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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화성행궁 사진 1 (19.09.13)

약초2 2019. 9. 14. 14:41

수원 화성행궁

2019년 9월 13일(금. 추석) 답사


수원문화재단


화성행궁 정문


■ 화성행궁 소개

 

정조의 원대한 꿈과 효심이 느껴지는 화성행궁은 국내 행궁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며 경복궁만큼 아름다운 궁궐로 손꼽힙니다.

 

사적 제478호 화성행궁은 1789년(정조 13년) 수원 신읍치 건설 후 팔달산 동쪽 기슭에 건립 되었다. 행궁(行宮)은 왕이 지방에 거동 할 때 임시로 머물거나 전란(戰亂), 휴양, 능원(陵園)참배 등으로 지방에 별도의 궁궐을 마련하여 임시 거처하는 곳을 말하며 그 용도에 따라서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전쟁과 같은 비상시에 위급함을 피하고 국사(國事)를 계속 하기 위해 마련된 행궁으로는 강화행궁, 의주행궁, 남한산성 내의 광주부행궁 등이 있고, 온양행궁은 휴양을 목적으로 설치된 행궁으로 조선 세종 이래 역대 왕이 즐겨 찾던 곳이다. 그리고 왕이 지방의 능원(陵園)에 참배할 때 머물던 행궁이 바로 화성행궁이라 할 수 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현륭원으로 이장하면서 수원 신도시를 건설하고 성곽을 축조했으며 1790년에서 1795년(정조 14∼19년)에 이르기까지 서울에서 수원에 이르는 중요 경유지에 과천행궁, 안양행궁, 사근참행궁, 시흥행궁, 안산행궁, 화성행궁 등을 설치하였다. 그 중에서도 화성행궁은 규모나 기능면에서 단연 으뜸으로 뽑히는 대표적인 행궁이라 할 수 있다.

 

화성행궁은 평상시에는 화성부 유수(留守)가 집무하는 내아(內衙)로도 활용하였다. 정조는 1789년 10월에 이루어진 현륭원 천봉 이후 이듬해 2월부터 1800년(정조 24년) 1월까지 11년간 12차에 걸친 능행(陵幸)을 거행하였다.

 

이때마다 정조는 화성행궁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행사를 거행하였다. 뿐만 아니라 정조가 승하한 뒤 순조(純祖) 1년(1801) 행궁 옆에 화령전(華寧殿)을 건립하여 정조의 진영(眞影)을 봉안 하였고 그 뒤 순조, 헌종, 고종 등 역대 왕들이 이곳에서 머물렀다.

 

화성행궁은 576칸으로 정궁(正宮) 형태를 이루며 국내 행궁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낙남헌을 제외한 시설이 일제의 민족문화와 역사 말살 정책으로 사라졌다. 1980년대 말, 뜻있는 지역 시민들이 복원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꾸준하고 적극적인 복원운동을 펼친 결과 1996년 복원공사가 시작되어 마침내 482칸으로 1단계 복원이 완료되어 2003년 10월, 일반에게 공개 되었다.









화성행궁 정문 신풍루


신풍루(新豊樓)

 

신풍루는 화성 행궁의 정문으로 1790(정조 14)에 누문 6칸을 세우고 진남루(鎭南樓)라고 하였다. 1795년 정조는 신풍루로 고치라고 명하여 조윤형으로 하여금 다시 편액을 쓰게 하였다. '신풍'이란 이름은 일찍이 한나라 고조가 '풍 땅은 새로운 또 하나의 고향' 이라고 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정조에게 있어 화성은 고향과 같은 고장이라는 의미로 편액을 걸게 한 것이다. 1795년 을묘 행차시에 신풍루 앞에서는 정조가 친히 참석하여 화성부의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고 굶주린 백성에게는 죽을 끊여 먹이는 진휼 행사가 벌어지기도 했다.





1874년(고종 11)에는 2만 냥을 들여 행궁 지붕을 고쳤다는 기록이 있다. 고종 때 까지도 잘 유지되어 왔다고 볼 수 있으나 구한 말 개화의 물결과 함께 수원 최초의 서양식 의료기관인 자혜의원이 1910년 세워지면서 행궁 일부가 파손되었다. 하지만 이 시기에 촬영된 사진에는 신풍루 뒤로 좌익문이 보이고 중양문과 유여택, 정당인 봉수당과 장락당, 내당인 복내당 등의 건물이 그대로 남아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화성행궁 건물까지도 완전히 사라진 것은 자혜의원이 도립병원으로 바뀌면서 크게 증축되었고 수원 농업시험소 등 여러 기관이 설치되고 주변에 경찰서와 민가가 들어서기 시작한 1923년 이후라고 할 수 있다. 또 이 부근에 신풍초등학교가 들어서면서 낙남헌 건물이 초등학교 교사로 사용되기도 했다. 1989년에는 화성행궁 복원 추진위원회가 설립되고 1991년에는 수원 의료원 건물이 이전되면서 1993년에 수원시에서 화성행궁 복원을 위한 장기계획을 수립하였다. 이에 따라 2003년 복원공사가 완공되어 옛 모습을 되찾았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좌익문(左翊門)

