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걷고싶은길/서울 둘레길

한양도성 순성(巡城)길을 다녀와서 (後記 2-3)

약초2 2021. 3. 29. 23:39

한양도성 순성(巡城)길을 다녀와서 (後記 2-3)

 

1. 답사 날짜

 

①창의문에서 흥인지문까지: 2021년 1월 5일

②흥인지문에서 숭례문까지: 2021년 2월 3일

③숭례문에서 창의문까지: 2021년 2월 17일

 

2. 답사 시간

 

①창의문에서 흥인지문까지 (2021년 1월 5일)

-새벽에 눈이 조금 왔으나 이후 맑고 깨끗함

-10:21 최규식 경무관 동상, 정종수 경사 흉상 있는 곳

-14:38 흥인지문(동대문) 착. 답사종료

※점심시간 포함하여 4시간 17분 소요됨.

 

②흥인지문에서 숭례문까지: 2021년 2월 3일

-맑다가 다소 흐림

-12:49 흥인지문(동대문)

-12:57 청계천 오간수교(다리)

-13:08 동대문역사관 착 / -13:23 발

-13:25 동대문 DDP 착 / -13:38 발

-13:46 광희문

-14:50 한양도성 암문

-15:21 남산공원 입구(국립극장 앞)

-16:10 남산전망대(팔각 광장)

-16:14 남산 서울N타워

-16:27 목멱산 봉수대 터

-16:37 잠두봉 포토아일랜드 (북측지점)

-16:52 한양도성 유적전시관

-17:05 백범광장

-17:20 숭례문 착. 답사종료

※점심, 관람시간 포함하여 4시간 31분 소요됨.

 

③숭례문에서 창의문까지: 2021년 2월 17일

-매우 추운날씨이지만 시야 깨끗함

-13:36 숭례문

-16:10 정자 착. 답사종료

※휴식시간 포함하여 2시간 34분 소요됨.

★한양도성 전체 답사시간: 11시간 22분

 

3. 답사 후기

 

▶ 흥인지문(興仁之門)에서 숭례문(崇禮門)까지 (2021년 2월 3일)

 

한양도성 순성길, 창의문에서 흥인지문까지 답사 한 후(2021년 1월 5일) 한 달 정도 지나 2월 3일에 두 번째 답사에 들어갔다.

흥인지문(동대문)에서 숭례문(남대문)까지 답사했다.

 

12시49분에 흥인지문에 도착했다.

 

▲ 보물 제1호인 한양도성 동대문(흥인지문)

 

◉ 서울 흥인지문(興仁之門)

지정번호: 보물 제1호

시대: 조선시대

소재지: 서울 종로구 종로 288 (종로6가)

 

서울 흥인지문은 1398년(태조 7)에 세운 당시 서울 도성의 동쪽문이다. 지금의 문은 1869년(고종 6)에 다시 지은 것이다. 당시 서울 성곽에 4개의 대문과 4개의 소문을 세웠다. 동서남북의 사대문에는 각각 인(仁) ․ 의(義) ․ 예(禮) ․ 지(智)의 글자를 넣어 이름을 지었는데, 그중 동쪽의 대문을 흥인문이라 하였다. 흥인지문은 서울의 숭례문과 더불어 가장 규모가 큰 성문이다. 성벽과 이어진 축대에 아치형의 통로를 내고, 그 위에 문루를 세워 성문을 만들었다. 서울의 성문 가운데 문루를 2층으로 만든 것은 숭례문과 흥인지문밖에 없다. 문루른 문을 지키는 장수가 머무는 곳으로 유사시에는 군사를 지휘하는 지휘소의 역할도 했다. 문루 바깥으로는 벽돌로 된 담장과 나무판으로 된 장문을 설치해서 작을 막는 데 유리하게 하였다. 흥인지문의 문루는 전체 구조는 간단하지만 장식이 많은 19세기 건축물의 특징을 잘 반영한다. 또 흥인지문의 앞에 적을 막기 위한 반달 모양의 옹성을 둘렸는데, 이는 서울 성문 가운데 유일하다.

 

※문루: 궁문, 성문 따위의 바깥문 위에 지은 다락집

※옹성: 성문을 보호하고 성을 튼튼히 지키기 위하여 큰 성문 밖에 쌓은 작은 성

[출처: 현지 동판 안내판]

 

흥인지문은 성 내부로 들어가는 곳이 막혀 있어서 밖으로 한 바퀴 돌면서 구경을 했다.

 

청계천 위에 세워진 오간수교를 건너 동대문 DDP 뒤에 있는 동대문역사관을 방문했다.

 

 

 

 

동대문역사관에는 이간수문과 성벽의 축조 모습을 재현한 미니츄어, 동대문운동장 발굴 과정, 다시 찾은 수문 등 볼거리가 많았다.

 

동대문역사관에서 밖으로 나오면 성화대가 나온다. 이어 DDP(동대문디자인플라자) 앞에 있는 조형물 등을 구경하고는 광희문으로 향했다.

 

 

▲ DDP (동대문디자인플라자)

 

 

※ DDP(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 대하여

 

‘꿈꾸고(Dream), 만들고(Design), 누리는(Play)’

DDP(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DDP는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에 위치한 복합 문화 공간입니다.

