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세계유산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 익산 미륵사지, 왕궁리유적 (21.10.05)

약초2 2021. 10. 14. 12:07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 제2편 익산시

미륵사지왕궁리유적를 찾아서!

 

1.답사날짜: 2021년 10월 5일(화)

2.날씨: 맑고 무더움

3.답사인원: 2명 (여행님)

4.답사코스: 미륵사지→왕궁리유적→보석박물관

 

5.답사시간

-07:00 서울 중계동 발

-11:50~12:25 미륵사지 답사

-12:40~13:10 왕궁리유적 답사

-14:10~15:10 보석박물관 답사(점심식사 30여 분 포함)

-20:10 귀가

 

6.답사 후기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 공주편(공산성, 무령왕릉과 왕릉원)에 이어 익산(미륵사지, 왕궁리유적)을 찾았다.

처음 계획은 부여(관북리유적과 부소산성, 정림사지, 부여 왕릉원, 나성)를 갈 예정이었으나 부여에는 갈 곳이 많아서 여유롭게 1박2일로 가기로 하고 익산을 먼저 답사했다.

 

▣ 백제역사유적지구

백제역사유적지구(百濟歷史遺跡(=遺蹟)地區, 영어: Baekje Historic Areas)는 공주시, 부여군, 익산시에 있는 백제 관련 역사유적지구이다. 2015년 7월 4일 독일 본에서 열린 제39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WHC)에서 세계유산 등재 심사를 최종 통과하여 대한민국의 12번째 세계유산이 되었다.

 

백제역사유적지구는 총 8개의 유적을 포함한 연속유산으로 공주시에 2곳(공산성, 무령왕릉과 왕릉원), 부여군 4곳(관북리 유적과 부소산성, 부여 왕릉원, 정림사지, 나성), 익산시에 2곳(왕궁리 유적, 미륵사지)을 포함한다.

 

세계유산위원회와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 유네스코 세계유산센터 산하 자문기구로서 문화유산의 등재 여부를 위원회에 권고)는 동 유산이 한국·중국·일본 동아시아 삼국 고대 왕국들 사이의 상호 교류 역사를 잘 보여준다는 점, 백제의 내세관·종교·건축기술·예술미 등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 백제 역사와 문화의 특출한 증거라는 점 등을 높이 평가하였다. 북한과 합쳐서 삼국시대 유적은 다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이번 세계 유산 등재는 충청권에서는 최초로 선정 되었다.

 

▶공주시​

공산성(사적 제12호)

무령왕릉과 왕릉원(구. 송산리 고분군 / 사적 제13호)

 

▶부여군​

관북리 유적(사적 제428호)과 부소산성(사적 제5호)

부여 왕릉원(구. 능산리 고분군 / 사적 제14호)

정림사지(사적 제301호)

나성(사적 제58호)

 

▶익산시​

왕궁리 유적(사적 제408호)

미륵사지(사적 제150호)

[출처: 위키백과]

 

▲ 완성된 미륵사 모습. 중원의 목탑이 어마어마하다.
▲ 완성된 미륵사의 모습

 

살아생전

국가사찰 미륵사지의 완벽한 부활을 꿈꾸며!

 

7시에 중계동을 출발하여 3시간 50분 걸려 11시 50분에 미륵사지 주차장에 도착했다.

미륵사지 주차장을 포함하여 주변은 공사로 어수선했다.

미륵사지 관리센터와 편의점이 있는 건물을 끼고 좌측으로 가니 미륵사지 정문이 나온다.

 

정문 가기 전에 미륵사 창건과정, 완성된 미륵사 그림이 그려있는 안내판, 백제역사유적지구, 익산미륵사지 안내도, 설명이 적혀 있는 안내판, 아름다운 순례길 안내도 등이 세워져 있다.

 

정문 입구 담장에는 「무왕릉(익산쌍릉), 백제왕궁(익산왕궁리유적), 보석박물관」에 대한 내용이 적힌 안내판도 세워져 있다.

또한 관람동선 안내판도 세워져 있다.

미륵사지 정문 좌측에 안내소가 있는데 닫혀 있었다.

 

▣ 익산 미륵사지 (益山 彌勒寺址)

 

-시대: 고대/삼국

-문화재 지정: 사적 제150호

-건립시기: 601년(백제 무왕 2)

-성격:사찰터

-유형:유적

-면적:1338만 4699㎡

-소재지: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32-2

 

◈ 요약: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에 있는 삼국시대 에 창건된 백제 최대의 사찰인 미륵사의 사찰터. 사적.

 

◈ 개설: 사적 제150호. 미륵사지는 마한(馬韓)의 옛 도읍지로 추정되기도 하는 금마면 용화산(龍華山) 남쪽 기슭에 자리 잡은, 한국 최대의 사찰지이다. 601년(백제 무왕 2)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며, 무왕(武王)과 선화공주(善花公主)의 설화로 유명한 사찰이다. 국보 제11호인 동양 최대 석탑인 미륵사지 서석탑과 보물 제236호인 미륵사지 당간지주가 있으며, 1974년 8월 원광대학교에서 실시한 발굴조사 때 동탑지(東塔址)도 발견되었다. 건물지(建物址)는 백제와 고구려의 유구(遺構)가 복합되어 있다.

 

◈ 역사적 변천

미륵사는 백제 제30대 무왕 때 창건된 것으로 보이는 백제 최대의 사찰로, 언제 없어지게 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조선시대에 들어 17세기경에 폐사(廢寺)된 뒤 서탑(西塔) 및 당간지주(幢竿支柱) 등의 일부 석물만 남았으며, 사역(寺域)은 경작지와 민가로 변하여 오늘날까지 내려왔다.

 

1910년대 일본 학자가 조사한 가람배치(伽藍配置)에 의하면, 미륵사지는 탑과 금당(金堂)이 마련된 일탑식(一塔式) 가람이 ‘品’자 모양으로 3개가 합쳐져 만들어진 사찰로 추정되어 왔다. 그 뒤 1974년과 1975년 두 차례에 걸쳐 원광대학교(圓光大學校)가 동탑지(東塔址)를 조사하기도 하였으나, 전체적인 성격을 파악하기에는 미흡하였다.

 

이에 정부에서 중서부고도문화권개발사업(中西部古都文化圈開發事業)의 하나로 미륵사지의 발굴조사를 통하여 사찰의 정확한 규모와 아울러 가람배치의 성격과 구조를 밝혀내고, 발굴 결과 얻어진 자료를 통하여 유적을 정비·보존할 목적으로 1980년부터 1995년까지 본격적인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발굴조사를 통해 이전까지 알려졌던 ‘品’자 모양의 가람 배치설은 맞지 않는다는 것이 확인되는 것과 동시에 사지의 전체적인 규모도 밝혀지고 2만여 점의 유물도 수습되었다.

