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도성 순성길 12] 숭례문에서 창의문까지 1
2021년 2월 17일(수) 답사
★ 숭례문 구간
구간 : 백범광장 ~ 돈의문 터
거리 : 1.8km
소요시간 : 약 1시간
백범광장에서 숭례문을 지나 돈의문 터까지 이어지는 구간이다. 한양도성의 정문인 숭례문은 한강과 도성을 최단거리로 잇는 문이어서 사람과 물자의 통행도 가장 많았다. 상업이 발달한 조선 후기에는 문 밖에 칠패시장, 문 안 선혜청 창고 앞에 남대문 조시(朝市)가 만들어졌다. 이중 칠패시장은 종루, 이현(梨峴)의 시장과 함께 ‘도성삼대시(都城三大市)’로 꼽혔으며, 남대문 조시는 오늘날의 남대문시장으로 이어졌다. 서구(西歐) 각국과 통상조약을 체결하고 서울을 개방한 이후에는 남대문 인근의 정동에 각국 공사관(公使館)과 외교관 사택, 선교사들이 세운 교회와 학교들이 들어섰다. 1899년 전차가 개통됨에 따라 숭례문은 더 이상 문의 구실을 못하게 되었고, 1907년에는 교통 불편을 해소한다는 명목으로 숭례문 양쪽 성벽이 철거되었다. 이후에도 남대문로 주변에 대형 건축물이 들어설 때마다 성벽이 철거되어 숭례문 주변에서는 옛 성벽을 찾아보기 어렵다. 현재 숭례문 구간에서 한양도성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은 세 군데 있다. 밀레니엄 서울힐튼과 SK남산빌딩 뒤쪽의 성벽,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올리브 타워로 이어지는 길가에 성벽 일부가 담장처럼 남아있으며, 창덕여자중학교 담장 아랫부분에서 50m 정도의 성벽을 볼 수 있다.
■ 숭례문 - 연중상설(월요일 휴무) 관람시간 09:00~18:00, 여름철(6월~8월) 09:00~18:30, 겨울철(11월~2월) 09:00~17:30
■ 숭례문 구간은 성곽의 자취를 찾기 쉽지 않으므로 순성길에 대한 사전학습이 필요하다.
■ 백범광장-숭례문-남지 터-대한·서울상공회의소-소의문 터-배재학당동관·배재공원-러시아대사관-창덕여중-돈의문 터(돈의문박물관마을)
(점선으로 된 이화여자고등학교 내부 순성길은 해설사 프로그램을 통해서만 진입이 가능하다.)
구간 주요지점
◉ 숭례문(崇禮門)
<국보 제1호> 한양도성의 남대문이자 정문이다. 1395년에 짓기 시작하여 1398년 완공하였고, 1448년에 개축하였다. 1907년 교통에 불편을 초래한다는 이유로 좌우 성벽이 헐린 뒤에는 문화재로만 남았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었으나 2008년 2월 화재로 목조인 1층 약 10%, 2층 문루 약 90%가 소실되었다가 2013년 5월 복구되었다. 이때 숭례문 서쪽 16m, 동쪽 53m의 성벽을 연결하였다.
* 숭례문 현판 : 현판의 글씨를 세로로 내려 쓴 이유는 숭례문을 마주하는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누르기 위한 방책이라는 이야기가 전한다. 달리 숭례문의 예(禮)가 사람을 바로 세우는 덕목이라서 그랬다는 설도 있다.
◉ 남대문시장과 칠패시장
남대문시장은 1897년 1월에 개장한 한국 최초의 도시 상설시장이다. 조선 초에는 이곳에 상평창이 있었는데, 17세기 대동법 시행을 계기로 선혜청 창고로 바뀌었다. 1894년 조세금납화 조치에 따라 현물을 보관할 필요가 없어지자 이 창고를 상인들에게 내 주어 시장으로 삼았다. 남대문 밖에는 칠패(七牌) 시장이 있어 종루(종로4거리), 이현(흥인지문 안)과 더불어 조선 후기 3대 시장 중 하나로 꼽혔다. 칠패라는 명칭은 이곳이 어영청 제7패의 순라길이었던 데에서 비롯되었다.
◉ 대한·서울상공회의소 부근 성벽
대한·서울상공회의소 부근에 성벽 일부가 담장처럼 남아 있다. 1907년 한양도성의 본격적인 철거는 여기에서부터 시작했다. 여장은 물론 체성조차 흔적을 찾을 수 없게 훼손되었는데, 최근 옛 성돌의 흔적 위에 새로 몇 단을 쌓아 올렸다.
