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나들길 열두 번째 이야기
4코스 해가 지는 마을길
아! 그리운 이름 천상병!
1.날짜: 2019년 3월 12일(화)
2.답사코스: 가릉→정제두묘→건평항→외포리 연안여객터미널 대합실
3.날씨: 맑음(미세먼지, 초미세먼지 심함)
4.답사시간
-10:04 가릉주차장 발(답사 시작)
-10:14 3코스(고려왕릉 가는 길), 4코스(해가 지는 마을길) 분기점
-10:59 갈멜산 금식기도원 정문
-11:04 정제두 묘
-11:19 하우약수터
-11:49 이건창 묘
-11:59 천상병 귀천공원 착 / -12:16 발
-12:37 장지포 비석군
-13:00 외포리 연안여객터미널 대합실 옆 도장함 착(답사 종료)
※ 휴식 포함하여 2시간 56분 걸렸는데 휴식 제외하면 2시간 39분 걸렸다.
5. 답사 후기
한 달 만에 다시 찾은 강화나들길 열두 번째 이야기는 제4코스 해가 지는 마을길이다.
강화나들길 제4코스 해가 지는 마을길
가릉 ~ 망양돈대
「주자학과 양명학을 절충한 형태로 이광사, 이충익, 이건창, 정인보 등을 길러 내고 박은식, 신채호 등 수많은 민족운동가, 사상가에게 영향을 끼친 강화학파의 절개를 느끼고 건평포구에서의 일몰의 아름다움과 외포리 새우젓시장의 풍경이 있는 낙조의 길 - 건평나루에서 외포리까지 자전거 도로가 개설되어 있어 자전거로 이동 가능」
거리: 11.5km / 소요시간: 3시간 30분 / 난이도: 하
가릉-(3.8km)-정제두묘-(0.6km)-하우약수터-(3.2km)-건평나루-(0.9km)-건평돈대-(2.7km)-외포여객터미널-(0.1km)-외포어시장-(0.2km)-망양돈대
[코스정보]
노을이 아름다운 하곡마을은 착하고 검소하게 양반, 노비 구분 없이 평등한 사회로 인간다운 삶을 추구한 강화학파의 산실이다.
그 중심에 하곡 정제두 선생이 있다. 200년이 지난 지금에도 온전히 남아 마을 곳곳에서 하곡의 넋이 손에 잡힐 듯 그립다. 노을이 내려앉은 마을길을 지나 해안 길을 걸으면 탁 트인 외포리 앞바다가 눈앞에 펼쳐진다. 여객선 따라 춤추는 갈매기의 합창 그리고 온통 붉게 물들어 버린 하늘은 나들이꾼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소나무, 참나무 우거진 숲길이다. 숲 속 어딘가에 있는 연리지도 찾아보고, 풀꽃들과 눈도 맞추며 걷다 보면 홀연히 시야가 훤해지며 하곡 선생의 묘가 나타난다. 잠시 발길을 멈추고 평등사회와 인간다운 삶을 추구한 선생의 앞선 생각을 더듬어 보자. 인심 좋고 양지바른 마을을 지나 건평나루에 들어서면 짭조름한 새우젓 냄새가 나들이꾼의 시장기를 자극한다. 만조 시 바다의 소용돌이에 일렁이는 붉은 노을 그리고 망양돈대에서 석양을 볼 수 있다면 둘도 없는 호사다. 겨울철에는 건평나루부터 외포리까지 바람이 많이 불고 미끄러워 옷차림과 스틱 등 장비를 잘 갖추어야 한다.
[볼거리]
▶ 가릉
고려 24대 원종(재위 1259~1274)의 왕비 순경태후의 무덤이다.
순경태후는 1235년 원종이 태자가 되자 태자비인 경목현비가 되었으며, 다음해에 충렬왕을 낳고 얼마 후 강화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 후 정순왕후로 추대되고, 충렬왕이 즉위하여 순경태후로 높여졌다.
석물이 유실되고 봉분이 무너진 것을 1974년에 정비하였고, 2004년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한 후 다시 복원하였다.
▶ 정제두 묘
호는 하곡이며 조선 현종 9년 문과의 초시에 급제하여 영조 때 우찬성, 원자보양관 등 요직에 임명되었으나 당시 사회혼란을 통탄 벼슬을 단념하고 전 생애를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우리나라 최초로 양명학의 상상적 체계를 완성하여 강화학파의 태두가 되었다.
▶ 망양돈대
망양돈대는 높이 3m, 폭 2.5m, 둘레 120m의 원형으로 대포를 올리기 위한 포좌(砲座) 4개소와 치첩 40개소가 있고 윗부분에는 벽돌로 만든 성가퀴(몸을 숨기고 적을 공격하기 위해 성위에 덧쌓은 낮은 담으로 여장 또는 성첩이라고 함)의 흔적이 남아 있다.
[출처: 강화나들길 홈피(www.nadeulgil.org/)]
오늘도 승용차를 이용했다.
잔뜩 흐린 날씨에다가 미세먼지 나쁨, 초미세먼지 나쁨까지 일기예보가 되어 있었다. 뿌연 하늘은 결국 빗방울을 조금 뿌리더니 다행히 이내 그쳤다.
