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걷고싶은길/서울 둘레길

한양도성 순성(巡城)길을 다녀와서 (後記 3-3)

약초2 2021. 3. 30. 12:57

한양도성 순성(巡城)길을 다녀와서 (後記 3-3)

 

1. 답사 날짜

 

①창의문에서 흥인지문까지: 2021년 1월 5일

②흥인지문에서 숭례문까지: 2021년 2월 3일

③숭례문에서 창의문까지: 2021년 2월 17일

 

2. 답사 시간

 

①창의문에서 흥인지문까지 (2021년 1월 5일)

-새벽에 눈이 조금 왔으나 이후 맑고 깨끗함

-10:21 최규식 경무관 동상, 정종수 경사 흉상 있는 곳

-14:38 흥인지문(동대문) 착. 답사종료

※점심시간 포함하여 4시간 17분 소요됨.

 

②흥인지문에서 숭례문까지: 2021년 2월 3일

-맑다가 다소 흐림

-12:49 흥인지문(동대문)

-17:20 숭례문 착. 답사종료

※점심, 관람시간 포함하여 4시간 31분 소요됨.

 

③숭례문에서 창의문까지: 2021년 2월 17일

-매우 추운날씨이지만 시야 깨끗함

-13:36 숭례문

-14:06 배재어린이공원

-14:16 돈의문 터

-14:38 인왕산 구간 순성 안내 쉼터

-14:51 사직동 1차로 도로

-15:30 인왕산 정상

-16:10 정자 착. 답사종료

※휴식시간 포함하여 2시간 34분 소요됨.

★한양도성 전체 답사시간: 11시간 22분

 

3. 답사 후기

 

▶ 숭례문(崇禮門)에서 창의문(彰義門)까지 (2021년 2월 17일)

 

1월 5일 창의문에서 흥인지문까지, 2월 3일 흥인지문에서 숭례문까지 답사를 마치고 이제 한양도성 순성길 마지막으로 2월 17일 숭례문에서 창의문까지 답사를 마쳤다.

하루에 한양도성 순성길을 마칠 수도 있다고 하는데 글쓴이의 입장에서 보면 3구간으로 나누웠고 또한 예전에도 몇 번씩 다녀왔어도 아직도 빠트린 곳이 많이 있다. 아무튼 이번 3번에 걸쳐 갔다 온 이후로는 한양도성에 대해 조금은 알 것 같다.

 

날씨가 꽤 쌀쌀해서 나중에 가려고도 했으나 마땅히 다른 곳도 갈 곳이 없어 점심 먹고 집에서 나섰다.

 

13:36분에 숭례문에 도착했다.

그런데 지도를 가지고 오지 못해서 숭례문에서 돈의문터로 이어지는 길을 찾지 못해 당황스러웠다.

 

 

▲ 국보 제1호 한양도성 숭례문 (남대문) 뒷면 모습

 

◉ 숭례문(崇禮門)

<국보 제1호> 한양도성의 남대문이자 정문이다. 1395년에 짓기 시작하여 1398년 완공하였고, 1448년에 개축하였다. 1907년 교통에 불편을 초래한다는 이유로 좌우 성벽이 헐린 뒤에는 문화재로만 남았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었으나 2008년 2월 화재로 목조인 1층 약 10%, 2층 문루 약 90%가 소실되었다가 2013년 5월 복구되었다. 이때 숭례문 서쪽 16m, 동쪽 53m의 성벽을 연결하였다.

* 숭례문 현판 : 현판의 글씨를 세로로 내려 쓴 이유는 숭례문을 마주하는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누르기 위한 방책이라는 이야기가 전한다. 달리 숭례문의 예(禮)가 사람을 바로 세우는 덕목이라서 그랬다는 설도 있다.

 

■ 숭례문 - 연중상설(월요일 휴무) 관람시간 09:00~18:00, 여름철(6월~8월) 09:00~18:30, 겨울철(11월~2월) 09:00~17:30

 

■ 숭례문 구간은 성곽의 자취를 찾기 쉽지 않으므로 순성길에 대한 사전학습이 필요하다.

 

■ 백범광장-숭례문-남지 터-대한·서울상공회의소-소의문 터-배재학당동관·배재공원-러시아대사관-창덕여중-돈의문 터(돈의문박물관마을)

(이화여자고등학교 내부 순성길은 해설사 프로그램을 통해서만 진입이 가능하다.)

[출처: 한양도성 홈피]

 

숭례문에서 무려 4번의 횡단보도를 건너 삼성생명 서소문빌딩으로 향했다.

소의문터 앞에는 횡단보도가 없어 경찰청앞 교차로에서 횡단보도를 건너 되짚어 올라간다.

 

러시아대사관 건물을 지나니 배재어린이공원이 나온다.

배재어린이공원 앞에는 조선 말기와 일제 강점기에 의병 활동을 한 여성 독립운동가 최초의 여성의병장 윤희순의사(1860년~1935년)의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

 

 

▲ 윤희순의사 조형물

 

그래서 답사 후에 윤희순의사가 궁금해서 인터넷 검색을 해봤다.

 

※ 참고자료

최초의 여성의병장 윤희순의사(1860년~1935년)에 대하여

 

조선 말기와 일제 강점기에 의병 활동을 한 여성 독립운동가

 

조선 말기와 일제 강점기 의병 활동에 앞장선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시아버지와 남편, 아들 등 가족과 함께 독립운동을 벌이다 1935년에 만주에서 세상을 떠났다.

