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나들길 세 번째 이야기
9코스 다을새 길
시간이 머물러 있는 역사(歷史)의 섬 교동도(喬桐島)
그 첫 구간을 가다!
1.날짜: 11월 20일(화)
2.답사코스: 월선포선착장→화개산→대룡시장→월선포선착장
3.날씨: 맑고 청명함.
4.답사시간
-09:30 월선포선착장 착 / -09:46 발(답사 시작)
-09:47 9-51 표지목
-10:25 안양사지(安養寺址)
-10:40 교동향교(喬桐鄕校)
-10:59 화개사
-11:06 삼거리분기점 이정표(←교동면사무소 1.5km / ↑화개산 정상 1.5km)
-11:13 문무정(文武井)
-11:22 연산군유배지 갈림길 이정표(←정상 0.65km, ↓화개사 0.75km, 연산군유배지 0.55km→)
-11:30 화개산 봉수대
-11:38 화개산 정상(정상목, 산불감시초소, 삼각점[교동 21], 팔각정, 망원경, 조망도 등. 조망좋음)
-11:52 성혈(星穴)바위
-12:00 효자묘(孝子墓)
-12:16 연산군유배지
-12:29 한증막(汗蒸幕)
-12:33 사거리 착(점심) / -12:45 발
-12:55 교동면사무소
-13:01 대룡시장
-13:07 대룡시장 간판
-13:53 남산포(삼도수군통어영지(三道水軍統禦營址))
-14:09 교동읍성
-14:16 연산군적거지(燕山君謫居址)
-14:24 방조제길 시작점
-14:36 쉼터(벤치, 팔각정, 각종 안내판 등)
-14:57 월선포선착장 착(답사 종료)
※휴식 포함하여 5시간 9분, 휴식없이 약 4시간 50분 정도 걸린 것 같다.
화개산 정상(259m)에서 바라본 조망
고구저수지와 바다 건너 북한 땅이 조망된다.
5.답사 후기
일주일 만에 강화나들길을 다시 찾았다. 이번에는 주문도 ․ 볼음도에 이어 교동도로 넘어와서 제9코스 다을새 길이다.
교동도는 연륙교가 개설되기 전 2007년 1월 14일(일)에 창후리선착장(강화도)에서 차도선을 타고 15분 정도 걸려 교동도 월선포선착장에 도착하여 화개사, 교동향교, 화개산, 난정저수지 등을 답사(http://blog.daum.net/joingi61/10725695)한 적이 있었다.
무려 11년 10개월 만에 교동도를 다시 찾았다. 많이 변했을 거라 생각했던 처음의 생각은 착각이었다. 변한 것은 거의 없었던 것 같았다. 단지 변한 거라면 연륙교가 개통된 것, 그것뿐인 것 같았다. 이제 연륙교가 됐으니 점차 빠른 속도로 변할 거라고 생각이 든다.
평화의 섬 교동도 넓은 황금벌판과 서해의 아름다움이 장관을 이루는 교동도는 인구 약 3천명, 면적 47㎢로 강화군 북서쪽에 위치한 섬이며 2014년 7월 교동대교의 개통으로 더욱 편리하게 찾을 수 있는 관광지이다. 고구려시대에는 고목근현으로 신라 경덕왕 때에는 교동현이라는 지명으로 개칭되었고 고려시대에는 벽란도로 가는 중국 사신들이 머물던 국제교역의 중간 기착지였으며 조선시대에는 인조 11년(1633년)에 삼도수군통어영을 설치하여 경기, 충청, 황해도까지 전함을 배치하는 해상 전략적 요충지였다. 동북쪽으로는 개풍군과 8km, 서북쪽으로 연안군 ․ 배천군과는 불과 3km 사이에 바다를 두고 남과 북이 마주보는 중립수역에 위치하고 있다. [평화의 섬 교동도 관광안내지도 팜플렛에서 발췌] |
교동도는 민간인 통제구역이기 때문에 교동도에 다리가 생기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아무튼 연륙교가 생겨서 이제는 쉽게 교동도를 갈 수가 있어서 좋았다.
