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즈넉함 속에서 선인의 지혜를 전하는
세계유산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 마곡사!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 무령왕릉과 왕릉원(구. 송산리고분군)을 보고 차량으로 20.3km 거리 약 30분 걸려 공주에 있는 세계유산(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 마곡사 주차장에 도착했다.(16:00)
▣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山寺, 韓國의 山地 僧院·僧園)은 대한민국의 산사 7곳을 묶어 등재된 유네스코 세계유산이다. 대한민국의 13번째 세계유산으로, 2018년 6월 30일 바레인에서 열린 제42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등재가 결정되었다.
※ 산사 7곳
1.경남 양산시 통도사
2.경북 영주시 부석사
3.경북 안동시 봉정사
4.충북 보은군 법주사
5.충남 공주시 마곡사
6.전남 순천시 선암사
7.전남 해남군 대흥사
◈ 마곡사 역사
충청남도(忠淸南道) 공주시(公州市) 사곡면(寺谷面) 운암리(雲岩里)의 태화산(泰華山) 동쪽 산허리에 자리 잡은 마곡사는 대한불교 조계종의 제6교구 본사(本寺)입니다.
‘春마곡’이란 별칭에서 알 수 있듯이 봄볕에 생기가 움트는 마곡사의 태화산은 나무와 봄꽃들의 아름다움이 빼어납니다.
마곡사 사적입안(事蹟立案)의 기록에 따르면 '마곡사는 640년(백제(百濟) 무왕(武王) 41년) 신라의 고승 자장율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오고 있으며 고려 명종(明宗) 때인 1172년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중수하고 범일(梵日) 대사가 재건하였다고 합니다.
도선국사(道詵國師)가 다시 중수하고 각순 (覺淳) 대사가 보수한 것으로 전해오고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도 세조가 이 절에 들러 ‘영산전(靈山殿)’이란 사액(賜額)을 한 일이 있었습니다.
신라의 고승 자장 율사가 창건할 당시만 하더라도 30여 칸에 이르는 대사찰이었으나 현재 마곡사는 대웅보전(보물 제801호)을 비롯한 대광보전(大光寶殿:보물 제802호), 영산전(보물 제800호), 사천왕문, 해탈문(解脫門) 등의 전각들이 가람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 밖에도 도량의 성보(聖寶)로는 5층 석탑(보물 제799호)과 범종(梵鐘:지방유형문화재 제62호), 괘불(掛佛) 1폭, 목패(木牌), 세조가 타던 연(輦), 청동 향로(지방유형문화재 제20호)가 있으며 감지금니묘볍연화경(紺紙金泥妙法蓮華經) 제6권(보물 제270호) 과 감지은니묘법연화경 제1권(보물 제269호)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출처: 마곡사 홈피 www.magoksa.or.kr/ ]
◈ 마곡사 유래
마곡사라는 절 이름에 대해서는 대체로 세 가지 유래가 내려온다.
첫째, 청양의 장곡사(長谷寺), 예산의 안곡사(安谷寺)와 더불어 삼곡사(三谷寺)라 불렀는데, 이 중 마곡사는 삼골이라 하여 마곡사(麻谷寺)라 불렀다는 것이다.
둘째, 신라의 보철화상이 설법을 할 당시 모인 사람들이 마치 삼밭의 삼대가 골짜기를 이룬 것 같다고 하여 마곡사라 하였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구산선문의 하나인 성주산문의 개창자인 신라 무염선사(800~888)가 중국 남종선의 「마곡 보철선산」의 법을 이어와 마곡사라 불렀다고 하는 설이 있다.
[출처: 마곡사 팜플렛]
마곡사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조금 올라가니 마곡사관광안내소가 나온다.
5분 후 「泰華山 麻谷寺」현판이 걸린 일주문이 나오고, 조금 더 간 곳에 「백범명상길」안내도, 백범 김구 조형물 위치가 표시된 안내도, 「전망있는 마곡사 가는길←」안내판, 「유네스코 세계유산 천년고찰 마곡사」라고 쓰여진 대형 안내판 등이 세워져 있는 곳을 지난다.
계속 포장도로와 나란히 가는 인도 데크길을 따라 간다. 우측은 마곡천이 흐르고 있다. 데크길 난간에는 좋은 글이 쓰여 있는 작은 액자판이 걸려있어 읽으면서 걸어가니 지루하지 않았다.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 대형 안내판이 나온다, 이어 「유네스코 세계유산 마곡사」대형 표지석이 나온다. 이곳은 삼거리로 좌측으로 가면 마곡사 주차장, 영은암을 갈 수 있다. 이곳에 주차장이 있고, 승용차들이 주차하고 있었는데 아마 신도들만 주차할 수 있는 것 같았다. 우측은 마곡사, 은적암, 백범명상길 가는 길이다.
우측 마곡사 가는 길로 간다.
길가에 꽃무릇이 반기는데 앞전에 한번 왔을 때는 못 본 광경이었는데 시기가 달라서 그런 것 같았다.
꽃무릇이 핀 언덕에 현수막이 걸려 있는데 현수막에는 「마곡사 전국사진공모전. 접수기간: 2021년 10월15일(금)~20일(수)」이라고 적혀 있다.
