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3회] 가칠봉, 응복산 첫 이야기
1.산행날짜: 2012년 7월 1일(일)
2.산행날씨: 맑음
3.산행코스: [산악회] 구룡령→갈전곡봉→가칠봉→삼봉자연휴양림
[글쓴이] 구룡령→갈전곡봉→가칠봉→응복산→삼봉자연휴양림
4.참가인원: 새싹산악회 제822회 정기산행 37명
5.산행시간
-10:35 구룡령 착
-10:45 숲길안내인 설명 듣고 산행시작
-10:49 삼거리[↓진고개 22km(11시간40분), 조침령21km(10시간)→, 갈전곡봉 2km(시간)]
-11:07 「산림천이조사구」 푯말
-11:09 구룡령옛길 정상
-11:16 삼거리[↓구룡령 2.7km(40분), ↑갈전곡봉 2.4km(1시간20분), 양양→]
-11:28 통나무의자 2개 있는 공터 삼거리[←구룡령 2.2km(1시간), 갈전곡봉 2km(1시간)→]
-11:48 삼거리[현위치: 정상. ↓갈전곡봉 0.75km, ←갈전약수터 2.1km, ↑구룡령옛길 1.8km]
-12:00 갈전곡봉 정상[↑조침령, 구룡령 4.2km(2시간)→, ←가칠봉3.0km(1시간30분)] 착 / -12:06 발
-13:06 가칠봉 착(정상석, 삼각점[현리 23 / 1990 재설])
-14:17 과외 받은 것 확인하고 빽 시작
-14:34 가칠봉 원위치(1시간 28분 과외 받음) 착 / -14:43 발
-14:47 삼거리(각종 푯말)
-15:06 실론계곡 갈림길
-15:26 능선분기점(방태산과 응복산 갈림길)
-15:45 응복산 전위봉(1164m)
-15:52 응복산(鷹伏山 1,176.7m)
-16:37 능선분기점(응복산 능선에서 휴양림 쪽 능선으로 이동)
-17:17 휴양림도로 착(산행종료: 6시간 32분 산행함)
-이후 원당삼거리로 이동하여 점심 먹고 귀가
◆구룡령-(1:15)-갈전곡봉-(1:00)-가칠봉-(0:23)-실론계곡갈림길-(0:20)-응복산갈림길-(0:26)-응복산-(1:25)-휴양림도로
※휴식없이 4시간 49분, 실제로는 과외 받은 것, 휴식 포함하면 6시간 32분 산행함.
빨간색이 산행한 코스이다.
6.산행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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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이름 |
높이(m) |
소재지 |
특 징 |
1 |
가칠봉(가칠峰) |
1,425 |
강원 홍천군 내면 |
오대산자락 (소대산 줄기) |
2 |
가칠봉(加七峰) |
1,242 |
강원 양구군(해안면, 동면) / 인제(서화면) |
금강산의 마지막 봉우리, 비무장지대 내 군사분계선 바로 남쪽에 위치 |
3 |
가칠봉(柯七峰) |
1,240.4 |
강원 홍천(내면) / 인제(기린면) |
삼봉약수 |
4 |
가칠봉(柯七峰) |
1,164.7 |
강원 인제군(인제읍, 기린면) |
점봉산 아래 |
오늘 산행하게 될 가칠봉은 강원도에만 4개나 있다.
가장 높은 가칠봉은 1,425m로 지도에는 표기가 되어 있지 않은 봉우리이다. 오대산국립공원 내 소대산 자락에 걸쳐 있다. 북단에 있는 가칠봉은 가칠봉이 금강산의 마지막 봉우리라고 하고(가칠봉이 들어가야 금강산 1만2천봉이 완성이 된다고 함), 비무장지대 내 군사분계선 바로 남쪽에 위치한 양구군(해안면, 동면)과 인제군(서화면)의 경계가 되는 1,242m의 가칠봉, 오늘 답사하게 될 삼봉휴양임 뒤의 가칠봉(1240.4), 점봉산 자락의 가칠봉(1,164.7m))이 그것이다. 비무장지대에 있는 양구, 인제의 가칠봉을 제외하고 3개의 가칠봉은 등산이 가능하다.
오늘도 새로운 산 답사에 대한 희망을 갖고 산행들머리인 구룡령으로 향했다.
「오늘 잘 하면 3개 산(가칠봉, 응복산, 사삼봉) 추가요! 아니면 최하 2개 산(가칠봉, 응복산)은 접수하리라!」
이렇듯 부푼 꿈을 안고 구룡령에 도착하여 산행에 들어갔다.
구룡령에서 산행을 시작했다.
