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줄기(기타·섬)/기타 산줄기

미완의 천성장마 이야기(삼양사거리에서 장령산 너머 금산고개까지)

약초2 2012. 2. 15. 14:10

992번째 산행이야기

미완의 천성장마 이야기

삼양사거리에서 시작해서 6개 산 찍고 금산고개에서 하산

 

1.산행날짜: 2012년 2월 11일(토)~12(일):무박산행

2.산행날씨: 맑음

3.산행코스: 삼양사거리→삼성산→용봉→마성산→장령산→금산고개→장찬저수지

 

4.참석인원: 새싹산악회 번개산행 7명

전순기, 박병남, 조인기, 강진희, 이정임, 김양수, 채재희.

 

5.산행시간

-06:08 삼양사거리 발(산행시작)

-06:51 팔각정

-07:00 삼성산

-07:42 용봉

-08:11 동평산성

-08:16 이정표와 지도 있는 곳

-08:26 헬기장

-08:30 삼거리안부(망지미마을 갈림길)

-09:07 마성산분기점

-09:10 마성산 정상 착 / -09:48 발

-10:20 사목재(사거리안부. 비포장도로)

-10:38 474.6m봉(삼각점, 무인감시카메라)

-10:42 용암사 갈림길

-10:55 거북바위 착 / -11:00 발

-11:17 삼거리(제3지점)

-11:24 팔각정 착(점심식사) / -12:40 발

-12:45 장령지맥 분기봉

-12:53 삼거리(제5지점)

-12:57 장령산 착 / -13:05 발

-13:12 헬기장

-13:26 돌메기산 착 / 과외 받고 13:38 재출발

-13:39 무봉산

-14:00 전망대 착 / -14:47 발

-15:05 금산고개

-15:42 장찬저수지 착(산행종료: 9시간 34분 산행함)

-이후 택시 호출하여 옥천역으로 이동하여

-옥천에서 무궁화호 열차 이용하여 서울역 도착하여

-저녁 먹고 귀가.

 

◈삼양사거리-(0:43)-팔각정-(0:09)-삼성산-(0:42)-용봉-(0:29)-동평산성-(0:59)-마성산-(0:32)-사목재-(0:18)-474.6m봉-(0:41)-팔각정-(0:17)-장령산-(0:21)-돌메기산-(0:01)-무봉산-(0:21)-바위전망대-(0:18)-금산고개-(0:47)-장찬저수지

 

※휴식없이 6시간 38분, 실제 9시간 34분 산행함

 

 미완의 천성장마 전체 지형도(1/25,000 지형도)

삼양사거리에서 시작해서 금산고개로 해서 장찬저수지로 하산했다.

 

 확대 지형도 1-3

 

 확대 지형도 2-3

 

확대 지형도 3-3

 

6.산행후기

미완의 천성장마

월간 「」 잡지의 「도시 근교 명산종주 - 충북 천성장마 르포」에 천성장마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백두대간과 정맥 종주에 이어 도시 주변 산의 장거리 종주산행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등산 마니아 사이에서 불고 있는 이러한 바람은 하나의 유행으로 번질 조짐이 보인다. 백두대간 종주를 위해 먼 거리를 이동하는 부담이 적고, 거주지에서 멀지 않아 시간을 내기도 좋기 때문이다. 하지만 산행 강도는 백두대간 종주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바쁘고 성질 급한 현대인에게 안성맞춤인 산행 패턴이라 하겠다.

 

특히 대도시 주변에 장거리 종주 산행 코스가 잘 발달되어 있는데, 이는 그만큼 산행을 즐기는 인구가 많기 때문이다. 서울의 외곽을 연결한 ‘불수도북’과 대구의 ‘가팔환초’, 대전의 ‘보만식계’는 이미 널리 알려진 곳이다. 하지만 이런 유명한 곳 외에도 숨어 있는 만만치 않은 종주 코스들이 있다. 이번에 소개하는 충복 옥천과 영동의 천성장마(天聖長馬) 역시 비교적 덜 알려진 능선종주 산길이다.

 

‘천성장마’라는 명칭은 영동군 양산면 천태산에서 시작해 옥천군 옥천읍 마성산까지 이어진 능선 상 주요 4개 산의 이름을 조합해 만든 것이다. 충남 금산군 제원면과 충북 영동군 양산면 경계를 이루는 태산(天台山· 714.7m)에서 시작한 이 산길은 북쪽의 대산(大聖山· 704.8m)과 령산(長靈山· 654.5m)을 거쳐 옥천읍의 성산(馬城山· 497m)까지 연결된다. 천성장마 능선은 도상거리 26km가량으로 순수 산행에만 13~15시간이 소요된다.

