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유산 남한산성
본성(동문→북문→서문→남문→동문) 종주 후기
1.답사 날짜: 2021년 11월 17일(수)
2.날씨: 맑으나 시야가 좋지 않음.
3.답사 인원: 나 홀로
4.답사 코스: 동문→장경사신지옹성→동장대터→북문→연주봉옹성→서문→수어장대→영춘정→남문→제1남옹성→남장대터→시구문→동문 [원점회귀]
5.답사 시간
-11:19 동문 주차장 착 / -11:24 발(답사 시작)
-11:55 장경사신지옹성
-12:08 동장대터
-12:40 북문
-12:51~13:05 점심식사
-13:21 연주봉옹성
-13:29 서문
-13:46 수어장대
-14:03 영춘정
-14:20 남문
-14:41 제1남옹성
-14:56 남장대터
-15:30 시구문
-15:35 동문 주차장 착 [원점회귀. 4시간 11분 산행]
6.답사 후기
이번이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아무튼 남한산성에 자주 왔다는 이야기이다. 예전에는 엑셀에다 저장해가며 기록했는데 어느 순간 직업이 바뀌면서 산행도 못함과 동시에 기록하는 것도 중단되었다.
여하간 가장 최근에는 2019년 11월 5일 단풍 보러 왔었다. 이때가 남한산성 단풍 절정기였다. 이번에 다녀온 남한산성은 조금 늦어서 겨울로 들어서는 시기였다.
남한산성 본성(옹성 5군데 포함)을 종주하기로 하고 승용차를 이용했는데 어디에서 원점회귀를 할까 고민하다가 동문 주차장에 도착, 다행히 한 자리가 비워있어 그곳에 주차를 했다. 주차장 요금은 무료이고 승용차 9대(장애인 주차 1구역 포함)가 주차할 수 있다.
남한산성에는 유료 주차장이 4개소(남문, 로터리, 중앙, 센터) 있는데 주차요금은 후불제이다.
남한산성은 남한산(南漢山·522m)과 청량산(淸凉山·462.6m) 사이에 걸쳐 있는 석성(石城)이다. 주봉은 수어장대(守禦將臺)가 있는 청량산이다. 남한산성은 북한산성과 함께 서울을 남북으로 지키는 산성이다. 통일신라 문무왕 때인 672년 쌓은 주장성의 옛터를 활용해 조선 인조 2년(1624) 축성 공사를 시작해 2년 뒤 완공했다.
성벽 외부는 급경사인데 반해 내부는 넓고 평탄한 분지로 되어 있어 조선 왕실의 보장처(保障處 : 전란 때 임금과 조정이 대피하는 곳)로 안성맞춤이었다. 그래서 산성 내에는 행궁을 비롯해 인화관 · 연무관 등이 차례로 들어섰고 1963년 1월 1일 문화재보호법이 제정 · 시행되면서 사적 제57호로 지정됐다. 그리고 지난해 6월에는 우리나라 11번째로 유네스코(UNESCO)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남한산성 성곽은 내성(5개의 옹성 포함) 8.949km와 외성(신남성 포함)을 합한 전체 길이는 12.402km에 달한다. 남한산성 일주는 약 7.7km(5코스)의 거리다. 오늘 일주는 동문에서 시작해서 북문, 서문, 남문을 거쳐 다시 동문에 도착하는 원점회귀 코스를 선택했다.
[참고자료: 남한산성 탐방로. 출처: 남한산성 홈피]
▶1코스 (거리 3.8Km / 소요시간 1시간 20분)
산성로터리 – 북문(0.4km) – 서문(1.1km) – 수어장대(0.6km) – 영춘정(0.3km) – 남문(0.7km) – 산성로터리(0.7km)
▶2코스 (거리 : 2.9km / 소요시간 : 60분)
산성로터리 – 영월정(0.4km) – 숭렬전(0.2km) – 서문(0.7km) – 수어장대(0.6km) – 산성로터리(0.9km)
▶3코스 (거리 : 5.7km / 소요시간 : 2시간)
경기도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 – 현절사(0.1km) – 벌봉(1.8km) – 장경사(1.5km) – 망월사(1.1km) – 동문(1.0km) – 경기도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
▶4코스 (거리 : 3.8km / 소요시간 : 1시간 20분)
산성로터리 – 남문(0.7km) – 남장대터(0.6km) – 동문(1.1km) – 지수당(0.5km) – 개원사(0.3km) – 산성로터리(0.6km)
▶5코스 (거리 : 7.7km / 소요시간 : 3시간 20분)
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 – 동문(0.6km) – 동장대터(1.1km) – 북문(1.6km) – 서문(1.1km) – 수어장대(0.6km) – 영춘정(0.3km) – 남문(0.7km) – 동문(1.7km) – 경기도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
동문인 좌익문(左翼門) 옆으로는 조그만 계곡(번천)이 있다. 포곡식 산성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이다. 산성 내 도로로 인해 성벽이 단절된 유일한 구간이기도 하다. 도로를 건너야 성벽으로 갈 수 있다.
그런데 보통 동쪽이 오른쪽이고, 서쪽이 왼쪽인데, 남한산성은 거꾸로다. 이는 한양 도성에서 봤을 때 왼쪽이 동쪽이기 때문이다. 동문은 낮은 지대여서, 계단을 쌓고 그 위에 성문을 축조했다. 따라서 물자의 수송은 제11암문(시구문)을 이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동문에서 북문까지
동문→장경사신지옹성→동장대터→북문
1시간 16분 산행 (11:24~12:40)
이제 산행에 들어갔다.