구룡령(해발 1013m. 육지에서 차량으로 갈 수 있는 3번째로 높은 도로)에 도착하여 숲길안내인(예전 등산안내인의 새로운 이름)의 자세한 설명을 듣고 산행에 들어갔다.(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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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 |
해발(m) |
위치 |
특징 |
1 |
만항재(晩項) |
1,330 |
강원 정선(고한)/영월(상동)/태백 |
414번 도로 |
2 |
성삼재(性三) |
1,090 |
전남 구례군 산동면 |
861번 도로 |
3 |
구룡령(九龍嶺) |
1,013 |
강원 홍천(내면) / 양양(서면) |
56번 국도 |
4 |
한계령(寒溪嶺) |
1,004 |
강원 인제(북면,기린면)/양양(서면) |
44번 국도 |
섬 |
1100도로 |
1,100 |
제주시 / 서귀포시 |
1139번 도로 |
예전에 글쓴이가 백두대간을 종주할 때 구룡령을 지나갔는데…
『드디어 백두대간 마지막 구간이다. 1996년 10월 13일 대간에 첫 발을 디딘지 만 9년 2개월 만이다. 횟수로 10년 세월이 흘렀다.
다소 들뜬 기분으로 집에서 일찍 출발하여 구룡령 생태터널을 지나서 미리 봐둔 구룡령 표지석 옆 공간에 주차를 하고, 승용차에 히타가 켜져 있는 상태로 억지 수면을 청한다.
4시 30분에 일어나 차에서 나와 잠시 하늘에 무수히 떠 있는 별들을 바라보노라니 감상보단 얼어 죽겠다는 느낌이 들어 잽싸게 차 안으로 들어간다. 바깥 기온이 장난이 아니다. 걱정이 앞선다. 산행에 들어가야 하는데…. 너무 추운 날씨에 꼼짝을 하기가 싫다.
무려 1시간을 버티다가 더는 안 되겠다 싶어 차문을 박차고 힘차게 나온다. 마지막인데! 하며.(2005.12.10)』
윗글은 2005년 12월 10일 글쓴이의 백두대간 마지막 구간을 적은 산행기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구룡령에서 열심히 설명하시는 숲길안내인의 모습
구룡령에서 갈전곡봉으로 올라가는 모습
예전에 구룡령 생태터널 바로 옆(양양 쪽)에서 올라갔는데 이제 그 길은 폐쇄되었는지(확인은 못했다) 숲길안내인의 설명을 듣고는 한참 아래 쪽(홍천)에서 올라갔다.
새롭게 등산로 입구를 만든 것이다.
입구에는 「산림유전자원보호구역 안내」「백두대간 상세도」「백두대간 등산로 안내도」등 이곳이 백두대간임을 알리는 각종 푯말 등이 난무하다.
산림천이조사구 푯말
나무계단을 타고 올라간다. 나무계단을 다 타고 올라가니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그리곤 이내 전형적인 폭 좁은 등산로에 접어든다. 3~4분 정도 진행하니 첫 번째 이정표(↓진고개 22km(11시간40분), 조침령21km(10시간)→, 갈전곡봉 2km(시간))가 반긴다.
이후 17분 정도 진행하니 「산림천이조사구」 푯말이 나온다. 사진을 찍고 있으니 진식씨가 「왜 이런 걸 사진 찍냐」고 한다.
필요해서 찍는다고 하니 「산림청에서 나왔습니까?」 한다.
나무공부 하고 있다고 되짚어 답변하고는 다시 발걸음을 재촉한다.
이후 2분 정도 더 진행하니 구룡령옛길 정상이 나온다. 예전에 이곳을 지나갈 때는 없었던 각종 푯말이 세워져 있다.
산림청에서 설치한 「구룡령 옛길 안내」푯말 내부에 적힌 「구룡령옛길의 유래」를 적어본다.
『구룡령(九龍嶺)은 홍천군과 양양군을 잇는 해발 1,009m 높이의 고개로 아홉 마리 용(龍) 전설이 전한다. 지명유래는 구룡이 승천하는 것처럼 구불구불하다고 하여 구룡령이라고 이름하였다. 이곳은 백두대간의 허리로서 아흔아홉구비 원형구비 원형과 산림자원을 비롯하여 심마니, 숯, 철광 등 산간민속이 살아 숨쉬는 곳으로 영서 산지와 영동해안을 우마로 연결하던 교역로였다. 현재의 56번 구룡령길은 1874년 개통되었다.』
구룡령옛길 정상 푯말
[※ 구룡령 옛길에 대하여]
구룡령 옛길 지도
구룡령옛길은 문화재청으로부터 명승29호로 지정(2007년 12월 17일)된 「문화재길」(옛길정상~갈천 산촌체험학교 2.76km)이기도 하다.
명승길은 죽령 옛길, 문경새재, 문경의 토끼비리(관갑천잔도)와 함께 우리나라에 4개뿐이다. 하지만 홍천 내면 명개리~옛길정상까지 3.7km부분은 명승길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구룡령옛길의 약 42%만 명승길인 셈이다.
횟돌반쟁이
횟돌이 많은 이곳은 옛날 시멘트가 없을 때 이 횟돌로 관도 만들고 구들장도 만들었답니다.
아직도 캐내던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솔반쟁이
옛날 경복궁 복원을 위해 아름드리 금강송들이 있던 곳입니다. 소나무가 많아서 솔반쟁이라합니다. 아직도 그때 베어낸 소나무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묘반쟁이
이곳 묘반쟁이에는 한 젊은 청년의 묘가 있는데 옛날 양양골 원님과 홍천골 원님이 명계리를 서로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면서 싸우다가 서로 자기 관청에서 출발하여 만나는 지점을 경계로 하자고 하였는데 땅을 한 평이라도 더 많이 차지하려고 양양골에 건장한 청년이 원님을 들쳐 업고 뛰어 명개리까지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결국 지쳐서 쓰러져 사망했다는 그 청년을 위해 양양골 원님이 이곳에 묘를 써 주었다고 합니다.
