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전라·제주 여행

다시 가고 싶은 섬, 추자도(楸子島)

약초2 2015. 9. 10. 19:29

 

 

다시 가고 싶은 섬, 추자도(楸子島)

1.날짜: 2015년 8월 1일(토)~3일(월): 2박3일

2.날씨: 사흘 내내 맑음

 

3.세부일정

[7월 31일(금요일)]

15:10 집 발

20:30 목포시 도착(숙박)

 

[8월 1일(토요일)]

-07:00 목포에서 출발

-08:30 완도항 착

-09:20 완도항 발(레드펄호) → 실제 09:30 출항

-11:20 추자도 신양항 착 → 실제 11:40 도착

-13:43 상추자도 대서리 유창민박집 발(올레길 답사 시작)

-13:49 추자항 여객선대합실

-16:54 추자교 착(상추자도, 올레길+나바론절벽+올레길 답사)

 

[8월 2일(일요일)]

-09:08 추자교(하추자도 방향) 발(하추자도 올레길 답사 시작)

-09:38 묵리교차로

-11:42 모정쉼터(사각정자. 황경한 묘) 착. 점심(도시락)식사

-12:45 발

-14:15 돈대산 착

-15:05 발

-15:27 묵리교차로 원위치

-16:00 추자교 원위치(하추자도 올레길 답사 종료)

-이후 민박집에서 저녁 먹고 다무래미 답사

 

[8월 3일(월요일)]

-08:00 아침식사

-이후 용등봉, 다무래미, 빼먹은 올레길 답사 후 민박집에서 짐 챙겨 작별인사 후 면사무소 들린 후

-하추자도 석지머리 답사

-17:30 신양항 발(레드펄호) → 실제 17:40 출항

-19:30 완도항 착 → 실제 19:45 도착

-이후 광주에서 호남고속도로→천안논산고속도로→경부고속도로 거쳐 02:00 귀가.

 

4.여행후기

 

[추자도에 대하여]

추자도는 추자군도에 속하는 섬으로 추자군도(楸子群島)는 제주시에서 가장 북쪽 제주해협에 위치한 군도로, 행정구역상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추자면에 속한다.

주 섬인 상추자도와 하추자도가 추자대교로 서로 연결되어 있고, 횡간도, 추포도를 포함한 4개의 유인도, 38개의 무인도로 이루어져 있다. 추자군도의 전체 면적은 7.05 ㎢이며, 인구는 2015년 7월 말 주민등록을 기준으로 1,133세대에 2,563 명이다.

 

다금바리를 제외한 모든 어종이 풍부한 지역이며, 일본까지 소문난 바다 낚시터로 많은 낚시인들이 찾는다. 겨울에는 주로 감성돔과 학꽁치, 봄에서 가을까지는 황돔, 흑돔, 농어 등이 잘 잡힌다. 부속 섬들의 대부분은 동남쪽해안이 절벽을 이루는 반면, 서북쪽은 경사가 완만하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제주도에 속하는데도 풍속은 전라도와 유사하다. 면소재지인 대서리에는 지방기념물 제11호(1971.8.26 지정)인 최영장군의 사당이 있으며, 이웃마을 영흥리에는 제주도 유형문화재 제9호 (1975. 3.12 지정)인 박처사각이 있다.

 

* 추자 10경

1) 우두일출(牛頭日出) - 우두도(속칭, 소머리섬)의 초여름 일출 광경이 소의 머리 위로 해가 뜨는 것과 같은 형상이다.

2) 직구낙조(直龜落照) - 상추자의 서북방 최단에 거북 모양을 한 직구도가 있는데 저녁노을이 매우 아름답다.

3) 신데어유(신데漁遊) - 하추자 예초리와 신양리 사이의 신데에는 천혜의 황금어장이 형성되어, 낚시꾼들이 즐겨 찾는다.

4) 수덕낙안(水德落雁) - 하추자의 남쪽 끝에는 사자 형상의 수덕도가 위풍당당하게 떠 있는데, 각종 물새가 사자머리에 해당하는 섬 꼭대기에 앉아 있다가 먹이를 쫓아 바다로 쏜살같이 하강하는 광경을 말한다.

5) 석두청산(石頭菁山) - 하추자도에 있는 청도라는 섬이 있는데, 마치 사람의 머리 같은 산꼭대기의 암반이 푸른빛을 띤다.

6) 장작평사(長作平沙) - 신양 포구의 해변을 가리키는데, 폭 20여m에 길이 300m의 자갈 해변이다.

7) 망도수향(望島守鄕) - 추자군도 섬들 가운데 가장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섬이 망도(속칭 보름섬)이다. 타향에 나갔던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올 때 먼 수평선에서 가물거리듯 망도가 시야에 들어오면 가슴을 설레게 한다. 추자군도의 수문장 역할을 한다고 전해진다.

8) 횡간추범(橫干追帆) - 횡간도는 제주도의 가장 북단에 위치하고 있다. 옛날에는 시원스레 펼쳐진 흰 돛을 단 범선들이 떠가는 풍경과 한데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을 연상케 했단다.

9) 추포어화(秋浦漁火) - 추포도는 제주도에 딸린 유인도 중 가장 작으면서도 멸치떼가 가장 많이 모이는 섬이다. 추자군도의 정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이 섬은, 어둠 속의 멸치잡이 불빛과 잘 어우러진다.

10) 곽게창파(곽게蒼波) - 추자도와 제주 본도의 중간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관탈섬의 또 다른 이름이 "곽게" 이다. 과거 유배객들이 제주도로 들어올 때에 이 섬 앞에 이르면 갓을 벗었다는 데에서 섬 이름이 유래되었다. 곽게섬 부근의 푸른 물결은 세상인연을 지워버릴 듯 무심히 너울거리며 흐른다. 그래서인지 더욱 푸르게 느껴진다.

 

현재 힘든 일을 하는 직장에 다니는 글쓴이로써 나흘 연속 쉬기는 하늘의 별따기(표현을 약간 과하게 씀) 만큼이나 힘이 들어 장거리 섬 여행은 언감생심 꿈도 못 꿨다. 하지만 입사한지 1년도 넘었고 해서 무리수를 두어 나흘 연속 휴무일로 정했다(글쓴이가 다니는 직장은 휴가가 따로 없고, 한 달에 6번 휴무일이 있다). 그리고는 갈만한 섬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백령도, 외연도, 추자도 이렇게 세 개의 섬을 두고 저울질하기 시작했는데 추자도의 나바론절벽에 반해 결국 추자도로 결정을 했다.

그래서 가장 먼저 선박을 예약해야 하는데 웬일인지 완도에서 추자도(신양항) 가는 배편(레드펄호)을 예약하기가 무척이나 힘이 들었다. 이유인즉 완도~추자~제주를 오가는 레드펄호가 취항한지 불과 나흘 만에 신양항에서 좌초되는 사고가 났던 것이다. 그래서 운항여부가 불투명하여 전화예약하기가 무척이나 힘들었다.

 

[레드펄호 사고 기사 내용]

제주특별자치도에 따르면 대형(2,878톤급) 카페리 여객선 레드펄호(제주~추자도~완도)가 검사와 시운전 등을 마치고 오는 2015.6.19일 신규 취항한다.

