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전라·제주 여행

[스크랩] 진도 여행 후기 1

약초2 2007. 1. 17. 15:27
 
 

진도(珍島) 여행후기


1.날 짜: 2006년 12월 23일(토)~24일(일): 1박2일 여행& 산행.

2.날 씨: 맑음.

3.일 정: 진도대교→접도(남망산 산행)→세방(세방낙조)→신비의 바닷길→동석산 산행→운림산방→왕온의묘→상만리 오층석탑→금골산 산행→백조도래지→진도대교

4.여행후기 & 산행후기

  전혀 예상치 못한 토요일(2006.12.23) 휴가로 2박 3일(23~25)의 여유가 생겼다. 막상 떠나려 해도 마땅히 갈 곳이 생각이 나질 않는다. 미리 휴가라고 귀뜸이라도 해줬으면 미리 공부도 하고 마음 편히 떠날 수 있는데 퇴근시간에 토요일도 쉬라고 연락을 받았으니 그것도 감지덕지 하고 받아드릴 수밖에.

  집에서 행복한 고민을 거듭한 끝에 한 번도 답사하지 않은 진도를 무작정 떠나기로 하고 준비물(준비물이라고 해봤자 디카, 지도책, 여벌 옷 뿐이다)챙기고 23일 새벽에 집에서 출발한다. 집에서 진도군청 사이트에 들어가서 잠깐 들여다보긴 했어도 기억이 잘 나질 않는다.

  서해안고속도로 목포 나들목을 빠져 나와 2번 국도를 타고 강진 쪽으로 진행을 하다 해남 쪽(13번 국도)으로 방향을 틀다가 이상(멀게)하다 느껴 지도를 다시 보고 마산면 쪽으로 방향을 바꿔 황산면, 문내면을 거쳐 진도대교에 도착했다. 진도 가는 도중에 알았는데 서해안고속국도 목포 나들목에서 2번 국도를 이용하다 삼호면(삼거리)에서 2번 국도가 아니라 49번 국지도로 이용해야 진도 가는 지름길이라는 걸 알았다. 에고 시간 버리고 기름 값 버리고.


※진도, 어떤 곳인가(월간 산 2005년 3월호 P.443)

  전남 진도군(珍島郡)은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큰 섬으로서 한반도 서남단에 자리하고 있다. 동쪽은 명량해협(鳴梁海峽) 일부를 사이에 두고 해남반도로 이어지고, 서쪽은 황해, 남쪽은 제주해협으로 트여 있으며, 북쪽은 명량해협을 사이에 두고 해남반도의 일부인 화원반도(花源半島) 및 신안군의 여러 섬들과 마주한다. 진도군은 본섬인 진도를 포함해 상조도·하조도·가사도 등 45개 유인도와 185개 무인도 등 230개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진도는 호남정맥에서 분기한 ‘땅끝기맥’이 황해에 이르러 서서히 침강하여 이루어진 다도해에서 가장 큰 섬이다. 동쪽에는 첨찰산(尖察山·485.2m)·덕신산(德神山·385m)이 자리하고,

서쪽에는 지력산(智力山·325m), 남쪽엔 동석산·급치산(221m)·여귀산(457m)이, 북쪽에는 금골산(金骨山·193m)·설매봉(雪梅峰) 등 200~400m 정도의 낮은 산지가 많이 있다. 동북부는 구릉성 산지가 분포하고, 서남부는 급경사로 인한 침식해안으로서 경관이 좋다. 하천은 석교천·인지천·이십오천·진도천·의신천 등이 있으나, 대부분 3~6km로 짧고, 첨찰산에서 발원한 의신천만이 10km 정도를 이룬다. 농토는 유기질이 많아 매우 비옥하다.

  삼한시대에는 마한에 속했고,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인진도군(因珍島郡)이었다.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에는 진도현으로 개칭하면서 무안군(茂安郡)의 영현이 되었다. 고려 초기에는 나주(羅州)에 속하였다가 뒤에 진도군으로 독립하였으며, 995년(성종 14) 옥주군(沃州郡)이라 했다. 조선 태종 때 해남현과 합하여 해진군(海珍郡)이라 하였고, 1437년(세종 19) 해남과 분리하여 진도군이라 하였다.

  1906년(고종 43) 명산면(命山面)을 영암군(靈巖郡)에, 삼촌면(三寸面)을 해남군에 이속시켰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안창면(安昌面)·가좌면(加佐面)·도초면(都草面)을 무안군에 편입시켰다. 1973년에는 군내면(郡內面) 수역리(壽域里)·수류리(水流里)·산월리(山月里)·해창리(海倉里)를 진도면에 편입시켰고, 1979년 진도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83년 조도면(鳥島面) 만재도리(晩才島里)와 가사도리(加沙島里)의 일부가 신안군으로 편입되었다.