그리고는 드디어 마곡사 입구에 도착했는데….
엄청난 큰 돌에 「산사 한국의 산지승 원 유네스코 세계유산 /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 / 麻谷寺」라고 적혀 있는데 글씨체가 예쁘고 배열을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아쉬움이 있다면 「산사 한국의 산지승 원 유네스코 세계유산」을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 유네스코 세계유산」이라고 썼으면 더욱 좋았겠다고 생각했다.
마곡사 대형 표지석 바로 앞에는 「사랑으로써 분노를 이기고 선으로써 악을 이겨라 / 베품으로써 인색함을 이기고 진실로써 거짓을 이겨라. 법구경」이라고 쓴 표지석도 세워져 있다. 그 뒤로는 한옥 커피 전문점이 자리하고 있다.
「공주 마곡사 남쪽 권역(남원)」안내판이 나온다.
마곡사 남원은 영산전이 있는 수행의 공간이다.
마곡사는 마곡천을 사이에 두고 남원과 북원의 두 공간으로 나뉜다. 북원의 대광보전과 남원의 영산전을 중심으로 독립적인 사찰이 두 개인 것처럼 보인다. 북원과 남원 양쪽에 불전, 요사, 누각 등 사찰이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건물이 각각 배치되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남원은 마곡사의 입구로 오른쪽은 해탈문을 지나 천왕문으로 연결되고 왼쪽은 영산전과 명부전, 산신각이 자리를 잡고 있다.
일제강점기 남원은 영산전을 주불전으로 삼고 있다. 영산전의 앞에는 흥성루(興聖樓)가 있고 북쪽에는 매화당(梅花堂), 남쪽에는 연향각(燃香閣)이 있다. 매화당과 연향각은 각각 건물을 담장으로 둘러싸서 외부에서 접근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현재와 비교해 보면, 연향각이 수선사(修禪社)로 바뀌었고 흥성루 앞쪽에 남원을 둘러싼 담장을 설치했다는 점이 다르다.
[출처: 현지 안내판]
매화당, 영산전, 수선사를 구경하고 다시 영산전 입구로 나왔다.
◈ 영산전 (靈山殿. 보물 800호)
영험의 기운 응집되어 있는 영산전
“예가 어진 정승과 용맹스러운 장수를 만들어 낸다는 태화산 군왕대의 혈 자리라.”
마곡사의 영산전은 예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마곡사에서 가장 영험이 큰 전각으로, 특히 어진 정승과 용맹스러운 장수를 만들어 낸다는 군왕대의 모든 기운이 모여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나라의 큰일을 할 인재 배출을 원하는 많은 불자들이 부처님께 기도를 올리고 소원을 성취하고 있습니다.
영산전은 현재 남아있는 마곡사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1650년에 중수돼 현재 보물 제800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영산전에는 고려시대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목불 7구가 남아있습니다. 사적입안의 기록에 따르면 영산전에는 세조의 친필인 방서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고 합니다.
영산전은 본래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인도의 영축산에서 법화경을 설하시던 당시의 광경인 영산회상을 재현해 모신 곳으로, 석가모니 부처님과 10대 제자, 16나한 혹은 500나한을 모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유독 마곡사의 영산전에는 한 가운데에 과거칠불을, 그 주위에 1000분의 부처님을 모셨습니다.
과거칠불이란 석가모니 부처님 이전에 이 세상에 출현하였다고 하는 일곱 분의 부처님을 일컫습니다.
◈ 영산전 현판
영산전 현판은 세조가 1465년에서 1487년 사이에 마곡사에 들러 쓴 현판이라고 '마곡사 사적입안'에 기록되어 있으며 실제 현판에는 '세조어필 '이라고 쓰여져 있다.
재위 1455년(세조 1)∼1468년(세조 14).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이유(李瑈). 자는 수지(粹之). 세종의 둘째 아들이고 문종의 아우이며, 어머니는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沈氏)이다. 왕비는 정희왕후 윤씨(貞熹王后尹氏)이다.
[출처: 마곡사 홈피]
마곡사에는 태화선원(泰華禪院)이 있습니다.
마곡사 들어서서 해탈문(解脫門)과 천왕문 사이에 왼쪽으로 담장을 둘러친 곳이 있고 그 곳에 오래된 전각이 있는데 이를 영산전(靈山展)이라 합니다. 그 앞으로는 흥성루(興聖樓)라는 누각이 있고 그 옆으로 아담하게 ㄷ자 형의 전통건물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태화선원입니다. 태화선원은 그리 오랜 전통은 갖지 못했지만 해마다 하안거와 동안거에는 몇몇의 수좌 스님들이 찾아와 정진을 하는 곳입니다. 특히 선원 위로 군왕대(君王垈)가 있고 이곳을 세조임금이 ‘만세불망지지(萬世不忘之地)’라 부를 만큼 기가 융성한 곳이라서 장부일대사(丈夫一大事)를 해결하려는 선객들의 해안이 번쩍이는 곳입니다.
[출처: 마곡사 홈피]
영산전 입구에서 해탈문, 천왕문을 지난다.
