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여행 첫 번째 이야기
서울 중랑천 첫 번째 이야기
「이제 시작이다!」
1.날 짜: 2008년 5월 5일
2.날 씨: 맑고 쾌청함. 다소 더운 날씨.
3.동행인원: 2명
4.여행코스: 하계동 학여울아파트→중랑천→응봉교→뚝섬유원지역
5.후기
스트라이다를 며칠 전에 구입한 후 처음으로 자전거를 타려고 중랑천에 나왔다.
집에서 가까운 하계동 학여울아파트에서 중랑천으로 진입하여 중랑천을 신나게 달린다.
학창시절 타보고 이제야 실질적으로 타보니 기분이 너무나 상쾌하다. 맑은 하늘에 더없이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 너무 좋다!
때 마침 중랑천 자전거도로의 양 옆으로 유채꽃이 만발하여 중랑천과 조화를 이룬 모습을 만끽하며 신나게 달리니 기분이 너무 좋다.
어린이날이라 많은 사람들로 붐비어 요리조리 피하면서 마음껏 패달을 밟아보니 그렇게 상쾌할 수가 없었다.
오랜만에 타보는 자전거라 히프가 아프지만 그래도 그건 문제될 것이 없었다. 그저 마냥 좋은 뿐이다.
점심때가 돼서 뚝섬유원지 잔디밭에서 점심을 먹는데 갑자기 걸려온 전화로 친구를 만나기
위해 뚝섬유원지역에서 지하철을 이용하여 이수역과 사당역에서 환승하여 약속장소인 낙성대역에 도착하는데 스트라이다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고 손쉽게 이동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낙성대역에 도착을 하여 접은 자전거를 펼치려고 하는데 손잡이 부분이 갑자기 부러지는 것이다. 너무 황당한 나머지 할 말을 잃어버렸다.
어쨌든 수습을 하긴 해야 하는데….
한 쪽 손잡이(오른쪽)가 부러져서 고정이 되질 않아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다 결국 되지를 않아 자전거 타기를 포기하고 자전거를 구입한 곳에 되돌아감으로써 첫 날 자전거여행을 마쳤다.
나중에 자전거를 구입한 곳에서는 너무 미안하다고 하면서 새 것으로 교환해주는 성의를 보여서 그나마 찝찝했던 마음을 풀 수가 있었다.
그래서 나의 자전거여행의 첫 번째 자전거인 백색 스트라이다는 단 하루만 타고는 아쉬운 이별을 했다.
다음부턴 오랜지색 스트라이다로 전국을 누빌 것이다.
6.특기사항
①자전거여행 첫 번째로 중랑천 답사
②스트라이다 손잡이 부분이 부러져서 새 것으로 교환함
7.경 비
①스트라이다: 360,000
②자물쇠: 5,000
③아이스크림: 700
④교통비: 2,000
⑤합계: \367,700
학여울청구아파트에서 중랑천으로 들어섰다.
아쉽게 하루만에 작별한 백색 스트라이다와 중랑천 유채밭의 모습
중랑천 자전거도로변 보리밭의 모습
오랜만에 보는 허수아비가 정겹다.
이정표
멋진 숲
이정표
우측 지하로 들어가야 살곶이다리를 만날 수 있다.
