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에서 계속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연미정을 다시 지나고 조금 더 진행하면 삼거리가 나온다. 강화읍, 옥림리 방향의 우측으로 진행을 한다. 다행스럽게 아직까지는 자전거전용도로가 설치되어 있어서 편안하게 진행을 한다.
얼마간 진행을 하니 강화산성 동문이 나온다.
2004년 복원된 강화산성 동문은 남쪽의 현판에는 망한루(望漢樓), 북쪽방향에는 강도동문(江都東門)이라고 쓰여져 있다.
울타리가 없어 사람들이 자유롭게 성루 밑을 지나갈 수 있다.
강도동문(江都東門)이라고 현판이 걸린 동문의 모습
성곽 안을 자유롭게 왕래할 수가 있다.
또한 동문은 망한루(望漢樓)라고도 쓰여있다.
강화산성 [江華山城]
종목: 사적 제132호 지정(등록)일: 1964년 6월 10일 소유자: 국유, 공유, 사유 관리자: 강화군 소재지: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국화리 산 3번지 일원 시대: 고려시대 크기: 면적 784,170㎢ 명칭: 성곽
강화읍을 에워싸고 있는 고려시대의 산성이다.
몽골의 침입으로 백성과 국토가 수난을 당하자, 당시 실권자인 최우는 1232년 강화도로 수도를 옮겼다. 왕궁과 성·관아 시설은 1234년 본격적인 공사가 시작되었다. 이 때 개경의 궁궐과 비슷하게 지어 산의 이름도 송악이라 지었다.
성은 흙으로 쌓았고, 내성·중성·외성으로 이루어져 있고, 내성은 주위 약 1,200m로 지금의 강화성이다. 중성은 내성을 지키기 위해 쌓았으며, 외성은 1233년 강화 동쪽해안을 따라 쌓았다. 이 외성은 몽골군이 바다를 건너 공격하지 못하게 한 가장 중요한 방어시설이자, 정부가 39년간 육지로부터 물자를 지원받았던 곳이기도 하다.
고려 원종 11년(1270) 개경으로 수도를 다시 옮기면서 몽골과 강화조약의 조건으로 성을 모두 헐게 되었다. 조선 전기에 내성이었던 강화성을 축소하여 다시 지었다. 1637년 병자호란 때 청군에 의해 다시 파괴당하였고, 숙종 3년(1677)에 성을 보수하면서 모두 돌로 쌓고 넓혀지었다.
남문인 안파루, 북문인 진송루, 서문인 첨화루와 동문인 망한루가 남아있으며, 비밀통로인 암문 4개 그리고 수문이 2개 남아있다. 높은 곳에서 망을 보기 위한 장대와 성위에서 몸을 감추기 위한 여장 등의 방어시설도 갖추고 있었으나 여장은 모두 무너졌다. 현재 성의 동쪽 부분은 없어졌으나, 남북쪽 산자락은 잘 보존되어 있다.
조선 후기 병인양요·신미양요와 일본 침략에 의한 강화조약을 체결한 수많은 외세침략의 역사적인 현장이다. |
[강화산성 보충설명]
강화는 삼국시대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군사 요충지로서 주목받았다. 섬 전체가 하나의 요새다. 김포에서 강화대교를 건너 왼쪽 강화역사관과 맞붙은 갑곶진에서 용진진을 지나 오두돈대·강화외성 등 100km 해안선을 따라 구축된 5개의 진과 7개의 보, 그리고 53개의 돈대, 12곳의 성곽 등 관광유적이 널려있다.
그 중심에 강화산성이 자리 잡고 있다. 이 산성은 몽고의 침입으로 고려가 서울을 개경에서 강화로 천도(1232년 6월)하면서 축성한 내성·중성·외성 중 내성에 해당된다.
초기 내성은 1.2km의 토석잡축성으로 쌓았다. 내성 안에는 궁궐과 관청을 건립하고 그 규모나 배치도 개경을 옮긴 듯 했다. 즉 강화 북산을 개성의 송악으로 바꾸고 신궁을 지어 ‘연경궁’으로 불렀다.