◈ 해탈문
法界로 들어가는 해탈문
해탈문은 마곡사의 정문입니다.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문화재 자료 제66호로 지정되었으며 태화산 남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 문을 지나면 속세를 벗어나 부처님의 세계 즉 법계(法界) 에 들어가게 되며 ‘해탈을 하겠다’는 원력을 갖게 된다고 합니다.
두 번째 문인 마곡사 천왕문이 박공지붕집인 데 비해 해탈문은 추녀 밑에 처마의 하중을 받고 장식도 겸해 나무쪽을 짜 맞춘 도구를 여러 개 배치한 겹처마 팔작지붕집입니다.
건물은 정면 3칸에 측면 2칸으로,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모두 판장 벽으로 막았습니다. 공포(拱包)는 3제공 형식으로, 제공 조두형(鳥頭形) 돋을새김을 하고 있으며 제공에는 연꽃을 조각하였습니다. 정면의 중앙 칸을 개방하여 통로로 사용하고 있으며 양편에는 금강역사상(金剛力士像)과 보현(普賢) 및 문수동자상(文殊童子像)을 봉안하고 있습니다.
◈ 천왕문
호법신장 나투신 천왕문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62호로 지정되었습니다. 태화산 남쪽 기슭에 있는 마곡사의 두 번째 문으로, 정면 3칸에 측면 2칸으로 되어 있습니다.
마곡사의 첫 번째 관문인 해탈문은 겹처마 팔작지붕집이지만 천왕문은 1출목 익공식(翼工式) 공포(拱包)를 짜 올리고 전후면 공포 사이에는 화반(花盤)을 하나씩 설치한 겹처마 맞배지붕으로 된 박공지붕집입니다.
중앙 칸에는 동서남북의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신장인 사천왕상 (四天王像)을 조성해 안치했습니다. 건립 연대는 알 수 없으며 내부에 걸린 편액(篇額)에는 “1910년 6월에 중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출처: 마곡사 홈피]
천왕문을 지나 다리를 건너기 전 좌측으로 가서 명부전을 봤다. 조금 더 위에 있는 국사당은 생략했다.
◈ 명부전
업장 소멸 명부전
“살아있는 모든 것은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죽음을 말하니 무섭다구요. 생자필멸(生者必滅)이라, 자연의 이치는 생(生)을 간직한 모든 이에게 평등합니다. 죽음 역시 그렇지요.
당신은 업보와 윤회에 대해 얼마나 확신하고 있습니까. 믿는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리 확신하지는 못할 겁니다.
명부전은 죽음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해 보면서 그 동안의 업장을 참회하고 소멸하는 기도처입니다.
지장보살님은 지옥에서 고통 받는 모든 중생들까지 다 구제할 것을 서원하신 보살님이십니다.
그러하기에 지장보살님께 기도하면 과거와 현재의 모든 업보와 죄를 소멸할 수 있습니다. 지장보살님을 모시고 있는 명부전은 특히 군왕대의 좋은 기운이 모인 곳으로, 참회 정진에 특히 좋은 정진 터입니다.
마곡사의 명부전은 1939년 건립되어 오늘에 이르는 전각입니다. 건물에는 지장보살님을 중앙 불단에 모시고 있으며 좌우에 ‘ㄷ’자형의 불단을 만들어 저승의 심판관인 시왕님을 모셨습니다.
[출처: 마곡사 홈피]
다시 다리(극락교) 쪽으로 이동했다.
극락교를 건너면 북원 구역이다.
마곡사 북원은 대광보전과 오층석탑이 있는 교화의 공간이다.
마곡사는 태화산 산골짜기 평지에 자리를 잡고 있으며, 경내에 모두 19동의 전각과 12개의 암자가 있는데, 그 위치에 따라 남원과 북원으로 구분하고 있다. 마곡사는 약8,000여 평의 면적에 경내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마곡천 계곡을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나뉘어 있어 마치 두 개의 사찰이 자리한 듯 보인다.
이중 북쪽 권역인 북원에는 대웅보전, 대향각, 응진전, 범종각이 있고, 승려들이 생활하는 심검당, 고방, 요사 및 백범 김구의 자취가 남아 있는 백범당과 향나무 등이 있다.
오층석탑의 북쪽에 대광보전을 짓고, 다시 축대 위에 대웅보전이 자리한 「일탑쌍금당(一塔雙金堂)식의 배치는 매우 희귀한 사례이다.
[출처: 마곡사 홈피]
수많은 사각형 등이 매달린 극락교를 건너니 가장 먼저 멋지게 생긴 범종각이 반긴다. 범종각 좌측으로 상선약수가 있다.
이어 마당 한 가운데 화분으로 절 모양을 해 놓았고 그 뒤로 오층석탑이 있다. 오층석탑 뒤에는 대광보전이 있다.
「한국33관음성지 제5호 마곡사」라고 쓰인 사각형의 깜찍한 입간판을 보고, 대광보전 우측에 있는 심검당으로 향했다. 심검당 건물 좌측에는 「마곡사」라고 써진 작은 현판도 걸려있다.
◈ 오층석탑
나라의 기근 막는 오층석탑
대광보전 앞에 위치한 오층석탑은 보물 제799호로, 일명 다보탑 또는 금탑이라고도 부릅니다.
