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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락산] 수락팔경(내원암)을 찾아서 2

약초2 2012. 12. 2. 21:58

[수락산] 수락팔경(내원암)을 찾아서 2

 

1부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이제 내원암으로 이동했습니다.

 

 내원암 해우소

 

 삭도

 

 내원암

 

 내원암에서 바라본 금류폭포 상단부 옆에서 장사하는 집입니다.

정면으로 미륵봉이 우람합니다.

 

 

 내원암 대웅보전

 

내원암(內院庵)

 

주소: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청학리 578번지

종단: 대한불교조계종

창건주: 미상

창건연대: 통일신라시대

 

 

내원암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어 인터넷을 검색해봤다.

그 중 2005년 9월 11일 한겨레신문 기사의 내용이다

 

얽히고설킨 내원암과 이해창, 조선왕실

-왕실의 절에서 소송까지 200년 인연

 

내원암 뒤쪽 산자락이 문제의 땅인데 친일파 이해창의 후손들이 소유권이전 소송을 낸 땅이라 한다.

 

친일파 후손과 임야 소유권 분쟁에 휘말린 남양주 봉선사 내원암은 조선 왕실과 200년 동안 깊은 관계를 맺어왔다. 내원암은 신라 때 창건되었다고 알려지고 있을 뿐 구체적 기록은 없다.

 

내원암이 본격 사찰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조선의 왕가와 인연을 맺은 조선 후기 정조 때부터다. 정조가 1794년 내원암의 서쪽에 칠성각을 짓고 친히 관응전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또 내원암은 순조, 철종, 고종 때도 조정의 지원을 받아 암자를 새로 증축했다고 기록에 전한다.

 

특히, 내원암은 왕실과 관련한 탄생 설화도 전해지고 있다. 옛 문헌과 내원암 스님들 사이에 전해지는 탄생 설화는 이렇다.

 

“정조 당시 대구 팔공산 파계사에 용파라는 스님이 있었다. 그는 학식과 덕망을 겸비해 고승으로 불렸다. 정조는 용파 스님에게 왕업을 계승할 후손을 얻을 수 있도록 기도해줄 것을 부탁하였다. 용파 스님은 내원암에서 300일 기도를 올렸다. 그러나 기도 중에 이 땅에 왕자를 잉태할 여성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결국 용파 스님은 북한산 금회암에 수행 중인 농산 스님에게 편지를 보내 이 땅의 왕자로 태어나줄 것을 부탁하였다. 어느 날 정조의 후궁 수빈 박씨는 노승이 자신에게 들어오는 꿈을 꾼 뒤 잉태해 아들을 낳았다. 그가 순조였다.”

 

이런 기록과 전설을 바탕에 놓고 보면 내원암은 조선 왕실의 절로 손색이 없었다. 그러나 일제시대 친일의 대가로 내원암 주변의 땅을 받은 이해창과 인연을 맺으면서 조선왕실과 관계는 악연으로 바뀌어간다. 이해창이 일제로부터 왜 하필 내원암 일대의 땅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해창은 왕이 될 수 있었던 왕족이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의 아버지 이하전은 흥선대원군과 사촌형제 사이다. 이하전은 헌종 다음 왕위에 오를 것으로 예상되었던 인물로, 세도정치를 폈던 안동 김씨의 모함에 걸려 역모죄로 죽음을 당했다. 만약 이하전이 죽지 않고 살았다면 이해창도 왕위에 올랐을지 모를 일이다.

 

내원암을 둘러싼 설화와 기록을 뒤쫓아보면, 이해창 후손들이 내원암을 상대로 소송을 낸 것은 순조 탄생의 배경이 되었던 왕실의 절에 소송을 내는 셈이 되었다. 이해창의 후손들은 내원암과 자신의 선조들의 친밀했던 관계를 제대로 알고 소송을 제기한 것일까? 아니면 그저 돈에 눈이 어두웠을까? 조선 왕실과 내원암의 200년 인연은 어떻게 마무리 될 것인가?

 

후속(재판 결과)이 궁금해서 계속 인터넷을 확인하니 결국 봉선사(내원암) 측이 승소하고…, 친일파 쪽은 소송을 취하하고…. 그런 내용이 뜬다.