내성을 지키기 위해 옥림리 성문고개에서 연화동 남산을 돌아 창성까지 9km 중성을 축성하고 선인문, 태안문 등 8개의 성문을 내고 이름도 개경 것을 그대로 사용했다. 그러나 성문은 지금 모두 멸실됐다. 현재 중성의 위치는 선원면 토성터로 추정하고 있다.
외성은 중성을 수비할 목적으로 강화의 동쪽 해안을 따라 대규모로 쌓았다. 총 길이가 1만 1232m였다. 중성과 외성은 모두 토성으로 쌓았다.
하지만 강화산성(내성 중성 외성)은 고종 46년(1259) 몽고가 고려와 화친의 조건으로 모두 헐어야 된다는 단서를 내걸었다.
몽고의 독촉으로 성곽을 허물던 병사들은 괴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울며 말하기를 “이럴 줄 알았으면 당초에 성을 쌓지 않았던 것만 못하리라” 했다. 성이 무너지는 소리가 큰 우레 같아서 아이들과 여자들 모두 슬피 울었다. “몽고군은 모든 성을 무너뜨리고 난후 곡식과 민가를 불태워 그 흔적이 성안에 헤아릴 수 없었다”고 고려사는 적고 있다.
그 후 부서지고 무너진 강화산성의 내성은 조선시대 숙종 3년(1677) 현재의 강화읍 소재지를 감싸며 남산정상을 휘감아 북산 산등성이를 타고 넘는 높이 3~5m의 총길이 7.2km를 이었다. 동서남북에 4대문과 4개소의 암문 및 남장대와 북장대, 서장대를 세우고 2개소의 수문도 설치했다.
세월이 흘러 성벽위의 여장(총을 쏠 수 있는 시설물)과 4대문의 문루. 성벽들이 멸실됐다.
폭우로 무너진 남문(안파루)은 1974년에 복원하고 강화남문 편액은 김종필 씨가 썼다.
서문은 1977년 다시 보수하였으며 첨화루 현판은 당시 그대로다. 북문은 원래 홍예석축만 있었으나 정조 7년(1783) 진송루라는 문루를 세웠다. 그 문루도 멸실된 것을 1977년 복원했다. 동문(망한루)는 2004년 복원했다.
강화산성 옛 정취는 서문과 남문사이의 작은 암문과 첨화루라는 서문, 그리고 성벽은 남산과 북산에 드문드문 허물어졌지만 원형으로 남아있다. 나머지 성벽은 도시개발로 무도 멸실됐고 남문 인근에만 복원돼 있다.
남산정상에 있는 남장대는 건물기단 석축 일부가 남아 있다. 북산 정상에 있는 북장대는 조망권이 압도적이다. 서장대는 서문 안쪽에 터만 남았다. 그 아래 비문인 연무당은 1876년 일본의 강압으로 부산과 인천. 원산까지 개항을 하게 된 강화도 조약이 체결된 곳이다.
근세에 강화산성은 많은 건물들이 소실됐다. 1866년 10월 16일 프랑스군의 침공으로 성곽과 행궁 등 성안의 건물들이 파괴되고 불탔다. 이때 규장외각에 소장됐던 고문서와 전적이 약탈당했다.
강화군에는 고려 무신정권을 탄생시킨 최충헌을 제거하려다 실패한 뒤 강화도에 유배됐던 비운의 왕 ‘희종’의 석릉. 고려 후기 강종의 부인이었던 원덕태후 유 씨의 무덤인 곤릉 등 고려문화의 향기가 가득하다.
삼국시대의 쟁탈전, 고려왕조가 몽고에 밀려 39년간 피신했던 곳. 조선인조 때의 정묘호란, 개화기에는 프랑스와 미국의 함대가 넘나들며 위협했고, 현재까지도 수도방위의 중요한 요충지로서 격변기 때마다 강화도는 나라를 수호했던 투쟁의 역사가 배어있는 곳이다.
이곳 수협사거리부터 48번국도를 따라 이강삼거리까지 진행한다.
