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걷고싶은길/서울 둘레길

한양도성 순성(巡城)길을 다녀와서 (後記 1-3)

약초2 2021. 3. 28. 12:45

한양도성 순성(巡城)길을 다녀와서 (後記 1-3)

 

1. 답사 날짜

 

①창의문에서 흥인지문까지: 2021년 1월 5일

②흥인지문에서 숭례문까지: 2021년 2월 3일

③숭례문에서 창의문까지: 2021년 2월 17일

 

2. 답사 시간

 

①창의문에서 흥인지문까지 (2021년 1월 5일)

-새벽에 눈이 조금 왔으나 이후 맑고 깨끗함

-10:21 최규식 경무관 동상, 정종수 경사 흉상 있는 곳

-10:24 창의문

-10:34 1번 출입문

-10:56 청운대 안내소(3번 출입문)

-11:06 한양도성 만남(청운대쉼터)

-11:17 한양도성 곡장

-11:23 백악 곡성 앞(숙정문 방향으로 좌회전)

-11:39 숙정문

-11:51 말바위 안내소

-12:14 한양도성 우회길 시작점(데크 전망대)

-12:23 한양도성 성곽 다시 만나는 지점

-12:34 한양도성 암문

-12:46 한양도성 성곽 끝나는 지점

-12:50~13:30 점심식사

-13:45 혜화문

-14:38 흥인지문(동대문) 착. 답사종료

※점심시간 포함하여 4시간 17분 소요됨.

 

②흥인지문에서 숭례문까지: 2021년 2월 3일

-맑다가 다소 흐림

-12:49 흥인지문(동대문)

-12:57 청계천 오간수교(다리)

-13:08 동대문역사관 착 / -13:23 발

-13:25 동대문 DDP 착 / -13:38 발

-13:46 광희문

-14:50 한양도성 암문

-15:21 남산공원 입구(국립극장 앞)

-16:10 남산전망대(팔각 광장)

-16:14 남산 서울N타워

-16:27 목멱산 봉수대 터

-16:37 잠두봉 포토아일랜드 (북측지점)

-16:52 한양도성 유적전시관

-17:05 백범광장

-17:20 숭례문 착. 답사종료

※점심, 관람시간 포함하여 4시간 31분 소요됨.

 

③숭례문에서 창의문까지: 2021년 2월 17일

-매우 추운날씨이지만 시야 깨끗함

-13:36 숭례문

-14:06 배재어린이공원

-14:16 돈의문 터

-14:38 인왕산 구간 순성 안내 쉼터

-14:51 사직동 1차로 도로

-15:30 인왕산 정상

-16:10 정자 착. 답사종료

※휴식시간 포함하여 2시간 34분 소요됨.

★한양도성 전체 답사시간: 11시간 22분

 

3. 답사 후기

 

2007년 4월 22일 북악산(342.5m)을 처음 답사했었다. 그때는 노란색의 표찰을 목에 걸고 산행을 했었다. 그때 북악산 정상의 정상석에는 백악산(白岳山. 海拔 342m)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는 2009년 12월 12일에 두 번째, 2012년 9월 1일 세 번째 답사, 그해 12월 25일에 서울성곽을 답사했었다. 그래서 북악산과 서울성곽길은 그간 잊어버리고 있다가 2020년 11월부터 그동안 개방하지 않았던 북악산 성곽에서 북악스카이웨이 사이의 성곽 북측면과 군부대 철책을 제거해 청운대~곡장 구간의 성곽외측 탐방로를 개방했다는 뉴스를 접했지만 개방 구간이 짧고 결국은 한양도성과 연결이 되기 때문에 머뭇거렸는데 서울성곽길이라고 부르던 것을 언제부터인가 한양도성 순성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어 겨울철 한파(寒波)에 눈도 많이 내리고 코로나 시기에 지방 여행 가기도 부담스럽고 해서 한양도성 순성길을 답사하게 되었다.

 

본격적으로 답사에 앞서 한양도성 홈피(http://seoulcitywall.seoul.go.kr/main/index.do)를 살펴보니 「한양도성은 순성길을 따라 하루에 돌아볼 수 있지만, 내사산을 중심으로 한 백악·낙산·남산(목멱산)·인왕산 구간과 도성이 멸실된 흥인지문·숭례문 구간 등 6구간으로 나누어 걷기를 추천한다.」라고 적혀 있지만 6구간은 조금 지루할 것 같아 3구간(창의문→흥인지문 / 흥인지문→숭례문 / 숭례문→창의문)으로 나누어서 답사를 했다.

 

※ 북악산(北岳山) 한양도성에 대하여

북악산 한양도성은 2006년 4월 1일 1단계로 홍련사~숙정문~촛대바위(1.1km)의 구간을 부분 개방하고, 이후 2007년 4월 5일 와룡공원~숙정문~청운대~백악마루~창의문(4.3km)의 구간을 전면 개방하였다.

 

2019년 4월 5일부터는 국민이 편리하고 자유롭게 북악산 한양도성을 이용할 수 있도록 신분확인 절차를 생략하고 개방 시간을 확대하였다.

 

또한 2020년 11월부터 그동안 개방하지 않았던 북악산 성곽에서 북악스카이웨이 사이의 성곽 북측면과 군부대 철책을 제거해 청운대~곡장 구간의 성곽외측 탐방로를 개방하였다.

[출처: 북악산 한양도성 팸플릿]

 

▶ 창의문(彰義門)에서 흥인지문(興仁之門)까지 (2021년 1월 5일)

 

경복궁역 3번 출구에서 여행님을 만나 1020번 버스로 환승, 윤동주기념관 옆 및 창의문 아래에서 내렸다. 곧바로 창의문 앞에 도착했다.

 

처음(2007년 4월 22일) 이곳을 답사할 때는 최규식 경무관 동상(어둡고 칙칙한 느낌을 들었다.) 만 있었는데 오늘 와 보니 바로 옆에 정종수 경사 흉상이 새롭게 설치되었고, 최규식 경무관 동상도 산뜻하게 서 있었다.

 

※ 최규식 경무관, 정종수 경사에 대해서

 

‘김신조 사건 순직’ 정종수 순경 흉상 세웠다

2017년 6월 5일 기사

 

▲ 정종수 경사 흉상 및 순직비

 

이른바 ‘김신조 사건’으로 불리는 1968년 청와대 습격사건 때 북한 무장공비를 막다가 목숨을 잃은 경찰관의 추모 흉상이 50년 만에 세워졌다.