  2005년 현재 진도읍·군내면·고군면·의신면·임회면·지산면·조도면 등 1읍 6면으로 이루어졌다. 면적은 430.6㎢, 인구는 37,408명(2004년 현재)이다. 군청소재지는 진도읍 성내리다.

  진도군 일대의 해역은 대륙붕 지역이고, 북상하는 쿠로시오해류의 영향으로 어족이 풍부하며, 해수 오염이 없어 해조류양식에 유리하다. 섬으로만 이루어진 군이지만 주민의 일부가 반농반어에 종사하고, 대부분의 주민은 농업을 전업으로 한다. 주요 농산물로는 쌀·콩·참깨·고구마를 비롯해 마늘·대파·배추 등 각종 채소류가 생산된다. 특산물로는 구기자·돌미역·돌김·멸치·유자와 진도홍주가 있다. 진돗개(천연기념물 제53호)는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진도는 예로부터 문화와 예술의 고장으로 이름 높았다. 한국의 대표적 민요인 진도아리랑을 비롯해 남도지방에서 불리는 창이나 민요 등 어디를 가나 부녀자들의 노래 가락을 들을 수 있다. 진도지방에서 불리는 민요는 김매기 등 농사를 하면서 부르는 농업요가 대부분 고, 닻배노래 등 고기를 잡으면서 부르는 어업요나 유희요 등도 많다. 또한 조선 후기 남종 문인화의 대표적 화가인 소치 허유~미산 허형~의재 허백련~남농 허건으로 이어지는 화가와, 서예가 소전 손재형 등이 진도 출신이다. 매년 4~5월 신비한 바닷길이 열리는 진도군 고군면 회동리와 모도의 간조육계도에서 영등제가 열린다.

  1984년 진도대교 완공으로 비로소 육지와 연결되었다. 진도대교를 지나온 18번 국도가 섬 중앙을 지나 남쪽의 임회면 팽목항까지 이어진 다음, 의신면~고군면을 연결하여 동남부를 돌고 있다. 서부는 801번, 803번 지방도가 면마다 연결되어 있다. 진도 내의 교통은 편리한 편이다. 임회면 팽목항에서 조도와 관매도행 배편이 있다.


  사진에서 많이 보아온 진도대교를 실제로 보니 감개무량하다. 더구나 똑같이 옆에다 다리 하나를 더 세워놨으니 더욱 더 멋지게 보인다. 차를 세워두고 사진을 찍으니 카메라 앵글에 다 들어오질 않는다. 그래서 진도로 건너가서 사진을 찍는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진도대교 전경은 망금산(111.5m) 정상의 녹진 전망대에 오르면 진도와 해남 화원반도 사이의 울돌목(명량)이 한눈에 다 들어와서 여기에서 찍어야 좋은 사진을 얻을 수 있다.


※진도대교

  정유재란 때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12척의 배로 왜선 330여척을 무찌른 명량대첩지, 울돌목위에 놓여진 우리나라 최초의 사장교(길이 484m, 폭 11.7m)로 1984년 10월 18일 준공되었으며, 2005년 12월 15일 제2대교가 개통되었다.


  태초에 진도를 섬으로 태어나게 한 울돌목의 너비는 한강과 비슷한 294m 내외. 진도의 나이든 주민들은 ‘울두목’이라 부른다. 울두는 목구멍인 인후(咽喉)를 말하는 ‘울대’의 사투리다. 물살이 하도 거세서 붙은 지명이다. 특히 사리 때면 해협을 빠져나가는 물살이 소용돌이치면서 부딪치는 소리가 마치 동물들 울부짖음처럼 우르릉거리는데, 주민들은 20리 밖에서도 그 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조류는 시속이 최고 13노트(24km)로 이는 배가 제대로 운행할 수 없는 유속이다. 울돌목에 걸린 진도대교도 처음 계획은 현수교였지만, 빠른 물살 때문에 양쪽 해안에 69m의 강철교탑을 세워, 강철 케이블로 다리를 묶어 지탱하는 사장교 형식을 채택하였던 내력이 있다. 이 때문에 일찍이 전문가들로부터 세계적인 조류(潮流) 발전지로 꼽혀왔고, 얼마 전 정부는 여기에 조류발전소를 건립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고고학자들은 전망대가 있는 망금산 성터에서 백제와 통일신라시대 토기 파편을 발견하기도 했다. 황해와 남해를 잇는 바닷길인 울돌목은 고대부터 중요한 역사적 현장이었던 것이다.

