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평산행(둘레길 등)/[강화]나들길

[강화나들길 8코스] 철새 보러 가는 길 (후기)

약초2 2019. 1. 12. 10:02

[제2부] 강화나들길 일곱 번째 이야기

 

8코스 철새 보러 가는 길

철새는 못보고 강화 남동해안 풍광에 반하다!

 

1.날짜: 2019년 1월 1일(화)

2.답사코스: 초지진→황산도→동검도입구→후애돈대→분오리돈대

3.날씨: 맑고 청명함. 간혹 구름

 

4.답사시간

-08:40 초지진 주차장 착 / -10:01 발(답사시작)

-10:09 초지대교

-10:33 황산도 선착장

-10:50 황산도 해안데크길 끝 지점

-11:27 섬암교

-12:19 선두5리 회센터

-12:40 후애돈대

-13:57 분오리돈대 입구 8코스 도장함 착(답사종료)

※짧은 휴식 포함하여 3시간 56분 걸렸다.

 

5.답사 후기

 

일주일 만에 다시 찾은 강화나들길 일곱 번째 이야기는 「제8코스 철새 보러 가는 길」이다.

 

강화나들길 제8코스 철새 보러 가는 길

초지진 ~ 분오리돈대

 

거리: 17.2km / 소요시간: 5시간 40분 / 난이도: 하

초지진-(2.2km)-황산도선착장-(2.7km)-소황산주차장-(1.5km)-섬암교-(2.3km)-동검도입구-(2.1km)-선두어시장-(0.7km)-후애돈대-(5.7km)-분오리돈대

 

[코스정보]

 

바다를 왼쪽에 두고 험한 절벽 허리에 나무 데크 길을 놓았다. 들고 나는 물길 위에 부드럽게 휘어진 황산도 데크 길은 상쾌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느리게 걷고 싶은 1km 정도를 왕복하는 바다 위의 길이다. 벚나무, 오동나무, 생강나무, 해당화, 참나리 등으로 가득 메운 절벽에는 제철의 향기가 바닷바람과 부딪치며 유감없이 멀리 멀리 품어낸다. 데크 길을 벗어나면 이제 막 썰물이 시작됐는지 촉촉한 갯벌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드넓은 갯벌이 만들어내는 독특한 풍광과 바다가 품어온 생명에 경외감이 솟는다. 「누구나 바닷가 하나씩은 자기만의 바닷가가 있는 게 좋다.」 어느 시인이 말한 그 바닷가가 바로 여기가 아닐까? 눈, 코, 귀, 입이 한꺼번에 호사하는 아름다운 강화도 해안코스다.

 

황산도 입구에도 지그재그로 길게 놓인 데크 길이 있다. 바다를 보며 편히 쉴 수 있는 쉼터도 곳곳에 있다. 특히 황산도는 선주들이 운영하는 횟집이 10여 곳이나 있어 언제나 싱싱한 생선회를 주문할 수 있는 특별한 곳이다. 나들길을 걸을 때 저어새 등 물새들을 만나게 되면 멀리서 관찰하고, 근처를 지날 때는 팔을 휘두르는 등 위협적인 행동을 절대 해서는 안 된다. 제방 등을 걸을 때 새들이 불안해하지 않도록 소음 없이 빠르게 지나쳐야 한다. 겨울철에는 눈이 얼어붙어 일부 구간은 미끄럽고 바람이 많은 길이다.

 

[볼거리]

 

▶ 저어새

3월 중순 두루미들이 번식지로 이동하면 저어새가 그들의 빈자리를 다시 채워준다. 주걱 모양이 특이하게 생긴 부리를 벌린 상태로 얕은 물에 담근 채 좌우로 저어가며 먹이를 잡는 모습을 보면 자연의 신비감을 느끼게 한다.

저어새는 동아시아 일대에서만 서식하며 강화도 지역이 저어새가 나고 자란 고향이며 또한 강화군을 대표하는 새이기도 하다.

 

▶ 황산도

대부분 상가 이름이 모두 배 이름이다. 직접 잡아오는 물고기를 운이 좋으면 먹을 수 있는 곳이다.

황산도 절반을 돌아볼 수 있는 바다 위 길인 데크가 있어 바닷바람을 맞으며 느리게 걸어 보는 곳이다.

 

▶ 후애돈대

조선 숙종 5년(1679) 강화유수 윤이제(尹以濟)가 어영군 4,300명과 함경, 황해, 강원 3도의 승군 8천 명을 동원하여 쌓았다.