서울지방경찰청은 5일 오전 서울 청운동 자하문고개 현충시설에서 고 정종수 경사(당시 순경)의 흉상 제막식을 열었다. 흉상은 한국기초조형학회 학회장인 류경원 충북대 교수가 제작했다. 흉상 전면에는 공적 요지와 함께 국가 수호를 위한 경찰의 활약을 현대적인 이미지로 표현한 부조상이 새겨졌다. 서울경찰청과 서울시 재향경우회, 서울북부보훈지청이 공동으로 주관했다.

이날 제막식에는 정 경사의 장남 정창한(61)씨 등 3남2녀를 비롯한 유족 8명이 참석했다. 김정훈 서울경찰청장은 “국가와 국민을 위해 희생한 경찰관이 합당한 예우를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1935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난 정 경사는 종로경찰서 수사과에서 근무하던 68년 1월21일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침투한 북한 124부대원 31명을 막다가 숨졌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인정해 같은 해 2월 1계급 특진과 함께 화랑무공훈장을 추서했다. 그때 함께 순직한 최규식 종로경찰서장은 총경에서 경무관으로 추대되고 69년 청와대 인근에 동상도 세워졌으나 정 경사는 하위직이란 이유로 대상에서 누락됐다.

 

◉ 사건 개요 (1.21사태 또는 김신조 사건으로도 불리고 있음)

 

1968년 1월 21일 일요일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침투한 북한의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 124부대 무장공비 31명과 서울 세검정고개에서 교전하다가 당시 종로경찰서장이던 최규식 총경은 당일, 정종수 순경은 1월 29일 월요일 순직. 이 사건을 계기로 향토예비군을 창설. 무장공비 소탕 작전에서 우리 군 33명도 전사.

 

「게릴라전 특수훈련을 받은 31명은 1968년 1월 13일 북한군 정찰국장 김정태(金正泰)에게 청와대 습격에 관한 구체적인 작전 지시를 받고 18일 자정을 기해 휴전선 군사분계선을 돌파하였다.

 

서부 전선의 미군 담당 군사지역에 잠입하여 하룻밤을 숙영(宿營), 19일 밤 8시 30분경 임진강의 얼음판을 횡단, 당시 경기도 파주군 법원리의 삼봉산(三峰山)에서 2일째 숙영을 한 다음, 20일 앵무봉을 통과하여 비봉·승가사(僧伽寺)로 이어지는 산악길을 타고 이날 밤 10시 서울시내 세검동 파출소 관할 자하문 초소에 이르렀다.

 

자하문 초소에서 경찰관의 첫 검문을 받게 되자, 일당은 “방첩대원들이다.”, “신분증은 볼 필요가 없다.”, “우리 부대로 가자.” 등의 위협적인 언사를 서슴지 않으며 계속 행진하였다. 약 400여m를 더 행진했을 무렵 연락을 받고 출동한 경찰 병력과 첫 접전이 벌어졌다.

 

게릴라들이 먼저 자동소총을 쏘며 수류탄을 투척하였다. 현장을 지휘하던 종로경찰서장 최규식(崔圭植) 총경이 총탄에 맞아 병원으로 이송하였으나 전사하고, 경찰관 2명이 중상을 입었다.

 

이때부터 게릴라들은 현장을 지나가는 버스 안에 수류탄 1발을 투척, 승객에게 부상을 입히는가 하면 자동소총에 실탄과 수류탄을 몸에 지니고 뿔뿔이 흩어져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 서대문구 홍제동 민가에서는 한 시민이 게릴라와 격투를 벌이다가 총격으로 사망하는 등 이날 밤 민간인 5명이 살해되었다.

 

군경합동수색진은 일당 가운데 김신조(金新朝)를 발견, 생포하는 한편, 이들에 대한 소탕전에서 그날 밤 게릴라 5명을 사살한 데 이어, 경기도 일원에 걸쳐 군경합동수색전을 전개, 31일까지 28명을 사살하였다. 나머지 1명은 도주한 것으로 간주되어 작전은 종료되었다.

 

이제 창의문을 통과하려고 하는데 좌측으로 청계천 발원지라는 표석이 눈이 띄었다. 「이 곳에서 북동쪽 북악산 정상 쪽으로 약 150m 지점에 항상 물이 흘러나오고 있는 약수터가 있으므로 이를 청계천 발원지(發源地)로 정하였다」라고 표석에 적혀 있다.

 

곧바로 짧은 계단을 올라 창의문 앞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북악산을 가려면 우측의 나무계단으로 올라가야 하지만 글쓴이는 새롭게 개방한 곳으로 가기 위해 창의문을 통과했다.(10:24)

 

◉ 창의문(彰義門)

<보물 제1881호> 창의문은 인왕산과 백악이 만나는 지점에 있는 문이다. 사소문 (四小門)중 유일하게 조선시대 문루가 그대로 남아 있다. 이 문루는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던 것을 영조 17년(1741) 다시 세운 것이다. 영조 때 문루를 새로 지으면서 인조반정 때 반정군이 이 문으로 도성에 들어온 것을 기념하기 위해 공신들의 이름을 새긴 현판을 걸어놓았다. 이 현판은 지금도 그대로 걸려있다. 현재는 자하문(紫霞門)으로 더 많이 불리는데, 이 문 부근의 경치가 개경(開京)의 승경지(勝景地)였던 자하동과 비슷하여 붙은 별칭이다.

[출처: 한양도성 홈피]

 

 

▲ 보물1881호이자 한양도성의 북소문인 창의문 (일명 자하문)

 

창의문을 통과하여 새롭게 개방한 코스를 답사하기 위해 1번 출입구로 향했다. 중간 중간 마을길을 통과해야 해서 갈림길이 많았지만 푯말을 갈림길마다 설치해서 어렵지 않게 1번 출입구에 도착했다.(창의문에서 10분 걸렸다.)

 

철문을 통과하여 나무계단을 올라간다. 곧바로 나오는 이정표에는 창의문 450m, 한양도성 곡장 1100m 라고 적혀 있다.

나무계단이 끝나고 이어 야자수매트길이 나온다.

위치안내판(120-북악산-01)을 지나면서 다시 나무계단길이 나오는데 제법 길게 이어진다. 새벽에 눈이 와서 그런지 계단에 눈이 살짝 쌓여 있지만 미끄럽지는 않았다.

 

길게 이어지던 계단길이 끝나고 다시 야자수 매트길이 나오면서 예전의 흔적물이 하나 나온다. 경계병 초소이다. 초소 우측에는 「철벽경계」라고 써진 표지석도 세워져 있다. 탐방로에서 조금 내려가면 초소인데 초소에서 정면을 바라보니 또 하나의 흔적물 건물 1동이 보이는데 아직 철거를 안 한 상태였다.

