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공산성, 무령왕릉과 왕릉원)를 찾아서
1.답사날짜: 2021년 9월 14일(화)
2.날씨: 맑음. 구름 잔뜩
3.동행인원: 2명(여행님)
4.답사코스: 공산성→송산리고분군→마곡사
5.답사시간
-07:30 중계역 발
-12:00 공산성 주차장 착
-12:00~13:50 (1시간 50분) 공산성 답사
-14:40~15:25 (45분) 송산리고분군 답사
-16:00~17:05 (1시간 5분) 마곡사 답사
-17:05 귀경길 시작
-21:35 귀가
6.답사 후기
9월 4일 논산 돈암서원(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9곳<소수서원(경북 영주), 도산서원(경북 안동), 병산서원(경북 안동), 옥산서원(경북 경주), 도동서원(대구 달성), 남계서원(경남 함양), 필암서원(전남 장성), 무성서원(전북 정읍), 돈암서원(충남 논산)> 중 하나. 2019.07.06 등재)을 답사한 후 세계유산에 관심이 있어서 서울에서 가까운 공주에 있는 세계유산을 찾았다.
공주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백제역사유적지구의 8곳 중 2곳(공산성, 송산리고분군)과 세계유산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 7개의 사찰 중 1곳인 마곡사, 이렇게 총 3군데가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 우리나라 유네스코 세계유산 12.백제역사유적지구: 2015년 7월 4일. 한국에서 12번째로 등재 13.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 2018년 6월 30일. 한국에서 13번째로 등재 14.한국의 서원: 2019년 7월 6일. 한국에서 14번째로 등재 15.한국의 갯벌: 2021년 7월 26일. 한국에서 15번째로 등재 ※현재(2021년 9월 14일) 한국의 세계유산(문화, 자연, 복합유산)은 모두 15개 이다. |
7시30분에 중계동에서 여행님을 만나 공주로 향했다.
추석을 일주일 앞 둔 화요일인데 많은 차량들로 지체되었다.
기흥휴게소에 들려 아침식사를 했는데 기흥휴게소는 출입구 마다 직원을 상주시켜 철저하게 방역수칙을 지키고 있어서 마음이 든든했다.
4시간 30분 걸려 공산성 소형 주차장에 도착했는데 많은 차량으로 주차할 곳이 없어서 한 바퀴 더 돈 다음에 빈 공간이 생겨 주차를 하고는 공산성 입구로 향했다.
주차장에서 공산성 입구까지 약 280m 거리에 4~5분 걸린다.
주차장 한쪽에는 2018년에 발굴 조사한 금성동 유적지가 있고, 백제역사유적지구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 백제역사유적지구
백제역사유적지구(百濟歷史遺跡(=遺蹟)地區, 영어: Baekje Historic Areas)는 공주시, 부여군, 익산시에 있는 백제 관련 역사유적지구이다. 2015년 7월 4일 독일 본에서 열린 제39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WHC)에서 세계유산 등재 심사를 최종 통과하여 대한민국의 12번째 세계유산이 되었다.
백제역사유적지구는 총 8개의 유적을 포함한 연속유산으로 공주시에 2곳(공산성, 송산리 고분군), 부여군 4곳(관북리 유적과 부소산성, 능산리 고분군, 정림사지, 나성), 익산시에 2곳(왕궁리 유적, 미륵사지)을 포함한다.
세계유산위원회와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 유네스코 세계유산센터 산하 자문기구로서 문화유산의 등재 여부를 위원회에 권고)는 동 유산이 한국·중국·일본 동아시아 삼국 고대 왕국들 사이의 상호 교류 역사를 잘 보여준다는 점, 백제의 내세관·종교·건축기술·예술미 등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 백제 역사와 문화의 특출한 증거라는 점 등을 높이 평가하였다. 북한과 합쳐서 삼국시대 유적은 다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이번 세계 유산 등재는 충청권에서는 최초로 선정 되었다.
▶공주시
공산성(사적 제12호)
송산리 고분군(사적 제13호)
▶부여군
관북리 유적(사적 제428호)과 부소산성(사적 제5호)
능산리 고분군(사적 제14호)
정림사지(사적 제301호)
나성(사적 제58호)
▶익산시
왕궁리 유적(사적 제408호)
미륵사지(사적 제150호)
[출처: 위키백과]
공산성 주변은 18일 무령왕 동상 제막행사로 인한 공사를 하고 있어서 어수선했다.
▣ 공주시 1500년전 무령왕, 공산성 앞에서 만난다.
2021.09.15
18일 무령왕 동상 제막행사 개최
[동양일보 유환권 기자]백제 중흥을 이끈 무령왕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공주 공산성 앞에 우뚝 선다.
15일 공주시에 따르면 올해 무령왕릉 발굴 50년, 갱위강국 선포 1500년을 맞아 백제 중흥을 이끈 25대 무령왕의 동상을 무령왕이 현 왕릉에 안장된 날인 9월 18일(음력 8월 12일) 공산성 회전교차로에 건립한다.
입상 형태인 무령왕 동상은 중국(양나라)으로 갱위강국 선언 국서를 보내는 모습으로, 동상 6.6m, 좌대 2.9m로 높이는 총 9.5m에 달한다.
원형 좌대에는 갱위강국 선포와 중국과의 외교, 누파구려, 농지 정리 시행 등 백성을 위하는 내용을 표현한 부조가 새겨졌다.
동상은 이천의 주물공장에서 약 5개월 동안 제작됐는데 몸체와 좌대 등 4~5개 부분으로 나눠 제작한 뒤 이를 이어 붙이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좌대 안에 구동부를 설치해 무령왕 동상이 회전할 수 있도록 제작된 점이 특징이다.
이에 따라 시는 10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는 공주 원도심인 원도심 쪽을 바라보게 하고 5월부터 8월까지는 활발했던 교역 백제의 의미를 부여해 중국 방향인 서쪽을 바라보게 된다.
또한 9월에는 1500년 전 ‘누파구려 갱위강국’을 선포한 무령왕의 뜻을 담아 고구려가 있던 북쪽으로 향한다.
김정섭 시장은 “무령왕이 다시 강국이 되었음을 선포한 지 1500년이 흐른 지금 무령왕의 동상을 온 시민들과 함께 건립할 수 있게 돼 매우 뜻깊게 생각한다”며, “백제의 숨결을 간직한 역사도시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며 시민들의 자긍심을 한층 드높여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무령왕 동상 건립에는 1214명의 시민들이 모은 4600여만원이 보태졌다. 공주 유환권 기자 youyou9999@dynews.co.kr
[출처 : 동양일보 '이땅의 푸른 깃발'(http://www.dynews.co.kr)]
백제 고도의 역사를 담은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 공산성의 아름다움에 반하다!