화강암을 정방형으로 쌓고 4개의 대포를 올려놓는 포좌를 설치했다.

이 돈대에는 여장(女墻)의 일부가 남아 있어 없어진 부분을 1998년에 복원하였다. 이 마을에서는 돈대를 훼손하면 재앙이 온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출처: 강화나들길 홈피(www.nadeulgil.org/)]

 


초지진


보문선착장에서 일출(구름 사이로 살짝 비친 햇살)을 구경하고 8코스 시점인 초지진에 도착했다.

초지진에 도착하여(08:49) 집에서 준비한 떡국을 먹었다.

 

강화도에는 곳곳에 「돈대」와 「진」이 있는데 모두 군사적인 방어시설로 과거에 만들어진 시설이다. 그중에서도 강화도와 우리나라 본토를 잇는 「초지대교」옆에 있는 초지진은 역사의 중심에 있었던 장소이다.

 

강화도의 초지진은 바다로 침입하는 외적을 막기 위하여 조선 효종 7년인 1656년에 구축하고 1679년 조선 숙종 때 성으로 지은 요새이다.

 

1971년 12월 28일에 대한민국 사적 제225호로 지정이 된 초지진은 입장료(700원)를 내고 초지진 내부로 들어가면(1월1일, 설날, 추석은 휴무) 홍이포(대포)가 전시되어 있다.

 

홍이포는 네덜란드에서 중국 청나라를 거쳐서 유래된 대포로 당시 네덜란드를 우리나라에서는 「홍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이것을 「홍이포」라고 불렀다. 홍이포는 다른 이름으로는「홍이대포」라고 불리기도 하고, 「컬버린포」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길이는 215m, 중량 1.8t, 구경 12cm, 최대 사정거리 2~5km에 유효사정거리 700m의 전장포로, 우리나라의 역사 속에서는 1886년 병인양요, 1871년 신미양요, 1875년 운요호 사건에 등장했다.

 

초지진의 외부에는 수령 400년이 된 두 그루의 소나무가 세워져 있고, 초지진 소나무 안내판, 중앙에 「포탄 흔적」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강화군 초지돈대에는 소나무 두 그루가 있다. 이 소나무 수령은 400년 정도 되었다. 나무는 굵은 줄기가 위로 솟구쳐 여러 갈래로 뻗고 가지가 늘어지면서 삿갓 모양을 이루었다. 나무 모양이 아름답고 생육상태도 좋다.

수려한 노거수로 식물학적 가치가 크고 역사 문화적 가치 또한 크다.

이 나무들은 1656년(효종7년) 강화유수 홍중보가 초지진(사적225호)을 설치할 때 선비의 기상과 지조를 상징하기 위해 초지돈대에 심은 것으로 추정된다.

 

초지돈대는 1871년 신미양요 때 미군 측의 함포공격으로 일부 파괴되었고, 1875년 일본 운요호사건 당시 조선 수비군과 일본군 사이에 벌어진 포격전으로 완전히 무너졌다. 이 두 소나무에서 격전 중 날아온 포탄 파편이 남긴 상처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열강의 침략에 맞서 장렬하게 싸운 조상의 기상을 간직한 소나무는 400년 넘게 초지돈대를 의연히 지키고 있다.

 

당시 조상들은 목숨을 바쳐 싸웠다. 신미양요 당시 미군 대령은 이런 기록을 남겼다.

「조선군은 근대적인 무기를 한 자루도 보유하지 못한 채 노후한 전근대적인 무기를 가지고서 근대적인 화기로 무장한 미군에 대항하여 용감히 싸웠다. 조선군은 그들의 진지를 사수하기 위하여 용맹하게 싸우다 모두 전사했다. 아마도 우리는 가족과 국가를 위해 그토록 강력하게 싸우다 죽은 국민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다.」 -슐레이 대령

(사)푸른인천가꾸기운동시민협의회와 강화군이 세운 안내문 내용인데 가슴이 뭉클하다.

 


황산도 해안데크


이제 초지진에서 출발했다.(10:01)

초지진에서 해안 쪽에 바짝 붙어 있는 좁은 길을 따라 진행한다. 조금 진행하니 초지대교가 나오고 ∩턴하여 초지대교를 지나 황산도에 들어갔다. 곧바로 해안데크가 나오는데 나들길이 아니어서 눈으로만 구경하고 얼마간 진행하니 비로소 해안데크길이 나온다. 제법 긴 해안데크길을 따라 바다도 구경하고 바다 건너 김포도 구경하면서 진행하다 보니 이내 해안데크길은 끝나고 포장도로를 따라 가는데 황산도 회센터가 나오는데 제법 큰 건물인데 썰렁하다. 간판도 없다. 장사를 안 하는 것 같은데 여름철에는 모르겠다.