2014년 3월 21일 개관한 이래 DDP에서는 각종 전시, 패션쇼, 신제품발표회, 포럼, 컨퍼런스 등 다양한 문화 행사가 진행되어 왔습니다.

 

DDP는 디자인 트렌드가 시작되고 문화가 교류하는 장소입니다.

세계 최초 신제품과 패션 트렌드를 알리고, 새로운 전시를 통해 지식을 공유하며, 다양한 디자인 체험이 가능한 콘텐츠로 운영됩니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DDP는 아시아로, 세계로 향하는 ‘디자인·패션산업의 발신지’의 역할을 할 것입니다.

 

운영 시간 안내

-배움터 : 화~목(일요일, 공휴일) 10:00-19:00 / 금~토 10:00-21:00 (※매주 월요일 휴관)

-살림터 : 평일 10:00-21:00 / 주말 또는 공휴일 10:00-22:00 (※매월 세번째 월요일 휴관)

- ※ 알림터는 프로그램에 따라 운영 시간이 다름

 

 

세계 최대 규모의 3차원 비정형 건축물 DDP

 

여성 건축가로서는 최초로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자하 하디드(Zaha Hadid)가 설계한 DDP는 세계 최대 규모의 3차원 비정형 건축물입니다.

자하 하디드의 DDP설계안에는 동대문 지역이 지니고 있는 역사적·문화적·사회적·경제적 토대 위에 새로운 미래적 가치와 비전을 더한 동대문의 새 풍경이 담겨 있었습니다. 자하 하디드는 이른 새벽부터 밤이 저물 때까지 쉴 새 없이 변화하는 동대문의 역동성에 주목해 곡선과 곡면, 사선과 사면으로 이뤄진 특유의 건축 언어로 자연물과 인공물이 이음새 없이 이어지는 공간을 만들어냈습니다. 이러한 콘셉트를 기반으로 DDP는 동대문이 갖는 상징성에 새로운 풍경을 더하게 되었습니다.

 

건립 개요

-위 치 : 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 281 DDP(20필지, 옛 동대문운동장 터)

-규 모 : 연면적 86,574m2(지하3층, 지상4층, 최고높이 29m)

-건립 기간 : 2009.04.28 ~ 2014.03.21

2009.04.28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착공식 및 홍보관 개관

2009.10.27 동대문역사문화공원 개장

2013.11.30 DDP 완공

2014.03.21 DDP 개관

 

-시설 공간 : 5개 시설 15개 공간

알림터(4,953.48m2) : 알림 1관, 알림 2관, 국제회의장

배움터(7,928.49m2) : 디자인박물관, 디자인전시관, 디자인둘레길, 박물관 카페

살림터(8,206.08m2) : 살림 1관, 살림 2관(크레아), 잔디사랑방(히노스레시피), 디자인나눔관

디자인장터 : 문화콘텐츠, 체험, 숍인숍이 결합된 복합편집형 매장

어울림광장 : DDP 방문객의 편의제공 및 주변상권 활성화를 위한 공간 (24시간 개방)

동대문역사문화공원(4,110.60m2) : 친환경 디자인공원(디자인갤러리, 운동장기념관, 동대문역사관 등)

 

-설계자 : 자하 하디드 아키텍츠+삼우종합건축사무소

-시공사 : ㈜삼성물산

-운영 기관 : 서울디자인재단

 

Zaha Hadid 1950-2016

 

“건축은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 할 수 없는 것들을 생각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DDP는 문화의 지속적인 변화와 성장을 고려하여 설계된 건축물입니다. 대중과의 관계에 끊임없이 도전하고 의문을 던져 서울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내리라 기대합니다.

 

자하 하디드는 건축과 도시, 그리고 디자인의 경계를 끊임없이 시험하는 혁신적인 건축가로 알려졌으며 2004년 여성 최초로 프리츠커 건축상(Prizker Architecture Prize)을 수상했습니다.

주요 작품으로는 독일의 패노 과학관, 비트라 소방서, 인스부르크의 베르그이젤 스키 점프대, 신시내티의 로젠탈 현대 미술관 등이 있습니다. 또한 런던의 건축재단, 2012년 런던 올림픽 해양관, 아부다비의 세이크 제이드 대교, 구겐하임공연예술센터, 두바이의 비즈니스베이 타워, 몽펠리에의 피에르 바이브 빌딩 등 다수의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DDP 건축 스토리

 

대한민국 최첨단 공법의 집약체 / 세계 최대의 3차원 비정형 건축물 / 45,133장의 각기 다른 외장 패널의 제작과 설치 / 외부도 내부도 직선 하나 벽 하나 없는 건축물 / 5가지 건축 기술 / 종이로만 그려낸 DDP를 실제로 구현

 

▶ 3차원 첨단설계기법 BIM 도입

 

세계적인 건축가 자하 하디드(Zaha Hadid)의 비정형 설계를 실제의 건축물로 구현하는 것은 기존의 2D 도면 설계방식으로는 시공 및 검토가 불가능했습니다.