레드펄호에는 화물차량 30대, 승용차 39대를 선적할 수 있으며 19노트(시속 약 34km)의 속도로 제주-추자-완도까지 4시간이면 운항할 수 있다.

지금까지 제주-추자 항로에는 한일3호(606톤), 핑크돌핀호(223톤) 등 소형 카페리 여객선 2척이 운항되고 있었지만 기상 악화 때마다 운항이 중단돼 지역 주민들이 불편을 호소해 왔다.

여기에다 한일3호가 선령 만료로 운항이 중단되면서 도에서는 임시로 대형카페리 여객선 뉴드림호(2103톤)를 운항해 왔다.

23일 오후 5시 30분쯤 추자도 신양항을 출항하던 한일 레드펄3호(2862톤)가 선착장 20~30미터 지점을 선회하던 중 저수심지에 좌초됐다.

이 사고로 승객 123명의 발이 묶이자 선사측은 24일 오전 9시30분께 제주에서 출항하는 핑크돌핀호를 투입, 이날 오전 11시~12시 사이에 추자도에서 출항해 진도 벽파항으로 이송키로 했다.

또 배에 선적돼 있는 차량 36대의 경우 전문기관 등의 점검을 거쳐 가능하면 레드펄호를 이용해 그대로 완도항으로 옮기고, 항해 불가 판정을 받으면 선사 측과 협의해 대체 선박을 이용해 운송키로 했다.

한편 레드펄호는 사고 발생 당일인 23일 오후 11시20분께 선체의 균형을 잡기 위해 바닥에 싣는 물이나 모래 등 물체인 밸러스트를 빼내 신양항 여객선 부두로 이동했다.

해경은 24일 잠수사 등을 동원해 선체의 바닥 부분을 확인하고, 이상이 없으면 사고원인 조사와 함께 이동여부 등을 결정할 예정이다.

제주항~추자도~완도를 항해하는 레드펄호는 365명 정원에 화물차 30대, 승용차 39대 등을 선적할 수 있는 여객선으로, 최근 신규 취항했다.

해당 항로에는 한일3호(606t) 및 핑크돌핀호(223t) 등 소형카페리만 운항해 왔지만, 기상이 악화될 경우 매번 운항이 중단되고, 특히 최근 한일3호가 선령 만료로 운항이 중단되면서 지역주민들의 불편이 이어져 왔다.

이에 추자항 접안시설 확충공사 등을 마치고 19일 레드펄호가 취항했지만, 불과 나흘 만에 사고가 발생했다.<헤드라인제주>

 

승객 등 123명을 태운 여객선이 출항하던 중 낮은 수심에 좌초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23일 오후 5시 30분쯤 추자도 신양항을 출항하던 한일 레드펄3호(2862톤)가 선착장 20~30미터 지점을 선회하던 중 저수심지에 좌초됐다.

선저가 바닥과 접촉되어 항해할 수 없다는 신고를 접수받은 제주해양경비안전서는 현장에 함정 등을 급파해 구조보트 4척, 낚시어선 2척을 동원해 배에 타고 있는 승객 106명과 선원 17명 등 123명을 긴급 구조했다.

승객들은 주변 낚시배 등을 이용해 신양항으로 이동한 후, 신양분교 등에 머물고 있다.

사고원인을 조사 중인 해경은 만조시 배를 안전해역으로 이동시켜 계류하게 한 후 선박검사를 통해 이상이 없을 경우 출항하도록 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레드펄3호는 이날 오후 3시 30분 제주항에서 출항해 추자도 경유 완도로 항해할 예정이었다.

 

좌우지간 어렵게 배편 예약을 마치고, 민박집도 예약을 마치고 추자도로 향했다.

 

[추자도 가는 방법]

추자도 가는 방법은 목포(진도 벽파항 경유), 벽파, 완도, 제주 이렇게 4군데가 있다.

 

출발지

도착지

선명

소요시간

요금

특기

목포

상추자도

핑크돌핀호

2:40

46,050

차량선적 불가능

진도(벽파)

1:40

30,650

완도

하추자도(신양)

레드펄호

2:00

23,050

차량선적 가능

제주

상추자도

핑크돌핀호

1:30

12,500

차량선적 불가능

하추자도

레드펄호

11,050

차량선적 가능

 

[문의 전화]

핑크돌핀호 벽파: 061-542-4500 / 추자: 064-742-3513 / 제주: 064-758-4234

[화물선적 문의]

제주(동광해운): 064-723-6996 / 완도(한일운송): 061-554-3265 / 추자(일조해운): 064-712-7622

 

7월 31일(금요일) 오후 3시 10분에 출발하여 고속도로에 접어들었는데 휴가차량으로 정체가 되고 있어서 결국 완도에서 자려던 계획이 목포에서 자게 되었다.

목포시내에서 저녁을 먹고, 인근 숙박업소가 많은 곳에서 저렴한 숙박비(3만원)로 편하게 휴가 첫 날 밤을 보냈다.

다음날 7시에 출발하여 1시간 30분 걸려 완도항에 도착하니 역시 예상했던 대로 완도항은 많은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겨우겨우 추자도행 배표를 구입하고는 곧바로 레드펄호에 승선했다. 자전거와 함께.

인근 연근해(섬)에 갔을 때는 자전거도 화물요금을 받았는데(섬 중에는 자전거요금을 따로 받는 곳도 있다) 이곳에서는 화물(자전거) 요금을 따로 받지 않아서 기분이 좋았다.

 

처음 타본 레드펄호는 무척 깨끗하고 편의시설이 잘 되어 있다. 아침 먹을 시간이 없어서 굶고 있었는데 레드펄호 선내 편의점에서 컵라면(2,000원)을 먹고는 이곳저곳 구경에 나섰다. 안마의자도 설치되어 있어서 요금(1,000원) 내고 안마도 받았다. 바다는 망망대해라 볼 것이 없고 선내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시간을 때웠다.

 

결국 2시간이 가까워지니 섬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름하여 추자군도(楸子群島)이다. 추자군도 중에 가장 눈에 확 띄는 게 있으니 바로 수덕도이다.

수덕도는 사자가 엎드리고 있는 모습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기러기를 비롯한 각종 물새들이 섬 상봉(사자머리)에 않아 있다가 먹이를 쫓아 물로 쏜살같이 꽃히는 광경은 추자10경중의 하나인 추자4경 ‘수덕낙안’이라 불리운다. 옛날 여기에는 봉수가 있어 추자를 통해 육지 해남 등지와 연결했다는 기록이 있다.

 

수덕도는 추자군도 42개 섬 가운데 가장 웅장함과 아름다움이 함께하는 섬이다. 높이 80~90m의 큰 바위와 서쪽 중턱에 해식동굴이 발달돼 있고 동쪽 해안절벽에는 붉은색의 수직절리가 넓게 형성돼 있으며 썰물 때 잠깐 보여주는 한반도 지형을 닮은 지도바위가 신비함을 더해준다.

또한 연중 낚시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을 정도로 대물의 명당이다. 벵어돔과 돌돔, 참돔, 농어, 부시리 등 다양한 어종들이 낚시꾼들을 유혹한다.

수덕도의 모습이 변하니 하추자도 신양항에 도착한다.

 

미리 기다리고 있던 민박집 사장님 차량으로 무거운 짐은 보내고 함께 온 자전거로 추자도 여행을 시작했다.