 

1860년에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난 윤희순은 열여섯 살이 되던 해에 유제원과 결혼했다. 이후 1895년에 을미사변에 이어 단발령이 실시되자, 시아버지인 유홍석이 강원도 춘천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리고 윤희순도 부인들을 모아 의병 활동에 참여했다. 당시 그녀는 주로 의병들의 뒷바라지를 도왔다. 빨래는 물론이고 의병들이 먹을 음식과 전투에 쓸 화약을 만들었으며 군자금을 모으는 데에도 앞장섰다. ‘안사람 의병가’와 같은 노래를 지어 부인들에게 가르치기도 했다.

 

의병 활동은 1907년에 일제가 대한 제국의 군대를 해산시키고 고종을 강제로 물러나게 하자 다시 일어났다. 이때에는 의병들의 뒷바라지뿐 아니라 군사 훈련에도 직접 참여했다. 그녀는 30여 명의 부인들과 함께 여성 의병을 조직해 일본군에 대한 정보를 모으거나 전투를 지원했다.

 

1910년에 한일 강제 병합으로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뒤에는 가족과 함께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벌였다. 몇 년 후 시아버지와 남편이 죽자, 유인석과 홍범도가 만든 무장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 독립단에 들어가 활동을 이어갔다. 그녀는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을 지원하는 한편, 독립운동에 필요한 군자금을 모으고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윤희순은 그토록 바라던 독립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35년에 세상을 떠났다. 큰 아들인 유돈상이 일본 경찰에게 붙잡혀 혹독한 고문을 받다가 죽은 지 10여 일 뒤에 그녀도 숨을 거두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2019년은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래서 이와 관련하여 공공 조형물을 설치한 것 같다. 배재어린이공원 입구에 설치된 조형물은 두 명의 여성이 무릎 꿇고 앉아 무언가를 열심히 만들고 있는 모습으로 여성들의 뒷면 대리석 벽에는 깨알 같은 글씨로 무언가가 적혀 있다. 작품 앞에 가서 자세히 살펴보니 한복을 입은 댕기머리 소녀는 호롱불을 비추고 있고, 단발머리에 교복을 입은 소녀는 무언가를 찍고 있었다. 소녀가 찍어내고 있는 것은 독립선언서로 지난(2019년) 2월 8일 2.8독립선언 100주년을 기념하여 항일여성독립운동 기념사업회와 항일여성독립운동가 상징 조형물 건립위원회가 세운 거사 전야의 조형물이다.

 

2.8독립선언을 앞둔 전날 밤, 독립선언을 준비하는 어린 소녀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이 조각상은 김서경·김운성 작가의 작품으로 일본군 강제위안부 문제를 국제적 이슈로 부각시키기도 한 '평화의 소녀상'을 제작한 작가라고 한다. 이 작가들은 중앙대학교 조소학과를 졸업한 부부 조각가이다.

 

작품으로는 평화의 소녀상과 효순 미순 추모 조형물 등 사회참여적인 작품을 만든 작가이라고 한다. 소녀상 옆 바닥에는 최초의 여성의병장 윤희순 의사(1860~1935년)와 안사람 의병가(1895년)이 새겨져 있다. 윤희순 의사는 한말 시아버지 외당 유홍석이 의병으로 출정하자 의병들에게 음식과 옷을 조달하는 한편, <안사람 의병가>, <병정의 노래>, <왜놈 대장 보거라> 등을 써서 여성들의 의병활동을 이끌어내는데도 적극 앞장선 인물이다.(두산백과)

 

대부분 사람들이 그냥 스쳐 지나갈 것으로 생각되지만 무슨 내용인지 확인해 보고 조형물 설치 의도와 의미를 깨달아 보람 있는 하루라고 생각하였다.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독립운동 정신을 기리기 위해 정동 지날 때 관심 있게 한번 보고 지나가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안사람 의병가 윤희순 작사 / 김동욱 작곡

 

아무리 왜놈들이 강성한들

우리들도 뭉쳐지면 왜놈 잡기 쉬울세라

아무리 여자인들 나라사랑 모를소나

아무리 남녀가 유별한들 나라 없이 소용 있나

우리도 의병하러 나가보세

의병대를 도와주세

금수에게 붙잡히면 왜놈 시정 받들소냐.

우리 의병 도와주세

우리나라 성공하면 우리나라 만세로다.

우리 안사람 만만세로다.

 

대한독립여자선언서(大韓獨立女子宣言書) 내용은 “슬프고 억울하다. 우리 대한 동포시여”로 시작되는 이 선언서는 곳곳에서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서 뜻은 있으나 국권 회복운동에 행동으로 참여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면서, 독립운동에서 여성의 대등한 참여의 뜻을 비췄으며, “때는 두 번 이르지 아니하고 일은 지나면 못 하나니 속히 분발할지어다. 동포, 동포시여 대한독립만세”라는 비장한 호소로 끝을 맺는다.

[출처: 네이버블로그 / 고독한 소피스트]

 

배재공원을 지나 정동길로 들어선다.

주한캐나다대사관 앞에 520년(1976.11.17일 지정)된 17m 높이의 보호수(회화나무)가 있다. 지금은 잎이 떨어져서 다소 앙상하지만 여름철에는 길손에게 그늘을 제공할 것 같다.

2003년 캐나다 대사관 신축 당시, 나무의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뿌리의 위치를 감안해 건축 디자인을 변경하고, 지지대를 세우고, 우물을 확장하는 등 캐나다 대사관의 노력으로 정동회화나무는 다시 건강한 모습을 되찾았다고 한다.