 

내원암 설화 3편

 

[1.「성절」이 된 내원암]

 

또 하나 이 절의 성격과 관계되어 내려오는 전설이 있다. 내원암을 일명‘성절’이라고도 부르는데, 그 유래는 우선 절이 자리한 수락산이 마치 개성(開城)의 성거산(聖居山)과 비슷하게 생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유는 성거산은 오백나한성상이 상주하는 도량이라서 그런 이름이 붙은 것인데, 내원암도 광응전이 낙성된 이듬해 강원도 묘향산에 있던 16나한상을 이곳으로 옮겨왔으므로 절 이름을 성사(聖寺)라고 하는 게 좋겠다는 정조임금의 말에 따라 성절[聖寺]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전설 역시 내원암이 조선 후기 왕실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었음을 나타내주는 설화로 생각된다. 그러나 현재 묘향산에서 옮겨왔다는 16나한상은 남아있지 않다.

 

[2. 내원암]

 

남대문에 이상한 물장수가 나타났다. 허름한 민가 한 켠, 버려졌던 움막에 새 주인이 들어 오고 그 주인은 양민들의 가가호호를 방문하며 우물물을 길어다 주는 일로 하루 세 끼니를 채웠는데 가족도 없고 만나는 사람도 특별히 없는 외톨박이였다. 무엇보다 그는 산중의 승려였음에도 저자 거리에서 물장수를 하고 있어 사람들의 관심거리가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의 물장수 생활이 한 달 두 달을 넘어 한 해 두 해를 지나면서 그 특별한 사람에 대한 관심은 눈 녹듯이 사라져 버렸다. 사람은 무슨 일이든 잊기를 좋아 하기에 새로운 일에 관심을 보일 수 있는 것인지 모를 일.

 

새벽에 일어나 염불을 하고 참선을 한 후 물지게를 지고 저자거리로 나서는 그 고단한 생활. 물장수는 남대문 저자 거리에 몸을 두고 있을지라도 마음은 늘 팔공산 파계사 법당과 저 구중궁궐에 계시는 임금에게 가 있었다. 그의 법명은 용파(龍坡). 팔공산 파계사 호젓한 도량에서 수행에 몰두하고 있었으나 억불숭유의 정치적 기류와 그 기류를 타고 불교를 핍박하는 지방 사대부들의 탐심이 못내 가슴 아프고 더러 화나기도 하는 현실을 그냥 지켜 볼 수만은 없었다.

 

"내 한양으로 가리라. 임금을 만나 뵙고 이 중생계의 악업을 끓도록 진언 하리라."

그러나 그의 뜻은 쉬 이루어 질 수 없었다. 한양 땅에는 올라 왔으나 승려의 신분으로는 도성을 출입할 수도 없는 실정법이 가장 먼저 가로막고 섰던 것.

"할 수 없는 일이지. 국법이 그렇다면. 그른 법도 법이니 어기면서까지 내 주장을 할 수야 없는 노릇. 내 주장이 그르지 않은바에야 언젠가 기회가 오리라."

그래서 남대문 밖 움막 하나를 주선해 기거하며 물장수 생활을 시작 한 것이었다. 어지간 하면 다음 기회를 생각하거나 다른 방도를 연구하기 위해 다시 절로 돌아 갈만도 하건만 3년의 세월을 한결 같은 마음으로 물지게를 지고 다녔으니 스님의 성정도 여간 굳센 것이 아니라 해야 할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부처님의 감화를 입게 되었다. 지성이면 가피가 없을 수 없음을 반증이라도 하듯 물장수 용파 스님의 뜻이 이뤄질 인연이 무르익은 것이다.

"참으로 이상한 꿈이로다."

임금(정조)의 꿈이었다. 한줄기 상서로운 기운이 한양 하늘에서 내리 뻗더니 궁궐이 아닌 남대문 밖 어느 곳으로 장대하게 떨어지는 것이었다. 마구 달려서 그 서기가 떨어진 곳으로 가 보았는데 뜻 밖에도 허름한 움막집이 한 채 있었고 그 속에는 조용히 좌선삼매에 든 승려 한 사람이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 승려에게 무슨 말을 하려다가 그만 잠이 깨 버린 것인데, 잠이 깬 후에도 그 꿈이 어찌나 생생한지 눈앞에 다시 꿈의 내용들이 시현되는 지경이었다.

 

임금은 신하를 불러 남대문 밖으로 나아가 이런 이런 곳이 있는지 알아보라 일렀다.