역시 섬 여행은 언제 어딜 가도 기분이 좋다. 확 트인 바다에 각각의 생김새가 다른 섬들을 보면서 신나게 자전거페달을 밟는다. 신양항에서 민박집(대서리. 유창민박)까지 5.3km 거리인데 사진 찍으며 쉬엄쉬엄 진행했다. 민박집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고는 잠시 쉬다가 추자도 첫 일정인 나바론절벽 답사에 나섰다.

추자도 일정은 첫날 상추자도 올레길과 나바론절벽 답사하고, 이튿날은 하추자도 올레길, 그리고 마지막날은 자전거 타고 추자도 구석구석 답사하기로 마음먹었다.

 

민박집에서 나와 상추자도 여객선터미널에 도착했다. 불과 2~3분 거리이다.

이곳이 추자도 올레(18-1 코스) 시작과 끝 지점인데 안내도 하나 설치되어 있지가 않아 의아했다. 대부분의 둘레길과 올레길 시작점은 안내도가 설치되어 있었다.

 

추자도 올레(18-1코스)

코스: 추자항→추자등대→묵리교차로→신양항→황경한의묘→엄바위장승→돈대산→추자교→추자항

난이도: 상

거리(시간): 18.2km (6~8시간)

 

봉글레산, 묵리 고개, 신대산, 예초리 기정, 돈대산 등 봉우리를 여러 차례 오르내린다. 하루를 머물러야 온전히 걸을 수 있는 길이다. 봉글레산에서 보는 일몰이 아름답다.

추자항 인근 외에는 식당이 없으므로, 물과 간식을 준비해서 가야 한다.

일부 구간은 통신장애가 발생할 수 있으며, 코스 내 숲 지역은 여성 혼자 걷기에는 적합하지 않으니 부득이한 경우, 제주여행 지킴이단말기를 이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실망한 체 되짚어 내려가 등대산공원으로 향했다.

여객선터미널에서 5분 거리에 위치한 등대산공원은 일출을 볼 수 있는 곳이라 역시 전망이 시원하게 확 트인다. 1974년 5월 20일 간첩사건 난 것에 대한 안내판과 높이 10m의 반공탑이 세워져 있다. 조망도도 설치되어 있는데 수령섬, 추포도, 횡간도, 보길도 등이 보인다. 전망 좋은 등대산공원에 이밖에 팔각정과 방위각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북쪽 방향인 서울은 400.9km, 북동 방향인 부산은 284km, 그리고 남쪽인 제주는 53.3km라 적혀 있다.

시원하게 펼쳐지는 추자군도의 섬들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다음 일정을 위해 발걸음을 돌렸다.

 

되짚어 대서리 면사무소 쪽으로 내려가는데 사람이 있어서 올레길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냐고 물어보니 초등학교 쪽으로 가면 된다고 해서 추자초등학교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추자초등학교 입구에 가서야 제대로 된 올레표시가 있다. 이제 본격적인 올레길 답사에 나선다. 추자초등학교 가는 길 좌측 담벽에는 벽화도 그려져 있어서 볼거리를 제공한다.

곧바로 최영장군 사당이 나온다.

 

[아래의 글은 최영장군에 대하여 인터넷에서 검색한 내용입니다]

제주시 추자면 상추자도 대서리에 최영 장군 사당이 있다.

고려 공민왕 때의 일이다. 제주도에서는 제주목사를 죽이는 등의 커다란 반란이 잇따라 일어났다. 이에 조정에서는 최영에게 전함 300여 척과 2만 50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제주도에 원정해서 목호들의 반란을 진압하게 했다. 제주도로 가는 도중에 거센 바람이 불어 잠시 추자도에 대피했는데, 그때 최영이 주민들에게 고기를 잡는 법을 가르쳤다. 그 은덕을 기리기 위하여 이 지방 사람들이 세운 이 사당에서는 매년 백중날과 음력 섣달그믐에 제사를 지내며 풍어와 풍농을 빈다. 제주도 기념물 제11호로 지정되어 있다.

 

최영의 활동 범위는 전국에 걸쳐 있기 때문에 관련 사당과 유적지가 산재해 있다. 관련 유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개성 덕물산의 최영장군사(崔瑩將軍祠), 강원도 철원군과 홍성군의 최영 장군 생가, 홍성문화제의 최영 장군 영신제, 경기도 고양시 대자산 기슭의 최영장군묘, 경남 통영시의 최영장군사당, 제주도 추자면의 최영장군사당, 부산 수영구의 무민사(武愍祠), 부산 동구의 무민공 최영장군사당, 경남 남해시 미조면의 최영장군사당 무민사, 충북 충주시의 기봉영당,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의 최영장군당 등이다.

 

유적은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으나 최영 장군 신격의 숭상은 특히 중부 지역이 강세를 보인다. 최영이 탄생하고 입적한 곳이 중부 지역이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신관 분포를 볼 때 중부 지역이 강세로 나타난다. 개성의 덕물산에 있는 최영장군사는 조선조 초에 이루어진 최영의 신원회복으로 창건되고 활성화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무민(武愍)’은 그때 받은 시호이다.

 

제주 최영장군 사당 [崔瑩將軍祠堂]

[정의]

제주특별자치도의 추자도 사람들이 최영 장군의 은덕을 기리면서 한 해의 풍어를 기원하는 장소.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추자면 대서리 155번지에 소재하며, 1981년 8월26일에 ‘제주도 기념물 제11호’로 지정되었다.

 

[역사]

최영장군사당은 고려 말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최영 장군이 1374년(공민왕 23년) 잠시 머물면서 주민들에게 그물을 이용한 어로법을 가르쳐 준 일이 있어 주민들이 장군을 기리기 위하여 사당을 세웠다는 전설이 있다. 사당은 오랫동안 주민들이 관리하여 왔으나 퇴락을 피할 수 없었다. 1935년에 뜻있는 사람들이 힘을 모아 사당을 새로 지었으며, 1970년에 국가 보조로 건물을 다시 복원하였다. 1974년에 단청과 담장을 보수하였으며 1998년에 외문을 새로 지어 현재의 모습에 이르고 있다.

 

[형태]

최영 장군을 모시는 사당은 추자초등학교 뒤쪽 산등성이에 있다. 상추자를 한눈에 굽어볼 수 있는 곳이다. 사당은 면적 16.5㎡, 평면 세 칸의 우진각 기와지붕 형태이다. 현판에는 ‘최영대장신사(崔瑩大將神祠)’라고 썼다. 내부에는 영정과 돌 위패를 모시고 있다. 사당 주위에 자연석을 장방형으로 에워 울타리를 쌓았다. 울타리 안쪽에 다시 시멘트 담장을 두었다. 사당 왼쪽 문 앞 위에는 「최영장군신사신축기(崔瑩將軍神祠新築記)」가 걸려 있다. 종서로 새겨진 내용은 “漂漂氣像 與闕張 張肩 堂堂忠義 使夷齊 齊立. 以麗朝臣都統 節鉞摩南 沍伏耽羅 候風斯島故 島民 去後益詠而立祠 牲牛尊誠 致祥消魔之己自數百年靈驗 □自甲午以後茅宇甲戌以來 風霖可年層 棟礎峍巓地 人往獸踏 祠土 不潔 驚惶洞詣 卜地新創 大西里區長 李起雄 有志人 夙興夜深之誠而此地建營之 庶民 自來 敖不活躍薦廟有歡樂樂以謂其□曰神境淨 永世不忘之功 註以記也 西紀一九三五年 乙亥 二月 二十五日(하략)”이다. 이것은 1935년 당시 사당을 새로 지은 내력을 담고 있다. 본래 초가 형태인 사당이 퇴락하여 볼품없게 되자 뜻을 모아 온전한 모양으로 지은 것이다.