하지만 서울시, 서울디자인재단, 삼성물산은 한국의 순수 기술을 활용해 전체 공사를 3차원 입체설계 방식인 BIM(Building Information Modeling)을 도입하여 완성시켰습니다.

최근의 경향은 일반적인 건축물에서도 사전검토를 위해서 BIM 기법을 적용하기는 하지만 건축물 외벽과 같은 일부분에 대해서만 적용한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DDP는 초기 터파기 공정부터 건축구조 건축인테리어마감 그리고 MEP(Mechanical Electrical Plumbing 기계전기배관), 조경부분까지 전 공정에서 BIM을 적용한 실질적인 최초의 사례라고 볼 수 있습니다.

BIM을 통해 제각기 다른 외장 패널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자동화 제작할 수 있었으며, 설치 시공에 있어서도 다시 고칠 필요 없이 한 번에 부착이 가능했습니다.

 

▶ 메가 트러스(Mega-Truss) 공법

 

자유분방하고 물결치듯 이어지는 곡선과 더불어 기둥이 보이지 않는 실내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메가트러스와 스페이스 프레임(Space Frame)이 적용되었습니다. 스페이스 프레임으로 장스팬과 곡면을 구현하면서 캔틸레버(Cantilever) 방식의 스페이스 프레임을 지지하기 위해 일반건축물이 아닌 교량 등의 큰 구조물에 들어가는 메가트러스를 사용한 것입니다. 이러한 기술적 기반으로 DDP 내부에 기둥이 없는 대형 공간들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 45,133장 외장패널공사

 

한 장도 같은 것이 없는 45,133장의 알루미늄 패널.

DDP와 일반 건축물의 가장 큰 차이점은 외관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비정형 외장 패널 입니다.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외관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외장 패널은 45,133장의 규격 및 곡률, 크기가 전부 달라 기존 생산방식 및 시공방법으로는 디자인구현, 품질확보, 공기 준수가 불가하고 국내·외에 벤치마킹할 수 있는 사례가 전무했습니다. 외장패널 공사를 정해진 비용과 공기 내에 성공적으로 구현하기 위해 삼성물산은 선박, 항공기, 자동차 등 모든 금속 성형분야의 기술들을 총 망라하여 세계 최초로 2차곡면 성형 및 절단 장비를 제작했습니다.

 

▶ 노출콘크리트공사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 동대문디자인플라자는 건물 안팎에 다양한 모양의 비정형 노출콘크리트를 도입했습니다.

노출콘크리트는 거푸집을 떼어낸 콘크리트 표면에 별도의 마감을 하지 않고 콘크리트 구조체를 그대로 노출하는 마감이기 때문에 거푸집 제작 및 콘크리트 타설 시, 정밀한 작업과 품질관리가 요구됩니다. 게다가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 노출콘크리트는 자유 곡선으로 이루어진 비정형으로써 고난이도 작업이었습니다.

3차원 비정형 노출콘크리트를 구현하기 위해 삼성물산은 BIM을 활용 비정형 구조체의 단면을 300mm 간격으로 추출해 거푸집을 제작하는 Rib 합판 거푸집 공법을 적용했습니다. 그리고 비정형 내부 기둥 거푸집 제작에는 외장패널 성형장비를 이용, 스테인레스 스틸(Stainless Steel)과 알루미늄을 함께 적용해 매끈한 비정형 노출 콘크리트를 구현해냈습니다.

 

▶ 3차원 비정형 곡면 구현 내부마감공사

 

동대문디자인플라자의 내부 마감 모습도 외장 판넬과 같이 모든 면이 각기 다른 곡률과 형태로 설계된 3차원 비정형 형태로 곡면 구현이 가능하고 내화성이 있는 우수한 친환경 마감자재인 천연석고보드, G.R.G보드(Glassfiber Reinforced Gypsum Board), 코튼흡음재, 인조대리석 등으로 시공했습니다.

동일한 모양이 하나도 없는 3차원 비정형 형태인 내부 마감공사도 일반적인 설계기법으로는 구현이 어려워 외장판넬 시공과 마찬가지로 최첨단 설계기법인 BIM을 도입했는데, 본공사 시공에 앞서 비정형 내부 마감 형상의 실물 크기 모형(Visual Mock-up)을 수차례 제작함으로써 시공성 및 품질 향상방법을 모색하여 높은 수준의 시공품질을 확보했습니다.

[출처: www.ddp.or.kr/ ]

 

횡단보도를 건너 광희문에 도착했다.

 

▲ 한양도성 광희문

 

◉ 광희문(光熙門)

한양도성의 동남쪽에 있는 문이다. 시구문(屍口門) 또는 수구문(水口門)이라고도 불리웠다. 일제강점기에 일부 무너지고 1960년대에 퇴계로를 내면서 반쯤 헐렸던 것을 1975년 원 위치에서 남쪽으로 15m 떨어진 현 위치에 중건하였다.

 

※ 광희문 바깥의 마을, 신당동의 유래 : 광희문은 시체가 나가던 시구문이다. 일반 백성들도 출입하기를 꺼리는 문이었으나 왕의 신분으로 이 문을 이용한 왕이 있었다. 인조는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 군사가 예상보다 빨리 도성에 접근하자 광희문을 통해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다. 한편 문 밖은 노제 장소였기 때문에 무당집들이 많아 신당리(神堂里)로 불렸는데, 갑오개혁 이후 신당리(新堂里)로 바뀌었다.

