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서울·경기 여행

남양주 다산 유적지를 찾아서

약초2 2007. 8. 20. 16:33

 

남양주 다산 유적지

지정번호: 사적 제73호

위       치: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 위치한 다산 유적지는 나라의 부패를 꾸짖던 선생의 쩌렁쩌렁한 목소리와 꼿꼿하고 검소한 그의 생활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생가 여유당, 이백 년 세월의 바람 앞에 절로 고개 숙여지는 다산의 묘, 시대를 앞서간 선구자의 업적과 자취가 전시된 다산기념관과 다산을 현대적 시각으로 재조명해보는 다산문화관이 있다.

한 걸음이면 뛰어 넘을 수 있을 것 같은 여유당의 낮은 담장에는, 허물없이 백성들의 기쁨과 아픔을 함께하고자 했던 다산 선생의 마음이 담겨 있다.


18년이란 장기간에 걸친 유배생활 속에서도 민생을 위한 경세의 학문인 실학을 연구하여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 500여권에 이르는 방대하고도 귀중한 저서를 남긴 다산은 모두 함께 더불어 잘사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정치, 경제, 교육, 사회전반에 걸친 개혁을 부르짖은 시대의 ‘개혁가’이자 애국ㆍ애민의 한 길만을 걸었던 참 선비였다.

실학의 체계를 완성한 대학자이며, 일찍이 북학을 받아들여 백성들의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것을 만들고자 밤새 고민했던 과학자, 1년에 100편이 넘는 시를 쓴 의욕적인 예술가였던 정다산, 그의 손이 거쳐간 곳이면 어디나 백성을 아끼는 마음,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깃들어 있다.

매년 10월 유서 깊은 다산유적지에서 펼쳐지는 다산문화제는 다채로운 시민행사와 놀이, 모두 함께 어우러지는 축제의 한마당으로 다산선생의 생애와 사상을 문화적 시각으로 재조명, 우리 문화를 통해 다산선생을 직접 체험하는 시민문화축제이다.


다산문화제는 퇴계원산대놀이, 북청사자놀음 등의 다채로운 문화공연이 펼쳐지며 전통악기체험, 전통놀이체험, 다산 찻잔만들기, 우리문양 탁본 찍어보기 등 선조들의 놀이문화를 체험하면서 우리문화를 체험하고 다산사상 강연회, 두리차회, 다산 알기 퀴즈대회 등을 통해 다산의 정신을 느껴볼수 있는 감동과 역사체험의 추억을 만들 수 있는 남양주의 대표적인 행사이다.


1991년도 부터 <다산묘역 정비 보강사업>을 시작으로 현재(2005)의 <다산문화 관광공원 조성사업>에 이르기 까지 남양주시가 남양주의 소중한 문화유산의 복원과 계승발전을 위해 애쓰고 있는 곳이다. 


1. 위    치: 남양주 조안면 능내리 산75-1번지

2. 시설내용:

-다산 정약용선생의 묘(경기도기념물 제7호)

-다산 정약용선생 생가

-문도사(사당)

-기념관

-문화관

-문화의 거리

-관광상품판매소

3. 전시물품: 총58종 304점

(동상, 영정, 목민심서등 저서, 거중기, 녹로, 디오드라마, 영상자료 및 조형물)

 

 

(1) 여행스케치

-다산 유적지 입구에서는 다산선생의 얼이 느껴지도록 입구에서 수원성축조에 사용된 거중기 전시 및 동판에 선생이 집필하셨던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이 새겨져 있다.

다산 기념관 내에 들어서면 다산선생의 유품을 전시하였고,

생가에는 선생의 어린 시절을 느낄 수 있도록 되어있으며, 나지막한 언덕위에 다산선생의 묘가 있다.