 

좌익문은 중양문 앞에 있는데, '좌익은 곧 곁에서 돕는다'는 뜻으로 내삼문을 바로 앞에서 도(道)와 행궁을 지키는 중삼문(中三門)이다. 1790년 완성되었고 편액은 정동준이 정조의 명을 받들어 썼다. 남쪽 행각의 끝은 외정리소와 연결되어 있다.





중양문(中陽門)

 

양문은 궁궐 건축의 삼문 설치 형식에 따라 행궁의 정전인 봉수당을 바로 앞에서 가로막아 굳게 지키는 역할을 하는 내삼문(內三門)이다. 1790년(정조 14)에 완성되었으며, 중앙의 정문과 좌우의 우협문, 좌협문으로 이루어져 있고 문 좌우로 긴 행각을 두어 출입을 통제 하였다.1795년 봉수당 진찬례 때 봉수당 앞으로는 정조와 혜경궁을 비롯한 왕실의 종친과 대신들이 자리 하였고, 중양문 밖으로 대문을 활짝 열어 승지와 사관, 각신이 반열을 이루었던 바 있다.



봉수당(奉壽堂)

 

봉수당은 화성 행궁의 정전(正殿)건물이자 화성 유수부의 동헌 건물로 장남헌(壯南軒)이라고도 한다. 1795년(정조 19) 정조는 혜경궁의 회갑연 진찬례를 이 건물에서 거행 하였다. 이 때 정조는 혜경궁의 장수를 기원하며 '만년(萬年)의 수(壽)를 받들어 빈다'는 뜻의 봉수당이라는 당호를 지어 조윤형으로 하여금 현판을 쓰게 하였다. 이 건물은 원래 1789년(정조 13) 8월 19일 상량하고 9월 25일 완공 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파괴된 봉수당은 1997년 복원 되었다. 정조는 혜경궁 회갑연을 마치고 9년 뒤인 1804년에 혜경궁의 70수연(壽宴) 진찬을 봉수당에서 갖겠으니 사용할 물건을 잘 보관하도록 지시하였다. 진찬례 행사는 조선시대 최대의 궁중행사로 당시의 커다란 화제거리였으며, 왕실의 종친과 신하들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참여 하였다.






정조 19년 윤2월 13일 혜경궁의 회갑연인 진찬례가 화성행궁의 봉수당에서 거행되었다. 이 행사에는 혜경궁의 내외빈 82명, 양로연시 수가(隧駕)노인이 영의정 홍낙성(洪樂性, 78세)·우의정 채제공(蔡濟恭, 76세) 등 15명과 이들의 아들·손자 등 23명, 그리고 화성부 노인 전 오위장 최상후(崔尙厚, 84세)·전 참의 이석조(李奭祚) 등 384명이 연회에 참석하였다. {원행을묘정리의궤} 봉수당진찬도의 그림을 보면, 건물에는 거북무늬의 발이 쳐져 있고 그 앞으로 장막이 드리워졌으며, 건물 앞으로 여러 악공들이 음악을 연주하고 기생들의 춤이 벌어지는 주변에 여러 대신과 무관들이 바른 자세로 둘러앉은 모습이 그려져 있다.

 

한편 [낙남헌 양노연도]에 나타난 당시 행사 모습을 보면, 건물 한 가운데 임금의 옥좌가 있고 그 좌우에 각 두 줄로 5인씩 앉아 있으며, 가운데에는 두 사람이 서서 악기를 연주하고 있다. 건물 밖 기단 위에도 두 줄로 11명이 서 있고, 기단 아래 마당에는 한 가운데에 5명씩 7줄을 이루어 사람들이 앉아 있으며, 그 좌우로 각 3열의 군사들이 도열하고 있다. 가장 뒷쪽에도 큰 북을 앞에 놓고 53명의 사람이 서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날 양노연에 참여한 노인 중 70세 이상과 61세된 노인에게는 각각 비단 1필씩을 하사하고, 현륭원 아래에 사는 주민에게는 복호 2년을, 그리고 부성(府城) 내외민에게는 복호 1년을 각각 가급하였다. 그리고 화성성역을 담당한 우의정 채제공에게는 호피(虎皮)를, 화성유수 조심태에게는 가자(加資)를, 이유경(李儒敬)에게는 갑옷을 하사하였다.