[출처: 한양도성 홈피]

 

광희문을 보노라니 기분이 묘했다. 한쪽 팔이 없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 흥인지문으로 이어지는 성벽은 없고, 남산으로 이어지는 성벽은 계속 이어지는데….

그러나 남산으로 이어지던 성벽도 이내 자취를 감췄다.

그리고는 장충동 주택지역을 지난다.

 

◉ 장충동 주택지역

광희문 성벽을 따라 장충동 주택가로 들어서면 한양도성은 다시 자취를 감춘다. 1930년대에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이 일대에 문화주택 단지를 조성하면서 한양도성의 상당 부분을 훼손했으며, 해방 후 1960~70년대에 신축된 주택들도 성벽을 파괴하였다. 현재 성돌은 주택의 담장이나 축대로 사용되고 있다.

[출처: 한양도성 홈피]

 

장충동 주택지역을 지나면 8차로의 넓은 동호로가 나온다. 지하로는 서울지하철 3호선(우측은 동대입구역, 좌측은 약수역이 지척에 있다)이 지나간다.

길 건너 횡단보도 우측에 장충체육관이 있다.

 

◉ 장충체육관

1963년 2월 개장한 국내 최초의 실내체육관으로 2015년 1월 리모델링을 통해 재개장한 시립체육시설이다. 체육관 규모는 지하2층, 지상3층 건물로 관람석은 4,507석이며, 체육관 외부는 원의 형태이고 돔으로 된 지붕을 가지고 있다. 체육관 내부의 원형 코트는 배구, 농구, 핸드볼 경기가 가능하고 각종 문화행사가 개최되고 있어 도심 속에 위치한 스포츠와 문화복합시설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다.

[출처: 한양도성 홈피]

 

횡단보도를 통해 길을 건너니 사라졌던 한양도성이 나타났다.

이제부터 남산구간이 시작이다.

 

 

★ 남산(목멱산) 구간

 

▶구간 : 장충체육관 ~ 백범광장

▶거리 : 4.2km

▶소요시간 : 약 3시간

 

장충체육관 뒷길에서 남산공원까지 이어지는 구간이다. 남산(목멱산, 해발 270m)은 서울의 안산(案山)에 해당하여 조선 초기부터 국태민안(國泰民安)을 비는 국사당을 이 산에 두었다. 또 정상에는 변방의 변란을 알리는 봉수대를 설치하여 궁궐에서 직접 살필 수 있게 하였다. 한강 남북을 포괄하는 현재 남산은 서울의 행정구역상 중심부에 해당하며 정상 부근에는 서울의 지리적 중심임을 표시하는 ‘서울 중심점’이 설치되어 있다. 1921년부터 1925년까지 일제가 남산 중턱에 조선신궁을 지으면서 주변 성벽을 대부분 파괴했으나 1970년대 이후의 성곽 보존 · 정비 사업과 1990년대 중반 남산 제 모습 찾기 사업을 통해 현재는 옛 모습을 상당 부분 회복하였다.

 

■ 남산-24시간 개방 (신라호텔~반얀트리클럽&스파서울 안쪽 구간 09:00~18:00)

■ 장충체육관 뒷길은 주택 지역이므로 주민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배려가 필요하다.

 

■ 장충체육관-장충체육관 뒷길(도성 바깥·안쪽 길)-우수조망명소(용산구 방향)-반얀트리클럽&스파서울-국립극장-나무계단길-남산공원 이용자 안내센터-N서울타워 -남산 팔각정(목멱산 봉수대 터)-남산 케이블카 승강장-잠두봉 포토아일랜드-한양도성 유적전시관(건립중)-안중근 의사 기념관-백범광장

[출처: 한양도성 홈피]

 

 

성벽을 보면서 완만하게 올라간다.

얼마간 올라가니 암문이 나와 통과하여 도성 안으로 들어갔다.

넓은 도성 내부 길을 따라 조금 올라가니 좌측에 팔각정이 있는 삼거리가 나온다.

이곳에서 팔각정 쪽으로 가면 서울숲으로 갈 수 있다.

 

한양도성 순성길은 반얀트리클럽과 남산 가는 길로 가야한다. 이곳에서 국립극장까지 700m이다.

이내 초록색의 높은 담장(테니스장, 풋살필드, 골프연습장)을 끼고 데크길을 가면 이내 길이 없어진다.

이젠 반얀트리클럽 내부로 들어가서 우측 아래로 내려가 정문을 통과하면 국립극장 앞 5차로 도로가 나온다.(15:18)

 

횡단보도를 건너니 건너편에 남산공원 글자 입간판이 세워져 있고, 그 뒤로 동상이 세워져 있어서 궁금하여 길을 건넜다.

확인하니 김용환 동상이었다.

