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전라·제주 여행

[스크랩] 진도여행 후기 3

약초2 2007. 1. 17. 16:14
 
 <진도여행 2편에서 계속>

  새벽같이 일어나 신비의 바닷길을 구경하려고 어두운 밤길을 달린다. 집에서 확인할 때 때마침 물이 갈라지는 시간을 맞출 수 있기 때문이다. 새벽녘에 도착을 하니 미리 도착한 차 1대가 보인다. 차를 세워두고 잠시 눈을 붙이다 일어나니 여러 대의 차량이 주차된 것이 보인다. 하지만 당연히 갈라질 것이라고 생각하던 바다는 요지부동 갈라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국립해양조사원의 인터넷을 원망(분명히 갈라지는 것으로 되어 있음)하며 일출 사진만 찍고 되돌아 나온다.


※신비의 바닷길

  세계적으로 「한국판 모세의 기적」으로 널리 알려진 신비의 바닷길은 고군면 회동리와 의신면 모도(茅島) 사이 약 2.8km가 썰물 때 개펄이 드러나는 현상이다. 매년 음력 3월 초와 보름에 극심한 조수간만의 차로 해저의 사구가 40m 폭으로 1시간쯤 완전히 드러나는데, 이때를 「영등살」이라 한다. 매년 이 현상을 보기 위해 국내외 관광객 40여만 명이 몰려온다. 전 세계적으로 일시적인 현상을 보기 위해서 가장 많은 인파가 몰려드는 곳으로 알려졌다.

  진도군에서는 영등제 기간에는 국내외 관광객들을 맞아 진도 고유의 민속예술인 강강술래, 씻김굿, 들노래, 다시래기 등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와 만가, 북놀이 등 전라남도 지정 무형문화재를 선보이고 다양한 이벤트로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올해(2007년)는 제30회로 4월17일부터 19일까지 3일간 열린다. 바닷길이 완전히 열리는 시간은 17일(오후 5시20분), 18일(오후5시 50분), 19일(오후6시 30분) 열리는데 약 1시간 전부터 바닷길이 열린다.

  현대판 「모세의 기적」으로도 불리는 신비의 바닷길은 1975년 주한 프랑스대사 피에르 랑디 씨가 진돗개 연구를 위해 진도에 들렀다가 이 현상을 목격하고 귀국 후 프랑스 신문에 「한국판 모세의 기적」이라 소개하면서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1996년에는 일본의 인기가수 덴도요시미가 신비의 바닷길을 주제로 한 「진도이야기(珍島物語)」를 불러 히트를 하면서 일본 관광객도 많이 찾는다. 바닷길 입구엔 2000년 4월 뽕할머니 상징 조형물을 제작해 설치했다. 


  되돌아가는 길에 전망 좋은 곳이라고 쓰여 있는 곳이 있기에 그곳으로 차를 몬다. 짧은 구간이지만 상당한 경사구간이다. 언덕 정상에 올라오니 멋진 카페 건물이 있고 앞에 설명문이 있는데 사유지로써 진도군청에 기증한 사연이 쓰여 있다. 잠시 바다를 바라보니 신비의 바닷길 쪽 바다가 한 눈에 보이는데 의신면 모도리 쪽의 바다가 갈라진 것이 보인다. 이쪽 고군면 회동리 쪽은 전혀 갈라지지 않았는데 반대쪽은 상당부분 갈라진 것이 목격됐다. 완벽하게 갈라지진 않았지만 그래도 갈라진 모습을 볼 수가 있어서 위안 삼았다.

  언덕에서 내려와 지나가는 길에 왕온의 묘를 답사했다.


※전 왕온의 묘

  고려 삼별초군의 항몽전 당시 진도에서 10일 동안 벌어진 전투로 삼별초군은 위기에 몰려 결국 후퇴하게 된다. 당시 왕으로서 패주하던 승화후 온(承化侯 溫)은 왕무덤재 근처에서 잡혀 몽골장수의 칼에 목숨을 잃는다. 논수곡(論首谷)과 논수동(論首洞)이라는 이름은 여기서 유래했다. 바로 밑에 왕이 탔던 말의 무덤이 남아 있으나 아들 항의 무덤은 남아있지 않다. 이때 함께 도망치던 여인들이 몸을 던진 만길재 아래 우황천은 급창둠벙이라는 이름으로 전하여 온다.