공산성 입구에 도착했다.
공산성 입장료가 1,200원인데 매표소 운용을 하지 않아서 그냥 올라갔다(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한 내부건물 휴관으로 인해 무료 개방 운영중). 입구 좌측에는 화강암과 대리석의 사각형 대형 표지석이 세워져 있는데 앞면에는 「세계유산 백제역사 유적지구 공산성」이라고 쓰여 있고, 뒷면에는 백제역사 유적지구 지도가 그려져 있다.
금서루 올라가는 길 우측에는 상당한 양의 비석들이 세워져 있다. 공주시 곳곳에 흩어져 있던 비석들을 모아 놓은 것인데 송덕비와 제민천교영세비 등 47기가 세워져 있다.
그중 2개의 비석에는 안내판이 별도로 세워져 있는데 「목사(牧使) 김효성 비(문화재자료 제71호)」와 「제민천교 영세비(공주시 향토문화유적 기념물 제20호)」가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한 굽이 돌아갈 즈음 공주 공산성(사적 제12호) 안내판이 나오고, 조금 더 올라가야 비로소 금서루 입구가 나온다.
입구에는 「공산성 깃발이야기」와 「공산성 금서루」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공산성 금서루 (公山城 錦西樓) 공산성 금서루는 공산성 4개 성문 가운데 서쪽 문루이다. 성 안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만드는 과정에서 흔적조차 찾기 어려웠지만 1859년에 편찬된 「공산지公山誌」의 문헌 기록과 지형적 여건 등을 고려하여 1993년에 복원하였다. 현재의 문루는 본래 서문이 있던 자리에서 약간 남쪽으로 이동하여 지은 것이다. 금서루는 비록 새롭게 복원된 것이지만 조선시대 성문의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출처: 현지 안내판] |
▣ 백제의 고도 공주의 상징, 공산성
공산성(사적 제12호)은 백제시대의 대표적인 성곽으로 웅진백제(475~538)를 지킨 왕성이다. 금강이 흐르는 해발 110m 능선과 계곡을 따라 흙으로 쌓은 포곡형(包谷形)산성이다. 백제시대에는 웅진성, 고려시대공주산성, 고려시대 이후 공산성, 인조가 이괄의 난(1624)을 피해 산성에 머문 이후 쌍수산성으로도 불렀다. 조선 선조·인조 때 지금과 같은 석성(石城)으로 개축하였고, 이후 지속적으로 사용된 공산성에서 시대별 역사를 살펴 볼 수 있다.
백제인들이 산위에 왕궁을 지은 이유는 무엇일까? 성벽은 밖에서 오르지 못하게 쌓고(치성雉城), 남북에 두 개의 문루와 적에게 보이지 않는 출입문(암문暗門)을 만들었다. 공산성 옆의 공주 옥녀봉성(충청남도 기념물 제 99호)은 흙으로 쌓은 성(퇴뫼식)으로 공산성의 보조왕성의 역할을 하였다.
* tip
백제문화제 기간에는 공산성 앞에서 금강신관공원까지 부교로 건널 수 있다.
금서루에서는 백제왕국의 위풍당당함을 ‘웅진성수문병근무교대식’으로 볼 수 있고, 금강신관공원에서는 밤풍경이 아름다운 공산성 감상이 가능하다.
[출처: 공주시청 홈피]
이제 공산성을 한 바퀴 돌아야 해서 어느 쪽으로 시작할까 하는 고민도 하기 전에 이미 여행님이 우측으로 올라간다.
성벽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니 S자 금서루 오름길이 멋지고 금서루 앞 쪽의 시가지도 멋졌다. 금서루 뒤쪽으로는 2층 누각인 공산성(公山亭)이 우뚝하다. 금서루 주변에는 백호(백색) 깃발이 바람결에 펄렁이고 있다.
공산성 깃발이야기 공산성 성벽의 동서남북에 배치한 깃발은 송산리 6호분 벽화에 있는 사신도를 재현한 것이다. 사신도는 동서남북의 방위를 나타내고 우주의 질서를 지키는 상징적인 동물로 외부의 나쁜 기운을 막아주는 의미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사신의 개념이나 형상이 표현된 것은 삼국시대에 중국 문화의 전래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송산리 6호분 벽화의 사신도는 당시 왕성했던 백제와 중국 남조와의 국제교류를 보여준다. 깃발의 바탕색은 황색이다. 이것은 백제의 나라색이며 백제시대 사람들은 황색을 우주의 중심이 되는 색으로 생각하여 중히 여겼다고 한다. 그리고 깃발의 테두리는 사신도의 각 동물이 상징하는 색을 반영한 것이다. 깃발의 배치는 송산리 6호분에 그려진 사신도의 위치를 그대로 따랐다. 따라서 동쪽에는 청룡, 서쪽에는 백호, 남쪽에는 주작, 북쪽에는 현무를 각각 배치하였다. [출처: 현지 안내판] |
※청색(청룡), 백색(백호), 적색(주작), 흑색(현무)
주변 경관이 너무 멋져서 잠시 지체했다가 이제 본격적으로 성곽을 따라 갔다.
금서루에서 5분 정도 성곽길을 따라 진행하니 쉼터가 나온다. 이곳에 「서문에서 바라본 공주 시가지」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공산성 정면으로 조선시대 천주교인들의 순교지인 황새바위가 있고, 그 뒤편으로 무령왕릉이 있는 송산리고분군, 우측 강가의 언덕에는 백제시대 제사유적인 정지산 유적, 그리고 배가 닿았던 고마나루가 보인다. 공산성 서문 앞 광장은 음식점과 상점이 가득 메우고 있지만 본래 공주 특산물이었던 미나리를 재배하는 미나리꽝 지대였다고 한다.
쉼터에서 다시 성곽길을 따라 간다. 좌우로 숲이 무성하다.
이어 「한마음 한뜻으로 다시 세운 제민천교」안내판이 나온다.
공주를 가로지르는 제민천은 여름 폭우 때면 범람하고 다리가 떠내려가는 일이 자주 있었는데, 1817년(순조 17)에도 많은 비로 범람하여 제민천 다리가 떠내려가는 일이 생겼다. 공사에 필요한 3천여금이라는 막대한 액수를 걱정하는 사람들은 충청수영과 공주관아에서 비축해둔 군량미, 그리고 고을 마을사람들이 모은 기부금으로 제민천교를 다시 만들었다고 한다.
공산성 서문 앞에 옮겨진 제민천교영세비는 당시의 사실을 자세히 기록하여 공주 사람들의 슬기와 정성이 오래도록 기억되기를 바라며 세운 비석이다.
이어 「인조와 쌍수정 이야기」안내판이 나온다.