 

▲ 김용환 지사 동상

 

김용환 (金龍煥, 1918~1968)

김용환은 1918년 경북 의성 출신으로 「재일본 대한민국 거류민단」에서 활동한 인물이다. 「재일본 대한민국 거류민단」은 1946년 설립된 재일동포의 권리증진과 번영 및 친목도모를 위해 설립한 재외국민 단체로서, 도쿄에 중앙본부를 두고 재일동포의 법적 지위 향상, 민생 안전, 문화 증진, 국제 친선 등을 도모하는 일을 해왔다.

광복 직후 좌우 대립의 과정에서 북한을 지지하는 「조총련」계에 대항하는 성격을 띠었으며,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이승만 정권이 재일동포 공인단체로 인정하였다. 1949년 「재일본 대한민국 거류민단」으로 바꾼 뒤, 1994년 「거류」라는 두 글자가 빠지고 「재일본 대한민국 민단」으로 변경되어 현재까지 활동하고 있다.

김용환 지사는 일본 나고야[名古屋]시 아이치[愛知]현 거류민 단장으로 동포의 단결과 조직의 강화를 위해 힘썼다. 1968년 11월 13일 회의 중 일본도를 든 괴한으로부터 습격받아 51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젊은 나이에 유명을 달리한 김용환을 안타까워하는 재일동포들의 성금 모금과 정부의 후원으로 서울 남산에 김용환 지사의 동상이 세워지게 되었다.

이 조각상은 우리나라의 1세대 조각가인 최기원 전 홍익대학교 교수에 의해 제작되었고, 글씨는 한글 서예가인 서희환이 썼다.

[출처: 현지 안내판]

 

1970년 10월 2일에 세운 김용환 지사 동상 앞면에는 김용환 지사 모습, 뒷면에는 약력이 적혀 있다.

 

김용환 지사 동상을 본 후 다시 길을 건너 국립극장 쪽으로 돌아왔다. 공사중이라 어수선한 국립극장을 뒤로 하고 남산을 향해 올라갔다.

 

「한국일보사 한국거북이마라톤대회」 라고 쓴 대형 표지석을 지나니 중구와 용산구의 경계를 나타내는 표지판이 도보블록에 박혀 있다. 그리곤 없어졌던 한양도성 성곽이 나타났다.

 

길 건너 도성 성곽과 나란히 있는 나무계단을 올라간다. 이곳에 이정표도 세워져 있다. 그러니까 한양도성 순성길을 가려면 이곳에서 도로 따라 가면 안되고 나무계단을 올라가야 한다.(15:31)

 

제법 높은 계단을 올라가니 숨이 차기 시작한다. 헉헉대며 한동안 올라가니 전망대가 나오는데 여지껏 힘들게 올라온 보람을 느끼게 해준다.

발 아래로 국립극장, 신라호텔, 반얀트리클럽, 한강 등이 잘 보인다.

 

전망대에서 잠시 내려가 이제는 다소 완만해진 계단을 올라가니 차도와 만난다.

남산 정상 버스정류장 앞에 있는 남산 전망대에 도착했다.

이곳에 조망도가 설치되어 있다. 팔각 광장에도 조망도가 설치되어 있고, 특히 이곳에는 바닥에 남산 서울밤풍경(낙산과 함께 야경이 아름다운 곳)이라고 쓴 동판이 박혀 있다. 날씨가 흐려있어서 아쉬웠다.

 

◉ 남산 팔각정과 국사당 터

남산 팔각정 자리는 조선시대 국사당(國師堂)이 있던 자리이다. 조선 태조는 남산을 목멱대왕으로 삼고 이 산에서는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원하는 국가 제사만 지낼 수 있게 하였다. 1925년 일제가 남산에 조선신궁을 지으면서 인왕산 기슭에 옮겨졌다. 제1공화국 때에 원 국사당 자리에 탑골공원 팔각정과 같은 모양의 정자를 짓고 이승만 대통령의 호를 따 ‘우남정’이라고 하였는데, 4·19 혁명 이후 팔각정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출처: 한양도성 홈피]

 

 

남산공원의 발자취

남산은 서울의 중심부에 있는 서울의 상징으로 해발 270m이다. 본래 이름은 경사스러운 일들을 끌어 들인다는 「인경산(引慶山)」이었으나 조선 초 태조 이성계가 남산의 산신에게 목멱대왕이란 벼슬을 내리고 제사를 지내면서 「목멱산(木覓山)」이란 이름으로 봉하였다. 그러다 조선시대 한양의 남쪽에 있는 주작에 해당한다는 의미의 「남산(南山)」으로 자연스럽게 불리게 되었다.

1940년 3월에 남산 일대가 공원으로 지정되어 1968년 9월 식물원 개관, 일제 강점기와 대 성장기를 거치면서 많은 건물과 시설이 들어서면서 본래의 모습이 훼손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91년부터 10년간 「남산 제 모습 가꾸기」사업을 통해 훼손된 지형을 복원하고 <야외식물원>, <야생화단지>, <한옥마을>등을 조성하여 시민의 공원으로 재탄생하게 되었다.

[출처: 현지 안내판]

 

남산공원의 발자취 안내판을 보고 서울의 중심점까지 봤다.