구룡령의 전설
양양 서면 갈천리에서 홍천 내면 명개리로 이어지는 이 옛길은 고려시대까지는 전혀 길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고려중엽 양양 서면 갈천리에서 어릴 때부터 개를 기르며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효성이 지극한 노총각이 살고 있었는데, 산 너머 아름다운 처녀가 산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 처녀에게 장가를 가고 싶어 했다.
이 마음을 알게 된 개가 길을 안내하여 처녀를 데려오는데 홍천의 동네 총각들이 몽둥이를 들고 뒤를 따라 왔으나 구름이 끼어 양양의 노총각은 무사히 양양으로 넘어와 이 처녀와 결혼을 하고 어머니를 모시고 더욱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그 후 이 길을 개가 안내하여 장가를 간 길이라 하여 개 구(狗)자와 구름 운(雲)자를 써서 「구운령」이라 하였다.
지금의 구룡령이란 지명은 현재의 56번국도가 생기면서 까닭 모르게 구룡령이란 이름으로 불리 우기 시작하였다.
이 옛길은 조선시대 말까지도 젊은 청년 30명 이상이 모여야만 넘어가던 길로 항상 산적이 많았으며 일본사람들도 이 길을 감히 넘지 못하였다고 한다.
또 다른 전설은 옛날 양양, 고성 지방 선비들이 과거를 치르러 한양으로 갈 때 명칭에서 유래하듯 용의 영험함을 빗대어 과거 급제를 기원하며 넘나들던 길이라 하며, 구룡령이라는 이름은 「아홉 마리 용이 고개를 넘어가다가 지쳐서 갈천리 마을 약수터에서 목을 축이고 고갯길을 넘어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전하고 있다.
[구룡령에 대한 참고 기사]
일제가 자원수탈 목적으로 만든 비포장도로가 원래의 길로 잘못 알려져…
짐 지고도 힘 덜 들여 걷는 길… 갈천리 주민들은 되살리기 운동 벌여
▣ 구룡령=글·사진 서재철 녹색연합 국장
구룡령 옛길은 백두대간에서도 가장 산림이 울창한 지역인 설악산과 오대산의 허리에 위치한 대표적인 옛길이다. 홍천군 내면 명개리와 양양군 서면 갈천리를 연결하는 구룡령은 영동과 영서 사람들이 설악산·점봉산·오대산 등 백두대간 장벽으로 나뉘어 산지와 해안 지역을 오가는 것이 힘들었던 시절 두 지역을 연결해주는 거의 유일한 통로였다.
△ 구룡령 옛길은 비탈을 따라 힘겹게 올라가는 길이 아니다.
대신 비탈에 수없이 굽이를 줘 발품을 팔아도 힘겨움이 덜하도록 최대한 배려한 흔적이 많다.
영동 북부 양양·속초 등지에 살았던 이들은 한계령·미시령·진부령보다는 주로 구룡령을 통해 홍천이나 평창으로 다녔다. 고속도로를 내면서 옛길을 곳곳에서 토막내는 바람에 원형이 많이 사라진 한계령·미시령·대관령 등에 비해 구룡령 옛길은 백두대간의 영서와 영동을 연결하는 옛길 가운데 그 원형이 가장 잘 보전돼 있는 길로 꼽힌다.
산지와 해안을 잇던 거의 유일한 통로
구룡령 옛길은 우리 사회가 옛길을 어떻게 취급하고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로 꼽힌다. 구룡령의 지명과 위치가 현재 잘못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지리에 밝고 산을 잘 안다는 사람들조차 구룡령의 옛길은 모른다.
대부분이 구룡령 하면 지금 차가 다니는 56번 국도가 넘나드는 고개를 원래의 구룡령길이라 생각한다. 이 도로는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자원 수탈 목적으로 구룡령 고개에서 1km가량 떨어진 곳에 개설한 비포장도로가 지난 1994년 포장된 것이다.
일제 당시 일본인들이 지도에 원래의 구룡령의 위치가 아닌, 차가 다니는 비포장도로를 구룡령으로 표기하면서 사람들은 구룡령의 위치를 잘못 알기 시작했다. 더욱이 94년 이후에는 모든 지도와 행정 표기에서 구룡령의 위치가 현재 차가 다니는 지점으로 정리됐다. 백두대간을 연구하고 관리하는 정부나 민간단체, 학자들조차 구룡령길을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다.