  신라시대에 완도에 청해진을 연 장보고도 이곳의 중요성을 놓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후백제 세력이 고려의 왕건 군대에게 끝까지 저항하던 곳도 진도였는데, 이때 울돌목을 중요한 방어선으로 여겼을 것이다. 또한 고려 후기에 대몽항쟁을 주도했던 배중손 장군의 삼별초군도 이 물길을 방패막으로 삼았다.
누구보다 울돌목의 조류를 극적으로 이용해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조국을 구한 이는 조선의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다.

  충무공이 1597년 정유재란 당시 단 12척의 배로 130여 척의 적선과 당당히 맞서 물리친 명량대첩의 현장이 바로 여기다. 이순신이 일본의 흉계로 통제사에서 물러난 뒤 원균은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일본 수군과 대전했으나 7월14일에 벌어진 칠천량에서 대패하여 조선 수군은 해상권을 상실한다. 당시 대부분의 조선 전함은 박살이 났으며, 원균도 목숨을 잃었다. 이에 선조는 8월30일 백의종군 중이던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한다. 백의종군에서 풀려난 이순신이 우수영에 도착했을 때 남은병력은 9명의 장교와 그보다 적은 6명의 병사가 전부였다. 이순신은 약 보름간의 강행군 끝에 12척의 전선과 120명의 군사를 모아 가까스로 수군의 모습을 갖춰 다시 전투 대비를 한다. 그러나 칠천량에서 전멸하다시피 대패한 뒤라 장수나 병사들은 지레 겁을 먹고 제대로 싸우려들지 않았다. 이순신은 두려움에 떠는 병사들에게 말한다. 「죽고자 하면 살 것이요,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必死卽生, 必生卽死).」

  이 무렵 이순신은 해남 우수영의 진을 진도의 벽파진을 옮겼다가 다시 우수영으로 이동하는데, 이는 울돌목의 빠른 조류와 물때를 면밀히 조사해 작전을 짜기 위해서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9월16일 일본 수군이 해남 어란포를 떠나 울돌목으로 공격해왔다. 구루시마 미치후사(來島道總)와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가 지휘하는 적은 133척의 대함대였고, 반면 조선 수군은 12척에 새로 한 척을 보탠 13척이 전부였다.
  울돌목을 지나는 북서해류는 가공할 만한 유속이었다. 울돌목은 조류가 잠시 멈추는 정조기(停潮期)의 짧은 시간을 제외하고는 전투가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물살이 빨랐다. 더구나 조수 이동이 심한 보름사리라 물살은 어느 때보다 거칠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적보다 물살을 바르게 읽고 있었다. 좁은 해협에서 일자진(一字陣)으로 적을 맞이한 이순신은 바뀌는 조류를 이용해 순식간에 일본 군선 31척을 무찔렀다. 대승이었다. 아군의 피해는 미미했다.

이 명량해전은 원균이 대패한 칠천량해전 이후 남해안에서 승승장구하던 일본 수군의 기를 꺾어 놓았을 뿐만 아니라, 남해에서 황해로 돌아 한양으로 진격하려던 일본군의 수륙병진계획을 송두리째 부숴 버린 전투로, 정유재란의 판세를 뒤집는 일대 전환점이 되었다. 죽음의 해협에서 일자진으로 풍전등화의 조국을 되살린 이순신 장군의 결단을 생각하면 심장의 박동은 울돌목 바위에 부딪쳐 튀어 오르는 조류만큼 세차게 뛴다. 열세를 극복하고 전세를 완전히 뒤집은 충무공의 명량해전을 목격한 진도의 민초들은 수많은 전설을 생산해냈다. 진도 여인들에게 군복을 입혀 손을 잡고 「강강술래」를 하도록 하여 군인이 많은 것처럼 위장했다는 망금산 강강술래 전설, 산봉우리를 이엉으로 엮어 노적봉을 만들고 군량미가 많은 것처럼 위장하였다는 군내면 독굴산 전설, 녹진 옆 분토리에서 백토(白土)를 바닷물에 풀어 쌀뜨물로 위장했다는 전설 등이 그것이다. 당시 울돌목 양안에 철쇄를 설치해 일본 군선을 격퇴했다는 영웅담도 후대에 확대 재생산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설화라 한다. 발달한 현대 과학으로도 설치 자체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설로 치부되던 일이 역사적 사실로 드러나는 경우도 있었다. 울돌목에서 남쪽으로 10여 리 떨어진 고군면 도평리엔 주인을 알 수 없는 떼무덤이 있다. 이 묘역엔 모두 232기의 무덤이 있는데, 창녕 조씨나 김해 김씨 등 진도를 기반으로 한 씨족 인물들 16기와 일부 무연고자들의 무덤을 제외한 200여 기는 정유재란 때 순절한 사람들의 것이다. 현재는 당당히 「정유재란 무명열사 묘역」으로 불리지만, 이전만 해도 떠도는 전설일 뿐이었다. 이 묘역의 무덤들이 명당도 아닌데다가 울돌목이 있는 북향을 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희생자 묘역임이 분명하다는 게 이곳을 조사한 목포대 박물관 조사팀의 지적이다. 당시 이순신 장군은 명량해전에서 대승을 거두었으나 곧바로 북서 밀물을 타고 신안 당사도로 빠지는 바람에 우수영을 비롯한 해남과 진도 주민들이 적군 잔당의 보복에 시달렸던 상흔이기도 하다.