교동대교(喬桐大橋)
-개요: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도(교동면 봉소리)와 강화도(양사면 인화리)를 연결하는 다리이다. 교동연륙교라고도 한다. 강화-교동 연결도로는 길이 2.11km의 교동대교와 다리 양쪽의 접속도로 1.33km를 합쳐 총 3.44km이고, 900억 원의 사업비가 투입되어 2014년 7월 1일 정식 개통하였다.
-설계: 사장교(斜張橋) (교각이 없이 양쪽에 높이 세운 버팀기둥 위에서 비스듬히 늘어뜨린 케이블로 다리 위의 도리를 지탱하는 구조의 다리. 주로 물 흐름이 빠르고 수심이 깊은 곳에 놓는다.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사장교는 서해대교, 삼천포대교, 진도대교, 인천대교, 목포대교 등이 있다.) -길이: 2.11km -폭: 11.5m (2차로) -착공일: 2008년 9월 25일 -완공일: 2014년 7월 1일 -개통일: 2014년 7월 1일 -위치: 강화군 교동면 봉소리 ~ 양사면 인화리
-특기사항: 교동도는 민간인출입통제구역이기 때문에, 교동도 주민이 아닌 외지인은 해병대 검문소에서 출입 목적 등의 확인 후 출입증을 교부받아 교동대교 입구의 검문소에 그 출입증을 제시해야만 다리를 건널 수 있고 야간(오후 8시~오전 6시)에는 통행할 수 없다. |
교동도의 멋진 다리를 건너 출발지인 월선포선착장에 도착을 했다.(09:30)
월선포선착장에는 화장실 건물과 강화나들길 대형지도, 강화나들길 도장함, 「강화나들길 ⑨다을새길」 표지목, 하트모양의 조형물과 그 안쪽에「사진이야기 월선포구」 안내판, 그네 등이 세워져 있다.
강화나들길 제9코스 다을새 길
월선포선착장~화개산~대룡시장~월선포선착장
거리: 16km / 소요시간: 6시간 / 난이도: 중
월선포선착장-(3.5km)-교동향교-(0.8km)-화개사-(1.5km)-화개산정상-(2.3km)-석천당-(1.1km)-대룡시장-(2.8km)-남산포-(1km)-교동읍성-(0.7km)-동진포-(2.3km)-월선포선착장
<단축코스> 월선포선착장-(3.5km)-교동향교-(0.8km)-화개사-(4.9km)-대룡시장-(3.8km)-교동읍성-(3km)-월선포선착장
강화나들길 9코스 다을새 길 개념도
[코스정보]
삼국시대 이래 서해안 해상교통의 요지이며 고려 ․ 조선 왕족들의 유배지 그리고 조선 중기엔 경기 ․ 황해 ․ 충청 삼도 수군을 담당하는 삼도수군통어영이 설치됐던 중요 섬이다.
한강 ․ 임진강 물과 예성강 물이 합쳐지는 물길 어귀에 교동도가 있다. 드넓은 간척지, 들판과 하늘을 휩쓸고 다니는 철새 떼가 몰려다니고 과거와 현재가 공존, 마을과 산자락에서 옛사람들의 흔적을 쉽게 만날 수 있다. 풍년 들면 교동 주민이 13년은 족히 먹을 수 있다는 풍요의 섬, 천혜의 자연과 단 한 번도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았을 것 같은 고즈넉한 숲길, 강화 속 강화다.