차도(장경사, 망월사로 가는 포장도로)로 가지 않고 성곽을 따라 가야 하기 때문에 동문이 있는 곳으로 올라갔다.
이내 동문에 도착했다.
남한산성 동문(東門 / 좌익문. 左翼門) 남한산성에는 동 ․ 서 ․ 남 ․ 북에 4개의 대문이 있는데, 동문은 성의 남동쪽에 위치하며, 남문과 함께 가장 많이 사용했던 성문이다. 조선 선조 때 보수하였고, 인조 2년(1624)에 다시 건립하였으며, 정조 3년 성곽 개축시 함께 보수하였다. 이때 성문마다 이름이 하나씩 붙여졌는데 동문은 좌익문(左翼門)이라 하였다. 행궁을 중심으로 국왕이 남쪽을 바라보며 국정을 살피니, 동문이 좌측이 되므로 좌익문이라 한 것이다. 이 동문은 낮은 지대에 축조되었기 때문에 계단을 쌓고 그 위에 성문을 축조하여 우마차의 통행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물자의 수송은 수구문 남쪽에 있는 11암문이 이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출처: 현지 안내판] |
※본문에 「수구문 남쪽에 있는 11암문」이라 적혀 있는데 수구문은 시구문을 뜻하고 시구문은 제11암문이다.
※「좌익문 남쪽에 있는 시구문(11암문)이 이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로 고쳐할 것이다.
동문을 앞 ․ 뒤로 구경하고 본격적으로 성곽 답사에 나섰다.
동문에서 성곽을 따라 약 8분 정도 올라가니 「송암정터(松岩亭址)」라는 이정표가 나온다. 송암정은 우리말로 「솔바위 정자」란 뜻이라고 안내하고 있다. 남한산성 일대는 수도권 최대 소나무 군락지로 알려져 있다. 다양한 모양의 소나무가 여기저기 군락을 이룬 모습을 볼 수 있다.
『옛날 황진이가 금강산에서 수도를 하다 하산하여 이곳을 지나는데 남자 여럿이 기생들과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 중 술에 취한 한 사내가 황진이를 희롱하려 하자 황진이는 개의치 않고 오히려 불법을 설파하였는데 이 때 그 무리 중 감명을 받은 기생 한 사람이 갑자기 절벽으로 뛰어내려 자결하였는데, 그 후 달 밝은 밤에는 이곳에서 노래 소리와 통곡소리가 들려왔다고 한다. 이 바위에 서 있는 고사목(소나무)은 정조가 여주 능행길에 대부 벼슬을 내려 「대부송」이라고 부르는 소나무이다.』라고 안내판에 적혀 있다.
잠시 성곽 너머에 있는 송암정을 확인하는데 커다란 암반이 절벽을 이루고 있고 그곳에 멋진 소나무가 있다.
「송암정터」 안내판이 있는 곳을 지나면 곧바로 큰 바위가 성벽 가까이에 있어 약간 비좁은 길을 겨우 빠져 나갈 수(여름철이면 옷을 얇게 입어서 쉽게 빠져 나갈 수 있다.) 있는 곳을 지난다. 남한산성 본성 성곽길에서 유일무이한 좁은 길이다.
성곽길은 다시 넓고 평평해졌다.
성곽은 동장대터까지 조망되는데 지형에 따라 멋진 S라인을 이루고 있다.
송암정터 안내판에서 약 8분 정도 올라가면 장경사 주차장이 나온다.
장경사 주차장으로 막 내려서는 곳에 남한산성 제1암문(장경사 암문)이 있다.
성벽에는 4대문 외에 16개의 암문이 있으며, 성벽 위에는 1,940여 개의 타로 구성된 여장이 구비되고, 각 타에는 원총안과 근총안이 설치됐다. 성벽 안쪽에는 125개에 달하는 군포가 구축되어 있다. 군포와 군포 사이에는 90여 군데의 소금을 묻어둔 매염 터와 숯을 묻어둔 매탄 터가 있었고, 성 내에는 유사시에 대비해 충분한 식량과 군수물자가 보관되어 있었다.
암문은 성문의 한 종류로, 일반 성문과 달리 외부에서 관측이 잘 되지 않은 은폐된 곳에 마련한 출입구다. 남한산성의 특징 중 하나가 우리나라 성곽 중 가장 많은 암문이 있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성곽의 규모가 크고 굴곡이 많은 지형과 성 외부에 외성이나 포대, 옹성 등과의 원활한 통행을 위해서다.
남한산성에 현재 남아 있는 암문은 모두 16개. 본성에 11개, 봉암성에 4개, 한봉성에 1개 등이다. 너무 많아 이름 붙이기 쉽게 아예 번호로 매겼다. 제2암문과 제6암문만 개구부(開口部)가 평거식(平据式)이고, 나머지는 전부 홍예식이다.
제1암문은 실제 답사날짜(21.11.17.<수>)때는 장경사 주차장으로 그냥 내려가서 보지 못했다. 나중에 집에 와서 사진을 확인하니 제1암문을 놓쳤던 것이다. 그래서 2주 연속 남한산성 답사의 계기도 되었지만.
제1암문은 일주일 후(21.11.23.<화>) 남한산성 외성(한봉성, 봉암성) 답사 때 확인했다.
동문에서 장경사 방향으로 답사(올라갈 때)할 때는 제1암문을 놓치기 쉽다. 그러나 반대방향인 장경사 주차장에서 동문방향으로 답사(내려갈 때)할 때는 제1암문이 잘 보인다.
제1암문을 빠져나가 보았다. 잡풀이 무성하고 길 흔적은 찾아 볼 수가 없다. 예전에는 1암문으로 나가 큰골을 거쳐 16암문으로 이동하는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을 것으로 추정된다.(21.11.23일 답사)
제1암문(장경사 암문)을 보고 내려서면 넓은 장경사 주차장이 나온다.
