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산행/전라, 제주의 산

[1,000번째 산행이야기] 1,089번째 만덕산 첫 이야기

약초2 2012. 4. 22. 20:44

1,000번째 산행이야기

1,089번째 산, 만덕산 첫 이야기

 

1.산행날짜: 2012년 4월 14일(토)~15일(일): 무박산행

2.산행날씨: 맑고 화창함. 다소 더움.

3.산행코스: 소석문→석문산→용문사→바람재→만덕산→옥룡사

 

4.산행시간

-04:48 오소재 발

-05:25 소석문 착 / -05:32 발(산행시작)

-05:55 석문산

-06:23 55번도로

-06:54 좌 합류 삼거리(삼거리. →백련사:5.23km, ←석문공원:0.58km, ↓용문사:0.35km)

-07:05 채광지 갈림길(↓용문사 0.48km, 만덕광업채광지→)

-07:25~07:38 휴식

-08:01 넓은 평지 안부

-08:15 이정표(←바람재 1.47km, 용문사 3.04km→) 있는 곳

-08:26 삼거리 안부(용문사 3.67km→)

-08:31 280봉(안테나, 벙커)

-08:39 사거리

-08:42 바람재(사거리 안부. 바람재(240m. ←임도 0.32km, 만덕산기도원 0.29km→, ↓용문사 4.51km, ↑옥련사 2.6km)

-08:58~09:12 전망대 봉우리에서 휴식

-09:21 다산초당 갈림길(←깃대봉 0.54km, 바람재 0.26km→, ↑다산초당 1.13km)

-09:35 만덕산 정상(깃대봉(408.6m) ←필봉 1.39km, 바람재 0.8km→) 착 / -09:41 발

-10:19~10:37 무명봉에서 휴식

-10:48 강진광업 갈림길(강진광업 0.5km→)

-10:53 필봉(필봉(190m) ←옥련사 0.41km, 깃대봉 1.39km→)

-10:58 이정표(←옥련사 0.26km, 필봉 0.15km→)

-11:01 무덤. 이정표(↓옥련사 0.15km, 옹달샘 0.11km→)

-11:04 옥련사(등산로→)

-11:07 옥룡사 주차장 착(산행종료: 5시간 35분 산행함)

-택시로 이동하여 다산초당 도착

-다산초당→유물전시관→다산초당→백련사

-다산초당 입구 명가식당에서 점심식사 후 귀경 시작(16:15)

-22:30 상일동 착

-23:00 건대입구역 착(해산)

-23:00 건대입구역 착(해산)

 

◆소석문-(0:20)-석문산-(0:25)-55번도로-(0:30)-능선분기점-(1:24)-안테나봉-(0:11)-바람재-(0:35)-만덕산-(0:54)-필봉-(0:14)-옥룡사

※휴식없이 4시간 33분, 실제는 휴식포함해서 5시간 35분 걸렸다.

 

5.참가인원: 산악회 24명 참석. 만덕산 코스 3명(본인, 하이디님, 솜사탕님)

 

6.참고자료[부산일보 만덕산 산행수첩 내용]

 

 

 

노란 수술과 붉은 꽃잎의 대비가 처연할 정도로 강렬한 동백꽃은 그 강한 인상만큼이나 서로 다른 2개의 꽃을 피운다.

하나는 바람 난 아가씨처럼 나뭇가지에 매달려 이리저리 흔들리는 생화이고 다른 하나는 모가지 째 뚝뚝 떨어져 바닥에 낭자한 선혈의 꽃이다.

봄이 황홀하면서도 서러운 것은 동백의 이러한 속성에서 기인한지 모른다. 바로 그 동백이 지금 국토의 남단에서 붉은 빛으로 타오르고 있다.

 

꽃피는 3월, 특집으로 꾸미는 위크앤조이는 전남 강진의 '동백산' 만덕(411.6m)을 찾아 나섰다. 꽃은 선운사 동백처럼 대규모는 아니지만 산기슭에 자리 잡은 백련사 군락지로 아담하면서도 황홀한 꽃물결이 그런대로 아름답다. 아직은 시작에 불과하지만 봄빛이 질감을 더해갈 즈음 땅과 하늘이 '붉은 아우성'으로 장관을 이룰 것으로 보인다.

 

산은 단지 동백림만 감춰놓고 있지 않다. 조선 최고의 학자 정약용이 10여년을 기거한 다산초당도 품고 있다. 동백에 취해 다산의 체취를 느끼면서 다산이 걸었던 오솔길도 함께 걸을 수 있다면 더 큰 감동으로 다가오리라 감히 생각한다. 산행은 그래서 백련사와 다산초당을 아우르는 코스로 꾸몄다.

 

정상에 올라 봄빛으로 깨어나는 산하를 바라본 뒤 백련사로 내려와 바닥에 나뒹구는 동백꽃을 즈려밟아 본다. 그리고 돌아 나오는 길에 다산초당과 다산유물전시관도 함께 둘러본다.

 

구체적 경로는 도암면 석문리 용문사입구~용문사~286봉~293봉~236봉~280봉~바람재~만덕산 깃대봉~백련사~다산초당~다산유물전시관~귤동마을 입구주차장 순이다.

 

이 코스를 답사하는데 걷는 시간만 2시간50분쯤 잡아야 할 것이며 휴식과 관람시간까지 포함한다면 적어도 4시간30분이상은 염두에 둬야 할 것이다.

 

코스는 비단 테마여행에만 주안점을 두지 않았다. 산행 자체로도 내실이 있게끔 코스를 잡았다. 따라서 산은 그렇게 높지 않지만 경사도가 심한 곳이 몇 곳이 있다. 때론 제법 암팡지고 날카로운 날등도 만나게 된다. 하지만 그다지 큰 위험은 없는 편이다.

시간이 허락된다면 가족과 함께 나서도 별다른 어려움이 없을 듯하다.

 

막힘없는 조망은 이 코스의 또 다른 보너스다. 정상에 올라보면 북쪽으로 펼쳐지는 월출산이 그림 같다. 동북쪽의 제암산과 동쪽의 천관산도 한눈에 들어온다. 멀리 남동쪽으로는 해신 촬영장으로 또 다른 명성을 구가하는 완도 상황봉이 아련하다. 남쪽으로는 첩첩한 덕룡산과 두륜산의 산릉도 꿈결처럼 황홀하다.

 

코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등로가 단순한 것이 장점이다. 갈림길이 나오는 몇 몇 구간만 주의하면 별다른 어려움이 없다. 설령 길을 잃었다 해도 주능선으로 되돌아오면 쉽게 이어갈 수 있다. 군데군데 이정표도 나와 있어 참고하면 된다.

 

산행 들머리는 석문리 용문사다.

도암면 계라 삼거리에서 완도 방면으로 가다 만나는 첫번째 분기점에서 왼쪽으로 연결된다.

바로 석문리 삼거리로 계라삼거리에서 3분 거리에 있다. 여기서 좌회전하면 만덕광업이 10m쯤 전방에 보이고 그 옆으로 사찰로 올라가는 길이 있다. 입구에 용문사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용문사까지 5분 소요.