 

한편, 미륵사지석탑(국보 11호)은 2001년 10월부터 해체·보수작업 및 보구정비에 착수하였고, 2017년 12월 석재 조립 공정이 완료되었으며, 2018년 6월 복원된 석탑이 일반에 공개되었다. 문화재청 산하 국립문화재연구소가 2009년 1월 14일, 이탑의 탑신 1층 심주(중앙기둥)를 해체·조사하는 과정에서 미륵사지의 창건년대와 창건주를 기록한 사리봉안 기록판과 금제 사리 항아리 등 유물 500여 점을 발굴했다. 이를 통해 미륵사는 무왕 재위 40년인 서기 639년에 백제인 왕후의 발원으로 건립된 사실이 확인되었다.

 

금판 앞뒷면에 194자로 된 사리 봉안 기록판에는 시주자의 신분이 무왕의 왕후로, 좌평(백제의 최고 관직)인 사택적덕의 딸이라는 사실이 새겨져 있다. 이는 백제 서동 왕자(무왕)가 향가 ‘서동요’를 신라에 퍼뜨려 신라 진평왕의 딸 선화 공주와 결혼했으며, 그 뒤 선화 공주가 미륵사를 건립했다는 『삼국유사』의 내용과는 다른 것이어서 논란이 되고 있다.

 

◈ 내용

발굴을 통해 확인된 가람배치를 보면 동탑(東塔)과 서탑(西塔)이 있고 그 중간에 목탑(木塔)이 있으며, 각 탑의 북편에 금당의 성격을 가진 건물이 하나씩 있음이 확인되었다. 이들 탑과 금당을 한 단위로 구분하는 회랑(回廊)이 있어 동쪽은 동원(東院), 서쪽은 서원(西院), 중앙은 중원(中院)이라는 개념의 삼원식(三院式) 가람형태임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가람배치는 동양 고대가람 연구에서 밝혀진 바 없는 전혀 새로운 형식의 특수한 가람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미륵사지 가람배치를 보면, 자북(磁北: 자침이 가리키는 북쪽)에서 약 25° 서쪽으로 기울어진 축선상(軸線上)에 중원을 배치하여 남에서부터 중문(中門), 좌우로 복도의 성격을 띤 남회랑(南回廊)·목탑·금당이 배치되어 있고, 주위는 동회랑(東回廊)·서회랑(西回廊)·북회랑(北回廊)으로 둘러져 있다.

 

또, 중원의 동서 양측에는 중원의 남북축을 중심으로 좌우대칭의 동원·서원을 같은 방식으로 배치하고 있다. 또, 이들의 동회랑과 서회랑은 중원의 회랑과 겸하여 사용하도록 되었다. 즉, 회랑의 전체배열로 보아 남회랑은 동원의 동쪽 끝에서부터 서원의 서쪽 끝까지 중문과 연결되어 일직선상에 놓였다.

 

각 원(院)의 동측 또는 서측에 놓이는 측랑(側廊)은 동원 또는 서원과 중원 사이에서는 중원의 측랑과 겸용하도록 배치하였다. 특히 이들 각원의 내랑(內廊)을 한정지어 주는 동서회랑의 중심거리와 그 내랑에 있는 금당의 기단 앞면 길이와는 비례가 맞아, 각 원의 건물규모에 따라 내부공간이 잘 조화되도록 구성되어 있음이 특기할 사실이다.

 

또한, 남회랑과 각 측랑과는 기단(基壇)이 서로 연결되지 않고 떨어져 있어 건물이 각각 독립된 것이 확인되었다. 출토된 유물은 기와류를 주로 하여 총 6,500여 점으로 백제시대에서부터 고려시대까지의 기와가 수습되었으며, 특히 서까래[椽木] 끝에 붙이는 녹유연화문연목와(綠釉蓮花文椽木瓦)는 백제기와로서 다수 출토되었다. 문자가 새겨진 기와에는 ‘彌勒寺(미륵사)’, ‘國五年庚辰(국5년경진)’, ‘姚奉院(요봉원)’, ‘至元四年(지원4년)’, ‘天曆三年(천력3년)’ 등 다양하게 수습되었다.

 

탑 1기와 금당이 짝을 이뤄 3개의 원(院)으로 구성된 배치이면서, 중앙에는 목탑, 좌우 양쪽에는 석탑으로 주성되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 의의와 평가

미륵사지는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삼탑삼금당이 배치된 사찰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아울러 백제 무왕이 세운 곳으로서 최근 발굴된 사리기를 통해 창건연대가 정확히 밝혀져, 백제사와 불교미술 연구에 있어 중요한 자료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정문을 통과하니 우측에 「세계유산 / 백제역사유적지구 / 미륵사지」라고 적힌 대형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뒷면에는 「미륵사지」라는 글자와 위치가 그려진 지도가 새겨져 있다.

미륵사는 동원, 중원, 서원 3곳의 원마다 탑과 금당이 있는 3탑3금당 구조로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다고 한다.

 

「연못(연지)」와 「후대 남회랑 터」를 보고 보물 236호인 당간지주 앞에 도착했다.

 

▲ 보물 제236호 익산 미륵사지 당간지주

 

◈ 익산 미륵사지 당간지주 (益山 彌勒寺址 幢竿支柱)
-보물 제236호
 
당간은 사찰에서 행사나 의식을 치를 때 부처의 가르침을 담은 깃발인 당을 달아 두는 길쭉한 깃대이며, 이 당간을 양쪽에서 받쳐주는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주로 사찰 입구에 세워 그곳이 신성한 공간임을 알렸다. 후대 남회랑 안마당에 약 90m 간격으로 서 있는 당간지주 2기는 크기와 형태, 제작 기법이 서로 같다. 현재 당간은 사라지고 지주만 남아 있는데, 미륵사지 서탑을 해체할 때 탑 안에서 나온 석재가 당간 형태임을 보아 당간은 돌로 만들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지주의 높이는 약 4.5m이고, 바깥 면에는 가장자리와 중앙에 띠가 있다. 지주의 안쪽에는 당간을 고정하기 위한 구멍이 뚫려 있다. 지주 아래에는 기단이 있으며, 기단 각 면에는 무늬가 새겨져 있다.
[출처: 현지 안내판]

 

당간지주는 동원 9층석탑 앞에도 있고 서원 석탑(국보 11호) 앞에도 있다.

 

당간지주 뒤로 웅장한 9층석탑이 자리하고 있다.