  고려는 1231년(고종 18)부터 침략해오던 몽골과 본격적인 전쟁을 벌이기 위해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도로 옮겼다. 그리고 40여 년 동안 삼별초가 중심이 되어 몽골과의 전쟁을 벌였으나, 1270년(원종 11) 고려는 결국 몽골에 항복하고 만다. 그러나 몽골에 굴복할 수 없던 배중손(裵仲孫)은 대몽항쟁을 주도했던 군대인 삼별초를 이끌고 1270년 6월 강화를 출발했다. 그리고 두 달이 지난 8월19일 진도로 들어와 용장산성(龍藏山城)을 쌓고 대몽항쟁을 계속했다. 행궁을 짓고 왕온(王溫)을 왕으로 삼으면서 자주 국가를 경영하려던 삼별초의 꿈은 참으로 컸다.

  삼별초가 강화도를 떠난 지 무려 두 달 만에 진도로 들어선 까닭은 여름의 잦은 태풍 때문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하필이면 진도였을까. 향토사학자들과 관련 전문가들은 몇 가지로 추측한다. 우선 진도는 바다를 두려워하는 몽골군이 접근하기 어려운 섬인데다가, 강화도보다 조금 넓지만 군사와 그 식솔들의 식량 자급자족이 가능할 정도로 들녘이 비옥했다. 또 지정학적으로는 황해와 남해의 길목을 지키는 지리적 요충지였고, 무엇보다 삼별초 장수 중에 진도 출신이거나 진도와 인연이 있는 인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독자적인 나라를 지키려던 삼별초의 진도정부는 그러나, 9개월 만에 끝이 난다. 1271년 여몽연합군은 해남 삼지원에서 병선 400여 척, 군사 1만 명을 3개 군단으로 나뉘어 벽파진 상륙작전을 폈다. 벽파진으로 상륙하는 주력부대를 막는 데 여념이 없던 삼별초군은 좌우로 협공해 들어오던 여몽연합군에게 10여 일만에 함락되고 만다. 삼별초군은 둘로 나뉘어 급박하게 후퇴한다. 김통정 부대는 동남쪽의 금갑포에서 배를 타고 겨우 제주로 넘어갈 수 있었지만, 배중손 장군은 진도남단의 남도석성으로 향하다가 굴포에서 전사하고 만다.

한편, 용장산성을 버리고 다급하게 도망가던 왕온과 아들 항은 산성에서 20리쯤 떨어진 왕무덤재 근처에서 잡혔고, 이들 부자는 결국 몽골장수의 칼에 목숨을 잃는다. 그 자리에 왕온의 것이라 전하는 무덤과 왕이 탔던 말의 무덤이 남아 있으나 아들 항의 무덤은 남아있지 않다.

의신천으로 흘러드는 작은 계곡을 논수곡(論首谷)이나 논수동(論首洞)이라 하는데, 바로 왕온의 목숨을 두고 고려 장수와 몽골 장수 간에 벌어지던 논쟁을 두고 붙인 지명이다. 함께도망치던 여인들은 잡힐 위기에 처하자 현재 의신면 돈지리의 만길재 밑 깊은 물에 몸을 던져 자결했으니 이를 급창둠벙이라 한다. 현재 이곳은 아주 자그마한 저수지에 불과하나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30여 년 전 경지 정리를 하기 전까지만 해도 물살이 아주 거셌다고 한다. 배중손과 그의 부하들은 주민들에 의해 임회면 굴포 마을의 마을신이 되었다고 하는데, 마을엔 배중손 장군을 모신 사당이 있다. 그런데, 사당에 서있는 배중손 장군동상을 보면 표정과 몸짓이 참 슬퍼 보인다.