 

천성장마 산행은 백두대간의 깊은 산 속을 걷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대도시에서 어느 정도 떨어져 있고 능선을 지나는 임도가 한 곳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천태산을 제외하면 사람들이 몰리는 곳도 거의 없어 분위기가 호젓하다.(이하 생략)』

 

그래서 천성장마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고 곧바로 종주에 들어가려다 글쓴이가 소속된 산악회 번개산행으로 올려서 함께 산행하면 좋겠다고 생각을 해서(비교적 짧은 중거리 산행이라는 단어에 새싹산악회 사람들도 할 수 있겠다 싶었다) 번개산행 공지를 하여 산악회 회원들과 산행에 나섰다.

 

인터넷을 뒤져 천성장마 후기 올라온 몇 사람 것을 정리해 보니 실거리가 33km인데 산행시간은 10시간 30분 정도 걸렸다고 적혀 있어서 늦어도 12시간이면 종주하겠지 하는 단순한 생각으로 산행에 들어갔다.

 

토요일 저녁 서울역에서 경부선 무궁화호 열차를 이용하여 옥천역에 새벽 1시에 도착하여 곧바로 역 앞에 있는 여관에 들어가 3시간 동안 이나마 눈을 붙이려 해도 잠이 오질 않는다. 하여 눈 만 감은 채 누워 있는데 새벽 2시, 4시, 다시 10분 후…. 차례로 들려오는 휴대폰 알람소리에 그나마 오려던 잠까지 사라졌다.

 

결국 4시 20분 경에 일어나서 아침식사 할 곳을 수배하러 나갔다.

바로 옆 24시간 편의점에서 알려준 식당에 갔더니 영업 막 끝났다고 하면서 약간 신경질 적으로 예기를 한다. 그러면 다른 곳 좀 소개 시켜 달라고 했더니 금방 어디서 나타났는지 남편같이 생긴 분이 손가락 짓을 하면서 어서 나가라고 한다. 참으로 불쾌했다.

그래서 식당 앞에 주차되어 있던 택시기사님에게 식당을 알려달라고 하니 「이가네」 식당은 24시간 영업을 하는데 택시를 이용하라고 한다. 걸어가면 얼마나 걸리냐고 되 물어보니 10분 정도 걸린다고 해서 그럼 걸어간다고 하며 직진하여 걸어가니 다시 식당이 눈에 띈다.

식당에 들어가니 이 집 역시 막 영업이 끝났다고 한다. 다시 이 집에서도 문 열린 식당을 물어보니 김밥천국집을 알려준다.

그래서 김밥천국집을 향해 걸어가는데 도중에 식당 한 곳이 더 나타나 들어가 보니 역시 영업 끝났다고 한다. 결국 김밥천국집에서 아침식사를 해결했다.

 

 2012년 2월 12일 옥천 용봉 능선에서 일출 봄

 

어렵게 아침식사를 마치고 산행들머리로 이동을 한다.

인터넷에 나와 있는 들머리는 가화현대아파트 옆 2차로 도로 우측 계단을 올라가게 되어 있다. 그러면 완벽한 산줄기 끝까지 타는 것이 아니라서 글쓴이는 완벽하게 처음부터 시작하고 싶어 삼양사거리에서 산행을 시작하려고 했다. 그런데 삼양사거리에 다가갈수록 첫 봉우리의 경사가 제법 가파르게 보인다. 그래서 첫 봉우리는 생략하고 둘째 봉부터 시작할까 싶어 대장님에게 넌지시 예기하니 이왕이면 처음부터 하자는 예기에 다시 수정하여 처음부터 올라가는 것으로 결정하고 삼양사거리에서 산행을 시작했다.

 

삼양사거리에 도착하여 들머리를 찾으니 들머리가 보이지가 않는다. 좌측에 조금 넓은 공터가 보이는데 무덤가이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곳이 옥천척화비가 있는 곳이었다. 사실 어두워서 그곳이 척화비가 있다는 것을 알았어도 자세히 볼 수는 없었다.

 

 

옥천 척화비

옥천 척화비는 1866년 고종 3년의 병인양요와 1871년 고종 8년의 신미양요를 치른 뒤 흥선대원군이 국민들에게 양인을 배척하고 경고하기 위하여 1871년 4월에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요충지에 세운 많은 척화비 중의 하나이다.

 

높이 135cm, 폭 45cm, 두께 26cm 되는 화강암에다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즉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해할 수 밖에 없고 화해를 주장하면 나라를 파는 것이 된다." 라고 큰 글자로 음각하였고 바로 옆에다 「戒我萬年 子孫 丙寅作辛末立」 즉 "우리들의 만대 자손에게 경고하노라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우다."라고 작은 글자로 새겨져 있다.

 

이 척화비는 1882년에 고종 19년에 대원군이 청나라에 납치되고 우리나라가 서양의 각 나라와 교역이 되면서 모두 철거되었는데 이 척화비는 산기슭에 있기 때문에 철거당하지 않고 그대로 6·25 참변 때 사람으로 오인 받아, 항공기의 기관총사격을 받아서 그때의 탄흔이 몇 군데 남아 있어 파란 많은 한국의 역사를 대변해 주고 있다. 그 후 1976년 주변을 정화하고 진입로 계단, 철책 등을 보수하여 면모가 일신 되었다.