 

◈ 동원 구층석탑 (東院 九層石塔)
 
1974년 동원의 탑 터를 발굴하여 기단의 규모와 형태 및 출토 유물을 조사한 결과, 국보 제11호인 서탑과 같은 백제시대의 석탑이 있었음을 밝혔다. 동원 구층석탑은 동원 탑 터에서 나온 기단석, 지붕돌인 옥개석, 탑의 꼭대기 부분인 상륜부를 받치는 노반석 등의 탑 부재와 현대 남아 있는 서탑 등으로 고증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1991년 복원을 시작하여 1992년에 완료했다. 복원된 탑은 아래 기단의 한 변이 12.5m, 위 기단의 한 변이 10.5m인 이중 기단이다. 탑 높이는 지면에서 상륜부까지 총 27.8m이다. 탑의 지붕돌에 달린 풍탁은 동원 탑 터에서 나온 백제시대 금동풍탁을 복제한 것이다. 탑 복원에는 기존 탑 부재와 같은 재질인 익산 황등에서 캐낸 화강암 2,000여 개와 백제시대 석탑 기단석과 탑신석 32개를 포함하여, 석재 2,700여 톤을 사용하였다. 석탑 복원 기록과 사리를 담은 용기인 사리장엄을 5층 심주석에 모셔 두었다.
[출처: 현지 안내판]

 

▲ 동원 구층석탑

 

1992년 복원된 동원 구층석탑의 각 모서리에는 백제시대 금동풍탁을 복제한 풍탁(風鐸)들이 달려 있어서 신기했다.

또한 내부로 들어갈 수가 있어 들어가 보니 사방으로 연결이 되어 있었다.

 

동원 9층석탑에서 조금 올라가니 「동원 금당 터(東院 金堂址)」, 「동원 승방 터(東院 僧房址)」, 「강당 터(講堂址)」를 봤다.

이중 단층 기단으로 되어 있는 강당 터는 백제시대 석조 기단 건물 중 가장 크고 완벽한 상태로 남아 있어 기단의 축조기법 등을 살펴볼 수 있다고 한다.

 

강당 터까지 보고 그 뒤로 너무 넓어서 생략하고 중원을 지나 서원에 있는 서탑으로 향했다.

 

이내 서탑에 도착했다. 동원 9층석탑에서는 관람객이 2명 있었는데 이곳은 꽤 많은 사람들이 서탑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아마도 해체한지 18년 만에 복원됐고 국보(11호) 문화재여서 그런가 싶다.

 

◈ 익산 미륵사지 석탑 (국보 제11호)
 
미륵사지 석탑은 7세기에 미륵사가 처음 지어질 당시 세워진 세 기의 탑 중 서쪽에 위치한 탑으로 우리나라 석탑 중 가장 크고 오래된 탑이다. 많은 석재들이 없어져 원래의 모습은 알 수 없지만 남아있던 석재를 참고해 9층으로 복원된 동쪽 석탑과 같은 규모로 추정된다.
미륵사지 석탑은 목탑이 석탑으로 변화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역사적, 학술적으로 매우 중요한 탑이다. 층마다 모서리의 기둥이 다른 기둥보다 살짝 높게 된 형태, 지붕이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며 끝 부분이 솟아오르는 모양 등 목조건축의 수법을 따르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구성된 1층에는 사방에서 계단을 통해 출입이 가능한 십+자형의 공간이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여러 개의 석재를 쌓아 올린 중심기둥(심주心柱)이 세워져 있다. 2009년 1월, 가장 아래의 심주석에서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가 발견되었는데 백제왕후가 639년에 탑을 세우면서 사리를 모셨다는 기록이 확인되었다. 6층 일부까지만 남아 콘크리트 구조물에 의지하고 있었던 미륵사지 석탑은 1998년 구조적으로 불안정하다는 안전진단 결과에 따라 2001년부터 2017년까지 해체와 조립이 진행되었다. 수리가 완료된 탑의 높이는 약 14.5m, 폭은 12.5m, 무게는 약 1,830톤에 이른다.
[출처: 현지 안내판]

 

▲ 예전의 미륵사지 석탑 (출처: 인터넷)
▲ 복원 전의 미륵사지 서원 석탑 모습 (출처: 인터넷)
▲ 복원된 미륵사지 서원의 석탑 모습

 

서원의 석탑에는 진신사리(眞身舍利)가 봉안되어 있어 아쉽게도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고, 보호막이 쳐져 있었다.

 

안내판에는 「미륵사지 석탑의 보수정비 중 2009년 1월 14일 1층 심주석에서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가 발견되었고 진신사리(眞身舍利)는 2015년 12월 3일 재봉안 되었습니다. 이곳은 불사리(佛舍利)가 봉안된 곳으로 출입을 금지합니다.」라고 쓰여 있다.

 

서탑의 해체·보수작업 중 2009년 초층 탑신 내부 심주에서 사리장엄구를 발견하는 성과를 거두었는데 이것은 기존의 삼국유사의 601년(백제 무왕 2)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는 것에 반(反)한 내용이다. 사리장엄구에 백제왕후가 639년에 탑을 세우면서 사리를 모셨다는 기록이 나와 미륵사지 석탑은 601년이 아닌 639년에 세워진 것이다.

 

미륵사지 서원의 석탑은 2001년부터 국립문화재연구소가 해체 보수 정비를 시작해, 18년만인 2019년 3월 정비가 완료되었고 4월 30일 공식적으로 준공되었다.

당시에는 동면 좌우측 갑석 모서리에는 앞으로 두 손을 모으고 있는 2개의 석인상이 배치되었고, 이후 3개의 석인상으로 유지되다가 2008년에 천진한 얼굴의 「석인상(石人像)」 1기가 발견되어 오늘날 미륵사지 석탑(서원)은 네 모리에 각각 석인상이 자리 잡고 있다. 동원의 석탑에는 석인상이 없다.

동원의 9층석탑에는 복제한 풍탁이 각 층의 탑마다 매달려 있는데 서원의 석탑(국보11호)에는 풍탁을 걸어둘 수 있는 구멍은 나 있지만 풍탁을 매달지는 않았다.

 

◈ 미륵사지 석탑(서원) 의의와 평가

이 석탑은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탑이며 동시에 가장 큰 규모의 탑이다. 양식상 목탑에서 석탑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충실히 보여주는 한국 석탑의 시원(始原)으로 평가 받는 기념비적인 석탑이다. 특히 석탑 내부 심초석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를 통해 백제시대의 사리봉안 방식이나 탑 건립에 따른 의식, 발원자와 발원 동기 등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와 의의는 매우 크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미륵사지 석탑(서원)에서 나온 문화재들

2009년 1월 14일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익산 미륵사지 석탑을 보수·정비하다가 심주(心柱) 상면(上面) 중앙의 사리공(舍利孔)에서 '금제 사리호(金製舍利壺), 금제사리 봉안기(金製奉安記)' 등 사리장엄(舍利莊嚴)을 발견하였다.

 

높이 13cm, 어깨 폭 7.7cm의 작은 병 금제 사리호도 발견하였다. X선으로 내부를 투시한 결과 내외함(內外函)의 2중 구조로 이뤄져 있음을 확인하였다. 사리호 표면의 다양한 문양과 세공기법은 백제 금속공예의 우수성을 잘 보여준다.