구룡령 옛길에는 조상들이 어떻게 길을 다녔는지를 보여주는 원형이 남아 있다. 요즈음 사람들은 영서와 영동을 차로 넘으면서 차창 밖으로 보이는 백두대간의 험한 지형을 실감한다. 그래서 이런 급경사의 산지에서 말이 다닐 수 있다는 사실을 상상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 길을 걸어보면 구룡령 옛길에서 노새와 조랑말 등이 큰 등짐을 지고 다녔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게 된다. 그만큼 옛길은 힘겨운 고개를 가장 힘이 덜 드는 형태로 만들어놓았다. 비탈길이어도 최대한 경사를 누인 길이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은 누군지도 모를 옛사람들의 지혜가 세월과 함께 쌓인 덕분이다. 어떤 빼어난 등산로도 따라올 수 없을 만큼 자연 속에 파고드는 절묘한 흐름이 길 구석구석에 배어 있다. 숲과의 조화가 자연스럽고 깊다는 점은 걸어보면 단박에 느껴진다. 똑같은 고도의 등산로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여유가 길에 묻어 있다.
△ 구룡령 옛길에는 농기구를 만들기 위해 철을 캐던 전통 광산의 흔적이 동굴 형태로 남아 있다(위).
구룡령 옛길의 양양 쪽 들머리인 갈천분교(아래).
지리산이나 설악산 등 큰 산의 등산로를 오르다 보면 주변의 숲을 감상하기 어려운 비탈과 고빗길이 수없이 펼쳐진다. 그래서 산쟁이들 가운데서도 발품이 노련하고 옹골진 이가 아니면 대부분 숲을 제대로 살펴보지도 못하고 정상으로 오르기에 바쁘다. 하지만 구룡령 옛길은 숲의 모습을 제대로 보고 느낄 수 있다. 옛사람들은 요즘 일부 등산꾼들처럼 싸우는 듯이 산길을 걷지는 않았던 것 같다. 어차피 갈 길이니 최대한 여유 있고 천천히 걸음이 이어지도록 길을 냈던 셈이다. 그러다 보니 숲의 원형이 훼손되지 않으면서도 다니기에 편안한 길이 되었다. 선조의 경험과학이 녹록지 않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솔반쟁이, 묘반쟁이, 횟돌반쟁이…
구룡령 옛길에는 굽이굽이 민중들의 꿈과 희망, 아픔과 좌절도 녹아 있다. 특히 일제시대 때 숯을 구웠던 재탄장과 함께 철광의 흔적이 남아 있다. 농경사회의 시작과 함께 철기문화가 열리면서 양양 일원으로 공급한 철로 만들어진 농기구의 원재료를 구룡령의 옛길 한쪽에서 생산해냈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철을 캐던 동굴이 그대로 남아 있다. 광산이 일제 강제수탈의 현장이었던 점도 흔적을 통해 확인된다.
숲으로 펼쳐진 구룡령 옛길의 또 다른 상징은 금강소나무다. 1980년대 말 경복궁 복원 과정에서 많은 금강소나무가 베어진 뒤 국내에는 금강소나무가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드물다. 무리를 이룬 200~300년 된 금강소나무들의 붉은 기운이 하늘로 뻗어 있다. 굵은 금강소나무의 표본인 곳이라 해 ‘솔반쟁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젊은 청년 죽은 터는 ‘묘반쟁이’, 장례식의 하관 때 회다짐을 하기 위해 쓰던 횟가루를 생산한 곳이라는 뜻의 ‘횟돌반쟁이’ 등의 지명도 남아 있다.
구룡령의 영동 쪽 방향 하늘 아래 첫 마을인 양양군 서면 갈천리에 사는 엄익환(70)씨는 마을 사람들과 함께 구룡령 옛길을 살리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 갈천리는 백두대간에서도 대표적인 첩첩산중으로 골이 깊고 숲이 울창한 곳으로 ‘갈천약수’로 더 알려져 있다. 오대산을 중심으로 설악산 일대까지 50년 가까이 산삼을 캐러 다녀 백두대간 심마니로 잔뼈가 굵은 엄씨가 구룡령의 옛길을 되살리려 하는 것은 산림이 곧 생활 터전이었던 그의 이력과 무관하지 않다. 특히 오대산·설악산 지역의 내력과 문화, 역사를 줄줄 꿰고 있는 그의 삶과 구체적으로 닿아 있다. 그는 들머리와 날머리 등을 비롯해 구룡령 구석구석 옛길의 흔적을 찾아내고 그곳마다 담겨진 사연을 기록하고 정리하고 있다. 심마니로서 구룡령 일대의 백두대간을 어릴 때부터 수없이 다녔던 기억을 되살려 옛 지명과 유래를 밝혀주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엄씨는 “내가 이 길의 내력과 이야기를 후대에 전해주지 않으면 영동 북부와 영서 내륙이 만나고 빚어낸 사연은 그냥 사라질 것이 아닌가”라며 “그것이 내 남은 생의 꿈이자 보람”이라고 말했다. 엄씨는 군대를 제대한 뒤 본격적인 심마니 생활을 시작했다. 그렇게 수십 년 발품으로 산을 다니며 받은 산삼으로 4남매 자식들을 길러내고 분가시킨 뒤 지금은 아내와 함께 크게 넉넉하지 않아도 곤궁하지는 않은 여생을 보내고 있다.