 

 

옥천척화비 옆으로는 담장이 쳐져 있어 조금 더 내려와 올라간다. 이곳은 나무를 식재해 놓은 곳이다. 다행히 전혀 없을 줄 알았던 등산로가 그래도 제법 뚜렷하게 나 있다. 등산로에 눈이 쌓여 있어서 어두워도 쉽게 찾아 올라갈 수가 있었다. 앞 서 가는 사람들은 제법 빠른 속도로 올라가는데 빛깔님은 나중에 힘을 내는 스타일이라 초반 급경사 오름길을 무척 힘들어 한다. 글쓴이가 뒤에 붙어서 올라가니 신경 쓰인다면서 먼저 올라가라고 하는데 컴컴한 밤에 혼자 나두고 나 몰라라 올라갈 수는 없는 일이라 그냥 무시하고 간격을 두면서 올라간다.

 

첫 봉우리 지하로는 경부선 철로(터널)가 지나가는데 벌써 두 번씩이나 기차가 지나갔다. 꽤 많은 통행량이다.

결국 힘들게 힘들게 첫 봉우리에 올라서니 앞 서 가던 전고문님이 기다리고 계신다.

 

이제 전고문님이 앞에 서서 길을 인도한다. 잠시 완만하게 내려가니 안부에 닿고 다시 오름길이 시작된다. 그렇게 한동안 오름길을 극복하니 팔각정이 나온다. 이곳에서 앞 서 간 회원님들과 조우한다.

 

좌측 동쪽으로 해가 나오려고 뻘겋게 달아오르고 있다. 구름이 끼어 있어 일출을 볼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옥천시가지가 제법 넓게 퍼져 있어 옥천읍도 작은 읍이 아님을 확인할 수가 있다. 그 뒤로 길게 장령지맥의 산줄기와 겹겹이 쌓이는 산줄기들이 잘 보이는데 아직 미답지 산들이어서 아는 산이 하나도 없다.

 

조망이 좋은 팔각정에서 조망을 마치니 주변이 어느새 환해졌다. 이제 등산로도 거의 국립공원 수준으로 무척 좋아지고 주변에 큰 나무들이 없어서 조망을 즐기면서 진행한다. 계속해서 운동기구 등도 나타난다.

완만하게 얼마간 진행하니 공터가 나타나면서 삼성산이라고 써진 조그마한 오석의 정상석이 눈에 띈다. 드디어 첫 봉우리에 도착했다.

 

오석의 정상석에는 삼성산이라고 쓰여 있는데 1/25,000 지형도에는 「관산성지」라고 쓰여 있다.

 

정상석 뒷면에는「삼성산 302.8m 장룡산악회 창립 1991년1월12일 245차 산행 15주년 시산제 기념 2006년 1월 22일」라고 쓰여 있다.

 

 

삼성산성(三城山城)

♣위치: 옥천군 옥천읍 양수리~군서면 월전리 사이. 삼성산 해발 303m

♣시대: 삼국시대

♣형태: 삼태기형 석축, 토산혼축. 둘레 900m

 

 

이제 삼성산을 지나니 랜턴이 필요 없을 만큼 주변이 환해졌다. 해가 뜨려고 하는 동쪽 하늘 주변은 더 붉어졌다.

 

조금 진행하니 해가 나오기 시작한다. 그런데 주변에 나무가 가려서 나무 사이로 일출을 보게 돼서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전망 좋은 봉우리에서 일출을 보고 싶은 마음에 속도를 내 보지만 힘만 들지 발걸음은 더디기만 하다.

이러다간 일출을 제대로 볼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지만 계속 발걸음을 빠르게 재촉한다. 해가 막 올라온다. 힘들게 뛰다시피 하여 314봉 정상에 올라섰지만 이곳 역시 나무에 가려 조망이 별로다. 그래서 몇 미터 더 옮긴 다음에 그나마 나무가 없는 곳에서 2012년 첫 번째 일출을 본다.

 

언제나 그렇듯이 일출 볼 때마다 장엄하다. 새해 첫 산행 때 진도 수품항에서 구름이 잔뜩 끼어 일출을 못 봤는데 오늘에서야 새해 첫 일출을 보게 된 것이다. 이런 맛에 무박산행을 하는 것이리라!

 

 용봉 정상

 

일출을 본 후 상쾌한 햇살아래 멋진 능선을 걸어간다. 계속해서 멋진 조망을 즐기면서 길게 이어진 오르막을 올라가니 용봉 정상이다.