 

또한 금제 사리봉안기도 발견하였다. 금제 사리봉안기는 가로 15.5cm, 세로 10.5cm 크기의 금판에 음각하고 붉은 칠(주칠)을 해 글씨가 명확하게 드러나도록 했다. 백제왕후가 재물을 희사해 가람(伽藍)을 창건하고, 기해년(639년)에 사리를 봉안해 왕실의 안녕을 기원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이는 미륵사의 창건 목적과 시주(施主), 석탑의 건립연대를 정확히 밝힘으로써 문헌사 연구의 부족한 점을 보완할 수 있는 귀중한 금석문 자료로 평가된다. 금제봉안기에는 시주자인 왕후가 백제 8대 귀족성 중 하나인 '사'씨(沙氏 또는 '사택'씨)의 딸로 기록돼 있어 선화공주가 미륵사지를 조성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과 차이가 있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받았다.

[출처: 위키백과]

 

※ 참고자료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68. 천년을 지킨 미륵사지석탑의 석인상

2019.12.12 전북일보 기사

 

▲ 2008년 발견된 석인상

 

익산 금마면에 있는 국보 제11호인 미륵사지석탑 하단 모서리에는 천진한 얼굴의 석인상이 있다. 20여 년간의 복원 기간을 마치고 공개된 석탑에 눈길을 빼앗기느라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자그마한 크기이다. 미륵사는 백제 제30대 왕인 무왕 대(639년) 창건된 사찰로 당시 목탑 1기와 동편과 서편에 석탑 2기를 세웠으나 목탑은 소실되었고 동편의 석탑은 1990년대 복원되었다. 미륵사지석탑으로 불리는 서편의 석탑은 일제강점기 탑이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당시 기술로는 최선인 콘크리트로 보수했지만, 석탑위에 덧바른 콘크리트는 우리 역사위에 덧씌워진 오욕의 흔적처럼 아픈 더께로 남아있었다.

 

“조선에 존재하는 석탑 중 최대”라며 미륵사지석탑을 평했던 일제는 1910년 12월 조사단이 촬영한 사진과 1915년 석축과 콘크리트로 무너져내린 서쪽 면을 보강한 뒤 석탑의 사진과 도면을 『조선고적도보』 등에 남겼다. 콘크리트로 보강되었던 석탑은 1998년 정밀구조 안전진단 결과 안전성에 문제가 제기되어 문화재위원회에서 해체보수가 결정되면서 복원을 하게 되었다. 앞서 복원된 동탑이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조형물로 인식되자, 서탑의 복원은 2001년부터 18년간의 검증을 거치며 원래 있던 부재를 80%가량 사용해 복원을 마무리했다.

 

해체와 복원을 거쳐 공개에 이르기까지 지난한 과정이었지만, 그 시간을 다독인 손길들에 의해 미륵사지의 비밀을 풀 수 있는 결실도 얻었다. 2009년 해체조사를 하던 중 석탑 1층 심주석 중앙에 봉인해 놓은 ‘사리장엄구’의 발견은 석탑의 건립시기와 미륵사 창건과 연관된 사연을 알게 된 최대의 성과였다. 그에 앞선 2008년에는 그 천진한 얼굴의 ‘석인상’ 1기가 발견되었다. 해체 전 탑의 북동, 북서, 남동 측의 기단 모서리와 바닥에는 총 3기의 석인상이 있었는데, 남서 측의 석인상이 발견되면서 석탑의 사방을 수호하는 수호석상의 완전체를 볼 수 있게 되었다. 보물로 지정된 석탑과 사리장엄구에 비해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발견 당시에 화제가 되었다.

 

해체하던 중 남서 측 바깥의 지면 석축 내부에서 발견된 석인상은 오랜 세월 외부에 노출되어 풍화작용을 겪은 3기의 석인상과 달리 석축 안에 있던 상태라 보존상태가 매우 좋았다. 보수정비사업단에서 실무를 담당한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사 김현용은 “석인상이 하나 더 있으리라 전혀 예상하지 못했어요. 당시 7~8명이 함께 석축 해체 작업을 하는데 넙적하게 덮어 놓은 돌 아래에 뭔가가 보이기 시작했어요. 돌을 걷어내니 둥그런 머리통에 이어 온전한 몸통을 지닌 석인상이 드러나는데 어찌나 기쁘던지요. 늘 긴장하는 현장에서 순박한 얼굴과 가지런히 손을 모은 모습을 온전하게 발견한 그 날이 아직도 생생해요”라며 당시의 감회를 전해주었다.

 

석탑 모서리에 자리한 석인상에 관한 기록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1910년대에 일제가 남긴 사진과 도면을 통해 붕괴된 석축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그 구석에 반쯤 묻혀있거나 삐딱하게 자리한 석인상도 살펴볼 수 있다. 이러한 자료를 보면 9층으로 추정된 석탑이 17세기 초 7층으로 무너지기 전에 이미 석축을 쌓았고, 18세기 중기에 석축이 다시 무너져 6층으로 변형된 것으로 추측된다. 이 과정에서 석탑의 사방에 놓여 있던 석인상도 석탑이 붕괴되고 보수되는 과정에서 조금씩 이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석인상은 석탑이 처음 창건된 백제 때 탑과 함께 조성된 것이 아니라, 후대에 사방수호신격으로 탑의 네 모서리에 안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석탑 1층 기단 주위에 노출되었던 기존의 석인상 3기는 풍화와 훼손이 심해 제작시기와 양식을 알기 어려웠지만, 남서의 석인상이 발견되면서 그나마 추정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각각의 석인상은 미세한 높이 차이가 나지만 그들의 키는 대략 92~93cm이다.

 

북동의 석인상은 가장 심하게 풍화된 상태지만 두상과 몸체를 짐작할 수 있는 모습을 지녔고, 북서의 석인상 역시 풍화가 심한 상태로 두상의 일부가 파손되어 떨어져 나가 있으나 손과 얼굴의 모습이 희미하게나마 남아있는 상태이다. 남동의 석인상은 1910년 조사단이 촬영한 사진에서도 그 모습이 상세히 남아있는 석인상으로 북쪽의 석인상에 비해 손 모양과 두상의 귀 모양 등 몸체의 구분이 분명하다.

 

일제가 기록한 사진과 도면을 통해 붕괴된 석축의 모습과 석인상의 위치를 알 수 있다. 남서 측의 석인상은 석축을 축조하면서 석축 안에 들어가게 됨에 따라 외부 환경과 차단되면서 다른 세 위치에 놓인 석인상에 비해 훼손되지 않고 뚜렷한 모습을 지니게 된 것이다.

