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 공부/나무 이야기

개잎갈나무(히말라야시다)

약초2 2012. 4. 23. 20:59

 

 

 

개잎갈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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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잎갈나무는 구과목 소나무과의 식물이다. 학명은 Cedrus deodara이다.

 

[이름] 히말라야시다, 설송나무, 히말라야삼나무, 히말라야전나무라고도 부른다. 파키스탄의 국가 나무이다. 종명 ‘deodara’는 현대 인도어 ‘deodar’에서 왔는데, 신의 나무를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devdar’가 어원이다.

 

[생태] 늘푸른 바늘잎나무로 키가 40~50미터에 이른다. 아주 큰 나무는 줄기 지름 3미터에 키가 60미터에 이르기도 한다. 히말라야 북서부에서 아프가니스탄 동부 원산이다. 나무 모습이 원뿔 모양으로 아름다워서 관상수로 많이 심는다. 큰 가지는 옆으로 뻗고 잔가지는 밑으로 드리워진다. 나무 껍질은 검은 잿빛인데 갈라지며 벗겨진다. 잎은 단면이 삼각형이고 끝이 뾰족하다. 암수한그루로 10월에 짧은 가지 끝에 암꽃과 수꽃이 곧게 서 핀다. 꽃 핀 다음해 9~10월에 솔방울 열매가 밤색으로 여문다.

 

[용도] 안쪽 나무는 주로 향이나 아로마 오일을 만드는 데 이용된다. 히말라야 시더 에센셜 오일은 주로 말 혹은 소 등의 가축에 해충을 제어하는데 쓰이기도 합니다.[출처: 위키백과]

 

 바늘잎

 

수피(나무껍질)

 

 개잎갈나무(히말라야시다)

 

세계의 지붕, 히말라야에 사는 개잎갈나무

글. 강판권 (계명대학교 사학과 교수) 2008.09.02 게제.

 

적지 않은 지방자치단체들이 화려한 꽃을 가로수로 조성하고 있어 매우 안타깝다. 가로수 선정에 누가 참여하는지 궁금하다. 철학 없는 가로수 조성은 도시를 아름답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천박한 도시로 전락시킬 수 있다. 한 그루의 나무를 도심에 심는 순간, 그 나무는 도시의 인간과 더불어 문화의 일부이다.

 

조금은 낯선 이름, 개잎갈나무

 

이름은 한 존재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중요한 통로다. 나무와 풀이름은 한글과 한자, 그리고 학명으로 이루어진다. 요즘 나무도감에 등장하는 나무 이름 중에는 과거에 불렀던 이름과 다른 게 종종 있다. 그 중 우리말로 바뀐 게 적지 않다. 나무를 비롯한 식물이나 학문을 다른 나라에서 수입할 경우 그것을 어떻게 수용하느냐의 문제는 아주 중요하다. 어떻게 수용하느냐에 따라 수용 대상에 대한 이해와 영향이 다르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에서 나무를 수입하면 그 나무를 어떤 식으로든 불러야만 한다. 이런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게 이른바 ‘격의(格義)’다. 격의는 뜻을 맞춘다는 뜻이다. 요즘 말로 하면 격의는 번역이다. 번역은 단순히 문자를 옮기는 차원이 아니라 한 나라의 문화와 문화의 수용과정이다. 수입 나무를 어떻게 작명하느냐의 문제는 문화의 문제이고, 문화는 한 나라 국민의 의식을 지배한다. 그래서 한 종류의 나무를 작명하는 작업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신중해야만 한다. 특히 식물의 작명에는 가능하면 그 식물의 정체성을 잘 드러내 붙일 필요가 있다.

 

개잎갈나무는 나무에 큰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겐 아직 낯선 이름이다. 이 나무의 이름은 ‘개’와 ‘잎갈’의 합성어다. 식물 이름에 등장하는 ‘개’는 대개 ‘유사’, ‘가짜’를 의미한다. ‘잎갈’은 ‘잎을 간다, 잎이 떨어진다’는 뜻이다. 그러니 개잎갈나무는 잎을 갈지 않는 나무라는 뜻이다. 잎을 갈지 않는 나무를 흔히 상록수, 즉 늘푸른나무라 부른다. 그런데 왜 개잎갈나무를 상록수라 부르지 않는 것일까. 과연 개잎갈나무에는 이 나무의 특성이 있는가. 개잎갈나무처럼 잎을 갈지 않는 나무는 아주 많다. 그런데도 상록수를 모두 개잎갈나무라 부르지 않는다. 누가 이 나무 이름을 붙였는지 모르지만, 개잎갈나무라는 이름에는 이 나무의 특성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했다.