장락당



장락당(長樂堂)

 

장락당은 1795년 을묘원행중 혜경궁의 침전으로서 1794년(정조 18) 화성 성역 중에 완성되었으며, 봉수당 남쪽에 있는데 봉수당의 서남쪽 지붕과 겹쳐 있으며, 동향으로 세워졌다. 장락당은 전한의 도읍인 장안성의 궁전이었던 장락궁에서 이름을 따 왔다. 혜경궁의 만수무강을 기원하였던 정조는 한나라 태후의 거처였던 장락궁의 이름을 따 행궁의 내전인 장락당의 편액을 직접 써서 걸었다. 실제로 1795(정조 19) 을묘원행시에 혜경궁은 이곳에서 머물렀는데, 정민시가 지은 상량문에서는 '빛나는 궁궐이 처음 이루어지는 때를 당하여 다행히 태후께서 먼저 납시는 것을 보았네'. 라고 하였다.


복내당



복내당(福內堂)

 

복내당은 행궁의 내당(內堂)으로 정조가 행차시에 머물렀던 곳이며 장락당 남쪽에 위치하였다. 상량문은 1796년(정조 20) 11월 민종현이 지었다. 복내당의 이름은 '복은 안에서 생겨나는 것이다'라는 뜻이다. 원래 복내당은 1790년(정조 14)에 수원부 신읍치소의 내아(內衙)로 건립하였고, 1794년(정조 13)에 세웠다. 좌우 두 채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유여택




유여택(維與宅)

 

유여택은 평상시에 화성유수가 거처하다가 정조가 행차시에 잠시 머무르며 신하를 접견하는 건물이었다. 유여택은 복내당 동쪽 행각과 외정리소 사이에 있다. 유여택이라는 이름은 『시경』 중에서 주나라 천명을 받아 나라를 크게 하고 집을 주었다는 데서 따온 것으로 정조의 입장에서는 화성 유수를 임명하여 내려 보내는 곳이라는 의미가 된다. 원래 유여택은 1790년(정조 14)에 건립하고 은약헌(隱若軒)이라 하였다가, 1796년(정조 20)에 증축하면서 유여택으로 이름을 바꿔 달았다. 건물은 동향으로 왼쪽에 공신루(供宸樓) 1칸을 덧붙여 휴식 공간을 마련하였다. 1795년 행차시에 정조는 유여택에서 각종 행사에 대한 보고를 받고 하교를 내렸다.





외정리소(外整理所)

 

정리소는 장차 1795년 을묘원행에서 펼쳐질 각종 행사를 준비하기 위해 1794년 12월에 설치한 임시 기관이었는데, 화성 성역이 끝난 후 외정리소라 하여 정조를 비롯한 역대 임금이 행차할 때 화성 행궁에서의 행사 준비를 담당하는 관청이 되었다. 처음에 정리소는 장용내영에 설치하였는데, 1796년(정조 20) 화성 행궁이 완성되면서 유여택 앞에 외정리소를 세우고 '외정리아문(外整理衙門)'이란 편액을 달았다. 외정리사는 호조판서가 겸임하는 것이 상례였으나 화성의 경우는 화성 유수가 겸직 하였다.










비장청





서리청(書吏廳)

 

서리는 문서의 기록 및 수령, 발급을 담당하는 아전으로서 서리청은 그들이 사용하는 건물이다. 비장청 앞에 위치했으며 남향이다. 예전의 금도청(禁盜廳)건물을 이청으로 쓰게 하고, 그 건물을 증축하여 사용하였으며 1795년 을묘원행시에는 수라간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남군영(南軍營)

 

남군영은 장용외영의 기마병이었던 친군위(親軍衛)가 좌, 우열로 각 100명씩 입직숙위하는 건물이다. 신풍루 좌우에 있는데 1789년(정조 13)에 처음 지었고, 1794년(정조 18) 좌우에 익량을 증축하여 모두 62칸의 규모를 갖추었다. 1798년(정조 22) 장용외영 군영의 일대 개편에 따라 좌, 우열은 파하고 1,2,3번의 입번 순서를 정하여 매년 각 100명씩 양 군영에 나누어 배치하였다.







본문의 내용은 수원문화재단 www.swcf.or.kr/ 에 실린 내용입니다.


사진 2부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