사당 안에는 비석 모양으로 만들어진 위패가 있다. 높이는 1m가량이며, 표면은 검은색이다. 거기에 ‘조국도통대장최영장군신위(朝國都統大將 崔瑩將軍 神位)’라 음각하고 빨간색으로 칠하여 놓았다. 위패의 왼쪽에는 영정을 걸어 모시고 있다. 사당 주위에는 돌담을 두르고 사당의 맞은편에 문을 달았다. 사당 입구에 세워진 안내판 바로 옆에는 최영사당금표(崔瑩祠堂禁標)라는 비가 있다. 비의 앞면에는 ‘신묘금지비(神廟禁地碑)’라 음각되어 있음이 확인되나 측면 글자는 많이 마모되어 알아볼 수 없다.

 

[내용]

고려 공민왕 시절 제주도에는 목호(牧胡)에 의한 반란이 끊이지 않았다. 공민왕 23년에 석질리(石迭里) 등이 난을 일으키자 조정에서는 최영 장군을 제주행병도통사(濟州行兵都統使)로 삼아 이를 진압하도록 하였다. 최영 장군은 군사를 이끌고 제주도로 원정을 오가는 도중에 거센 풍랑을 만나 추자도 점산곶(點山串)으로 대피하게 되었다. 추자도는 예부터 제주도를 오가는 배들이 풍랑을 만날 경우 대피하는 곳으로, 해중(海中)의 유일한 후풍처(候風處)였다. 기록에 따르면 최영 장군은 8월 24일부터 28일까지 5일간, 9월 23일부터 10월 17일까지 25일간 등 모두 30일간을 머무른 것으로 확인된다. 이처럼 30일 동안이나 머물렀으니 주민들에게 그물로 고기를 잡는 방법을 알려주었을 만도 하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바다에 고기는 많으나 주민들이 잡을 줄을 몰라 궁핍하게 살고 있는 것을 보고 최영 장군이 그물을 만들어 고기잡이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이로 인하여 추자도 사람들의 생활에 커다란 변혁이 일어나게 된다. 풍부한 어족자원을 활용할 수 있게 됨에 따라 일거에 풍족한 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이 일로 주민들은 장군의 덕을 영원히 기리기 위하여 사당을 지었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해마다 음력 칠월 보름날과 섣달그믐날에 풍어와 풍농을 빌며 제사를 지내 왔다. 이를 대제(大祭), 사당제(祠堂祭) 또는 당제(堂祭)라고 한다. 대제는 본래 여름철인 칠월에 지냈다. 추자도는 여름철에 멸치 어장이 형성되고, 최영 장군을 모시는 것이 이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그 당시에는 선주들이 윤번제로 사당을 관리하고, 제비도 공동으로 부담하였다. 오늘날에는 수협에서 사당의 관리를 맡고 대제와 관련한 제반 사항도 도맡아 하고 있다. 수협(水協)에서 대제를 맡으면서부터 제일을 봄철인 음력 이월 보름날로 옮겼다. 택일하여 날이 좋지 않으면 길일(吉日)로 바꾸어 제사를 지낸다. 제사 시기를 바꾸게 된 까닭은 주요 어족자원이 조기로 바뀌었기 때문이며, 조기의 성어기가 봄철이기 때문이다.

과거 주민들이 제사를 맡아 지낼 때는 제주(祭主)를 한 사람 정하였다. 제관은 축관 한 명과 제관 한 명으로 구성하였다. 제관들은 제주의 집을 제청으로 삼아 일주일 동안 정성을 들였다. 그곳에서 목욕재계를 하고, 제물을 비롯한 제반 음식을 마련하였다. ‘큰새미’라고 하는 샘에 3~4일 동안 금줄을 쳐서 부정한 사람의 접근을 금하고, 그 물을 떠다가 제사를 준비하는 데 사용하였다. 제장에도 금줄을 쳐서 부정한 이의 출입을 막았다. 희생으로 소 한 마리를 올렸으며, 통째로 올리는 것이 아니라 머리를 올리되 고기는 삶고 내장은 생으로 올렸다. 기타 제물로는 메, 갱(쇠머리 삶은 물), 어물(삼치, 도미, 갈치, 방어, 조기 등), 나물(시금치, 콩나물, 산나물, 듬북기, 녹두나물), 시루떡 등을 올렸다.

 

한편 신위의 양쪽에는 작은 그릇에 장군과 똑같이 제물을 차려 올렸다. 이것은 호위병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 어떤 경우에도 돼지고기는 제물로 올리지 않았다. 음복은 제관과 참례자들이 함께하였으며, 남은 음식은 땅에 묻었다. 근래에는 최영 장군에 대한 제사뿐만 아니라 불의의 사고로 생명을 잃은 어업인의 넋을 위로하는 제사도 함께 지낸다. 영흥리 뒷산 높은 곳에 산신당이 있고, 대서리 바닷가에는 해신당이 있었다고 한다. 대서리 뒷동산에 최영장군사당이 있다. 이 사당은 무속 신당의 기능을 함께 했다고 볼 수 있으니 산신당-장군당-해신당의 구도가 갖추어진 셈이다. 실제로 상추자에서 풍어제를 지낼 때는 산신제-장군제-해신제를 차례대로 지내 왔다.

 

[특징]

제주도 추자도는 최남단 지역으로, 이곳에서 최영 장군을 신격화하여 모신다는 것은 지역적으로 특별한 사례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실재한 인물을 지역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과 결부시켜 마을신으로 모시면서 풍어를 기원하고 있다는 것 또한 특징이다.

 

『최영 장군 사당 (崔瑩將軍 祠堂)』

<충남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에 있는 사당으로 최영장군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음>

소재지; 충남 홍성군 홍북면 대인리 산39-7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 는 고려 말 청렴하고 곧은 무장이었던 최영(崔瑩, 1316~1388) 장군을 상징하는 어록입니다.

최영은 안팎으로 혼란스럽던 고려 말에 밖으로는 외적의 침입을 물리치고 안으로는 고려왕실을 지키려 한 명장군이자 재상이었으나 그는 새로운 시대의 흐름보다는 기존의 질서를 고집했고 원∙명 교체기 급변하는 중국의 정세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여 자신이 키워낸 새로운 무장세력 이성계와 불화한 탓에 결국 그토록 지키고자 하였던 고려 왕실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갔습니다.

 

『최영 장군 묘 (崔瑩 將軍 墓)』

종목; 경기도 기념물 제 23호 | 분류; 유적건조물 / 무덤 / 무덤 / 봉토묘 | 수량; 1기 | 지정일; 1975. 09. 05.

소재지; 경기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산70-2번지

부인 문화 유씨와의 합장묘로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에 있다.