동문을 지나니 도로가 복잡하다. 2차로의 도로 갓길을 조심스럽게 진행한다. 계속 직진하니 수협사거리에 닿음으로써 48번국도에 합류한다. 1구간도 48번 국도를 원 없이 진행했었는데 이번 역시 이곳 수협사거리에서 이강삼거리까지 48번국도를 진행해야한다.
강화산성 서문의 모습
서문 맞은편에 있는 연무당옛터 표지석 모습
연무당옛터 옆에 있는 석수문의 모습
복잡한 시내를 조심스럽게 진행한다.
다시 강화산성의 서문에 도착한다. 맞은편에는「연무당옛터」라고 크게 쓴 표지석이 눈에 띈다. 자전거를 잠시 세우고 2차로도로를 건너 연무당옛터 표지석을 확인하고 조금 더 가보니 이번에는 강화석수문 안내판이 눈에 띈다.
강화석수문(江華石水門)
유형문화재 제30호
인천 강화군 강화읍 국화리 883
이 수문은 강화산성의 내성에 연결되어 강화읍을 통하여 흐르는 동락천을 가로지르는 수문으로서 조선 숙종 37년(1711)에 축조되었다. 3개의 무지개 모양을 한 홍예문으로 재질은 화강암이며, 길이가 18.2m에 높이가 2.7m, 폭이 4.7m이며 홍예의 높이는 1.7m, 폭은 3m이다. 1910년 갑곶리 동락천 입구의 다리로 사용되었다가, 1972년 하수문 자리로 옮겨졌던 것을 1992년 원 위치에 옮겨 복원하였다.
서문의 모습. 서문은 현판에 첨화루라고 쓰여있다.
강화석수문을 구경하고는 다시 차로를 건너 서문(첨화루)을 구경한다.
맞은편 벤치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는 다시 페달을 힘차게 밟는다.
그러나 이내 안장에서 내려온다. 고개여서 자전거를 끌고 올라간다. 이어지는 내리막을 신나게 내려간다.
송해면을 지나고 하점면에 접어들고 이내 강화지석묘 입구에 도착한다.
세계문화유산이기도 한 강화고인돌(江華支石墓) 역시 그전에 답사한 적이 있어서 화장실만 답사(?)하고는 출발한다.
세계문화유산 강화 고인돌의 도로표지판 모습
강화고인돌(江華支石墓)
강화군 하점면 부근리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고인돌유적은 탁자식고인돌로 덮개돌의 길이가 약 6.4m, 폭 5.2m이며, 그 밑에는 2개의 굄돌과 2개의 막음돌이 받치고 있었으나 2개의 막음돌은 시간이 경과하면서 없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2000년 12월 유네스코에 등록된 만큼 매우 학술적 가치가 높다. 강화고인돌을 비롯하여 강화도에는 약 150여기의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다.
고인돌의 형식분류
탁자식: 탁자식은 판석 4개로 지상에 무덤방을 꾸미고 덮개돌을 덮는 형식으로 책상처럼 생겨 탁자식이라고도 한다. 주로 한강이북부터 중국 요령지방까지 분포하며 사적 제137호인 강화 부근리 고인돌은 탁자식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다.
바둑판식: 바둑판식은 주로 판석이나 할석, 냇돌등을 사용하여 지하에 무덤방을 만들고 덮개돌과 돌방사이에 3~4개 또는 그 이상의 받침돌이 있는 것으로 바둑판처럼 생겼다하여 바둑판식이라고도 한다. 주로 전라도, 경상도 등 한강 이남에 분포되어 있다.
개석식: 개석식은 지하돌방과 덮개돌 사이에 받침돌이 없이 덮개돌이 직접 무덤방을 덮고 있는 형식으로 무지석식 또는 놓인형 고인돌이라고도 불리운다. 개석식 고인돌은 한강 이북에서도 발견되고 있으며 우리나라 전체지역에 분포해 있다.
세계유산이란
유산이란 우리가 선조로부터 물려받아 오늘날 그 속에 살고 있으며, 앞으로 우리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자산이다. 자연유산과 문화유산 모두 다른 어느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우리들의 삶과 영감의 원천이다.
