지역 주민들이 기존의 강화대교를 이용하는 것보다 차로 30여 분 빨리 강화도에 도착할 수 있게 되었고, 강화도에서 인천까지는 출퇴근이 가능한 1시간대로 교통이 편리해졌다. 이 다리를 건너 우회전해 해안도로를 따라 5분 정도 가면 흥선대원군의 척화비(斥和碑)가 있는 덕진진(德津鎭)이 있고, 그 주위로 마리산 국민관광지, 화도면 철새도래지 등 관광명소가 많다.

 

 

 초지진의 모습

 

 

초지진 [草芝鎭](사적 225호)

 

인천 강화군 길상면(吉祥面) 초지리에 해안선을 지키기 위하여 설치한 진.

 

1971년에 사적 제225호로 지정되었으며, 면적은 4,233m2이다.

 

1656년(효종 7) 강화유수(江華留守) 홍중보(洪重普)가 처음 설치하였다. 66년(현종 7) 병마만호(兵馬萬戶)를 두었다가 1763년(영조 39)에 첨사(僉使)로 승격시켰는데 이 때의 병력은 병마첨절별사(兵馬僉節別使) 1명, 군관 11명, 사병 98명, 돈군(墩軍) 18명, 목자(牧子) 210명, 진선(鎭船) 3척과 무기 다수가 있었다. 1866년(고종 3) 병인양요(丙寅洋擾) 때 이 곳에서 프랑스 함대의 로즈 소장과 싸웠으며, 1871년(고종 8)에는 미국 아시아함대의 로저스 중장이 이 곳에 침입하였을 때 필사의 방어전을 전개하다 함락된 바 있었고, 1875년(고종 12)에는 일본 군함 운요호[雲揚號]와도 이 곳에서 교전하였다.

 

이 초지진은 모두 허물어져 돈(墩)의 터와 성의 기초만 남아 있었던 것을 1973년 초지돈만 복원하였다. 돈에는 3곳의 포좌(砲座)가 있고 총좌(銃座)가 100여 곳 있다. 성은 높이 4m 정도에 장축이 100m쯤 되는 타원형의 돈이다. 돈 안에는 조선 말의 대포 1문이 포각 속에 전시되어 있는데, 포각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집 홍살로 되어 있으며, 대포의 길이는 2.32m, 입지름 40cm이다.

 

 

 덕진진의 모습

 

 

덕진진 [德津鎭](사적 226호)

 

조선시대에 강화해협을 지키던 요새.

 

강화 12진보(鎭堡)의 하나이며, 덕진진은 덕포진과 더불어 해협의 관문을 지키는 강화도 제1의 포대였다. 덕진진은 본디 수영(水營)에 속하여 첨사(僉使)를 두고 있었는데, 1666년(현종 7년)에 강화유수 서필원(徐必遠)이 임금에게 청하여 첨사를 경기 김포시 덕포로 옮기고 이곳에 별장을 두었다. 1677(숙종 3년)에는 유수 허질(許秩)이 임금에게 청하여 만호(萬戶)로 승격시켰다. 1874년(고종 11년)에 축조한 남장 포대는 15문의 포대가 남아 있다.

 

1866년 병인양요 때는 양헌수(梁憲洙)의 부대가 밤의 어둠을 타서 이 진을 거쳐 삼랑성(三郞城:일명 정족산성, 鼎足山城)으로 들어가 프랑스군을 격파하였고, 1871년 신미양요 때는 J.로저스 중장이 이끄는 미국 극동함대와 이곳에서 치열한 포격전을 벌였다. 그러나 초지진(草芝鎭)에 상륙한 미국해병대에 의하여 점령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이때

 

성첩(城堞)과 문루(門樓)가 모두 파괴되고, 문루터만 남게 되었다. 1976년에 문루를 다시 세우고 돈대(墩臺)를 보수하였으며 남장 포대도 개축하였다.

 

 

보수공사 중인 광성보(안해루)의 모습

 

 

 손돌목 안내문

 

 

 광성보의 모습

 

 

광성보 [廣城堡](사적 227호)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佛恩面) 광성나루(광성진)에 있던 성보(城堡).

 

사적 제 227호. 강화해협을 지키는 중요한 요새로, 강화 12진보(鎭堡)의 하나이다. 고려가 몽골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강화도로 천도 한 후에 돌과 흙을 섞어 해협을 따라 길게 쌓은 성이다.

조선시대 광해군 때 헐어진 데를 다시 고쳐 쌓았으며, 1658년(효종 9)에 강화유수 서원이 광성보를 설치하였다. 그 후 숙종 때(1679)에 이르러 완전한 석성(石城)으로 축조하였다.