 
이런저런 사연 짚어보게 되는 왕온 묘를 지나 첨찰산(485.2m) 기슭으로 발길을 옮기면 진도 서화(書畵)의 진면목을 접할 수 있는 운림산방(雲林山房)이다. 이는 조선 후기 남화의 대가인 소치(小癡) 허유(許維·1809-1893)가 말년에 거처하며 여생을 보내던 화실이다. 여름이라면 소치가 심었다는 붉은 백일홍이 작은 꽃구름처럼 반길 터지만, 응달에 잔설 희끗희끗 남아있는 겨울엔 뺨을 스치는 바람조차 제법 차다. 그러나 그윽하게 번지는 묵향만은 봄볕처럼 따사롭다. 첨찰산을 등진 채 연못을 품고 있는 운림산방은 어느 계절에 찾아도 고즈넉한 가운데 온몸을 감싸는 문기(文氣)가 느껴진다.

소치는 어려서부터 그림에 재주가 있었음에도 비교적 늦은 나이인 28세에 본격적으로 그림 공부를 시작했다. 당시 대흥사 두륜산방의 초의(草衣)선사 밑에서 공제 윤두서의 화첩을 보면서 그림을 익혔고, 33세가 되던 해 소치의 천재성을 알아챈 초의선사의 소개로 추사 김정희 아래에서 본격적인 서화수업을 하게 된다. 천재성에다 강한 의지까지 지녔던 소치는 이후 급성장을 거듭해 결국 시(詩)·서(書)·화(畵) 삼절(三絶)에 능한 남화의 대가가 된다. 군왕인 헌종 앞에서 그림을 그렸는가 하면 흥선대원군, 권돈인, 민영익, 정학연 등 당시 내로라하는 권문세가들과도 어울렸다. 소치라는 호는 스승인 추사가 붙여줬는데, 이는 중국 원나라 4대 화가인 대치(大痴) 황공망과 비교할 만하다는 뜻이 담겨있다.

추사의 남화 분위기를 잘 살렸다는 평을 받는 소치는 죽수계정도, 선면산수도, 노송도 같은 좋은 작품을 남겼다. 또 추사김정희의 반신상인 ‘완당선생 초상’ 같은 초상화도 그렸다.

1856년 추사가 세상을 떠나자 소치는 이듬해 고향 진도로 돌아와 운림산방을 지었다. 이곳에서 소치는 85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제자를 기르며 불후의 작품을 많이 남겼다.

이후 운림산방은 한국 남화의 본거지로서 소치 허유~미산 허형(米山 許瀅)~남농 허건(南農 許健)·임인 허림(林人 許林)~임전 허문(林田 許文)의 직계 4대에 걸쳐 5인의 화가를 배출하면서 세계에서 드물게 큰 화맥을 이어가고 있다. 또 소치의 5세에 속하는 현손 중에서 붓을 잡은 화가가 6명이나 된다 하니 가히 세계적인 화가 집안이라 할 만하다. 그래서 진도주민들은 우스갯소리로 「진도의 허씨 집안은 빗자루만 잡아도 명필이 나온다」고 말한다.

흔히 어느 고을의 장점을 말할 때 「어디 가서 무엇을 자랑하지 말라」라는 말이 있다. 주로 돈이나 주먹, 인물 등에 관련된 자랑인데, 진도에선 자랑하지 말아야 할 것이 무려 세 가지나 된다. 첫째 글씨 자랑이요, 둘째 그림 자랑이고, 셋째는 노래 자랑이다.