사적 160호인 살곶이다리 표지석과 살곶이다리 모습
살곶이다리 전경
살곶이다리 전경
응봉역 앞에 설치되어 있는 성동구 자전거도로 지도 모습
청계천 자전거도로 구간별 거리표 | ||
구간 |
좌안 |
우안 |
현지점(응봉교) |
0.0 |
0.0 |
살곶이공원 |
3.4 |
3.4 |
마장2교 |
6.2 |
6.4 |
고산자교 |
7.6 |
7.8 |
※고산자교~도심구간: 자전거이용 금지 |
중랑천 자전거도로 구간별 거리표 | ||
구간 |
좌안 |
우안 |
현지점(응봉교) |
0.0 |
0.0 |
군자교 |
10.0 |
8.0 |
장평교 |
12.8 |
10.8 |
중랑교 |
14.6 |
12.6 |
월릉교 |
17.4 |
15.4 |
월계교 |
19.4 |
17.4 |
녹천교 |
22.6 |
20.6 |
창동교 |
24.4 |
22.4 |
상계교 |
26.6 |
24.6 |
세월교 |
30.0 |
28.0 |
노원교 |
32.0 |
30.0 |
삼도교 |
35.0 |
33.0 |
한강 자전거도로 구간별 거리표 | |
구간 |
왕복거리(km) |
행주대교 |
49.6 |
방화대교 |
45.6 |
가양대교 |
39.0 |
성산대교 |
32.4 |
양화대교 |
29.2 |
서강대교 |
25.0 |
마포대교 |
22.0 |
원효대교 |
19.6 |
한강대교 |
16.8 |
동작대교 |
12.6 |
반포대교 |
10.4 |
한남대교 |
6.6 |
동호대교 |
4.0 |
현지점 |
0.0 |
현지점-성수대교 |
4.4 |
성수대교-영동대교 |
8.8 |
영동대교-청담대교 |
10.2 |
청담대교-잠실대교 |
14.4 |
잠실대교-올림픽대교 |
17.4 |
올림픽대교-천호대교 |
19.4 |
천호대교-광진교 |
19.9 |
광진교-강동대교 |
32.3 |
▲응봉역 앞에 설치되어 있는 각 구간별 이정표
뚝섬유원지 잔디밭의 백색 스트라이다 모습
중랑천과 한강의 합류지점에 설치되어 있는 지도 모습
※중랑천(中浪川)에 대하여 1
경기도 양주시[도락산]에서 발원하여 의정부를 지나 남류하여 한강으로 흘러드는 하천.
중랑천은 한강의 제 1지류로, 경기도 양주시에서 발원해 의정부시를 거쳐 서울특별시 성동구 금호동과 성수동 1가의 강변북로 다리에서 한강과 합류하는 하천이다.
경기도부분의 중랑천은 지방하천으로 분류되며 서울특별시에 접어들면 국가하천으로 등급이 바뀐다.
또, 동부간선도로가 서울특별시 구간부터 중랑천과 나란히 뻗어있다. 서울특별시 내의 하천 중에서 제일 길다.
길이 20km. 최대너비 150m. 유역면적 288㎢. 경기와 서울의 경계 부분은 서원천(書院川)이라 하고 도봉구 창동(倉洞) 부근에서는 한내[漢川]라고 한다. 서울의 시계 밖을 흐르는 부분 700m를 제외하고 국가하천으로서는 19.3km이다. 동대문구 이문동(里門洞) 부근에서는 중랑천 혹은 중랑개[中浪浦]가 되어 계속 남류하다가 군자교(君子橋), 장안교(長安橋)를 지나서 청계천과 만나 서쪽으로 꺾여 한강으로 들어간다.
옛날에도 청계천과 중랑천의 하천오염은 심했던 모양으로 서빙고(西氷庫)에서 하던 채빙(採氷)을 두모포(豆毛浦:현재 玉水洞) 쪽으로 장소를 옮겼다는 기록이 있다. 1979년에 중랑천 하수처리장이 건설되었다.
중랑천의 지류
중랑천의 지류로 청계천(淸溪川), 도봉천(道峰川), 우이천(牛耳川), 묵동천(墨洞川), 면목천(面牧川), 방학천, 부용천, 호원천, 광사천 등의 지류가 있다.
범람 사고
1998년 5월 2일 중랑천이 범람하여 9일간 7호선의 운행을 중단시켰다.
[인터넷에서 발췌]
※중랑천(中浪川)에 대하여 2
중랑천은 경기도 양주군 주내면 신북리 북쪽 계곡에서부터 시작되어 남쪽으로 흐르면서 의정부시의 광쟁이 개울과 백석천(白石川)을 합치고 서원천(書院川)을 합한 물줄기는 다시 도봉구에 와서 한천(漢川)과 당현천(堂峴川)을 이룬 후 바야흐로 상봉동과 면목동에 이른다.