※명량대첩

  1597년(선조 30) 9월 정유재란 때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이 울돌목(명량)에서 일본 수군을 쳐부순 명량대첩(鳴梁大捷)은 정유재란의 전환점을 마련해준 해전이다. 조선군은 12척의 전선으로 133척의 적과 싸웠고, 왜선 31척을 격파했다. 명량해전의 승리로 칠천량해전 이후 남해안에서 승승장구하던 일본의 수륙병진계획은 차질이 생겼고, 조선은 다시 해상권을 회복하였다.

  명량해전의 현장인 울돌목은 해남반도와 진도 간의 좁은 해협을 이루며 바다의 폭은 한강 너비 정도의 294m 내외다. 물길은 동양 최대의 시속을 지닌 11~13노트의 조수가 흘러 배를 운행하기 힘든 곳이다. 한편, 1984년 10월18일 진도군 녹진과 해남군 학동 사이의 울돌목에 놓인 진도대교는 길이 484m, 폭 11.7m의 사장교다. 현재 다리를 넓히는 마무리공사가 한창이다.

 고군면 벽파진에 세워진 이충무공 벽파진전첩비는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을 기리기 위해 1956년에 세운 비석으로, 커다란 바위 언덕에서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비석 머리에는 쌍룡

이 휘감은 채 양편으로 머리를 내놓고 있는데 매우 사실적이다. 비문은 노산 이은상이 짓고 글씨는 진도 출신 서예가 소전 손재형 선생이 썼다. 명량해협의 동쪽 길목인 벽파진은 진도대교가 놓여 지기 전만 하더라도 진도와 육지를 오가는 관문이었다.


  진교대교에서 잠시 역사의 현장을 회상하다 벽파진으로 가지 않고(명량해협의 동쪽 길목에 자리한 벽파진은 해남반도와 진도를 잇는 배가 드나들던 나루다. 조선시대 해남에서 진도를 들어서는 길은 해남 우수영에서 녹진으로, 또는 황산면 삼지원(三枝院)에서 벽파진을 잇는 물길을 이용하는 두 갈래가 있었다. 녹진은 아마 군사적 목적으로 주로 쓰였을 것이고, 진도로 유배 오는 벼슬아치는 물론이고 육지로 드나드는 진도의 사람과 물자는 모두 물살이 상대적으로 약한 이곳을 지났다. 이런 사정은 1984년 진도대교가 놓이기 전까지만 계속되었다. 그런데 대동여지도에 이곳을 벽파진이 아니라 벽파정이라 기록한 것으로 보아 제법 이름 날리던 정자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허나 지금은 흔적조차 남지 않은 벽파정(碧波亭)터를 찾는 일은 아쉽다. 벽파진엔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 있다. 울돌목 동쪽 물길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큼직한 바위 언덕에서 왜선들이 몰려들던 동쪽을 바라보며 서있다.  글은 노산 이은상이 짓고, 글씨는 서예가 소전 손재형이 썼는데, 소전 선생은 진도 출신 명필가다. 20세기 중반인 1956년에 세웠으니 비교적 최근 것임에도 불구하고 오가는 이들의 눈길을 붙잡으며 제법 보물급으로 대접받는 까닭은 매우 사실적으로 조각된 비석머리의 쌍룡과 힘이 넘치는 글씨 덕이리라.) 접도로 향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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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조인기
글쓴이 : joingi61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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