 

◉ 서울 중심점

서울의 한가운데는 어디일까. 위성항법장치(GPS)로 측량한 결과 서울의 지리적 중심점이 남산 정상부에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 자리에는 서울의 중심점임을 표시하는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

[출처: 한양도성 홈피]

 

▲ 서울의 중심점

 

서울의 중심점

서울은 조선 태조 3년(1394) 한양 천도로 도읍지가 되어, 시대의 흐름에 따라 행정구역 확장이 이루어져 한양 도성 중심에서 한강의 남북을 아우르게 되었다. 따라서 서울의 지리적 중심점은 남산의 정상인 현 위치에 이르게 되었다.

이 표지는 우리나라의 지리적 위치 결정을 위한 측량의 출발점인 대한민국 최초의 경위도 원점이었던 곳에 설치된 것으로, 국가기준점(서울25삼각점)과 지리적삼각점으로서 측지와 지적측량에 쓰인다.

 

위치: 서울특별시 중구 예장동 산5-6

좌표: 위도 37 〬 33 ′06.6 ″ 경도 126 〬 59 ′19.6 ″ 높이 267,

 

※1.이 표지는 측량의 기준이 되는 중요한 시설입니다.

2.관리자: 국토해양부 국토지리정보원장, 서울특별시장

[출처: 현지 안내판]

 

서울의 중심점은 넓은 보도블록 공터에 정원의 형태에 중앙(남산)에 다시 원형의 기둥을 세우고 좌표를 표시했다. 주위에 벤치와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이어 N타워까지 구경했다. 남산에 많이 왔어도 N타워 내부까지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볼 만 했다. 엄청난 양의 형형색색 자물쇠가 각각의 벽면마다 걸려 있는 것이 인상 깊었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조망도 훌륭했다.

 

◉ N서울타워

남산 정상에 우뚝 솟은 전망 탑으로 해발 480m 높이에서 360도 회전하면서 서울시 전역을 조망할 수 있는 명소이다. 1969년 수도권에 TV와 라디오 전파를 송출하는 종합 전파탑으로 세워졌다가 1980년부터 일반에 공개됐다. 이후 대대적인 보수를 거쳐 2005년 복합문화공간인 N서울타워로 재탄생하였다. 2층에서는 한양도성에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N서울타워 전망대 이용시간 : 월요일~금요일/일요일 10:00~23:00 | 토요일 10:00~24:00

*N서울타워 전망대 2층(T2)에서 서울 한양도성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출처: 한양도성 홈피]

 

전망대에서 내려와 봉수대지로 향했다.

5기의 봉수대가 있는 봉수대 터에는 안내판도 세워져 있다.

 

◉ 목멱산 봉수대 터

<기념물 제14호> 목멱산 봉수대는 조선시대 전국팔도에서 올리는 봉수(烽燧)의 종착점이었다. 봉수란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변방의 정세를 알리는 시각(視覺) 신호를 말한다. 평시에는 1개의 봉수를 올렸으며, 변란이 생기면 위급한 정도에 따라 2개부터 5개까지 올렸다. 목멱산 봉수대는 세종 5년(1423)에 설치되어 1895년까지 500여 년 간 존속하였다. 현재의 봉수대는 1993년에 추정 복원한 것이다.

[출처: 한양도성 홈피]

 

▲ 목멱산(남산) 봉수대 터에 설치된 봉수대 모형

 

목멱산 봉수대 터

지정번호: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14호 / 시대: 조선시대

소재지: 서울특별시 중구 예장동 8번지 1호

 

목멱산(木覓山) 봉수대 터는 서울에 있다고 하여 경봉수(京烽燧)라고도 불렸었는데 전국의 봉수가 집결되었던 곳이다. 봉수제도는 신호체계에 따라 연기나 불을 피워서 변방의 긴급한 사정을 중앙까지 전달하여 알리며, 해당 지역의 주민들에게도 알려 빨리 대처하도록 하는 일종의 통신수단이다. 멀리 바라보기 좋은 높은 산봉우리에 봉수대를 설치하여 불을 피워서 낮에는 연기,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를 알아볼 수 있도록 하였다. 전국 각지에서 오는 봉수는 남산에서 집결하였고, 남산 봉수대는 제1봉수대부터 제5봉수대까지 다섯 곳의 봉수대가 있었다.

제1봉수대는 함경도-강원도-양주 아차산, 제2봉수대는 경상도-충청도-광주 천림산, 제3봉수대는 평안도 강계-황해도-한성 무악 동봉, 제4봉수대는 평안도 의주-황해도 해안-한성 무악 서봉, 제5봉수대는 전라도-충청도-양천 개화산에 이르는 봉수를 받았다.

이곳은 1993년에 김정호의 <청구도> 등의 관련 자료를 참고해서 남산의 다섯 개 봉수대 중 하나를 복원한 것이다.

[출처: 현지 안내판]

 

봉수대 터 근처에 있는 쉼터에는 형형색색 자물쇠들이 많이 걸려있다.

이제 남대문(숭례문)을 향해 내려간다.

 

남산케이블카 건물을 지나 조금 더 내려가니 잠두봉 포토 아일랜드가 나온다. 전망이 무척 좋은 곳이다.