 

용문사에 닿으면 산길은 큰법당 왼쪽의 지능선으로 이어진다. 법당으로 올라가기 전 샘터가 있어 식수를 보충하면 된다. 능선으로 접어들면 이후부터는 외길 능선이다. 286봉까지 17분, 293봉까지 25분쯤 걸린다. 293봉을 지나면 독도 주의지점을 만난다. 길은 날등으로 오르지 않고 오른쪽 사면으로 비켜섰다가 다시 주능선으로 복귀한다. 293봉에서 7분 거리에 있다.

 

유독 바람이 세차게 불어 고개이름도 바람재인 만덕산 직전 안부는 독도유의 지점에서 45분쯤 걸려 닿는다. 등로는 여기서 급경사로 오른다. 제법 땀을 흘려야 하지만 뒤로 펼쳐지는 그림 같은 산릉들이 발걸음을 가볍게 해준다. 등로 주변에 군상처럼 솟은 기암괴석도 눈을 즐겁게 한다. 정상인 깃대봉까지 26분쯤 걸린다.

 

백련사로 내려가는 길은 정상에서 헬기장 방면 이정표를 따른다.

그 길을 따라 4분쯤 쏟아져 내려가면 이내 순탄한 능선길로 만난다. 그 길을 따라 다시 3분쯤 더 가면 오른쪽으로 사면길이 나온다. 백련사로 내려서는 길이다. 지나쳤다면 헬기장에서 되돌아오면 된다.

 

천년고찰 백련사는 천연기념물 151호인 동백림 한쪽에 자리하고 있다. 절 왼쪽이 동백림 탐승지다. 사찰 본당으로 들어가지 말고 왼쪽으로 나아가면 돌계단 아래 다산초당 가는 길의 이정표로 연결된다. 그 이정표를 따라 조그만 둔덕을 올라가면 아름드리 노거수들이 숲터널을 이룬 군락지로 만난다. 바로 왼쪽은 절에서 돌보고 있는 차밭이다.

 

다산초당 가는 길은 동백림과 차밭 사이 오솔길로 열린다.

이 오솔길이 그 유명한 다산의 사색코스다. 길 중간에 야생차나무도 이색 볼거리다.

 

다산초당을 둘러봤다면 다산유물전시관도 찾아볼 만하다.

전시관은 초당에서 내려와 만나는 아스팔트길 삼거리에서 오른쪽 언덕 너머로 이어진다.

 

다산의 위대한 업적이 세월을 뛰어넘어 민족의 자랑으로 남아 있는 곳이다.

시간이 된다면 찬찬히 둘러볼 만하다. 초당에서 전시관까지 10분 소요. 전시관에서 귤동마을 주차장까지 다시 10분 소요.[부산일보에서 발췌]

 

 

 55번 지방도 석문교 근처 모습

 

7.산행후기

1996년 1월 1일 조카하고 북한산 백운대를 시작으로 만 16년 3개월 만에 드디어 1,000회의 산행기록을 달성했다. 답사 산은 이번에 다녀온 석문산이 1088, 만덕산이 1089번째 답사 산봉우리이다.

 

이번에 새싹산악회 제817회 정기산행으로 주작~덕룡산 종주산행인데 글쓴이는 이미 다녀온 산이라 이번에도 가게 돼서 앞전에 갔던 코스의 역으로 계획을 잡았었다. 그런데 무박산행이고, 또한 웬만한 사람이면 한 번씩은 다 다녀온 산이라 호응도가 적어 참가회원의 수가 너무나 적었다. 그래서 솜사탕님과 하이디님(두 사람 모두 주작~덕룡산을 답사했음)을 섭외하는 과정에서 산행 하산지점인 소석문에서 산행을 시작하여 소석문~만덕산~옥룡사 코스를 제의했다. 두 분이 흔쾌히 받아드려 2명의 회원을 산악회 차원에서 확보하게 됐다. 글쓴이의 입장에서 보면 새로운 산을 답사하게 돼서 좋았다. 물론 산악회를 대표하는 입장에서 다른 산을 간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한 사람이라도 더 참석시켜 적자 폭을 줄이고자 하는 마음을 알게 된다면 회원님들이 이해해 주시리라 믿었다.

 

토요일 저녁 10시 10분경에 건대입구를 출발하여 천호동을 거쳐 상일동에서 마지막으로 명예회장님이 승차하고 산행들머리인 오소재로 향했다. 이번에도 산악회 전속기사인 임기사 대신 대리기사님이 오셨다. 전속기사가 아닌 대리기사가 오면 참석한 회원님의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것을 매번 감수했다. 5월부터는 꼭 본인이 참석하겠다는 이야기를 믿고 그런데 이번에는 그간의 크고 작은 불편을 넘어 상당히 불편했다. 물론 대신 참석한 기사님은 안전운전에 최선을 다했다. 그렇지만 본인 차량이 아닌 남의 차량으로 최선을 다한다는 것과 그간 익숙해 있던 회원님들이 새로운 기사님의 버스 작동 능력에 왜 불편을 겪어야 하는지…. 산행에 참석한 회원님들이 버스에 대해서 전혀 불편함이 없이 산에 다녀오면 좋겠지만 어쨌든 불편을 최소한도로 줄여 줘야하는 의무감이 있는 글쓴이로써는 실로 감내하기 힘들었다. 이번에도 회원님들에게 많은 불편을 줘서 죄송하다는 말씀을 이 자리를 빌어 사과드립니다.

 

일요일 새벽 4시 15분경에 산행들머리인 오소재에 도착하니 이미 여러 대의 버스가 도착해 있어 약수터가 있는 넓은 공터가 다소 복잡하다. 정신없이 잠에서 깨서 정신 차린 후에 버스에서 도시락을 먹고 주산~덕룡 산행팀(21명)은 출발하고 하산지점인 소석문으로 버스가 이동한다.

 

37분 걸려 산행 하산지점인 소석문에 도착했다. 그런데 약수터 쉼터에서 차량을 일부러 돌려(다른 기사들이 차량을 돌렸기 때문에 본인도 돌렸다고 함) 18번 국도로 해서 소석문에 도착을 해서 오소재약수터 쉼터에서 차량을 돌리지 말고 곧장 직진하여 55번도로를 탔으면 10분 정도 단축시킬 수 있었다.

 

소석문에 도착하니 예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이제 많은 사람들로 북적되는 산이 된 것이다. 그것도 지금이 일 년 중 가장 많은 사람이 찾을 때이다. 산악회 버스는 이곳 소석문 근처가 나중에 당일산행으로 오는 산악회가 많아서 무척 혼잡이 예상되므로 비교적 한산한 수양관광농원으로 이동을 했다.

 

화장실건물에서 볼일을 보고 2차로도로 건너편(화장실 건물 옆 아치형 다리를 건너면 덕룡산으로 갈 수 있다) 녹색의 이정표 푯말이 보이는 곳이 들머리다.