 

용봉 정상에는 「용봉 437m」라고 쓴 작은 오석의 정상석과 용봉산성의 내용이 적힌 오석의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조망이 무척 좋은 곳인데 북쪽으로 대전의 최고봉으로 시설물을 머리에 이고 있는 식장산 능선이 무척 잘 보인다.

 

 

용봉산성(龍峰山城)

♣위치: 옥천군 옥천읍 양수리~군서면 하동리 사이 용봉 해발 437m

♣시대: 삼국시대

♣형태: 마안봉형(馬鞍峯形) 석축산성 둘레 250m

 

 동평성터를 내려가는 중

 

용봉은 능선분기점이라 좌측으로 내려간다. 이후 좌측으로 드넓은 옥천읍내를 바라보며 계속 진행을 한다.

 

몇 개의 봉우리를 지나자 동평산성터가 나온다. 공터인데 이곳에도 동평산성의 내용이 적힌 오석의 대리석이 세워져 있다. 이곳 능선을 지나가면서 벌써 산성이 삼성산성, 용봉산성, 동평산성 이렇게 세 군데가 된다. 이곳 옥천이 삼국시대 격전지였나보다. 산성은 앞으로도 마성산성 한 군데가 더 나온다.

 

이곳 공터에는 동평산성 내용이 적힌 오석의 대리석과 함께 스텐으로 만든 동평성터 안내판까지 세워져 있다.

 

 

동평산성(東坪山城)

♣위치: 옥천군 옥천읍 양수리~군서면 동평리 사이 성재 북쪽 100m. 해발 405m

♣시대: 삼국시대

♣형태: 산봉형(蒜峯形) 석축산성 둘레 247m

 

 

동평성터(東坪城址)

위치: 옥천군 군서면 동평리 산 9-1번지

이 성은 삼국시대 전형적인 고리형 석성(石城)으로 북서쪽을 주로 경계토록 쌓았는데 서쪽에는 암벽으로 사람이 접근할 수 없는 요새지이며 군서면 일대가 발 아래 내려다 보이고 북쪽으로는 서화천과 식장산이 한눈에 보인다.

성 안에는 신라(新羅)시대의 토기조각이 발견되고 축성 방법으로 보아 신라때 쌓은 성으로 짐작한다.

 

 

동평성터에서 내려서니 이내 성터임을 알 수 있는 성곽의 모습이 나타난다.

 

 

헬기장

 

이후 5분 진행하니 「옥천 관광안내도」와 이정표(←50m 동평산성, 마성산 방향(양수, 마암)→, ↓등산로 입구 1km)가 세워진 곳에 닿는데 이런 곳에 「옥천 관광안내도」가 꼭 필요한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그리곤 10분 진행하니 헬기장이 나온다. 이후 4분을 내려가니 삼거리안부에 떨어지는데 작은 이정표에 망지미마을 표시를 해놨다. 그러니까 좌측으로 내려가면 옥천읍의 망지미마을로 내려갈 수 있다.

 

 마성산 정상

 

이제 마성산을 향해 진행하는데 37분간 진행해야 한다. 몇 개의 봉우리를 지나 힘겹게 마성산분기점에 닿는다. 이곳에 작은 돌을 세워놓고 매직으로 「마성산 497m」이라고 써놓은 것이 있고, 그 옆에 돌탑도 2개 조성되어 있다. 「마성산 성터」안내 푯말도 세워져 있다.

 

 

마성산 성터 (馬城山 城址)

위치: 옥천군 옥천읍 대천리 산 18-1번지

이 성은 마성산 정상에다 고리형의 석성(石城)을 북쪽을 경계토록 쌓았으며 동쪽과 서, 북쪽에는 망대(望臺)을 만들어 동쪽은 옥천을 한 눈에 바라볼 수 있고 서쪽은 군서면과 멀리 성터산성(군서면 은행리 상은 부락)과 사양성(군서면 사양리)이 보이며 북쪽으로 동평성(옥천군 군서면 동평리)과 삼성산성(옥천읍 양수리)이 내려다 보인다.

옛날 기록에도 언급된 바 없으나 경계 방향이나 축성 방법으로 보아 신라(신라)에서 쌓은 성으로 짐작한다.

 

 

힘이 들어서 조금 쉬려고 하니 이곳이 온통 돌 천지이고 주변에 나무들이 있어서 쉴 만한 공간이 없어서 좌측으로 2~3분 정도 진행하니 제법 넓은 공터가 나온다. 이곳에 마성산성 유래가 적힌 오석의 대리석이 세워져 있다.

 

 

[앞 면]

마성산성(馬城山城)

♣위치: 옥천군 옥천읍 대천리~군서면 금천리 사이 마성산 해발 510m

♣시대: 삼국시대

♣형태: 산봉형(蒜峯形) 둘레 216m ※蒜: 달래 산

 

[뒷 면]

마성산 정상의 남북으로 뻗은 짧은 능선을 따라 성을 쌓았으며 현재는 남동쪽의 일부 성벽을 제외하고는 모두 허물어져 원형을 알아보기는 힘들다.