    


후애돈대


이제 황산도에서 벗어나 포장도로 갓길(자전거길)로 진행한다. 조금 진행하니 좌측으로 해안 쪽으로 내려가는 길이 나와 계단을 통해 해안으로 내려가서 진행하는데 걷기가 무척 불편했다. 이러한 해안길은 제법 길고, 가야할 길도 멀어서 이내 해안길로 가는 것을 포기하고 다시 포장도로로 올라와서 포장도로를 따라 진행했다.

 

얼마나 갔을까 Y 삼거리가 나오는데 이곳이 섬암교 앞이다.

섬암교 앞에서 좌회전하여 찻길 따라 얼마간 진행하니 동검도로 들어가는 다리가 보이기 시작하고 이내 동검도 입구에 도착했다. 동검도는 나들길에서 벗어나 있다. 이곳에 8-16 표지목(종점 6.9km, 시점 5.1km)이 세워져 있다.

 

이제 찻길에서 벗어나 제방길로 들어선다. 제방길 안쪽으로는 멋진 집(펜션)들이 계속해서 나타난다.

 

제방길을 벗어나 조금 진행하면 「선두항 어판장」, 「선두5리어판장」 입간판이 세워진 삼거리가 나온다.

이곳에서 선두5리 어판장 방향(좌측)으로 진행한다.

2차로 도로의 갓길로 진행하는데 강화나들길 캐릭터 발밤이가 나타나고, 조각 작품도 나오는데 2개의 벤치에 앉아 있는 작품인데 둘의 사이가 안 좋은지 서로 떨어져 앉아 있는데 여성은 독서하는 모습이고, 바로 옆 벤치의 남자는 사색에 잠긴 모습이다. 이어 「하묵개 쉼터」 안내판이 나온다.

 

하묵개라는 이름은 아래쪽 검은색의 갯벌이라는 뜻으로 지어진 갯벌의 이름인데 하묵개 쉼터에서는 매주 주말 농 ․ 특산물 직판장이 열려 갖가지 수산물 등을 판매하고 있다고 안내판에 적혀 있다.

 

그리곤 2분 후 선두리 갯밭마을 안내판이 세워져 있는 선두5리 어판장에 도착했다. 이곳에도 표지목(종점 5km, 시점 7km)이 세워져 있다.

또한 선두리 대형 표지석(화강암)도 세워져 있는데 선두리는 해안마을 경관형성사업 시범마을이고, 옛 부터 주변 선박이 편안히 기착했던 곳으로 뱃머리를 돌려 들어 온다하여 선두(배선, 머리두)라 하였다라고 적혀 있고, 하단에는 해안나들길 8코스 지도(개념도)가 그려져 있다.

 

10분 후 짧은 목교가 나오는데 입구에 강화나들길 푯말과 발밤이(강화나들길 캐릭터)가 세워져 있다. 목교를 건너 다시 해안 제방길로 들어선다.

 

이어 선두리 갯밭마을 대형 안내판이 세워진 곳을 지나니 후애돈대가 나온다.

 

후애돈대 입구에서 목교를 건너 조금 올라가면 예전에 세운 안내판이 나오고, 조금 더 올라가면 최근에 세운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이어 후애돈대 내부로 들어가면 화강암을 이용하여 정사각형의 모양으로 쌓아 올렸다. 대포를 올려놓는 받침대를 4개 설치했다는데 글쓴이는 못 찾았다. 조망이 무척 좋다.

 

후애돈대(後崖墩臺)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3호(1995년 3월 1일 지정)

 

돈대란 적의 움직임을 살피거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하여 감시가 쉬운 곳에 설치하는 초소이다. 후애돈대는 강화 54돈대 중 숙종 5년(1679)에 축조된 것으로 어영군 2천명과 경기 ․ 충청 ․ 전라 3도의 승군 8천명이 동원되어 쌓아졌다. 성 위로 낮게 쌓은 여장(女墻)의 일부만이 남아 있었는데, 1998년에 완전히 복원해 놓았다.