이렇듯 우리에게 익숙한 하천의 지류들을 포함 총 18개의 지류를 갖고 있는 중랑천을 성수동과 금호동의 경계에서 한강으로 흘러들어 가는데 그 길이가 자그마치 45.3km나 되는 하천으로서 서울의 그 어느 하천보다도 길다. 현재 중랑천(中浪川)이라 부르고 있는 명칭 외에 시대와 지역적 특성에 따라 송계천(속계), 중량포(中梁浦, 中良浦), 충량포(忠良浦) 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웠다.
먼저 송계천(松溪川)이라는 명칭은 냇물 동쪽에 송계원(松溪院)이 있는데서 연유되었음을 왕조의 기록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태종실록의「조선 태종 9년 5월에 태조의 제사를 올리기 위해 건원릉에 나가려 홍인문 밖에 이르렀을 때 앞선 신하가 살피고 돌아와 "송계원 서쪽천의 물이 넘쳐 건널 수 없습니다."라고 아뢰자 오던 길을 되돌아갔다」는 것과,「세종 2년 4월에 상왕(태종)이 철원 등지로 행차하려는 도중 송계원평에서 말을 멈추었다」라는 세종실록의 기록이다. 이로써 송계라는 중랑천의 옛 이름은 그 역사적 유래가 조선조 초기로 거슬러 올라감을 알 수 있다. 한편 중량천이나 충량포라는 이름들은 하천의 형세가 넓은 물가를 이루고 있는 특성에 따라 붙여진 이름들로 보여진다. 이들 모두는 일정한 표기를 갖고 있진 않으나 왕조실록과 동국여지비고, 대동지지 등의 기록에서 표기만 다를뿐 음이 비슷한 명칭으로 나타나고 그 위치도 동일한 지점이어서 송계나 속계, 중량포나 충량포는 다같이 중랑천을 일컬었던 명칭임을 알 수 있다.
조선의 시조 태조가 자신의 묘자리를 건원릉이라 칭하고 후손들도 장차 그곳을 장지로 삼으라 일렀다. 이에 5대 문종의 현릉에서 18대 현종의 경릉에 이르기까지 9개의 능을 이룬게 오늘날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이 되었다. 이 동구릉을 참배한다는 명분으로 효종은 중랑천 부근의 넓은 모래사장에 자주 행차하였다는 기록이 전해온다. 그것은 병자호란 후 효종이 봉림대군이었을 시절에, 형 소현세자와 함께 심양에 8년간이나 볼모로 잡혀 있었던 그 굴욕을 씻고자, 북벌계획을 세우고 군을 정비하면서 북벌군의 군사훈련을 지켜보기 위함이었다. 이처럼 역사적 사연이 서려있는 울분을 풀기위한 곳으로도 이용되었던 중랑천에 얽힌 뒷 얘기는 이외에도 많다. 동구릉이나 사릉, 광릉 등이 있어 역대 왕들의 능행이 잦았는데 이를 위해 특별히 석교를 놓았다는 기록이 전해온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재건시 송계교의 석재를 헐어 사용하는 바람에 고종 이후엔 능행길이 바뀌게 되었다는 얘기도 있다.
한편 예나 지금이나 서울에서 강원도 방면으로 나가는데 있어 교통연결에 큰 구실을 하고 있는 중랑교는 1934년에 가설된 것이지만 다리가 놓여진 것은 조선 초기 훨씬 이전의 일이다. 이러한 중랑천을 둘러싼 풍취가 세종실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온다. "여름 밭두둑에 바람 잔잔하니 밀 이삭이 잘 자라고 가을 들판에 비가 흡족하니 배꽃이 향기롭습니다. 오늘의 한번 노는 일 농꾼들도 기뻐하는 것이 시월의 타작마당은 풍년이 틀림없습니다. 「夏 龍同로徵麥穗場(하룡동징맥수장) 秋郊雨足稻花香(추교우족도화향) 一遊正合三豊望(일유정합삼풍망) 準擬豊登十月場(준의풍등십월장)」 이는 당시 세종과 상왕이 송계 언덕에서 매사냥하는 것을 구경하고 중량포에서 점심을 들며 마련한 술자리에서 병조참의 윤회(尹淮)가 지은 것으로 상왕이 흡족케 했다는 7언절구시이다. 이런 기록이나 넓은 들판을 가로지르는 내라는 뜻으로 이름 붙여진 중량천(中梁川)의 표기로 보아 옛날 우리 중랑천변은 대단히 넓은 들판으로 한가롭고 풍광 좋은 농경지대 였음을 익히 짐작할 수 있다.