 

정동제일교회, 정동극장, 이화여고, 백주년기념관등을 지난다.

이어 강북삼성병원 앞 정동사거리에 도착했다. 이곳이 돈의문터이다.

 

▲ 돈의문 터에 설치된 안내판

 

 

★ 숭례문 구간

 

구간 : 백범광장 ~ 돈의문 터

거리 : 1.8km

소요시간 : 약 1시간

 

백범광장에서 숭례문을 지나 돈의문 터까지 이어지는 구간이다. 한양도성의 정문인 숭례문은 한강과 도성을 최단거리로 잇는 문이어서 사람과 물자의 통행도 가장 많았다. 상업이 발달한 조선 후기에는 문 밖에 칠패시장, 문 안 선혜청 창고 앞에 남대문 조시(朝市)가 만들어졌다. 이중 칠패시장은 종루, 이현(梨峴)의 시장과 함께 ‘도성삼대시(都城三大市)’로 꼽혔으며, 남대문 조시는 오늘날의 남대문시장으로 이어졌다. 서구(西歐) 각국과 통상조약을 체결하고 서울을 개방한 이후에는 남대문 인근의 정동에 각국 공사관(公使館)과 외교관 사택, 선교사들이 세운 교회와 학교들이 들어섰다. 1899년 전차가 개통됨에 따라 숭례문은 더 이상 문의 구실을 못하게 되었고, 1907년에는 교통 불편을 해소한다는 명목으로 숭례문 양쪽 성벽이 철거되었다. 이후에도 남대문로 주변에 대형 건축물이 들어설 때마다 성벽이 철거되어 숭례문 주변에서는 옛 성벽을 찾아보기 어렵다. 현재 숭례문 구간에서 한양도성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은 세 군데 있다. 밀레니엄 서울힐튼과 SK남산빌딩 뒤쪽의 성벽,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올리브 타워로 이어지는 길가에 성벽 일부가 담장처럼 남아있으며, 창덕여자중학교 담장 아랫부분에서 50m 정도의 성벽을 볼 수 있다.

 

◉ 남대문시장과 칠패시장

 

남대문시장은 1897년 1월에 개장한 한국 최초의 도시 상설시장이다. 조선 초에는 이곳에 상평창이 있었는데, 17세기 대동법 시행을 계기로 선혜청 창고로 바뀌었다. 1894년 조세금납화 조치에 따라 현물을 보관할 필요가 없어지자 이 창고를 상인들에게 내 주어 시장으로 삼았다. 남대문 밖에는 칠패(七牌) 시장이 있어 종루(종로4거리), 이현(흥인지문 안)과 더불어 조선 후기 3대 시장 중 하나로 꼽혔다. 칠패라는 명칭은 이곳이 어영청 제7패의 순라길이었던 데에서 비롯되었다.

 

◉ 대한·서울상공회의소 부근 성벽

 

대한·서울상공회의소 부근에 성벽 일부가 담장처럼 남아 있다. 1907년 한양도성의 본격적인 철거는 여기에서부터 시작했다. 여장은 물론 체성조차 흔적을 찾을 수 없게 훼손되었는데, 최근 옛 성돌의 흔적 위에 새로 몇 단을 쌓아 올렸다.

 

◉ 소의문 터 (昭義門)

 

사소문 중 하나로 도성의 서남쪽에 있는 문이다. 1396년 도성과 함께 축조되었으며 처음 이름은 소덕문(昭德門)이었다. 영조 20년(1744) 문루를 개축하면서 소의문으로 이름을 바꿨다. 광희문과 함께 성 밖으로 상여를 내보내던 문이었다. 1914년 일제의 시구개수사업 과정에서 헐려 지금은 소의문 터였음을 알리는 표석만 남아 있다.

* 소의문은 공포의 문이었다? : 소의문은 광희문과 함께 도성 밖으로 상여를 내보내던 문이었다. 소의문은 사형수를 처형장으로 끌고 나갈 때에도 사용되었다. 소의문 밖 넓은 마당은 조선시대 사형 집행장이었다. 천주교 순교자들 다수도 이 문 밖에서 처형당했기 때문에 외국인들 사이에서는 순교자의 문으로도 불렸다. 현재 서소문역사공원 안에 있는 순교자 현양탑은 이와 관련한 기념물이다.

 

◉ 배재학당동관(배재학당 역사박물관)

 

<기념물 제16호> 1916년 준공된 배재학당동관은 현재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배재학당은 1885년 감리교 선교사인 아펜젤러가 설립한 학교로서 1886년 고종이 ‘배재학당(培材學堂)’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유용한 인재를 기르고 배우는 집’이라는 뜻이다. 초창기 배재학당은 미국 문물 교류의 통로로서 수많은 근대 지식인을 배출하였다. 이승만·주시경·김소월·나도향·오긍선·신봉조 등이 이 학교 출신이다.

 

◉ 구 러시아공사관

 

<사적 제253호> 고종 27년(1890)에 완공된 르네상스식 건물로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정동의 상징적 건축물이었다. 을미사변 이후 신변에 위협을 느끼던 고종이 1896년 2월 이곳으로 피신해 1년 간 머물렀다(아관파천). 한국전쟁 중 건물 대부분이 파손되어 탑 부분만 남았다. 1973년 현재의 모습으로 정비했으며 2007년과 2010년 두 차례에 걸쳐 보수하였다. 구 러시아공사관 터는 현재 정동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 정동교회

 

<사적 제256호> 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가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기독교 감리교회이다. 고딕풍의 붉은 벽돌 건물로 1895년에 착공, 1897년에 완공하였다. 인근의 배재학당 · 이화학당과 더불어 개화기 미국 문물 도입의 통로 역할을 하였다.