월선포를 출발하여 푹신푹신한 숲길을 따라가면 최초로 공자상을 모신 교동향교의 고풍스러운 솟을삼문이 맞이한다. 고려 말의 문신이자 대학자 목은 이색이 머물렀던 화개사를 지나 화개산 정상에 오르면 섬 전체가 한눈에 들어오고 북녘땅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다가온다. 섬 전체가 민통선 지역인 데다 물때가 맞지 않으면 들고 나기가 매우 불편해서 그랬을까? 옛 정취가 섬 구석구석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헝클어진 일상사로 머리가 복잡할 때, 일에 치여 피폐해졌다고 느낄 때, 아무 일 없어 심심할 때 걸어보라. 시간여행이라도 한 듯 시계도 더디게 가는 느림의 평화와 생각이 우물처럼 깊어지는 걸 알게 될 것이다. 겨울철에 화개산 방향은 스틱과 아이젠을 준비해야 한다.
[출처: 강화나들길 홈피(www.nadeulgil.org/)]
09:46분에 월선포선착장에서 출발함으로써 강화나들길 제9코스 다을새 길을 시작했다.
다을새는 교동의 옛 지명 가운데 하나인 달을신(達乙新: 하늘에 닿을 새)에서 왔다고 한다.
교동대교 방향으로 1분 여 진행하니 「강화나들길 9-51」 표지목이 나타난다.
계속해서 넓은 포장도로를 따라 약 400m 정도 진행하면 삼거리가 나오는데 이곳에 이정표(←0.4km 월선포(옛 화개해운 선착장), 회주길 해안정자 1.5km, 교동읍성 2.5km→)가 세워져 있다.
이후 200m 더 간 지점에 표지목(시점까지 0.6km, 종점까지 14km)이 세워져 있다.
좌회전하여 잠시 숲길로 진행하다 시멘트 포장길로 접어든다.
도로를 가로질러 다시 숲길로 들어선다.
푹신한 낙엽을 밟으며 얼마간 진행하니 공터가 나온다. 이곳이 안양사지(安養寺址)이다.
안양사(安養寺)는 화개사와 함께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될 정도로 연혁이 있으나 현재는 터만 남아 있고, 사역 전체의 규모는 동서 21m, 남북 19m로 동쪽을 향하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고 한다. 남쪽에는 1m 정도의 토탄 축대와 당시 사용하던 것으로 추정되는 샘터와 수풀사이의 낮은 석축이 남아 있다고 강화나들길 안내판에 적혀 있다.
터만 남아있는 안양사지에 벤치 5개가 설치되어 있어 쉬고 가기 좋은 곳이다.
교동향교
안양사지에서 숲길 따라 13분을 진행하니 드디어 교동향교가 보이기 시작한다.
곧바로 교동향교 정문에 도착했다.(10:40)
답사시작 거의 한 시간(정확히 54분)이 걸렸다.
공자상을 모신 최초의 향교, 교동향교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8호 주소: 강화군 교동면 교동남로 229-49
향교는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며, 지방 백성의 교육을 담당하기 위해 국가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고려 충렬왕 12년(1286)에 안향이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공자상을 들여와 모셨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교육공간인 명륜당과 동재 ․ 서재가 있고, 제사공간을 형성하는 대성전과 동무 ․ 서무 그리고 내삼문 ․ 외삼문과 제기고 등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 ․ 노비 ․ 책 등을 지급받아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1894) 이후 교육의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의 기능만 남아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향교인 만큼 지금도 매달 음력 초하루와 보름에 유림들이 모여서 분향을 한다. |
교동향교 내부로 들어가서 잠시 구경하고 나왔다.
교동향교 입구에는 이정표(←월선 선착장 3.8km, 화개사 0.8km→)가 세워져 있고, 교동향교(喬桐鄕校) 안내판이 세워져 있는데 안내판 좌측 상단에 「한국 최초, 인천 최고 100선 / 교동향교 / 우리나라 최초로 공자상을 모셨던 향교」라고 써진 작은 현판이 붙어있어 눈길을 끌었다.
그래서 「한국 최초, 인천 최고 100선」이 궁금해서 인터넷을 검색(「6.참고자료 ② 한국 최초, 인천 최고 100선 목록」에서 확인)해봤다.
화개사
교동향교에서 화장실 건물을 지나 10분 정도 올라가니 화개사가 나온다.