이 마을에서는 이 돈대를 훼손하면 재앙이 온다는 전설이 내려오는데, 이 때문에 돈대를 제단처럼 여기고 보호하여 지금까지 그 본모습이 잘 남아 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발췌]

 

후애돈대에서 내려와 다시 제방길을 걷는데 선두리 갯밭마을 경관안내판이 나온다. 안내판에는 영종도, 신도, 시도, 각시암, 시도, 장봉도가 조망되는 것으로 나와있다.

바로 옆에는 천연기념물 제205-1호인 저어새 안내판, 그 옆에는 강화나들길 8코스 철새 보러 가는 길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또한 이곳에는 망원경도 있어서 재두루미 및 저어새를 볼 수가 있는데 글쓴이는 보지 못했다.

 

이어 8분을 진행하니 선두5리 어판장에 세워져 있던 선두리 대형 표지석(화강암)이 이곳에도 세워져 있다. 현위치 표시만 다를 뿐 크기와 내용이 똑같다.

 

2분을 더 진행하니 「치마바위와 범골」안내판이 나온다. 안내판 옆에는 표지목(종점 3.2km, 시점 8.8km)도 세워져 있다.

 

치마바위와 범골

 

16세기 중엽 조선 중종 때, 금실이 아주 좋은 부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임신한 부인이 신 것이 먹고 싶다고 하자 남편은 싱아를 따러 범골로 가게 되는데 그곳엔 호랑이가 살기로 유명했습니다. 남편은 싱아를 따던 중 호랑이를 만나 목숨을 잃게 됩니다. 이 소식을 들은 동네 사람들이 호랑이를 잡기 위해 숲으로 몰려가 호랑이를 범골 구덩이에 몰아넣고 고춧가루를 뿌려 눈을 멀게 한 뒤 호랑이를 때려잡았습니다. 남편을 잃은 부인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치마바위에 올라 치마를 뒤집어 쓴 채 뛰어내려 남편의 뒤를 따르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범골에 가면 호랑이에게 뿌렸던 고춧가루 자국과 호랑이의 핏자국이 남아 있습니다. 한편, 임신을 하지 못한 부인이 매일 같이 치마바위에서 기도를 하면 임신에 성공하게 된다는 전설이 있어 마을사람들은 치마바위를 보며 소원을 빌고는 했습니다. [출처: 현지 안내판]

 

안내판이 세워져 있는 곳에서 산 쪽을 바라보면 육산의 능선에 바위구간이 보이는데 그곳이 치마바위이다.

    


강화나들길 캐릭터 발밤이


선두4리 어판장(둘째, 넷째 수요일 휴무)을 지나니 곧바로 사각정자가 있는 쉼터가 나온다.

이곳 쉼터에도 저어새 안내판과 망원경이 설치되어 있다. 그리곤 그 옆에 발밤이에 강화나들길 간판을 붙인 조형물이 있다. 그런데 발밤이의 백색과 빨간색은 사이좋게 붙어 있는데 검은색의 발밤이는 조금 떨어져 있게 설치했다. 바로 옆에는 저어새 서식처 안내판과 표지목이 세워져 있다.



분오리저수지 입구


이후 제방길을 따라 20여 분을 진행하니 사각오두막 정자가 나오는데 정자 기둥 양쪽에 나들길 거리가 적힌 푯말을 붙여놨다. 이곳이 분오리저수지 시점이다.(13:25)

 

이제 엄청 넓은 분오리저수지를 바라보며 제방길을 진행한다.

2~3분 후 쉼터가 나오고, 이후 9분 정도 더 진행하니 분오리저수지가 끝이 난다.(13:37)

    


분오리선착장 입구


2분 정도 더 진행하니 오래된 작은 이정표(←분오리돈대 0.88km)가 나온다. 이어 나무계단을 타고 올라가면 나들길 표지목(종점 0.8km, 시점 11.2km)이 반긴다.

 

이어 분오 왕새우 양식장(개인 사유지) 안내판을 지나 해안가로 내려선다.

해안가에서 올라가면 카페가 나온다. 카페 마당을 가로질러 후문(아치형)으로 나가면 다시 해안가로 떨어진다. 바다가 결빙되어 있어서 무척 조심스럽게 진행했다. 여러 척의 배가 정박되어 있는 해안을 지나 선착장으로 올라가니 저어새의 고향 각시바위 이야기(숨은그림찾기) 라고 쓴 대형 그림 안내판이 나온다. 이곳이 분오항어판장이다.

 

분오항어판장 간판과 동막회센터 간판을 뒤로 하고 포장도로를 따라 조금 올라가니 버스정류장이 나오고 이내 나들길 도장함이 설치되어 있는 분오리돈대 앞이다.

