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 전국해안선 일주여행(2)]
『역사의 고장, 강화도 해안일주!』
제2일 구간: 강화대교(강화인삼센타주차장)→연미정→수협사거리→이강삼거리→심은미술관→외포리→분오리돈대→오두돈대→강화대교(강화인삼센터주차장)[원점회귀]
1.여행날짜: 2010년 4월 3일(토)
2.여행날씨: 맑음
3.여행시간
-06:40 집 발
-08:00 강화터미널 인근 강서식당에서 아침식사
-09:07 강화인삼센터 주차장 발(자전거여행 2일차 시작)
-09:37 연미정 민통선 검문소
-09:57 강화산성 동문
-10:10 강화산성 서문 착 / -10:18 발
-10:58 이강삼거리
-11:08 심은미술관 착 / -11:55 발
-12:10 망월3리 표지석이 있는 삼거리(망월3리 방향으로 우회전)
-12:25 내가3교(시멘트포장도로)
-12:50 계룡돈대 착 / -13:00 발
-13:30 외포리 착(점심식사) / -14:15 발
-14:37 쉼터
-15:00 내리삼거리
-15:04 삼거리
-15:58~16:06 미루교회 앞에서 휴식
-16:30 분오리돈대 착 / -16:46 발
-17:22 후애돈대
-17:24 가천의대 입구(자전거도로 시작)
-17:37~17:45 너멍골입구에서 휴식
-주차장에서 10분 휴식
-18:10 초지대교입구 삼거리(횡단보도 이용)
-18:21 삼거리(우측으로 진행)
-18:40~18:50 쉼터에서 휴식
-18:58 화도돈대
-19:30 강화인삼센터 주차장 착(자전거여행 2일차 종료: 10시간 23분)
[이동거리]
-강화인삼센터주차장-(4.59km)-연미정-(3.71km)-수협사거리-(9.86km)-이강삼거리-(1.24km)-심은미술관-(1.2km)-이강삼거리-(1.66km)-망월리입구사거리-(3.24km)-내가3교-(5.05km)-황청리선착장-(3.281km)-외포리선착장-(0.167km)-자전거도로입구-(8.63km)-삼거리[자전거도로종점]-(8.65km)-미루교회-(6.12km)-분오리돈대-(5.03km)-길화교삼거리-(6.8km)-섬안교삼거리-(2.85km)-초지대교입구삼거리-(14.24km)-강화인삼센타주차장
※총 86.318km. 10시간 23분 자전거여행 함.
강화도 해안일주 지도(빨간색이 종주한 코스이다)
세부지도 1
세부지도 2
세부지도 3
세부지도 4
세부지도 5
세부지도 6
4.여행후기
자전거로 가는 전국해안선일주여행이 오늘로 벌써 2일차이다. 오늘은 강화도 일주이다.
그런데 걱정이다.
「과연 해낼 수 있을까?」하는 의구심이 든다.
첫 날,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자신이 없다. 강화도를 완전 종주하면 좋겠는데 안 되면 다음에 다시 오지 하는 생각으로 제2일차 자전거여행을 시작한다.
오늘은 조금 일찍 집에서 나와 강화도터미널 근처 강서식당에서 소머리국밥으로 아침식사를 하고 들머리인 강화인삼센타 주차장에 도착하여 자전거를 차에서 꺼내 본격적으로 답사에 들어간다(09:07).
강화대교 옆에 있는 강화인삼센터 주차장에서 제2일차 구간을 시작했다.
강화도에 대하여
강화도는 남북 28km, 동서 16km, 면적 302.14㎢로서 제주도, 거제도, 진도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4번째로 큰 섬이다. 강화도는 원래 두 개의 섬, 즉 원래의 강화도(江華島)와 마니산을 중심으로 한 고가도(古加島)로 나누어져 있었으나, 고려시대부터의 간척사업으로 하나의 섬이 되었다.