장경사(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5호)는 성내에 존재했던 9개(망월사, 옥정사, 장경사, 개원사, 한흥사, 국청사, 천주사, 동림사, 남단사)의 사찰 중 당시의 모습으로 남아 있는 유일한 사찰이다.
▼ 남한산성 장경사 단풍 사진 보기: https://blog.daum.net/joingi61/15965334
이윽고 장경사에 도착했다. 인조 2년(1624) 남한산성을 고쳐 쌓을 때 승려 벽암각성을 팔도도총섭으로 삼고, 전국의 승려들을 번갈아 징집해 성을 쌓게 했다. 축성 후에도 승군들이 주둔했다. 장경사는 이들의 숙식을 위해 인조 16년(1638)에 건립한 절이다. 1894년 갑오경장으로 승군제도가 없어질 때까지 전국에서 뽑힌 270여 명의 승려가 교대로 산성을 보수하거나 경계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무인카페도 있고, 걷다가 제법 쉬어갈 만하게 조성돼 있다. 넓은 주차장도 있다.
장경사 주차장을 벗어나 3분 정도 올라가니 첫 번째 군포지(軍鋪址)가 나온다.
군포지 안에는 참나무 종류의 나무가 높이 솟아 있다.
군포지(軍鋪址) 군포(軍鋪)는 성을 지키기 위한 초소 건물이다. 중정남한지(重訂南漢誌. 1847) 기록에 따르면 남한산성 내에 125개소의 군포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는 한군데도 남아 있지 않다. 발굴조사 결과 군포는 약간 높고 평탄한 대지 위에 있었고,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로 건축했다. 건물의 모양은 맞배지붕에 기와를 얹고 토석벽을 두른 형태로 초소기능에 맞게 정면이 트여 있다. [출처: 현지 안내판] |
5분 정도 올라가니 제2암문이 나온다.
제2암문(장경사신지옹성 암문)은 장경사신지옹성으로 출입하던 곳으로 본성과 연결부에 설치된 이 암문은 폭이 1.3m, 높이가 1.42m로서 다른 암문에 비해 비교적 큰 편이다. 본성에 설치된 11개 암문 대부분이 문 밖에서 보면 문 윗부분이 무지개 모양으로 반쯤 둥글게 만든 홍예문이지만 제6암문과 이 암문은 윗부분이 「ㅡ」자로 만든 평거식 문이다. 또한 다른 암문은 원성 축조시 함께 만들어져 사전에 계획된 것인 반면, 이 암문은 장경사신지옹성을 쌓으면서 신축한 암문으로 보인다.
[출처: 현지 안내판]
제2암문을 통해 본성의 5개 옹성 중 첫 번째인 장경사신지옹성를 보기 위해 밖으로 나가 보았다.
곧바로 안내판이 나온다.
장경사신지옹성 (長慶寺信地甕城) 옹성은 일반적으로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성문 밖으로 한 겹의 성벽을 더 둘러쌓은 이중의 성벽을 말한다. 그러나 남한산성의 옹성은 성벽으로 접근하는 적을 3면에서 입체적으로 공격하고, 요충지에 대한 거점 확보를 위해 성벽에 덧대어 설치한 시설물로 다른 성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남한산성에는 모두 5개의 옹성이 있는데, 장경사신지옹성은 한봉성과 봉암성에 대한 방어를 주목적으로 설치되었으며, 둘레가 159m이다. 옹성 끝에는 2개소의 포대가 설치되었고 포루의 좌측 벽에는 이방이라 불리는 무기나 화약을 저장하는 시설이 있었다. 본성과 연결되는 지점에는 전투 시에 성내로 출입할 수 있도록 암문을 설치하였다. [출처: 현지 안내판] |
안내판을 잠시 살펴보고 끝부분까지 가 보았다.
한봉성과 봉암성의 중간 정도에 위치한 장경사신지옹성은 두 개(한봉성, 봉암성)의 성이 함락될 경우 본성을 지키기 위한 보루인 것 같다. 끝 부분에 2개의 포대가 있다. 그리곤 외로운 한그루의 나무가 장경사신지옹성을 지키고 있다.
2암문을 다시 출입하여 본성에 합류했다.
다시 오름길을 올라간다. 6분 정도 올라가니 2번째 군포지가 나온다. 이번에는 예전에 세운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이후 2분 정도 더 힘겹게 올라가니 동장대터가 나온다.(12:07)
동장대터 (東將臺址) 장대란 지휘와 관측을 위해 군사적 목적으로 지은 누각 건물로 남한산성에는 5개의 장대가 있었다. 이곳은 동장대가 있던 곳으로 성 동쪽에 있다하여 동장대라 불린다. 이곳에는 남한산성에 주둔하던 수어청에 소속된 5영 중 좌영장을 지휘하던 곳이다. 동장대는 인조 2년 산성 수축시에 설치되었고 누각도 함께 건립되었으나 18세기 초에 붕괴된 것으로 보인다. 18세기 중엽에 이르러 남장대와 서장대는 다시 수축하였으나 북장대와 동장대는 다시 짓지 않았다. 한봉성과 연주봉옹성의 축성으로 동장대나 북장대는 상징적인 의미만 있을 뿐 군사적인 실효성이 없어졌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출처: 현지 안내판] |
남한산성에는 동서남북으로 각 방향에 장대를 두었고, 후대에 외성인 봉암성에도 외동장대를 두어, 5개소의 장대가 있었다.