탑의 2층 네 면에는 소박한 솜씨로 ‘사방불’이 양각되어 있으며 상륜부에는 청동제인 풍마 등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라마식 보탑과 유사한 점으로 보아 원나라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사방불이란 동서남북의 방위개념으로 모든 방향을 포괄하는 상징이기도 하므로 사방불은 모든 공간에 부처님이 영원히 거주한다는 불신상주의 전형적인 모델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현재불에서 과거불과 미래불이라는 삼세불로의 확대는 시간을 횡으로 가르고 다시 공간적으로 투영되어 사방(四方), 팔방(八方), 시방(十方)에 현재불이 등장함으로서 현재의 다방불, 천불, 삼 천불 사상으로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사상적 경향은 모든 중생이 본래 불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의 모든 존재가 이미 깨달은 상태에 있다는 내재불 사상으로 발전했습니다. 오층석탑에는 나라의 기근을 3일간 막을 수 있다는 전설도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 대광보전 (보물 802호)
앉은뱅이 업장 소멸한 대광보전
앉은뱅이, 그가 걸어 나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부처님의 자비를 모든 살아있는 것들에 세세생생 회향하겠노라고 다짐했다. 그날은 그가 부처님께 공양 올릴 삿자리를 짜기 시작하면서 앉은뱅이로서의 삶을 거두고 걸을 수 있게만 된다면, 그 자비광명을 얻게 만 된다면 이생을 넘어 세세생생 보시하는 삶을 살겠노라고 맹세하고 부처님께 의지하며 생활한지도 어느덧 100일째 되는 날이었다. 그는 이미 자신이 너무도 주제 넘는 소원을 품었던 터라 더없이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내가 가진 업보가 그 얼마나 큰데 감히 부처님께 그런 소원을 빌다니! 얼마나 더 공덕을 쌓아야 그 동안 지은 억겁의 죄업을 다 씻을 수 있을 것인가, 슬프도다 슬프도다.’
지난 100일 동안의 기도 끝에 깨달은 것은 첫째도 참회요, 둘째도 참회였다. 그러한 나날이 계속 될수록 그는 걷게 되는 것을 염원하기보다는 길가에 무심히 핀 들꽃이 소중하고 그것이 살아있음을,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며 그 무엇에건 감사하게 되었다. 들꽃과 함께 호흡하고 나를 느끼는 것 자체만으로도 그는 부처님께 감사했다. 일체의 삼라만상에 부처님의 자비를 회향하겠노라고 다짐하는 날이 늘어갔다. 그렇게 100일이 채워졌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삿자리가 완성되었다. 그는 부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성치 않은 다리를 끌고 부처님께 기어가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지극한 마음으로 절을 올리고 법당을 나왔다.
그런데 이것이 어찌된 일인가? 그가 걸어 나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자신도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그는 어느새 걷고 있었다. 그는 그 파란 하늘과 푸른 숲, 무심히 흐르는 마곡천을 바라보며 부처님의 자비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는 다시 한 번 또 다짐했다. 이 같은 부처님의 자비를 하늘과 바람과 나무와 숲, 그리고 모든 살아있는 이들에게 회향하겠노라고, 그리하여 나누는 삶, 자비의 삶을 살아가겠노라고.
대광보전에는 ‘삿자리를 짠 앉은뱅이’ 전설이 담겨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법당 안에 삿자리가 깔려 있었습니다.
대광보전은 마곡사의 중심 법당으로 1788년에 중창되었으며 보물 제802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대광보전 내부에는 비로자나 부처님이 건물 서쪽에서 동쪽을 바라보도록 특이하게 봉안되어 있습니다. 비로자나 부처님은 진리 자체를 상징하는 부처님으로, 진리의 몸이 온누리에 두루 비치는 광명의 빛을 내어 모든 이들을 지혜의 길로 이끌어 주십니다.
대광보전의 후불탱화는 영산회상도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영축산에서 설법하는 장면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1788년 조성된 이 영산회상도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중심으로 6대보살, 10대 제자, 용왕과 용녀, 사천왕으로 구성되어 있지요. 비로자나 부처님 뒷벽에는 18세기 후반 조선회화의 특징을 그대로 살린 백의수월관음도가 봉안되어 있습니다.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환희심을 불러일으키는 관음보살님으로 이름나 있습니다.
◈ 대광보전 현판
시문서화 사절로 꼽히던 표암 강세황(姜世晃, 1712~1791)의 글씨이다.
글씨체는 약간 흘림체로 힘이 있고 유려하다.