강화는 한강, 임진강, 예성강 등 3개의 강이 합류하는 지점의 바다 입구에 위치하고 있다. 지형은 마니산과 정족산의 큰 산이 잇지만 대부분은 평야지대로 일찍이 농업이 발달하였다. 강화도는 섬 자체가 우리나라 역사의 축소판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선사시대의 고인돌 유적부터 단군왕검의 얼이 담긴 마니산, 고려 때의 대몽항쟁과 팔만대장경 조성, 서양세력과 처음으로 전투를 벌였던 병인양요에 이르기까지 강화도의 역사는 곧 우리 한민족의 역사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지금도 강화도는 역사와 문화의 섬으로 그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강화군은 멀리 국조 단군성조의 개국과 그 역사를 함께하며 도서 특유의 지정학적 숙명으로 고금을 통해 왕실의 흥망성쇄가 곧 강화군의 역사를 이룬 것이라고 하겠다.
강화의 옛 이름은 갑비고차(甲比古次)라고 불리었고, 고구려시대에 이르러 군제를 두어 혈구군이라 칭했으며 그후 국력이 강성하자 신라때에 이르러 해구군으로 개칭하고 태수를 주재시켰다. 고려조에 이르러 태조 22년에 현으로 개편되고 이어 현재 지명인 강화현으로 불리었다.
강화는 국가에 커다란 변란이 있을 때 마다 제2의 서울로서 임무가 주어졌으며, 외적이 침입할 때 마다 조정에서는 강화로 천도함으로서 강화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강화는 근 40년간이나 사실상의 고려조의 왕도 역할을 하게 되었고 그후에도 수차례 천도가 있었던바 처음으로 강화에 천도한 것은 고려 23대 고종이었다. 그해 대륙에서 득세한 신흥세력인 몽고군이 송경(지금의 개성)에 침범하자 당시의 권신 최우의 권유로 8월에 천도하였고, 그 다음대의 원종도 강화에 머물러 39년간 강화는 사실상 고려의 수도이었다.
1995년 3월 1일 강화군은 인천광역시에 통합되었다. 개국의 성지인 강화군은 국조단군의 홍익인간이념과 외침에 맞서 끝까지 항쟁하였던 호국의 고장으로 지역 곳곳마다 산재되어 잇는 문화유적의 발굴보전과 산과 바다 등 자연경관을 최대한 활용한 역사문화 관광도시로 개발하여 21세기를 선도할 수도권 제일의 관광지 조성을 위하여 나날이 변모해가고 있다. |
<강화팔경>
1. 전등사: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635 2. 보문사: 인천광역시 강화군 삼산면 매음리 629 3. 연미정: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월곶리 242 4. 갑곶돈대: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갑곶리 1020번지 일대 5. 마니산: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 일원 6. 광성보: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833 7. 초지진: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초지리 624 8. 적석사: 인천광역시 강화군 내가면 고천리 210-3 |
갑곶순교성지 표지석
강화인삼센타 주차장에서 앞전에 건넜던 강화대교(사실은 신강화대교이다) 밑에 도착한다. 좌측으로 꺽어 진행해야하는데 강화대교 밑으로 「갑곶순교성지」표지석이 보여 잠시 그쪽으로 가본다.
갑곶순교성지 [甲串殉敎聖地]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갑곶리에 있는 천주교도의 순교성지이다. 미국이 1866년의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빌미삼아 1871년 군함을 앞세우고 강화도 해역을 침범한 신미양요(辛未洋擾)가 일어난 후 대원군은 더욱 심하게 천주교를 박해하게 된다. 미국 군함이 물러간 후 고종은 철저하게 천주교인을 잡아 처벌하라는 교서를 내리게 되는데 이때 미국 함대에 왕래했던 박상손(朴常孫), 우윤집(禹允集), 최순복(崔順福) 등이 제일 먼저 잡혀 갑곶진두(갑곶나루터)에서 목이 잘려 효수되었다.