"전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꼭 그러한 곳이 남대문 밖에 있었고 움막에는 몇 년 전부터 승려 한 사람이 와서 물장사를 하며 살고 있다 하옵니다."

신하의 보고에 임금은 등골의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필시 그 승려가 할 말이 있음이다. 이리로 데려 오도록."

 

그렇게 용파 스님의 소원은 이뤄지게 되었다. 3년의 기다림 끝에 왕을 친견하게 되었고 지방 토호세력과 사대부들이 자아내는 억불의 실상을 낱낱이 고할 수 있게 되었다.

"… 단지, 저희 같은 승려가 잘 살자고 드리는 말씀은 아니옵고 불교를 핍박함은 이 나라의 정신을 억누르는 일이며 여러 산과 계곡의 절과 암자가 피폐하는 것은 민심의 피폐임에 조정과 국기(國基)를 튼튼히 하시기 위해서라도 일방적이고 터무니없는 탄압은 삼가 하도록 하명이 계셔야 할 줄로 아뢰옵니다…"

임금은 "내 진작 그런 사정을 세세히 몰랐음이니 향후 일체 그런 일이 없도록 하리라"는 약속을 했다. 그렇게 임금을 알현하고 물러나려는 순간 임금이 그윽한 목소리로 스님을 다시 불렀다.

"화상. 나는 하늘로부터 화상과의 만남을 언약 받은 일이 예삿일일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소. 화상이 간청한 일도 참으로 나라를 위해 갸륵한 일이 아닐 수 없고 내 그 청을 들어 주기로 약조도 했소. 그런데 나를 위해 화상의 특출한 법력을 발휘해 줄 수는 없겠소."

다름이 아니라 임금의 후사 문제였다. 중전이 다산을 하지 못하고 한 명의 왕자를 생산 했을 뿐인 정황에서 느끼는 그 은근한 조바심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었다.

"미력한 힘이나마 나라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용파 스님은 북한산 금선사(金仙寺)를 찾았다. 농산(聾山) 스님과 더불어 기도를 하기 위함이었다. 나라에서는 특별히 기도처를 물색하라는 전갈이 있었고 용파 스님은 북한산의 금선사와 수락산의 명당터를 골라 기도에 들어갔다. 수락산의 그 터는 이미 신라적부터 절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 곳이었다. 나라에서는 그 곳에 당우를 지어 주었다. 두 스님이 기도를 시작한 이후 임금은 불심을 발해 두 스님의 기도를 도왔다.

 

어느 날 용파 스님이 북한산으로 찾아갔다. 농산 스님이 열심히 기도를 하고 있었다.

"대사의 기도가 날로 성성함인지 이 나라에 좋은 소식이 깃들 것 같소이다."

"화상의 기도 덕분이겠지요."

"대사. 이제 몸을 바꾸심이 어떨런지."

농산은 용파의 말이 무슨 뜻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날 밤 두 스님은 어느 때 보다 정성스런 기도를 했다.

"제불보살이여. 이 나라에 감응하사 천년 국운을 융성케 하옵고…"

두 스님은 밤늦도록 기도를 했다. 산을 뒤 흔드는 목탁 소리에 두 스님의 염불소리가 파도처럼 일렁거리는 장엄한 기도였다. 이윽고 농산 스님은 눈짓으로 용파스님에게 자리를 피해 달라는 요청을 했고 용파는 농산을 향해 지극한 마음으로 3배를 올렸다. 그리고 용파는 총총히 금선사를 떠났다. 하늘에는 별들이 찬란히 빛나고 있었다. 용파 스님이 어두운 산길을 헤치고 하산 할 즈음 농산 스님은 조용히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리고 산바람 한 모금을 들이 마쉬는 순간 그대로 적멸의 깊은 잠으로 빠져 들었다. 원적(圓寂). 스님의 죽음은 이 세상을 영영 떠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몸을 받아 다시 오기 위한 하나의 의례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원래의 적적한 자리로의 회귀였고 다시 인연을 따라 세상으로 나투는 성스러운 반전이었다.

 

북한산에서 기도를 하던 농산 스님이 입적 했다는 소식은 다음날 날이 밝기 무섭게 조정으로 알려졌다.

"용파 화상. 이 어찌된 일이오. 어제까지 기도에 정성을 쏟던 스님이 갑자기 입적하다니…"

황급히 찾아 온 한 대신의 놀라움에 비해 용파 스님의 마음은 조용하고 여유롭기까지 했다.