우선 다른 고을의 자랑거리와 비교해 볼 때 품격이 다르거니와, 이 세 가지만으로도 진도를 우리나라 최고의 예향으로 꼽는 데 이의를 달 수 없다. 이외에도 진도 사람들 앞에서 자랑하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주량이다. 특히 홍주를 앞에 놓고 주량을 자랑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진도 사람들은 홍주를 받아들이는 배가 따로 있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진도에 들어선 날이 금요일이라면 ‘금요상설무대’가 펼쳐지는 남도국립국악원으로, 토요일이라면 ‘토요민속여행’으로 흥겨운 진도향토문화회관으로 발길을 향하는게 좋다. 물론 홍주 몇 병 사들고 우리나라 최초의 노래방이있는 지산면 소포리 마을회관 노인들을 찾는 것도 괜찮다. 아니면 학교 파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초등학생 손목이라도붙잡고 미소로 노래를 청하든지. 어쨌거나 어렵사리 머나먼 진도까지 내려와서 진도의 세 번째 자랑거리인 노랫가락 한 대목 듣지 않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그렇다. 진도는 뭐니 뭐니 해도 민요가 넘실대는 고을이다. 진도에선 낯선 남자가 길을 가면 밭일을 하던 아낙들은 멱구리(씨앗망태)로 길을 막고 노래를 시키곤 했다. 그가 노래를 한 가락 하면 앞길을 열어 주지만 만일 노래를 부르지 못하면 노래로 놀려댔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진도 사람들은 원수가 외나무다리에서 만났을 때도 먼저 시를 짓고, 결판이 안나면 노래를 불렀고, 그것마저 우열을 가리지 못하면 그제야 힘으로 대결했다고 한다. 참 그럴 듯한 이야기다. 증거는 많다. 노래와 춤을 곁들인 수많은 중요무형문화재가 전승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순신 장군의 전설이 서린 강강술래(제8호), 진도 농부들이 농사일을 할 때 부르는 남도들노래(제51호), 망자가 편안히 저 세상으로 갈 수 있도록 기원하는 씻김굿(제72호), 죽은 자의 극락왕생을 축원하는 다시래기(제81호)는 국가에서 지정한 것이고, 도에서 지정한 진도북놀이, 진도만가,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진도아리랑 등을 합하면 실로 무궁무진하다. 노래 부분만을 보더라도 가창 부문의 인간문화재 23명 중에서 진도 출신이 무려 6명이나 포함되어 있다.

진도에서 이렇듯 다양하고 많은 판이 벌어질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진도의 넉넉한 물산 덕이다. 진도는 섬이면서도 농사 지을 땅이 많았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어업보다는 농업으로 사는 주민들이 훨씬 많았고, 게다가 토지도 비옥해 일 년 농사를 지으면 삼 년을 먹고살 만큼 소출이 많았다. 고려 때의 옥주(沃州)라는 지명도 여기서 비롯했다. 이런 넉넉함에서 나온 여유가 문화적 욕구로 이어졌음을 짐작하기란 어렵지않다. 곳간에서 인심도 나고 노랫가락도 흐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도들노래 등 대체적으로 노랫가락은 향토색이 짙고 매우 흥겹다.


그런데, 이런 문화의 향유에서 진도 아낙들의 역할은 참으로 컸다. 제주도 해녀에서 보듯 원래 섬 아낙의 생활력은 대단한데, 농삿일이 많았던 진도는 김매기는 물론 산에서 땔감을마련하는 것도 여자의 몫이었다고 한다. 오죽하면 여자도 상여를 메겠는가. 이런 환경에서 진도 여인들은 잔칫집이나 굿판에서 노래 부르고 춤을 추며 위안을 삼았다.

또한 진도는 씻김굿, 다시래기, 진도만가 등 죽음과 관계된 민속도 많다. 무당이 하는 제사인 씻김굿은 죽은 사람의 원한을 풀어주고 편안히 저승으로 갈 수 있도록 기원하는 굿이다. 원한을 씻어준다 해서 씻김굿이라 부른다. 진도씻김굿의 음악은 무속 선율인 육자배기목(시나위목)을 중심으로 피리·대금·해금·장고·징으로 이루어진 삼현육각(三絃六角) 반주로 진행되는데, 요즘엔 가야금·아쟁·북 등을 쓰기도 하고, 때로 정주나 바라를 보조악기로 쓰는 수도 있다. 무당은 흰색 옷에 다홍색 띠를 걸치는 정도의 소박한 옷차림으로 불교적 성격이 짙은 승복과 비슷하며, 죽은 사람의 한을 풀어주는 지전(紙錢)춤을 춘다. 노래는 홀로 부르는 통절(通節) 형식과 선소리를 메기고 뒷소리로 받는 장절(章節) 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선율의 부침새와 여러 가지 세련된 목구성을 구사해 매우흥겹고 아름답다.
진도씻김굿은 죽은 사람뿐 아니라 산 사람의 무사함을 빌고 불교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굿으로, 춤이나 음악에서 예술적요소가 매우 뛰어나다. 원시종교인 샤머니즘과도 통하는 죽음에 대한 인간의 초연한 자세를 예술적 세계로 승화시킨다는 평을 듣고 있는 진도씻김굿은 1979년 세계민속음악제에서 금상을 받기도 했다.