 

석인상의 투박하고 순진한 얼굴은 돌하르방과 돌장승을 닮았으며 가지런히 두 손을 가슴에 얹은 자세로 조각되었다. 석인상은 동물에서 사람으로 변화하는 과도기적 모습을 보이며 둥그런 몸체와 두툼하고 큰 귀의 표현 등을 보았을 때 고려말이나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와 흡사한 유래로는 진묘수(鎭墓獸)라 하여 무덤을 수호하는 목적으로 사용한 석상이 있다. 백제 무령왕릉을 지키는 무덤에도 있으며, 신라시대 성덕왕릉 앞에도 석조물이 있다. 그러한 수호의 기능을 위해 석탑의 사방을 지키는 사방신의 의미로 배치된 것으로 보인다.

 

비슷한듯하나 각각 바라보는 방향도 각기 다르고 손과 얼굴의 모습도 다른 석인상은 백제 무왕과 왕비가 품었던 꿈을 굳건하게 수호한 물상이다. 한 해를 마무리하며 천년을 넘게 사방을 주시하며 그곳을 닳도록 지켜 온 석인상을 만나 그 순전한 모습을 마주하고 탑돌이를 하며 우리의 꿈도 기원하는 것도 좋겠다.

[출처 : 전북일보 인터넷신문(http://www.jjan.kr)]

 

※서원 석탑 4개의 모퉁이에 놓여진 석인상 중 유일하게 형태를 알아볼 수 있는 석인상은 1개만 남아 있다. 2008년 7월 29일 발견되었고, 크기 폭 595mm, 높이 920mm이다.

 

이후 서원 금당 터를 보고, 아래로 내려와서 어마어마하게 가지런히 놓여있는 돌들을 구경했다. 미륵사지 출토 석조물이다.

 

미륵사지 경내에 있는 국립익산박물관은 아쉽게도 답사를 못했다. 대체공휴일 휴관이었다.

 

국립익산박물관에 서원 6층석탑, 중원 목탑, 동원 9층석탑이 미니어처로 만들어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목탑의 추정 높이가 최소 40m인데, 1/20로 축소 제작되어 전시되어 있고, 또한 보석박물관에도 전시되어 있다.

 

익산 미륵사지 정문을 빠져 나온다. 정문 앞에는 미디어아트 쇼를 알리는 구조물이 아직도 세워져 있었다.

 

▣ 익산 미륵사지 미디어아트 쇼

2021.09.03(금)~2021.10.02(토)

오후 8시, 9시 / 10분씩 2회 공연

 

※ 참고자료

<칼럼> 백제왕후 좌평 사택적덕의 딸은?

 

百濟王后佐平舍乇積德女(백제왕후 좌평 사탁적덕의 딸). 2009년 1월 14일 사리장엄 봉영(안)기를 통해 홀연히 나타난 사택(탁)왕후는 누구일까? 올해 기해년 3월12일은 무슨 날일까? 사택왕후가 왕족·귀족, 백성들이 운집해 사리장엄을 봉안한 기해년인 639년 음력 1월29일을 양력으로 계산하니 3월12일이다. 이날 미륵사지석탑 보수정비 준공식과 불교법회가 열린다.

 

백제좌평은 16관등 제1품 최고관리다. 사택가문은 백제 8대 대성 으뜸으로 대좌평과 좌평 등 수많은 인물 기록이 있다. 왕후에 ‘백제‘ 국호가 붙어 정실왕후임을 반증한다. 능근사정재조립가람能謹捨淨財造立‘伽藍’(능히 삼가 깨끗한 재물을 희사해 가람=미륵사를 만들어 세우시고)는 단순 석탑 발원·봉안자가 아닌 3탑·3금당·3원 사찰인 미륵사 최대 시주 및 건립 주체다. 사택왕후가 남긴 지정문화재는 국보11호 미륵사지西석탑에다 사리장엄 중 금제사리내호와 금동제사리외호, 금제사리봉영기, 구슬 등 공양품이 담겼던 6개 청동합 등 총 3건 9점이 2018년 보물 1991호로 지정됐다. ‘총통’ 가짜 국보사건 여파로 국보지정이 까다로워져 보물지정 후, 3-5년 후, 사리내·외호와 봉영기 등 국보 2-3개가 추가되고 금동합이 보물로 유력해 사택왕후는 국보 3-4개와 보물 등을 남긴 셈이다. 여성이 국보를 남긴 최초·최대 사례다.

 

2009년, 미륵사지 석탑에서 금제사리봉안기가 발견되었는데, 그 내용에 따르면 미륵사 창건의 주체인 '좌평 사택적덕의 딸' 사택왕후가 무왕의 왕후라 기록하고 있어 선화공주의 존재를 뿌리부터 위태롭게 하였다. 이에 학자들은 선화공주의 실존 여부에 대해 대립하기도 하였다. 일부 학자는 설화가 어느 정도의 역사성을 바탕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미륵사를 처음 짓기 시작한 것은 선화공주나, 선화공주가 죽은 뒤 사택왕후가 절을 완성했다는 새로운 가설을 내놓았다. 같은 맥락에서 학자들은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무왕이 신라와 혼인 관계를 맺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아 신라 선화공주가 백제를 다스렸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하고 있다.

 

당시 유물은 아니나 사택왕후가 ‘만들어 세운’ 미륵사 유물은 보물 1753호 통일신라 금동향로와 보물 236호 미륵사지 당간지주 등이 있다.

 

봉영기에서 사택왕후는 種善因於曠劫受勝報於今生撫育萬民(지극히 오랜 세월 선함을 베푼 인연으로 훌륭한 응보를 받아 금생에 만민을 어루만지고 보살펴 기르는), 此善根仰資大王陛下年壽與山岳齊固(이 같은 선한 근원과 자량으로 ‘대왕폐하=무왕’ 수명은 산악처럼 견고하고)라고 간구했다. ‘착할 선善‘이 연속 나와 선화공주가 연상된다. 선과 덕을 쌓는 적선積善·적덕積德이다. 무왕에 대한 간절한 지극정성 사랑도 읽혀진다.

 

원왕후즉신심동수경조법계願王侯卽身心同水鏡照法界(왕후가 현세에 부처가 돼 마음이 물거울처럼 불법세계를 비추기를 원합니다)는 엄청나다. 삼국시대 ‘왕즉불王卽佛(왕이 곧 부처)’ 사상을 넘어 왕후가 즉신성불卽身成佛(현세 육신 그대로 부처가 되는 일)하기를 간구했다. ‘살아있는 부처=생불生佛’이 돼 만민을 어루만져 기르고 불법세계도 환히 비추기를 원했다. 즉신성불 대상이 여성은 사택왕후가 최초다. ‘한국여성사’가 다시 쓰여 질 대목이다. 上弘正法下化蒼生(위로 정법을 넓히고 아래로 ‘창생=세상 모든 사람‘을 교화시키게 하소서)와 凡是有心俱成佛道(모든 중생도 함께 부처 가르침을 이루게 하소서)는 만민구제 대승불교 사상이다.