 

◉ 이화여자고등학교 심슨기념관

 

<등록문화재 제3호> 1915년에 준공된 옛 이화학당 교사(校舍)로 현재 이화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화학당은 1886년 미국 감리교 여선교사인 메리 스크랜튼이 창설한 한국 최초의 여성교육기관으로, 이화학당이라는 이름은 1887년 왕후가 지어준 것이다. 학교 경내에 유관순 열사가 빨래하던 우물터와 ‘한국여성 신교육의 발상지’ 기념비, 유관순 동상, 손탁호텔 터 표석 등이 있다.

 

◉ 창덕여자중학교 담장

 

돈의문과 주변 성곽은 일제강점기 시구개수사업(1915) 과정에서 훼손되었는데 창덕여자중학교 담장에 일부가 남아 있다. 담장에는 ‘서대문 성벽의 옛터’라는 안내문이 있고, 담장 아랫부분에는 19세기 초 순조 때 쌓은 성벽이 50m 정도 이어져 있다. 이곳은 개화기 프랑스공사관이 있던 자리로 1896년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옛 프랑스공사관 건물의 머릿돌이 남아있다.

 

◉ 돈의문 터 (敦義門)

 

도성의 서대문인 돈의문이 있던 자리이다. 돈의문은 태조 때 처음 세워졌으나 태종 13년(1413)에 만들어진 서전문(西箭門)이 서대문의 기능을 대신하였다. 그 위치는 현재 정확히 알 수 없다. 세종 4년(1422)에 도성을 대대적으로 수축하면서 서전문을 닫고 새로운 돈의문을 세웠는데 현재 돈의문 터가 그 위치이다. 이후 돈의문은 새문 또는 신문(新門)으로도 불렸으며, 현재의 신문로라는 지명도 이에서 유래한다. 1915년 일제는 서대문을 지나는 전차를 개통하면서 이 문을 해체하여 건축자재로 매각하였다. 현재 돈의문 터에는 공공 미술품 ‘보이지 않는 문’이 설치되어 있다.

[출처: 한양도성 홈피]

 

 

정부와 시장(market)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 시장이 이긴다.

 

조선시대에 시장은 관이 운영했다. 종로거리의 육의전이 그것이다. 조선은 장사를 하려면 나라의 허락을 받도록 했다. 성리학의 사농공상(士農工商)에서 상업은 말업이다. 사대부들은 상업이 지나치게 발달하면 농업이 어려워진다고 생각했다. 농업국가였고, 농본사상이 근본을 이루던 시절이다.

 

조선 시대엔 상인들이 관청의 허가를 받은 뒤에야 장사를 할 수 있었다. 이렇게 허가받은 상점들을 ‘시전’이라고 했다. 시전 상인들은 나라가 필요로 하는 물품을 대거나 장사한 뒤 남은 수익의 일부를 세금으로 바쳤다.

 

하지만 농업이 피폐하면 농민들이 농토와 유리(遊離)된다. 토지에서 쫓겨난 농민들은 장사라도 해야 한다. 관이 허가하는 상인 이외에 자생적인 시장이 생겨난다. 그것이 칠패시장이다.

 

서울 도심 남대문에서 신한은행 본점 건물로 가다보면 칠패시장을 그려 놓은 그림을 볼 수 있다. 이곳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치른 18세기경에 시장이 생겨났고, 개항 이후에는 청나라 상인과 일본 상인들이 칠패시장에서 상권을 다투었던 곳이다.

 

 

[한선생의 한양이야기] 서해 어물이 집결하는 칠패시장

<巡城길1> 종로시전·이현시장과 함께 조선후기 3대 시장

 

한선생 문화해설사

기사입력 2016-06-10 [10:07]

 

[공감신문 한선생 문화해설사] 이제 숭례문을 통과했으니 어디로 갈까? 망설여진다.

 

그냥 태평로로 직진할까 생각하니 아차! 조선시대에는 태평로가 없었지? 이 칼럼의 제목이 한양이야기인데..

 

그럼 뭐니뭐니해도 한양도성을 따라 한양을 한바퀴 돌아보는것도 재미있으리라 생각된다. 여기서 잠깐! 우리민족은 참 재미를 좋아했다. 상대방이 내 말을 듣지 않고 좀 껄끄러울 때 우리는 흔히 “너, 재미없어~”한다.“너 죽을줄 알아”쯤 되는 말이다. 재미가 없다는 것을 우리 조상들은 죽는 것만큼 싫어했던 모양이다.

 

한양도성을 도는 것이 그러면 재미있을까?

더 말해서 무엇하랴? 이 복잡한 시대에 내4산으로 연결된 한양도성을 돌다보면 세상에 이렇게 재미있는 일도 있단 말인가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참 재미를 위해서 한양도성 18.6km를 한 번 독자 여러분과 돌아볼 생각이다. 조선시대에는 한양도성을 한바퀴 돌면서 꽃구경을 하기도 했고 아침에 정한수 떠다놓고 어머니들이 천지신명께 빌듯이 자기의 소원을 빌며 다니기도 했다. 일명 “순성(巡城)놀이”다. 한 번 조선시대 사람들처럼 과거로 돌아가 한 선생과 함께 성을 한 바퀴 도는 순례 (巡禮)길을 떠나보자. 성을 한 바퀴 돌다보면 어찌 기쁜 역사만 만나겠는가? 슬프고 아픈 역사의 현장을 목격하게 될 테니 그때는 모두 함께 두 눈 똑바로 뜨고 그 질곡(桎梏)의 현장을 마주하자.