벌봉이 바로 앞에 보인다. 벌봉을 마주보는 본성 성벽이 여장(女墻)이다. 여장이 훼손된 채 보존되고 있으며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여장은 성벽 위에 낮게 쌓은 담으로, 이곳에 몸을 숨겨 적을 향해 효과적으로 총이나 활을 쏠 수 있게 만든 시설이다. 남한산성 여장은 하부는 석재로, 상부는 다른 성곽에서 보기 드문 전돌로 축조했다. 여장은 다른 용어로 여담, 여첩, 치첩, 타, 여원 등이라고도 한다.
동장대터에서 벌봉(봉암)으로 이어지는 봉암성곽을 잠시 보다가 이내 출발했다.
봉암성과 벌봉을 답사하려면 시간이 꽤 걸릴 것 같아 봉암성은 한봉성과 함께 하루 시간 내서 답사할 예정이다.
군포지를 지나니 제3암문(봉암성 암문)이 나온다.
봉암성암문은 다른 문에 비해 제법 크다. 봉암성은 본성의 동장대 부근에서 북동쪽의 능선을 따라 벌봉(일명 봉암) 일대에 쌓은 외성을 말한다. 벌봉은 해발 512.2m로, 남한산성 정상인 청량산보다 높다. 남한산성의 외성에 있고 다른 봉우리이기 때문에 청량산이 남한산성에서 가장 높다고 한다. 벌봉에서는 남한산성의 서쪽 내부와 동벽이 넓게 조망된다. 봉암성에도 모두 4개의 암문과 2개의 포대 및 치성 등이 구축되어 있다. 봉암성암문은 홍예문으로 본성과 봉암성을 연결하는 주출입구로 매우 큰 편으로 문루만 없을 뿐 성문의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봉암성 암문(제3암문)을 나가보니 장비들이 널려 있었다. 벌봉에서 3암문으로 이어지는 탐방로 정비사업(2021.09.13~2021.12.11)을 하고 있다.
되짚어 성 내로 들어왔다.
이어 군포지가 나오고, 내리막이 나온다. 내리막길은 돌계단으로 되어 있어 조심스럽게 내려갔다. 좌측으로는 로프 난간이 설치되어 있다.
내리막을 다 내려가면 제4암문(북암문)과 군포지가 나온다.(12:21)
이 문은 북문의 보조기능을 하도록 설치한 것으로, 홍예문으로 폭이 좁다. 밖으로 나가 성벽을 보니 이끼가 많이 붙어 있다. 그 옆에 제2 군포터도 있다.
이제 성 안으로 다시 들어가 잠시 편안한 길을 걷는다.
이내 현절사(0.5km)로 갈 수 있는 삼거리를 지난다.
현절사는 아직 미답지이다.
현절사는 병자호란 때 척화를 주장하다 청에 끌려가 갖은 곤욕을 당한 후 참형에 처해진 오달제∙윤집∙홍익한 등 삼학사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1688년(숙종 14년) 남한산성 내에 세운 사당이다. 1693년 현절사로 사액되었으며, 1700년 척화대신이었던 김상헌과 정온을 함께 배향하면서 현 장소로 옮겨지었다.
현절사 삼거리를 지나(12:29) 10분 정도 내려가니 가림막이 나오면서 공사 안내판이 나온다.
남한산성 북문 해체보수공사이다. 2021.04.21~2022.04.15까지 공사기간이다.
포장도로로 내려와 북문 해체보수를 하고 있는 현장을 잠시 가림막 틈새 사이로 봤다.(12:40)
북문에서 서문까지
북문→연주봉 옹성→서문
49분 산행 (12:40~13:29. 점심시간 포함)
북문은 병자호란 당시 성문을 열고 나가 기습공격을 감행했던 문이다. 싸움에 패하지 않고 모두 승리한다는 뜻에서 「전승문(全勝門)」이라 했다. 병자호란 당시 영의정 김류의 주장에 의해 군사 300여 명이 북문을 열고 나가 청나라 군을 공격했으나 적의 계략에 빠져 전멸하고 말았다. 이를 「법화골전투」라고 하는데,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 내의 최대의 전투이자 최대의 참패였다. 정조 때 이를 잊지 말고 앞으로는 꼭 승리하자는 의미로 전승문이라 한 것으로 전한다.
북문(全勝門) 해체보수공사현장 옆으로 올라가 성곽길에 다시 합류했다.
공사현장에서 9분 정도 진행하니 북장대터가 나온다. 이곳에도 안내판이 있는데 오래돼서 글씨를 판독하기 힘들다.(12:49)
북장대터에서 성곽을 따라 1~2분 정도 내려가니 다시 포장도로와 만난다. 이곳에 벤치 2개가 설치되어 있어서 점심(김밥)을 먹었다.
이후 포장도로를 따라 조금 걷다가 우측의 계단을 통해 성곽길로 올라갔다.(13:10)
6분 정도 올라가니 제5암문(연주봉옹성 암문)이 나온다.
5암문은 연주봉옹성으로 연결되는 통로로 서쪽에는 성벽에서 2m 정도 돌출된 치가 있고 북쪽으로는 직선길이 150m 정도의 연주봉옹성이 연결된다. 개구부 외부는 홍예식, 내부는 평거식이다. 통로의 길이는 5m 정도로 천장은 장대석 5매로 덮여 있다.
암문을 통해 연주봉옹성으로 향했다.
남한산성의 옹성은 요충지에 대한 거점 확보를 위해 성벽에 덧대어 설치한 시설물이다. 남한산성에는 모두 5개의 옹성이 있다. 남쪽에 제1, 2, 3남옹성, 북쪽에 연주봉옹성, 동쪽에 장경사신지옹성이 설치돼 있다.