주변이 조금 환하지만 그래도 약간은 어두워서 랜턴을 켜고 올라간다. 곧바로 녹색의 이정표(석문공원:1.73km, 백련사: 7.74km, 옥련사:9.40km)를 지나고, 좌측으로 무덤1기를 지난다. 이제 경사가 서서히 높아간다. 등산로가 매우 뚜렷하지만 주변에 넝쿨가시들이 간혹 성가스럽게 한다.

 

조금 더 올라가니 이정표(합장암터 입구. ↑정상: 0.37km, →합장암터: 0.13km)가 나타난다. 우측이 합장암터 같은데 주변이 어두워서 합장암터 보는 것은 생략하고 올라간다. 이제는 몸이 더워져서 옷을 벗고 다시 올라간다. 잠시 뒤돌아보니 덕룡산 쪽으로 랜턴불빛이 끊기지 않고 이어지는 것을 보니 이쪽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올라가고 있었다. 우리 팀과 아마 중간에서 만날 것 같다.

 

덕룡산 쪽 암릉길이 너무나 환상적으로 보인다. 멋진 암릉에 몇 번이고 자꾸 뒤돌아본다. 고도가 계속 올라가면서 힘이 든다. 드디어 정상 직전의 전망대에 올라선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조망이 환상이다. 소석문의 협곡, 덕룡산~주작산~오소재~두륜산으로 이어지는 땅끝기맥 능선이 환상이다. 또한 넓은 석문저수지하며 산 아래 얕게 깔린 운무의 풍치가 글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멋지다.

카메라가 없어서 사진을 못 담은게 한스럽다(글쓴이는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촬영하는데 조금이라도 어두운 곳에서는 스마트폰 카메라가 잘 찍히지가 않는다. 스마트폰 카메라는 후레쉬기능이 없다)

 

멋진 조망에 잠시 넋을 놓고 구경하다가 이내 출발한다. 곧바로 공터인 정상에 도착한다. 석문산 정상에는 이정표(정상. -해발 272m-.→석문공원: 1.00km, ↓소석문: 0.60km)가 이곳이 정상임을 알려준다. 산행들머리인 소석문에서 약 20분 정도 걸린다.

 

정상에서 곧바로 용문사로 향한다. 석문공원 방향인 우측으로 진행을 한다. 능선은 잠시 평평하게 이어지다가 경사가 약한 내리막으로 이어지는데 정면으로 만덕산 쪽 능선이 너무 멋지게 보인다. 능선은 우측 방향으로 한동안 이어지면서 녹색의 이정표 푯말(↑○덕룡산동봉:4.26km ○주작산입구:9.13km ○소석문:1.73km ○덕룡산입구:1.83km ○정상:1.00km ○합장암터:1.50km)이 나타난다. 곧바로 55번 도로에 떨어진다. 들머리(소석문)에서 45분 걸린다. 이밖에 갈색의 도로표지판(정다산유적지 4km, 백련사 5km ←)과 청색의 표지판(다산 공직관 학습 및 체험장(다산수련원) 2.5km←)이 세워져 있다.

 

용문사로 이어지는 아치형 다리인 석문교의 모습

 

 용문사

 

너무나 아름다운 석문산 협곡의 모습

 

 삼거리 이정표

 

55번 도로(3차로)를 넘어간다. 길 가의 가로수인 벚나무들이 활짝 만개되어 환상이다. 멋진 벚꽃터널을 잠시 구경하고는 도로에서 직진하지 않고(도로를 계속 직진하면 석문공원이 나오는데 이곳에서 다리를 건너면 이정표(대석문등산로 ↑석문정:0.16km, 삼거리:0.58km, 용문사: 0.93km, 바람재:4.87km, 백련사:5.81km, 옥련사:7.47km)가 나타난다. 계속 진행하면 팔각정[석문정<石門亭>]이 나온다. 나중에 산행후기를 쓰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결론은 용문사를 구경하고 되짚어 나와 석문공원 쪽으로 이동하여 팔각정 능선으로 산행을 해야 좀 더 멋진 풍광을 볼 수가 있다.) 바로 아래에 있는 도로를 따라 조금 진행하니 아치형 다리가 나오는데 입구에 이정표(↱ 용문사 0.83km)가 반긴다.

 

아치형 다리(도암천)를 건너 용문사로 향하는데 이곳에는 동백나무가 가로수 역할을 하는데 동백이 생각보다 무척 작다. 이내 용문사가 나온다. 큰 절은 아닌 듯 일주문이 없다. 이곳 용문사는 한글로 「큰법당」이라고 쓴 대웅전 현판이 가장 눈길을 끈다. 용문사에서는 등산로를 찾기가 무척 수월했다. 이내 곧장 진행하니 녹색의 이정표(용문사. ↑석문공원:0.93km, 삼거리:0.35km)가 눈에 띈다. 이정표가 세워져 있는 곳에서 계단을 올라 능선에 붙는다.

 

약간 급경사 오름길을 오르다가 잠시 뒤돌아보니 석문산과 이쪽(만덕산 방향) 능선들이 서로 위용을 뽐내는 듯 멋진 양쪽의 암봉 사이로 55번 도로가 지나가고, 건너편 능선 쪽에 팔각정(석문정)이 바위 위에서 자태를 뽐낸다. 석문산 협곡의 너무 멋진 풍광에 잠시 넋을 놓고 바라보다 이내 출발한다.

 

조금 진행하니 좌측능선이 합류되는 삼거리가 나오는데 녹색의 이정표(삼거리. →백련사:5.23km, ←석문공원:0.58km, ↓용문사:0.35km)가 세워져 있다. 그러니까 석문공원에서 팔각정을 거쳐 올라오는 길과 석문교에서 용문사를 거쳐 올라오는 능선이 만나는 지점이다.

 

그렇게 좌측능선이 합류되는 삼거리에서 11분 진행하니 우측으로 만덕광업채광지로 갈 수 있는 삼거리에 이정표(↓용문사 0.48km, 만덕광업채광지→)가 세워져 있다. 계속 완만한 능선을 진행한다. 20분 진행하다가 잠시 휴식을 한다.

 

 시설물(안테나)이 설치되어 있는 280봉의 모습

 

 사거리안부인 바람재의 이정표

 

휴식을 마치고 계속 완만한 능선길을 따라 진행을 하는데 진달래가 지천으로 피어 있다. 산행들머리부터 진달래는 계속 줄지어 피어있다. 지금이 만개된 상태이다. 반대쪽 주작~덕룡 능선을 타고 있는 회원님들도 진달래의 멋진 모습을 보며 산행을 하고 있을 것 같다. 23분을 진행하니 넓은 평지의 안부가 나온다.

 

넓은 평지의 안부에서 14분 진행하니 능선 상에 이정표(←바람재 1.47km, 용문사 3.04km→)가 나타난다. 그리고는 11분 진행하니 삼거리 안부가 나오는데 이곳에도 이정표(용문사 3.67km→)가 세워져 있다. 이후 5분을 더 진행하니 280봉에 닿는다. 이곳에는 시설물(안테나, 벙커)이 세워져 있다.