본관 진주(晋州). 자 광지(光之). 호 첨재(添齋)·표옹(豹翁)·노죽(路竹)·산향재(山響齋)·표암(豹菴). 시호 헌정(憲靖).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나, 8세 때 시를 짓고, 13~14세 때는 글씨에 뛰어난 솜씨를 보여, 소년기에 쓴 글씨조차도 병풍을 만드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아버지의 사랑과 교육을 받았으며, 매형이었던 임정(任珽)의 영향도 크게 받았다. 처남 유경종 외에도 허필(許佖)·이수봉(李壽鳳) 등
과 절친하게 지냈으며, 이익·강희언 등과도 교유하였다. 당대의 유명한 화가였던 김홍도·신위 등도 그의 제자들이다. 벼슬에 뜻이 없어 젊은 시절에는 주로 작품활동에만 전념하였다. 32세 때 가난 때문에 안산(安山)으로 이주한 뒤에도 오랫동안 학문과 서화에만 전념하였다. 처음 벼슬을 한 것은 61세로, 영조의 배려에 힘입어 관계에 진출하게 되었다. 이후 64세 때 기구과(耆耉科), 66세 때 문신정시에 장원급제하였으며, 영릉참봉·사포별제(司圃別提)·병조참의·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하였다. 72세 때 북경사행(北京使行), 76세 때 금강산 유람을 하고, 기행문과 실경사생 등을 남겼다. 시·서·화의 삼절로 불렀으며, 식견과 안목이 뛰어난 사대부 화가였다. 그 자신은 그림제작과 화평(畵評)활동을 주로 하였는데, 이를 통해 당시 화단에서 ‘예원의 총수’로 한국적인 남종문인화풍을 정착시키는 데 공헌하였다. 이밖에도 진경산수화를 발전시켰고, 풍속화·인물화를 유행시켰으며, 새로운 서양화법을 수용하는 데도 기여하였다. 평생 동안 추구한 그의 서화의 세계는 궁극적으로 습기(習氣)도 속기(俗氣)도 없는 경지에 이르는 것이었다. 산수·화훼가 그림의 주소재였으며, 만년에는 묵죽으로 이름을 날렸다. 작품으로는 《첨재화보(添齋畵譜)》 《벽오청서도》 《표현연화첩》 《송도기행첩》 《삼청도》 《난죽도》 《피금정도》 《임왕서첩(臨王書帖)》 등이 있으며, 54세 때 쓴 《표옹자지(豹翁自誌)》에 있는 자화상을 비롯하여 7~8폭의 초상화를 남겼다.
◈심검당 현판
심검당 현판은 정조 연간에 청백한 관리로 이름난 송하 조윤형(曺允亨, 1725~1799)의 글씨이다.
청빈한 그의 인품을 보여주듯 굵직하면서도 날카로운 느낌으로 '심검'이라는 의미와 상통하는 글씨체이다.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치행(穉行), 호는 송하옹(松下翁). 할아버지는 판결사 조하기(曺夏奇)이며, 아버지는 개성부유수 조명교(曺命敎)이다.
문음(門蔭)과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1766년(영조 42) 처음 벼슬길에 나간 뒤 1781년(정조 5) 선공감주부가 되었으며, 1784년 예조정랑을 역임하였다. 이어서 선공감부정(繕工監副正)을 거쳐 보덕(輔德)이 되어 책례도감상례(冊禮都監相禮)를 겸하였다.
그 뒤 안악군수·광주목사(廣州牧使) 등 3현·2군·1목의 수령을 역임하고 돌아와 1791년 호조참의가 되었으며, 1797년에는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가 되었다. 그림과 글씨에 능하였는데, 풀·대나무 등의 묵화를 잘 그렸다.
글씨는 초서·예서를 잘 써서 일찍이 서사관(書寫官)을 역임하였으며, 위로는 대신들로부터 아래로 조례(皁隷)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그의 글을 얻으려 하였다.
작품으로는 「유점사풍악당대사비(楡岾寺楓嶽堂大師碑)」·「이보혁무신기공비(李普赫戊申紀功碑)」·「용흥잠저고정기(龍興潛邸古井)」 등을 썼다.
◈ 마곡사 현판
마곡사 현판은 근대 서화가인 해강(海剛) 김규진(金圭鎭. 1868~1933) 의 글씨이다.
모든 서법에 자유로왔으며 특히 대필서(代筆書)가 당대에 독보적이었다고 한다. 현판 양족을 초화와 화훼로 꾸미고 초서로 썼다. 김규진의 본관은 남평(南平), 자는 용삼(容三), 호는 해강(海岡)이며, 그 외 백운거사(白雲居士) 취옹(醉翁) 만이천봉주인(萬二千奉主人) 등 10여 개가 있다. 평남 중화 출생. 8세부터 장인 이소남(李小南)에게 글씨를 배우고 18세 때 청(淸)나라에 유학하여 서화(書畵)의 명적(名蹟)을 연구하였다.
전서(專書), 예서(隸書), 해서(骸書), 행서(行書), 초서(草書)에 모두 묘경(妙境)을 이루었고, 산수화 화조화(花鳥畵)를 잘 그렸으며 특히 난죽(蘭竹)은 절묘하였다. 그는 사군자(四君子)도 즐겨 그렸고 글씨는 대자(大字)를 특히 잘 썼다. 영친왕이은(英親王李垠)에게 서법(書法)을 가르쳤다. 한국 최초로 사진술을 도입하고 어전(御前)사진사가 되었다. 한편, 안중식(安仲植) 조석진(趙錫眞)과 함께 서화협회를 창설하여 후진을 양성하는 한편, 경향 각지에서 화전을 개최하여 서화 예술의 계몽에도 진력하였다. 저서에 <해강난죽보><육체필론><서법진결><금강유람가> 작품으로는 글씨에 <기법보살><천하기절><금수강산><대웅전><백마장강><촉석루><가야산해인사><보신각><희정당대조전><태극전> 그림에 <외금강만물상도><소상대죽도><대부귀길상도> 등이 있다.