또 진도에서는 초상, 특히 망자가 수명을 다 누리고 세상을 떠난 경우 동네 상여꾼들이 전문 예능인들을 불러 함께 밤을지샌다. 진도 다시래기다. 다시래기는 한자로 다시락(多侍樂), 즉 같이 즐긴다, 또는 우리말로 다시 낳는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다시래기 놀이 맨 끝에 사람 죽은 집에서 “갓난애나 둘려 가지고 가자”는 대사처럼 죽고 낳고 하는 세상살이를 이야기하는 굿이다. 고구려의 옛 무덤에서 보이는 벽화와 고구려·신라의 역사를 기록한 사서를 통해 보듯 오랜 옛날부터 전통적으로 장례에서 가무가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연극놀이는 언제부턴가 모든 지역에서 사라졌고 진도에만 그 흔적이 남아 있다. 그래서 진도를 원형의 섬으로 부르는 것이다.

사람이 죽었을 때 상여꾼들이 상여를 메고 가면서 부르는 상여소리를 만가(輓歌)라 하는데, 진도만가는 여느 지방과는 달리 여자도 상두꾼으로 참여하고, 만가의 반주로 사물과 피리가 등장하는 게 다르다. 이외에도 가면을 쓴 방자쇠 두 사람이 조랑말을 타고 칼춤을 추면서 잡신을 쫓는가 하면 횃불이 등장하고 상주들의 상복 또한 특이하다.


슬픈 곡소리가 넘쳐나야 할 상가에 다시래기굿으로 웃음이 터지고, 슬퍼해야 할 장송곡인 상여소리에 풍악이 울리니 진도 주민들의 의식세계는 어찌 된 것일까. 진도의 민속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진도 사람들은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임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시련 없이 피어나는 꽃이 없듯, 진도가 간직하고 있는 이런 원형의 아름다움은 역사적인 상처에서 유래했다. 진도의 비극은 후삼국 무렵부터 시작됐다. 후삼국시대 왕건에게 끝까지 저항한 후백제 군사가 여기 진도에서 격파되어 천민 거주지인 향(鄕)이 되었고, 고려 말기엔 삼별초군이 들어왔으며, 정유재란 때엔 조선군과 일본 수군이 전투를 벌였다. 이럴 때마다 진도엔 피바람이 몰아쳤는데, 삼별초의 항몽전 여파로 당시 여몽 연합군은 전투에서 승리한 뒤 아녀자를 제외한 모든 장정을 몰살해 피가 내를 이루었다. 살아남은자들은 대부분 몽골에 노예로 팔려갔는데, 이들은 20여년만 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여말선초엔 왜구들 때문에 80여 년간 섬을 비운 적도 있을 정도로 환란이 많았다. 임진왜란 때도 왜군은 전략상 요충지인 진도에 상륙해 약탈, 방화, 살인등으로 섬을 초토화했다. 이렇듯 각종 전란으로 남정네 씨가 마르면서 진도 아낙들은 남성의 일인 상여를 메고 지아비를 장사 지내는 아픔을 겪었다. 이러한 한이 씻김굿 등으로 승화됐다. 그래서 진도의 노래 속에는 한과 흥이 조화를 이루며어우러져 있다.