 

나무계단(경사진 곳)과 야자수 매트길(평지길)이 계속 반복해서 나오고, 벤치 2개가 설치된 곳도 지나니 철문이 나오면서 2번 출입구(좌측으로 가면)로 갈 수 있는 삼거리가 나온다. 이곳에도 이정표(←창의문 950m, 한양도성 곡장 600m→)가 세워져 있다. 우측의 계단을 올라가니 초소가 나온다.(10:53)

 

1968년 1월 21일 청와대 기습 미수사건 이후 북악산 지역이 특정경비지구로 설정되면서 제1경비단에서 사용하던 경계초소인데 2006년 4월 1일에 북악산 탐방로가 부분개방(숙정문 권역) 되면서부터는 사용하지 않는 초소가 되었고, 이후 2020년에는 북악산이 확대 개방되면서 탐방로 상 일부 철책과 초소들은 재단장을 통해 기억의 공간으로 남겨 두었다(출처: 현지 안내판) 한다.

 

구(舊) 초소에서 잠깐 내려가니 좌측으로 2차로의 북악스카이웨이길이 나오고 주차장이 나온다. 그리고는 청운대안내소가 나온다. 이곳이 3번 출입문이다.(10:56)

 

청운대안내소에서 출입푯말을 받고 게이트를 통과했다. 예전처럼 출입명부 적는 것과 신분 확인 절차도 없어졌다.

 

게이트를 통과하니 곧바로 옛 군견 훈련장 터가 나온다. 종로구에서 설치한 안내판에는 「제1경비단은 육군 수도방위사령부 직할 단급 부대로 청와대 외곽, 북악산, 인왕산 경비를 담당한다. 지금의 터는 과거 군견 훈련장으로 이용하였고 1단계부터 7단계까지 각기 다른 훈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2020년 철거 후 일부를 남겨 쉼터로 조성하여 시민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개방하였다.」라고 적혀 있다.

 

쉼터로 변한 옛 군견 훈련장 터를 지나니 나무계단이 나온다. 새롭게 설치한 나무계단을 자세히 보니 나무계단 끝 부분에 모래 칸 2줄이 섞여 있는데 미끄럼방지 역할을 하고 있다. 이내 한양도성에 도착했다.(11:06) 지도에는 이곳을 청운대쉼터로 적혀 있다.

 

청운대쉼터에서 곡장까지 한양도성 성곽 바깥쪽 역시 2020년 11월에 개방한 구간이다.

이곳에서 우측으로 가면 청운대, 북악산 정상을 거쳐 창의문으로 가는 길이다. 글쓴이는 이미 세 차례나 다녀왔기 때문에 미련 없이 좌측의 곡장 방향으로 진행했다.

 

이제부터는 제대로 된 한양도성 순성길을 답사한다.

 

조선시대에도 순성(巡城)놀이라는 것이 있었다. 새벽에 도시락을 싸들고 5만9500척(尺)의 전 구간을 돌아 저녁에 귀가했다. 도성의 안팎을 조망하는 것은 세사번뇌에 찌든 심신을 씻고 호연지기까지 길러주는 청량제의 구실을 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

 

좌측에 철책을 끼고 우측의 한양도성을 바라보며 야자수매트길을 진행한다.

얼마 안 가 암문(暗門)이 나오고, 암문 좌측에는 서울 한양도성 안내판과 축성시기에 따른 형태라고 적힌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 한양도성 시대별 성벽형태

 

▶ 1396년 태조

태조 5년(1396)1월과 8월, 두 차례의 공사를 통해 산지는 석성, 평지는 토성으로 쌓았다. 성돌은 자연석을 거칠게 다듬어 사용하였다.

 

▶ 1422년 세종

1422년 1월 도성을 재정비하였다.

이때 평지의 토성을 석성으로 고쳐 쌓았다. 성돌은 옥수수알 모양으로 다듬어 사용하였다.

 

▶ 1704년 숙종

무너진 구간을 여러 차례에 걸쳐서 새로 쌓았다. 성돌의 크기를 가로 ․ 세로 40~45cm 내외의 방형으로 규격화하였다.

 

▶ 1800년 순조

가로 ․ 세로 60cm 가량의 정방형 돌을 정교하게 다듬어 쌓아올렸다. 각자성석은 여장에 있다. 이로써 성벽은 이전보다 더 견고해졌다.

[출처: 북악산 한양도성 팸플릿]

 

「한양도성 시대별 성벽 형태」 안내판을 보고 나서야 알게 되었지만 한양도성 성벽을 보고 있노라면 시대별로 혼합되어 있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이제 나란히 가던 철책은 없어지고 새롭게 설치한 나무계단이 길게 이어진다. 경사가 제법 가파른데 뒤돌아보니 북악산으로 이어지는 산성이 너무 멋졌다.

이어 성벽으로 올라갈 수 있는 시설물을 올라간다.

조망이 멋진 이곳에서 되돌아보니 역시 북악산으로 이어지는 산성이 멋지고 그 뒤에 병풍처럼 펼쳐진 인왕산도 멋졌다.

 

바로 곡장에 도착했다.(11:17)

곡장(曲墻)은 성곽의 시설 중 하나로, 방어적으로 중요한 지점에 성곽 일부분을 둥글게 돌출시킨 것을 말한다. 치성과는 비슷하지만 다르다.

한양도성에는 북악산과 인왕산 두 군데가 있는데 인왕산 곡성은 군부대가 자리 잡고 있어서 일반인은 갈 수가 없다.

 

한양도성 자료를 수집하다 보니 어떤 곳은 곡성이라고 쓰고, 어떤 곳은 곡장이라고 쓰기도 해서 혼란스러웠다. 물론 같은 말이긴 하지만 통일을 했으면 좋겠다.

 

▲ 한양도성 북악산 곡장 모습

 

곡장(곡성)에서 바라보는 조망은 그야말로 환상 그 자체였다.

족두리봉(수리봉)~향로봉~비봉~승가봉~문수봉으로 이어지는 북한산 비봉능선과 보현봉이 우뚝하고 북악산을 향해 용트림하며 올라가는 산성, 그리고 병풍처럼 막아선 인왕산, 남산의 N타워 등이 너무 잘 보였다.

 

그런데 곡장의 넓은 터 한쪽에 「서울로 트레킹 길」 안내판이 세워져 있는데 「서울로 트레킹 길은 서울로7017을 기점으로 북악산으로 가는 녹색역사길과 서울숲으로 가는 녹색보행로길로 구성되어 있으며, 걷기를 통해 서울의 역사와 자연을 동시에 체험할 수 있는 20km 코스의 보행길입니다.」라고 적혀 있다.

 

곡장을 뒤로 하고 내려가면 삼거리가 나온다. 우측은 북악산, 좌측은 숙정문으로 가는 길이다.