이곳 전망대에 「잠두봉 포토아일랜드(북측지점)」이라고 쓴 조망도가 설치되어 있다.

서울시교육연구정보원, 힐튼호텔, 안산, 인왕산, 한국은행, 북악산, 북한산, 도봉산, 수락산, 불암산, 남산골한옥마을 등이 보인다는데 아쉽게도 날씨가 흐려 있어서 희미하다.

 

◉ 잠두봉 포토아일랜드

남산 서쪽 봉우리는 누에머리를 닮았다하여 예부터 잠두봉이라 불렸다. 이곳 전망대에 오르면 내사산으로 둘러싸인 도심의 빌딩숲이 한눈에 들어온다.

[출처: 한양도성 홈피]

 

계단을 다 내려오니 한양도성 유적전시관이 반긴다.

 

[참고자료]

 

■ 한양도성 유적전시관

 

소개

 

한양도성 유적전시관은 2013년~2014년 발굴조사를 통해 드러난 성벽 유적을 전시하고 있다.

이 유적은 한양도성 남산 구간의 일부로 그동안 멸실된 줄로만 알았던 성벽 구간이다. 전시관이 자리 잡은 남산 자락은 한양도성의 오랜 역사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장소이다. 한양도성 유적(1396)-조선신궁 배전 터(1925)-남산 분수대(1969) 등을 포괄하는 전시관 권역에서는 조선시대 축성의 역사, 일제강점기의 수난, 해방 이후의 도시화, 최근의 발굴 및 정비 과정을 모두 볼 수 있다.

 

한양도성 유적

 

전시관 일원에서는 총 길이 약 189m의 한양도성 유적이 발굴되었다. 한양도성은 조선 왕조 내내 지속적인 보수를 통해 유지되었다. 이 유적은 태조(14세기), 세종(15세기), 숙종 이후(18~19세기)에 쌓았던 부분들이 하나의 성벽을 이루고 있어 시기별 축성양식의 변화를 확인할 수 있다. 성벽을 쌓을 때 임시로 나무 기둥을 박았던 구멍의 흔적들도 함께 발굴되었다.

 

조선신궁 배전 터

 

한양도성 남산 구간은 1925년 일본의 식민통치를 상징하는 조선신궁 건립으로 크게 훼손되었다. 이 건물지는 조선신궁 내 배전(拜殿, 방문객들이 절하며 참배하는 곳)의 기초 구조물로 성벽 발굴조사 때 함께 발견되었다. 일제가 한양도성을 철거하고 그 위에 조선신궁을 세웠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현장이다.

 

분수대

 

광복 이후 조선신궁이 없어진 자리에는 이승만 대통령 동상이 들어섰다가 4·19 혁명으로 철거되고 1968년부터 남산 식물원과 분수대가 자리 잡았다. 둘레 20m의 분수대는 당시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컸으며 나들이 장소로 사랑받았다. 2006년 ‘남산 제모습 가꾸기’ 사업으로 식물원은 철거되었으나 분수대 광장은 발굴 전까지 유지되었다.

 

방공호

 

일제강점기에 설치된 이 방공호는 적군의 공중 공격을 피하기 위한 방어시설이었다. 1941년 태평양 전쟁을 앞두고 일본은 경성(현재의 서울)에 1만 개의 방공호를 만들겠다는 계획을 발표하고 건설을 추진했다. 입구 계단을 내려가면 약 33㎡의 방과 긴 통로가 있는데, 관람객 안전을 위해 내부 관람은 제한하고 있다.

 

각자성석(글자를 새긴 성돌)

 

축성과 관련된 글자를 새긴 돌이라는 뜻이다. 천자문 순서로 표시된 축성구간 명칭(14세기), 축성 담당 지방(15세기), 공사 관계자의 이름(17세기 이후) 등을 새겼다. 발굴조사에서 발견된 ‘내자육백척(奈字六百尺)’ 각자성석은 14세기의 것으로 이 구간의 명칭이 천자문의 60번째 글자인 ‘내(奈)자’였음을 보여준다.

 

■ 관람안내

 

관람시간 : (3월~10월) 09:00~19:00 / (11월~2월) 09:00~18:00

정기해설 :

평일(한국어 해설)

오전 : 10시, 11시30분

오후 : 14시, 16시

주말·공휴일(한국어, 영어 해설)

오전 : 10시(한국어), 10시30분(영어), 11시30분(한국어)

오후 : 14시(한국어), 15시(영어), 16시(한국어), 16시30분(영어, 12~2월 중에는 미운영)

전화 : 02-779-9870~1

관람시 유의사항 : 코로나19 예방 행동수칙(마스크 착용, 거리두기 등)을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유적 및 전시관 시설에 손을 대거나 손상을 입힐 수 있는 행위는 삼가주십시오.

전시관 내 모든 공간은 금연구역입니다.

음식물 반입과 애완동물 출입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어린이들을 동반한 보호자께서는 어린이의 안전·보호와 관람 질서를 부탁드립니다.

단체관람은 사전에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 오시는길

 

버스 : 402번, 405번 / 02번, 04번(녹색순환)

남산도서관(03-167, 03-168) 하차 (도보 5분)

지하철 : 1, 4호선 서울역 → 남산방면 (도보 25분)

4호선 회현역 → 남산방면 (도보 20분)

주차 : 주차공간이 협소하오니 대중교통을 이용 바랍니다.