북서쪽 요충지인 연주봉을 확보하기 위하여 설치한 연주봉옹성은 아차산 북쪽과 남양주 일대의 한강, 이성산성과 하남시 춘궁동 일대가 잘 보인다. 성 내부의 지역도 관측되는 중요한 요충지이다. 근래의 발굴조사 결과 옹성 끝에서 포대로 추정되는 유구가 확인되어 고증을 통하여 포대를 복원하였다. 연주봉 옹성의 둘레는 315m이다.
연주봉옹성을 본 후 다시 5암문을 통해 본성에 들어와 4분 정도 진행하니 서문(右翼門)이 나온다.(13:29)
서문에서 남문까지
서문→수어장대→영춘정→남문
51분 산행 (13:29~14:20)
남한산성 4개의 대문 중 가장 작은 서문(右翼門)은 산성을 처음 쌓았을 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정조 3년(1799)에 다른 문과 같이 개축하여 우익문이라 칭하였다. 행궁을 중심으로 국왕은 남쪽을 바라보며 국정을 살피니, 서문이 행궁 우측에 있어 우익문이라 하였다. 경사가 급하여 물자를 이송하기는 어려웠지만, 광나루나 송파나루 방면에서 산성으로 진입하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 병자호란 때(인조 15년<1637> 1월 30일) 인조가 소현세자와 함께 서문을 통해 청나라 진영으로 가서 화의를 맺고 항복을 하기도 했다.
서문 인근에 전망대가 있는데, 위례신도시와 롯데월드타워, 한강, 그리고 남산 서울타워를 모두 조망할 수 있다. 특히 롯데월드타워와 한강, N서울타워와 남한산성 서문이 일렬로 정렬되어 있어 옥수동 달맞이 공원, 응봉산 팔각정과 함께 서울의 야경 포인트로 유명하다.
서문의 안 ․ 밖을 둘러보고 다시 성내로 들어와 성곽길을 이어갔다.
소나무 군락을 이룬 곳에 벤치가 설치되어 있어서 여름철에 쉬어 가기 좋은 곳이 나온다.
남한산성 소나무숲은 2016년 제16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생명상(대상)을 수상했다.
성곽을 따라 아름드리 소나무가 수도권 최대의 숲으로 남아 있고, 백제 때부터 군사 요충지로 역사적 가치가 높아 조선시대부터 보호되어 왔으며 일제 강점기에 훼손될 위기에서 마을 주민 303인이 금림조합을 결성하고 도벌을 막아 지키고 가꾸어 지금의 소나무 숲을 이루었다. 남한산성 소나무는 약 60ha 면적에 14,000본이 있다.
이어 포장도로와 만나 한동안 포장도로를 따라 진행하는데 「9번 탐방로 일부구간 출입통제」 안내판이 나온다.
아래어정약수터에서 서문화장실 사이 구간으로 2020.08.01일부터 2022.12.31일 까지 통제한다고 적혀 있다.
서문에서 약 10분 정도 올라가면 수어장대 입구가 나온다. 입구에는 사적 제57호 남한산성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조금 더 올라가면 수어장대와 청량당에 대한 안내판도 나온다. 그리고는 수어장대가 나온다.
수어장대 가기 전에 청량당이 나온다. 이곳은 성벽을 쌓을 때 억울하게 죽은 축성담당자였던 이회 장군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그의 두 부인과 실제로 성벽을 쌓았던 벽암대사(1575~1660)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고 하는데 문이 잠겨 있어서 볼 수 없었다.
청량당을 지나면 수어장대(守禦將臺)가 나온다.
남한산성의 수비는 총융청이 맡아하다가 성이 완성되면서 수어청이 따로 설치되었다. 수어장대란 요새 방어를 맡은 수어사가 지휘, 명령하는 곳이며, 건립 당시에는 단층 누각으로 「서장대」라 하였다. 영조 27(1751년)에 유수 이기진이 2층 누각을 증축하면서 외부 편액은 수어장대, 내부편액은 「무망루(無忘樓)」라 이름 했다.
무망루는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겪은 시련과 8년간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 귀국해 북벌을 이루지 못하고 승하한 효종의 원한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영조가 지은 것이다.
1751년에 쓴 현판은 수어장대 2층 누각에 있고 항상 잠겨 있어서 일반인은 볼 수가 없었으나 1989년 전각을 건립하여 전각 안에 현판을 새로 설치하여 일반인이 볼 수 있게 하였다. 수어장대 옆에 있다. 현판(무망루. 無妄樓)을 모시기(?) 위한 전각은 이곳에서 처음 봤다.
수어장대는 1624년(인조 2) 남한산성을 축조할 때 지은 4개의 장대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 있는 중요한 건물이며, 수어청의 장관(將官)들이 지휘와 관측을 위한 군사적 목적으로 지어진 건축물로 적군을 사방에서 바라 볼 수 있도록 다락처럼 높이 짓고 문과 벽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남한산성의 대표적인 봉우리는 수어장대가 있는 청량산(482.6m)이고, 남한산성의 최고봉은 남한산(522m)이다.
남한산성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인조 14(1636년)에 청나라 오랑캐가 쳐들어 온 사건인 병자호란이다. 그로인해 47일간의 모진 항쟁, 결국엔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항복을 하였던 우리의 비통한 국사가 서린 곳이 남한산성이다. 하지만 현재의 남한산성은 아픈 역사를 뒤로하고 다시 튼튼히 재축성하여 휴식과 여가를 즐길 수 있는 삶의 생활공간이다.