천주교 인천교구는 문헌상에 나와 있던 갑곶진두의 정확한 위치를 찾아 그 터를 매입한 후 2000년에 순교성지로 조성하였고, 2001년 9월에는 순교자들의 행적을 증언한 박순집의 묘를 이장하였다. 박순집은 참수 희생자는 아니지만 목숨을 걸고 순교자들의 시신을 안장하고, 순교자의 행적을 증언하였으며 성직자들을 보호한 인물이다. 갑곶순교성지는 순교자묘역과 박순집의 묘, 예배당, 야외제대, 십자가의 길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
통제영학당지 안내판과 통제영학당 옛터 표지석의 모습
갑곶순교성지 표지석 우측으로는 차량진입을 못하게 파이프로 막아놔서 차량은 출입할 수 없다. 자전거는 통과할 수가 있어 통과한 후 우측 공터 끝 쪽에 「통제영학당지」표지석과 「통제영학당 옛터」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좌측으로는 의자시설이 되어 있어서 잠시 쉬어갈만한 장소라고 생각을 해본다.
통제영학당지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49호
소재지: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갑곶리 1045-1
통제영학당은 조선 고종 때인 1893년에 설치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해군사관학교로 현재 터만 남아있다. 개항과 더불어 해양방어의 일환으로 군함의 건조와 구입을 추진하였으나 인재부족, 재정궁핍, 청나라와 일본의 방해 등으로 효과를 거두지 못하자 그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고자 이곳에 건물을 신축하였다. 그러나 동학농민전쟁과 청일전쟁 등으로 인해 교육이 순조롭지 못하다가 1896년 5월 영국군 교관들이 귀국하자 폐교되었다.
통제영학당 옛터
<개화>와<쇄국>의 혼란스런 시대 상황을 겪으며 오로지 조국의 바다를 지킬 구국의 인재를 양성하고자 최초의 근대식 해군사관학교인 <통제영학당>이 이터에 뿌리내렸다.
바야흐로 빛나는 대한민국해군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자긍심을 고취하고자 여기 표지석을 세운다.
2009년 4월 13일
대한민국 해군참모총장
통제영학당 안내판 옆에 설치된 쉼터 모습
신강화대교 아래 모습(도로가 끊겼다)
보려고 했던 갑곶순교성지는 못보고 대신 통제영학당지라는 것을 알고는 이내 다시 빠져나온다.
「그런데 왜 이곳에다 갑곶순교성지 표지석을 세워놨을까?」
갑곶순교성지 좌측으로는 2차로 도로가 끝나는 지점이다. 남쪽의 강화교(구강화대교)와 갑곶돈대 쪽으로는 길이 이어지질 않는다. 하루빨리 연결이 되기를 학수고대하면서 본격적으로 자전거답사에 들어간다.
강화대교(江華大橋)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갑곶리와 경기도 김포시 월곶면 포내리를 연결하는 다리이다.
1993년 8월에 착공하여 1997년 12월에 준공되었으며 연장은 780m, 폭은 19.5m(4차로)이다. 본 교량의 개통으로 1969년 준공되어 사용하던 노후된 기존의 옛 강화대교는 폐쇄되었다.
구강화대교(舊江華大橋)
인천 강화군 강화읍 갑곶리(甲串里)와 경기 김포시 월곶면(月串面) 포내리(浦內里)를 잇는 다리이다. 길이 694m. 너비 10m(차도 2차선 7m, 보도 3m). 1965년 7월 착공하여 1969년 12월에 완공되었다. 육지와 섬을 잇는 다리로서는 경남 충무교, 전남 완도교에 이어 3번째이다. 1997년 신 강화대교가 개통되면서 폐쇄되어 이용할 수 없다.
우측으로 진행한다.
염하를 우측에 두고 진행하는데 아쉽게도 철조망이 이중으로 쳐져 있어서 염하 조망이 별로다.
자전거도로 옆으로 이중으로 철조망이 쳐져 있어서 조망이 별로다.
염하 [鹽河]
인천광역시 강화군(강화도)과 경기도 김포시 사이에 있는 남북 방향의 좁은 해협(海峽)이다. 마치 강(江)과 같다 하여 염하(鹽河)라고 부르며 강화해협 또는 김포강화해협이라고도 한다. 폭이 좁은 곳은 200~300m, 넓은 곳은 1km 정도이고, 길이는 약 20km이다.