 

8분 후 사거리를 지나, 3분을 더 내려가니 비로소 사거리안부인 바람재가 나타난다. 바람재에는 이정표(바람재(240m. ←임도 0.32km, 만덕산기도원 0.29km→, ↓용문사 4.51km, ↑옥련사 2.6km)가 세워져 있어 이곳이 바람재임을 알려준다. 이정표를 보니 산행 끝 지점인 옥룡사가 2.6km 남았다. 그런데 정작 가장 중요한 만덕산까지의 거리는 적혀 있지가 않다.

 

 멋진 암릉길

 

 마당봉(전망대)에서 바라본 덕룡~주작~두륜산으로 이어지는 힘찬 땅끝기맥의 산줄기가 잘 보인다.

 

멋진 바위

 

아무튼 바람재에서 정상을 향해 올라간다. 오늘 산행 중 가장 경사가 심한 곳이다. 다행히 거리가 짧다.

한동안 헉헉거리며 능선에 올라선다. 능선에 올라서니 여태껏 실망(석문산 주변과 용문사 주변 처음부분 만 암릉길이어서 조망이 멋지고 그 외 능선은 평범해서 실망했었다)했던 감정이 스르르 녹아버린다. 만덕산 주변 능선이 온통 멋진 암봉들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펼쳐질 멋진 조망에 자뭇 흥분된다.

 

잠시 눈앞에 펼쳐진 암봉들을 보다가 우측으로 들어선다. 조금 넓은 평평한 지대에 들어서는데 이곳에서의 조망은 가히 환상이다. 어떤 등산지도에는 이곳이 「마당봉」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곳이 마당같이 넓고 평평해서 그런 이름이 붙은 것 같다.

이곳에서의 조망은 가장 먼저 덕룡산~주작산~두륜산으로 이어지는 땅끝기맥의 능선이 너무나 잘 보인다. 완도의 상황봉도 잘 보인다. 북쪽으로 펼쳐지는 월출산이 그림같이 아름답다. 이곳에서 조망도 즐기며 잠시 휴식을 한다.

 

 만덕산 정상에서 바라본 마당봉(만덕산 전위봉. 전망대)의 모습. 그 뒤로 두륜산까지 쭈~욱 이어지는 땅끝기맥의 산줄기가 조망된다.

 

 만덕산 정상의 이정표

 

 만덕산 정상

 

 만덕산 정상에서의 조망

 

 만덕산 정상

 

14분 휴식을 마치고 다시 출발한다. 이곳에서 정상까지 별로 멀지 않아 보이는데 시간이 23분 걸린다.

전망대에서 9분 진행하니 다산초당 갈림길이 나온다. 이정표(←깃대봉 0.54km, 바람재 0.26km→, ↑다산초당 1.13km)가 세워져 있다. 이곳에서 다산초당 방향(우측)으로 한동안 내려가면 안부가 나오는데 이곳 안부에서 우측은 다산초당, 좌측은 백련사로 가는 길이다.

 

다산초당 갈림길에서 14분을 더 진행하니 비로소 오늘의 최고봉 만덕산 깃대봉에 닿는다.

만덕산 정상에는 이정표(깃대봉(408.6m) ←필봉 1.39km, 바람재 0.8km→)와 삼각점(해남 22. 1990 재설), 오석의 정상석(앞면: 萬德山 깃대峯 408.6m. 뒷면: 金陵山岳會 竪)이 세워져 있는데 일망무제의 조망을 자랑한다. 북쪽으로 뾰족뾰족한 월출산이 한층 가깝게 보인다. 강진만 건너 천관산도 한눈에 들어온다. 남쪽으로는 덕룡산~주작산~두륜산으로 이어지는 땅끝기맥의 능선이 잘 보인다. 만덕호와 강진만도 잘 보이고, 반대쪽으로 월출산으로 이어지는 이름 없는 무명봉들의 능선(땅끝기맥)이 잘 보인다.

 

 만덕산 정상에서 필봉(마지막 봉, 뾰족한 봉)으로 이어지는 능선과 임천저수지 건너로 월출산이 멋지다.

 

 월출산이 가깝게 보인다.

 

 계속되는 멋진 암릉구간

 

 진달래가 만개했다.

 

 밧줄구간

 

멋진 봉우리

 

잠시 백련사를 내려보다가(우측으로 내려가면 백련사로 갈 수 있다) 좌측으로 진행한다. 정면으로 아기자기한 암릉길이 이어진다.

「그래서 사람들이 옥룡사 방향으로 진행하는구나!」

옥룡사 방향으로 이어지는 아기자기한 암릉길이 환상이다. 물론 주작~덕룡 능선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곳은 이미 다녀온 곳이니 이곳도 좋다는 뜻이다.

아기자기한 암릉길을 얼마간 진행하다 직벽 암봉에서 좌측으로 우회하는 길에 로프가 걸려 있다. 크게 위험하지는 않지만 겨울철에는 주의가 요구되는 곳이다. 그렇게 한참을 내려선 후 다시 오름길이 이어진다.

 

그리곤 낑낑거리며 올라간 봉우리에서 잠시 휴식을 한다.

「혹시! 이곳이 필봉!」

 

휴식을 마치고 다시 내려가는 길에 앞을 바라보니 마지막 봉우리에 이정표가 보인다. 마지막봉이 필봉이었던 것이다.

 

 

 만개한 진달래

 

 임천저수지 뒤로 월출산이 멋지다.

 

 산행종점인 옥룡사 이정표

 

강진광업 갈림길(강진광업 0.5km→)을 지나 5분 더 진행하니 드디어 마지막 봉인 필봉에 도착한다. 필봉에는 이정표(필봉(190m) ←옥련사 0.41km, 깃대봉 1.39km→)가 세워져 있다.

 

필봉에서 5분 내려가니 다시 이정표(←옥련사 0.26km, 필봉 0.15km→)가 나온다. 이곳에서 오늘 산행하면서 처음으로 사람을 만났다. 선두로 4명, 그 뒤에 4명의 한 팀을 만났는데 조금만 서둘렀더라면 오늘 5시간 35분간 산행하면서 한 번도 사람을 만나지 않은 곳으로 기록될 뻔(?) 했다.

 

묘지가 있는 곳에 이정표(↓옥련사 0.15km, 옹달샘 0.11km→)가 세워져 있다. 곧바로 옹달샘이 나오는데 먹기에는 좀 그렇다.

 

이내 옥련사 경내로 떨어진다. 화려한 벚꽃에 살짝 가려진 이정표(등산로→)가 보인다.

잠시 옥룡사 경내로 들어간다. 옥룡사 구경을 마치고 주차장으로 내려가는데 도로변 양쪽으로 만개한 벚꽃이 눈부시다. 이곳에서 벚꽃 구경을 할 줄이야!

이로써 5시간 35분의 산행을 마쳤다.

 

 한참 절정인 벚나무의 모습

 

 옥룡사

 

 옥룡사

 

 옥룡사 진입로의 벚나무

 

 화려한 벚꽃

 

 옥룡사 진입로의 벚나무

 

이후 도암택시를 호출한 후 주차장 근처에서 벚꽃구경을 하고 있는데 이내 택시가 나타난다.