[출처: 마곡사 홈피]
대광보전을 본 후 수 많은 연등이 걸린 계단을 올라가 대웅보전을 봤다.
◈ 대웅보전 (보물 801호)
아들 점지해 주는 대웅보전
싸리나무 기둥 안고 돌면 아들을 낳는다는 대웅보전!
무슨 말이냐구요?
2층으로 된 대웅보전은 통층으로 전각의 내부에는 싸리나무 기둥이 네 개가 있는데 여기에도 흥미로운 설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설화의 내용인즉 이렇습니다.
사람이 죽어 저승의 염라대왕 앞에 가면‘그대는 마곡사 싸리나무 기둥을 몇 번이나 돌았느냐?’고 묻는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많이 돌수록 극락길이 가깝기 때문이지요. 아예 돌지 않았다고 하면 지옥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이생에서 아들이 없는 사람에게는 마곡사의 싸리나무 기둥을 안고 돌면 아들을 낳는다고 일렀다고 합니다. 이런 재미난 전설로 인해 지금도 이 싸리나무 기둥은 윤기가 나고 손때가 묻어있습니다. 아들을 낳고 싶은 아낙이 많아서이지요.
대웅전 혹은 대웅보전은 법화경에 석가모니 부처님을 큰 영웅이라 한데서 유래한 것으로 석가모니 부처님이 주석하시는 집이라는 뜻입니다.
마곡사 대웅보전은 보물 제801호로 1785년에서 1788년에 걸쳐 중수되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을 중심으로 양옆에 약사여래부처님과 아미타부처님이 모셔져 있습니다. 이때의 부처님들은 공간적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三世)를 대표하므로 삼세불이라고도 부릅니다.
[출처: 마곡사 홈피]
대웅보전에서 내려와 백범당을 보았다. 백범당 주변으로는 김구 선생 은거 기념식수 향나무가 자라고 있다.
◈ 마곡사와 백범 김구
마곡사에는 백범 김구 선생이 머물다 간 백범당이라는 건물이 있고 그 옆으로는 김구 선생이 해방 후 1946년 여러 동지들과 이곳을 찾아와 기념식수를 한 향나무가 아직도 파랗게 자라고 있다.
백범선생은 마곡사를 떠난 지 근 50년 만에 돌아와 대광보전 기둥에 걸려있는 주련 却來觀世間 猶如夢中事(각래관세간 유여몽중사 : 돌아와 세상을 보니 모든 일이 꿈만 같구나)라는 원각경에 나오는 문구를 보고 감개무량하여 이 향나무를 심었다 한다.
백범 선생은 동학교도에서 승려, 독립군, 상해 임시정부 초대 주석에 이르기까지 투쟁과 투옥 그리고 망명으로 점철된 삶이었지만 언제나 해방된 조국, 하나 된 조국의 뚜렷한 목표가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후대의 사람들은 선생의 고절한 생을 흠모하는 것이다.
백범 선생은 명성황후가 시해된 1896년 일본군 중좌를 살해하고 살인범으로 낙인찍혀 인천교도소에서 사형수로 복역 중 그곳을 탈옥하여 1898년 마곡사에서 은신하다가 하은당이라 불리는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법명을 원종(圓宗)이라 하였다.
백범일지에는 그의 출가에 대한 기록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고 있다.
“사제(師弟) 호덕삼(扈德三)이 머리털을 깎는 칼(削刀)을 가지고 왔다. 냇가로 나가 삭발진언을 쏭알쏭알 하더니 내 상투가 모래 위로 뚝 떨어졌다. 이미 결심을 하였지만 머리털과 같이 눈물이 뚝 떨어졌다.“
출가 당시의 착잡했던 심경이 잘 묘사되어 있다. 지금도 마곡사에는 김구 선생이 삭발했던 바위가 있고 지금은 마곡사와 공주 시청이 이곳 삭발바위와 마곡천을 잇는 다리를 놓아 백범교라 부르고 그곳에서 마곡천 절경을 굽어보는 마곡사 또 다른 명소가 되었다. 또한 마곡사 생태농장에서 군왕대로 이어지는 <백범 솔바람 명상 길>을 두어 마곡사를 방문하는 사람들이 1시간가량 산보하기 좋다.
백범 선생이 지냈던 백범당에는 백범선생의 진영(眞影)과 1946년 마곡사를 방문했을 때 마을 사람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 걸려 있는데 백범 선생 뒤로는 왼쪽에는 완장을 찬 좌익이 서있고 오른 쪽에는 넥타이를 맨 우익이 서있다. 이렇듯 백범선생은 사상 보다는 하나 된 조국을 더 원하였다.
사진 옆에는 백범선생이 평생 좌우명으로 삼았던 친필 휘호가 있는데 그것은 서산대사의 선시로 다음과 같다.
踏雪野中去 (답설야중거)
不須胡亂行 (부수호란행)
今日我行跡 (금일아행적)
遂作後人程 (수작후인정)
눈 덮인 들판을 밟고 갈 적에
어지러이 거어선 아니되겠지
오늘 내가 걸었던 길을
뒷사람이 그대로 따를테니까.