 

숙정문으로 향한다.

좌측은 한양도성 성곽, 우측은 늘 푸른 소나무의 사열을 받으며 완만하게 내려간다.

얼마간 내려가니 2016년 7월 16일 외측 성벽이 붕괴되어 2018년 7월에 보수공사를 시작하여 성벽은 숙종시기의 형태로 여장은 인접여장 형태로 2019년 10월 보수를 완료했다는 안내판이 나온다.

 

그리고는 촛대바위가 나온다.

촛대를 닮았다고 해서 이름 붙은 촛대바위는 높이가 약 13m이다. 아래에서 봐야 높이를 실감할 수 있는데 바위꼭대기의 암반에 서 있으니 실감이 가질 않았다. 촛대바위 옆에는 전망데크도 있다.

 

촛대바위전망대에서 숙정문으로 내려가는 길은 소나무가 우거진 오솔길이다(소나무 보호 군락지). 백악산은 배수가 잘 되는 바위산인 데다 척박한 토질이어서 활엽수의 생장조건에는 맞지 않아 소나무가 이 산의 주인공이 됐다.

 

소나무 숲을 내려가니 숙정문(肅靖門)이 나온다. 그런데 보수중이다. 다행히 숙정문을 보수하는 것이 아니고 주변시설 및 암문 보수정비 공사였다. 그런데 안내판(공사내용: 한양도성 보수정비공사[숙정문 및 이화마을 암문 구간] / 공사기간: 2020.08.31~2020.12.28)의 공사기간 날짜를 확인하니 이미 공사가 끝난 것이다. 아직까지 공사 안내판과 공사 가림막은 철거가 안 된 상태였다.

 

◉ 숙정문(肅靖門)

숙정문은 한양도성의 북대문이다. 처음에는 숙청문(肅淸門)이었으나 숙정문(肅靖門)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현존 도성문 중 좌 ․ 우 양쪽으로 성벽이 연결된 것은 이 문이 유일하다. 1976년에 문루를 새로 지었다. 숙정문 안내소에서 삼청각으로 갈 수도 있고, 일명 ‘김신조 루트’라고 불리는 등산로를 따라 북악스카이웨이의 팔각정과 하늘마루로 갈 수도 있다.

[출처: 한양도성 홈피]

 

 

▲ 한양도성의 북대문인 숙정문의 모습

 

『숙정문은 다른 성문처럼 태조 5년(1396)에 세워졌다. 당시의 성문 이름은 숙청문(肅淸門)이었다. 그 이름이 언제 바뀌었는지 알 수 없으나 중종4년(1509) 6월3일 기사에 숙정문이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했다.

속칭으로 정북문 또는 북대문이라고 불리기도 했지만 그렇게 불리기보다 실제로 북정문(北靖門) 또는 북청문(北靑文)으로 더 많이 불렸다.

 

숙정문은 도성 안 삼청동계곡에서 도성 밖 성북동으로 나가는 북쪽의 대문이다. 이 문을 나가면 한양에서 원산까지 가는 경원가도의 지름길에 이른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일반통로로는 사용되지 않았다.

 

숙정문 건립 후 18년째인 태종 13년 풍수지리가 최양선이 백악산의 양팔에 해당하는 창의문과 숙청문을 닫아서 지맥(地脈)을 보존해야 한다고 상소를 올렸다. 결국 숙정문은 폐쇄됐고 창의문과 숙정문 가는 길에 소나무를 심은 탓에 일반인의 통행이 어려워졌다.

 

이곳을 폐쇄한 또 다른 이유는 이 문이 북문으로서 ‘음’을 상징하기 때문에 이 문을 열어두면 부녀자의 풍기를 문란하게 하는 상중하간지풍(桑中河間之風)이라는 바람이 불어온다는 속설 때문이었다. 이 얘기는 조선 현종 때 실학자인 오주 이규경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나온다. 상중하간지풍은 “고대 중국 주나라 선혜왕 때 귀족들이 매우 음란해 뽕나무밭에서 남녀가 밀회했다”는 ‘시경’의 문구에서 유래한 것으로 부녀자의 풍기문란행위를 뜻한다.

 

실제로 숙정문 밖 성북동 일원에는 선잠단(先蠶壇·사적 제 83호)이 있었고 양잠을 위한 뽕나무밭이 있었다. 조선시대에도 사대부집 부녀자들이 숙정문 밖에 있는 뽕나무밭에서 은밀한 애정을 즐겼다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그리고 정월대보름 전에 부녀자가 숙정문을 세 번 다녀오면 그 해에 일어날 재난의 운수가 사라진다고 해서 도성 안 많은 부녀자들이 숙정문을 찾았다는 얘기도 있다. 그와 함께 숙정문을 찾는 부녀자를 희롱하러 오는 남정네들이 몰려들어 풍기가 문란해지자 성문을 닫았다고도 한다.

 

숙정문을 열 때도 있었다. 여름철 한발이 닥치면 숙정문은 열고 숭례문을 닫고 기우제를 지냈다. 이런 행사는 북쪽은 ‘음’에 해당하며 남쪽은 ‘양’에 해당한다는 음양오행설에 근거한다. 가뭄에는 북쪽의 숙정문을 열어 음기를 도성 안으로 들어오게 하고 남쪽의 숭례문을 닫아 양기가 도성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가뭄에 남문을 닫고 북문을 여는 이유는 남문은 목화토금수(木火土金水)에서 화(火)에 해당하고 북문은 수(水)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남문을 닫아 화기를 막고 북문으로 물 기운이 도성 안으로 들어와 가득 차게 해야 비가 온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기우제를 지낼 때는 시장을 옮기고 인정과 파루(罷漏)를 치지 않았다.』

[출처: 인터넷]

 

 

숙정문을 통과하면 200m 거리에 숙정문 안내소가 있다. 와룡공원(1km) 방향으로 간다. 숙정문을 지나도 우측의 도성 안에는 소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서 있다.

이내 말바위 안내소에 도착하여 청운대 안내소에서 받았던 표찰을 반납하고 말바위 안내소를 통과했다.(11:51)

 

말바위 안내소에서 290m를 가면 다소 복잡한 나무계단과 전망데크가 나온다. 전망데크에는 「한양도성 순성길(백악산구간) 전망안내도」가 설치되어 있다.

삼청공원 방향으로 좀 더 내려가면 말바위가 나오는데 유래가 적힌 안내판과 조망대가 있다.