함께 나들길을 답사하는 여행님이 발목을 다쳐서 한 달 만에 나들길을 다시 찾았다. 사실 오늘도 완치되지 않은 상태라 상당히 조심스러웠다. 그래서 답사거리가 짧고 난이도 낮은(하) 4코스를 선택한 것이다.
여행님이 준비한 김밥으로 이동 중에 아침을 해결하고 가릉 입구에 도착했다.
앞 전 3코스 할 때 가릉주차장을 못보고 하산을 해서 이번에 신경을 써서 입구에서 가릉주차장을 찾았는데 역시 못 찾았다.
결국 능안6교에서 좌측길(입구에 양도제일교회 입간판이 세워져 있음)로 조금 들어가면 나오는 공터에다 차를 세우고 답사에 들어갔다.
능안6교 우측에는 가릉 주차장 입간판이 세워져 있는데 왜 이곳에 세워져 있는지 모르겠다. 이곳에 세웠으면 방향 표시(화살표)가 있어야 하는데 아무런 표시가 없으니 어디가 주차장인지 몰랐던 것이다.
3코스 종점도장, 4코스 시점도장이 있는 도장함
가릉주차장 입간판을 지나 조금 올라가니 우측으로 주차장이 보인다. 생각했던 것 보다 넓은 주차장은 화장실 건물도 있고 끝자락에 발밤이 말뚝 표지판(3코스 종점완주), 도장함(3코스 종점도장, 4코스 시점도장), 「버스정류장 가는 길」 안내판 등이 세워져 있다.
앞 전 3코스를 답사하면서 내려올 때는 주차장 건너편 도로로 내려와서 개울 건너 좌측에 있는 주차장을 못 본 것이다.
아무튼 앞전에 못 찍은 3코스(고려왕릉 가는 길) 종점 도장과 4코스(해가 지는 마을길) 시점 도장을 찍고 출발했다. 여전히 하늘은 잿빛이다.
9분 정도 올라가니 가릉이 나온다.
가릉은 고려 24대 원종의 왕비(순경태후) 무덤이고, 가릉 뒤쪽에는 능내리 석실분이 있다.
가릉주차장에서 이곳까지는 3코스와 4코스가 겹치는 구간이다. 이제 3코스, 시멘트포장길과 작별하고 좌측의 숲길로 들어간다.
숲길은 이내 끝나고 넓은 흙길을 진행한다. 좌측으로 비닐하우스가 여러 동 보인다. 계속해서 조금 올라가니 철문으로 막혀 있고, 그 많던 리본도 보이지가 않는다. 아뿔싸! 잘못 진행했구나 하며 되돌아 내려가는데 순간 여행님의 발목이 걱정스러웠다. 다행히 짧은 거리여서 안심이 됐다.
비닐하우스 쪽으로 내려간다. 아직도 자재 등이 바닥에 있는 걸 보니 마무리는 안 된 것 같다. 비닐하우스 앞에 발밤이 말뚝 표지판(4-05)이 세워져 있다.
비닐하우스 앞을 지나 다시 숲길로 들어가니 갈림길(좌측으로 진행)이 나오는데 이곳에 이정표(◀ 갓바위 가는 길), 발밤이 말뚝 표지판(4-07. 시점 0.5km, 종점표시판은 없다) 상수도 취수원 안내판(양도면 능내리 능안마을) 등이 세워져 있다.
이후 3~4분 정도 더 진행하면 삼거리가 나오는데 이곳에 이정표(←갈멜산기도원 2.62km, ↓가릉 0.8km)와 하동정씨 선산 푯말이 세워져 있다.
갈멜산기도원 방향(좌측)으로 5분을 올라간 삼거리에 발밤이 말뚝 표지판(4-09. 종점 7.9km, 시점 1.1km)이 세워져 있다. 우측으로 진행한다.
숲이 제법 길게 이어지지만 기복이 심하지 않아 다행이었다. 건물이 보이기 시작한다. 아마 갈멜산기도원 같다. 삼거리 언덕에서 15분 정도 진행을 하니 건물 마당이 나온다. 마당 건너편으로는 갈멜산기도원이 보인다.
마당에서 1분을 내려가니 포장도로가 나오면서 갈멜산기도원 정문이 나온다. 정문 우측에는 갈멜산 강화금식기도원 목판이 좌측에는 정원성산교회 목판이 걸려 있다.
갈멜산기도원 정문에서 도로를 가로질러 우측으로 살짝 올라가면 입구에 발밤이 말뚝 표지판(4-11. 종점 7km, 시점 2km)과 작은 강화나들길 이정표가 세워져 있고 곧바로 정제두(鄭齊斗) 묘가 나온다.
정제두 묘 (鄭齊斗 墓)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56호 소재지: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 하일리 산165
하곡(霞谷) 정제두(1649~1736)선생은 조선 영조대의 학자로 18세기 초 강화도로 옮겨 살면서 양명학 연구와 제자 양성에 힘써 「강화학파」라 불리는 하나의 학파를 이루었다. 현종9년(1668) 별시문과 초시에 급제했으나 정국의 혼란을 통탄하여 벼슬을 포기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처음에는 주자학(朱子學)을 공부하였으나, 뒤에 지식과 행동의 통일을 주장하는 양명학(陽明學)을 연구 발전시켜 최초로 사상적 체계를 세웠다. 문집으로는 「하곡문집(霞谷文集)」과 저서로 「존언(存言)」,「논어해(論語解)」등이 있다. 묘비는 순조 3년(1803)에 건립된 것으로 비문은 신대우가 짓고 서영보가 썼으며, 전방에는 정제두의 아버지인 정상징과 그의 부인인 한산이씨의 합장묘가 있다. [출처: 현지 안내문] |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56호로 지정된 정제두(조선 영조대에 이곳에서 양명학을 연구하고 후학을 양성하여 강화학파를 이루는 업적을 이뤘다) 묘 앞에는 정제두의 아버지인 정상징과 어머니 한산이씨의 합장묘가 있다.