또한 이 절은 김구(金九)와 인연이 깊은 사찰이다. 한말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한 일본인 장교 쓰치다[土田壞亮]를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 나루에서 죽인 김구는 인천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다가 탈옥하여 이 절에 숨어서 승려를 가장하며 살았다. 지금도 대광명전 앞에는 김구가 심은 향나무가 있는데, 그 옆에 ‘김구는 위명(僞名)이요 법명은 원종(圓宗)이다’라고 쓴 푯말이 꽂혀 있다. 현재 이 절은 충청남도 70여 개 말사(末寺)를 관장하고 있다.
[출처: 마곡사 홈피]
이어 응진전, 관음전, 2004년 지정된 템플스테이 전각까지 보고는 극락교를 건넜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극락교(極樂橋)를 사이에 두고 보물 제801호인 공주 마곡사 대웅보전과 보물 제800호인 공주 마곡사 영산전(靈山殿), 보물 제802호로서 천장의 무늬가 아름다운 공주 마곡사 대광보전(大光寶殿), 강당으로 사용하는 흥성루(興聖樓), 해탈문, 천왕문, 16나한과 2구의 신장을 모신 응진전(應眞殿), 명부전이 있으며, 응진전 맞은편에는 요사채인 심검당(尋劍堂)이 ㄷ자형으로 크게 자리 잡고 있다.
또 영산전 옆에는 벽안당(碧眼堂)과 매화당(梅花堂) 등이 있으며, 그 밖에도 염화당(拈花堂)·연화당(蓮華堂)·매화당(梅花堂) 등 승려가 거처하는 요사채가 매우 많다. 이들 건물 중 영산전은 이 절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서 조선 중기의 목조건축 양식을 대표할만한 것이다. 그 현판은 세조가 김시습(金時習)을 만나기 위해서 이 절에 왔다가 만나지 못한 채 돌아가면서 남긴 필적이라 한다.
또 대웅보전은 1651년에 각순이 중수한 것으로, 현판은 김생(金生)의 글씨라고 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특이한 2층 건물로 조선 중기의 사원건축 양식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가치가 있는 문화재이며, 건물의 기둥을 안고 한 바퀴 돌면 6년을 장수한다는 전설이 전한다.
이 밖의 중요문화재로는 보물 제269-1호로 지정된 감지은니묘법연화경 권1과 보물 제270호로 지정된 감지금니묘법연화경 권6, 보물 제799호로 지정된 공주 마곡사 오층석탑, 보물 제1260호 공주 마곡사 석가모니불괘불탱,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20호인 마곡사 동제 은입사향로,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62호인 마곡사 동종 등이 있다.
이 중 오층석탑은 풍마동다보탑(風磨洞多寶塔)이라고도 하는데, 인도에서 가져온 것이라고도 하나 라마교 탑과 비슷하여 원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고 있다. 이 탑은 임진왜란 때 무너져 탑 안의 보물들이 도난당한 지 오래이나 1972년에 수리할 때 동제 은입사향로와 문고리가 발견되었다. 이 탑은 전 국민의 3일 기근을 막을만한 가치가 있다는 전설이 있으며, 한국·인도·중국 등 세계에서 3개밖에 없는 귀중한 탑이라고 한다.
이 밖에도 대광보전 마루에는 나무껍질로 만든 30평 정도의 삿자리가 있다. 이 자리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한다. 조선 후기에 이름 없는 앉은뱅이가 이 절을 찾아와서 부처님께 백일기도를 드렸다. 그는 불구를 고치기 위해서 백일기도하는 동안 틈틈이 이 삿자리를 짰다. 이 삿자리는 참나무를 한 끝에서 잇고 또 이어 한 줄로 완성한 것인데, 그는 이 자리를 짜면서 법당에 봉안된 비로자나불에게 자신의 불구를 낫게 해줄 것을 기도하였다. 백일 뒤 일을 다 끝내고 밖으로 나가는데 자신도 모르게 일어서서 법당문을 걸어 나갔다고 한다.
부속암자로는 심정암(深淨庵)·부용암(芙蓉庵)·북가섭암(北迦葉庵)·토굴암(土窟庵)·백련암(白蓮庵)·영은암(靈隱庵)·대원암(大願庵)·은적암(隱寂庵) 등이 있다. 이 절은 ‘춘마곡추갑사(春麻谷秋甲寺)’라는 말이 전해질 만큼 봄 경치가 뛰어나다. 백련암에서 바라보는 전망은 특히 빼어나며, 북가섭암의 바위 뒤에 있는 천미장군수(天米將軍水)는 뛰어난 약수이다. 또 마곡사 앞 냇가 암벽에는 부여 고란사에만 있는 것으로 알려졌던 고란초가 자생하고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되짚어 주차장에 도착하여 차량을 회수한 후 귀가했다.
▶세계유산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 공주 마곡사 사진 1-2 보기: https://blog.daum.net/joingi61/15965688
▶세계유산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 공주 마곡사 사진 2-2 보기: https://blog.daum.net/joingi61/15965689
세계유산 공주 편(3곳)을 모두 답사해서 기분이 좋았지만 시기가 추석명절을 앞 둔 일주일 전이라 고속도로 교통량이 많아서 갈 때 서울 중계동에서 공주 공산성까지 4시간 30분, 올 때도 마곡사에서 서울 중계동까지 4시간 30분 걸렸다.