공산성 쌍수정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는데, 1624년 인조임금이 왕위에 오른 직후 나라에서 주는 상에 불만을 품은 이괄이란 장수가 반란을 일으켜 왕이 된지 1년도 못 되어 도성을 떠나 공주로 피난을 오게 되었다.
인조는 공산성의 두 그루의 큰 나무에 기대어 시름을 달래곤 했는데, 얼마 후 반란군을 완전히 토벌했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을 놓은 인조는 그동안 버팀목이 되어주었던 나무에 정3품(통훈대부(通訓大夫))의 벼슬을 내리고 금대를 걸어주면서 기쁨을 함께 나누었다고 한다. 훗날 이곳에 지은 정자가 쌍수정이다.
바로 옆에는 「인절미의 고향 공주」, 「공산성 쌍수정」안내판도 세워져 있다.
「공산성 쌍수정」안내판 옆의 계단을 올라가면 쌍수정이 나온다.
쌍수정 (雙樹亭)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49호 공산성 쌍수정은 충청도 관찰사 이수항이 1734년(영조10)에 인조를 기리기 위하여 세운 정자이다. 조선의 제16대 왕인 인조(재위 1623~1649)는 1624년 이괄의 난을 피해 공산성에서 6일간 머물렀는데 당시 인조는 두 그루의 나무 아래에서 난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고 한다. 인조는 난이 진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자신이 기대었던 두 그루의 나무, 즉 쌍수(雙樹)에 정3품의 벼슬을 내렸다. 그 후로 공산성을 「쌍수산성」으로 부르게 되었다. 이수항이 관찰사로 부임하여 나무가 있던 자리에 삼가정(三架亭)을 세웠는데 이 건물이 쌍수정이다. 오늘날의 쌍수정은 1970년에 해체한 후 다시 세운 것으로 조선시대의 쌍수정과 다소 차이가 있다. ※이괄의 난: 이괄(1587~1624)이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가 왕이 된 인조반정의 보상 과정에 불만을 품고 일으킨 난 [출처: 현지 안내판] |
쌍수정에서 정면으로 드넓은 초원지대가 보이는데 이곳이 추정왕궁지(推定王宮址)이다.
쌍수정에서 내려가 추정왕궁지를 살펴봤다.
추정왕궁지 (推定王宮址) 백제가 한성에서 웅진으로 수도를 옮긴 웅진시대 초기의 왕궁터로 추정된다. 1985~1986년 총 2년에 걸친 발굴 조사 때 10칸, 20칸 등의 큰 건물터와 돌로 쌓은 둥근 연못터 및 목곽의 저장시설 등 각종 유적이 확인되었고, 백제의 연꽃무늬 수막새를 비롯하여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출처: 팸플릿] |
「공산성 백제시대 건물지」, 「공산성 백제 목곽고」 등의 안내판이 세워져 있고, 책자형 「추정 왕궁지」「공산성 백제 왕궁지」등의 표지석도 세워져 있다.
「제자리를 찾은 충청감영!」, 「1604년 2월 어느 날의 일기」안내판을 지나니 유형문화재 제35호인 「쌍수정 사적비」가 나온다.
쌍수정 사적비는 이괄의 난과 인조가 공산성으로 피하게 된 사실, 공산성에 머물렀던 6일 동안의 행적, 공산성의 모습 등이 적혀 있다.
인조 때 영의정을 지낸 신흠이 비문을 짓고,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남구만이 글씨를 썼다. 쌍수정 사적비는 1624년 인조가 공주를 떠난 직후 세우려고 했으나 84년이 지난 1708년(숙종 34)에 지금의 비석이 세워졌다.
비는 거북모양의 받침과 목조 지붕 모습의 머릿돌을 갖춘 조선시대의 일반적인 양식을 따르고 있다.
문이 잠겨 있어서 틈 사이로 봤는데 보존상태가 좋았다.
쌍수정 사적비 앞쪽에 대형 벽면TV가 설치된 파고라가 있고 그 아래에는 「공산성 관광객 쉼터」건물이 있다.
다시 추정왕궁터로 돌아와 끝 쪽으로 가보니 한국 제주도 고유종인 왕벚나무가 있는데 엄청 큰 나무로 꽈리를 틀면서 위용을 자랑한다. 여지껏 본 벚나무 중에서 가장 큰 나무였다.
「내 이름은 코끼리, 나는 애물단지가 아니에요!」안내판도 세워져 있다. 그리곤 공산성 백제 연못이 나오는데 주변으로 데크가 깔려 있다.
공산성 백제 연못 (公山城 百濟 蓮池) 백제 연못은 공산성 왕궁 터에서 확인된 백제시대 인공 연못이다. 빗물을 받아 저장하여 연못으로 사용하기도 하였고, 화재가 났을 때는 소방용으로도 사용하였다. 연못은 지름 약 9.5m 정도로 땅을 판 후 다듬지 않은 돌을 쌓아 만들었으며, 바닥에는 너비가 40~50㎝ 정도 되는 얇고 평평하게 다듬은 돌을 깔았다. 연못 벽 뒤에는 물이 새는 것을 막기 위하여 1m 너비로 점토를 두껍게 채웠다. 연못 안에서는 많은 양의 백제시대 토기와 기와조각 등이 출토되었다. [출처: 현지 안내판] |
다시 엄청 큰 왕벚나무가 꽈리를 틀고 굳건히 위용을 자랑하는데 온통 이끼 옷을 입고 있었다. 이곳 추정왕궁터에는 오래된 왕벚나무가 네그루 있다. 모두 천연기념물 아니면 최소한 보호수라는 명칭이 있어야 했는데…, 아무런 내용도 없어서 아쉬웠다.
갑자기 이렇게 큰 규모의 왕벚나무가 꽃이 활짝 필 때의 모습이 궁금했다.
쌍수정 입구로 되돌아가 다시 성곽길을 따라 걷는다.
빨간색(주작)의 깃발이 나온다. 공산성 남쪽에 있는 진남루가 가까워졌다는 이야기 이다.
곧바로 진남루가 나온다.
공산성 진남루 (公山城 鎭南樓)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48호 공산성 진남루는 공산성의 남문이자 정문이며 조선시대에는 삼남(三南)의 관문이었다. 공산성은 사방에 문 터가 확인되는데, 그중에 남문인 진남루와 북문인 공북루는 성문이 남아 있었지만 동문과 서문은 터만 남아 있었다. 이에 1993년 동문 터에는 영동루를, 서문터에는 금서루를 다시 세웠다. 진남루는 여러 차례 고쳐 지었지만 그 위치와 모습은 본래의 것으로 볼 수 있다. 지금 있는 성문은 1971년에 전부 해체하고 다시 세운 것이다. [출처: 현지 안내판] |
진남루 아래로 내려가면 독일에서 온 신부 「노르베르트 베버와 공산성」안내판과 노거수가 나오고, 왼쪽 도로 따라 내려가면 영은사가 나온다.