엄씨를 비롯한 갈천리 주민 모두는 구룡령 옛길을 지켜온 산증인들이다. 엄씨와 마을 주민들의 옛길 복원 노력은 결실을 맺고 있다. 지난 10월12일 구룡령 정상에서는 ‘구룡령 옛길 걷기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양양군청과 강원도청, 동부지방산림청 관계자들과 등반객 등 300여 명은 이날 양양과 홍천을 넘나드는 옛길을 따라 5km 정도를 걸었다. 특히 구룡령 옛길의 들머리가 시작되는 곳으로 삼기 적절한 56번 국도가의 갈천분교는 그 소담한 풍경이 대한민국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여서 참석자들이 눈길을 떼지 못했다. 이곳은 몇 해 전에 폐교가 되어 지금은 수련원으로 쓰이고 있다.
10월에는 ‘옛길 걷기대회’ 열려
구룡령 옛길은 엄씨가 떠나고 갈천리 주민들의 기억이 사라지면 영원히 역사에 묻힐 가능성이 큰 길이다. 백두대간의 문화적 원형과 생태적 유산이 녹아 있는 이 옛길이 주민들의 뜻처럼 제대로 관리되고 이용된다면 우리 사회는 그 어떤 포장도로보다 의미 있고 풍부한 길을 하나 더 가지는 셈이 된다.
고개 넘던 사연은 가물가물
영동~영서 통하던 백두대간 길 중 대관령 길 외에는 흔적 없어
우리 역사에서 가장 대표적인 옛길은 영남대로와 호남대로 등이다. 이 길들은 삼국시대부터 일제 강점기까지 우리 땅의 주요 축선이었다. 영남대로는 서울 남대문을 나서면서 시작돼 문경새재를 넘어 부산 동래까지 이어지는 길로 조선시대의 관리, 장사꾼 등 한양으로 올라가는 이들에게 필수적인 도보 교통로였다. 이런 옛길 가운데서도 가장 이질적인 문화가 교류했던 곳이 바로 태백산에서 금강산 너머 원산까지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고갯길이었다.
이 길을 통해 영동 지역의 소금과 미역 등 해산물과 영서 지역의 곡식, 임산물 등의 교류가 이뤄졌다. 일제 강점기까지 생활의 많은 부분을 자연산물에 의지하던 시절 바닷가의 산물이 주를 이루던 영동과 산림의 산물이 주를 이루던 영서가 오갔던 이동통로가 바로 백두대간의 고개였다. 특히 이 고개는 영동 사람들이 한양으로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통로였다.
이 가운데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길이 대관령 옛길이다. 대관령 옛길은 고속도로가 뚫렸지만 그래도 옛길의 역사가 일부 남아 있는 편이다. 하지만 백두대간의 나머지 주요 옛길은 포장도로와 함께 그 문화와 역사도 거의 다 사라졌다. 삼척의 댓재, 백봉령, 삽당령, 닭목재, 진고개, 한계령, 미시령, 진부령 등 대부분의 고갯길은 옛길의 흔적이 바랜 지 오래다. 이제는 사연과 이야기마저 가물가물하다.
지리산에서 비무장지대 삼재령까지 약 700km에 달하는 백두대간 가운데 옛길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차를 타고 넘을 수 있는 백두대간 고갯길만 헤아려도 70여 곳이다. 최근에는 속리산 자락의 밤재와 점봉산의 조침령에 포장도로가 개설됐다. 이화령에는 4차선 국도가 있는데도 그 옆에 다시 고속도로가 뚫렸다.
갈전약수터 갈림길에 설치된 이정표
구룡령옛길 정상을 확인하고는 출발한다. 6분을 진행하니 삼거리가 나오는데 이곳에 이정표(↓구룡령 2.7km(40분), ↑갈전곡봉 2.4km(1시간20분), 양양→)가 세워져 있다.
갈전곡봉 2.4km 남았다는 이정표가 있는 삼거리에서 12분을 진행하니 통나무의자 2개가 있는 공터 삼거리에 닿는데 이곳에도 이정표(←구룡령 2.2km(1시간), 갈전곡봉 2km(1시간)→)가 세워져 있다. 예전 이곳을 지나갔을 때는 없었던 이정표들이다.
통나무의자가 있는 삼거리에서 20분을 더 진행하니 다시 삼거리가 나오는데 이곳 역시 이정표(현위치: 정상. ↓갈전곡봉 0.75km, ←갈전약수터 2.1km, ↑구룡령옛길 1.8km)가 세워져 있다.
갈전곡봉 정상
갈전곡봉
갈전곡봉 정상
이후 내리막길이 이어지다가 갈전곡봉 정상을 향한 오름길이 시작된다. 다소 숨이 차다 싶을때 공터인 갈전곡봉 정상에 닿는다. 갈전곡봉 정상은 능선분기봉이다. 예전에 백두대간을 종주할 때 특히 북에서 남으로 종주할 때 이곳에서 가칠봉 쪽으로 많이 갔었다. 정상에도 이정표(↑조침령, 구룡령 4.2km(2시간)→, ←가칠봉3.0km(1시간30분))와 북부지방산림청에서 설치한 갈전곡봉(1,204m)에 대한 설명이 적힌 푯말이 세워져 있는데 갈전곡봉에 대한 설명은 아래와 같다.