망대지는 남쪽과 북쪽의 끝 부분에 있으며 성벽의 높이는 무너진 돌의 양과 지형으로 보아 5~6m로 추정된다. 옥천읍 전체와 군서면이 잘 보이며 특히 금천리 계곡 전체가 한눈에 보여 금산군 방향에서 금천리 계곡을 따라 군서면 또는 사목재를 넘어오는 적을 경계하기 위한 보루였던 것으로 보인다.

2009년 10월

옥천군. (사)옥천향토사연구회

 

 

이곳에서 후미를 기다린다. 30분 정도의 시간이 흐르니 블루홀님이 나타난다. 곧이어 나타날 줄 알았던 빛깔님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이곳이 분기점에서 조금 들어온 곳이라 그냥 지나칠 수도 있겠다 싶어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출발했다. 이곳에서 38분을 보냈다.

 

마성산분기점에 원위치 한 후 우측으로 내려간다. 능선에 눈이 제법 쌓여 있지만 앞 서 간 사람들이 많아서 인지 어렵지 않게 발자국을 쫓아간다.

갑자기 앞에서 빛깔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런데 사람은 보이지가 않는다. 평평한 길을 얼마간 진행하니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빛깔님과 반갑게 만난다.

 

이후 완만한 내리막길이 한동안 이어지다가(내려가는 도중 내내 조망이 좋다) 급경사를 올라서면 448봉이다. 다시 급경사 내리막을 내려서면 천성장마 유일의 도로인 새목재에 떨어진다.

 

 새목재

 

 새목재에서 장령산 쪽 들머리 모습

 

사거리안부인 새목재는 비포장도로가 가로지르고 있다. 이곳에서 좌측으로 내려가면 옥천읍내로 가는 길이고, 우측은 군서면으로 내려가는 길이다. 「장령산휴양림 등산로 안내도」스텐 푯말이 세워져 있다. 산행을 시작한지 4시간 12분이 흘렀다.

 

새목재로 내려선 후 우측으로 조금 내려가니 장령산으로 갈 수 있는 들머리에 긴 계단이 설치되어 있어서 계단을 타고 올라간다.

 

 474.6m봉(삼각점봉) 오름길에 바라본 마성산의 모습

 

 건너편 능선에 있는 충남 제1위봉 서대산의 멋진 모습

 

 474.6m봉의 무인감시카메라

 

힘겹게 올라가니 바위전망대가 나온다. 지쳐서 잠시 쉴겸 조망을 즐긴다. 앞 서 진행한 마성산줄기가 잘 보인다. 내려갔다가 448봉을 올라선 후 다시 내려가는 능선이 무척이나 멋진데…. 사실 멋지다 보다는 448봉을 거쳐햐 하는 괴로움이 묻어 있는 능선이다. 잠시 지나온 능선을 바라보다 이내 다시 올라간다. 조금 더 올라가니 무인감시카메라 시설물이 설치된 474.6m봉에 닿는다. 삼각점과 삼각점 안내문이 설치되어 있다.

 

 장룡산 능선길의 바위

 

 장룡산 능선

 

474.6m봉에서 4분을 더 진행하니 용암사갈림길이 나온다.

용암사 갈림길 이후로는 바위들이 심심치 않게 나타나 지루하지 않게 진행한다. 용암사갈림길에서 13분을 진행하니 거북바위에 닿는데 도저히 거북바위 모습을 알 수가 없어 바위 꼭대기까지 올라가본다. 잠시 쉬다가 이내 내려와 출발하면서 뒤돌아봐도 거북바위임을 알 수가 없었는데 나중에 사진으로 보니 거북이라고 생각을 하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왕관바위 근처

 

왕관바위 근처의 구멍바위

 

 우회길

 

 구멍에 낀(?) 당근 형님!

 

왕관바위

 

 왕관바위

 

거북바위에서 내려오니 이내 왕관바위가 나타난다. 바위 사이의 좁은 틈이 보이는데 그쪽보다는 우측의 로프가 걸려 있는 쪽이 나을 것 같아 우측의 로프길로 진행을 하는데 당근 형님이 바위 사이의 좁은 틈으로 진행하다가 빠져 나올 때 배낭이 걸려 잠시 웃음을 자아냈다. 오늘 산행 중 하이라이트 지점이다. 너무 짧은 구간에 아쉬움을 뒤로 하고 계속 진행한다.

 

장룡산자연휴양림 등산로 안내도

 

 제4지점

 

 팔각정

 

삼거리(제3지점)을 지나 7분을 더 올라가니 팔각정(장령정)이 반긴다. 시간이 11시 24분이다. 새벽밥을 먹었기 때문에 배도 고프고 해서 이곳에서 점심식사를 하려고 팔각정 옆에다 자리를 잡았다.