(2) 관람시간

-동절기(11월 ~ 2월) : 오전9시 ~ 오후6시

   (입장가능시간 : 오전9시 ~ 오후5시)

-하절기(3월 ~ 10월) : 오전9시 ~ 오후7시

   (입장가능시간 : 오전9시 ~ 오후6시)

※휴관일 : 매주 월요일


(3) 입장료

- 무료


(4) 대중교통 안내

▶버스 : 다산유적지 앞 하차 (도보 20분)

       청량리에서 2228번, 8번(배차간격 10~15분)

       (청량리-구리시-덕소-다산유적지-양수리)

▶강변역에서 2000-1번(배차간격 20~30분)

        (강변역-구리시-덕소-다산유적지-양수리-양평)

▶전철 덕소역에서 8번, 2000-1번, 2228번

▶철도 : 청량리역에서 중앙선 이용 능내역 하차(도보 15분)

        오전6:50분 출발 오전7:26분 도착, 단1회


(5) 문의처

-남양주시청 문화관광과 (전화 031)590-4241~4243)

-다산유적지 관리사무소 (전화 031)590-2481, 2837)

 

 

출처: http://dasan.nyj.go.kr/ (남양주 다산 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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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 선생께서 저술한 약 500여권에 이르는 서책과

그 속에서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타오르는 실학사상의 정신을

조형물로 형상화 하였습니다.

2001년 11월

작품명: 꺼지지 않는 불

작  가: 박 철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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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 상

 

 

 

다산 정약용의 삶 (1762~1836)

▶1762년 (영조 38년)

-6월 16일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부친 정재원(丁載遠)과 모친 해남윤씨(海南尹氏, 고산 윤선도, 공제 윤두서의 후손)의 4남으로 출생.

▶1776년 (영조 62년)

-2월 22일 풍산홍씨(豊山洪氏)와 결혼

▶1789년 (정조 13년)

-봄에 문과에 급제하여 희릉직장, 3월에 당하문관(堂下文官)중 문학이 뛰어난 자를 뽑아 쓰는 초계문신(抄啓文臣)에 임명되고, 그해 겨울에 배다리(舟橋)의 제작 규제를 만들어 공을 세움.

▶1792년 (정조 16년)

-봄에 홍문관 수찬(弘文館 修撰)이 됨. 겨울에 수원 화성을 설계하고 거중기와 녹로, 유형거를 고안하여 성 축조에 이용함.

「성설(城設)」, 「기중도설(起重圖說)」을 지어 올려서 4만냥의 경비를 절약하고, 공사기간을 7년이나 단축시킴.

▶1794년 (정조 18년)

-성균관 직강(直講)에 임명되고, 경기암행어사로소 탐관오리를 벌함.

이후 홍문관 교리(校理) ․ 수찬(修撰)이 됨.

▶1795년 (정조 19년)

-동부승지(同副承旨), 병조참의(兵曹參議), 우부승지(右副承旨)를 제수받음.

주문모사건에 연좌되어 7월 충청도 금정찰방(金井察訪)으로 외보됨.

▶1800년 (정조 24년)

-봄 처자를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저작에 주력함.

6월 정조가 승하하고 11살의 순조를 대신하여 정순왕후가 수렴청정함.

▶1801년 (순조 1년)

-책롱사건으로 장기현으로 유배되고, 황사영사건으로 강진으로 이배됨.

▶1808년 (순조 8년)

-봄에 도암면 만덕동의 茶山에 있는 윤단(尹慱)의 산정(山亭, 다산초당)으로 이주함.

▶1818년 (순조 18년)

-이태순의 상소로 유배에서 해배되어 9월 14일 마현 고향집으로 돌아옴.

▶1836년 (헌종 2년)

-75세, 회혼일인 2월 22일 진시(辰時)에 마현 자택에서 서거함.

4월 1일 여유당 뒷동산에 안장됨.

▶1910년 (순종 4년)

-7월 18일 정2품 정헌대부 규장각 제학으로 증직되고 시호를 문도공으로 하사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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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과 부인 홍씨의 합장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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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가 "여유당"

 

 

 

다산생가 여유당

다산의 생가인 여유당(與猶堂)은 현재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마재(馬峴)마을에 있다. 당시는 광주군 초부방 마현리였는데 지금은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산75의 1번지로 변경되어 있다. 여유당은 지금은 팔당 호숫가의 외딴 집으로 남아 있지만 다산 당년에는 그윽한 강마을의 저택이었다. 이곳을 그 옛날에는 소내(苕川) 또는 두릉(杜陵)이라고 했고 다산의 5대조부터 여기에 자리를 잡았다.