하우약수터
묘에서 내려오면 발밤이 말뚝 표지판(4-12. 종점 6.6km, 시점 2.4km)과 2차로 도로가 나온다.
2차로 보도 옆에는 도로변이라 위험하니 길가에 꼭 붙어서 지나가라는 안내문이 세워져 있다. 실제로 차량이 적어서 그런지 지나가는 차량마다 꽤 빠른 속도로 지나가곤 했다.
이제 하늘은 잿빛에서 벗겨져 조금은 맑아졌는데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당연히 고갯마루에서 내려오는 바람이려니 생각을 했는데 이 바람은 답사가 끝날 때까지 계속 불어왔고 바람의 세기도 강해졌다. 그 바람에 답사 막판에 추위를 느꼈다.
3분 정도 올라가니 건너편에 안내판이 세워져 있어서 지나가는 차량이 없을 때 조심스럽게 2차로도로를 건너 확인하니 산딸나무에 대한 내용이 적힌 안내판이었다.
안내판(양도면 木 산딸나무 이야기)에는 강화에서는 박달나무라고도 불리는데 가을에 빨간 산딸기 모양의 열매가 맺힌다 해서 산딸나무라고 부른다. 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1분을 더 올라가면 김취려(金就礪) 묘 안내판이 나오고, 그 뒤에는 「언양김취려장군묘소(彦陽 金就礪將軍墓所)」라는 묘석도 세워져 있다.
김취려 장군에 대한 내용이 궁금해서 귀가 후 인터넷에서 검색을 해보니 「헉!」묘가 두 군데나 있다.
강화군 양도면(인천시 문화재자료 제25호)과 울주군 언양읍(시도기념물 7호)에 각각 무덤이 있다. 그러면 시신을 반(?)으로 나누었다…
무능한 글쓴이는 도저히 이해가 안가서 계속 인터넷 검색을 해봤지만 더 이상의 소득은 없었다.
아마 둘 중 하나는 가묘(假墓)이겠지 하는 생각을 해본다.
[강화에 있는 묘에 대한 설명]
김취려 묘(金就礪 墓)
소재지: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 하일리 산71
인천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5호(2010년 12월 6일 지정)
그는 고려 후기 예부시랑을 지낸 김부(金富)의 아들로 본관은 언양이며, 음서(蔭敍)를 통해서 정위(正尉)에 임명되었다. 1216년 거란군이 청천강 북쪽을 약탈하자 장군은 앞장서서 싸웠다. 1217년 5월 거란군이 한강 이남을 공격하자 박달재에서 크게 무찔렀다. 1218년 7월에도 거란군의 침략을 막았고, 이듬해 2월에는 마침내 강동성(江東城)을 함락하고, 거란군을 완전히 무찔렀다. 1232년에는 벼슬이 최고관직인 문하시중(門下侍中)까지 올랐으며, 위열공(威烈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사람됨이 정직하고 검소하였으며, 아랫사람을 바르게 다스려 누구도 그를 속이지 못하였다고 한다. 고종 21년(1234) 강화에서 사망하였다. 김취려 묘지석에는 ‘공은 갑오년(고종 21, 1234) 2월 14일에 미미한 병세를 보이다가 21일에 갑자기 돌아가시니 향년 63세이다. 천자(天子)께서는 몹시 슬퍼하며 조문하고 부의를 내리셨다. 공은 복야(僕射) 조언통(趙彦通)의 따님을 부인으로 맞아들여 세 아들과 딸 하나를 두시고 뒷일을 처리하게 하였다. 7월 12일에 진강산(鎭江山) 대곡동(大谷洞) 서쪽 기슭에 예장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어 묘지석이 발견된 곳에 강화군과 언양김씨 종친회에서 묘소를 새롭게 정비하였다. 묘역에는 원형의 봉분 앞에 망주석 한 쌍과 상석이 갖추어져 있으며, 하단 부분에 묘역을 정비하고 종친회에서 건립한 비석이 세워져 있다.
[언양에 있는 묘에 대한 설명]
위열공 김취려의묘 (威烈公 金就礪의墓)
소재지: 울산 울주군 언양읍 송대리 산15
울산광역시 시도기념물 제7호(1997년 10월 9일 지정)
김취려(?~1234)는 언양현 사람으로 아버지인 김부는 예부시랑(禮部侍郞)을 지냈다. 그는 1216년(고려 고종 3)부터 1219년(고종 6)까지 거란군의 여러 차례 공격을 물리쳐 나라를 어려움에서 구하였다. 당시 13세기 동아시아의 정세는 몽골이 크게 흥기하고 있었으며, 거란 역시 몽골의 공격을 받아 1216년 압록강을 건너 고려의 북방지역으로 밀려오게 되었다. 이때 김취려는 대장군으로 조양진(평안남도 개천시 조양)에서 거란군을 물리쳤고, 연주(평안북도 영변군)에서도 거란군의 포위를 돌파하였다. 이에 거란군은 청새진(淸塞鎭: 평안북도 희천)을 넘어 퇴거하였다. 이 전투에서 맏아들이 전사하였다.