「구룡령과 조침령을 잇는 백두대간의 능선에 위치한 갈전곡봉(1,204m)은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과 홍천군 내면에 걸쳐 있다. 서북 방향을 뻗고 있는 능선은 가칠봉, 응복산, 구룡덕봉 등의 준봉들을 이루면서 방태산과 연결된다. 산자락에는 방동약수, 개인약수 등 유명약수가 많고, 왕승골, 아침가리골, 연가리골, 조경동계곡 등의 깊은 골짜기도 많이 형성되어 있다.
가칠봉(1,240m), 사삼봉(私參峰 1,322m), 응봉산(鷹峰山 1,016m) 등과 함께 태백산맥의 일부를 이룬다. 또한 소양강의 지류인 방대천(芳臺川)을 비롯하여 계방천(桂芳川) . 내린천(內麟川) 등의 발원지를 이루고 있다.」
2005.12.10일에도 거의 쉬지 않고 왔는데 1시간 40분 걸렸는데, 이번에는 1시간 15분 걸렸다. 이번 역시 한 번도 쉬지 않고 왔다. 나이의 차이인가? 계절의 차이인가? 지금이 그때보다 나이를 더 먹었으니 아마 계절의 차이인 듯 하다.
갈증이 심해 물을 먹고 조금 쉬려고 하니 정대장님이 출발하자고 한다.
「이것 참!」
그래서 6분 정도 쉬고 가칠봉으로 향한다.
오늘 하루에만 2번 오른 가칠봉 정상에서
갈전곡봉에서 가칠봉까지도 역시 한 번도 안 쉬고 가칠봉 정상에 도착했다. 1시간 소요됐다.
가칠봉 정상에 도착해서야 한 쪽 방향으로나마 조망이 터져 조망에 대한 갈증이 다소나마 해갈이 되는 곳이다. 정상석과 삼각점(현리 23 / 1990 재설)이 박혀 있다. 좁은 공터에 사람들이 몰려 있고, 또 햇볕이 들고 있어서 그늘진 곳에서 쉬기로 하고 더 가기로 했다. 그래서 이곳에서 정남쪽 방향(휴양림 방향)으로 내려가야 하는데 잘못 본 지도 덕에 정동쪽으로 내려간다. 이제부터 장장 1시간 28분의 과외가 시작됐으니….
정동(正東)쪽으로 내려가는데 길은 매우 뚜렷하게 잘 나있다. 아무런 의심없이 내려간다. 앞 서 내려가는 현석진님을 쫓아갈 수 없어 별 수 없이 대장님과 글쓴이는 조금 넓은 공터에 자리 잡아 휴식을 한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사람소리가 들려오더니 앞 서 내려간 현석진님과 천지산악회에서 왔다는 남자분이 함께 올라온다. 아무래도 길을 잘못 들어섰다는 것이다. 꼭 계곡으로 내려가는 것 같아서 올라왔다고 하는데 글쓴이가 가지고 온 지형도을 배낭에서 꺼내와 표고차이를 확인해본다. 약300m 정도 표고가 떨어진다고 하니 다시 의심을 접고 왔던 길 내려간다. 대장님과 글쓴이도 앞서 가는 두 분을 따라 내려간다.
그런데 우측으로 가야 할 능선이 좌측으로 가면서 곧장 계곡으로 향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건 아니다 싶어 앞 서 가고 있는 현석진님에게 잘못 가고 있다고 예기를 하고는 되짚어 올라가 좌측능선으로 가겠다고 하니 저만치 내려가 있던 두 분이 어느새 올라와 4명이서 없는 길 헤쳐 가며 능선에 힘겹게 올라섰다.
그리고는 계속 직진하며 내려가는데 순간 길이 없어져 버렸다. 바로 앞에 짧은 바위가 있었던 것이다. 별 수 없이 우측으로 해서 길게 없는 길 고비 천지인 습한 지역을 헤치며 겨우겨우 능선에 복귀했다.
순간 대장님이 가칠봉에서 휴양림 쪽으로 더 가서 내려가는 게 아니냐고 한다. 더불어 옆에 있던 현석진님도 그런 거 같다고 한다. 그때서야 지도를 잘못 본 것을 알게 됐다.
「아뿔사!」
「대단히 실수 했구나!」
이미 엎어진 물이다. 다시 가칠봉으로 향한다. 아까 바위구간이 있어서 우회한 구간도 이제 시간이 없기 때문에 정면돌파로 조심스럽게 가기로 하고 정면 돌파하니 길이 쉽게 뚫린다. 아까도 조심스럽게 진행했으면 될 길을 지레 겁먹고 길게 우회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계속 능선을 따라 올라간다. 능선 상에 「사계절산악회」 유도표시 종이가 바닥에 깔려 있다. 이런 종이는 아까 계곡으로 내려갈 때도 있었다. 결국 가칠봉에 다시 도착했다.
1시간 28분의 과외를 받고 가칠봉에 도착하니 14시 34분이다. 가칠봉 정상에는 문종화씨가 도착해 있었다. 이어 설국님 등도 도착한다.