 

백련사로 이동하면서 기사님에게 맛있는 식당을 알려달라고 하니 다산명가식당을 알려준다. 그리고는 다산초당에 내려준다(택시비 12,000원. 미터기 요금이 아닌 구간요금).

 

다산초당 안내판

 

 다산초당 안내판

 

정약용(다산)선생과 김정희(완당)선생의 초상화

 

다산초당 옆에 있는 다산명가식당으로 들어가 산채비빕밥을 예약을 하고는 다산초당을 구경하러 이동한다. 그런데 좌측에 있는 유물전시관을 빠트릴 수 없어 다산초당에서 좌측에 있는 유물전시관 방향으로 이동한다.

 

유물전시관 가는 길이 호젓하고 멋지다. 중간에 살짝 솟은 고개를 넘어가는데 고개 양쪽으로 뿌리를 드러낸 채 나무들이 신음하고 있는 모습이 목격된다. 장마철 폭우가 내릴시 에는 아무래도 조금은 위험할 것 같다. 뿌리가 심하게 노출되어 있다. 곧이어 우측으로 다산수련원 건물이 보인다. 다산수련원 옆으로 유물전시관 가는 길이 잘 조성되어 있는데 좌측으로 두충(두충과 두충속. 낙엽활엽교목. 암수딴그루. 중국 원산으로 나무껍질을 한약재로 이용하기 때문에 밭에서 재배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이 빽빽이 식재되어 있다. 이내 다산유물전시관에 도착한다.

 

 

거중기(擧重器)

화성성역(華城城役)은 최초로 계획된 신도시였는데 새로운 재료와 구법(構法)을 사용하였다. 특히 무거운 돌을 들수 있도록 만든 거중기(擧重器)가 개발 사용되었는데 거중기는 횡량(橫樑), 4개의 편목(片木), 中, 下 유량(遊樑), 좌우 2개의 소차(繅車) 좌우 2개의 대골륜(大滑輪)로 구성되었고 크기는 4개의 다리길이 14尺(2.75m), 가로대 길이 7尺(1.37m)이다.

 

전시관 건물 앞에는 은목서, 금목서, 꽝꽝나무 등 남부지방 나무들이 멋지게 저마다의 자태를 뽐내고 있다. 전시관 건물 내부로 들어간다.

※유물전시관 거중기 앞에 설치된 푯말의 내용(거중기의 「기」자가 잘못 적혀 있다.

 

 

거중기 [擧重機]

[요약] 무거운 물건을 들어올리는 데 사용하던 재래식 기계로, 다산 정약용이 고안한 것이다.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하여 만들었으며, 수원성 공사에는 왕실에서 직접 제작된 거중기 1대가 사용되었다.

 

[본문] 정약용이 고안한 기계로 1792년 수원 화성을 쌓는데 이용되었다.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하여 작은 힘으로 무거운 물건을 들어 올리는 장치이다. 정약용은 정조가 중국에서 들여온 《기기도설(奇器圖說)》이란 책을 참고하여 거중기를 개발하였다.

 

위에 네 개 아래에 네 개의 도르래를 연결하고 아래 도르래 밑으로 물체를 달아매고, 뒤 도르래의 양쪽으로 잡아당길 수 있는 끈을 연결하여 이 끈을 물레에 감아 물레를 돌림에 따라 도르래에 연결된 끈을 통해 물체가 위로 들어 올려 지도록 했다.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에 완전히 조립된 모습의 전체 그림과 각 부분을 분해한 그림이 실려있다. 이 책에는 수원화성 공사를 위해 제작한 기구의 종류, 수량이 나와 있는데, 거중기는 1대가 사용되었으며 왕실에서 직접 제작하여 공사현장에 내려 보냈다고 한다. [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전시관 한복판에 축소된 거중기가 화성의 모형과 함께 전시되어 있고 그 앞에 거중기를 설명한 푯말이 걸려 있는데 거중기에서 「기」자의 한문이 잘못 적혀 있다. 전시관에서 나오려고 하는데 두 분의 초상화가 걸려 있는데 한 사람은 당연히 다산선생인 정약용 선생인데 우측의 또 한사람이 도저히 모르겠다. <「완당선생 초상」간송미술관 소장>이라고 초상화 아래에 적혀 있는데 「완당」이라는 사람을 알기 위해서 정약용 선생 족보를 확인하니 완당이라는 글자는 나오지가 않아서 궁금증만 품고 나왔다. 안내데스크에는 사람이 없었다. 이후 백련사 가는 길의 해월루에서 만난 사람들에게도 완당이 누구인지 알아보았으나 잘 모르겠다고 한다. 문화해설사까지 했다고 하는데….

집에 와서 후기를 쓰면서 알게 된 완당은 바로 추사 김정희 선생이다. 추사나 완당이나 모두 김정희 선생의 호이다.

 

김정희 [金正喜]

[인명] 조선 말기의 문신 ․ 서화가(1786~1856). 자는 원춘(元春), 호는 완당(阮堂), 추사(秋史), 시암(詩庵)이다. 북학파의 한 사람으로 실사구시를 주장하였고, 서예에 능하여 추사체를 완성하였다. 1816년에는 북한산 비봉에 있는 석비가 진흥왕 순수비임을 밝혀냈다. 작품에 <묵죽도(墨竹圖)>, <묵란도(墨蘭圖)>, <세한도(歲寒圖)> 등이 있으며, 저서에 《완당집》, 《금석과안록》 등이 있다.

 

이제 유물전시관에서 나와 다산초당으로 향한다. 역시 빽빽이 식재된 두충(나무)사이를 지나고 약간 둔덕의 고개를 넘어 다산초당 입구에 닿는다.

 

 

 거중기

 

다산초당 입구에는 「정다산 유적 (사적 제107호)」스텐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잠시 읽어보고는 다산초당으로 향한다.

 

조선 후기 대표적인 실학자인 다산(茶山) 정약용 선생을 기리는 축제는 매년 두 곳에서 열린다. 다산 선생이 태어나고 천수를 다한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유적지에서 열리는 「다산문화제(2011.09.30~10.02)」와 다산 선생의 유배지이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다산초당(茶山草堂) 등 다산의 유배지 흔적이 남아 있는 전남 강진 지역의 「다산제(2011.10.14~15)」이다.

 

강진은 다산 정약용 선생이 유배되어 18년간 머문 곳이다. 그 중 가장 오랜 기간(11년) 머물며 후진 양성과 실학을 집대성한 성지가 바로 다산초당이다. 그를 아끼던 정조가 세상을 떠난 후인 1801년(순조 원년) 신유박해에 뒤이은 황사영백서사건에 연루되어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다산초당

 

 다산초당 제1경인 정석

 

사의재, 고성사 보은산방 등을 거쳐 1808년에 외가(해남윤씨)에서 마련해준 이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유배가 풀리던 1818년까지 다산은 이 초당에 머물며 제자를 가르치고 책읽기와 집필에 몰두하여 「목민심서(牧民心書)」,「경세유표(經世遺表)」,「흠흠신서(欽欽新書)」 등 600여권의 저서를 남겼다.