1217년 다시 내려온 거란군을 방어하고, 1218년 병마사가 되어 서북면원수 조충(趙沖)과 함께 거란군을 강동성(江東城)으로 쫓아냈으며, 이후 몽골군 및 동진국과 힘을 합쳐 강동성을 함락시켰다. 이후 고려시대의 최고 관직인 문하시중(門下侍中)까지 올랐으며, 위열공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언양읍에 위치한 그의 묘는 최근에 만든 대리석 제단, 석등, 새 문무신상이 있다. 묘비는 1670년(현종11) 후손인 김려와 언양현감이 세웠다.
김취려 묘 입구에서 5분을 더 올라가면 하우고개가 나온다. 좌측으로 쉼터가 조성되어 있는데 하곡정제두선생숭모비가 세워져 있다.
하우고개는 삼거리여서 이곳에서 2번 도로와 작별하고 좌측의 1차로도로로 진행했다.
곧바로 벽화가 그려져 있는 하우약수터가 나온다. 약수터는 말라있고 식수로 부적합하다는 안내문이 걸려 있다.
약수터 아래쪽에 화남 고재형 선생의 하일동(霞逸洞) 표지판이 있어 인터넷 검색을 해봤다.
화남 고재형 선생이 지은 한시 187수 「하일동」
하현의 서남쪽은 골짝마다 그윽한데,
재상이 예로부터 이 산중에 머물고 있네.
두 정승의 집터와 세 정승의 무덤이 있어,
이곳을 강화도의 제 일구(第一區)라고 부른다네.
하일리를 강화의 제1구라고 부르게 된 이유인 두 정승의 집터는 정제두와 최규서의 집터이고, 세 정승의 무덤은 도촌 정유성, 하곡 정제두, 권개의 무덤이다.
하곡선생이 거처하는 초가집은 비바람을 막지 못해 유수 민진원이 평소 선생을 공경하였기에 집을 지워졌다고 한다.
하우약수터에서 조금 더 내려가면 우측으로 반듯한 화장실이 있는데 시설이 잘 되어 있고 무척 깨끗하다.
완만하게 올라간 고갯마루에는 발밤이 말뚝 표지판(종점 6.1km, 시점 2.9km)이 세워져 있고, 다시 완만하게 3분을 내려가면 자전거탄풍경 펜션이 나온다.
1~2분 정도 더 진행하니 다시 발밤이 말뚝 표지판(4-16. 종점 5.5km, 시점 3.5km)이 나온다.
이후 8분을 더 진행하니 삼거리가 나온다. 발밤이 말뚝 표지판(4-18. 종점 5km, 시점 4km)과 세로형 직사각형 이정표(←이건창묘)가 세워져 있다.
이건창 묘
명문 사대부가의 집이라고는 믿기 힘든 이건창 생가(사기리 소재) 모습
이건창 생가 앞에 있는 천연기념물(79호) 탱자나무
좌측으로 1분 정도 진행하니 건평리마을회관이 나오고, 5분을 더 진행하니 건평교회가 나온다. 그리곤 1분 후 이건창 묘소 입구에 도착했다.
묘소 입구에는 발밤이 말뚝 표지판(4-20. 종점 4.4km, 시점 4.6km)이 세워져 있고 계단을 올라가면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이건창 묘 (李建昌 墓)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29호
조선 후기 문신이며 문장가였던 영재 이건창(1852~1898)의 묘소이다. 이건창은 병인양요 때 순국한 충정공 이시원의 손자로 1852년 강화군 화도면 사기리에서 태어났다. 호는 영재, 당호는 명미당(明美堂)으로 1867년 15세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23세에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가서 이름을 떨쳤고, 24세에 충청우도 암행어사를 거쳐 예문제학, 함흥부의 안무사 등을 역임하였다. 고종 31년(1894) 갑오개혁이 추진되자 이를 반대하여 모든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재야에서 일본의 침략을 물리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으며 1898년 6월 18일 47세로 일생을 마치고 이곳에 묻혔다. 저서로는 「명미당집」, 「당의통략」, 「독역수기」등이 있다. [출처: 현지 안내문] |
다시 계단을 올라가면 이건창 묘가 나온다.
조선 후기 천재라고 불리던 이건창은 15세에 과거에 급제한 이력이 있는데 이것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어린 기록이다. 대쪽 같은 암행어사로 알려져 있으며 구한말 일본의 영향력 하에 단발령 등이 포함된 갑오개혁이 시행되자 이에 반대하여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강화로 내려와 이곳에 묻혔다.
그런데 무덤을 보고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일반 서민의 무덤에도 대부분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이건창 묘는 그 흔한 비석도 없이 나 홀로 양지바른 곳에 묻혀 있었다. 앞전에 이건창 생가를 답사할 때도 조촐한 집을 보고는 놀랬는데 역시 무덤도 조촐했다.
명문 사대부가의 생가와 무덤이라고는 도저히 상상이 안 간다.
고개가 떨구어지고 마음이 숙연해진다.