남한산성의 축성은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시대보다 훨씬 이전인 신라 문무왕 때 처음 성을 쌓고 「주장성」이라 했으며, <동국여지승람>에는 「일장산성」이라 기록되어 있다.
수어장대 바로 옆에는 탁지부에서 설치한 삼각점이 있는데 대한제국 말기 탁지부(조선 말기 재무행정을 관장하던 중앙관청)에서 토지조사사업을 시행하기 위하여 경기도와 경상북도의 일부 지역에 지적세부측량의 기준이 되는 삼각점을 설치했다. 경술국치(1910.08) 후 조선총독부에서 전국적인 토지조사사업을 시행하기 위하여 한반도에 일제히 삼각점을 설치하면서 탁지부에서 설치한 삼각점이라고 한다.
탁지부에서 설치한 삼각점은 현재 전국에 10여 점이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지적사적 측면에서 볼 때 매우 귀중한 유물로 삼각점으로는 우리나라 최초로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광주시 향토문화유산 기념물 제7호)하여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수어장대에서 내려와 성곽에 복귀한 후 다시 성곽길을 걷는다.
잠시 포장도로를 따라 가다 보니 우측에 매탄처(埋炭處)가 나온다.
매탄처는 전쟁이 일어났을 때 사용 할 전략물자인 숯을 묻어 놓은 장소를 말한다. 『중정남한지(重訂南漢志)』「군수(軍需)」에는 「숯을 가마니에 담아서 묻은 것이 94군데, 24,192석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 매탄처는 그 중 300석의 숯이 보관되어 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남한산성에서는 3년은 소금을 굽고, 중간 1년은 숯을 사서 연례적으로 성첩과 군포사이에 묻었다고 전해진다.
[출처: 현지 안내판]
매탄처에서 1분 정도 진행하니 제6암문(서암문)이 나온다.(13:55)
제6암문은 성벽의 흐름방향과 달리 입구가 북서쪽을 향하고 있어 외부에서 쉽게 관측되지 않도록 하였다. 또한 북동쪽의 성벽을 돌출하여 암문으로 접근하는 적을 측면에서 효과적으로 공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원성에 설치된 12개 암문의 외측 개구부(開口部)는 대부분 홍예식(虹霓式)이지만 제2암문과 더불어 이 암문의 개구부는 평거식(平据式)이다. 인조 15년(1637) 1월 23일 한밤중에 습격해 온 청병을 크게 물리친 곳이라 하여 이 암문 부근을 「서암문 파적지」라 부른다.
[출처: 현지 안내판]
서암문을 나가 보았다. 성 내부 쪽은 폭이 넓은데 외부 쪽은 폭이 좁았다. 성 밖의 탐방로도 잘 닦여 있었다.
다시 성 안으로 들어와 성곽을 걸었다.
내리막길에 데크가 깔려 있고 소나무군락이 잠시 이어지는데 소나무의 가지들이 하나같이 성 밖으로 향하고 있어 멋진 소나무 터널을 이루고 있다.
나무계단은 이내 끝나고 좌측으로 정자가 보여 잠시 올라가봤다.
팔각정 입구에 119안내판이 세워져 있는데 영춘정이라고 적혀 있다.
팔각정에는 현판이 걸려 있지 않아서 119표지목에 적힌 영춘정 글자가 없더라면 팔각정의 이름을 모른 체 지나갈 뻔 했다.
영춘정(迎春亭) 주변엔 온통 소나무가 자라고 있어 전망대의 구실은 못하고 그저 쉼터의 역할 만 하는 것 같다.
영춘정에서 완만한 내리막길을 약 15분 진행하니 남문이 나온다.(14:20)
등산객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남문은 정문에 해당되는 성문으로 남한산성 4개의 문중 가장 크고 웅장하다. 정조 3년(1779)에 기존의 성문 자리에 새로이 문루를 마련하면서 성문 이름을 지화문(至和門)이라 명명하였다. 유일하게 현판이 남아 있는 문이다.
『동설(凍雪)이 이 같으니 군민(軍民)이 다 죽겠구나. 내가 친히 노천에서 빌리라. 이 외로운 성에 들어와 믿는 것이란 하늘뿐이온데, 눈비가 이 같으니 형세가 얼어 죽을 것만 같소이다. 제 한 몸 아까울 것이 없사오나 백관만성(百官萬姓)이 무슨 죄이오리까. 바라건대 잠깐 개이게 하사 우리 군민을 살리소서.』
<중정남한지>에 나오는 당시 인조가 하늘을 향해 한 말이다. 1637년 1월 30일 인조가 무릎을 꿇고 읊조리듯 항복을 선언한 치욕의 현장이기도 한 곳이다.
청나라와 싸우기 위하여 남한산성에 들어올 때는 해가 떠오르는 남문(지화문)이었고, 항복하러 갈 때는 해가 지는 서문(우익문)을 나왔으니 조선의 흥망이 해가 뜨고 지는 것과 궤를 같이 했다.
남문 밖으로 나가봤다.
성 안은 광주시, 밖은 성남시로 산성은 자연스럽게 시 경계를 이루고 있다.
지화문(남문)은 성남으로 통하는 관문 역할을 하고 있으며 성문 앞에 식재된 느티나무가 볼 만하다. 4주의 느티나무 거목(450년 추정)은 성남시 보호수로 지정(2006.6.20.)되어 보호 관리되고 있다.
그런데 한 그루의 느티나무 고목은 베어버리고 밑둥만 남아 있다. 2017년 11월 21일 답사할 때만 해도 있었다.
느티나무 꽃말은 운명, 병자호란 비극의 증인으로 우리나라 아픈 역사와 함께 했다.