◉ 소의문 터 (昭義門)
사소문 중 하나로 도성의 서남쪽에 있는 문이다. 1396년 도성과 함께 축조되었으며 처음 이름은 소덕문(昭德門)이었다. 영조 20년(1744) 문루를 개축하면서 소의문으로 이름을 바꿨다. 광희문과 함께 성 밖으로 상여를 내보내던 문이었다. 1914년 일제의 시구개수사업 과정에서 헐려 지금은 소의문 터였음을 알리는 표석만 남아 있다.
* 소의문은 공포의 문이었다? : 소의문은 광희문과 함께 도성 밖으로 상여를 내보내던 문이었다. 소의문은 사형수를 처형장으로 끌고 나갈 때에도 사용되었다. 소의문 밖 넓은 마당은 조선시대 사형 집행장이었다. 천주교 순교자들 다수도 이 문 밖에서 처형당했기 때문에 외국인들 사이에서는 순교자의 문으로도 불렸다. 현재 서소문역사공원 안에 있는 순교자 현양탑은 이와 관련한 기념물이다.
◉ 배재학당동관(배재학당 역사박물관)
<기념물 제16호> 1916년 준공된 배재학당동관은 현재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배재학당은 1885년 감리교 선교사인 아펜젤러가 설립한 학교로서 1886년 고종이 ‘배재학당(培材學堂)’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유용한 인재를 기르고 배우는 집’이라는 뜻이다. 초창기 배재학당은 미국 문물 교류의 통로로서 수많은 근대 지식인을 배출하였다. 이승만·주시경·김소월·나도향·오긍선·신봉조 등이 이 학교 출신이다.
◉ 구 러시아공사관
<사적 제253호> 고종 27년(1890)에 완공된 르네상스식 건물로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정동의 상징적 건축물이었다. 을미사변 이후 신변에 위협을 느끼던 고종이 1896년 2월 이곳으로 피신해 1년 간 머물렀다(아관파천). 한국전쟁 중 건물 대부분이 파손되어 탑 부분만 남았다. 1973년 현재의 모습으로 정비했으며 2007년과 2010년 두 차례에 걸쳐 보수하였다. 구 러시아공사관 터는 현재 정동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 정동교회
<사적 제256호> 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가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기독교 감리교회이다. 고딕풍의 붉은 벽돌 건물로 1895년에 착공, 1897년에 완공하였다. 인근의 배재학당 · 이화학당과 더불어 개화기 미국 문물 도입의 통로 역할을 하였다.
◉ 이화여자고등학교 심슨기념관
<등록문화재 제3호> 1915년에 준공된 옛 이화학당 교사(校舍)로 현재 이화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화학당은 1886년 미국 감리교 여선교사인 메리 스크랜튼이 창설한 한국 최초의 여성교육기관으로, 이화학당이라는 이름은 1887년 왕후가 지어준 것이다. 학교 경내에 유관순 열사가 빨래하던 우물터와 ‘한국여성 신교육의 발상지’ 기념비, 유관순 동상, 손탁호텔 터 표석 등이 있다.
◉ 창덕여자중학교 담장
돈의문과 주변 성곽은 일제강점기 시구개수사업(1915) 과정에서 훼손되었는데 창덕여자중학교 담장에 일부가 남아 있다. 담장에는 ‘서대문 성벽의 옛터’라는 안내문이 있고, 담장 아랫부분에는 19세기 초 순조 때 쌓은 성벽이 50m 정도 이어져 있다. 이곳은 개화기 프랑스공사관이 있던 자리로 1896년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옛 프랑스공사관 건물의 머릿돌이 남아있다.
◉ 돈의문 터 (敦義門)
도성의 서대문인 돈의문이 있던 자리이다. 돈의문은 태조 때 처음 세워졌으나 태종 13년(1413)에 만들어진 서전문(西箭門)이 서대문의 기능을 대신하였다. 그 위치는 현재 정확히 알 수 없다. 세종 4년(1422)에 도성을 대대적으로 수축하면서 서전문을 닫고 새로운 돈의문을 세웠는데 현재 돈의문 터가 그 위치이다. 이후 돈의문은 새문 또는 신문(新門)으로도 불렸으며, 현재의 신문로라는 지명도 이에서 유래한다. 1915년 일제는 서대문을 지나는 전차를 개통하면서 이 문을 해체하여 건축자재로 매각하였다. 현재 돈의문 터에는 공공 미술품 ‘보이지 않는 문’이 설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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