 

 제5지점

 

 장령산 정상

 

날씨가 받쳐줘서 무척 포근한 햇살을 받으며 즐겁게 점심을 먹고는 출발했다.

팔각정에서 5분을 진행하니 장령지맥 분기봉에 닿는다.

 

장령지맥 분기봉은 공터인데 이렇다 할 표기는 없고 장령지맥 쪽(좌측방향)으로 표지기 한 장이 나무에 걸려 있을 뿐이다.

 

장령지맥 분기봉에서 8분을 진행하니 다시 삼거리가 나오는데 제5지점이라고 쓰여 있다. 이곳이 장령산휴양림에서 예기하는 4개의 코스 중 제1코스 지점이다.

 

제5지점에서 4분을 더 올라가니 비로소 장령산 정상에 도착한다.

 

 장령산 정상에서

 

「장령산 656m」라고 쓴 오석의 정상석이 세워져 있고, 이곳에도 장령산휴양림 등산로 안내도가 나무에 걸쳐 있다.

 

장령산 정상에서 잠시 쉬다가 이후의 계획에 대하여 논의를 해본다. 시간을 보니 빠른 걸음으로 걸으면 대성산까지는 가능할 것 같은데… 후미가 이미 지쳐 있는 것 같아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아무튼 갈 때 까지 가본 후 하산한다는 생각으로 진행을 한다.

 

금산고개 가기 전 전망좋은 전망대에서

 

그런데 이곳부터는 전혀 발자국이 없다. 동물의 발자국만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러셀 아닌 러셀을 해가며 진행한다.

아니 삼양사거리부터 이곳 장령산 정상까지는 많은 사람들이 다녀서 길이 무척 좋았는데 갑자기 장령산 정상 이후로는 사람의 발길이 전혀 없는 것이었다.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장령산 정상을 찍고 되짚어 내려갔다던가 아님 우측 능선을 타고 내려갔다는 예기인데…. 참으로 모를 일이다.

 

아무튼 사람의 흔적이 전혀 없는 능선길을 눈 위에 찍힌 짐승 발자국을 쫓아 내려간다.

7분 내려가니 헬기장이 나오고, 이후 13분을 올라가니 삼각점봉(574.0m)이 나오는데 코팅된 A4용지에 돌메기산이라고 적혀있다.

 

이곳에서 소변이 급해 뒤 따라오던 대장님에게 천천히 오라고 하고 급하게 정면으로 보이는 표지기를 확인한 후 직진(실제 우측방향임)하여 급하게 내려간다. 적당한 곳에서 급한 일을 해결한 후 호출을 하여 내려간다. 조금 내려가니 다시 갈림길이 나오는데 어째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거 능선으로 가는데 아니고 계곡으로 떨어지는 느낌이 든다.

다행히 뒤따라오던 고문님이 이쪽길이 아니라고 예기를 한다.

「크~!」

오늘도 과외를 받은 것이다.

 

되짚어 힘겹게 올라가 돌메기산에 도착했다. 시간을 확인하니 12분 허비했다.

그러니까 이곳 돌메기산(574.0m봉. 삼각점)은 능선분기점인데 우측으로 가면 도경계(충북, 충남) 능선을 따라 서대산으로 이어진다. 물론 상곡천을 넘어야 한다.

좌우지간 장령산 쪽 방향에서 진행하다 보면 천성장마 능선길보다 서대산 도 경계능선이 더욱 잘 나 있다. 표지기도 이쪽 방향에 여러 장 매달려 있다.

 

충북, 충남의 도 경계능선 종주도 언젠가는 답사해야 할 능선길이라 좋은 공부 한 셈이다.

 

돌메기산에서 좌측으로 급하게 내려간다. 이내 올라선 봉우리에 무봉산이라고 적혀 있다. 무봉산에 대해서 인터넷을 뒤져 봤지만 이렇다 할 내용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

 

무봉산 내리막길은 무척 위험하다. 더욱이 눈이 쌓여 있어서 무척 조심스럽게 내려선다. 그리고는 완만하게 진행하다가 다시 563m봉을 향해 힘겹게 올라간다.

 

힘겹게 올라간 563m봉에서 다시 급하게 내려갔다가 올라서니 바위전망대가 나타난다. 전망이 무척 좋은 곳이라 이곳에서 휴식을 한다. 시간을 보니 벌써 2시다. 옥천역에서 5시 25분 열차라 도저히 대성산까지 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지내재에서 하산하기로 하고 후미를 기다린다.