 

자, 그러면 서쪽으로 돌아보니 웬 큰 시장이 하나있네?

 

숭례문에서 서소문까지 일대에 있었던 칠패(七牌)시장이다. 머릿속에 상상이 안가면 신한은행본점 건물 로비에 가면 칠패시장을 그려놓은 큰 그림을 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한 무리를 지칭할 때 패(牌)라는 단위를 썻다. 지금은 1조, 2조 할 때 組로 쓰고 패라는 말은 불량배나 깡패등 부정적 이미지로 사용하지만 이것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바뀌어진 말로 보면 된다. 그러면 7패는 하나의 행정구역 단위로 생각하면 어떨까? 한양도성은 지금의 수도경비사령부와 같은 3군문(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으로 나누어 지키게 했다. 그중에서 어영청의 1패에서 8패중 7패에 해당되는 구간 앞에 있는 시장이라 하여 칠패시장이다. 1패의 단위는 보통 소대와 중대단위의 약 40~50명사이의 규모로 보면 된다.

 

종로시전(鍾路市廛), 이현시장(梨峴市場)과 더불어 3대 시장이 18세기에 존재했다. 종로시전은 종로와 남대문로에 丁자 형태 육의전을 비롯해 2,000개의 가가로 형성된 공인받은 시장이었다. 조선 후기로 넘어오면서 성곽주위로 사람들이 증가하며 자연스럽게 민간 주도의 칠패시장이 형성되었고, 100년 후에는 동대문의 이현(배오개)시장이 형성되었다.

 

동대문의 배오개길을 아는가? 그 배오개가 이현시장의 자리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칠패시장에서는 주로 어물을, 이현시장에서는 채소를 팔았다고 한다.(東部菜 七牌魚)

 

그것은 한강과 관계가 있다. 한강은 5강이라하여 5개의 큰 나루가 있었다. 현재 위치와 지명으로 보면 광나루, 마포, 용산, 노량진, 양화진이 그것이다. 그중에 마포나루가 가장 컸다. 지금의 마포대교를 통과해보면 마포앞 한강 폭이 얼마나 넓은지 알 수 있다. 용산에서 넘어오는 강물과 서해에서 밀려오는 바닷물이 만나는 곳이 마포였다. 그러다보니 엄청 큰 호수와 같은 큰 강폭이 형성되었으니, 이름하여 큰 강의 호수와 같다하여 西江이라 했다. (그러면 마포의 동쪽에는 동호가, 서쪽에는 서호가 있는 것이다. 마포를 기준으로 한 동호대교, 서강대교라 이름 짓는 어원이 되었다)

 

마포는 남한강에서 내려오는 뗏목의 집산지로서 제재소가 많았고 고기를 잡아 보관하는 옹기집이 많았다고 한다. 목재를 만지다보니 목에 먼지가 많이 끼었고 그 컬컬함을 없애기 위해 마포에 고기집이 성행했었다. 지금도 마포에는 오래된 유명 음식점들이 많다. 특히 서해에서 잡아오는 새우젓이 많이 올라왔다. 상인들은 강화에서 올라온 새우젓과 생선을 지게에 싣고 만리재 고개를 넘어 칠패시장에서 팔았다. 새우젓장사는 아침에 해를 받으며 지게 지고 올라오기 때문에 이마가 검게 탔다고 하고, 이현시장의 채소장사는 해를 등지고 오기 때문에 뒷목덜미가 새카맣게 탔다고 했다. 그래서 얼굴과 목덜미만 봐도 이 사람이 칠패시장의 새우젓장사인지, 이현시장의 채소장사인지 알았다고 한다.

 

기왕 알려주는 김에 또 한 가지. 옛날 사람들은 지갑이 없었으므로 남자들은 큰 도포자락에 끝 소매에 돈을 넣어 다녔다고 한다. 오른손으로 돈을 만지는 것은 부정하다하여 오른손 소매에 돈을 넣고 왼손으로 돈을 집어 물건 값을 지불하였는데 일종의 모리배들이 팀을 형성하여 앞길을 막고 말을 시키다가 옆에 있는 사람이 소매를 툭 치면 안에 있던 돈이 빠져나오는데 그것을 주워 가져 갔다 하는데 그것이 <소매치기>의 유래라고 한다. 그 소매치기가 성했던 곳이 칠패시장이라고 하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곳 칠패시장에 와서 물건을 팔고 사고하였는지 짐작이 간다. 오늘은 옛날을 생각하며 마포에 가서 소주에 돼지갈비를 먹어봄직 하지 않은가? 마포나루에서 새우젓을 떼다가 그 경사진 만리재 고개를 땡볕 받아가며 날랐을 우리와 같은 민초를 생각하며 말이다. 그들이 왜 고생을 했겠는가? 집에 있는 처자식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가장들은 식솔들을 먹여 살리느라 참 고달픈 것이다.