유적지 입구에 들어서면 정면에 다산의 생가인 여유당이 고졸한 자태로 은근히 나그네를 유혹하지만 정작 발걸음을 재촉하게 되는 곳은 여유당의 오른편을 돌아 뒤편 동산의 다산묘소이다. 다산은 여기에서 세상을 떠났고 이 집 뒷산에 묻혔다. 모진 비바람에도 든든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소박한 護石의 보호아래 부인 풍산 홍씨와 함께 조용히 누워 있는 다산 선생은 여유당을 휘감고 도는 한강의 여유로운 흐름을 관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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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가 "여유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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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가 "여유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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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문화관 건물 모습

 

 

다산문화관 

다산기념관 바로 옆에는 지하 1층, 지상 1층의 다산문화관은 다산이 설계한 배다리(舟橋)를 이용해 정조가 수원에 있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顯隆園)를 참배하러 갈 때의 모습을 그린 능행도를 왼쪽으로 보며 문을 들어서면 원형모양의 1층 문화관의 가운데 기둥 정면엔 두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글이 적혀 있다. 자연을 벗 삼아 한가롭게 세월을 보내는 음풍농월(吟風弄月)의 사치스러운 시를 비판하고 실학적, 주체적인 시를 쓸 것을 아들들에게 부탁하는 서찰에서 다산의 시정신을 볼 수 있다.

기념관에는 크게 네 시기로 나뉜 다산의 생애와 <경세유표>를 비롯한 대표적인 저술들에 대한 설명이 적혀 있다. 한쪽 벽면에는 500여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을 분야별로 기록하여 놓았는데 보는 이들로 하여금 주눅이 들게 하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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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중기 모습 

 

 

 

거 중 기

1792년(정조16) 다산 정약용(丁若鏞)이 서양의 기술과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하여 창의적으로 만든 기구로 높이는 4.4m, 너비는 1.7m이다.

「기기도설」을 연구한 다산 정약용이 골차로 거중기를 만들어 수원성을 쌓는 사업을 지휘하면서 직접 만든 것으로, 이 기계를 써서 건설 경비를 4만냥이나 절약하였고, 거중기를 이용하여 노동자 두 사람이 약 10톤 또는 그 이상의 무거운 자재를 높은 곳으로 운반할 수 있었다.


원리는 비교적 간단하여 위에 네 개의 도르래를 연결하고 아래 도르래 밑으로 물건을 달아매고, 위 도르래의 양쪽으로 잡아당길 수 있는 끈을 연결하여 이 끈을 물레에 감아 동시에 물레를 돌림에 따라 연결된 끈을 통해 물건이 위로 들어 올려 지도록 한 것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으로 지정된 수원화성 축조에 사용하였으며 다산선생의 과학사상과 앞선 시대정신을 엿 볼 수 있다.

(전시모형은 1:1로 제작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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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기념관 모습

 

 

다산기념관 

기념관의 현관은 다산의 대표적 저서인 『목민심서』의 몇 구절이 적힌 동판으로 장식되어 있다. 내부에는 다산의 친필서한 · 간찰(簡札) · 산수도 등과 대표적 경세서인 『목민심서』『경세유표』『흠흠신서』사본이 전시되어 있으며 특히 실물 4분의 1과 2분의 1크기의 거중기와 녹로가 눈길을 끈다. 97년 유네스코 선정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화성(수원성)을 쌓을 때 역학적인 원리를 이용하여 무거운 물체를 들어올리는 데 사용되어 백성들의 노고를 덜어주었던 거중기와 도르레의 원리를 이용해서 만든 일종의 크레인인 녹로는 바로 실학정신에 바탕한 다산의 설계로 제작된 기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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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기념관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