 

초당에 오르면 다산초당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보물인 다산4경이 있다. 고적한 유배생활의 정취가 서려 있는 정석, 약천, 다조, 연지석가산은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다산 실학이 구상되던 도량(道場)이요 산실이다. 초당에 이른는 길은 수백 년 된 소나무 뿌리들이 서로 뒤엉켜 세월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는데, 시인 정호승은 이 길을 「뿌리의 길」이라 노래하였다.

 

초당은 다산이 제자들을 가르치고 책을 썼던 곳이다. 원래 윤단(尹慱)의 산정(山亭)이었으나 서로 교분을 나누면서 그에게 거처로 제공되었다. 다산이 거주할 당시에는 초막이었으나 복원 당시엔 정씨 문중에서 선조의 집에 기와를 얹어야 가문의 위상이 높아진다고 해서 1957년 다산유적보전회가 허물어진 초가를 치우고 다시 세우면서 초당(草堂)이 아닌 실제론 와당(瓦當)이 되었다. 조만간 짚을 덮은 본래의 초당(草堂)으로 복원될 예정이다. 현판은 추사(일명 완당) 김정희 선생의 친필을 집자해서 모각한 것이다.

 

다산초당 옆 서암(西庵)은 윤종기 등 18인의 제자가 기거하던 곳이다. 차와 벗하며 밤늦도록 학문을 탐구한다는 뜻으로 「다성각(茶星閣)」이라고도 하며, 1808년에 지어져 잡초 속에 흔적만 남아 있던 것을 1975년 강진군에서 다시 세웠다. 강진군 도암면 귤동마을 끝단에서 다산초당 표지판이 있는 숲길을 따라 오르다보면 돌계단이 나온다. 돌계단 언덕 위에 다산초당이 있고 그 왼편으로 서 있는 건물이 서암이다.

 

유배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기 직전 다산이 직접 새겼다고 전해지는 정석은 다산초당의 제1경이다. 아무런 수식도 없이 자신의 성인 정(丁)자만 따서 새겨 넣은 것으로, 다산의 군더더기 없는 성품을 그대로 보여준다.

 

 

 

 

다산초당 뒤편엔 작은 샘이 하나 있다. 약천이다. 이 약천은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샘이라고 한다. 처음에는 물이 촉촉이 젖어 있던 곳이었는데 다산이 직접 이곳을 파니 돌 틈에서 맑은 물이 솟아나왔다고 한다. 다산은 약천의 물을 마시면 「담을 삭이고 묵은 병을 낫게 한다」고 기록하였다. 지금도 맑은 물이 조금씩 흘러내린다.

 

약천이 바로 보이는 다산초당 앞마당엔 큼지막한 넓적바위가 앉아 있다. 이곳은 「다조」로 쓰이던 돌이다. 다산이 이곳에 오기 전부터 있던 이 돌은 차를 달이는 부뚜막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다산은 이곳에서 약천의 물을 떠다가 주변에서 모은 솔방울로 숯불을 피워 찻물을 만들었다고 한다. 평생 차를 좋아했던 다산 선생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특별한 장소이다. 다산초당의 제3경이다.

 

다산초당

 

 다산초당

 

 연지석가산

 

다산초당과 동암 사이에 있는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은 연못 가운데 돌을 쌓아 만든 돌탑이다. 다산은 원래 이곳에 있던 연못을 크게 넓히고 강진만 바닷가 돌을 주워와 조그마한 봉을 쌓아 석가산(石假山)이라 하였다. 이 연못에선 잉어도 키웠는데 유배생활에서 풀려난 후 제자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이 연못에서 기르던 잉어의 안부를 물을 만큼 귀히 여겼다고 한다. 또 다산은 연못 속 잉어의 상태를 보며 그날그날 날씨 상태를 알아내었다고 하니 그 관찰력과 지혜가 대단하기만 하다.

 

 다산초당

 

 송풍루

 

 다산동암

 

송풍루(松風樓)라고도 불리는 동암(東庵)은 다산이 저술에 필요한 2천여 권의 책을 갖추고 기거하며 손님을 맞았던 곳이다. 다산은 초당에 있는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이곳에 머물며 집필에 몰두하였다. 목민관이 지녀야 할 정신과 실천방법을 적은 「목민심서」도 이곳에서 완성했다. 1976년 서암과 함께 다시 세웠는데 현판 중 보정산방(寶丁山房)은 추사의 친필을 모각한 것이고, 다산동암(茶山東庵)은 다산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다.

 

 

 삼남길 푯말

 

동암에서 오른쪽으로 난 오름길을 잠시 오르면 작은 정자가 하나 나온다. 천일각(天一閣)이다. 이 천일각은 다산 선생이 동쪽 산마루에 올라가 바람을 쐬거나 흑산도로 귀양을 간 둘째 형 정약전을 그리워했다는 곳에 세워진 정자이다. 다산 선생이 있던 당시엔 없었던 건물이다. 이곳에선 강진만 풍경이 잘 보인다.

 

다산초당은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귤동마을 뒤 만덕산 기슭에 있다. 정약용 선생의 호인 다산(茶山)은 원래 차나무가 많았던 이곳 만덕산의 별명이었다고 한다.

 

다산초당을 다 구경하고는 이제 백련사로 향한다. 중간 중간 대장님과 통화를 하니 시간이 조금 지체되는 것 같다.

 

 

안내판

 

 안부에 설치된 이정표

 

 해월루

 

 해월루에서 바라 본 조망(강진만 건너로 장흥의 명산 천관산이 잘 보인다.

 

다산초당에서 백련사 가는 길은 정호승 시인의 말대로 뿌리의 길이다. 길가에 뿌리가 많이 드러나 있다. 대나무 뿌리도 한몫 거든다.

능선의 고개 오름길이 조금은 힘이 든다. 고개에 올라서자 정면으로 백련사가 내려다보인다. 직진하여 내려가려고 하니 하이디님이 해월루 구경 안 하냐는 소리에 얼른 되짚어 올라와 해월루 방향으로 진행한다. 안부에서 80m 거리이라 이내 해월루(2층)에 도착한다. 해월루에서 바라보는 조망은 만덕산 능선에서 바라보는 조망하고 별반 차이가 없다. 정면으로 강진만 건너 장흥의 천관산이 우람하게 잘 보인다.

 

 

수형이 아름다운 배롱나무

 

해월루에서 구경을 마치고 되짚어 안부에 도착한 후 백련사로 내려간다. 약간 경사가 급하다. 백련사 가는 길에 우측으로는 동백나무, 좌측으로는 차밭이 줄지어 나온다.

이내 백련사에 도착한다. 좌측으로 동백나무 군락지가 대단하다. 일반 백련사 경내를 보고 나중에 동백나무 군락지를 보기로 하고 백련사 경내로 들어간다.