최영 장군은 우왕 14년(1388) 이성계 등의 신진세력에 의해 처형되어 선친인 최원직의 묘소 앞에 안장되었다. 이성계는 왕조를 세우고 나서 6년 만에 무민(武愍)이라는 시호를 내려 넋을 위로하였는데, 그의 무덤에는 풀이 돋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최영 장군의 묘비명 | 변계량》

위엄을 떨쳐 나라를 구할 때

백발이 성성했구나

삼척동자도 그의 이름을 알고 있으니

한 조각 붉은 마음

응당히 죽지 않아

천추에 태산같이 우뚝하리라.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말을 남긴 최영은 청렴결백한 삶을 살았다. 잘못된 일은 언제나 바로잡는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요동 정벌의 꿈이 이성계로 인해 좌절되고 목숨까지 잃게 되자 개성 사람들은 가게의 문을 닫고 슬퍼하였으며, 온 백성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성계는 새 왕조를 세우고 나서 6년 만에 무민(武愍)이라는 시호를 내려 최영의 넋을 위로했다. 그러나 그는 죽어서도 이성계를 인정할 수 없었으니, 풀이 나지 않는다는 무덤, 적분(赤墳)이 이를 말해준다. 조선의 변계량이 최영의 적분을 보고 이 묘비명을 지어 바쳤다고 한다. 최영의 꼿꼿함이 되살아나는 듯한 묘비명이다. <출처; 묘비명·비문_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 2009.12.15, 포럼>

 

전망 좋은 최영장군 사당을 지나니 시멘트 포장도로가 나오면서 우측으로 바다가 펼쳐진다.

얼마간 진행하니 이정표(←젯샘, 최영장군사당→)가 나오고, 좀 더 진행하면 풍향계가 설치되어 있고 우측 공터에 헬기장이 조성되어 있다. 이후 포장도로 따라 조금 더 올라가면 삼거리가 나오는데 이곳에도 이정표(←봉골레산, 젯샘→)가 세워져 있는데 올레길은 좌측의 봉골레산 쪽으로 진행한다. 직진하면 물 빠지면 건너갈 수 있는 다무래미가 나온다. 이곳에 봉골래쉼터가 조성되어 있는데 벤치 주변에 풀이 무성하여 쉬고 싶지 않은 곳이다. 올레 이정표에는 봉골레산 정상이 0.4km이고, 올레길 남은 거리는 16.5km 적혀 있다.

 

다무래미 가는 길과 작별하고 봉골레산 방향(좌측)으로 400m 올라가면 전망이 무척 좋은 봉골레산 정상(85.5m)이다. 팔각정과 돌탑이 쌓여 있다. 앞으로 가야 할 용등봉과 나발론 절벽을 끼고 있는 능선이 잘 보인다.

 

이후 얼마간 내리막길을 내려가면 큰 길과 만난다. 이곳에서 올레길과 잠시 작별하고 나바론절벽을 가기위해 후포 쪽으로 향했다. 올레길은 마을을 지나 숲길로 들어서 등대로 향하면 나바론절벽 등산로와 다시 만난다.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몇 분 가지 않으면 이내 후포가 나오는데 정식 해수욕장은 아닌 것 같은데 여러 명의 어린이들과 어른들이 해수욕을 즐기고 있고 정자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쉬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이정표(←순효각, ↑용듬벙, 봉골레산→)가 세워져 있는데 용듬벙 방향으로 올라가야 한다.

나바론절벽을 가기위해 용듬벙 방향으로 올라가는데 이내 표지판(↑300m, 나바론절벽 전망터, 용듬벙)이 나타난다. 우측의 사각정자에도 많은 사람들이 쉬고 있다.

 

완만한 시멘트포장도로를 따라 조금 올라가면서 바라본 후포 앞 바다가 멋지고, 대서리 쪽 능선이 멋지다. 이내 나바론절벽 등산로 입구임을 알려주는 데크길 입구가 나오는데 아쉽게도 출입통제 안내문(추락 등 안전사고 위험이 있어 출입을 통제합니다)과 「공사중」 출입금지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고 굵은 동아줄로 입구를 막아 놨다. 이곳에서 올라가려면 얼마든지 올라갈 수 있지만 조금 더 가면 공터가 나오는데 이곳에서 좌측능선으로 올라갔다.

정면으로 데크길이 만들어진 용등봉이 너무 멋진데 그것보다 나바론절벽이 우선이라 용등봉은 나중에 시간될 때 답사하기로 하고 나바론절벽 답사에 나섰다.

조심스럽게 바위지대를 올라가면 갈수록 용등봉 쪽을 바라보니 환상이다. 용등봉의 좌측면이 강아지의 얼굴처럼 보이고, 처음에는 대서리 쪽 능선만 보이던 것이 고도가 높아질수록 다무래미 쪽도 보여서 뱀의 혀처럼 두 개의 능선이 보인다. 기묘한 바위도 나타난다. 무엇보다 나바론절벽의 이름처럼 능선 우측은 까마득한 절벽으로 한참을 바라보니 현기증이 난다. 너무나 멋지다.

등산로에는 안전시설물이 설치되어 있어서 그렇게 생각보다 위험하지 않게 진행할 수 있다.

 

 

 

 

조금 멀리 군부대의 시설물이 보이기 시작한다. 상추자도가 멋지게 보인다. 계속해서 감탄사가 나오고, 연실 사진(스마트폰으로) 찍느라 진행이 더디다. 그렇게 얼마나 갔을까 쉬기 좋은 곳이 나와 잠시 휴식을 하다가 조금 더 진행하니 급경사 구간이 나오는데 밧줄이 걸려있다. 나바론절벽 등산로의 유일한 로프구간이다. 조심스럽게 그냥 내려갈 수도 있다. 조금 위험하다고 느끼면 밧줄 잡고 내려가도 된다. 그렇게 밧줄구간을 내려가면 다시 등산로가 이어지는데 앞 구간보다는 경치가 썩 좋지가 않고 숲 지대로 들어선다.

 

그러면 이내 군부대가 나온다. 좌측, 우측으로 우회로가 나 있는 것 같은데 우측으로 돌아야 짧을 것 같아 우측으로 돌아서 군부대를 우회했다. 그리고는 잠시 숲 지대를 통과하니 이내 「공사중(우회하시오)」 안내판과 올레길 안내판이 나온다. 나바론절벽 쪽 등산로는 막아 놨다.

올레길 안내판을 보니 현 위치가 나바론절벽 정상으로 되어 있고 0.2km 가면 추자등대 전망대를 갈 수 있다고 되어 있다. 다시 올레길에 합류하는 순간이다.

이제 올레길에 들어서니 길이 무척이나 편하다. 사실 군부대 지나고부터는 숲길이 무성하여 여름철 반바지 입고 등산하기에는 매우 불편하다.

길 좋은 올레길 따라 얼마간(200m) 진행하니 추자등대가 나온다. 등대 전망대까지 올라가서 전망을 즐긴다. 이곳에서 제주도가 보인다고 했는데 제주도는 보지 못했고, 추자군도의 섬들은 다 보이는 것 같았다. 오늘 산행의 종점인 추자교도 바로 코 앞이다.