 

1871년 신미양요 때 가장 치열했던 격전지이다. 그 해 통상을 요구하며 강화해협을 거슬러 올라오는 미국 극동함대를 초지진·덕진진·덕포진 등의 포대에서 일제사격을 가하여 물리쳤다. 그러나 4월 23일 미국 해병대가 초지진에 상륙하고, 24일에는 덕진진을 점령한 뒤, 여세를 몰아 광성보로 쳐들어왔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열세한 무기로 분전하다가 포로 되기를 거부, 몇 명의 중상자를 제외하고 전원이 순국하였다.

 

이 때 파괴된 문루와 돈대(墩臺)를 1976년에 복원하였으며, 당시 전사한 무명용사들의 무덤과 어재연(魚在淵) 장군의 전적비 등을 보수·정비하였다.

 

 

 광성보

 

 

광성보에서 바라본 염하와 바다 건너의 김포 쪽 모습 

 

 

강화역사관을 지나 48번국도 굴다리를 통과하여 반대쪽 차선으로 들어설때면 주위가 완전히 껌껌해졌다. 이내 인삼센타주차장에 도착함으로써 길고 긴 10시간 23분(총 86.318km)의 자전거여행을 무사히 마쳤다.

 

함께 한 자전거를 다시 차량내부와 트렁크에 싣고 아쉽고 섭섭한 강화대교를 건너간다. 김포에서 생선구이로 저녁을 먹고 귀가했다.

 

 

 

5.특기사항

 

날짜

구간

거리(km)

시간

특기사항

경비

1

2010.03.27

서울중계동→동부간선도로→한강→48번국도→강화대교

77.714

09:06

집에서 출발하여 강화대교까지

81,200

2

2010.04.03

강화대교→연미정→외포리→분오리돈대→강화대교(강화도 해안도로 일주)

86.318

10:23

연미정 이후 북단은 민통선지역이라 자전거여행금지구역임

79,400

합계

164.032

19:29

\160,600

 

 

자전거 전국해안가 일주여행 두 번째 일정 소화

②연미정 이후 도로는 민통선지역이라 출입을 하지 못해 강화시내로 진입하여 48번국도을 따라 진행하다 이강리삼거리에서 48번국도와 작별함. 강화도 북부해안을 종주못해 결과적으로 강화도종주를 완주했음.

③날씨가 꽤 쌀쌀함.

④강화역사관~구강화대교~신강화대교~인삼센타 간 도로가 연결되지 못해 아쉬웠음.

 

⑤오두돈대(鼇頭墩臺)

소재지: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온면 오두리 산1

 

외적의 침입이나 척후활동을 사전에 관찰하고 대비할 목적으로 접경지역 또는 해안지역에 흙이나 돌로 쌓은 소규모의 방어 시설물을 돈대라고 한다. 강화지역에는 숙종 5년(1679) 강화 전해안을 하나의 방위체제하에 운영하고자 돈대를 설치, 운영하게 되었다.

오두돈대는 지형 이름에서 나타나듯이 자라의 머리와 같은 지형에 설치되어 있으며, 평면형태는 원형으로 지름이 32m에 달한다.

돈대 동남쪽으로는 오두정지(鼇頭亭址)와 강화전성이 위치한다.

 

⑥화도돈대(花島墩臺) 문화재자료 제17호(강화군)

지정(등록)일: 1999.03.29

소 재 지: 인천 강화군 선원면 연리 54

시 대: 조선시대

소유자(소유단체): 강화군

관리자(관리단체): 강화군

상 세 문 의: 인천광역시 강화군 문화관광과 032-930-3626

 

일반설명(전문설명)

돈대란 적의 움직임을 살피거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하여 영토 내 접경지역 또는 해안지역의 감시가 쉬운 곳에 마련해 두는 초소이다. 대개 높은 평지에 쌓아두는데, 밖은 성곽으로 높게하고 안은 낮게하여 포를 설치해둔다.

이 돈대는 강화유수를 지내던 윤이제가 해안지역의 방어를 튼튼히 하고자 조선 숙종 5년(1679)에 쌓아놓은 것이다.

 

⑦세계 5대 갯벌

전 세계적으로 갯벌은 다양한 형태로 분포하고 있습니다.

갯벌은 조석의 차이가 크고 지형이 완만하며 갯벌을 만드는 퇴적물이 충분히 육지로부터 공급되는 내만이나 강 하구에 잘 발달됩니다.

전 세계적으로 유럽의 북해 갯벌, 아마존강 하구 갯벌, 미국 동부 해안 갯벌, 캐나다 동부 해안 갯벌 그리고 우리나라 갯벌 등이 대표적인 갯벌입니다.

 

 

세계 5대 갯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