 

▲ 말바위

 

삼청공원 말바위 유래

조선시대에 말을 이용한 문무백관이 시를 읊고 녹음을 만끽하며 가장 많이 쉬던 자리라 하여 말(馬)바위라 불리기도 하고, 백악(북악)의 산줄기에서 동쪽으로 좌청룡을 이루며 내려오다가 끝에 있는 바위라 하여 말(末)바위라는 설도 있다. 예전에는 바위에 벼락이 많이 친다고 해서 벼락바위라고도 불리기도 했다.

[출처: 현지 안내판]

 

이곳에서 계속 내려가면 삼청공원으로 이어지고 한양도성 성곽하고는 멀리 떨어지기 때문에 되짚어 계단이 있는 조망데크로 다시 올라갔다.

 

조망데크에서 계단을 따라 와룡공원을 향해 내려간다.

계단을 다 내려가니 짧은 구간 복원한 취병(조선시대의 독특한 조경기법으로 식물을 소재로 만든 친환경 울타리로 궁궐의 핵심지역과 일부 상류층의 정원에만 사용되었고, 공간을 깊고 아늑하게 만들어 생기가 나게 하는 아름다움이 있다. 일제강점기 이후 실물이 사라졌으나 창덕궁 후원에 복원된 바 있다.[출처: 현지 안내판])이 나온다.

 

그리곤 이내 평지에 떨어지면서 녹산약수터로 갈 수 있는 삼거리가 나온다.

와룡공원(542m) 방향인 우측으로 간다.

 

메마른 개천의 짧은 목교를 건너고, 나무계단을 올라가면 잠시 헤어졌던 한양도성 성곽을 다시 만났다.

 

야자수매트가 깔려 있는 편안한 길을 걸으며 한양도성의 높은 성곽을 형성하고 있는 여러 모양의 성돌을 재미있게 보면서 진행했다.

 

「성북동 성곽길 조망지점[성북동 성곽길 서울밤풍경]」이라고 써진 안내판(바닥에는 동판도 박혀 있다.)을 지난다. 야간이 아니라서 아쉬웠다.

다시 발걸음을 재촉한다.

잘 꾸며진 데크길을 한동안 내려간다. 이 지역은 성곽을 비추는 조명시설이 바닥에 촘촘히 깔려 있다.

 

얼마간 내려가니 암문이 나온다.

암문을 통해 한양도성 내부로 들어가면 와룡공원이다.

제법 넓은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내려가니 이곳에도 서울밤풍경(와룡공원 성곽길) 동판과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공원답게 곳곳에 등받이 벤치가 많이 설치되어 있다.

이내 한양도성 성곽이 끊어지면서 자취를 감추고 성북동의 넓은 차도가 나온다. 입구에 서울 한양도성, 서울 한양도성 순성길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12:46)

 

성북동에 도착해서 점심때도 됐고 해서 점심을 먹고(12:50~13:30) 혜화문을 향해 출발했다.

 

좁은 골목길을 지나간다. 산성의 흔적은 찾을 수가 없어서 고개를 갸우뚱거려 본다. 역시나 전봇대 위에 헤화문 푯말이 보인다.

얼마나 갔을까 정면으로 보이는 주택의 한쪽 면이 수선전도(首善全圖. 고산자 김정호 作)로 채워져 있다. 잠시 눈이 호강을 했다.

이어 경신중 ․ 고 앞에는 「서울 한양도성 순성길」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지나온 와룡공원은 400m, 앞으로 가야 할 혜화문은 450m라고 적혀 있다.

 

얼마가 갔을까 갑자기 한양도성 성곽이 나타났다. 잠시 성곽 따라 내려가니 삼거리에서 성곽은 끝이 난다. 우측으로 가면 한양도성 혜화동 전시안내센터인데 코로나 시국이라 문이 닫혀 있으리라 지레 짐작을 하고는 통과했다.

 

한양도성 혜화동 전시안내센터는 1940년 지어진 유서 깊은 목조건물로 예전에는 서울시장 공관이었다.

대법원장 공관으로 사용되다 1980년 18대 박영수 시장 때부터 2013년 35대 박원순 시장 때까지 역대 서울시장이 살았다. 박 시장은 옛 시장공관을 시민들에게 돌려주기로 하고 2년 여간 리모델링해 한양도성 안내센터로 만들었다.

 

■ 한양도성 혜화동 전시·안내센터에 대하여

 

한양도성 혜화동 전시·안내센터 (옛 서울시장공관)

 

서울시장 공관은 서울 시내에 얼마 남지 않은 1940년대 목조 건축물이다.

1959년부터 20년간 대법원장 공관으로 4‧19 혁명재판의 판결문이 작성되는 등 대한민국 사법부의 중요한 역사현장이다. 또한, 1981년부터 2013년까지 33년간 서울시장 공관으로 사용되면서, 시민들과 열띤 토론이 이루어지는 등 24시간 잠들지 않는 행정이 이루어진 서울시 역사의 일부이기도 하다.

 

■ 전시관 구성

 

전시관 1층(1전시실,2전시실,카페)

전시관 2층(3전시실,4전시실,5전시실)

 

1.제1 전시실- 한양도성과 혜화문

 

백악산, 낙산, 남산, 인왕산의 지형을 따라 아름답게 굽이치는 한양도성은 600여 년의 세월 동안 서울 시민의 삶과 맞닿아 있었다.

한양도성 주변을 돌며 서울의 아름다운 경치를 즐기는 순성놀이의 전통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고, 도성과 주변 마을에서는 저마다 다른 풍경과 이야기를 만들어왔다.

도성의 동북쪽에 위치한 혜화문은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를 거쳐 현재까지 훼손, 복원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주요전시물>

 

한양도성의 축성, 도성삼군문분계지도, 도성도, 동소문도, 순성놀이기록, 지도로 보는 한양도성, 모형지도, 혜화문의 훼철과 복원

 

2.제2전시실-시장공관과 한양도성

 

한양은 내사산의 지세에 따라 도시형태가 결정되었다. 한양도성은 평지,산지, 구릉 등 다양한 지형에 따라 자연과 조화되어 축성되었으며 도성 안에서 바라볼 때 내사산 너머 외사산과 함께 역사도시경관이 전개된다.

옛 시장공관을 둘러싸고 있는 한양도성 밖으로 백악산이 감싸 안은 성북동이 보이고, 풍경의 왼편, 백악산의 능선 너머에 북한산이 보인다.

 

<주요전시물>

 

성곽의 구성, 성돌에 새겨진 글씨 각자성석, 백악산이 감싸안은 성북동, 혜화동 27-1번지

 

3.제3전시실-시장공관과 역대 시장

 

혜화동 옛 시장공관은 다양한 서울시의 정책이 논의되는 일터이자, 서울시장이 하루를 마치고 휴식을 취하는 집이었다.