 

일연스님 ‘삼국유사’의 “무왕과 부인이 ‘용화산=미륵산’ 사자사로 가던 중 미륵삼존이 출현해 부인이 ‘대가람大伽藍’을 세우기를 원해 미륵사를 세웠다.”는 내용과 사택왕후가 발원·봉안 및 미륵사 최대 시주 및 건립자로 “깨끗한 재물을 희사해 만들어 세운 ’가람伽藍‘”이란 ’사리장엄 봉영기’가 일치한다. 서동설화 중 신라 선화공주, 명문의 역사인 백제 사택왕후는 별개 인물이 아니다. 사택선화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봉영 640년이 흘러 고려 말 쓰여 진 삼국유사다. 좌평佐平 사택적덕의 딸이 삼국유사에 신라왕 진평眞平 셋째 딸로 둔갑이 유력시된다.

 

2년 만에 4명(위덕왕·혜왕·법왕·무왕)이 바뀌는 극도 혼란기에 서동과 사택선화 사랑이 사비(부여)의 좌평 사택적덕 도움으로 왕위에 올랐고 엄청난 재정지원과 많은 장인까지 보내줘 미륵사를 준공한 것으로 사료된다. 미륵사와 제석사 건립, 왕궁성 개·보수, 사비성 중축, 궁남지 조성 등은 지금도 수 조원이 들어갈 대역사다. 마를 팔아 근근이 살던 왕의 서자, 서동이 무왕으로 즉위해 수많은 전란에도 40여 년을 통치하고 훗날 지극정성 수명이 산악처럼 견고하도록 간구하는 것은 서동과 사택선화 사랑이 근원이 아니었을까?

 

무왕이 죽고 의자왕(641-660) 2년인 ’일본서기‘ 642년 기록에 사택왕후를 '국주모國主母‘(나라 주인인 어머니)라 한 사망기록만 봐도 부친 사택적덕이 실질적 ’나라 주인’으로 사택왕후를 결혼 전, 선화공주라 칭했을 가능성이 매우 농후하다./취재국장 고재홍>

 

살아생전에 미륵사가 완벽하게 복원된 모습, 보기를 기원하면서 미륵사지를 떠났다.

 

국가사찰 미륵사지의 완벽한 부활을 꿈꾸며! 사진 보기: https://blog.daum.net/joingi61/15965703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 익산 미륵사지 (21.10.05)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 익산 미륵사지 사진 2021.10.05(화) 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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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왕궁 왕궁리유적을 찾아서!

 

미륵사지 주차장에서 약 5.4km 거리에 약 10분 정도 걸려 왕궁리유적 주차장에 도착했다.

 

▣ 익산 왕궁리 유적

-사적 제408호

 

왕궁리 유적은 백제 왕궁의 모습이 잘 남아 있어 삼국 시대 도성을 이해하는 데에 빼놓을 수 없는 대표적인 유적이다. 1989년부터 시작한 발굴 조사에서 궁궐 담장, 정전, 정원, 후원, 화장실, 공방 등이 있었음을 확인하였다.

궁성은 장방형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담장의 길이는 동서로 약 240m, 남북으로 약 490m이다. 담장의 폭은 3m 가량이며, 담장 양쪽에는 1m 폭으로 편평한 돌이 깔려 있어 보도시설로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궁성 안은 동서방향으로 축대를 쌓아 공간을 남쪽인 전반부와 북쪽인 후반부로 나누었다. 전반부에는 경사면을 따라 단이 지도록 4곳에 출대를 쌓아 대지를 평탄하게 만들고, 왕이 정사를 돌보거나 의식을 행했던 정전건물, 사용했던 기와를 쌓아 건물을 올린 와적기단 건물, 1동 2실 구조 건물 등을 세웠다. 후반부 북동쪽의 높은 지대에는 왕이 휴식을 취하는 후원을 만들고, 북서쪽의 낮은 지대에는 금과 유리를 생산하는 공방과 화장실을 두었다.

왕궁리 유적은 백제 무왕(600~641 재위) 때에 궁성으로 건설하여 사용하다가 백제 말, 통일신라시대에 와서 사찰로 바뀌었다. 1965년에는 왕궁리 오층석탑을 해체하고 보수하는 과정에서 사리장엄구(사리를 넣어 둔 용기와 공양물)를 발견하였다.

궁성을 지을 대지를 만들기 위해 대규모로 흙을 쌓은 성토층과 동서 방향으로 쌓은 축대, 당대 최고의 위생 시설을 갖춘 화장실, 금속공예 기술을 보여 주는 공방 등은 삼국시대 궁성의 구조와 기능을 밝히는 데 상당히 중요한 자료이다. 또한 왕궁리 유적에서 출토된 수부명 인장와(「수부」라고 도장을 찍은 기와), 전달린 토기(위쪽에 손잡이처럼 넓적한 면을 붙인 토기), 중국제 청자 조각 등은 왕궁리 유적의 위상과 중국과의 교류 사실도 보여 준다.

왕궁리 유적은 이러한 가치를 인정받아 2015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출처: 현지 안내판]

 

※익산 왕궁리 유적(益山 王宮里 遺蹟)은 전라북도 익산시 왕궁면에 있는 백제의 유적이다. 1974년 9월 27일 전라북도의 기념물 제1호 모질메산성으로 지정되었다가, 1998년 9월 17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408호로 승격, 지정되었으며, 2015년 7월 4일 유네스코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로 지정되었다.

[출처: 위키백과]

 

이곳에도 세계유산 안내판, 표지석 등이 세워져 있다.

주차장에서 위로 올라가면 가장 먼저 「남쪽 궁궐 담장」 안내판이 나온다. 그리고는 정면으로 오층석탑이 보인다.

오층석탑으로 가던 중 익산문화재 야행 포토존이 눈길을 끌었다.

 

▲ 국보 제289호 왕궁리 오층석탑

 

◈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益山 王宮里 五層石塔) (국보 제289호)
 
탑은 사찰에서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는 곳으로, 이 석탑은 미륵사지 석탑을 본떠서 만든 백제계 석탑이다. 단층 기단, 얇고 넓은 지붕돌, 3단의 지붕돌 받침이 특징이다. 1965년부터 1966년까지 해체와 보수를 하였는데, 이때 1층 지붕돌 중앙과 기단에서 「금강경판」19장, 금동제 사리함, 사리병등 사리장엄구(국보 제123호)가 발견되었다. 또한, 석탑의 건물 기초는 가로 16.8m, 세로 12.7m 크기인데, 흙을 다져 메운 판축 기법을 사용한 점으로 보아 이 석탑은 본디 목탑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석탑 주변에서 「왕궁사」, 「관궁사」, 「대관관사」, 「대관궁사」라는 글자가 새겨진 통일신라시대 기와가 발견되어 탑이 세워진 시기를 놓고 「백제시대,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 초기」등 여러 견해가 있다.
[출처: 현지 안내판]

 

글쓴이의 눈에는 오층석탑 외에는 볼 것이 없었다. 왕궁터 였으니 정전, 정원, 후원, 화장실, 공방 등의 표시와 안내판이 있을 뿐이다.