 

 

★ 인왕산 구간

 

구간 : 돈의문 터 ~ 창의문

거리 : 4km

소요시간 : 약 2시간 30분

 

돈의문 터에서 시작해 인왕산을 넘어 윤동주 시인의 언덕까지 이어지는 구간이다. 해발 339m인 인왕산은 풍수상 우백호(右白虎)에 해당한다. 거대한 바위들이 노출되어 있는 바위산으로 치마바위, 선바위, 기차바위 등 기암괴석이 많다. 인왕(仁王)은 불교식 명칭으로, 무학대사가 이 산을 주산으로 삼으면 불교가 융성할 것이라고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1968년 1·21 사태 이후 민간인 출입이 통제되다가 1993년 개방되었다.

 

■ 24시간 개방

 

■ 인왕산은 바위 구간이 많아서 겨울철 등산 시에 주의해야 한다. (인왕산으로 진입하면 화장실이 없으므로 출발 전 미리 다녀오는 것이 좋다.)

 

■ 돈의문 터(돈의문박물관마을)-경교장-월암공원-홍파동 홍난파 가옥-편의점(구 옥경이식품)-인왕산 순성 안내쉼터-인왕산 곡성-인왕산 범바위-인왕산 정상-윤동주 시인의 언덕-창의문

 

구간 주요지점

 

◉ 돈의문 터 (敦義門)

 

도성의 서대문인 돈의문이 있던 자리이다. 돈의문은 태조 때 처음 세워졌으나 태종 13년(1413)에 만들어진 서전문(西箭門)이 서대문의 기능을 대신하였다. 그 위치는 현재 정확히 알 수 없다. 세종 4년(1422)에 도성을 대대적으로 수축하면서 서전문을 닫고 새로운 돈의문을 세웠는데 현재 돈의문 터가 그 위치이다. 이후 돈의문은 새문 또는 신문(新門)으로도 불렸으며, 현재의 신문로라는 지명도 이에서 유래한다. 1915년 일제는 서대문을 지나는 전차를 개통하면서 이 문을 해체하여 건축자재로 매각하였다. 현재 돈의문 터에는 공공 미술품 ‘보이지 않는 문’이 설치되어 있다.

 

◉ 경교장(京橋莊)

 

<사적 제465호> 1945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국 후 1946년까지 사실상 임시정부 청사로 사용된 곳으로, 국무위원회 개최 및 신탁통치 반대운동의 주 무대가 되었다. 또한 주석 김구가 약 4년간(1945~1949) 거주하다 서거한 역사의 현장이다. 서거 이후 60년간 중화민국 대사관저, 월남대사관, 병원시설 등으로 사용되다가 2013년 3월 김구 거주 당시의 임시정부 활동공간으로 복원하여 시민에게 개방하였다.

 

◉ 서울 한양도성의 흔적들(월암공원 일대)

 

월암공원을 따라 최근에 성벽을 새로 쌓았다. 공원을 조성하면서 서울시 복지재단(구 기상청 건물)의 담장 축대 아래 묻혀있던 성벽의 일부가 드러났다. 홍파동 홍난파 가옥 부근 연립주택 건물 주차장 뒤편에도 성벽의 흔적이 남아 있다.

 

◉ 홍파동 홍난파 가옥

 

<등록문화재 제90호> ‘봉선화’, ‘고향의 봄’ 등으로 유명한 작곡가 난파 홍영후(1898~1941)가 살던 집. 그의 대표곡들이 대부분 이곳에서 작곡되었다. 1930년대 서양식 주택 양식이 잘 보존되어 있다.

 

◉ 딜쿠샤(테일러 가옥)

 

딜쿠샤는 미국인 금광 기술자로 UPI 서울특파원을 겸하면서 3·1 운동을 세계에 알렸던 앨버트 테일러가 짓고 거주(1923~1942)했던 서양식 건축물이다. 딜쿠샤는 힌디어로 '희망의 궁전'이라는 뜻으로 오랫동안 베일에 쌓여있던 이 건물의 내력은 2006년 앨버트의 아들 브루스 테일러가 방한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딜쿠샤 바로 옆에는 수령 450년이 넘은 은행나무가 있는데, 행주대첩을 이끈 권율 장군의 집에 있던 나무로 전해지며, 행촌동이라는 지명도 이 나무에서 유래한다.

 

◉ 사직근린공원 부근 성곽

 

한양도성 전 구간 중 성 안과 성 밖을 모두 살펴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이다. 성벽 안쪽의 넓은 길에서는 도심의 고층 빌딩을 바라보며 편히 걸을 수 있고, 바깥쪽 오솔길에서는 담쟁이넝쿨과 고풍스러운 성벽이 어우러진 모습을 볼 수 있다. 조경 및 조명 시설이 잘 되어 있어 밤에 보는 성벽의 모습도 무척이나 아름답다.