천상병 시인 조형물(조각가 박상희 2017년 작품 )
이건창의 묘 뒤쪽에는 강화나들길 기둥형 표지판(④해넘이길)이 세워져 있다.
이건창의 묘를 지나 2분 정도 내려가면 외곽 골격만 남은 집이 나오고, 3분을 더 내려가면 양도어판장 앞이다. 이곳에 발밤이 말뚝 표지판(4-22. 종점 4.1km, 시점 4.9km)이 세워져있다.
이제 2차로 도로를 건너면 해안가에 조성된 천상병귀천공원이 나온다.
이곳에는 심도기행의 저자 화남 고재형 선생이 쓴 「건평동(乾坪洞)」표지판, 포토존(강화의 숨겨진 사진명소 10코스. 천상병의 하늘이 머문 건평포구 건평항), 벤치에 앉아 있는 어린왕자, 안내판(진강상 벌대총 이야기), 백마 조형물, 발밤이 캐릭터, 강화나들길 4코스 대형 입간판, 그리운 금강산 노래비,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 막걸리를 들고 있는 천상병 시인 동상, 시비(귀천) 등 아주 다양한 시설물 등이 설치되어 있어서 볼거리가 많아 쉬고 가기 좋은 곳이다.
강화도는 조선의 국영 말목장이 있던 곳이다. 특히 세종대왕은 강화도 전체를 말 목장으로 만들고 싶어 했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그 대신 강화도 여러 곳에 말 목장을 만들었는데 그 중 진강산의 진강목장이 가장 컸다.
이후 효종이 가장 아끼던 명마 「벌대총」이 진강목장에서 키워졌다. 이곳에 있는 백마 조형물은 그 벌대총을 기린 것이다.
천상병 시인의 대표작 「귀천」은 이곳 강화도 건평항에 있는 주막에서 박재삼 시인과 막걸리를 마시다가 쓰였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에 그를 기리는 동상이 있다.
경남 마산이 고향인 천상병 시인은 늘 고향 바다를 그리워하였으나 여비가 없어 가질 못하고 서울에서 가까운 강화도를 드나들며 향수를 달래곤 하였다.
어느 날 건평나루에서 막걸리를 마시며 끼적이던 것을 동행했던 고향친구 박재삼 시인에게 건네준 메모가 「귀천」 이라는 작품이다.
천상병 - 「귀천(歸天)」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문단의 마지막 순수시인 千祥炳(천상병:1930-1993)
일본 효고원 히매지시 출생, 1955년 서울대학교 상과대 4년 중태. 가난·무직·방탕·주벽 등으로 많은 일화를 남긴 그는 우주의 근원, 죽음과 피안, 인생의 비통한 현실 등을 간결하게 압축한 시를 썼다.
1971년 가을 문우들이 주선해서 내준 제1시집 《새》는 그가 소식도 없이 서울시립 정신병원에 수용되었을 때, 그의 생사를 몰라 유고시집으로 발간되었다. ‘문단의 마지막 순수시인’ 또는 ‘문단의 마지막 기인(奇人)’으로 불리던 그는 지병인 간경변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주막에서》, 《귀천(歸天)》, 《요놈 요놈 요 이쁜 놈》 등의 시집과 산문집 《괜찮다 다 괜찮다》, 그림 동화집 《나는 할아버지다 요놈들아》 등이 있다. 미망인 목순옥(睦順玉)이 1993년 8월《날개 없는 새 짝이 되어》라는 글 모음집을 펴내면서 유고시집 《나 하늘로 돌아가네》를 함께 펴냈다.
천상병은 노원구 수락산 하변에 거주하였었으며 수락산시인으로 일컬어지며 『수락산하변』 이라는 시를 쓴 바 있다.
[출처: 서울시 노원구청 > 문화체육관광 > 문화유산 > 노원의 위인 > 천상병]
노원구 수락산 둘레길에 가면 천상병 공원과 천상병 길을 만날 수 있고, 노원구의 수락산디자인거리에도 천상병공원이 있다. 또한 노원구에서는 작년 11월 3일에 제10회 천상병 문화축제도 열렸다.
이번 답사에서 만난 고달픈 시인의 술잔에 막걸리 한 잔 채우고 싶었지만…
이제 해안도로를 따라 외포리까지 걷는다.
자동차가 다니는 길과 분리된 자전거길로 진행한다.
천상병귀천공원에서 1분 정도 진행하니 발밤이 말뚝 표지판(4-24. 종점 3.8km, 시점 5.2km)이 나온다. 사실상 이곳까지가 천상병귀천공원 구역이다.
무려 3개코스(4,5,16)의 종점도장이 설치된 외포리여객터미널
얼마 안 가 오른쪽으로 5층 규모의 해오름펜션이 보이고 조금 더 진행하니 좌측 해안가에 설치된 군 초소가 나타난다.
바람의 세기가 점 점 강해지면서 추위가 엄습해서 발걸음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이후 12분 정도 진행하니 발밤이 말뚝 표지판(4-25. 종점 2.9km, 시점 6.1km)이 나타난다. 갯벌의 고장답게 바다 색깔이 온통 진흙색이다.
5분 후 도로 표지석과 나란히 있는 발밤이 말뚝 표지판(종점 2.4km, 시점 6.6km)이 나타나고, 1분 후 우측으로 3개의 비석이 있는 장지포 비석군이 나온다. 안내판도 세워져 있다.