건원릉에 모신 태조의 능 참배를 위해 태종이 수시로 행차하였는데 후대의 왕들도 자주 능행을 하면서 지금의 월릉교 밑에 묻혀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송계교의 중요성은 더욱 높아지게 되고 이에 따라 자주 보수를 하게 되었다. 송계교를 목교에서 석교로 개축할 때 인근 마을의 장정은 모두 부역으로 동원되었다. 부역자 중 중이(仲伊)라는 사람은 눈이 먼데다가 열여섯살 되는 딸 하나를 데리고 사는 홀아비였다. 국가의 명이라 부역을 거역할 수도 없는 처지고 양주 관아에서 이미 수차례나 인원 점검을 해왔기 때문에 도망칠 수도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이를 알게 된 그의 딸은 자신이 아버지 대신 부역을 하겠노라며 양주 관아를 찾았으나, 처녀의 몸으로 돌 나르는 일을 할 수 없다하여 관아로부터 거절당했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중이의 딸은 관아 앞에서 여러 날을 지새며 아버지 대신 부역시켜 줄 것을 간청하자, 관아로부터 드디어 부역 허가가 떨어졌는데 반드시 남장을 해야 하는 조건이었다. 그녀는 관아에서 시키는 대로 남장을 하고 참여했지만 문제는 생리현상이었다. 동료들과 일하다가도 배변시는 앉아서 하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었지만 배뇨시에는 남자들과 달리 앉아서 해야 하므로 금방 여자임이 탄로날 지경이었다. 전전긍긍하던 그녀는 대나무를 잘라서 옷 속에 넣어 관을 통해 서서 배뇨를 할 수 있게 하고 가능한한 수분섭취를 줄여서 배뇨 횟수를 줄이도록 노력하였다. 이런 눈물겨운 사연을 전해들은 양주 관아에서는 마침내 중이의 부역을 해제시킴으로써 중이를 대신해서 부역하던 그녀의 딸도 눈먼 아버지 곁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남자인 줄만 알고 지내던 동료들이 그를 중낭자(仲郎子)라고 불렀으나 그가 사실은 남장 여인이라는 것을 알고 난 다음부터 그녀를 중랑(仲狼)이라고 불렀고, 중랑(中浪)의 어원이 됐다는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다.
유적지
사실 중랑천의 주변 유적과 유물은 너무 많다. 다른 지류들의 유적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왜냐하면 중랑천 본류를 끼고 옆의 지천들에 유적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무엇이 있는지 나열해 보도록 하겠다.
○녹천마을
조선시대에 이 마을이 홍수로 인해 폐허가 되자 마을대표들이 모여 회의를 하고 있었는데, 이때 뒷산에서 사슴이 내려와 마을 앞 중랑천에서 목욕을 하고 간 후부터 농사가 잘 되고 마을일도 순조로와졌다. 이때부터 마을 이름을 녹촌으로, 촌주의 별명을 녹촌대감으로 불렀다. 그 뒤 이 마을에는 병조판서였던 세종대왕 6대손인 녹촌대감의 별당이 지어졌다. 녹촌의 또 다른 유래는 이곳 산의 모양이 "사슴이 냇물을 마시는 모습 같다"하여 지어진 이름이라는 말도 있다. 현재 이 마을에는 사슴이 목욕을 하고 갔다는 곳은 남아 있지만 그 자리에 노인정이 위치하고 있어[녹천]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녹천마을은 그 이름만큼이나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간직하고 있어 고향의 푸근함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태릉,강릉,삼군부청헌당,연령군신도비,충숙이공 영정,충숙이공 신도비,이명신도비,월계동각심제,한글고비 등등>
[우원식 전 의원 인터넷 글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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