 

 

바위 전망대에서 바라본 매봉과 대성산

 

바위전망대에서 후미를 기다리면서 블루홀님에게 어디쯤 오냐고 전화를 하니 돌메기산이라고 한다. 그러면 선두가 30분 걸렸으니 40분 정도 걸린다고 치면…. 시간상 지내재에서 하산하면 시간에 쫓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하산을 금산고개로 내려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역시 40분 정도 시간이 흐르니 후미가 도착한다. 이제 모두 함께 진행을 한다. 다시 사람의 흔적이 전혀 없는 능선길을 러셀해가며 진행한다. 다행히 적설량은 2~3cm정도라서 쉽게 진행할 수가 있다. 이미 등산화는 젖어버린 상태이다.

 

하산지점인 장찬저수지 모습(빙어낚시를 하고 있다)

 

바위전망대에서 출발하여 평평한 능선길을 조금 진행하다가 우측으로 내려선 후 다시 무명봉 하나를 넘어서니 금산고개가 나온다. 바위전망대에서 18분 걸렸다.

 

다행히 장찬저수지 쪽 하산로가 잘 보인다. 금산고개에서 좌측으로 꺽어 장찬저수지 방향으로 내려간다. 장찬저수지가 잘 보인다. 하산길은 짐승 발자국 조차 보이지가 않는다. 하얀 백설 위를 발자국 내면서 내려가는데 오래전에 내린 눈이라 푸석거린다. 우측의 능선으로 진행하다가 좌측으로 꺽어 내려간다. 한동안 지그재그로 내려간다. 중간 중간 벌목해 놓은 나뭇가지등이 성가시게 하지만 그래도 못 지나갈 정도는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그렇게 지그재그로 내려서니 드디어 계곡이 나타난다. 이제 계곡을 따라 내려간다. 몇 번 계곡을 횡단하여 내려서니 비로소 장찬저수지에 떨어진다. 금산고개에서 47분 걸렸다.

9시간 34분의 긴 산행을 무사히 마쳤다.

 

산행을 마치고 이원택시를 호출하여 네 사람 먼저 옥천역을 향하고 이어 다시 부른 택시를 타고 옥천역에서 합류하여 옥천역에서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귀경했다.

 

서울역에 도착하여 저녁 먹고 헤어진 후 귀가했다.

미완의 천성장마였지만 나름 많이 배운 산행이었다.

이제 남은 구간은 숙제로 남겨두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7.참고사항

▣ 옥천의 마을 - 이원면 장찬리(長贊里)

장찬리는 원래 이남면(利南面)에 속해 있던 마을이다. 1739년 기록에 보면 33호가 살았고 1891년 신묘장적에는 24호가 살았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후 이남면(伊南面)에 속해 있다가 1929년 이원면(伊院面)에 소속 되었다. 2007년말현재 15호 31명이 살고 있다.

 

장찬리라 부르게 된 것은 800여 년 전에 장씨 성을 가진 사람이 처음 들어와 사기그릇을 만들어 팔고 살았는데 이 사람이 아들을 낳아 기르게 되니 그 아들이 어릴 적부터 아버지를 도와줌으로 이름을 도울 찬(贊)자를 써서 찬이라 불렀는데 이것이 마을 이름이 되어 장찬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웃장찬리 골안이와 사기점터에 옛날 도요지가 남아 있어 많은 사기 그릇 파편들을 볼 수 있다.

 

저수지 서남쪽으로 돌메기산, 무봉산, 골안이, 사기점터가 있고 금산에서 터널로 물을 끌어 드리는 통수골(새목재), 진상품을 운반하던 길인 진상골, 새시골, 동학전쟁 때 부부가 와서 거처하던 피난굴, 베를 짜서 생계를 이어갔다는 베틀굴, 산위에 옛성이 남아있는 시루봉, 작은 절골, 큰절골 등이 남아 있다.

 

1970년 농업용수 개발사업으로 장찬리 저수지를 건설하게 되어 아래장찬리 주민들은 수몰된 고향을 떠나 여러 곳에 이주하여 살게 되었다. 고향을 그리는 실향민과 고향을 지키는 재향민이 힘을 합하여 1994년에 애향비를 세웠다.

 

1979년 준공된 장찬저수지에는 수상레저타운이 있어 수상스키를 즐기는 레저 활동이 활발하고 겨울에는 깨끗하고 싱싱한 빙어를 맛볼 수 있다.

-옥천문화원 홈피에서 발췌-

 

▣ 옥천의 인물 - 정지용(鄭芝溶 : 1903 ~ ? )

 

시인. 옥천읍 하계리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영일 정씨. 1923년 휘문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29년 일본 경도의 동지사대학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그 직후부터 귀국하여 모교의 교원으로 재직하였고, 1945년 광복 후에는 경향신문 편집국장,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를 역임하였다. 그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으나 조선문학동맹에 가입하였으며, 그 중앙집행위원에 선입되었으나 적극적으로 가담하지는 않았다. 대한민국 정부수립후 전향하여 보도연맹에 가입하였다.