진남루에는 4개의 벤치도 있어 잠시 쉬어갈 만 했지만 이내 출발했다.
다시 오름길이 시작됐다. 빨간색의 주작 깃발을 보면서 올라간다. 이곳에 식재된 맥문동(麥門冬) 꽃이 피면서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었다.
다소 짧은 맥문동 꽃 구간을 지나 얼마간 진행하니 석성(石城) 구간이 끝이 나고 흙성(土城) 구간이 시작된다.
더불어 청색의 청룡 깃발이 나타났다. 우측 성벽 아래로 암자가 한 채 보이는데 생략했다. 아마 산제당 같았다.
이내 공산성 동쪽에 있는 영동루에 도착했다.
공산성 영동루 (公山城 迎東樓) 공산성 영동루는 공산성 4개 성문 가운데 동쪽 문루로 백제시대 성벽이 축소되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1980년 발굴 당시 문 터와 문 양옆으로 문을 지탱하고 있던 받침돌을 확인하였다. 조사에서 얻은 자료와 1859년(철종 10)에 편찬된 『공산지 公山誌』의 기록을 바탕으로 1993년에 조선시대 성문의 일반적인 모습으로 다시 세웠다. 문루의 이름을 알 수 없어서 2009년 시민 공모를 거쳐 영동루라고 지었다. [출처: 현지 안내판] |
영동루 하단 천정에는 용 그림이 그려져 있고, 위에는 벤치도 설치되어 있다.
토성 위에 깔린 야자수매트길을 따라 조금 진행하니 「동문에서 바라본 공주 시가지」안내판이 나오고, 좌측으로 조금 올라가보니 광복루가 나온다.
광복루 앞에는 「광복루와 백범 김구」안내판이 세워져 있고, 공산성 삼각점도 박혀 있다. 이곳이 공산성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공산성 광복루 (公山城 光復樓)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50호 공산성 광복루는 공산성 동쪽 가장 높은 곳에 있는 2층 누각이다. 공산성 안에 주둔한 군대를 지휘하던 중군영(中軍營)의 문이었으나 일제강점기에 지금의 위치로 옮기고 웅심각(雄心閣)이라 하였다. 1945년 광복 이후 공주 시민들이 힘을 모아 보수하였다. 이듬해인 1946년 4월에 김구, 이시영 등이 공주를 방문하여 이곳을 둘러본 후 광복을 기념하기 위해 이름을 「광복루」로 고쳤다. [출처: 현지 안내판] |
되짚어 성곽으로 돌아와 조금 진행하니 쉼터 데크가 나오는데 벤치는 없다.
이어 「공주 옥룡동 은개골 유적」안내판이 나온다.
공산성과 옥녀봉성 사이에 있는 골짜기인데 이곳에 백제시대 나무방식창고(목곽고) 1동, 움집 4기, 기둥식 건물 2기, 움터(수혈유구) 2기, 고려시대 석곽묘 3기, 주춧돌 건물 1동, 조선시대 움무덤(토광묘) 1기 등 총 43기의 유구가 조사되었다고 한다.
그리고는 「←은개골 역사공원 450m」 이정표도 세워져 있는데 앞으로 송산리고분군과 마곡사도 봐야 해서 은개골 역사공원은 숙제로 남겨두고 다시 성곽길을 제촉했다.
이어 광복루가 나온다. 광복루는 아까 봤기 때문에 패스하고 찻길따라 내려간다.
거목의 느티나무가 나오고 공사 현장이 나온다.
공사 현장 앞에 명국삼장비가 세워져 있고, 안내판도 두 개나 세워져 있다.
공산성 명국삼장비 (公山城 明國三將碑) 유형문화재 제36호 명국삼장비는 정유재란이 일어난 이듬해인 1598년(선조31)에 명나라의 세 장수 이공, 임제, 남방위가 왜군에게 피해를 많이 받은 공주에 들어와 머물면서 주민들을 보호한 업적을 기린 송덕비이다. 명국삼장비는 1599년 금강변에 세웠으나 홍수로 매몰되자 1713년(숙종 39)에 다시 세웠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들이 비석에 쓰여 있던 왜구(倭寇)라는 글자를 지우고 공주읍사무소 뒤뜰에 묻어버렸지만 1945년 광복이 되면서 현재의 위치로 옮겨 세웠다. [출처: 현지 철판 안내판] |
공사는 임류각 보수정비사업인데 2021.06.14~10.30일까지 90일이다.
글쓴이는 문화재여행을 좋아하는데 문화재를 보려고 가면 꼭 한 두 군데 공사를 하고 있어서 늘 아쉬웠다. 이제 우리나라도 살기가 좋아져서 예산을 편성해서 문화재 보수를 많이 하는 것 같았다.
공산성 임류각 (公山城 臨流閣) 임류각은 백제 제24대 동성왕 22년(500)에 왕궁의 동쪽에 지은 누각이다. 높이가 15m에 이르는 건물로 왕과 신하들의 연회 장소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1980년 공산성 발굴 조사 과정에서 고층 누각의 모습으로 확인되어 1993년에 2층 누각으로 다시 세웠다. 현재의 임류각은 백제 건축 양식인 하앙식(下昻式)을 재현하여 세웠으며, 단청 문양은 무령왕릉에서 나온 장신구와 무덤방의 벽돌에 남겨진 무늬를 활용하였다. [출처: 현지 안내판] |
옆에는 「이달의 공주 역사인물」 2020년 9월의 공주역사인물로 선정된 동성왕(東城王. 미상~501)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또한 공산성 장대지 안내판도 세워져 있다.
이제 금강이 보이기 시작했다.
금강을 우측에 두고 제법 넓은 포장도로를 따라 간다.
조금 올라가니 전망이 무척 좋은 곳에 쉼터가 있다. 쉼터 앞에는「서거정과 공주10경」, 「공산성에서 바라본 풍경」안내판도 세워져 있다.
비단같이 아름답다 하여 붙여진 이름 「금강」의 굽이굽이 흐르는 물줄기를 잠시 바라보며 역시 참 아름답다고 생각이 들었다.
이제 내려간다.
그런데 내려가는 경사가 제법 심하다. 조심스럽게 내려가는데 한참을 내려간다.
거의 다 내려갈 즈음 우측 금강변 쪽으로 제법 큰 정자와 연못이 보이고, 포클레인(굴삭기)도 보인다.
다 내려와 확인하니 정자는 만하루(挽河樓)이고, 연못은 연지(蓮池)였다.
이곳도 공사 중이었다.