"전하께 상고 하시오. 이제 우리 두 사람의 기도는 더 이상 필요치 않다고. 그리고 기도는 성취되어 조정에 경사가 있을 것임을…"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입궐한 대신은 용파 스님의 말을 임금에게 전했고 임금 역시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이내 그 궁금증은 풀어졌다. 수빈 박씨에게 태기가 섰던 것이다. 임금은 농산 스님이 왕자의 몸으로 다시 세상에 나오고자 짐짓 입적을 한 것임을 알 수 있었고 그 일을 도모한 두 스님의 정진력과 부처님의 감화에 거듭거듭 감읍할 뿐이었다.

"두 화상께서 나라에 이토록 경사스런 인연을 지었음이로다. 수락산 기도터에 절을 크게 짓도록하라."

임금의 명으로 용파 스님이 기도하던 곳은 신라이래 폐찰이 된 불운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고 농산스님이 몸을 바꿔 나툰 왕자는 훗날 보위에 올랐다. 임금의 둘째아들로 태어나 열살에 왕세자로 책봉되고 11살의 나이에 보위에 오른 임금, 조선의 제23대 왕 순조(純祖)였다.

 

[3. 용파대사 원력과 왕자가 된 농산스님]

 

대구 팔공산에 있는 파계사(把溪寺)에는 수행이 높은 용파대사(龍坡大師)가 있었다. 용파대사는 당시 승려들에 대한 핍박을 직접 탄원하고자 한양으로 올라왔으나 승려들은 사대문 안을 드나들 수 없는 법령으로 남대문 밖에서 물장수를 하며 머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렇게 3년 동안이나 있었으나 계속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할 수 없이 파계사로 돌아가기로 작정한 전날 밤이었다. 이날 밤 정조가 꿈을 꾸었는데 남대문 밖 어느 집 위에서 서기(瑞氣)가 서리는 것을 보게 되었고, 곧 사람을 시켜 꿈에 본 집을 찾게 했다. 신하가 그곳을 가보니 물장수 차림의 용파대사가 있는 것을 보고 그대로 임금에게 아뢰어, 마침내 스님은 정조를 알현할 수 있었다. 이때 임금은 후사가 없어 걱정하던 참이었는데 스님이 보통 인물이 아님을 알고 스님에게 후사를 이을 기도를 해줄 것을 부탁했다. 이에 따라 용파 스님은 북한산 금선암(金仙庵)에 있던 농산(聾山) 스님과 함께 기도 정진을 올리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용파 스님은 참선 중에 나랏일이 위태로움을 헤아리고는 즉시 농산 스님에게 편지를 내어 농산 스님에게 직접 이 땅의 왕자로 태어나 줄 것을 부탁하고 농산 스님은 이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날 밤 정조의 후궁인 수빈 박씨가 어떤 노스님이 방에 들어와 자신에게 들어오는 꿈을 꾸었는데 그리고는 곧바로 태기를 느끼고 순조를 낳았다. 이같은 사연을 들은 정조는 용파·농산 스님의 도력과 청정한 계행에 감동해 이후 더욱 더 불법에 마음을 쏟게 되었고, 이어 내원암에 칠성각과 사성전을 짓고 토지를 하사하여 불사에 충당하도록 했다고 한다. 이 전설은 왕실과 그 원찰이 된 절 사이에 이루어지는 여러 유형의 인연담 가운데 하나인데, 단지 여기에서처럼 스님이 환생해서 왕이 되었다는 전설은 보기 드문 것이다. 그만큼 왕실과의 돈독한 관계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통사찰총서5, 내원암편, 162~163page)

 

HBMC 부다피아 홈피에서 발췌

http://www.buddhapia.com/temple/temple_info_basic.asp?temple_cd=0000163428

 

 내원암 대웅보전

 

남양주 내원암 괘불도 안내판

 

 삼성보전

 

 다보탑과 비슷하게 생긴 탑

 

 내원암에서 수락산장 거쳐 수락산 정상 올라가는 길

이곳에서 수락산 정상을 향하지 않고 미륵봉을 가기 위해 되짚어 내려갔습니다.

 

 청학리가는 길 푯말

 

이 탑을 마지막으로 구경하고 내원암과 작별한 후

금류폭포 상단에서 돌계단을 타고 내려가

녹색의 철 난간이 있는 곳에서 좌측 능선으로 올라갔습니다.

미륵봉을 향하여!

제3부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