10분 후 발밤이 말뚝 표지판(4-28. 종점 1.6km, 시점 7.4km)이 나온다.
다시 10분 후 발밤이 말뚝 표지판(종점 0.9km, 시점 8.1km)이 나온다. 외포리가 코 앞으로 다가왔다.
2분 후 외포리여객터미널 대합실 옆에 있는 나들길 도장함에 도착함으로써 4코스를 무사히 마쳤다.
이곳 도장함에는 4코스, 5코스, 16코스 이렇게 무려 3코스의 종점도장 1개가 있다.
원래 4코스 종점은 망양돈대인데 이곳에서 망양돈대까지는 16코스와 겹치기 때문에 16코스 때 답사하면 된다. 무엇보다도 여행님의 발이 불편해서 이곳에서 마쳤다.
글쓴이는 나들길 1코스(4코스)를 마쳐서 기분이 좋았지만 불편한 발을 이끌고 끝까지 완주했던 여행님은 그로인한 후유증으로 계속해서 한의원에 침 맞으러 다니고 있다.
6. 참고자료
① 천상병(千祥炳. 1930.1.29 ~ 1993.4.28)시인에 대하여
(1) 소개
한국 문단의 마지막 순수시인이자 기인(奇人)
대한민국의 문학인이자 시인. 1930년 1월 29일 일본 효고 현 히메지 시(姫路市) 출신. 호는 심온(深溫). 대표작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로 유명한 귀천.
문학계에서는 손꼽힐 정도로 대단한 주당이자 기인으로 명성을 떨쳤다. 특히 비슷하게 문학계의 주당으로 이름을 드날렸던 시인 김관식과는 죽이 잘 맞았다고 한다.(그의 친구였던 신경림 시인의 회고록과 주변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알 수 있다.)
1930년 1월 일본 효고 현 히메지 시에서 한국인 부모에게서 태어나 1934년에 잠깐 진동에서 지내다 1940년에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간사이에서 초등학교를 나왔다고. 1945년 해방이 되면서 부모님과 함께 귀국하여 경상남도 마산(現 창원시)에서 자랐다가 마산중학교에 입학하여 중학생 시절인 1949년 죽순(竹筍) 11집, 공상(空想)을 통해 문단에 이름을 올렸다. 이 때 <강물>을 유지환의 초회추천으로 발표했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때에는 미국 통역관으로 근무했다고 한다.
1951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과에 입학했으나 4학년 때 중퇴하였고 그 사이 부산시장 공보실장으로 일하다가 1967년 독일 동(東)베를린 공작단 사건, 일명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서 6개월간 옥고를 치른 후 선고 유예로 석방되었다. 이 때 당했던 고문을 계기로 심신(心身)이 멍들게 되는 후유증을 앓기도 하였다.
1970년에는 <김관식의 입관>을 발표했는데, 무연고자로 오해를 받게 되어 서울시립정신병원에 수용되기도 하였고, 또 이 때 친구의 여동생 목순옥(1935~2010)이 수 년 간 간병을 해준 것이 계기가 되어 1972년 결혼하였다. 1979년 시집 '주막에서', 1984년 '천상병은 천상 시인이다', 1991년 '요놈 요놈 요 이쁜놈' 등의 시집을 발표하며 활동하였다. 간(肝)경화증을 앓다가 1993년 4월 28일 세상을 떠났다.
아내인 목순옥이 천상병의 사후인 1993년 8월에 《날개 없는 새 짝이 되어》라는 글 모음집을 펴내면서, 유고시집인 《나 하늘로 돌아가네》를 함께 펴냈다.
본래는 종교 상 개신교 신자였으나 말년 즈음에 천주교로 개종하였다. 세례명은 시몬.
천상병 시인의 대표작을 원작으로 한 KBS 1TV <인간극장> 9화 '귀천'이 94년 방영됐다. 故 정진이 주인공 천상병, 故 김자옥이 천 시인의 아내이면서 원작자인 동시에 극의 화자인 목순옥 여사로 나왔다. 동명의 연극도 있었으며, 이재상 연출에 주연은 故 강태기.
(2) 일화
천상병 시인은 많은 일화를 가지고 있다. 여기 실린 것은 그 중 유명한 것들로 지극히 일부라는 점을 밝혀둔다.
◆ 한창 젊었을 적 완전히 폐인 모습으로 살고 있던 천상병 시인. 머리가 하도 덥수룩하여 얼굴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이를 딱하게 여기던 친구 한 명이 그냥 돈을 주면 술을 사 먹을까봐 천상병을 데리고 이발소로 갔다. 거기서 이발비를 지불하고 천상병이 머리카락을 자르는 걸 본 친구는 안심하고 집으로 가게 된다. 그런데 친구가 나가자마자 천상병은 이발사에게 지금까지 이발한 비용을 제외하고 환불해달라고 요구한다. 어이없어진 이발사는 환불을 해주고 천상병은 그 돈으로 술을 사먹었다고 한다.
◆ 대학시절, 교수님 집에서 머무는데 화장대에 멋있어 보이는 병이 있어서 양주인 줄 알고 마셨는데, 이상하게 향이 심해서 '역시 좋은 술인 가보다.'라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향수였다고 한다. (출처: 괜찮다 괜찮다 다 괜찮다.)