공산성 연지 보수정비사업으로 2021.03.16~09.11일 까지 공사기간이라고 안내판에 적혀 있었는데 글쓴이가 답사한 날짜가 9월 14일 이었다. 그러면 이미 공사가 끝났어야 했는데 아직도 공사를 하고 있었다.
연지 앞으로 조금 가면 영은사가 나온다.
영은사(靈隱寺)는 세조 4년(1458)에 지은 사찰로 임진왜란 때에는 승병의 합숙소로 사용하였으며, 광해군 8년(1616)에 승장을 두어 전국의 사찰을 관리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대웅전은 도지정유형문화재 제51호이다.
영은사 대웅전을 보고 다시 연지로 왔다. 충남도기념물 제42호인 연지는 단(段)의 형태로 석축(石築)을 정연하게 쌓았으며 동서 양측에 넓은 통로를 둔 것이 특징이고 깊이는 9m이다.
이제 다시 오름길이다.
다 올라가면 충청남도에 있는 잠업 농가에 누에 씨를 보급하기 위해 만든 지하 저장 시설인 잠종냉장고가 나온다. 아쉽게도 철문이 잠겨 있다.
다시 내리막이 나오는데 느티나무 거목이 계속해서 나온다. 이곳 공산성에는 오래된 노거수들이 참 많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어찌 한 개도 보호수로 지정이 안됐을까?…
이제 성곽 길은 평평해지면서 흑색의 현무기가 펄렁이며 반긴다.
이내 공북루가 나온다.
공산성 공북루 (公山城 拱北樓) 유형문화재 제37호 공북루는 공산성의 북쪽 문루로 금강의 남쪽과 북쪽을 오가는 남북통로의 주 출입문이다. 본래 공북루 자리에는 망북루(望北樓)가 있었는데 허물어져 터만 남아 있었다. 충청감영을 충주에서 공주로 이전하면서 1603년(선조36)에 공산성을 크게 고쳐 쌓고, 이때 공북루와 그 옆에 월파당(月波堂)을 함께 지었다. 여러 차례 고쳐 지었으며, 월파당은 1954년에 철거되었다. 공북루의 아래쪽은 성으로 통하는 통로로, 위쪽은 마루를 만들어 금강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장소로 이용하였다. 문루 안에는 여러 편의 글과 시를 걸어 두었다. [출처: 현지 안내판] |
공북루 2층 마루 입구에는 끈으로 막아 놓아 올라가지 못했다. 금강의 경치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이라고 하는데…, 아쉬웠다.
아래쪽도 끈으로 묶여 있었는데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다.
이곳에 「성안마을과 서문고개」, 「비단강을 사랑한 선비들」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바로 앞 넓은 뜰(공산성 왕궁관련유적지)에는 백제문화제 준비하는 공사차량들이 여러 대 주차하고 있었다.
▣ 제67회 백제문화제 (충남 공주시 ․ 부여군)
-개최기간 : 2021. 9. 25. ~ 10. 3.
-주관단체 : 공주시 백제문화선양위원회
-주요내용 : 개막식, 불꽃쇼, 비보이경연대회, 공연, 백제별빛정원, 유등전시, 농특산물판매
다시 흑색의 현무기를 보며 성곽길을 걷는다.
현무기가 끝나면 거목의 느티나무가 반긴다.
이제 오르막길로 접어든다.
다 올라가면 2층 규모의 공산정이 나온다.
공산정 가기 전 성곽길에 「배다리와 금강철교」안내판이 나온다.
1932년 충남도청이 공주에서 대전으로 옮겨가는 대가로 금강에 다리를 만들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금강철교라고 한다.
▣ 공주 금강철교(公州 錦江鐵橋)
공주 금강철교(公州 錦江鐵橋)는 공주시 금성동과 신관동을 연결하는 교량이다. 이름은 '철교'이지만, 경상남도 창녕 남지철교와 마찬가지로 철도 교량이 아닌 도로 교량이다. 1932년 일제강점기 하에서 충청남도 도청이 공주에서 대전으로 이전할 때, 제공된 여러 건의 보상물 가운데 하나로 건립됐으며. 2006년 3월 2일 대한민국의 국가등록문화재 제232호로 지정되었다.
▶역사
서울에서 목포를 연결하는 국도 제1호선상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공주읍과 장기면을 연결하기 위해 1932년 1월 2일에 착공하여 1933년 10월 23일에 준공하였다. 철교가 완성되기 이전에는 배를 연결하여 왕래하였으나 비가 올 때에는 금강의 수량이 증가하여 통행에 어려움이 많았으므로 마침내 철교를 건설하였다. 철교의 길이는 약 514m,폭6m였으며, 교각의 평균 높이는 약 20m였다.1986년 공주대교가 건설되기 이전까지,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를 연결하던 유일의 교량이었다
한국전쟁 당시 2/3 가량 파괴되었던 것을 1952년에 복구하였으며,2002년에 보수공사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는 1t 트럭 이하의 화물차량과 승용차급에 해당되는 차량의 강남에서 강북 방향으로의 일방통행만 허용하고 있다. 다리 상하에는 총천연색의 조명등을 가설하여 금강의 밤을 밝히고 있다. 또한 백제문화제 기간 동안에는 루미나리에가 설치되어 다리의 아름다움을 더한다.
[출처: 위키백과]
또한 「지켜지지 않은 세 나라의 약속, 취리산 회맹」안내판도 세워져 있다.
이제 바위지대를 거쳐 2층 누각인 공산정에 도착했다.
공산성 공산정 (公山城 公山亭) 공산정은 공산성 서북쪽 정상에 있는 정자이다. 공산성 안에 있는 백제 관련 유적을 비롯하여 유유히 흐르는 금강과 금강철교(국가등록문화재 제232호)등 공주의 전경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특히 이곳에서 볼 수 있는 금강의 낙조(落照)와 야경은 빼어난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다. 공산정에 관한 기록은 구체적으로 남아 있지 않으나 18세기 후반의 충청도읍지 공주목 지도를 보면 「후락정(後樂亭)」이 있었던 곳이다. 지금의 공산정은 1970년대에 새롭게 만든 것으로 이전에는 유신각(維新閣) 또는 전망대 등으로 불렸다. 「공산정」이란 이름은 2009년 시민 공모를 거쳐 지은 것이다. [출처: 현지 안내판] |
역시 공산정에서 보는 경치도 일품이었다.
공산정에서 내려와 되짚어 성곽길로 들어섰다.
조금 진행하니 전망데크가 나온다. 이곳에서 공산성 정면이 잘 보인다.
금강철교와 백제큰다리도 잘 보인다.
다시 성곽길을 걷는다. 전망데크를 지나니 처음 시작했던 금서루가 보이기 시작했다.