 

추자등대 벤치에서 30여 분 휴식한 후 출발했다. 이정표(←추자처사각 0.64km, 충혼묘지 0.77km→)를 지나니 올레길이 전망이 확 트이면서 사각정자가 바로 앞에 보이고 앞으로 진행할 올레길이 뚜렷하게 잘 보인다.

이내 사각정자(바랑케길 쉼터)에 도착하여 잠시 휴식을 했다. 바로 옆에는 추자올레 안내도도 설치되어 있다. 이제 오늘의 종점인 추자교도 얼마 남지 않아서 힘을 내서 출발한다.

완만한 오름길에 바라본 추자군도의 여러 섬들을 감상하면서 진행하니 이내 내리막길이 이어지다 이내 추자교에 도착한다. 이정표(↑하추자올레길, 등대전망대→)와 도로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추자교에는 추자교 연륙교량 가설의 유래가 적혀 있는 오석의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내용인즉

「추자도의 오랜 숙원사업이던 상추자와 하추자와의 교량(楸子橋梁) 가설은 섬과 섬을 잇는 교량으로는 전국 최초로 시설 1966년 6월 28일 착공하여 총 길이 156m, 폭 3.4m의 다리를 1972년 10월에 완공하여 연륙(連陸)되었고 교량의 안전을 위해 4.5톤 이상의 차량운행을 금지시켰으나 1993년 4월 11일 골재를 실은 트럭이 통행으로 다리가 무너져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1992년 10월9일부터 시작된 신교량공사는 1995년 4월 30일 총 길이 212.35m 폭 8.6m로 완공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현재 이 다리는 상.하추자도를 하나로 묶어 주민생활과 산업증진에 큰 역할(役割)을 다하고 있다.」

 

추자교에는 이밖에 쉼터(사각정자. 추자교쉼터)와 추자면 안내도가 설치되어 있다.

이곳에서 민박집까지 거리가 약 2km가 조금 넘기 때문에 걸어가도(올레길이기도 하지만 자전거로 3차례나 지나감) 되지만 뜨거운 한 여름 무리했기 때문에 힘이 들어서 조금 걷다가 결국 히치하이크해서 민박집에 도착했다.

민박집에 도착하여 약간 이른 저녁을 먹고는 피곤하여 이내 잠이 들었다. 일몰이고 뭐고!(원래 일몰을 보려고 했었다)

 

다음날 추자도 여행 2일째!

오늘은 하추자도 올레길 답사하는 날이다.

오늘도 민박집에서 아침을 먹고는 자전거를 타고 상추자도 올레길(해안도로)을 따라 신나게 페달을 밟아 추자교에 도착했다. 추자교를 넘어 하추자도 입구 삼거리에 도착했다. 이곳이 하추자도 올레길이 시작되는 곳이다.

파란색의 도로표지판과 녹색의 올레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이곳에서 좌측의 예초리 방향에서 시작해도 되고, 직진해서 묵리방향으로 가도 된다. 직진하여 돌계단을 조금 오르면 숲길이 나온다.

 

어느 정도 진행했나 싶더니 묵리교차로가 나온다. 이곳은 나중에 돈대산을 넘어 다시 이곳으로 오게 되어 있다. 아쉽게도 중요한 이곳에 각각의 방향에 이정표가 없어서 잠시 헷갈린다. 뒤 따라오던 올레객도 잠시 방향을 잃어 한동한 멍하다가 올레 표지판을 한참이나 보고서야 방향을 잡고 출발했다. 글쓴이 역시 잠시 어느 방향으로 가야할지 몰라 지도를 한참이나 쳐다보고서야 묵리 마을 방향으로 출발했다.

 

이내 숲길과 헤어져 묵리 마을 입구에 도착했는데 우물이 있어서 때마침 갈증도 나고 해서 우물물을 먹었는데 그렇게 썩 시원하지가 않았다.

이후 묵리마을을 지나니 잠시 해안도로를 따르는데 역시 섬생이가 멋지다. 저렇게 멋진 섬 이름이 섬생이라니? 참으로 섬 이름에 대해 아쉬움을 감출 수 없었다.

포장도로(해안도로)는 이내 숲길로 안내한다. 숲길은 온통 담쟁이가 나무를 휘감았는데 꽤 많은 나무들이 담쟁이에 시달리는 듯하다.

그리곤 얼마나 갔을까 다시 숲길이 나오는데 이것은 정상적인 올레길이라기 보다는 거의 사람들이 다니지 않아서 잡풀들이 무성하다. 반바지 차림으로 이곳을 지나가려면 꽤나 곤혹을 치를 것 같다. 잡풀들이 무성하게 지난 곳을 지나기 갑자기 길이 좋아지면서 황경한의 묘가 나온다.

그런데 한경한의 묘가 이상하다. 새로 만든 오석의 황경한 묘에는 황경헌이라고 쓰여 있다. 또한 제주올레 홈피에도 황경헌의 묘라고 명명이 되어 있다. 나중에 우연한 기회에 추자면장님하고 만났는데 이때 황경한과 황경헌 중 어떤 것이 맞냐고 물어봤는데 면장님 말씀으로는 황경한으로 정리됐다고 하고 나중에 세운 황경헌의 비석도 글씨를 수정할 것이라고 한다.

 

황경한은 19세기에 추자도에 살던 한 어부(漁夫)의 이름이다. 그런데 무슨 이유로 깔끔하게 단장을 하고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는 것일까? 위업(偉業)은커녕 선행(善行)도 딱히 전하는 게 없는데도 말이다. 그의 무덤을 성지처럼 꾸민 것은 천주교 제주교구라고 한다. 교구차원에서 묘비를 세우고 묘역을 조성한 것이다. 묘비(墓碑)에는 「순교자 황사영 신앙의 증인 정난주의 아들 황경한의 묘」라고 적혀 있다. 이 무덤의 주인이 황사영 백서 사건의 당사자 황사영(1775∼1801)의 아들이란다. 그렇다면 황사영의 아들이 어쩌다 이런 절해고도(絶海孤島)에 묻혔을까. 남편 황사영이 서울에서 처형된 후 그의 아내 정난주는 두 살 아들 경한을 안고 제주로 유배를 갔다. 정난주는 배가 추자도를 지날 때 섬 동쪽 갯바위에 아기를 내려놓고 떠났다. 아들만큼은 죄인으로 키우고 싶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정난주는 제주 대정에서 관노로 38년을 더 살다가 죽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기는 어미의 바램대로 예초리 어부 오씨가 거둬 제 자식처럼 키웠다. 경한이 성년이 되자 오씨는 꼭꼭 숨겨뒀던 내력을 들려줬다고 한다. 그렇지만 모자(母子)는 평생 재회(再會)하지 못했다. 뒤늦게라도 화를 입을까 염려했기 때문이다.

슬픈 황경한의 내력을 알고 묘소 바로 앞 전망 좋은 곳에 세워진 모정의 쉼터(사각정자)에서 쉬면서 약간 이른 점심을 먹었다.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잠시 낮잠도 즐겼다.

 

낮잠에서 깬 후 몇 발자국 진행하니 샘터가 나오는데 황경한의 눈물이라고 안내판에 써져 있다.

황경한의 묘을 지나니 몽돌해안이 나오고 이후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진행하니 신대산 오름길이 나오는데 양갈래 길이다. 해안길이 있고, 곧장 시멘트포장도로를 따라 가는 길이 있는데 해안길이 별로인 것 같아 그냥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올라갔다.