2번 답사한 가칠봉 정상 기념을 찍고 있으니 산사랑님 등 중간그룹이 속속 도착한다.
현석진님이 응복산 정상을 못 가는게 서운했는지 글쓴이에게 의견을 타진해본다. 글쓴이 역시 사삼봉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응복산까지는 가야했기에 의기투합하여 자리에서 일어나 응복산으로 향한다.
가칠봉 정상에서 정남으로 내려오면 나오는 삼거리에 설치한 등산로 안내도인데
빨간색 파선으로 칠한 그러니까 가칠봉정상에서 좌측으로 방태산 방향을 표시했는데 잘못된 것이다.
그쪽으로 가면 조경동계곡으로 빠진다. 그러므로 "방태산"글자는 삭제 해야 한다.
이 지도 때문에 1시간 30분 특과를 받았다.
가칠봉 정상에서 이제 정남(正南)쪽으로 방향을 잡아(길 매우 뚜렷함) 내려간다. 4분을 내려가니 삼거리가 나온다. 각종 푯말이 난무하다.
1시간 30분 전에 이곳을 통과했어야 했는데….
씁쓸한 표정과 함께 우측으로 내려간다.
응복산 정상에서의 보라대장님의 모습
완만한 내리막길을 내려간다. 내려가는 능선 중간 중간에 이정표(←휴양림 2.7km, 가칠봉 0.7km→), (←휴양림 2.0km, 가칠봉 1.4km→)가 제대로 진행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삼거리에서 19분을 내려가니 휴양림(실론계곡)과 갈라지는 곳에 닿는다. 휴양림 쪽으로 깊게 패인 하산로가 매우 뚜렷하지만 응복산, 방태산으로 이어지는 길은 넓은 초지에 길이 그렇게 뚜렷하지가 않다. 우측의 능선으로 올라가니 그때서야 뚜렷한 길이 이어진다.
그렇게 능선에 붙은 이후 1098m봉 응복산 분기점까지 계속되는 오름길에 기운이 다 빠져버렸다. 다행히도 완만한 오름길이기 천만다행이었다. 앞 서 가는 현석진님은 지치지도 않은지 잘 도 간다.
실론계곡갈림길에서 응복산 갈림길인 1098m봉까지 20분 걸렸는데 무척 힘이 들었다. 이미 체력이 고갈된 상태이다.
방태산과 응복산의 갈림길은 뚜렷한 능선분기점이라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렇게 해서 응복산 구역으로 들어섰다. 잠시 내려섰다가 오름길이 시작된다. 다행히 완만한 오름길이 이어진다. 완만한 오름길에 온갖 나물들이 천지로 널려 있다. 힘은 들어도 나물보는 낙으로 완만한 오름길을 올라간다. 19분을 완만하게 올라가니 응복산 전위봉(1164m)에 닿는다. 산행하기 전 어떤 선답자의 최신 후기에 응복산은 삼각점(1/25,000 지형도에는 삼각점이 표시되어 있음)은 물론이고 아무런 표기도 없다고 했다.
그래서 글쓴이는 처음에는 이곳 전위봉이 응복산 인줄 알았다. 정수리에 표지기 한 장 매달려 있어서….
옆에 있던 현석진님이 바로 정면으로 보이는 곳이 더 높아 보인다 하면서 그곳이 응복산 같다고 한다. 글쓴이의 눈에는 나무에 가려 더 작아 보였다. 다시 지형도를 꺼내 확인해보니 뒷 봉이 응복산이었다. 조금 더 쉬고 응복산 정상을 향해 출발했다.
이내 다음 봉우리에 선다. 역시 아무런 표시도 없다. 그런데 조금 더 간 지점(바위가 조금 있음)에 응복산 정상표시를 한 비닐코팅지가 나무에 매달려 있다. 이곳이 응복산 정상이나 보다. 그래서 어렵게 어렵게 응복산 정상에 도착했다.
응복산 갈림길에서 26분 걸렸다.
이제 하산길을 찾아야 한다. 시간도 꽤 많이 흘렀고, 무엇보다도 후미가 거의 하산을 마칠 시간이기 때문에 시간이 없어서 최대한 빨리 내려가는 길을 찾아야 한다.
역시 현석진씨가 선두로 치고 내려간다. 응복산에서 삼봉약수로 곧장 내려가려고 했다. 그런데 한 5분 정도 내려간 현석진씨가 도저히 내려갈 수가 없으니 길 좋은 능선길로 내려가자고 한다.
이에 글쓴이도 동조를 한다. 기운이 남아 있을 때야 치고 내려가도 문제가 없겠지만 이미 체력이 고갈된 상태에서는 최대한 길 좋은 곳으로 내려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되짚어 응복산 정상에 올라간다. 그리고는 다시 응복산 정상에 선다. 이제 능선따라 내려간다.
얼마나 내려갔을까 한참을 내려갔다고 생각을 하고 985m봉을 지난 안부에서 내려가려고 하는데 길이 희미하다. 표지기 한 장이 유혹을 하지만 아니다 싶어 조금 더 간 후에 내려가자고 제의한다.