유산의 형태는 독특하면서도 다양하다. 아프리카 탄자니아의 세렝게티 평원에서부터 이집트의 피라미드, 호주의 산호초와 남미대륙의 바로크 성당에 이르기까지 모두 인류의 유산이다. ‘세계유산’이라는 특별한 개념이 나타난 것은 이 유산들이 특정 소재지와 상관없이 모든 인류에게 속하는 보편적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유네스코는 이러한 인류 보편적 가치를 지닌 자연유산 및 문화유산들을 발굴 및 보호, 보존하고자 1972년 세계 문화 및 자연 유산 보호 협약(Convention concerning the Protection of the World Cultural and Natural whc; 약칭 ‘세계유산협약’)을 채택하였다.
세계유산의 정의
세계유산이란 세계유산협약이 규정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지닌 유산으로서 그 특성에 따라 자연유산, 문화유산, 복합유산으로 분류한다.
문화유산
-기념물 : 기념물, 건축물, 기념 조각 및 회화, 고고 유물 및 구조물, 금석문, 혈거 유적지 및 혼합유적지 가운데 역사, 예술, 학문적으로 탁월한 보편적 가치가 있는 유산
-건조물군: 독립되었거나 또는 이어져있는 구조물들로서 역사상, 미술상 탁월한 보편적 가치가 있는 유산
-유적지: 인공의 소산 또는 인공과 자연의 결합의 소산 및 고고 유적을 포함한 구역에서 역사상, 관상상, 민족학상 또는 인류학상 탁월한 보편적 가치가 있는 유산
자연유산
-무기적 또는 생물학적 생성물들로부터 이룩된 자연의 기념물로서 관상상 또는 과학상 탁월한 보편적 가치가 있는 것.
-지질학적 및 지문학(地文學)적 생성물과 이와 함께 위협에 처해 있는 동물 및 생물의 종의 생식지 및 자생지로서 특히 일정구역에서 과학상, 보존상, 미관상 탁월한 보편적 가치가 있는 것
-과학, 보존, 자연미의 시각에서 볼 때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주는 정확히 드러난 자연지역이나 자연유적지
복합유산
문화유산과 자연유산의 특징을 동시에 충족하는 유산
세계유산: 890점(2009.11월 현재)
-문화유산: 689점(전체유산의 77%)
-자연유산: 176점(전체유산의 20%)
-복합유산: 25점(전체유산의 3%)
-위험에 처한 세계유산목록에 등재된 유산은 31점(2009년 11월 현재)이며, 이 가운데 문화유산이 16점, 자연유산이 15점이다.
※한국의 세계유산(문화유산 8개, 자연유산 1개. 총9점)
1.해인사장경판전(1995년 12월 등록)
2.종묘(1995년 12월 등록)
3.석굴암, 불국사(1995년 12월 등록)
4.창덕궁(1997년 12월 등록)
5.수원 화성(1997년 12월 등록)
6.고창 화순 강화 고인돌유적
7.경주 역사지구
8.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자연유산으로 등재. 2007년 6월 27일 등재): 한라산, 성산일출봉, 거문오름용암동굴계(이상 3개)
9.조선왕릉(2009년 6월 30일 등재)
[고창 화순 강화 고인돌유적 설명]
고인돌은 선사시대 돌무덤의 일종으로 영어로는 돌멘(Dolmen)이라고 한다. 고인돌은 거석기념물의 하나이며 피라미드(Pyramid), 오벨리스크(Obelisk)등 이집트나 아프리카 대륙의 각종 석조물과 영국의 스톤헨지, 프랑스 카르낙의 열석(列石)등이 모두 거석문화의 산물이다.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 중의 하나인 고인돌은 세계적인 분포를 보이고 있으며 지역에 따라 시기와 형태가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동북아시아 지역이 세계적인 분포권에서 가장 밀집된 곳으로 그 중 우리나라가 그 중심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는 전국적으로 약 30,000여 기에가까운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중 이번에 세계유산으로 등록된 고창·화순·강화 고인돌 유적(Gochang, Hwasun, and Ganghwa Dolmen Sites)은 밀집분포도, 형식의 다양성으로 고인돌의 형성과 발전과정을 규명하는 중요한 유적이며 유럽, 중국, 일본과도 비교할 수 없는 독특한 특색을 가지고 있다. 또한 고인돌은 선사시대 문화상을 파악할 수 있고 나아가 사회구조, 정치체계는 물론 당시인들의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선사시대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되는 보존가치가 높은 유적이다.