밀물 때의 최대 유속은 약 3.5m/sec로 물살이 거세고 수심이 얕아서 썰물 때에는 곳에 따라 바닥이 드러나기도 한다. 염하의 북쪽으로는 한강과 임진강, 예성강의 강물이 흘러들어 오는데, 염하 북쪽의 월곶과 남쪽 황산도 간에는 물높이(해수면 높이) 차이가 아주 커서 물살이 빨라지게 된다.
염하는 예로부터 우리나라 해상교통의 요충지로, 조선시대에 삼남지방에서 서해를 북상해 온 세곡선(稅穀船)이 염하를 통해 한강으로 진입하여 한양으로 들어갔다. 염하는 교통의 요지였을 뿐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외세를 막는 군사적 요충지였는데 개항기 때에는 병인양요(1866년)와 신미양요(1871년)를 치른 격전지였다.
염하를 따라 군대 주둔지인 진(鎭)과 보(堡), 초소인 돈대 등 수많은 방어유적이 산재해 있다.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초지진(草芝鎭, 사적 제225호), 덕진진(德津鎭, 사적 제226호), 덕포진(德浦鎭, 사적 제292호), 광성보(廣城堡, 사적 제227호), 갑곶돈(甲串墩 갑곶돈대, 사적 제306호) 등이 있다.
염하는 한국전쟁 전까지만 해도 북한 신의주까지 오가던 뱃길이었는데 전쟁 후 뱃길이 봉쇄되었다가 2007년부터 민간어선이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염하를 가로질러 강화대교와 초지대교가 놓여 있다. |
연미정으로 향하는 자전거전용도로 모습
바람이 불어대서 꽤 쌀쌀하다. 자전거전용도로를 따라 신나게 페달을 밟는다. 내리막구간이 이어진다. 순간 바람에 모자를 흔들기에 한손으로 모자를 만지는데 갑자기 자전거가 요동을 친다. 급하게 두 손으로 핸들을 꼭 잡아 위기를 모면하다.
「휴~!」
시작부터 큰일 날 뻔한 순간이었다.
잠시 스톱하여 벙거지 모자를 완전무장하여 출발한다. 아직 라이더로서의 준비가 부족하여 헬멧이 없어서 등산 모자를 쓰고 자전거답사에 나서고 있다. 다음 구간부터는 꼭 헬멧을 써야겠다.
밖에서 본 연미정의 모습
연미정 입구에 붙어있는 심도로 드는길 안내판 모습
강화팔경의 하나인 연미정 모습
연미정(燕尾亭)
유형문화재 제24호
소재지: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월곶리 242
이 정자의 초창년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고려 고종이 구재(九齋)하기 위하여 학생을 이곳에 모아놓고 면학(勉學)케 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후 조선 중종 5년 (1510) 삼포왜란때 방어사가 되어 왜적을 무찌르고, 중종7년 (1512) 순변사가 되어 반란을 진압한 공로로 황형에게 이 정자를 하사하였다 한다.
이곳은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하여 한 줄기는 서해로, 또 한줄기는 강화해협(염하강)으로 흘로 그 모양이 마치 제비꼬리 같다 하여 연미(燕尾亭)라 하였다 한다. 높은 석주위에 세운 팔작집으로 영조 20년(1744) 중건, 고종 28년(1891) 중수 등 수차에 걸쳐 보수하였다. 조선 인조 5년(1627) 정묘호란시 이곳에서 청국과 강화조약(講和條約)을 체결 한 곳이기도 하다.
연미정
연미정
자전거전용도로를 따라 약 20여분 진행하니 연미정에 닿는다.
연미정은 예전에 두 차례 답사한 적이 있어서 내부 구경을 생략하고는 곧바로 진행을 한다.
바로 앞에 있는 민통선 검문소에 도착한다. 보초를 서고 있는 사병에게 자전거해안일주를 한다고 하니 이곳부터는 민통선이라 출입을 할 수 없다고 한다.
무슨 소리를 하는거냐? 예전에 이곳을 지나갔었다고 하니, 차량은 차량번호를 적고 통행할 수가 있는데 사람과 자전거는 안된다는 것이다.
몇 번을 사정해도 CCTV가 설치되어 있어서 자기네들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예전에 두어 번 차량으로 다녀온 것으로 위안을 삼고는 자전거를 돌려 나온다.
(제2편으로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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