◆ 그가 동베를린 사건에 연루되었을 당시 그의 죄명은 그의 친구였던 강빈구에게 공갈로 3만 6500원을 갈취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강빈구에게 술값으로 백 원, 오백 원씩 받아썼던 돈으로, 그것 때문에 하루아침에 간첩으로 몰리게 되었다. 이 사건은 조작된 것임이 밝혀졌고, 45년 뒤에 전원 무죄판결이 나왔다.
◆ 천상병과는 술동무로 절친한 사이였던 시인 신경림의 회고에 따르면, 먹성이 좋고 주량도 엄청났던 모양이다. 또한 몸이 튼튼해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험하게 살았음에도 어디서든 멀쩡히 잘 먹고 잘 살았던 탓에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그 속이 무쇠로 되어있다"고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고… 그러나 동베를린 공작단 사건 당시에 고문을 당한 후유증 때문에 완전히 딴 사람이 되어서 젊은 시절의 먹성도 사라졌고, 술은 많이 먹었으나 주량이 줄어들어서 금방 취해 횡설수설하기 일쑤였으며, 평소 같았으면 쓰지 않을 이상한 글을 써서 동료 시인들이 무척 놀랐다고 한다. 고문 후유증으로 몸과 정신이 크게 쇠약해진 것은 주변 사람들의 증언이 일치한다.
◆ 천상병은 언제나 "사람은 탄탄한 조직에 들어가야 잘 살 수 있다"는 지론을 지니고 있었다. 때문에 친구였던 신경림 시인이 영어학원 강사로 근근이 살아가는 것을 보고는 안타까워하며 취직을 시켜주겠다면서 일자리 알선도 해 주었다고. 신경림은 일정한 수익이 없었던 천상병이 제 걱정은 않고 남 걱정만 하는 것을 보고는 우스워서 한마디 했더니, 천상병 또한 이에 지지 않고 "너와 나는 타고난 생리가 다르다"라는 말로 일축했다고 한다. 즉 자신은 남들보다 시를 잘 쓰니 자기 힘으로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는 뜻이다.
◆ 천상병은 절친한 친구인 시인 김관식의 집에 자주 드나들었는데, 하루는 김관식도 골탕 먹이고 술 사먹을 돈도 벌 겸 김관식의 집에 있던 오래된 책 한권을 몰래 봉투에 담아 이를 고서점에 팔려고 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김관식이 이를 눈치채고는 천상병이 훔친 책을 몰래 봉투에서 빼내고선 대신에 낡은 원고지 한뭉치를 넣어버렸다. 이를 모르고 고서점에 책을 팔러 갔던 천상병은 되려 망신을 당하고 돌아왔는데, 김관식은 이 광경을 보고 배꼽이 빠져라 웃다가 기분이 좋아져서 천상병에게 따로 술을 대접했다고 한다.
◆ 동베를린 공작단 사건에 연루되어 취조를 받던 당시 그의 별명은 '천희갑'이었다고 한다. 그의 얼굴이 당시의 넌센스 코미디언 김희갑을 닮아서였다고 한다.
◆ 동베를린 공작단 사건 당시에 모진 고문을 받았는데 특히 전기 고문을 당한 후유증으로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 고문에 의한 후유증은 이뿐만이 아니었기에 죽을 때까지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 그가 무연고자로 오해받아 서울시립정신병원에 수감될 당시 그의 지인들이 그가 객사한 것으로 생각하여 그가 남긴 시를 모아 유고시집 《새》를 남기기도 했다. 그런 까닭에 그는 살아서 유고시집을 남기는 진기록을 가졌다. 물론 93년에 확실히(…) 죽은 뒤에도 유고시집 《나 하늘로 돌아가네》가 출간되었다.
◆ 천상병 시인은 생전에 지인들에게 세금(?)으로 500원, 1000원씩을 받아내곤 했었는데 징수(?)의 기준이 특이했다. 돈을 받는 사람은 꼭 지인 한정이었고 지인이 아닌 사람한테는 돈을 받지 않았다. 그리고 어른이라 생각하면 1000원, 어른이 아니라 생각하면 500원씩을 받았다고 한다. 그 기준도 나이같은 게 아니라 결혼을 기준으로 한 것이라고 한다. 결혼한 사람에게는 1000원, 결혼 안 하면 500원씩 받는 것이다(…). 주변 사람들은 천상병이 스스로 어지간히 친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면 돈을 걷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돈을 주면서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 1988년 간경변으로 춘천의료원에 입원했을 당시의 일이다. 당시 병원장과 천상병 시인은 친구 관계였다고 한다. 그를 만났을 당시 병원장이 천상병 시인에게 배에 복수가 차서 누워있는 시인에게 배가 왜 이렇게 불렀냐고 묻자 천상병 시인은 임신을 했다는 개드립 농담을 던진다.(…)
◆ 역시 춘천의료원에 입원했을 당시의 일이다. 당시 소설가 이외수가 문병을 왔는데 그때 초면이었던 이외수를 보자마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외수야! 넌 이제 내 동생이다!(…) 이외수의 회고에 따르면, 평소에 천상병 시인을 존경하여 직접 만나 보고 싶었으나, 정작 그런 기회가 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뒤늦게 병문안을 가면서 처음 만나게 되었다가 이와 같은 환대를 받자 무척 감격했다는 듯. 이후에 서로 연락도 하고 자주 만난 듯하다.