다시 성 안으로 들어가서 성곽을 걸으려고 하는데 좌측 아래로 돌탑군이 보여 조금 아래로 내려가 자세히 봤다. 수많은 돌탑들이 세워져 있다. 꽤 넓은 면적에 돌탑들이 정렬하게 세워져 있는데 무엇하는 곳인가? 궁금도 했지만 시간이 여의치 않아서 나중에 보기로 하고 성곽길을 이어 나갔다.
남문에서 다시 동문으로 원점회귀
남문→제1남옹성→남장대터→시구문→동문
51분 산행 (14:20~15:35)
전체 산행 4시간 11분.
남문(지화문)에서 7분 정도 진행하니 제1남옹성이 잘 보이는 곳이 나온다. 이후 3분을 더 내려가니 터널이 나온다.(14:36)
터널로 내려가기 직전에 제7암문(제1남옹성암문)이 있다.
7암문은 성벽이 남북방향으로 가다 이곳부터는 동서방향으로 방향이 바뀌는 지점에 있고, 개구부는 서쪽을 향하고 있다. 이 암문은 제1남옹성과 신남성으로 연결되는 통로로서 남쪽 성벽에 설치된 암문 중에서는 가장 이용이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7암문을 통해 제1남옹성으로 향했다. 길이가 길어서 제법 걸어야 제1남옹성을 갈 수가 있다. 둘레가 426m이다.
제1남옹성 끝에는 8개의 포대가 설치되어 있고 중앙에는 제법 높게 대를 만들었는데 올라가 보지는 못했다. 아마 헬기장 역할을 하는 것 같다.
8개의 포대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되짚어 암문을 나와 본성에 들어왔다. 곧바로 터널에 도착했다. 차량통행이 가능한 터널이다. 실제로 글쓴이가 터널에 도착 했을 때 2대의 차량이 지나갔다.
터널 밖으로 나가보니 이정표와 「한양 삼십리 누리길」 종합안내도가 세워져 있다.
다시 터널을 통과하여 성내로 들어와 성곽길을 이어갔다.
약 5분 정도 진행하니 제2남옹성 안내판이 나온다.
둘레가 318m이며, 다른 옹성과 달리 이중으로 되어 있는 것이 특색이다. 이곳도 옹성 끝부분에 포대가 있는데 이곳은 3곳이다. 남한산성에 설치된 옹성 중 규모가 가장 크다.
성벽에서 제2남옹성이 잘 보이는데 강화도의 돈대와 비슷하게 생겼다. 끝부분 만 정비가 되어 있고 이곳 성벽에서도 잘 보여서 굳이 끝부분까지 가지 않았다.
제2남옹성을 셩벽에서 구경하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이내 제2남옹성치 안내판이 나온다. 남한산성에는 5개의 치가 설치되어 있는데 본성에 4개, 봉암성에 1개가 있다.
제2남옹성치는 남장대 바로 앞에 설치되어 있으며, 남한산성에 설치된 치 중 가장 규모가 크다. 남한산성은 대부분 성벽이 굴곡이 심하여 치가 별도로 필요하지 않으나 남쪽은 지형이 완만하고 성벽의 굴곡이 약하여 방어력을 높이기 위하여 설치하였다.
[출처: 현지 안내판]
바로 제2남옹성치 앞에는 남장대터이다.
남장대가 있던 곳으로 성 남쪽에 있다하여 남장대라 불린다. 이곳에는 남한산성에 주둔하던 수어청에 소속된 5영 중 전영장을 지휘하던 곳이다. 제2남옹성 바로 안쪽에 있었던 장대로 주변 지형을 보더라도 장대가 위치할 입지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 1788년 부윤 이태영이 수어장대와 같이 이층으로 고치고 타운루라는 편액을 걸었으나, 지금은 둥글게 잘 다듬어진 주춧돌만 남아있다. 남장대가 있는 이 지역은 제2남옹성치를 설치하여 장대 앞의 면적을 넓힘과 동시에 3개의 남옹성을 설치한 점 등을 고려해 볼 때, 전략적으로 중요한 장대임을 알 수 있다.
[출처: 현지 안내판]
제2남옹성으로 갈 수 있는 암문(8암문)을 놓쳐서 뒤로 빽을 한 후 암문을 찾아보았다.
결국 8암문을 찾았다. 8암문은 성 안쪽은 평거식, 바깥쪽은 홍예식으로 되어 있고, 안내판은 없다.
8암문을 확인하고 다시 남장대터로 올라갔다. 8암문을 보려면 성곽길을 따라 가면 놓칠 수 있다. 성곽에서 조금 떨어진 안쪽으로 나있는 길을 따라 가면 된다.
남장대터 좌측으로 내려가면 곧바로 8암문이 나온다.
남장대터에서 약 6분 정도 진행하니 제3남옹성이 잘 보이는 성곽에 도착했다. 그런데 제3남옹성에 대한 안내판은 없었다. 안내판은 암문을 통해 제3남옹성 근처에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번에도 암문(제9암문)을 놓쳤다. 그래서 다시 되짚어 진행해서 찾아봤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왔다 갔다 했지만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고 힘도 들어서 9암문은 숙제로 남겨두고 다시 성곽길을 걸었다. 지금부터는 성곽을 끼고 가는 게 아니라 성곽에서 조금 떨어진 탐방로를 따라 진행했다.
정면으로 동문에서 올라가는 산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조금 더 내려가니 제10암문이 나온다.
10암문도 성 밖은 홍예식, 성 안은 평거식으로 되어 있다. 10암문에 대한 안내판은 못봤다.
이후 계속 내리막을 내려가니 11암문(시구문)이 나온다.