이내 신대산전망대가 나온다. 조망도도 설치되어 있지만 여지껏 전망 좋은 걸쳐 왔기 때문에 전망이 별로다.

이제 내리막을 내려가니 해안길이 나오는데 전망이 무척이나 좋다. 이런 해안산책로 같은 올레길을 얼마간 진행하니 마을이 나타난다. 예초리 포구이다.

예초리 포구부터 계속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진행된다. 추자도의 북쪽바다를 보면서 얼마간 진행하니 엄바위장승이 나온다.

안내판이 세워져 있는데 내용인즉

 

엄바위장승(억발장사)

옛날에 엄바위의 억발장사가 있었다. 엄바위 아래 바닷가에 『장사공돌』이라는 바위 다섯 개가 있었는데 이 바윗돌로 공기놀이를 즐겼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횡간도로 건너뛰다가 미끄러 넘어져 죽었다. 그래서 예초리과 횡간도 사람들은 서로 결혼하지 않는다고 한다. 결혼하면 청춘과부가 된다는 속설 때문이라고 한다. 언제부턴가 마을 누군가가 억발장사를 상징하는 목장승을 깎아 세웠으며 예초리에 해마다 걸궁을 할 때면 이 엄바위 앞에 와서 한마당 놀고 소원을 빌기도 한다.

 

엄바위장승과 작별하고 다시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진행하는데 이내 숲길 입구가 나온다. 「추억이 담긴 학교가는 샛길 →300m」라고 써진 목판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계단을 오르면서 숲길로 들어선다. 이후 22분 정도 완만한 오름길(방화선을 만든 것처럼 넓은 길)을 올라가니 드디어 추자도 최고봉 돈대산 정상이다.

역시 최고봉답게 조망도 최고다. 돈대산 정상에는 예쁜 사각 대리석의 정상석(해발 164m)과 조망도, 팔각정이 세워져 있다. 이미 팔각정에는 아까 만난 연인들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글쓴이를 보자 자리를 뜬다. 신양항이 멋지게 보인다.

돈대산 오면 거의 다 온 것이므로 이곳에서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내려갔다. 내려가면서 바라보는 조망도 멋지다. 산불감시초소를 지나 얼마간 진행하니 묵리교차로가 나온다. 드디어 원위치한 것이다.

 

이후 돈대산 산책로 안내판이 세워져 있는 도로에 도착한다. 이후 포장도로를 따라 진행하니 은달산 길 표지판이 나오고 잠시 숲길로 이어지다가 다시 도로에 나오는데 바로 앞에 커다란 조기 조형물이 반긴다. 바로 옆이 추자교이다.

돌탑과 추자교 그 뒤로 산등성이에 추자등대가 멋지다.

이렇게 해서 하추자도 올레길 답사를 마쳤다.

 

자전거 있는 곳으로 이동하여 자전거 타고 다시 추자교를 넘어 민박집에 도착했다.

샤워를 한 후 저녁 먹고 일몰도 볼 겸 물 빠진 다무래미를 보고 싶어서 자전거를 타고 다무래미에 도착하니 역시 물이 빠져 있어서 다무래미를 건널 수 있었다. 물 빠진 곳에는 미역 줄기 비슷한 것 들이 많이 있고, 돌들이 무척 미끄러워 조심스럽게 다무래미 쪽으로 건너는 갔는데 이후 능선으로 올라가려니 해송의 굵고 짧은 잎이 무척 억세고 날카로워 다리를 콕콕 찔러대는데 도저히 올라갈 수가 없다. 이리저리 샛길을 찾아봤지만 아무리 찾아도 샛길이 없어서 할 수 없이 되 내려왔다.

 

준비한 간식을 먹으며 해넘이 구경을 한다. 추자10경 중 제2경인 직구낙조 (直龜落照: 상추자의 서북방 최단에 거북 모양을 한 직구도가 있는데 저녁노을이 매우 아름답다)가 있는데 이곳에서 바라보는 낙조도 직구낙조 못지않다. 바로 앞섬이 직구낙조로 유명한 직구도이다.

서서히 붉은 해가 바다 속으로 잠기는 광경을 보고 있노라니 가슴이 벅차다. 그렇게 멋진 일몰까지 구경한 후 민박집에 되돌아와 제2일 일정을 마치고 꿈속으로 들어갔다.

 

추자도 여행 마지막 날 아침이 밝았다.

역시 민박집에서 아침을 먹고 자전거 타고 민박집을 나섰다. 오늘은 추자도 빼먹은 곳 구석구석을 답사할 예정이다.

가장 먼저 용등봉 답사에 나섰다. 한 번 갔던 길이라 거침없이 자전거 타고 입구에 도착하여 데크길을 올라갔다. 아쉽게도 데크길은 중턱에서 멈춘다. 이곳이 나바론절벽 전망대인데 역시 전망대 이름답게 나바론절벽이 멋지게 보인다.그런데 앞 전에 나바론절벽 답사 때는 몰랐는데 나바론절벽의 반대쪽에 하트(♡)모양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인위적으로 만든 것 같다. 인위적으로 만들었어도 멋진 조화를 이루워 보기가 좋다.

전망대에서 용등봉 정상으로 올라가려니 너무 위험해서 올라갈 수가 없어서 아쉬움을 뒤로하고 되내려와 이번에는 물 찬 다무래미를 보고 싶어서 다무래미로 향했다.

 

역시 밀물 때라 물이 차서 다무래미가 섬이 되어 있었다.

이번엔 다무래미에서 앞 전에 나바론절벽 답사하느라 빼먹은 상추자도 올레길 답사에 나섰다.

상추자도 마을로 들어선다.

지극한 효성을 실천한 박명래(朴明來)의 행실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순효각(純孝閣), 처사 박인택(朴仁宅)을 추모하기 위해 후손들이 건립한 사당인 처사각(處士閣)을 거쳐 등대입구까지 올레길 답사를 했다. 이렇게 해서 상추자도 올레길 빠진 구간 답사를 마치고 민박집에 돌아와 점심을 먹고 짐 챙겨 그동안 짧은 기간 너무나 잘 해주신 민박집 부부와 작별하고 민박집을 나섰다.

추자도의 유래가 추자나무(가래나무)에서 유래됐다는 말이 있어서 가래나무를 알고 싶어서 민박집에서 같이 식사한 사람이 면사무소 앞에 가래나무 4그루가 있다고 해서 가장 먼저 면사무소로 향했다.

 

[추자도의 유래]

추자도라는 섬 이름은 굳이 낚시를 좋아하지 않은 사람일지라도 한번쯤은 들어봤음직한 섬 이름일 것이다.

행정구역상 제주특별자치도에 속해 있고 생활권은 전남에 속해 있는 우리나라 서해남부 먼 바다에 위치한 42개의 군도로 형성되어 있다. 4개(상추자, 하추자, 추포도, 횡간도)의 유인도와 38개의 무인도가 있다.

 

추자도 이름의 유래는 여러 가지 설이 많은데 섬 이름인 추자(楸子)가 바로 가래나무를 뜻하기 때문이다.