앞으로는 명절 앞두고는 좀 더 일찍 움직이던가. 아니면 밀리지 않는 한수 이북으로의 여행을 해야겠다.
다음 행선지로는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8군데)중 부여(4곳. 관북리유적과 부소산성, 정림사지, 능산리고분군, 나성)를 갈 예정인데 지금부터 가슴이 설렌다.
7.참고자료
(1) 세계유산
한국의 세계유산 목록 [2021.09.14일 현재]
★ 한국의 세계유산(문화, 자연, 복합유산) 목록
1.해인사 장경판전(1995년)
2.종묘(1995년)
3.석굴암과 불국사(1995년)
4.창덕궁(1997년)
5.화성(1997년)
6.경주역사유적지구(2000년)
7.고창, 화순, 강화의 고인돌 유적(2000년)
8.제주 화산섬과 용암 동굴(2007년) ※세계자연유산
9.조선 왕릉(2009년)
10.한국의 역사마을 : 하회와 양동(2010년)
11.남한산성(2014년)
12.백제역사유적지구(2015년)
13.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2018년) ※통도사, 부석사, 봉정사, 법주사, 마곡사, 선암사, 대흥사
14.한국의 서원(2019.07.06) ※소수서원(경북 영주), 도산서원(경북 안동), 병산서원(경북 안동), 옥산서원(경북 경주), 도동서원(대구 달성), 남계서원(경남 함양), 필암서원(전남 장성), 무성서원(전북 정읍), 돈암서원(충남 논산) 등 9곳.
15.한국의 갯벌(2021.07.26). 보성-순천갯벌(전남 보성, 순천), 서천갯벌(충남 서천), 고창갯벌(전북 고창), 신안갯벌(전남 신안). ※세계자연유산
★ 한국의 인류무형문화유산 목록
1.종묘제례(宗廟祭禮) 및 종묘제례악(宗廟祭禮樂)(2001년)
2.판소리(2003년)
3.강릉단오제(2005년)
4.처용무(2009년)
5.강강술레(2009년)
6.제주 칠머리당 영등굿(2009년)
7.남사당놀이(2009년)
8.영산재(2009년)
9.대목장(大木匠), 한국의 전통 목조 건축(2010년)
10.매사냥, 살아있는 인류유산(2010년)
11.가곡(歌曲), 국악 관현반주로 부르는 서정적 노래(2010년)
12.줄타기(2011년)
13.택견, 한국의 전통 무술(2011년)
14.한산(韓山) 모시짜기(2011년)
15.아리랑, 한국의 서정민요(2012년)
16.김장, 김치를 담그고 나누는 문화(2013년)
17.농악(農樂)(2014년)
18.줄다리기(2015년)
19.제주해녀문화(2016년)
★ 한국의 세계기록유산 목록
1.조선왕조실록(1997년)
2.훈민정음(해례본)(1997년)
3.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2001년)
4.불조직지심체요절 하권(佛祖直指心體要節 下卷)(2001년)
5.조선왕조 의궤(儀軌)(2007년)
6.고려대장경판 및 제경판(高麗大藏經板-諸經板)(2007년)
7.동의보감(東醫寶鑑)(2009년)
8.일성록(日省錄)(2011년)
9.1980년 인권기록유산 5 ․ 18 광주 민주화운동 기록물(2011년)
10.새마을운동 기록물(2013년)
11.난중일기(亂中日記): 이순신 장군의 진중일기(陣中日記)(2013년)
12.한국의 유교책판(2015년)
13.KBS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기록물(2015년)
14.국채보상운동 기록물(2017년)
15.조선통신사에 관한 기록-17세기~19세기 한일 간 평화구축과 문화교류의 역사(2017년)
16.조선왕실 어보와 어책(2017년)
[출처: 유네스코와 유산 홈피 http://heritage.unesco.or.kr/ ]
(2) 공주10경
①송산리고분군: 백제의 혼을 담은 타임캡슐이 열리다. 세계유산.
②공산성: 백제 고도의 역사를 담다. 세계유산.
③금학생태공원: 깊은 산 속 청정 자연과 마주하다.
④계룡산국립공원: 수려한 자연 성릉 위, 용이 춤추다.
⑤갑사: 천년 고찰 산사의 정취를 품다.
⑥마곡사: 고즈넉함 속에서 선인의 지혜를 전하다. 세계유산
⑦금강: 천리 물길로 공주의 중심을 수놓다.
⑧고마나루: 푸른 솔밭에서 설화 속 곰을 만나다.
⑨동학사 은선폭포: 신선들이 놀던 곳.
⑩석장리: 공주에서 구석기시대의 흔적을 찾다.
(3)한국의 33 관음성지: https://blog.daum.net/joingi61/15964550
8.답사경비 (2인 기준)
①통행료: 9,900
②주유비: 40,000
③간식비: 10,000
④식대: (아침:14,500), (점심:28,000)=42,500
⑤입장료: 공산성(1,200원), 송산리고분군(1,500원), 마곡사(3,000원)=3,000원(1인)
※공산성과 송산리고분군은 코로나19로 무료입장.
⑥합계: 105,4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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