금서루 깃발인 백색의 백호기가 나타나고, 「안렴사가 반해서 춤추었다는 안무정」안내판이 나온다. 거목의 느티나무가 다시 나타나고, 이내 처음 출발했던 금서루에 도착했다.
공산성 팸플릿에는 1시간 소요된다고 적혀 있었는데 글쓴이는 휴식시간 거의 없이 1시간 50분 걸렸다.
금서루에서 내려가서 길을 건너 식당으로 들어가 늦은 점심을 먹고 다음 행선지인 송산리 고분군으로 향했다.
▶ 세계유산 공산성 1-5 사진 보기: https://blog.daum.net/joingi61/15965682
▶ 세계유산 공산성 2-5 사진 보기: https://blog.daum.net/joingi61/15965683
▶ 세계유산 공산성 3-5 사진 보기: https://blog.daum.net/joingi61/15965684
▶ 세계유산 공산성 4-5 사진 보기: https://blog.daum.net/joingi61/15965685
▶ 세계유산 공산성 5-5 사진 보기: https://blog.daum.net/joingi61/15965686
백제의 흔적을 담은 타임캡슐이 열리는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 무령왕릉과 왕릉원 (舊.송산리고분군)!
[참고 기사]
공주 송산리 고분군 → 무령왕릉과 왕릉원…명칭 변경
'부여 능산리 고분군'은 '부여 왕릉원'으로
"무덤 주인 병기로 국민 알권리 충족 기대"
(서울=뉴스1) 윤슬빈 기자 | 2021-09-09 09:29 송고 | 2021-09-09 10:40 최종수정
문화재청(청장 김현모)은 백제 능과 원의 지위를 찾아 '공주 송산리 고분군'을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으로, '부여 능산리 고분군'은 '부여 왕릉원'으로 국가지정문화재(사적) 명칭을 변경, 오는 17일 관보로 고시한다.
무덤을 지칭하는 명칭은 유적의 형태와 성격에 따라 분(墳), 능(陵), 총(塚), 묘(墓) 등으로 불린다.
현재 공주 송산리 고분군과 부여 능산리 고분군은 고분(古墳)이라는 명칭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이는 옛무덤을 지칭하는 일반적인 용어로 두 사적의 성격과 위계에 맞지 않다는 지적이 있어 왔다.
이번 명칭 개선은 소재지와 유형으로만 불리던 사적 명칭을 무덤 주인과 병기함으로써 명칭만으로도 무덤의 주인을 쉽게 알 수 있도록 해 국민의 알권리를 충족해 줄 것으로 보인다.
'공주 송산리 고분군'은 백제 웅진 도읍기(475~538, 지금의 공주)에 조성된 7기의 고분으로, 지난 1963년 1월 사적으로 지정됐으며 1971년 무령왕릉의 지석이 발견되면서 고대 왕릉 중 유일하게 무덤의 주인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으로의 명칭 변경은 백제 무령왕릉의 발굴로 백제왕실 무덤의 주인공과 조성시기가 확실히 밝혀짐에 따라 국민에게 널리 알려진 '무령왕릉'이 포함된 이름으로 사적 명칭을 변경해 국민이 쉽게 알아보고, 왕릉급 무덤임을 명확히 해 능원의 역사·문화재적 위상을 세우는 취지도 있다.
'부여 능산리 고분군'은 백제 사비 도읍기(538~660, 지금의 부여)에 조성된 무덤들로 현재까지 17기의 고분이 확인되었으며 무덤들 서쪽에서 발굴된 절터에서 국보인 '백제 금동대향로'와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이 출토돼 능산리 무덤들이 왕실 무덤이라는 것이 확인된 곳이다.
'부여 왕릉원'으로의 명칭 변경은 피장자들이 왕과 왕족으로서 왕릉급 고분군임을 분명히 알려 인근의 '능안골 고분군', '염창리 고분군'들과 차별성을 두고 능산리 고분군만의 특성과 역사성을 반영하기 위한 것이다.
문화재청은 충청남도, 공주시, 부여군과 함께 이번 지정명칭 변경에 따른 안내판 정비와 문화재 정보 수정 등 후속조치도 신속히 추진해 나갈 계획이다.
[출처: 뉴스1 기사]
공산성 소형주차장에서 송산리고분군 주차장까지 약 1.7km 거리에 5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 공주 송산리고분군 (公州 宋山里古墳群)
시대: 고대/삼국/백제
문화재 지정: 사적 제13호
건립시기: 백제 웅진시대
성격: 무덤군
유형: 유적
면적: 7기 238,301㎡
소재지: 충청남도 공주시 금성동 산5-1
분야: 역사/선사문화
요약: 충청남도 공주시에 있는 삼국시대 백제의 벽돌무덤·굴식돌방무덤 등이 발굴된 무덤군. 사적.
내용: 1963년 1월 21일에 사적 제13호로 지정되었다. 공주시 중심지에서 서북방으로 약 1㎞ 정도의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곳은 옛부터 ‘송산소(宋山所)’라고 불리어 오던 곳이다. 이곳의 지형은 금강과 연접하고 있는 곳으로서 북쪽이 막혀 있고 남쪽이 트여있는 구릉지역이다. 이 구릉의 남쪽으로는 계속되는 낮은 구릉이 전개되고 있다. 정상에 올라보면 동으로 풍광이 우수한 계룡산이 보이고 서남으로는 금강이 휘감고 돌아 절경을 이루고 있다.
고분들은 동남향의 8부 능선상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대체적으로 표고 75m 정도이다. 현재 확인되고 있는 고분은 벽돌무덤(塼築墳)인 무령왕릉과 6호분이 있고, 이외에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인 1∼5호분이 노출되어 있다. 그리고 주위에는 수십 기의 고분들이 위치하고 있다. 송산리 고분군의 고분 배치는 구릉의 윗부분에 1∼4호분이 하나의 그룹을 이루고 있으며, 그 남쪽 사면에 무령왕릉과 5호분 그리고 6호분이 또 하나의 그룹을 형성하고 있다. 5호분, 6호분, 무령왕릉의 배열은 무령왕릉이 최북단에 있고 이곳으로부터 남으로 6호분이 위치하고 있다. 또한 5호분은 6호분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들 3기의 배치는 삼각형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돌방무덤인 1∼4호분은 앞의 고분들에서 20∼30m의 거리를 두고 동에서 서로 일렬로 배치되어 있다.
이 송산리 고분군에 대한 조사는 비교적 일찍부터 조사가 진행되었다. 현재 노출되어 있는 1∼5호분의 돌방무덤을 비롯하여 주변의 돌방무덤들이 이미 1927년에 조사된 바 있다. 그리고 1933년에는 벽돌무덤이 조사되었지만 이들에 대한 조사는 약간의 기록만 전해지고 있어 그간의 실정을 자세하게 알 수 없다.