고창 고인돌 유적은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죽림리, 도산리, 아산면 상갑리 일대의 유적으로 죽림리 매산마을을 중심으로 동서로 약 1,764m 범위에 447기가 분포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고인돌 군집을 이루고 있는 지역이다. 10톤 미만에서 300톤에 이르는 다양한 크기의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으며 탁자식, 바둑판식, 지상석곽형 등 다양한 형식의 고인돌이 공존하고 있다.
화순 고인돌 유적은 전라남도 화순군 도곡면 효산리와 춘양면 대신리 일대의 계곡을 따라 약 10㎞에 걸쳐 500여기의 고인돌이 군집을 이루어 집중분포하고 있으며 최근에 발견되어 보존상태가 좋다. 또한 고인돌의 축조과정을 보여주는 채석장이 발견되어 당시의 석재를 다루는 기술, 축조와 운반방법 등을 확인할 수 있는 유적으로 평가된다.
강화 고인돌 유적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부근리, 삼거리, 오상리 등의 지역에 고려산 기슭을 따라 150여 기의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다. 이곳에는 길이 6.4m, 높이 2.5m의 우리나라 최대의 탁자식 고인돌이 있으며 우리나라 고인돌의 평균고도보다 높은 해발 100m-200m까지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다.
1.고창고인돌유적
고창지석묘군(사적 제391호)
2.화순고인돌유적
화순 효산리 및 대신리 지석묘군(사적 제410호)
3.강화고인돌유적
강화지석묘(사적 제137호)
강화내가오상리고인돌(인천광역시기념물 제16호)
강화오상리고인돌군(인천광역시 기념물 제47호)
강화대산리고인돌(인천광역시 기념물 제31호)
강화부근리점골고인돌(인천광역시 기념물 제32호)
강화부근리고인돌군(인천광역시 기념물 제44호)
강화삼거리고인돌군(인천광역시 기념물 제45호)
강화고천리고인돌군(인천광역시 기념물 제46호)
강화교산리고인돌군(인천광역시 기념물 제48호)
세계유산적 가치
고창, 화순, 강화의 선사유적들은 거대한 석조로 만들어진 2,000∼3,000년 전의 무덤과 장례의식 기념물로서 선사시대 문화가 가장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으며 당시의 기술과 사회현상을 가장 생생하게 보여주는 유적이다.
등록기준 :세계문화유산기준 (Ⅲ)
(Ⅲ) 독특하거나 지극히 희귀하거나 혹은 아주 오래된 유산
시원하게 해결(?)하고는 고창, 화순의 고인돌유적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강화고인돌유적지를 출발한다.
조금 더 진행한 후 삼거리에 이르니 석조여래입상(보물615호), 5층석탑(보물10호)의 표지판이 나타난다. 이곳도 예전에 강화지맥 종주할 때 다 답사한 적이 있어서 통과한다.
보물10호 5층석탑의 모습
보물10호 5층석탑의 모습
강화 하점면 오층석탑(江華 河岾面 五層石塔)
보물 제10호
소재지: 인천광역시 강화군 하점면 장정리 산193
봉은사지(奉恩寺址) 5층석탑으로도 불린다.