많은 굿판에서 뒤풀이 민요로 불리는 진도아리랑을 보자. 정선아리랑이 깊은 산중에서 신산한 삶을 읊은 한의 노래라면, 진도아리랑은 널따란 들녘에서 여유롭게 부르는 흥의 노래다. ‘응 응 응’ 하는 후렴의 떨림소리를 바다의 물결이 출렁거리는 소리로 보기도 한다. 또한 진도아리랑은 소리와 춤의 동시성을 지니고 있다. 장단은 세마치 장단이며 선율은 시나위형으로 중머리 장단에 불린다. 특히 진도아리랑은 가사보다는 그 여음의 묘미가 특색이다. 계통 없이 불리던 진도아리랑을 체계적으로 악보로 정리한 사람은 임회면 삼막리 출신으로 우리나라 대금산조의 명인으로 꼽히는 박종기(1879-1939) 선생이다.

한편, 진도는 유배의 섬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고려부터 조선까지  무려 180여 명이 진도에 유배당한 것으로 나타난다. 유배당한 사대부들은 대부분 일정 기간이 지나면 다시 관직에 오르기 때문에 유배지 인근에서 일정한 세력을 유지했다. 오죽하면 당시 유배자들 때문에 진도 주민들이 먹을 게 없다는 말까지 나왔을까. 하지만 진도 주민들의 핏속에 유전되는 넉넉함과 예술적인 기질은 유배자들에게서 고급 문화를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여러 장점을 흡수해서 진도만의 독특함으로서 발전시켰다.

진도아리랑에 등장하는 「문경새재는 왠 고갠가」 하는 대목도 여기서 유배생활을 했던 영남출신 사대부의 흔적으로도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런데 얼마 전 진도 출신의 한 음악선생은 자신의 논문에서 진도아리랑의 첫마디가 「문경새재」가 아닌 「문전세재」임을 지적하기도 했다. 「문 앞의 세 고개」는 태어나는 첫 번째 고개, 인생살이 두 번째 고개, 북망산천으로 가는 세 번째 고개를 말한다는 것이다. 진도에선 60세 이상의 노인들이 모두 「문전세재」로 발음하고, 진도아리랑의 내용이 인생의 희로애락을 노래한 점을 근거로 들었다. 그럴 듯한 의견이다.

늘상 아리랑 울려 퍼지는 진도의 겨울은 푸르다. 전국 시장점유율이 무려 20%에 육박한다는 겨울대파와 월동배추가 펼쳐진 덕이다. 거기에 드문드문 보리밭이 있으니 푸르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할 터. 그래서 강원도는 대설주의보가 내려진 한겨울에도 진도 주민들은 대파와 배추를 수확하느라 구슬땀을 흘린다.

그렇다. 누군가의 말처럼 저 푸른 들녘이 있어 우리의 겨울밥상은 그렇게 싱그러웠던 것이다. 허나 어디 육신의 밥상뿐이겠는가. 진도의 푸른 겨울날, 너른 들판을 터벅터벅 반나절만 걷다보면 잊고 있던 풍류가 살아날 터니, 진도는 타향이 아니고 바로 잊고 있던 우리의 본향인 것을-.


 
신비의 바닷길 장면(퍼온 사진)

신비의 바닷길 입구에 있는 뽕할머니상

신비의 바닷길 모습(이날 끝내 바닷길이 열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조망좋은 언덕 정상에서 바라본 반대쪽은 바닷길이 조금 열렸다.

첨찰산 쌍계사 일주문 전경
바로 이웃에 운림산방이 있다.

진도 임회면 상만리 680 비자나무(천연기념물 111호)
주목과에 속하는 난대성 상록침엽교목이다.
높이 25m, 수령 약 500년

상만리 오층석탑(전남 유형문화재 10호)
높이 3.8m, 약간 기울어져 있다.
탑이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것으로 불교의 상징적인 예배의 대상이다.
우리나라 최남단인 진도지방까지 탑이 만들어졌음을 알려주는 좋은 예이다.

여귀산 등산로 근처에 있는 탑 공원

여귀산 등산로 근처에 있는 탑 공원
출처 : 조인기
글쓴이 : joingi61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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