추자라고 부르는 가래나무는 서양에서는 월넛(Walnut)이라고 부르며 체리, 마호가니, 로즈우드, 티크와 더불어 서양가구에 주로 쓰이는 최고급 목재들이고 요즘 우리가 쓰는 가구들의 대부분이 무늬목이나 시트지로 입힌 월넛이나 체리이기도 하다.

중국에서는 왕의 관을 가래나무로 만들어 그 이름을 '재궁'이라고 부른다 해서 재궁이란 임금의 관을 뜻하는 단어가 되었고, 조선에서는 그렇게 큰 추자나무가 흔하지 않은 탓에 소나무로 임금의 관을 썼지만 이름은 똑같이 '재궁'이라고 부른다.

흔히 월넛은 호두나무로 알려져 있지만 가래나무와 호두나무는 거의 쌍둥이 나무이다. 원래 호두나무는 호도(胡.桃)나무이고 호도의 뜻을 직역하면 '오랑캐 복숭아'란 뜻으로 중국 한 무제 때 장건이 서역을 갔다 오면서 이 나무를 가져왔는데, 서역에서 왔다고 해서 ‘호’를 쓰고 그 열매 모양이 복숭아를 닮았다고 해서 ‘도’를 써 호도가 된 것이다.(중앙아시아 쪽에서 각 나라마다 이름은 다르지만 주식으로 먹는 얇고 넓은 쟁반만한 밀가루 빵이 우리나라에 오면 호떡(오랑캐떡/빵이라는 개념은 근대에 온 것이므로 떡), 이탈리아로 가서 피자가 된다. 참고로 삼립식품의 호빵은 겨울에 호호 불어서 먹으라고 호빵이지 수입품으로서의 호(胡)가 아니다 ^^)

호두가 처음 우리나라에 온 것은 고려 충렬왕 때 천안출신인 유청신이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묘목과 열매를 가지고 와 천안 광덕사에 심었는데 그게 오늘날 천안의 명물 호도과자가 된 유래이기도 하다.

 

옛날부터 선조들은 호두나무와 가래나무를 특별히 구분해서 쓰지는 않았는데 추자라고 부르는 가래나무는 주로 추운 지역인 중부 이북지역에 잘 자라고 호도나무는 중부 이남 지역에 잘 자라기 때문에 오늘날 추자도에 대한 의문이 생기는 것이다.

남쪽하고도 상당히 끝 쪽에 위치한 추자도에 추자나무가 당연히 있기 힘들기 때문으로 오늘날 추자도의 유래는 추자나무가 많이 서식하는 섬이라서가 아니라 점점이 뿌려져 있는 42개의 섬이 마치 추자나무 열매가 바둑판 모양으로 정연히 있는 모습에서 추자도란 이름이 유래했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한 설명일 것이다. (실제 글쓴이는 추자도 구석구석 다녀봤는데 가래나무를 본 적이 없었다.)

문제는 경남 통영 앞바다에 위치한 추도(楸島 )역시 가래나무가 울창하여 그 이름이 추도라 불렸다는 것인데, 지금은 가래나무가 전혀 없어서 과연 이 추도도 가래나무가 과거에 울창했는지는 의문시 된다.

추자도의 대표적인 봉우리는 관탈봉(冠脫峯. 모자를 벗는 봉우리)으로 주로 제주로 귀양 가는 양반들이 이곳 추자도를 지날 때, 이젠 포기하고 양반의 상징인 갓을 벗었다고 해서 그 이름이 유래됐다고 한다.

 

과거나 지금이나 정치적 라이벌은 그 존재 자체가 정치적 불안요소이기 때문에 격리, 징벌, 제거 같은 방식을 사용한다. 격리는 멀리 보내기는 하지만 생활은 곤궁하지 않게 하는 것이고, 징벌은 멀리 보내고 생활도 힘들게 하는 것이고, 제거는 그야말로 죽이는 것이다. 전라도 쪽으로 보내는 죄인들은 주로 격리에 해당한다. 먹고 살기 나은 곳으로 보내 최소한 생활의 궁핍은 없게 하고자 하는 방식이다.[인터넷에서 발췌]

 

면사무소 앞 가래나무를 유심히 보고 있는데 누군가가 옆에 와서 이것저것 물어본다. 묻는 말에 대답을 하니 차 한 잔 할 시간이 되냐고 묻기에 시간 여유가 있어서 좋다고 하니 면사무소 2층으로 올라간다.

「허~걱!」

면장 집무실이었던 것이다.

이후 현길환 면장님은 추자도에서의 불편한 점, 개선할 점, 좋은 점 등을 손수 끓인 오리지널 커피와 드링크 등을 건네면서 묻곤 메모하며 진지하게 경청했다.

뜻밖에 면장님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면사무소에서 나와 다시 자전거를 타고 추자도 답사에 나서는데 민박집 부부를 만났다. 해조류(미역 등)을 주려고 했는데 아까 헤어질 때 깜박했다며 따라오라고 한다. 그래서 민박집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있는 창고로 이동하여 푸짐한 해조류 선물을 받고 헤어졌다.

이후 석지머리로 이동하여 제주도와 한라산이 조망되는 멋진 쉼터에서 한동안 쉬다가 신양항으로 이동하여 배 시간을 기다렸다. 이렇게 해서 2박3일의 추자도 여행을 즐겁게 마쳤다.

 

완도항에 거의 다다를 즈음 일몰도 너무나 멋졌다.

완도항에 도착하여 차량을 회수한 후 귀가했다.

오, 멋진 추자도여 다음에 또 가리라!

 

5.참고자료

 

(1) 추자도 가는 배편(배 시간이 계절에 따라 변하니 선사 홈피나 전화로 확인 요망)

 

구분

완도

추자(하추자. 신양항)

제주

한일레드펄호

09:20 →

11:20 →

13:20

19:30

← 17:00

← 15:30

구분

목포

벽파

추자(상추자항)

제주

핑크돌핀호

14:00 →

15:00 →

16:40 →

17:45

13:15

← 12:30

← 11:00

← 09:30

 

[선사 홈피]

한일레드펄호 : http://www.hanilexpress.co.kr 

씨월드고속훼리(핑크돌핀호) : http://www.seaferry.co.kr/ 

 

6. 사진 더 보기

[추자도여행 1] 추자올레길을 따라

[추자도여행 2] 추자도의 최고 경관지, 나바론 절벽

[추자도여행 3] 다시 추자올레길

[추자도여행 4] 추자올레길(하추자도)

[추자도여행 5] 추자도 다무래미

[추자도여행 6] 추자도 용등봉, 석지머리

 

7. 여행경비 [2인 기준]

(1)고속도로 통행료: 갈 때(17,100) 올 때(20,900), 합계(38,000)

(2)숙박비: 목포시내(30,000)

(3)식대: 목포시내(2인: 16,000), 상행선 휴게소(2인: 12,000)

(4)주유비: 55,800 + 63,000

(5)배삯: 갈 때(25,250× 2=50,500) 올 때(23,700× 2=47,400), 합계(97,900)

(6)부식비: 삼다수, 과일, 과자 등(55,160) 컵라면(2,000× 2회=4,000)

(7)기타: 안마의자(1,000)

(8)추자도 민박비(식대 포함): 2박 14끼(7끼 2명), 합계(160,000)

(9)합계: 532,8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