국립익산박물관이 대체공휴일 휴무라 이곳 「왕궁리유적전시관」도 문이 닫혀 있으리라 지레 짐작하고 이곳을 떠났다.

나중에 후기를 쓰면서 검색 결과 왕궁리유적전시관은 상설전시실 리모델링 공사 및 백제왕궁 ICT 역사관 조성공사로 인하여 휴관중임을 알게 되었다. 12월에 새로운 모습으로 개관한다고 한다.

 

차량으로 1~2분 정도 갔는데 주차장이 나온다. 이곳에 여러 대의 차량들이 주차하고 있어 글쓴이도 주차를 하고 위로 올라가봤다.

이곳은 왕궁리 유적의 연장선상으로 「북측 궁궐 담장 문터」, 「북측 궁궐 담장 교각시설」안내판 등을 보고는 되짚어 내려왔다.

왕궁터라 역시 규모가 제법 크다는 것을 느꼈다.

이로써 익산시의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 두 곳(미륵사지, 왕궁리유적)을 봤다. 이제 부여(관북리유적과 부소산성, 정림사지, 부여 왕릉원, 나성) 만 답사하면 백제역사유적지구는 모두 돌아보게 된다.

 

귀경길에 「익산 보석박물관」을 구경하고 귀경했다.

 

▼ 백제왕궁 왕궁리유적을 찾아서! 사진 보기: https://blog.daum.net/joingi61/15965704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 익산 왕궁리유적 (21.10.05)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 익산 왕궁리유적 2021년 10월 5일(화) 답사

blog.daum.net

 

 

7.참고자료

 

(1) 익산 미륵사지 석탑 (益山 彌勒寺址 石塔) .국보 11호.

-지정(등록)일: 1962.12.20

-소재지: 전북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97번지

-시대: 백제시대 후기 7세기

-소유자(소유단체): 국유

 

백제 최대의 사찰이었던 익산 미륵사는 무왕(武王, 600-641) 대에 창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륵사는 전형적인 1탑1금당의 백제식 가람배치와 달리 세 개의 탑과 금당 등으로 구성된 3탑3금당의 독특한 배치형식이다. 이 미륵사지 석탑은 세 개의 탑 중 서쪽에 위치한 탑이다. 우리나라 석탑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창건시기가 명확하게 밝혀진 석탑 중 가장 이른 시기에 건립된 것이다. 원래는 9층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반파된 상태로 6층 일부까지만 남아있었다. 창건당시의 정확한 원형은 알 수 없으며, 17~18세기 이전 1층 둘레에 석축이 보강되고 1915년 일본인들이 무너진 부분에 콘크리트를 덧씌운 상태로 전해졌다.

 

남아있던 6층까지의 높이는 약 14.2m이고 상·하 이층으로 구성된 기단의 전체 폭은 약 12.5m이다. 1층은 각 면이 3칸으로 구성되고 가운데 칸에는 문을 내달아 계단을 통해 사방으로 통하게 하였다. 기둥석은 아래가 넓고 위가 좁은 민흘림기법과 양 끝 모서리를 약간 높인 귀솟음기법이 반영되어 있다. 기둥석 하부에는 목조건물에서처럼 별도의 초석이 있고 기둥과 기둥을 연결하는 상ㆍ하 인방석(引枋石)과 기둥 상부에 평방석(平枋石), 포벽석(包壁石) 등이 구성되었다. 옥개부(屋蓋部)는 목조건물의 지붕처럼 모서리 끝이 살짝 치켜 올라가고 가운데가 오목하게 들어가는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고 있다.

 

한편 석탑의 1층 내부에는 ‘十’자형 공간이 조성되어 동서남북 네 방향에서 출입이 가능하며, 탑의 중심에는 여러 개의 사각형 돌을 수직으로 쌓아올린 기둥(심주)이 4층까지 연속된다. 이러한 모습은 다른 석탑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징이며, 2009년 1층의 첫 번째 심주석에서 발견된 사리봉영기(舍利奉迎記)의 기록을 통해 639년이라는 석탑의 건립연대가 명확하게 밝혀졌다.

 

석탑은 1998년 구조안전진단 결과에 따라 이듬해 해체수리가 결정되었고 2001년 해체조사에 착수하여 2017년 조립공정이 완료되었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은 고대의 목탑에서 석탑으로 변화되는 과정을 충실하게 잘 보여준다. 또한 고대건축의 실제 사례로써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아 우리나라 불탑건축 연구에서 대단히 중요한 문화재이다.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2) 익산 미륵사지 석탑 해체보수 20년 만에 준공

2019.04.25 14:07

 

4월 30일 미륵사지에서 준공식 개최

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이 해체보수 20년 만에 준공됐다.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는 2001년부터 석탑의 본격적인 해체조사와 함께 다양한 분야의 학술조사연구와 구조보강, 보존처리 등을 시행하여 2017년 말 6층까지 석탑의 조립을 완료하였다. 완공된 석탑은 높이 14.5m, 너비 12.5m, 사용된 부재는 총 1,627개로 무게가 약 1,830톤에 이른다.

 

미륵사지 석탑은 최장기간 동안 체계적인 연구와 수리를 진행하였다. 국제 기준에 따라 보수정비 과정을 이행하여 석조문화재 수리의 선도 사례를 제시한 것으로 평가가 나오고 있다. 또한, 추정에 의한 복원이 아닌, 원래의 부재를 81%까지 최대한 재사용하여 석탑의 진정성과 구조적 안정성을 확보했다는 점에서도 큰 의미가 있다.

 

미륵사지 석탑 보수정비는 단일 문화재로는 최장기간 동안 체계적인 수리를 진행한 사례이다. 특히, 국제적 기준에 따라 학술조사와 해체·수리 과정을 충실히 이행하였다는 점에서 석조문화재 수리의 선도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원래의 부재를 최대한 재사용하여 문화재의 진정성을 확보하고 과학적 연구를 통해 구조적 안정성을 확보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2009년 1월 석탑 해체조사 과정 중 1층 내부의 첫 번째 심주석에서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가 발견되어 학계, 불교계 등 큰 관심이 집중된 바 있다. 이를 통해 석탑이 백제 무왕 대인 639년 창립되었고, 미륵사 창건의 배경과 발원자 등이 밝혀졌으며, 이후 수습한 유물들이 학술조사와 보존처리 과정을 거쳐 최근 보물로 지정예고된 것도 의미 있는 성과 중 하나이다.

 

익산 미륵사는 조선 시대까지 유지되었던 사찰로서 1980년부터 1994년까지 진행된 발굴조사를 통해 전체적인 규모와 가람배치의 특징 등이 밝혀졌다. 미륵사지 석탑은 원래 미륵사에 있었던 3개의 탑 중 서쪽영역에 위치한 석탑으로서 현존하는 석탑 중 최대(最大) 규모이며, 백제 목조건축의 기법이 반영된 독특한 양식의 석탑이다.