이로써 나들길 8코스 「철새 보러 가는 길」을 무사히 마쳤다.

짧은 휴식 포함하여 3시간 56분 걸렸다.

    


분오리돈대


이후

분오리돈대로 이동하여 분오리돈대를 구경하고 되 내려와 버스정류장으로 이동하여 한 시간을 기다려 5번 버스를 타고 초지대교 앞에서 내려 차량을 회수한 후 귀가했다.

 

6. 참고 자료

 

강화 초지진(草芝鎭) 사적 제225호

 

초지진(草芝鎭)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초지리에 있는, 바다로 침입하는 외적을 막기 위하여 조선 효종 7년(1656년)에 구축하고 1679년 조선 숙종 때 성으로 지은 요새이다. 1971년 12월 28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225호로 지정되었다.

 

1866년 10월 천주교 탄압을 구실로 침입한 프랑스 극동 함대와(병인양요) 1871년 4월 무역을 강요하며 침략한 미국의 아세아 함대(신미양요), 그리고 1875년 8월에 침공한 일본 군함 운요호를 맞아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격전지이다. 그러나 당시 프랑스·미국·일본의 함대는 우수한 근대식 무기를 가진데 비하여 조선군은 빈약한 무기로 대항하여 싸웠기에 매우 고전하였다.

 

1973년 초지진의 성곽을 보수하고 당시의 대포를 진열하여 역사 교육 현장으로 이용하고 있다.

 

▶ 개요

 

강화군 길상면 초지리 624번지 일대는 조선 효종 7년(1656)에 강화도와 강화해협의 수로 방비를 위해 구축한 요새인 초지진(草芝鎭)이 있던 곳이다. 운요호 사건과 강화도조약 이후 허물어져 돈대(墩臺)의 터와 성의 기초만 남아 있던 것을 1973년 강화전적지 보수정비사업 때 초지돈대만 복원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현재의 초지진은 원래 안산(安山)의 초지량(草芝梁)에 있던 조선 수군의 만호영(萬戶營)을 현종 7년(1666)에 강화로 옮겨 강화수로 수비의 요새로 새롭게 구축한 것이다. 초지진에는 군관 11인, 사병 98인, 돈군 (墩軍) 18인, 목자(牧子) 210명 등이 배속되어 강화해협을 수비하였다. 또한 초지돈(草芝墩), 장자평돈(長子坪墩), 섬암돈(蟾巖墩) 등 세 곳의 돈대를 거느리고 있었는데, 이들 돈대와 본진간의 협공체제를 통해 수비력을 극대화 하였다. 초지진에는 군선(軍船) 3척이 배속되어 있었고, 부속된 3곳의 돈대에는 각각 3개의 포좌(砲座)를 마련하고 화포를 설치하여 강화 해협을 수비하였다.

 

고종 8년(1871) 신미양요(辛未洋擾) 때 미군함 모노카시호와 팔로스호 등의 포격과 미국 해병 450명의 상륙공격으로 초지진이 미군에 점령 되면서 군기고(軍器庫), 화약고, 진사(鎭舍) 등이 모두 파괴되었다. 고종 12년(1875)에는 일본 군함 운요호의 포격으로 또다시 초지진이 큰 피해를 입었는데, 이듬해인 1876년 강화도조약으로 외세에 문호가 개방된 이후 방치되어 허물어지고 말았다.

 

현재 초지진의 진사와 주요시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자리에는 음식점 등 각종 시설이 들어서 축조 당시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유일하게 복원되어 있는 초지돈대는 높이가 4m 정도이고 장축이 100여m 되는 타원형의 돈대인데, 내부에는 3군데의 포좌(包座)와 총좌(銃座) 100여 개가 있으며, 조선시대 대포 1문이 전시되어 있다. 1971년 12월 28일 사적 225호로 지정되었다.

[위키백과에서 발췌]

 

▶사적 제225호(1971년 12월 28일 지정)

▶주소 :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해안동로 58

▶운영시간 : 9:00 - 18:00

▶입장료: 700원

▶전화번호 : 032-930-7072~3

▶특징 : 역사적인 장소, 전쟁, 병인양요, 신미양요, 운요호 사건

 

분오리돈대(分五里墩臺)

 

문화재 지정: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6호

건립시기: 1679년(숙종 5)

성격: 건축, 성곽, 돈대

소재지: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 사기리 산185-1번지

요약: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에 있는 조선 후기의 군사시설.