주소 : 서울시 중구 회현동1가 100-267 일대

[출처: 한양도성 홈피 < 한양도성 유적전시관]

 

 

▲ 안중근 의사 동상

 

한양도성 유적전시관을 지나니 대한국인 안중근 의사 동상과 안중근 의사의 친필이 새겨진 표지석이 여러 개 세워진 곳을 잠시 감상했다.

또한 와룡매(臥龍梅) 안내판도 세워져 있다.

 

▲ 남산의 와룡매 (홍매)

 

▶ 일본이 뽑아간 와룡매, 자목은 고국 남산으로= 남산 안중근 기념관 앞에 있는 와룡매라 불리는 매화 두 그루(홍매화와 백매화)가 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 장수가 창덕궁에 있던 매화나무를 뽑아 일본에 가져다 심었다. 일본 미야기현 마쓰시마 즈이간지(瑞巖寺)의 본당 앞에 있는 홍매화와 백매화가 그 주인공이다. 매화가 용이 엎드려 있는 모습이라 하여 와룡매라고 부른다. 일본의 천연기념물로 지정될 정도로 사랑받고 있지만, 우리에게는 뼈아픈 역사이다. 1998년에 즈이간지 주지가 한일 친선의 상징으로 와룡매의 가지를 떼어 접목한 묘목을 기증하기로 하면서 1999년에 안중근 의사 추도식에 맞춰 400년 만에 우리 땅으로 돌아와 안중근 기념관 앞에 식재됐다. 오랜 이야기를 지닌 매화가 안중근 의사를 추모하는 기념관 앞에 놓여 있으니 더욱 숙연한 느낌이 든다. 하지만 앞으로 와룡매는 더 많은 꽃을 피워내며 우리나라가 그랬던 것처럼 화려하게 성장할 것이다.

[출처: 사진・글 / 서울관광재단]

 

 

이밖에 서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비와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조형물

 

 

기림비는 손을 맞잡고 있는 한국 ․ 중국 ․ 필리핀 세 소녀를 김학순 할머니가 바라보고 있는 형상이라고 한다. 시기가 시기인지라 동상이 마스크도 쓰고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 옷도 걸쳐 입고 있었다.

 

 

◉ 남산 회현자락 유구 발굴현장

남산 안중근 의사 기념관 주변은 1925년 일제가 조선신궁을 지으면서 성곽을 훼손했던 곳이다. 서울시는 2013년 한양도성 보존 관리 사업의 일환으로 이 일대를 발굴했는데, 발굴 결과 땅 속에 묻혀 있던 성곽의 기저부가 매우 양호한 상태로 모습을 드러냈다. 발굴 유구는 조선시대 축성 기법과 석재(石材)의 변천 과정을 알려주는 소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 백범광장 일대

남산의 백범광장 주변에는 백범 김구 선생 동상, 성재 이시영 선생 동상, 안중근 의사 기념관과 동상 등 항일 독립운동가를 기리는 기념물이 많다. 이곳은 일제강점기에 조선신궁이 있던 곳으로, 일제 식민지배의 상징을 항일 독립운동의 상징으로 대체한 것이다. 백범광장 일대의 한양도성은 일제강점기 조선신궁을 지을 때 모두 철거되거나 흙 속에 묻혔다가 최근 다시 쌓았다. 다만 지형 훼손이 심해 원형을 살릴 수 없는 구간에는 성벽이 지나던 자리임을 알 수 있도록 바닥에 흔적을 표시해두었다.

[출처: 한양도성 홈피]

 

이어 백범 김구선생 동상을 거쳐 백범광장공원 조망지점에 도착했다.

그리고는 잘 복원된 산성 따라 조금 내려가면 한양도성은 또 다시 자취를 감춘다. 이내 넓은 차도가 나온다. 남대문시장 8번 게이트 앞에서 남대문(숭례문)을 마지막으로 보고(17:20) 회현역에서 귀가했다.

 

 

4. 한양도성 순성길 더 많은 사진 보기

 

1.창의문에서 흥인지문까지

1. https://blog.daum.net/joingi61/15965514

2. https://blog.daum.net/joingi61/15965515

3. https://blog.daum.net/joingi61/15965516

4. https://blog.daum.net/joingi61/15965517

5. https://blog.daum.net/joingi61/15965518

6. https://blog.daum.net/joingi61/15965519

2.흥인지문에서 숭례문까지

7. https://blog.daum.net/joingi61/15965527

8. https://blog.daum.net/joingi61/15965528

9. https://blog.daum.net/joingi61/15965529

10.https://blog.daum.net/joingi61/15965530

11.https://blog.daum.net/joingi61/15965531

3.숭례문에서 창의문까지

12.https://blog.daum.net/joingi61/15965532

13.https://blog.daum.net/joingi61/15965533

14.https://blog.daum.net/joingi61/15965534

 

 

5. 한양도성 순성(巡城)길을 다녀와서 (後記 1-3) 보기

 

https://blog.daum.net/joingi61/159655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