 

익숙한 이름, 히말라야시다(Hymalaya cedar)

 

총길이 2,400km에 해당하는 히말라야는 세계의 지붕이다. 이곳에 세계에서 가장 높은 에베레스트 산이 있다. 에베레스트는 영국 사람의 이름이지만, 산스크리트어로는 ‘하늘의 이마’, 티베트어로는 ‘세상의 어머니’를 의미한다. 히말라야시다는 ‘히말라야’와 ‘시다’의 합성어다. 히말라야는 고대 산스크리트, 즉 범어(梵語)로 ‘(雪)’을 뜻하는 ‘히마(hima)’와 ‘거처’를 뜻하는 ‘알라야(alaya)’의 복합어다. ‘시다’는 향나무와 삼나무 같은 침엽수를 총칭하는 이름이다. 따라서 히말라야시다의 이름에는 지역명과 나무의 기본 특성이 함께 들어 있다.

 

히말라야시다의 이름은 학명에 가깝다. 이 나무의 학명은 Cedrus deodara (Roxb.) Loudon으로 영국 출신의 식물학자 루던(Loudon, 1783~1843)이 붙였다. 학명에는 원산지 표시가 없지만, 히말라야시다는 이 나무의 원산지가 히말라야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학명 중 속명에 해당하는 ‘체드루스’는 ‘향나무’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케드론(kedron)’에서 유래했다. 종소명에 해당하는 ‘데오다라’는 ‘신목(神木)’을 뜻한다. 학명 중 체드루스는 히말라야시다의 시다를 이해하는 열쇠다. 결국 학명을 붙인 사람은 이 나무가 소나무과에 속하지만 향나무와 많이 닮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아울러 학명에서는 이 나무가 신령스럽다는 의미도 놓치지 않고 있다. 이 나무를 한국의 느티나무, 은행나무, 소나무 등과 같이 신목으로 생각한 것은 무엇보다도 추운 곳에 살면서도 아주 오래 살 뿐 아니라 목재의 가치도 높았기 때문이다.

 

개잎갈나무와 히말라야시다는 같은 나무를 다르게 부르는 이름이지만 담고 있는 의미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개잎갈나무는 나무의 의미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 반면 히말라야시다는 상대적으로 나무의 의미까지 담고 있다. 이 나무를 다른 나라에서 어떻게 부르는지 비교하면 개잎갈나무가 잘 붙여진 이름인지 짐작할 수 있다. 히말라야 산맥과 인접한 중국에서는 이 나무를 설송(雪松)이라 부른다. 북한에서도 이 나무를 중국과 같은 이름으로 부른다. 중국과 북한에서 부르는 설송의 ‘설’은 히말라야를, ‘송’은 이 나무가 소나무와 닮았기 때문이다. 설송은 이 나무의 원산지와 특성을 함께 고려한 이름이다.

 

솔로몬이 성전에 바친 나무, 백향목(柏香木)

 

우리나라에서는 이 나무를 개잎갈나무와 히말라야시다 외에 다른 이름으로 불렀던 적이 있다. 그 이름은 백향목이다. 기독교 신자들은 이 나무를 성경에서 아주 자주 만날 수 있었지만, 성경에 등장하는 나무가 개잎갈나무인지 아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내가 잘 아는 분 중 아주 독실한 기독교신자가 계셨다. 그 분은 이 나무에 대한 나의 글을 보고서야 백향목이 개잎갈나무라는 것을 알았다. 더욱이 그 분이 다니는 교회에 100년 동안 살고 있는 나무가 바로 성경에 나오는 백향목인 줄도 그때서야 비로소 알았다.

한글 성경 번역본에 등장하는 백향목은 학명 중 속명에 해당하는 ‘체드루스’를 우리말로 옮긴 듯하다. 백향목은 무슨 뜻일까? 백향목은 측백나무와 향나무를 합한 이름이다. 한국 사람들은 대개 ‘백’을 ‘잣나무’로 번역하지만 한자의 뜻은 측백나무다. 백향목은 학명의 뜻을 잘 살린 이름이다. 그러나 개잎갈나무를 백향목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이 나무는 성경에서는 힘· 영광· 평강을 상징한다. 아울러 이 나무는 솔로몬 왕이 궁전과 모리아(Moniah) 산 위에 성전을 세울 때 사용했다. 솔로몬은 이러한 대역사를 위해 3만 명의 이스라엘 인과 15만 명의 노예와 3천 명이 넘는 관리를 보내어 20여 년 넘게 광대한 나무를 베게 했다. ‘평화’를 의미하는 ‘솔로몬’은 평화롭게 살고 있는 백향목의 목숨을 한순간에 앗아간 장본인이다. 백향목으로 건설한 성전이 얼마나 화려했을지는 보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백향목을 벤 사람은 솔로몬만이 아니다. 청동기를 만든 이후 인류는 백향목을 비롯한 각종 나무로 문명을 일구었다. 나무의 희생 없는 인류 문명은 상상할 수 없다.