 

▶ 개설

 

강화도는 삼국시대 이래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다. 조선시대에도 17세기∼18세기에 해안을 따라 6개의 진(鎭)과 7개의 보(堡), 9개의 포대(砲臺)와 함께 53개 돈대가 설치되었다. 이 돈대는 강화도의 가장 남쪽에 있는 돈대이다.


▶ 역사적 변천

 

돈대는 적의 동태를 살피거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서 접경 지역이나 해안 지역 등의 군사 요충지에 세운 초소이다. 이 돈대는 조선 숙종 5년(1679)에 강화유수 윤이제(尹以濟, 1628∼1701)가 병조판서 김석주(金錫胄, 1634∼1684)의 명령을 받아 경상도 군위의 어영군 8천 여명을 동원하여 쌓았다고 전한다.

 

강화도 남쪽에 자리한 초지진(草芝鎭)의 외곽포대로, 망월돈대(望月墩臺), 계룡돈대(鷄龍墩臺), 굴암돈대(屈巖墩臺), 송강돈대(松岡墩臺) 등과 함께 영문(營門)에 속하였지만, 돈장(墩將)을 따로 두어 지키게 할 정도로 중요한 돈대였다. 현종 때에 강화유수 서필원(徐必遠, 1614∼1671)이 정비하였고, 최근에도 일부를 보수하였는데, 보존 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 내용

 

이 돈대는 해안으로 돌출한 산 능선의 끝부분에 위치하고 있다. 바다를 향해 돌출하여 곶을 이룬 지형에 자리하였으므로, 시야가 넓으면서 좌우에는 깊이 굽은 갯벌의 주변으로 포구가 형성되어 있다. 따라서 육지에서 진입할 때는 평지에 가깝지만 해안은 절벽과 급경사로 이루어져 있다. 평면이 네모난 여느 돈대와는 달리 지형을 그대로 살려 성벽을 쌓았기에, 평면은 반달 모양이며, 특히 동쪽 성벽 일부는 자연암반 위에 쌓았다.

 

성벽은 거칠게 다듬은 네모난 모양의 돌을 안팎으로 쌓았는데, 둘레가 84보라고 전하지만, 지금의 안쪽 둘레는 약 70m이고 너비는 약 12.8m이다. 바다를 향해서 4개의 포좌가 설치되어 있다. 성벽 위에 쌓은 성가퀴인 치첩(雉堞)도 37개가 있었다고 하지만, 현재는 일부만 남아 있을 뿐이다. 한편 돈대의 성문은좌우에 화강석을 잘 다듬어 만든 커다란 무사석(武砂石)을 쌓고서, 그 위에 보 형식으로 긴 돌을 건너질러 놓은 모습이다. 성문 안에는 문을 설치하였던 흔적으로 장군목(將軍木)을 끼웠던 구멍이 남아있다. 현재 돈대의 평균 높이는 2.62m이고, 입구 부분의 최고 높이는 약 4m이다.


▶ 의의와 평가

 

이 돈대는 군사 요충지인 강화도에 설치된 군사시설의 하나로, 조선 숙종 때의 축성 기술을 잘 간직하고 있는 국방 유적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발췌]



동막해변


7. 더 많은 사진 보기

강화나들길 8코스 철새 보러 가는길(사진 1) http://blog.daum.net/joingi61/15965208

강화나들길 8코스 철새 보러 가는길(사진 2) http://blog.daum.net/joingi61/15965209

강화나들길 8코스 철새 보러 가는길(사진 3) http://blog.daum.net/joingi61/15965210

 

8. 강화나들길 답사 후기

 

코스

답사

순서

답사날짜

후기

9. 다을새 길

3

2018.11.20

http://blog.daum.net/joingi61/15965198

10. 머르메 가는 길

4

2018.11.27

http://blog.daum.net/joingi61/15965201

11.석모도 바람길

5

2018.12.04

http://blog.daum.net/joingi61/15965204

12.주문도 길

1

2018.11.12

http://blog.daum.net/joingi61/15965194

13.볼음도 길

2

2018.11.13

http://blog.daum.net/joingi61/15965195

19.석모도 상주해안길

6

2018.12.25

http://blog.daum.net/joingi61/15965207

 

9.답사 경비

 

※1박2일 경비

①승용차 이용 기름값(추정): 50,000

②통행료: 4,900

③식대: 15,000

④버스비: 2,500

⑤민박요금: 50,000

⑥합계: 122,4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