공관은 국내외의 손님이 초대되는 행사장이었고, 동네의 일원으로서 반상회를 개최하거나 새해에 떡국을 나누는 장소이기도 했다.

또한 텃밭을 가꾸고 평상에 누워 한숨을 돌릴 수 있는 일상의 공간이었다.

1981년 박영수 시장부터 2013년까지 역대 서울시장이 거주했으며 이곳에서 논의된 다양한 정책들은 서울시의 역사이자 우리나라의 현대사가 되었다.

 

<주요전시물>

 

역대 서울시장 인터뷰 영상, 기증품, 시정관련 신문기사

 

4.제4전시실- 혜화동 27-1번지의 역사

 

1941년 일제강점기에 지어져 2016년 <한양도성 혜화동 전시안내센터>로 자리매김하기까지 이곳 혜화동 27-1번지는 우리나라 근대사의 중요한 사건들과 함께 했다. 원래 개인의 주택이었던 이 건물은 해방 이후 대법원장 공관을 거쳐 서울시장 공관으로 사용되었다.

한양도성의 성벽을 담장으로 사용하고 있어 여러 차례 철거 논란이 있었으나,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보존하기로 결정되었고, 한양도성 순성길의 쉼터이자 시민들을 위한 공간으로 재탄생하였다.

 

<주요전시물>

 

시장공관 건축 연혁, 시장 기증도서 및 도성관련 도서, 전시안내센터 모형, 혜화동 주변 예술인 작품 등

 

5. 제5전시실

 

대한뉴스로 본 서울시장 공관의 문화행사 소개

한성판윤~서울시장연표

 

■ 관람안내

센터운영시간 : 09:00 ~ 18:00

전시관 관람 : 09:30 ~ 17:30

휴관일 : 매주 월요일, 1월1일, 설날, 추석, 기념행사 시(사전공지)

관람료 : 무료

해설예약 : 서울시 공공예약시스템(https://yeyak.seoul.go.kr), 현장방문 수시접수

정기해설 : 10:00, 14:00, 15:30

문 의 : 02-766-8520~1

카페운영 : 개방시간 내 이용

※ 음식물 반입 금지, 반려동물 입장 금지, 전지역 금연

 

■ 오시는길

주 소 : 서울시 종로구 창경궁로 35길 63(혜화동 27-1)

교 통 :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 5번 출구

※ 주차 공간이 없으니 대중교통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출처: 한양도성 홈피(http://seoulcitywall.seoul.go.kr/main/index.do)에 들어가서 좌측 황색 사각 내부 2번째에 있는 한양도성 혜화동 전시안내센터 클릭]

 

끊어진 성벽에서 정면으로 혜화문이 보인다.

길을 건너 혜화문 입구의 성벽에 설치한 철문을 통해 계단을 올라가면 혜화문 상단부이다. 내부로 들어갈 수 없어서 계단을 통해 내려왔다.

성북동에서 15분 걸렸다.

 

▲ 한양도성 동소문인 혜화문의 모습

 

◉ 혜화문(惠化門)

한양도성의 북동쪽에 있는 문이다. 창건 당시에는 홍화문이었으나 창경궁의 정문 이름을 홍화문으로 지음에 따라 중종 6년(1511) 혜화문으로 개칭하였다. 문루가 없던 것을 영조 때에 지어 올렸다. 문루는 1928년에, 홍예는 1938년에 헐렸는데 1994년 본래 자리보다 북쪽에 새로 지었다.

[출처: 한양도성 홈피]

 

원래 혜화문까지만 답사하려 했는데 시간(13:45)이 아직 많이 남아 있고 낙산구간은 걷기 편한 구간이라서 동대문(흥인지문)까지 가기로 했다.

 

창경궁로의 8차로 도로를 횡단보도를 통해 낙산 방향으로 넘어간다. 8차로 도로 지하로는 서울지하철 4호선이 지나가고 지상은 성북구와 종로구의 경계이다.

 

횡단보도를 건너 좌측으로 조금 가면 낙산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나온다. 이제 백악구간에서 낙산구간으로 이동한다.

 

‘낙타의 등’처럼 생긴 낙산

 

혜화문에서 낙산을 지나 흥인지문까지 이어지는 구간이다. 낙산(121m)은 서울의 좌청룡(左靑龍)에 해당하는 산으로 내사산 중 가장 낮다. 낙타 등처럼 생겨 낙타산, 타락산이라고 했다는 설이 있다. 이 구간은 경사가 완만하여 산책하듯 걷기에 좋다.

 

조금 진행하니 삼선동 369성곽마을 이야기 안내판이 나온다. 2013년 1월에 이곳을 답사할 때는 없었던 안내판이었다.

 

「삼선 재개발 6구역」의 첫소리를 따서 3 ․ 6 ․ 9마을이라 부르게 되었고, 마을의 정체성과 문화를 바탕으로 주민이 화합하여,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언덕마을이라는 세 가지 뜻으로 『三育丘(삼육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출처: 현지 안내판)

 

낙산공원 동남쪽 성벽을 끼고 있는 장수마을(369마을)은 한국전쟁 전후에 형성된 판자촌에서 기원한다. 60세 이상 노인 거주인구가 많아 장수마을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마을 재생사업으로 주민들이 직접 집을 단장하고 골목길을 정비해 산뜻하고 깔끔한 모습으로 변했다.

 

도성을 따라 걷는 길은 대부분 성 안쪽에 조성되어 있어서 주로 어깨 높이 정도의 여장만 보인다. 그러나 낙산 구간은 전 구간이 성 바깥에서 걸을 수 있게 조성되어 있다.(물론, 암문을 통해 성 안쪽으로 들어갈 수도 있다). 특히 가톨릭대학교를 따라 이어진 성벽길을 걸으면 한양도성의 웅장함과 견고함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또한 세종 · 숙종 · 순조 연간의 축성 모습을 비교해 볼 수 있다.

 

장수마을에서 얼마가지 않아 삼군부 총무당(서울시 유형문화재 제37호) 안내판이 나온다. 거리가 170m, 왕복 340m라 포기했다.

 

◉ 삼군부 총무당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7호> 총무당은 조선의 군무를 총괄하던 삼군부 청사의 중심이 되는 본전으로 원래는 광화문 남쪽 현 정부종합청사 자리에 있던 것을 1930년대에 지금의 위치로 옮긴 것이다. 이 건물은 조선 고종 5년(1868)에 건축된 것으로 양옆의 덕의당, 청헌당이 있었으나 이곳에 총무당만 옮겼다. 정면 7칸, 측면 4칸의 2고주 7량 합각지붕이다. 조선시대 관아건물로서 보존된 희귀한 문화재이다.