 

레바논의 국기에 등장하는 나무, 레바논시다

 

같은 나무면서도 사는 지역에 따라 이름이 다를 수 있다. 히말라야시다가 히말라야에 살아서 붙인 이름이라면, 레바논에 사는 개잎갈나무는 레바논시다다. 레바논 사람들은 이 나무를 끔찍하게 사랑한다. 레바논시다는 이 나무가 주로 레바논 산맥에 살고 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레바논 산맥도 히말라야 산맥처럼 1년의 반이 눈으로 덮여 있다. 그래서 레바논의 국명도 ‘하얗다’를 의미하는 ‘라반(Laban)’에서 유래했다. 레바논시다는 레바논의 나라 나무, 즉 국목(國木)이다. 현재 레바논 산맥 골짜기에 5천 년 동안 살고 있는 개잎갈나무가 있다. 그러나 레바논시다도 예루살렘 성전과 이집트의 신전 건설을 위하여 잘려 나가 많이 남아 있지 않다.

레바논 사람들이 사랑하고 있는 개잎갈나무는 최근 혁명을 상징하는 나무로 불린다. 1992∼1999년, 2000∼2004년 10월까지 총리를 역임한 레바논의 리피크 하리리가 2005년 베이루트에서 차량폭탄 테러로 사망했다. 그는 레바논에 주둔하고 있는 시리아군의 철수를 요구하는 야당 진영에 합류했다. 그가 5월 총선을 앞두고 암살당하자 레바논에선 오랜 세월 종주국 노릇을 해온 시리아와의 관계를 청산하자는 시위가 잇따랐다. 미국은 레바논 민중의 움직임을 ‘백향목 혁명’이라 불렀고, 우리나라에서도 같은 이름으로 불렀다. 이처럼 단풍나무가 캐나다의 국기에 등장하듯 한 그루의 나무는 한 민족의 정체성까지 간직한다.

 

대통령이 사랑한 나무, 히말라야시다

 

히말라야와 레바논에 자생하던 개잎갈나무는 우리나라 도시 곳곳에서 볼 수 있다. 특히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집중적으로 심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왜 하필 이 나무를 좋아했는지 알 수 없지만, 늘 푸르고 목재의 가치도 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개잎갈나무는 우리나라 초등학교 어디든 버즘나무와 함께 즐겨 심었던 나무다. 개잎갈나무는 늘 푸르고 가지도 길게 뻗어 이 나무에 눈이 내리면 아주 운치가 있다. 그러나 이 나무는 덩치에 비해 뿌리가 깊지 않아 태풍에 아주 약하다. 히말라야와 레바논 산맥의 개잎갈나무들은 뿌리가 서로 엉켜 있기 때문에 눈보라에도 잘 견딜 수 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는 개잎갈나무를 가로수로도 즐겨 심었다. 특히 내가 살고 있는 대구 동대구로는 대부분 개잎갈나무다. 이 길의 개잎갈나무는 다른 지역 사람들이 대구의 상징으로 꼽을 만큼 강한 인상을 준다. 내가 다닌 계명대학교 대명동 캠퍼스에서도 학교를 세울 때 노천강당 주변에 돌을 파서 이 나무를 심었다. 대명동 캠퍼스의 상징 나무도 개잎갈나무였다. 그러나 대구를 상징하던 개잎갈나무는 2003년 9월 ‘태풍 매미’로 큰 피해를 입었다. 내 모교인 대명동 캠퍼스의 개잎갈나무는 모두 넘어져 이제 한 그루도 남아 있지 않고, 그 자리에 소나무를 심었다. 동대구로의 개잎갈나무도 대부분 가지가 잘리고 지주대에 의지해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태풍 매미 직후 동대구로의 개잎갈나무는 대구 시민들의 논쟁 대상으로 떠올랐다. 개잎갈나무를 그대로 둘 것인가, 아니면 다른 나무로 바꿀 것인가를 둘러싼 논쟁이 대구의 여름 날씨만큼 뜨겁게 달아올랐다. 논쟁은 결론 없이 끝났다. 여전히 동대구로의 개잎갈나무는 남아 있다. 문제는 나무가 아니라 나무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인식이다.

 

개잎갈나무와 가로수

 

가로수의 역사는 길다. 어떤 나무를 가로수로 할 것인지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르다. 중국 진나라 수도 함양의 가로수는 소나무였고, 한나라 수도 장안의 가로수는 회화나무였다. 중국 당나라 이후 수도의 가로수는 주로 버드나무였다. 그러나 우리나라 가로수의 역사는 아주 짧다. 개잎갈나무를 가로수로 삼았던 이유 중 하나는 도시를 늘 푸른 나무로 가꾸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금처럼 도시 규모가 크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자동차가 거의 없던 시절, 아울러 가로수의 가치를 다양하게 고려할 수 없었던 시절에는 개잎갈나무를 가로수로 선택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박정희 대통령 시절 개잎갈나무의 가로수선정을 무조건 탓하는 것은 비역사적인 해석이다.