 

◉ 인왕산 국사당과 선바위

 

<중요민속문화재 28호> 조선 태조 때 남산에 세운 국가 신당이다. 일제가 남산 중턱에 조선신궁을 지으면서 국사당을 헐자 이곳에서 제례를 지내던 무속인들이 인왕산 서쪽 자락으로 옮기고 사설 무속 신당으로 바꾸었다. 국사당 위쪽에 있는 선바위는 고깔 쓰고 장삼 입은 승려가 참선하는 형상의 바위이다. 불교를 배척했던 정도전이 한양도성의 경계를 정하면서 일부러 선바위 있는 곳을 제외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 경복궁 서측 한옥마을(상촌 上村, 우대)

 

인왕산과 경복궁 사이, 일제강점기에 건축된 도시형 한옥이 다수 남아 있는 마을이다. 조선 후기에는 상촌(上村), 우대 등으로 불렸다. 산세가 수려하고 물이 맑아 왕족, 고관대작의 집과 별장도 도처에 있었지만, 주로 말단관리인 경아전(京衙前)들이 많이 살았다. 상촌인이라는 말은 경아전(京衙前)과 동의어였다. 조선 말기에는 중인 지식인들의 시회(詩會) 장소로 자주 이용되어 여항(閭巷) 문학의 중심지 구실을 하였다. 근대 이후에는 시인 이상과 윤동주 · 화가 노천명 · 이중섭 · 천경자 · 이상범 등이 이 일대에 거주하며 작품 활동을 하였다.

 

◉ 인왕산 순성길

 

해발 338m인 인왕산은 큰 화강암 덩어리들로 이루어진 바위산으로 정상에 가까울수록 험준하다. 이런 지형적 특성 때문에 경사가 급한 곳에서는 자연 암반이 성벽 역할을 대신하기도 한다. 큰 바위들과 어우러져 끊어질 듯 이어진 성벽은 한양도성의 빼어난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인왕산 정상 가까운 곳에는 무악재와 안산(무악) 방향으로 길게 돌출된 곳이 있는데 이런 지형을 활용하여 곡성(曲城)을 쌓았다. 곡성이란 주변을 관찰하기 좋은 전략적 요충지에 성벽을 지형에 따라 길고 둥글게 내밀어 쌓은 성을 말한다. 인왕산 곡성은 현재에도 군사시설로 이용되고 있어 일반인은 출입할 수 없다.

 

◉ 축성 시기별 축성 방법의 차이를 확인할 수 있는 곳

 

인왕산 구간에서도 시기별 축성 방법의 차이를 확인할 수 있는 곳이 있다. 정상에서 치마바위를 지나면 탕춘대성 갈림길이 나온다. 이곳부터는 성 안팎으로 길이 나 있다. 성 바깥 길을 걸으며 성돌의 모습을 눈여겨보자. 태조 · 세종 · 숙종 · 순조, 그리고 그 이후에 쌓은 성돌이 공존하는 구간이 꽤 길게 이어진다.

 

◉ 윤동주 시인의 언덕과 윤동주 문학관

 

윤동주 시인의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해 조성한 공원. 인왕산 자락 서쪽 끝, 창의문 부근에 있다.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 재학 시절 종로구 누상동에서 하숙했는데, 그가 이 일대를 거닐며 시상(詩想)을 가다듬었을 것으로 보아 이 자리에 윤동주 시인의 언덕을 조성하였다. 언덕 위에 그의 대표작 ‘서시’를 새긴 커다란 시비가 있으며, 가까이에 윤동주문학관도 있다.

* 윤동주 문학관 관람 시간 : 10:00~18:00 매주 월요일, 명절연휴(시정, 구정, 추석) 휴무

 

◉ 최규식 동상/청계천 발원지

 

창의문 앞 길가에 1·21 사태로 순직한 최규식 동상이 있다. 1968년 1월 21일 북한의 특수부대 소속 31명이 청와대를 기습하기 위해 서울에 침투하였다. 당시 종로경찰서장이던 최규식 총경은 북한군과 교전 중 창의문에서 순직하였다. 이 사건 이후 백악과 인왕산에는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되었는데, 1994년에는 인왕산이, 2007년에는 백악이 각각 다시 개방되었다.

*청계천 발원지 표석 : ‘이곳에서 북동쪽 북악산 정상에서 약 150미터 지점에 항상 물이 흘러나오고 있는 약수가 있으므로 이를 청계천 발원지로 정하였다’고 적혀있다.

 

◉ 창의문(彰義門)

 

<보물 제1881호> 창의문은 인왕산과 백악이 만나는 지점에 있는 문이다. 사소문 중 유일하게 조선시대 문루가 그대로 남아 있다. 이 문루는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던 것을 영조 17년(1741) 다시 세운 것이다. 영조 때 문루를 새로 지으면서 인조반정 때 반정군이 이 문으로 도성에 들어온 것을 기념하기 위해 공신들의 이름을 새긴 현판을 걸어놓았다. 이 현판은 지금도 그대로 걸려있다. 현재는 자하문으로 더 많이 불리는데, 이 문 부근의 경치가 개경(開京)의 승경지(勝景地)였던 자하동과 비슷하여 붙은 별칭이다.

[출처: 한양도성 홈피]

 

 

돈의문터(강북삼성병원 앞 정동사거리) 사거리에서 횡단보도를 건너 올라가니 서울시교육청이 나오고 조금 더 올라가니 비로소 한양도성 성곽이 나타났다.

 

이곳에서 도로와 작별하고 몇 계단 올라가면 「서울 한양도성 순성길」 입간판과 「달빛 머무는 교남동 여기는 행촌성곽마을입니다.」 라고 쓴 나무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새롭게 쌓아 깨끗한 성곽은 이내 끝이 나고 다시 차도와 만났다. 길 건너편에는 다시 성곽이 나타났고, 우측엔 쉼터가 조성되어 있다.

쉼터에는 인왕산 안내도와 인왕산 구간 순성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잠시 성곽과 나란히 올라가는 차도 따라 올라가다가 암문을 통과하여 도성 내부로 들어갔다.

이제 인왕산이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보인다.