송산리 고분군에는 현재 백제시기의 고분 7기가 전시되고 있다. 이중에는 1971년에 발견된 무령왕릉이 포함되어 있고, 1985년부터는 무령왕릉의 모형전시관도 마련되어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다. 송산리 고분에 위치하고 있는 고분들의 주인공에 대하여는 처녀분으로 지석(誌石)이 출토된 무령왕릉을 제외하고는 자세하게 알 수 없다. 단지 6호분이 성왕릉이 아닐까하는 추정을 하고 있을 따름이다.
내부가 공개되어 있는 5호분은 깬돌(割石)로 4벽을 구축하였는데 바닥으로부터 약 1m 정도는 수직으로 쌓고 그 위부터는 약 25˚정도 안으로 좁히면서 맞조여 쌓아 올림으로써 활(穹隆狀)천장을 이루었으며, 정상에는 1매의 대판석을 덮고 있다. 또한 널길(羨道)은 남벽에 설치하였는데 남벽의 동쪽에 치우치게, 즉 동측의 장벽에 잇대어지게 하고 있다. 이 5호분의 내부 돌방은 깬돌로 쌓아진 형태로 남아 있으나 본래는 벽면에 두껍게 진흙을 발랐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아직 미공개인 4호분이 벽면에 두껍게 진흙이 발라져 있어 이들 돌방무덤의 널방(玄室) 대부분이 이처럼 흙을 발랐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것이다.
송산리 고분군 내에는 무령왕릉 및 6호분의 벽돌무덤과 1∼5호분의 돌방무덤 등 대외적으로 공개되거나 정비된 고분 이외에 이미 조사가 이루어져 이들에 대한 조사의 내용만이 전하는 고분들이 다수 있다. 이들은 대체로 1927년에서 1932년 사이에 조사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조사는 본격적인 학술조사라기보다는 외형 및 내부의 구조파악과 유물의 수습에 불과한 것이었다. 따라서 현재 그 고분들의 유형 및 형태에 대한 단편적인 지식만이 전하고 있을 따름이다. 더불어 고분군의 대체적인 윤곽만이 확인되고 있을 따름이다. 현재 당시 조사되었던 고분들은 모두 외형이 감추어져 있어 이들 고분들의 실체들을 확인하려면 전면적인 재조사가 이루어져야만 가능하다.
1930년대에 조사된 고분들은 대략 20여 기로 추정되는데 위에서 언급하였던 1∼5호분의 돌방무덤과 6호분의 벽돌무덤 이외의 나머지는 모두 석축에 의한 것들이었다. 유형별로 보면 활천장돌방무덤 외에 구덩식돌덧널무덤(竪穴式石槨墳)도 상당수 있었던 것으로 전한다. 이들은 대부분 무령왕릉을 위로하여 주변에 분포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러한 고분들은 공주의 송산리 지역에서 확인 혹은 조사된 고분들이나, 이외 송산리 일대에는 미확인된 고분이 아직도 상당수 존재하고 있다. 이들에 대한 조사가 앞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주차장에서 입구 쪽으로 가다보면 사적 제13호 「공주 송산리고분군」, 「백제역사유적지구」등 대형 안내판 2개가 세워져 있다.
조금 더 간 데크에는 원형의 파란 안내판이 세워져 있는데 유네스코 세계유산 송산리고분군(무령왕릉), 국보 제157호 왕비 금제귀걸이 등이 적혀 있다.
바닥이 데크 나무로 깔려 있어 편안하게 진행한다.
돔 모양의 웅진백제역사관 건물을 지나니 「무령왕릉과 주목 이야기」안내판이 나오는데 무령왕릉 왕비의 두침(베개) 사진과 무령왕릉 내부에서 발굴된 왕비의 베개(국보 제164호)가 주목으로 제작되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안내판 옆에는 빨간 열매가 주렁주렁 달린 주목 나무가 있다.
무령왕릉 입구에서 출토된 국보 162호 진묘수(鎭墓獸)를 3배 크기로 제작한 조형물이 입구 한가운데 우뚝 세워져 있다.
진묘수(석수)는 고대 무덤을 지키는 상상의 동물로 중국 남북조 시기에는 무덤 앞이나 안에 있었다. 무덤 안에 있는 진묘수의 경우 죽은 자를 저승으로 인도하는 안내자의 역할을 겸하는 것으로 보기도 하는데, 우리나라 고분에서는 백제 무령왕릉에서 처음 출토되었다 한다.
역시 상상의 동물인 해태와 비슷하기도 하고…, 어쩌면 몸에 새긴 문양을 빼면 돼지하고도 비슷하기도 하고….
진묘수를 지나면 송산리고분군, 무령왕릉 입구이자 매표소가 나온다.
그런데 매표소 창구에 직원은 없고 닫혀 있다. 대신 코로나19로 인하여 당분간 무료입장이라는 내용이 적혀 있는 안내문이 창문에 붙어 있다.
무료입장하여 조금 더 진행하면 커다란 분묘 입구가 나오는데 송산리고분군전시관 간판이 걸려있다.
송산리고분군전시관 내부로 들어갔다.
「세계유산 공주 송산리고분군」, 「송산리고분군과 백제고분」, 「송산리 1~4호 돌방무덤 조사 현황」, 「송산리고분군의 발견」, 「송산리고분군 세계유산 추진과정」, 「송산리고분군의 현황」과 고분의 위치를 표시한 지도, 「송산리 5 • 6호분과 백제인의 무덤」등의 내용이 적힌 것들이 벽에 걸려 있다.
「무령왕릉 발견」의 안내문을 읽다보면 『왜? 그토록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발굴 조사를 안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연히 발견되다
1971년 7월 충청남도 공주 송산리고분군.
이곳은 예로부터 백제 왕릉이 있다고 알려진 곳으로 당시 모두 6기의 크고 작은 돌방무덤(1~5호분)과 전축분(6호분)이 송산(松山) 구릉상의 남쪽사면 중턱에 조성되어 있었다.
그중 5호분과 6호분은 여름철 같은 우기에 무덤 안에 물기가 새거나 습기가 차 무덤의 손상이 심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1971년 6월말부터 6호분 봉토 북쪽으로 배수 시설공사를 시작하였다. 이 작업은 공주박물관 관장을 비롯해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 공주시 직원이 현장을 입회하면서 진행하였다.
배수구를 만들기 위해 봉토의 일부를 파 들어가던 7월 5일, 배수구 한쪽에서 작업하던 인부의 삽자루 끝에 봉토와 다른 딱딱한 물체가 닿았다. 조심스레 그쪽을 파내려 가던 중 6호분과 비슷하게 가지런히 쌓은 벽돌들이 나타나자 인부들은 현장에 나와 있던 문화재관리국 직원과 공주박물관 관장에게 알렸고 이것은 새로운 무덤의 발견을 알리는 것이었다.