그래서 조금 더 간 능선에서 좌측으로 뻗은 능선에 길이 뚜렷하여 그 쪽으로 방향을 잡고 내려간다. 매우 뚜렷하게 이어지는 능선이 갑자기 안부에 이르렀을 때 길이 보이지가 않는다. 생각같아선 좌측으로 내려가면 휴양림으로 내려갈 것 같은데 앞 서 가던 현석진님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는다. 소리를 지르니 능선 앞 쪽에서 들려온다.
잠시 길 없는 능선을 진행하니 길은 이내 다시 나타난다. 그리고는 속도를 내어 현석진님과 합류를 한다. 그런데 더덕이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더덕 한 뿌리 수확하고, 또 한 뿌리 수확하니 앞 서 가던 현석진님은 보이지가 않는다. 소리 질러도 들려오지도 않는다.
그사이 이윤영 부회장님의 계속되는 전화가 마음을 조급하게 만든다. 모두 하산을 완료했다는 것이다.
다시 능선이 분기하는 지점에 이르러 우측 능선의 급사면을 타고 내려간다. 경사가 제법 급하고 흙길과 돌이 섞여 있는 급경사길이다. 그래서 속도를 내여 내려가니 개울이 나온다. 그리고는 좌측으로 횡단하여 내려가니 휴양림도로에 떨어진다. 좌측으로 산악회 버스가 보인다.
이로써 6시간 32분의 힘든 산행을 마쳤다.
그 후 원당삼거리로 이동하여 닭백숙으로 늦은 점심을 먹고 귀경했다.
삼봉자연휴양림에 대하여
지난해 KBS TV 예능 프로그램인 ‘1박 2일’을 통해 국민적인 관광지로 업그레이드됐다. 내면 광원리에 위치한 삼봉자연휴양림은 오대산국립공원 북서쪽의 가칠봉(해발 1240m)과 응복산(1155m), 사삼봉(1107m) 등 세 봉우리에 둘러싸여 있는 곳에 고즈넉히 자리 잡고 있다.
다양한 침엽수와 활엽수가 조화를 이룸은 물론 깊은 계곡 물에는 1급수에서만 사는 보호어종인 열목어와 도롱뇽, 반딧불이가 관광객들을 유혹한다. 이곳의 대표적인 명소는 바로 삼봉약수. 위장이나 신장병에 효험이 있어 지역 주민뿐만 아니라 많은 외지관광객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
삼봉약수에는 전설이 있다. 조선시대 문종비인 현덕왕후 부친인 권전 대감이 날개가 부러진 학이 안개가 피어오르는 계곡에 날개를 적시고 다시 날아가는 것을 보고 그 곳을 살펴보니 바위틈에서 샘물이 솟아났는데 바로 삼봉약수였다는 것이다. 이 물을 마시면 질병이 나았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부정한 사람이 마시면 약수물이 흙탕물로 변한다는 이야기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 삼봉약수는 양양 오색약수, 인제 개인약수와 함께 천연기념물 제530호로 지정된 우리나라 3대 약수 중 하나로 불린다. 물에는 철분, 탄산이온, 망간, 불소 등이 함유돼 있어 위장병과 피부·신장병에 효험이 있어 전국에서 많은 사람이 찾고 있다. 이와관련, 국립삼봉자연휴양림측도 몸에 좋은 삼봉약수 마시기, 세수하기, 삼봉약수로 음식 만들기 및 약수 족욕 등 다양한 체험프로그램을 운영해 관광객들로부터 크게 인기를 끌고 있다.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은 국립자연휴양림 최초로 이곳 삼봉자연휴양림에 1개월이상 최대 2개월까지 장기체류가 가능한 숲속의 집도 운영하고 있다. 숙박시설 이외에 야영데크 81개소를 비롯 물놀이장, 목공예실, 삼봉약수 족욕탕, 숲체험코스 1.5㎞ 등 다양한 시설을 갖추고 있다.
특히 ‘1박2일’에서 머물다 간 계곡과 숲이 어우러진 야영장은 캠핑에 최적의 장소로 많은 관광객들이 이용하고 있다.
먹을거리로는 이곳에서만 맛볼 수 있는 삼봉약수로 만든 닭볶음탕과 백숙, 1급수에서 서식한 송어와 두부전골 등이 유명하다.
7.특기사항
①답사 산봉우리
No. 0661 갈전곡봉(葛田谷峰. 1,204m)
-소재지: 강원도 홍천군 내면, 양양군 서면, 인제군 기린면
-정상: 공터, 정상표시 적은 돌, 이정표, 조망 없음 등
-특기: 2번 답사(1회: 2005.12.10)
No. 1105 가칠봉(柯七峰. 1,240.4m)
-소재지: 강원도 홍천군 내면, 인제군 기린면
-정상: 공터, 정상석, 이정표, 한쪽 조망 등
-특기: 첫 답사
No. 1106 응복산(鷹伏山. 1,176.7m)
-소재지: 강원도 홍천군 내면, 인제군 기린면
-정상: 공터, 정상석, 이정표, 한쪽 조망 등
-특기: 첫 답사
②1/25,000 지형도: 2매(방동[芳東], 창촌[倉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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