봉은사는 개성에 있던 고려시대의 국가사찰로 고종 19년(1232)에 수도를 강화도로 옮길 때 함께 옮겨졌다. 발견당시 주변에 흩어져 있던 석재를 1960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다시 세웠다. 3층 이상의 몸돌과 5층의 지붕돌, 상륜부가 유실되었으며 현재 남아 있는 부분의 높이는 3.5m이다. 만든 수법으로 보아 고려후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석조여래입상이 있는 누각 모습
석조여래입상의 모습
보물615호 석조여래입상의 모습
하점면 석조여래입상(河岾面 石造如來立像)
보물 제615호
소재지: 인천광역시 강화군 하점면 장정리 산122
강화 하점면 오층석탑과 함께 고려시대 사찰인 봉은사지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높이 2.8m의 마애불이다. 머리 위에 큼직한 유계가 솟아있고 얼굴은 둥근편으로 입가부터 양쪽 볼과 눈매에 이르기까지 미소를 가득 머금고 있다.
목에는 삼도가 표현되어 있고, 통견 법의가 원호를 그리면서 몸 전면을 감싸고 있다. 광배는 두광과 신광으로 구분되며 두광에는 화염문 등이 장식되어 있으며 전체적으로 입상의 하반부는 층단식처리, 광배, 화염문 등의 표현수법으로 제작시기를 11세기경으로 추정한다.
하점면사무소 입구에 있는 봉천산등산로 표지석과 봉천산 등산안내도의 모습
하점면사무소와 그 뒤의 봉천산 모습
삼거리를 지나 얼마간 페달을 힘차게 밟으니 「봉천산등산지도」가 눈에 띈다. 그래서 급하게 자전거 핸들을 꺽어 좌측으로 들어간다. 알고 보니 이곳이 하점면사무소이다.
봉천산은 개인적으로 3번씩이나 답사한 산이다.
이곳 이강삼거리까지 48번국도를 달려왔다.
하점면사무소에서 나와 다시 48번국도를 힘차게 달린다. 신봉삼거리를 지나니 드디어 48번국도와 작별을 하는 이강삼거리에 닿는다.
심은미술관 1층의 쉼터 모습(매우 다양한 도자기 작품이 있다)
이강삼거리에서 48번국도와 작별을 한 후 좌회전하여 17번도로로 진행한다. 얼마간 진행을 하니 심은미술관이 나온다. 심은미술관은 한 번도 답사한 적이 없어서 심은미술관으로 들어간다.
개인미술관인데 입장료 3,000원을 받는다.
심은미술관 2실 입구 모습
심은미술관 [沁隱美術館]
2000년 2월 학생 감소로 폐교된 강후초등학교 자리에 이 학교 1회 졸업생인 전정우(全正雨)가 강화교육청으로부터 모교를 대부받아 2000년 9월 개관한 미술관이다.
전정우는 1987년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대상을 받은 서예가이며, 심은(沁隱)은 그의 아호(雅號)이다. 지상 2층의 옛 학교 건물에 마련된 미술관은 전시공간 661㎡, 교육공간 165㎡로 이루어져 있다. 1층에는 1전시실과 특별전시실, 로비와 복도공간이 있다. 특별전시실은 쉼터인 다향만당(茶香滿堂)을 겸한다. 2층에는 2전시실과 3전시실이 있다. 각 실마다 중진 및 원로 미술가들의 작품 150여 점이 상설 전시되고 있다. 야유회나 수련회 장소로도 이용할 수 있도록 취사 및 샤워 시설, 운동장과 테니스장도 갖추고 있다.
심은미술관의 작품 모습(천자문이 각각 다른필체로 쓴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심은미술관 입구 모습
심은미술관 쉼터 모습
심은미술관 전경
심은미술관 입구 모습
심은 전정우선생의 천자문이 현재 66체까지 발명했는데 100체까지 발표할 예정이라고 한다. 2층의 2,3전시실에는 각각 다른 서체로 써진 천자문이 전시되어 있다.
2,3층의 전시실을 구경한 후 다시 1층으로 내려와 쉼터로 들어가면 심은 전정우선생님의 부인의 작품들로 도자기들이 가득하다.
실내에는 차향의 냄새가 은근하게 풍겨 잠시나마 쉬고 가고 싶은 생각이 든다. 대추차(5,000원)을 주문하니 바나나와 우리쌀과자가 보너스로 나온다. 커피잔보다는 큰 도자기잔으로 대추차를 맛있게 먹고는 다음 일정을 위해 심은미술관을 빠져나온다.
(3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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