왕의 안식처가 열리다
송산리고분군 현장 상황을 통보 받은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에서는 국립중앙박물관 관장을 단장으로 한 발굴조사단을 구성하여 7월7일 공주에 도착하였고, 현장을 지키던 공주 지역 관련 연구자들도 조사단에 합류하였다.
멈췄던 작업이 계속되면서 벽돌로 쌓아 올린 부위가 점차 넓게 드러났고 이윽고 막음벽돌(閉鎖塼)로 채워진 널문이 드러났다. 그러나 무덤을 만들 당시 널문 앞에 생긴 구덩이 벽안은 굳게 다져진 충전토로 채워져 있었고, 막음벽돌 겉에는 두텁고 단단한 강회다짐이 되어 있어 널문과 둘레 윤곽이 거의 드러나기 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야간작업은 저녁 무렵 쏟아진 폭우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다음날인 7월8일 오후 3시가 다 되어서야 널문이 완전히 드러났다. 그 사이 발굴현장에는 새로운 무덤이 발견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몰려든 주민들, 각지에서 모인 기자들로 가득했다.
발굴단은 본격적 조사에 앞서 무덤주인을 위한 제사를 지낸 후 드디어 널문을 막은 벽돌을 빼내는 작업에 들어갔다. 널문을 막았던 맨 위쪽의 벽돌 한 장을 처음으로 뺏을 때 무덤 속으로부터 하얀 김이 서려 빠져나오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되살아난 백제문화
막음벽돌을 무릎 높이까지 빼낸 후 작업을 일시 멈추고 우선 발굴단장과 공주박물관장이 무덤 내부를 살펴보기 위해 무덤 안으로 들어갔고 20분이 지난 뒤 다시 밖으로 나왔다.
발굴단장은 쏟아지는 기자들의 질문에 무덤의 주인공은 백제 사마왕, 즉 제25대 무령왕과 왕비라는 것과 이것을 적은 묘지석이 존재하며, 도굴되지 않고 온전히 보존된 무덤이라고 밝혔다.
다음날 아침까지 이어진 조사를 통해 묘지석을 포함해 4,600여점에 이르는 화려한 유물들이 수습되었다.
무령왕릉의 발견은 기억 속에 사라져가는 1,500년 전 고대 국가 백제를 다시 일깨워 준 역사적 사건이었다. 무령왕릉은 왕의 무덤이라는 상징성 뿐만 아니라 그때까지 베일에 가려져 있던 웅진백제시대 백제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며, 잊혀진 백제에 대한 재평가는 물론 새로운 백제사 연구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출처: 현지 안내문]
이제 무령왕릉 묘에 들어 가봤다.
무령왕릉 묘 앞에는 무령왕릉 상반신 상이 세워져 있다.
내부에는 묘실 전체를 벽돌로 만든 벽돌무덤으로 아주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널길과 널방에 부장되어 있던 4,600여 점의 다양한 유물들은 백제인의 정신과 수준 높은 문화적 역량을 보여주는 것으로 동아시아 및 삼국관계에서의 백제의 위치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용한 실마리 제공하고 있다고 한다.
◆무령왕릉 출토유물
석수(국보 162호), 묘지석(국보 163호), 오수전, 동탁은잔, 목재관.
◆무령왕의 유물
왕 금제관장식(국보 154호), 왕 금제귀걸이(국보 156호), 금제뒤꽂이(국보 159호), 청동거울(국보 161호), 왕 나무발받침(국보 165호), 왕 나무머리받침, 고리장식 칼.
◆왕비의 유물
왕비 금제관장식(국보 155호), 왕비 금제귀걸이(국보 157호), 금제아홉마디목걸이/금제일곱마디목걸이(국보 158호), 다리작명 은제팔찌(국보 160호), 왕비 나무머리받침(국보 164호), 왕비 나무발받침, 금동신발.
무령왕릉을 보고 송산리고분군전시관을 나왔다.
이제 실제의 무덤을 보기 위해 약간 언덕진 길을 올라간다.
송산리 6호분이 가장 먼저 나온다. 역시나 입구는 막혀 있다. 고분군 보존상의 문제로 1997년 7월 15일 문화재청의 영구 비공개 결정에 따라 내부관람이 중지되었다. 그래서 고분이나 무령왕릉 내부는 막혀 있어 들어갈 수가 없었다. 대신 전시관에 있는 모형을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5호분, 무령왕릉, 4호분 등 막혀 있는 고분과 왕릉을 보고 나니 「송산리 방단계단형 적석유구」안내판이 나온다.
이어 조망쉼터가 나오는데 조망도가 세워져 있다. 벤치는 없다.
곧바로 능선 정상 삼거리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우측으로 가면 정지산유적이 나온다. 파고라와 벤치 3개가 있다. 송산리고분군 안내판도 세워져 있다.
이제 내리막길을 따라 내려가니 숭덕전(崇德殿)이 나온다.
숭덕전은 백제국 시조 온조왕을 비롯하여 웅진백제시대(475~538)의 문주왕, 삼근왕, 동성왕, 무령왕의 위패를 모신 전당이다. 매년 백제문화제가 열리는 첫날에 웅진백제대왕 추모제가 열린다.
숭덕전을 지나 조금 올라갔다가 내려가면 홍살문이 나오고, 통과하면 주차장이 나온다.
이로써 45분(14:40~15:25)의 무령왕릉과 왕릉원(구.송산리고분군) 답사를 마쳤다.
신라의 고분들만큼의 큰 규모는 아니지만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만큼 완벽한 형태로 보존되어 있는 문화재이다.
송산리고분군은 1호부터 무령왕릉 포함 13호의 고분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개방되어 있는 고분은 없지만 전시관에 실제 크기 모형이 설치되어 있다.
올해는 무령왕릉 발굴(1971.7) 50년이 되는 해이다.
백제의 흔적을 담은 타임캡슐이 열리는 무령왕릉과 왕릉원이었다!
▶ 세계유산 무령왕릉과 왕릉원 사진 보기: https://blog.daum.net/joingi61/15965687
[참고자료]
▣ 백제시대(百濟. B.C 18~660. 678년간. 총31대) 연표
-위례성(하남)시대: BC 18 ~ BC 6 (1.온조왕)
-한산(광주)시대: BC 5 ~ 475 (1.온조왕부터 22.문주왕까지)
-웅진(공주)시대: 475 ~ 538 (22.문주왕, 23.삼근왕, 24.동성왕, 25.무령왕, 26.성왕)
-사비(부여)시대: 538 ~ 660 (26.성왕, 27.위덕왕, 28.혜왕, 29.법왕, 30.무왕, 31.의자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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