[출처: 한양도성 홈피]

 

조금 더 가면 나오는 암문을 통해 도성 안으로 들어가니 낙산공원 놀이광장이 나온다. 낙산공원은 「서울의 몽마르뜨 언덕」이라고 불리며 이곳에서 바라보는 노을과 야경이 아름답다.

 

조금 더 내려가니 이화마을이 나온다. 이화마을은 예전에 벽화를 보려고 일부러 찾기도 했던 곳이라 익숙한 곳이다. 그래서 이화마을로 내려가지 않고 성벽 따라 내려갔다.

 

이화마을은 낙산구간 성벽 바로 안쪽에 있어 도성 안에 형성된 옛 마을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 2006년부터 정부 지원 하에 예술가들이 건물 외벽에 그림을 그리고 빈터에 조형물을 설치하면서 마을의 이미지가 밝고 화사하게 바뀌었다.

 

▲ 낙산 이화마을에서 동대문으로 내려가는 길의 모습

 

낙산공원에서 흥인지문 방향으로 내려오면 옛 동대문교회 터에 한양도성박물관이 있다.

 

■ 박물관 소개

 

2014년 7월 31일 개관한 한양도성박물관은 2016년 9월 6일 새롭게 단장하여 재개관 하였습니다.

 

1396년 축조된 한양도성은 600여 년 동안 서울을 지켜온 수도의 성곽이었습니다.

 

지형과 한 몸이 되어 축조된 한양도성은 근대화 과정에서 일부 훼철되기도 하였지만, 오늘날까지 그 원형이 잘 남아 있어 도시와 공존하는 문화유산입니다.

 

동대문성곽공원에 위치한 한양도성박물관은 조선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양도성의 역사와 문화를 담은 박물관으로 상설전시실, 기획전시실, 도성정보센터와 학습실을 갖춘 문화공간입니다. 한양도성박물관에서 600년 한양도성의 역사 와 문화유산으로서의 미래가치를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출처: 한양도성 홈피]

 

한양도성박물관 역시 지레 짐작(코로나로 문이 닫혀 있을 거라는….)을 하고 동대문(흥인지문)으로 내려갔다.

 

흥인지문공원 글짜 간판, 한양도성의 각자성석 안내판, 종로 건강산책로 안내판 등이 세워져 있다. 성벽은 흥인지문과 단절된 상태로 이곳까지 잠시 자취를 감춘다.

 

이로써 창의문부터 흥인지문까지의 한양도성 첫 구간을 마쳤다. 점심시간 포함하여 4시간 17분 걸렸다.

 

◉ 공사실명제와 각자성석

축성과 관련한 글을 새겨 넣은 돌을 각자성석(刻字城石)이라 한다. 한양도성 전체 구간 중 동대문성곽공원 옆에 가장 많다. 성곽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각자성석들을 이곳에 모아놓았기 때문이다. 태조 · 세종 때의 각자성석에는 구간명과 구간별 축성 담당 군현(郡縣)명이, 조선 중기 이후의 각자성석에는 감독관과 책임기술자의 이름, 날짜 등이 명기되어 있다. 오른쪽 사진의 각자성석들은 낙산 구간이 끝나는 부분의 도성 바깥에 위치해 있다.

 

◉ 한양도성박물관

이화여자대학교 부속 동대문병원 일부를 철거하고 세운 서울디자인지원센터 1~3층에는 한양도성박물관이 있다. 방문객들에게 한양도성의 역사와 가치를 알려주며 순성 정보를 제공한다.

 

◉ 흥인지문(興仁之門)

<보물 제1호> 한양도성의 동대문이다. 현재의 흥인지문은 고종 6년(1869)에 다시 지은 것이다. 조선 후기 건축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어 보물 제1호로 지정되었다. 서울의 지세는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기 때문에 군사적으로는 동대문이 가장 취약하였다. 동대문 바깥쪽으로 옹성을 하나 더 쌓은 것은 이 때문이다. 1907년 좌우 성벽이 헐려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

 

■ 동대문(흥인지문, 興仁之門)

1396년(태조 5년) 건립된 한양도성 4대 문중 하나로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2층 건물이며, 도성의 8개 성문 중 유일하게 반달 모양의 옹성(壅城)으로 둘러져 있다.

 

■ 한양도성

동대문성곽공원에서 낙산공원까지 이어지는 성벽은 조선시대의 성 쌓는 기술의 변화 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또한 나라를 지키려는 조상들의 호국정신을 느낄 수 있다.

[출처: 한양도성 홈피]

 

4. 서울 한양도성 [사적 제10호]에 대하여

 

한양도성은 조선왕조 도읍지인 한성부의 도심의 경계를 표시하고 그 권위를 드러내며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방어를 위해 자연 지세를 따라 축조된 성이다.

 

1392년 개경 수창궁(壽昌宮)에서 조선왕조를 개국한 태조는 한양으로 옮긴 다음 종묘(宗廟)와 사직(社稷), 경복궁을 지은 후, 태조 5년(1396) 음력 1월부터 2월까지 49일간, 이어서 8월부터 9월까지 49일간, 모두 98일 동안에 전국에서 197,400여명의 백성을 동원하여 백악(北岳山)·낙타(駱山)·목멱(南山)·인왕(仁王山)의 내사산(內四山) 능선을 따라서 평지는 토성(土城)으로, 산지(山地)는 석성(石城)으로 축성한 이후 여러 차례 개축하였다. 평균 높이 약 5~8m, 전체 길이 약 18.6km에 이르는 한양도성은 현존하는 전 세계의 도성 중 가장 오랫동안(1396~1910, 514년) 도성 기능을 수행하였다.

 

전체 공사구간(총 59,500척)을 600척씩 97구간으로 나눠 각 구간을 천자문(千字文) 순서에 따라 이름붙인 뒤 군현(郡縣)별로 할당하였고, 성을 쌓을 때는 일부 성 돌에 공사에 관한 기록을 남겨 책임 소재를 밝혔다.

 

한양도성 성곽에는 4대문(四大門)과 4소문(四小門)을 두었다.

동쪽 흥인지문(興仁之門), 서쪽 돈의문(敦義門), 남쪽 숭례문(崇禮門), 북쪽 숙정문(肅靖門)의 4대문과 북동쪽 혜화문(惠化門), 남동쪽 광희문(光熙門), 남서쪽 소의문(昭義門), 북서쪽 창의문(彰義門)의 사소문을 만들어 성안과 밖을 연결하였다.