 

조선 시대 이후 석탑은 반파된 상태로 6층 일부까지만 남아있었는데 1915년 일본인들이 붕괴된 부분에 콘크리트를 덧씌워 보강하였다. 1998년 구조안전진단을 실시한 결과 콘크리트가 노후 되었고, 구조적으로 불안정하다는 판단에 따라 1999년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해체보수를 하기로 했다.

 

미륵사지 석탑이 해체보수 20년 만에 준공됨에 따라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전라북도 익산 미륵사지에서 전라북도(도지사 송하진), 익산시(시장 정헌율)와 공동으로 4월 30일 오후 2시, ‘익산 미륵사지 석탑 보수정비 준공식’을 개최한다.

 

이번 행사는 미륵사지 석탑의 보수정비 준공을 기념하고 그 성과와 의미를 알리는 자리이다. 특히, 올해는 사리를 봉안하고 석탑이 건립된 지 1,380주년이 되는 해이며, 석탑의 해체보수가 결정된 지 만 2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익산시립무용단의 식전공연을 시작으로, 준공식 행사와 함께 불교계의 기념법회가 함께 진행된다.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오는 5월 학술포럼을 개최하여 미륵사지 석탑의 조사연구와 수리 결과를 공유하고 문화재 수리의 현황과 과제를 논의할 계획이다. 또 올해 말까지 그동안의 연구 성과와 해체보수 과정을 기록한 수리보고서를 발간해 전체 사업을 완료할 예정이다.

 

(3) 익산 미륵사지

미륵사는 백제 제30대 무왕이 세운 사찰로, 익산의 주산인 미륵산(과거에는 용화산이라 함)남쪽 기슭에 위치한다. 『삼국유사』 무왕조에는 "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師子寺를 가던 중 용화산 밑의 큰 연못에서 미륵삼존이 출현하자 사찰을 짓고 싶다는 부인의 청을 받아들여 연못을 메운 후, 법당과 탑, 회랑 등 을 각각 세 곳에 ´미륵사´라 하였다."는 미륵사 창건설화가 전한다.

 

1980년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된 미륵사지 발굴조사에서는 2만여점의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1993년 미륵산 사자암 발굴조사에서 백제 및 통일신라의 기왕와 토기, ´지치2년사자사와至治二年師子寺造瓦´명 암막새등이 출토되어 『삼국유사』기록의 신빙성을 높여준다,『삼국유사』,『삼국사기』,『와유록』,『금마지』등의 문헌기록과 17년간의 발굴조사를 종합해 보면, 미륵사는 백제 무왕의 왕권강화와 국력신장을 목적으로 조성한 동양 최대 최고의 국가사찰이며, 조선 후기 17세기 무렵에는 폐사되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미륵사의 가람은 중문·탭·금당金當을 일직선으로 배치한 중원中院과 이를 둘러싼 회랑回廊, 그리고 중원과 거의 비슷한 금당과 탑을 중원의 동쪽과 서쪽에 비치한 삼원병립식三院竝立式 가람으로, 어디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독창성을 지니고 있다.

 

삼원병립식 가람배치는 미륵불의 3회 설법을 통해 중생을 구원한다는 미륵신앙을 현실세계에서 구현한 산물로써, 당시 백제인의 세계관과 창조성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지닌다.

 

정면 5칸 측면 4칸 규모의 미륵사지 금당은 초반석 위에 1m높이의 주춧돌을 올려 지음으로써 의도적으로 지면과 금당 바닥 사이에 빈 공간을 만든 독특한 건축양식을 하고 있다.

 

(4) 익산 왕궁리유적

익산시 왕궁면 용화산 남쪽 끝 해발 40m내외의 구릉에 위치한 왕궁리유적이 백제의 궁성터라는 직접적인 기록은 없다. 그러나 오래전부터 『대동지지』(김정호)의 ´익산 별도別都´ 기록과 「관세음응험기」(일본 청렴원 발견)의 ´백제 무왕 지모밀지枳慕蜜地 천도´기록이 왕궁리유적의 소재지명인 왕궁면의 ´왕궁王宮´과 연관되어 백제의 무왕 혹은 보덕국의 안승, 후백제의 견훤이 경영하였던 왕궁터로 인식되어 왔으나 발굴조사를 통해 무왕대에 조성되었음이 밝혀졌다.

 

왕궁리유적은 평지성 구릉에 남북 492m, 동서 234m, 폭 3m 내외의 궁장을 두른 후, 내부에 경사면을 따라 4단의 석축을 쌓고 평탄대지를 조성하여 정무공간과 생활공간, 후원공간을 배치한 궁성유적이다. 궁성으로의 역할이 끝난 뒤에는 탑-금당-강당으로 구성된 1탑 1금당식 사찰로 그 성격이 변화되었는데, 이는 유적의 중심부에 있는 오층석탑과 그 주변에서 조사된 건물지를 통해서 밝혀졌다.

 

최근 발굴조사에서 전각건물로 추정되는 대형건물지, 백제의 자연친화적 조경기술을 보여주는 정원시설 등의 궁성관련 유구가 밝혀지고 전달린토기, 8엽단판연화문수막새와 인장와(「수부首府」명기와 등), 유리·금제품, 도가니 등 총 10,000여점의 유물이 출토됨에 따라 백제 왕궁의 면모가 더욱 선명해졌다.

 

유적의 중심부에서 조사된 대형 건물지와 그 주변에서 출토 된「수부」명인장와는 부여의 추정 왕궁터인 관북리 백제유적에서만 조사되고 있어서 이곳 왕궁리유적 또한 백제의 무왕이 거주하였던 왕궁이었음을 입증해 주고 있다.

 

궁성 내부 전반부에 정전 건물을 두고 후반부에 후원을 배치하는 조영방식은 중국 북위 낙양성洛暘成의 궁성배치방식과 비슷하여, 정원시설이나 대형 화장실 유구 등의 부속시설은 일본 평성경平成京유적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왕궁리유적´을 통해 한·중·일 삼국의 문화교류 모습을 증명한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매우 높다.

 

(5) 세계유산(World Heritage)

-세계유산은 1972년 ´유네스코(unesco)세계문화 및 자연유산의 보호에 관한 협약´에 의거하여 세계유산목록에 등재된 유산을 지칭한다. 인류의 보편적이고 뛰어난 가치를 지닌 자국의 부동산 유산이 등재되는 세계유산의 종류에는 문화유산, 자연유산 그리고 문화와 자연의 가치를 지닌 복합유산이 있다.

 

-2020년 기준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은 167개국 총 1,121점(문화유산 869, 자연유산 213, 복합유산 39)이다.

 

-우리나라는 1988년 가입한 이후 백제역사유적지구를 포함한 15건(문화유산13, 자연유산2. 2021년 9월 30일 기준)등재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