 

대웅보전

 

 

백련사 [白蓮寺]

 

[요약] 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道岩面) 만덕리(萬德里) 만덕산에 있는 절.

 

종파 : 대한불교 조계종

창건시기 : 839년(문성왕 1)

창건자 : 무염

소재지 : 전남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본문]

만덕산(408m)에 있으므로 만덕사(萬德寺)라고도 한다. 사찰의 창건은 통일신라시대 말기인 839년(문성왕 1) 무염(無染) 스님이 창건하였다. 사찰의 이름은 만덕산 백련사라고 불렀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만덕사로 불렀다. 하지만 근래에 다시 이름을 고쳐 백련사라고 부르게 되었다. 고려시대에 들어 불교를 숭상하였기에 원묘국사 요세(了世) 스님에 의해 사찰의 교세는 확장되었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들어 억불정책으로 승려들은 천시되었고 백련사는 퇴보하기 시작했다. 거기다 남해안 일대는 고려청자와 곡창지대로 약탈을 목적으로 자주 출몰하는 왜구들에 의해 점점 폐사될 지경으로 내몰렸고 사찰은 명맥만 겨우 유지하게 되었다. 1170년경 주지 원묘(圓妙)에 의해 중수되기도 했지만, 본격적인 중수는 조선 세종 때인 1426년 주지 행호(行乎) 스님이 2차 중수를 하면서 백련사는 예전의 모습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1430년부터 대대적인 불사작업이 시작되었고 효령대군의 도움이 컷다. 효령대군은 왕위를 동생(세종)에게 양보하고 전국을 유람하면서 강진땅 백련사에 들어 8년 동안 기거하였다. 효종 때 3차 중수를 하면서 탑과 사적비(事蹟碑)를 세웠다.

 

대웅전(大雄殿)은 정면 3칸, 측면 3칸에 팔작지붕의 건물로, 각 추녀마다에 4개의 활주(活柱)를 세워 건물을 받치고 있으며, 전면 2개의 주두(柱頭)에는 용두(龍頭)로 장식되어 있는데, 단청(丹靑)이 잘되어 있는 다포(多包)집 건물이다.

 

이 밖에 시왕전(十王殿)· 나한전(羅漢殿)· 만경루(萬景樓)· 칠성각(七星閣) 등의 건물이 있다. 절 앞에는 비자나무와 후박나무, 그리고 푸조나무와 함께 동백나무숲(천연기념물 151) 등이 있어 장관을 이루고 있다. [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백련사 사적비

 

백련사 사적비

종목 : 보물 제1396호

명칭 : 강진 백련사 사적비 (康津 白蓮寺 事蹟碑)

분류 : 기록유산 / 서각류/ 금석각류/ 비

수량/면적 : 1기

지정(등록)일 : 2004.01.26

소재지 : 전남 강진군 도암면 백련사길 145, 백련사 (만덕리)

시대 : 고려시대

소유자(소유단체) : 백련사

관리자(관리단체) : 백련사

 

백련사 사적비는 백련사 대웅전에서 오른쪽으로 약 50여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높이 447㎝ 규모의 전형적인 석비(石碑)이다. 귀부(龜趺), 비수(碑身), 이수(이首)로 구성되어 있는데, 귀부는 고려시대의 조성으로, 비신과 이수는 1681년(조선 숙종 7)에 조성되어 각기 서로 다른 건립연대를 보이고 있다.

 

귀부는 지대석(地臺石)과 더불어 화강암 일석(一石)으로 조성되었다. 용두(龍頭)는 목을 움츠리고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데, 입은 상· 하 7개의 가지런한 이빨로 꽉 다문 모습이며, 하단에는 길게 수염이 흘러 목주름까지 늘어져 있다. 위 입술은 약간 들려 눈은 삼각형의 구도 안에 동그란 눈동자가 볼륨있게 표현되었다. 용두의 뿔은 목 뒤로 흐르며 2조로 갈라지며 비좌(碑座)에 연결되어 있다. 귀부의 등면은 너비 30㎝의 음각선으로 곽을 조성한 후 내부에 당초문(唐草紋)을 양각했다. 귀갑문(龜甲紋)은 6각형으로 내부에는 연화문을 새겼다. 네 발은 모두 5개의 발가락을 지녔으며, 꼬리는 왼쪽으로 틀어 올렸다. 귀부의 중앙 상면에는 비좌가 조성되었는데, 측면에는 초화문(草花紋)이 양각되었고, 상면에는 118㎝×15㎝ 규모의 비신공(碑身孔)이 마련되었다. 전체적인 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 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귀부의 크기는 227㎝× 190㎝× 110㎝이다.

 

비신은 2면비로 전· 후면에는 비문이, 양 측면에는 초화문을 양각했다. 비신 전면의 상단에는 자경 15㎝ 크기의 전서체로 「만덕산백련사비」라 새겼고, 횡서로 「전라도강진만덕산백련사사적비」라 기록하고 있다. 뒷면에는 당시 불사(佛事)에 참여한 사람의 인명이 기록되어 있다. 비문은 조정저(1631∼1690)가 지었고, 현록대부랑선군 이우(1639∼1693)가 썼는데, 상단의 전서만은 가덕대부랑원군 이간(?∼1699)이 썼다. 말미의 명문으로 보아 1681년(조선 숙종 7)에 조성했음을 알 수 있다. 이수에는 우진각지붕의 형태로 하단에는 목조 건축의 겹처마를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정상에는 2마리의 용이 등을 맞대고 서로 반대 방향을 보고 있는 형상인 바, 매우 사실적인 조각수법을 보이고 있다. 비신의 크기는 234㎝× 118㎝× 29㎝이며, 이수는 170㎝× 75㎝이다.

 

백련사 사적비는 귀부와 비신의 건립연대가 서로 다른 상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보아 귀부는 보존상태가 매우 양호하고, 조각수법도 뛰어나 고려시대 전기의 작풍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다. 사적비 역시 전형적인 조선시대 석비의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는데, 특히 양 측면에 양각된 초화문은 이 시대의 석비로서는 특이한 예라 하겠다. 따라서 백련사 사적비는 귀부와 석비가 비록 시대를 달리하고 있지만, 각 부재가 지닌 양식상의 특성으로 보아 가치가 있다.

 

 백련사 동백나무 군락지

 

 동백나무 군락지

 

종목 : 천연기념물 151호

명칭 : 백련사의 동백림 (白蓮寺의 冬栢林)

분류 : 학술림

수량 : 12,893㎡

지정일 : 1962.12.03

소재지 : 전남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산55

소유자 : 백련사

관리자 : 강진군

 

동백나무는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일본, 중국 등의 따뜻한 지방에 분포하며, 우리나라에서는 남쪽 해안이나 섬에서 자란다. 꽃은 이른 봄에 피는데, 매우 아름다우며 꽃이 피는 시기에 따라 춘백(春栢), 추백(秋栢), 동백(冬栢)으로 부른다.