 

1950년 6.25사변 때 서울에 있다가 북괴군에 끌려나가 문화선무대에 참여했다고 하며 그 뒤 소식이 끊겼다. 1953년 전후에 북한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휘문고등보통학교 재학 때 박팔양과 함께 동인지 『요람』을 간행하였다. 대학에 재학할 때에는 시 「카페 프란스」(1926. 6)·「Dahlia」(1926. 11)·「이른봄 아츰」(1927. 3)「바다」(1927. 2)「향수」(1927. 3)등을 발표하였다. 이 작품들은 신선한 감각과 이미지를 보여주고 전위적인 모더니즘의 실험성까지 보여주는 작품이어서 당시 시단에 큰 충격을 주었다. 1930년대에는 박용철이 주재하는 『신문학』동인으로 참가, 창간호에는 「이른봄 아츰」·「경도압천」·「선취」, 2호에는 「바다」·「피리」·「갑판 위」·「저녁 햇살」·「홍춘」·「호수1·2」등을 발표하였다. 1933년에는 『카톨릭청년』지 창간에 참여하여 시 「해협의 오전2시」·「비로봉」·「임종」·「시계를 죽임」·「다른 한울」·「또 하나의 다른 태양」·「불사조」·「나무」등을 발표하였다.

 

그의 시집으로는 『정지용 시집』과 『백록담』이 있으며 산문집으로는 『지용 문학독본』『산문』이 있다. 이 밖에도 「무제」 「이토」등 상당수의 미수록 작품이 있으며, 번역시 수편이 있는데 정확하고 수준이 높다고 평가받는다.

 

그의 시는 흔히 모더니즘 계열로 간주되고 있으나, 정확히 평가한다면 이미지즘 계열의 시, 특히 초기의 현대시는 그에게서 시작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조지훈·박목월·박두신 등 청록파 시인들이 그의 추천에 의하여 등단하였다.

 

▣ 옥천의 인물 - 육영수(陸英修 : 1925 ~ 1974)

 

제 3· 4공화국 박정희 대통령 부인으로 종관과 이경령 사이의 차녀이다. 아버지가 소문난 부호로 부유한 가정에 있었으나 자만하지 않고 겸손하고 온유한 성품을 지녔다. 옥천읍내 죽향국민학교를 마치고 상경하여 배화여고를 졸업한 뒤 옥천여자중학교 교사로 근무하였다. 1950년 전란으로 부산에 피난중일 때 육군중령 박정희와 혼인하여 슬하에 지만·근혜·근영 등 1남2녀를 두었다. 1961년 박정희 장군이 5.16군사 쿠데타를 주도하여 성공한 뒤1963년 10.15 총선거에서 6대 대통령에 당선되고 연임됨에 따라 대통령 부인으로 11년간 내조하였다.

 

검소한 안 살림과 우아한 품위로 대외적인 활약을 하였으며, 숨어서 남이 못하는 일을 많이 하여 덕망을 쌓았다.

 

만년의 공직은 양지회 명예회장과 자연보존협회 총재였으나 평소 재야 여론을 수렴하여 대통령에게 건의하기를 계속하는 가운데 ‘청와대 안의 야당"이라는 말도 들었다. 남산에 어린이 회관을 설립하는가 하면, 서울 구의동 일대에 어린이 대공원을 조성하고 정수기술직업훈련원 설립을 비롯하여 재해대책기름조성과 정신박약아 돕기 운동 등 그늘진 곳을 직접 찾아다니며 사회복지사업에 분망한 일과를 보내었다.

 

어린이 잡지 『어깨동무』창간과 서울대학교 기숙사 정영사를 건립하였다. 경향 각처의 여성회관 건립은 물론 연말마다 고아원· 양로원을 위문하여 따뜻한 구호의 손길을 미쳤고, 1969년부터 전국에 87개소나 되는 음성나환자 정착촌을 만들어 재생의 길을 터주었다.

 

1974년 8.15광복절 기념식이 열린 서울국립극장 단상에서 문세광에게 저격당하여 최후를 마쳤다.

 

박정희 대통령 저격사건에 희생양이 된 격이어서 애도 인파가 청와대에 연일 쇄도하였는데 국민장 영결식이 8월 19일 오전10시 중앙청 광장에서 각국 조문사절과 내외인사 3,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엄숙하게 거행되고 이날 오후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는 우리시대가 낳은 훌륭한 어머니와 아내로서 이상적인 한국의 여인상을 국민의 가슴속에 심어놓고 간 것이다.

 

8.특기사항

①산행지형도 1/25,000: 2매[옥천(沃川), 이원(伊院)]

②답사 산봉우리(삼성산, 용봉, 마성산, 장령산, 돌메기산, 무봉산)

No.1073 삼성산

No.1074 용봉

No.1075 마성산

No.1076 장령산

No.1077 돌메기산

No.1078 무봉산

③2012년 첫 일출 구경

④새싹산악회 번개산행으로 열차 왕복 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