11번째 암문은 이른바 시구문이다. 시구문 역시 성 밖은 홍예식, 성 안은 평거식으로 되어 있다.
시구문 건너편은 동문(좌익문)이다.
시구문을 통해 산성 밖으로 나가봤다.
성곽 우측에 1801년(신유박해), 1839년(기해박해), 1866년(병인박해)때 남한산성에서 순교한 천주교인 300여 명이 시구문을 통해 이 계곡(번천)에 버려졌다는 내용이 적힌 표지석이 있는데 관리가 제대로 안 되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남한산성 순교자들은 처형당한 후 동암문(東暗門)을 통해 계곡에 버려졌다. 동암문은 남한산성 동문(東門)에 인접한 암문을 가리킨다.
암문은 적군의 눈에 띄지 않게 만들어 놓은 작고 비밀스러운 통로다. 시체를 버리던 문이라고 해서 시구문(屍口門)이라고도 불렀다.
동암문은 폭 2.86m, 높이 3.07m, 길이는 5.6m에 달해 남한산성에 있는 암문 16개 중에서는 큰 편에 속하지만 지금도 일부러 찾으려 하지 않으면 위치를 확인하기가 쉽지 않다.
남한산성 순교자들은 동암문 아래 계곡에 버려져 오랫동안 방치되고 짐승들에 의해 훼손됐다. 이곳에서 산성로터리 방향으로 약 1㎞ 정도 떨어진 곳에 남한산성순교성지가 있다.
순교자현양비 기록을 보면, 남한산성순교성지 순교자 300여 명 중 이름과 행적이 알려진 이는 첫 순교자 한덕운(토마스, 1752~1802) 복자를 비롯해 김덕심(아우구스티노), 김윤심(베드로), 김성희(암브로시오), 김차희, 김경희, 김윤희 등 36명에 불과하다. 이름도 기억되지 않는 순교자들이 훨씬 많다.
남한산성순교성지 순교자들 중 상징적 존재인 한덕운 복자는 충청도 홍주 출신으로 1800년 10월 경기도 광주로 이주했다. 이듬해 신유박해로 신자들이 순교하고 있다는 소식이 광주에 전해지자 옹기장사꾼으로 변장하고 한양에 올라갔다. 박해의 와중에 신자들의 소식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한덕운은 한양 청파동에 이르러 거적에 덮인 홍낙민(루카)의 시신을 보고 애도하며 비통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서소문 밖에서는 최필제(베드로)의 시신을 찾아 장례를 치러 줬다. 한덕운 자신도 천주교 신자라는 신분이 탄로나 죽임을 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죽은 영혼을 위로했던 것이다.
[출처: 카톨릭신문 2021.11.14. 제3269호. 10면 기사]
바로 옆에는 또 하나(남한산성 성곽 보수정비공사 준공표석)의 표지석도 관리가 안된 채 방치되어 있었다.
남한산성 제11암문(동암문) 암문은 적의 관측이 어려운 곳에 설치한 성문으로 일종의 비밀통로이기 때문에 크기도 작고, 적에게 쉽게 식별될 수 있는 시설도 설치하지 않았다. 남한산성에는 모두 16개의 암문이 있는데, 동문(좌익문)에 인접한 이 암문은 폭이 2.86m, 높이가 3.07m, 길이는 5.6m에 달해 가장 규모가 크다. 동문에는 계단이 있어 우마차의 통행이 불가능하였으므로 수레나 일반인들의 통행은 주로 이 암문을 이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말 천주교 박해 때 희생당한 시신이 이 문을 통해 버려져 천주교인의 성지순례 장소이기도 하다. [출처: 현지 안내판] |
다시 시구문을 통해 산성 안으로 들어왔다.
이내 수문이 나온다. 수문은 보호 난간으로 인해 가까이 가서 볼 수가 없었다. 수문 앞에 안내판도 세워져 있는데 세운지 오래됐는지 글씨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됐다. 세계유산이 된지 꽤 됐는데 하루빨리 세계유산의 격에 맞게 교체를 해야 할 것 같다.
글씨를 알아볼 수 없어서 인터넷 검색을 해서 확인했다.
남한산성은 지세가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아 대부분의 물이 이 수문을 통해 밖으로 흘러나간다. 산성 내에는 80개의 우물과 45개의 연못이 있을 정도로 수원이 풍부하였다고 전해진다. 수구문 바닥과 천장에는 홈이 패여 있는데 이는 적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하여 쇠창살을 가로질러 놓았던 것으로 보인다. 남한산성은 내부 경사가 완만하고 넓은 경작지와 물을 갖춘 천혜의 전략적 요충지다.
이런 환경적인 요건 때문에 병자호란 당시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청군에 함락당하지 않고 47일이나 항전할 수 있었다. 이 수문은 동문 가까이에 있는 곳인데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도로 가까이에 가서 오른편 밑으로 자세히 봐야 작은 구멍을 찾을 수 있다.
수문을 보고 이내 차도로 내려왔다. 그리고는 길 건너에 있는 동문 주차장에 도착함으로써 남한산성 본성(3개의 옹성 답사포함) 종주를 무사히 마쳤다. 4시간 11분 걸렸다.
▼ 남한산성 사진 1-5 보기: https://blog.daum.net/joingi61/15965729
▼ 남한산성 사진 2-5 보기: https://blog.daum.net/joingi61/15965730
▼ 남한산성 사진 3-5 보기: https://blog.daum.net/joingi61/15965731
▼ 남한산성 사진 4-5 보기: https://blog.daum.net/joingi61/15965732
▼ 남한산성 사진 5-5 보기: https://blog.daum.net/joingi61/15965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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