 

백련사의 동백림은 강진에 있는 백련사 부근에 있는데 동백나무 1,500여 그루가 숲을 이루고 있으며, 이밖에 굴참나무, 비자나무, 후박나무, 푸조나무 등도 군데군데 자라고 있다. 동백나무의 높이는 평균 7m쯤 되고, 동백꽃이 필 무렵이면 매우 아름다워 이 지역의 명소로 알려져 있다.

 

동백림의 유래에 관하여 정확히 알려진 것은 없으나, 정약용 선생의 유배지인 다산 초당이 가까이 있고, 이곳에서 다도(茶道)연구를 했던 것으로 미루어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백련사의 동백림은 우리나라의 난온대지방을 대표하는 나무인 동백나무가 집단적으로 자라고 있는 지역일 뿐만 아니라, 정약용 선생과 관련된 문화적 장소로서의 가치도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낙화된 동백꽃

 

 만덕산 백련사

 

가장 먼저 거목의 푸조나무가 반긴다. 그리고는 위로 올라가니 역시 제법 큰 배롱나무가 반기는데 수형이 너무나 아름답다. 여름철 배롱나무가 필 때 구경하면 장관일 것 같다. 배롱나무 밑에는 백련사 지킴이 정진이(풍산개. 암컷)이 팔자 좋게 자리 잡고 있다. 움직일 생각을 안한다. 그래서 액스트라로 집어 놓고 사진 몇 장을 찍는다. 대웅보전으로 향한다. 대웅보전 내부에는 「萬德山 白蓮社(만덕산 백련사)」라고 현판이 걸려 있어 고개를 갸우뚱 거려본다. 절사자가 아닌 모일사자를 쓰는 이유가 분명이 있을 터 집에 도착하여 후기 쓰면서 백련사 홈피에 들어가보니 자세하게 적혀 있어서 그제야 이해가 갔다.

 

백련사 홈피(http://www.baekryunsa.org/)의 메인 화면에 「萬德山 白蓮社(만덕산 백련사)」라고 제목이 써져 있다.

 

홈피에서 발췌한 백련사의 역사를 살펴보면

백련사의 원래 이름은 만덕사로 신라 문성왕 때 무염국사(801~888)가 창건했다고 전해온다. 1211년(고려 회종7년)에 원묘국사 요세(1163~1245)스님이 옛터에 중창하고 백련결사로 크게 이름을 날려 백련사(白蓮社)로 불리우게 되었다. 고려 후기 정치와 종교가 제 기능을 상실한 채 몽고와 왜군의 침략으로 살육과 눈물로 점철된 고난의 시대에 요세 스님은 어둠의 한 가운데서 온 몸으로 희망을 말하고 인간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보여주는 결사운동을 벌인다. 이렇게 태동된 백련결사는 삶속에서 민중들과 함께 참회와 염불 수행을 통해 현세를 정토로 만들자는 최초의 민간 결사 운동이었다.

원묘국사의 백련결사는 120년간 고려 8분의 국사(원묘국사, 정명국사, 원환국사, 진정국사, 원조국사, 원혜국사, 진감국사, 목암국사)를 배출하고 번창하였다.

고려사기를 보면 공민왕자가 1351년(충정3년)에 백련사에서 살았다는 기록이 있으나 사찰은 고려말 왜구가 세 차례나 침입하여 노략질을 일삼았을때 폐허지경에 이르렀다. 이후 1430년(세종12년)에 행호대사가 효령대군의 후원으로 동원 20동과 서원 4동을 건립하고 왜구의 침입에 맞서 행호토성를 쌓는다. 세종의 둘째형인 효령대군은 백련사에서 입산하여 8년간 큰 법화를 열고 불, 법, 승(佛, 法, 僧) 삼보에 기원하는 수륙재를 지내며 수행을 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도 백련사는 청허 휴정선사의 의발을 전수받은 8명의 종사(소요대사, 해운대사, 취여대사, 화악대사, 설봉대사, 송파대사, 정암대사, 연파대사)를 배출하며 이어져 내려왔다. 백련사에 8국사와 12종사(宗師)가 나온다고 하였는데 8국사는 고려때 나왔으며 8종사는 조선시대 배출되었으니 앞으로도 4종사가 나올 것이라는 예언이 있다.

그 가운데 여덟 번째가 다산 정약용(1762~1836)과 교류하던 아암 혜장선사(1772~1811)로 두륜산 대흥사에서는 12대 강사로 꼽힌다.

백련사 옆 다산초당에 적거했던 다산 정약용은 백련사에 자주 들러 차를 마시며 마음의 평안을 얻었다고 한다.

 

 대웅보전

 

대웅보전 들어가는 길에 바라본 배롱나무

 

 푸조나무

 

 아름다운 숲 푯말

 

 아름다운 숲 푯말

 

강진 백련사 동백나무 숲 안내판

 

백련사 경내를 다 구경하고 좌측의 동백나무 군락지로 향한다. 아름드리 동백나무에서 떨어진 동백이 바닥에 지천으로 깔려있다. 나무에는 아직도 동백꽃이 많이 걸려 있다. 잠시 동백나무에서 휴식을 하다가 주차장으로 향한다.

 

사천왕문(아직 내부시설물을 설치하지 않고 외, 내부 만 설치된 상태라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건물 구조가 사천왕문 같다)이 한창 공사중이다. 사천왕문을 빠져나오니 이내 넓은 주차장이다. 일주문이 없다는 것이 조금은 아쉬웠다. 주차장에서 백련사 경내까지는 비교적 짧은 거리이다. 입구에 「이곳 강진군 다산초당~백련사 간 숲길은 2009년 「제10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 [숲길] 부문에서 아름다운 어울림상(장려상)을 수상한 곳입니다 」라고 써진 세로형 푯말이 서 있다. 「강진 백련사의 동백나무숲 (白蓮寺의 冬栢林) 천연기념물 제151호. 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산55-1」이라고 스텐에 써진 안내판도 세워져 있다.

 

백련사 입구

 

이로써 오늘의 일정은 모두 마쳤다. 이곳 백련사에서 버스가 오기를 기다린다. 한참을 기다리니 버스가 온다. 버스를 타고 식당이 있는 다산초당으로 향한다. 그런데 다산초당 입구의 공터에 세워야 식당이 조금 가까운데 다산유물전시관 주차장으로 가서 조금은 길게 식당까지 걸어가야 했다.

늦은 점심을 먹고 귀경길이 시작됐는데 귀경 정체가 조금 심해서 건대입구역에 11시에 도착했다.

좌우지간 새로운 산 석문산. 만덕산 때문에 오늘도 해피데이!

 

8.특기사항

①1/25,000 지형도: 영춘(永春)

 

②답사 산 목록

No.1088 석문산(石門山 283m)

-전남 강진군 도암면 소재

-정상: 공터, 이정표, 바위산, 주변 경관 멋짐.

-특기: 첫 답사.

 

No.1089 만덕산(萬德山 411.6m)

-전남 강진군 강진읍, 도암면 소재

-정상: 삼각점, 정상석, 이정표, 조망 좋음.

-특기: 첫 답사.

③만덕산 정상석 뒤쪽 한문: 竪(세울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