 

개잎갈나무는 현재 가로수로 적합하지 않다. 그러나 지금도 개잎갈나무는 대구 동대구로의 주요 가로수다. 이처럼 현재 가로수로 적합하지 않은 나무들이 도시 곳곳에 살고 있다. 도시에 오지 말아야 할 나무들이 매일 매연을 마시면서 힘들게 살고 있는 모습을 보면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인간이 가장 먼저 할 일은 가로수에 대한 성찰이다. 어쩔 수 없이 인간이 살기 위해 나무를 도심으로 가져와야 한다면, 적어도 도심에서라도 나무가 본성대로 살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배려라도 해야 옳다. 개잎갈나무를 도시의 가로수로 삼은 것은 애초부터 나무에 대한 깊은 배려가 부족한 탓이다. 그러나 지금 와서 개잎갈나무를 비롯한 도시에 적합지 않은 모든 가로수를 벤다면, 이 또한 나무의 생명을 모독하는 짓이다.

 

도심의 개잎갈나무는 인간의 무지가 낳은 비극의 가로수다. 이런 비극이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 비극을 줄이는 방법은 나무를 정확하게 아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최근에도 지방자치단체에서 조성하고 있는 각종 가로수 정책은 개잎갈나무의 전철을 밟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적지 않은 지방자치단체들이 화려한 꽃을 가로수로 조성하고 있어 매우 안타깝다. 가로수 선정에 누가 참여하는 지 궁금하다. 철학 없는 가로수 조성은 도시를 아름답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천박한 도시로 전락시킬 수 있다. 한 그루의 나무를 도심에 심는 순간, 그 나무는 도시의 인간과 더불어 문화의 일부이다.

 

개잎갈나무는 아주 넓은 곳에서 살아야 천명을 누릴 수 있다. 개잎갈나무가 천명을 누리도록 배려하지 않으면 결국 인간도 천명을 다할 수 없다. 개잎갈나무에 달린 둥근 열매가 익어 떨어져 후손을 만들 수 있어야 인간도 후손을 낳을 수 있다. 내 연구실에는 올 봄 잘린 개잎갈나무에서 채취한 열매의 흔적이 있다. 나는 ‘피 묻은’ 개잎갈나무의 열매를 연구실에 가져와 걸어두었다. 시간이 지나자 열매가 조금씩 갈라지면서 껍질이 우주의 무게로 뚝뚝 떨어졌다. 갈라진 열매는 매미날개보다 얇고 부드러운 막이 겹겹으로 씨앗을 둘러싸고 있었다. 나는 한 치의 오차 없이 만든 개잎갈나무의 열매를 보면서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른다. 그런 개잎갈나무를 함부로 대하지는 않았는지 반성했다.

 

나는 죽은 개잎갈나무의 열매를 헛되이 할 수 없다는 생각에 학습 자료로 활용하기로 작정했다.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떨어진 열매 껍질을 치우지 않고 몇 달 동안 그냥 둔 채, 연구실에 오는 사람마다 개잎갈나무의 삶을 얘기했다. 때론 열매를 가져가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보여주면서 나무를 예찬했다. 지금도 심(心)만 남은 열매가 창처럼 책에 꽂혀 있다. 아직도 열매의 흔적을 버리지 않고 간직하고 있는 것은 개잎갈나무의 죽은 열매를 통해 사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다. 죽은 자를 통해 사는 법을 배우지 못한다면, 제대로 살아갈 수 없다. 책에 꽂힌 두 개의 개잎갈나무 열매는 나에게 ‘명(銘)’이다. 열매를 바라보면서 어떻게 살지를 새기는 경구와 같은 존재다.

 

연구실 창문 너머 개잎갈나무가 바람에 춤춘다. 히말라야와 레바논 산맥에서 사라진 개잎갈나무의 비명소리가 문틈 새로 들어온다. 개잎갈나무로 만든 화려한 성전과 신전은 사라지고 그곳엔 먼지만 뒹군다. 이제 ‘성전’과 ‘신전’은 개잎갈나무의 희생으로 만들 수 없다. 개잎갈나무와 함께 사는 자체가 성전과 신전이다. 성전과 신전은 다른 생명과 더불어 살 때만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히말라야시다의 솔방울 열매와 씨앗의 모습

 

솔방울처럼 물에 젖으면 인편이 모두 움츠려들었다가 습기가 걷히면 꽃처럼 피어납니다.

인편은 잘 익은 순서대로 떨어지며 인편의 사이에서 솔씨와 닮은꼴의 시과 씨앗이 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