 

새벽에 눈이 왔는지 가장자리에 눈이 제법 쌓여 있고 매우 추운날씨가 손난로를 의지하며 올라간다. 추운날씨이지만 하늘은 무척 깨끗하여 조망 즐기기에 너무 좋은 날씨였다.

 

▲ 본격적으로 인왕산 구간이 시작되는 곳

 

사직근린공원 힐링숲 안내도를 지나니 다시 1차로의 넓은 차도가 나타났다.

길을 건너면 입구에 「한양도성탐방로」 인왕산 지도가 세워져 있다.

이제부턴 계속 오름길이 이어진다.

나무계단을 올라가면서 뒤돌아보면 N서울타워가 서 있는 남산이 정면으로 잘 보인다.

「인왕산 성곽초소 이야기」 안내판을 지나면 경사는 다소 누그러진다.

찬바람이 불어오는데 성곽이 막고 있어서 천만다행이었다.

 

조금 힘들다 싶으면 뒤돌아서 남산을 바라본다. 남산을 향해 꿈틀거리며 움직이는 한양도성이 너무 멋졌다.

 

인왕산에 곡장(곡성)이 있는데 그곳에 시설물이 있어서 일반인은 출입을 할 수가 없다. 아쉬웠다.

 

바위지대가 나왔다. 난간 로프를 잡고 올라갔다. 바위지대에서 바라보는 서울은 너무나 멋지다.

 

▲ 성벽 보다 높은 탐방로로 인해 매섭게 불어오는 바람을 피할수 없는 곳이다. 정면으로 인왕산 정상이 보인다.

 

암봉(이곳이 인왕산 정상인줄 알았다) 위에 서니 이곳은 바람막이(성벽)가 없어서 차갑게 불어오는 센 바람에 몸이 휘청거린다. 별 수 없이 급하게 나무계단을 내려갔다.

 

평지가 나온다. 성곽이 바람을 막아줘서 좋았다. 종로구 경계점(종로구와 서대문구 경계)을 표시한 원형의 조형물이 땅에 박혀 있다. 정상까지 300m 남았다.

 

성곽을 끼고 계속해서 오르막을 올라가는데 아뿔싸! 암벽에 막혀 길이 없는 것이다. 성곽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성곽과 잠시 작별하고 되돌아 내려와 정식 탐방로를 따라 올라갔다.

정식 탐방로는 난간로프를 잡고 바위지대를 올라가야 한다.

 

 

▲ 인왕산 정상

 

바위지대를 올라가면 다소 넓은 길이 나오면서 경사도 매우 완만해졌다. 성곽도 다시 만난다.

완만한 바위지대를 올라가니 드디어 인왕산 정상의 정상목(338.2m)이 반긴다.

인왕산 정상의 평지 한가운데에 돌출된 큰 바위가 있다. 큰 바위 꼭대기에 삼각점(서울 487 / 1994 복구)이 박혀 있다. 시설물(CCTV)도 설치되어 있다. 또한 이곳에도 종로구 경계점(종로구와 서대문구 경계. 무악재고개~인왕산 주능선~홍지문을 경계로 좌측<서쪽>은 서대문구, 우측<동쪽>은 종로구이다.)을 표시한 원형의 조형물이 땅에 박혀 있다.

 

거대한 바위(치마바위, 선바위, 기차바위 등)들이 즐비한 인왕산은 서울의 우백호(右白虎)에 해당되고, 겸재 정선이 그림의 단골 소재로 삼았던 곳이다.

인왕(仁王)은 불교식 이름으로 무학대사가 이 산을 주산으로 삼으면 불교가 융성할 것이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정상에서는 곧바로 내려가는 길이 없다. 그래서 되짚어 조금 내려가면 좌측으로 내려가는 길이 나온다.

이내 성곽과 다시 만난다.

이후로는 한양도성 성곽과 함께 가파르게 내려간다.

계단이 눈이 제법 쌓여 있어서 무척 조심스럽게 내려갔다.

기차바위로 갈 수 있는 삼거리를 지나, 계속 급경사를 내려가는데 정면으로 북악산이 우뚝하게 좌측으로는 북한산 줄기가 웅장하다.

 

▲ 한양도성 부부소나무 (연리지)

 

인왕산 정상에서 급경사 20여 분을 내려가니 연리지(連理枝) 소나무가 나온다. 안내판에는 「한양도성 부부소나무」라고 적혀 있다.

 

다시 급경사 계단을 5분 정도 내려가니 비로소 급경사가 끝이 난다.

한양도성 성곽과 작별하고 우측으로 내려가면 이내 차도가 나온다. 그리고는 사각정자(서시정<序詩亭>)가 나오고 도로 따라 내려가면 윤동주 시인의 언덕이 나온다. 조금 더 내려가면 창의문이다.

 

휴식시간 포함하여 2시간 34분 걸렸고, 한양도성 전체 답사시간은 휴식시간 포함하여 11시간 22분 걸렸다.

 

 

4. 한양도성 순성길 더 많은 사진 보기

1.창의문에서 흥인지문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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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흥인지문에서 숭례문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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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https://blog.daum.net/joingi61/15965531

3.숭례문에서 창의문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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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https://blog.daum.net/joingi61/15965533

14.https://blog.daum.net/joingi61/15965534

 

 

5. 한양도성 순성(巡城)길을 다녀와서 (後記 1-3) 보기

 

https://blog.daum.net/joingi61/15965545

 

6. 한양도성 순성(巡城)길을 다녀와서 (後記 2-3)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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