이중 돈의문과 소의문은 멸실되었고, 숙정문 ․ 광희문 ․ 혜화문은 복원되었다. 전체구간의 약 73.6%(13.7km) 성벽과 6개의 성문, 1개의 수문이 보존되어 있다. 또한 도성 밖으로 물길을 잇기 위해 흥인지문 남쪽에 오간수문(五間水門. 내사산의 물길이 청계천에 모여 동쪽으로 나가기 위해 만듦)과 이간수문(二間水門. 목멱산에 흘러내린 물길이 나가기 위해 만듦)을 두었다.

 

▲ 한양도성 지도 (출처: 한양도성 홈피)

 

한양도성은 순성길을 따라 하루에 돌아볼 수 있지만, 내사산을 중심으로 한 백악·낙산·남산(목멱산)·인왕산 구간과 도성이 멸실된 흥인지문·숭례문 구간 등 6구간으로 나누어 걷기를 추천한다.

[출처: 서울시 서울한양도성 홈피 http://seoulcitywall.seoul.go.kr/main/index.do / 북악산 한양도성 팸플릿]

 

 

코스

구간

거리

소요시간

난이도

백악 구간

창의문 ~ 혜화문

4.7km

약 3시간

★★★★★

낙산 구간

혜화문 ~ 흥인지문

2.1km

약 1시간

★★

흥인지문 구간

흥인지문 ~ 장충체육관

1.8km

약 1시간

남산(목멱산) 구간

장충체육관 ~ 백범광장

4.2km

약 3시간

★★★

숭례문 구간

백범광장 ~ 돈의문 터

1.8km

약 1시간

인왕산 구간

돈의문 터 ~ 창의문

4.0km

약 2시간 30분

★★★★★

합계

 

18.6km

 

 

 

[출처: 서울시 서울한양도성 홈피 http://seoulcitywall.seoul.go.kr/main/index.do ]

 

 

5. 참고자료

 

(서울=연합뉴스) 박초롱 기자 = "도성의 둘레는 40리나 되는데, 성을 한 바퀴 돌아서 도성 안팎의 풍경을 구경하는 것은 멋진 놀이다."

 

조선의 정조 때 실학자 유득공(1748∼1807)은 한양의 세시풍속을 소개한 저서 '경도잡지'에서 '순성(巡城)'을 이렇게 표현했다.

 

지방에서 과거시험을 치러 상경한 선비들이 한양을 빙 둘러싼 도성을 돌며 합격을 기원했던 풍습은 한양 사람들에게 전해져 '순성놀이'가 됐다. 둘씩 짝지어 성곽을 따라 걸으며 도성 안팎의 경치를 감상하고 봄가을로 꽃과 단풍을 즐겼다.

 

새벽에 출발하면 하루가 꼬박 걸리고, 산길이 험해 중간에 지쳐 돌아오는 경우도 많았지만, 조선 시대 한양 사람들은 순성하는 날을 무척 기다렸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한양도성이 훼손되며 순성놀이는 점차 서울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졌다. 김신조 등 북한 특수부대원 31명이 청와대 기습을 위해 침투한 1968년 1·21사태 이후엔 핵심구간인 북악산 숙정문∼창의문의 출입이 금지되면서 오랜 기간 순성 자체가 불가능했다.

 

이런 순성놀이가 되살아나고 있다.

 

끊겼던 성곽이 서서히 복원되고, 출입이 막혔던 구간이 뚫리며 한양도성은 다시 서울사람들이 사시사철 찾아 자연을 즐기는 곳이 되고 있다.

 

서울 단풍이 절정에 이르는 11월엔 성곽 길을 따라 물든 가을빛을 즐기러 한양도성을 찾는 이들이 특히 많다.

 

◇ 내사산 능선 타고 흘러내리는 '서울의 얼굴'

 

서울은 동서남북으로 낙산(125m), 인왕산(338m), 남산(265m), 북악산(342m)에 둘러싸인 분지에 자리 잡고 있다.

 

이들 산의 능선을 타고 조성된 한양도성은 옛 수도의 윤곽을 보여주고 있다.

 

경계를 표시하고, 외부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한양도성의 전체 길이는 18.6km. 현존하는 전 세계 도성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다.

 

한양도성의 나이는 올해로 만 621살이다.

 

조선 태조 5년인 1396년 1∼2월 농한기 때 전국에서 11만8천명을 동원해 1차 공사를 했다. 같은 해 8∼9월 2차로 7만4천명을 동원해 성곽을 완성하고 사대문(숭례문·숙정문·흥인지문·돈의문)과 사소문 석축을 쌓았다.

 

각각의 공사 기간은 49일씩으로, 100일도 채 안 되는 기간에 한양의 외양인 '도성'이 완성됐다. 당시 한양 인구가 10만명 정도였다고 하니 성곽 공사에 얼마나 많은 인력을 동원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한양도성 축성 공사는 180m씩 97구역으로 나눠 진행됐다. 각 구간 공사는 함경도·전라도 등 군현별로 할당됐다. '공사 실명제'가 도입됐기에 지금도 성벽 곳곳에 어느 군현에서 맡아 공사했는지 표시한 글자가 새겨져 있다.

 

(서울=연합뉴스) 박초롱 기자 = 북악산 구간 한양도성에선 성벽이 축조된 시대별 차이를 확연히 볼 수 있다. 숙종(1074년) 때는 석재를 정사각형에 가깝게 규격화해 튼튼히 쌓았다. 석재 하나의 무게는 장정 4명이 들어야 할 정도였다. 태조(1396년) 때는 큰 메주만 한 크기의 자연석을 다듬어 쌓았다.

 

흙으로 쌓았던 성곽이 홍수로 일부 무너지자 세종 4년인 1422년 전면 보수 공사를 해 성곽 전체를 돌로 다시 쌓았다. 현재 볼 수 있는 성곽의 모습은 이때 어느 정도 갖춰진 셈이다.

 

숙종 30년인 1704년 보수 공사를 하면서는 성벽에 공사 감독관 직책과 이름, 날짜까지 기록해 놓은 곳이 있어 살펴보는 재미가 있다.

 

대한제국기 고종 황제 때까지 제 모습을 지키던 한양도성은 1900년 즈음부터 속절없이 헐려 나가기 시작했다.

 

1899년 도성 안팎을 연결하는 전차가 개통되면서 가장 먼저 성문이 제 기능을 잃었다. 1908년엔 일본 왕세자 방문을 앞두고 길을 넓히려고 숭례문 좌우 성벽이 철거됐다. 이후 산성을 제외한 평지 성곽 대부분이 사라졌다.

 

해방 이후엔 주택과 도로를 지으며 성벽을 훼손하는 일이 잦았다.

 

한때 총 18.6km 구간 중 10.5km만 남았었으나 근래 꾸준한 복원 작업을 통해 13.4km(전체구간의 72%)가 원형에 가깝게 정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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