◆ 1988년 간경변으로 춘천의료원에 입원했을 당시 그의 부인이었던 목순옥 여사가 춘천으로 오고가면서 천상병 시인을 5년만 더 살게 해달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놀랍게도 병원에서조차 가망이 없다던 그의 병은 완쾌되었고 더 놀랍게도 정확히 5년 후인 1993년 거짓말같이 세상을 떠났다. 천상병 시인이 세상을 떠났을 당시 목순옥 여사는 이렇게 생각했다고 한다. "5년이 아니라 10년만 더 살게 해달라고 빌었을 것을…"
◆ 평생을 가난하게 살다보니 전화기 한 대 못 가지다가 80년대 후반에 전화기를 한 대를 가지게 됐는데 가지고 나서 전화기 곁에 계속 붙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친구들은 그가 또 잡혀가거나 그런거 아니냐고 찾으러 다녔다고 한다.
◆ 천상병 시인이 세상을 떠난 이후 8백만원에 달하는 조의금이 들어왔다고 한다. 당시 생전 처음 만져보는 돈을 그의 장모가 잘 숨겨둔다는 것을 하필 아궁이에 숨겨놓았다.(…) 그런데 목순옥 여사가 이것을 모르고…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그나마 형태가 남은 것을 은행에 가져가서 그나마 절반은 건졌다고 한다. 장모인 조성대 여사는 딸인 목순옥 여사가 세상을 뜨던 2010년 102세로 생존, 그리고 2011년 4월 12일 사위와 딸을 다 보내고 103세로 귀천하셨다. 아이러니하게 천상병 시인은 평소 장모의 장례비 걱정을 많이 했다는데 그래놓고 장모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으며 남은 돈이 장모의 장례비만큼의 돈이었다고 한다.
◆ 당시 '귀천'에 자주 다니던 사람이 천상병 시인에게 빌린 돈을 언제 갚을 거냐고 묻자 천상병 시인이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허허, 내가 죽으면 천국과 지옥의 갈림길에서 포장마차를 하고 있을 테니 오거든 갚을 만큼의 공짜 술을 주겠네." 이 이야기는 일본인이 쓴 세계 유명인의 명대사란 책자에 나온 적도 있다.
◆ 개를 무척 좋아하여 개와 함께한 유명인이라는 책자에 나오기도 했다. 천상병 시인이 세상을 떠날 때 기르던 개는 슬퍼하며 천상병이 자주 앉던 서재에 항상 누워 있다가 3년 뒤에 주인을 따라갔다고 한다.
◆ 노원구 수락산 등산로에는 천상병 공원이 있다고 한다. 여기에는 천상병 시인의 유품 203점을 묻어놓은 타임캡슐이 있는데 천상병 시인의 탄생 200주년이 되는 2130년 공개한다고 한다.
◆ 천상병 시인은 인사동에서 찻집 '귀천'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천상병 시인이 죽은 뒤에는 아내 목순옥 여사가 계속해서 운영하고 있었다. 하지만 목순옥 여사마저 2010년 세상을 떠나자 '귀천'은 문을 닫아버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목순옥 여사의 조카가 하고 있는 귀천 2호점은 계속 운영되고 있다는 점이다.
◆ 은평 한옥마을에 이외수 중광 천상병 세 예술가의 육필 원고와 작품을 모아놓은 문학관이 있다.
[출처: 나무위키]
천상병 시인의 묘는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 석우리 산19(의정부 시립공원묘지)에 부인(목순옥 여사)과 합장되어 있다.
7. 더 많은 사진 보기
강화나들길 4코스 해가 지는 마을길(사진 1) http://blog.daum.net/joingi61/15965234 |
강화나들길 4코스 해가 지는 마을길(사진 2) http://blog.daum.net/joingi61/15965235 |
강화나들길 4코스 해가 지는 마을길(사진 3) http://blog.daum.net/joingi61/15965236 |
8. 강화나들길 답사 후기 (2018.11.12 ~ ?)
코스 | 답사 순서 | 답사날짜 | 답사 후기 |
1.심도역사문화길 | 8 | 19.01.08 | |
2.호국돈대길 | 9 | 19.01.22 | |
3.고려왕릉가는길 | 10 | 19.01.29 | |
4.해가지는마을길 | 12 | 19.03.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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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고비고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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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남생가가는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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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낙조보러가는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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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철새보러가는길 | 7 | 19.01.01 | |
9.다을새길 | 3 | 18.11.20 | |
10.머르메가는길 | 4 | 18.11.27 | |
11.석모도바람길 | 5 | 18.12.04 | |
12.주문도길 | 1 | 18.11.12 | |
13.볼음도길 | 2 | 18.11.13 | |
14.강화도령첫사랑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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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고려궁성곽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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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서해황금들녘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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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고인돌탐방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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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왕골공예마을가는길 | 11 | 19.02.12 | |
19.석모도상주해안길 | 6 | 18.12.25 | |
20.갯벌보러가는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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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답사 경비
①승용차 이용 기름값(추정): 10,000
②통행료: 2,400
③식대: 14,000
④택시비: 9,500 (외포리 버스터미널에 정차되어 있는 택시 이용)
⑤합계: 3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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