화개사 오름길에서 늦가을의 정취를 흠뻑 느꼈다.
고려 말의 문신 이색이 머물었다는 화개사에는 약 200년 된 수고 14m, 나무둘레 1.6m 된 소나무가 보호수(고유번호: 4-9-73)로 지정(2008.08.07)되어 있다. 소나무가 보호수로 지정된 것은 아마 처음 본 것 같다.
화개사(華蓋寺)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 화개산(華蓋山)에 있는 사찰.
역사적 변천: 고려시대에 창건된 사찰로 자세한 내력은 전하지 않는다. 17세기 말의 『강도지(江都志)』와 18세기에 편찬된 『가람고(伽藍考)』에 언급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 후기에까지 그 명맥이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840년경 화재로 소실되었고, 1915년에는 붕괴한 적이 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는 전등사(傳燈寺)의 말사였는데, 1928년 3월 승려 정운(晶雲)의 불사(佛事) 기록이 남아 있다. 1967년 다시 화재를 겪었고 다음 해에 중건되어 오늘에 이른다.
내용: 화개사(華蓋寺)는 화개암(華蓋菴)이라고도 하는데, 『가람고』에서는 화정사(火鼎寺)라 하였다. 고려 말의 문신 이색(李穡, 1328-1396)이 이 사찰에 머물면서 독서를 했다고 한다. 화개사에는 고려 때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도금 불상 2구가 있었으나 지금은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남아 있는 유물로는 팔각원당형 부도 1기가 있으며, 수령이 200년 된 소나무가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고려시대의 사찰 내력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강도지』나 『가람고』와 같은 조선 후기 문헌에 언급되고 있다는 점에서 강화도의 주요 사찰 중 하나였음을 주정해 볼 수 있다. |
화개사 경내에서 석모도의 상주산(264m)과 앞 바다가 시원스럽게 잘 보인다.
조망을 마치고 이제 화개산 정상을 향한다.
화개사 경내를 빠져나오면 산길 초입에 이정표(←교동면사무소 1.5km / ↑화개산 정상 1.5km)가 세워져 있다. 그러니까 나들길 단축코스를 원하면 이곳에서 교동면사무소 방향으로 가면 된다. 글쓴이는 화개산 정상을 한 번 다녀온 적이 있지만 화개산 정상에서의 조망을 기억하며 화개산 정상을 향했다.
7분을 올라가니 문무정(文武井) 안내판이 나온다. 공터인데 낙엽만이 수북하다.
문무정(文武井)
문무정은 본래 동쪽에 문정(文井), 서쪽에 무정(武井)이 있어 두 개의 샘이었는데, 지금은 하나로 합해져 그 흔적만 남아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문정의 물이 많으면 문관이 많이 배출되고, 무정의 물이 많으면 무관이 많이 배출되었다고 한다. 어느 날 이 샘물의 물빛이 바다 건너 송가도(지금의 삼산면)까지 비추어 그 곳 부녀자들의 풍기가 문란하게 되자 노승의 말에 따라 소금으로 메운 후 진정 되었다고 한다. 송가도에서 이 노승의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냈었다고 하는데, 현재 사당은 남아 있지 않다. 그리고 문무정이 메워진 후 교동에서는 문관과 무관의 배출이 현저하게 줄었다고 전해온다. [안내판에서 발췌] |
문무정에서 계속해서 오름길을 약 9분 올라가니 연산군유배지 갈림길이 나오는데 이정표(←정상 0.65km, ↓화개사 0.75km, 연산군유배지 0.55km→)가 세워져 있다.
화개산 정상
연산군유배지 갈림길에서 약 8분 정도 더 올라가니 화개산 봉수대 터가 나온다.
화개산 봉수대 (華蓋山 烽燧臺) 강화군 향토유적 제29호
화개산 봉수대는 화개산과 잇대어 있는 연봉 정상에 자리 잡고 있으며, 현재 낮은 석단만이 남아 있는데, 가로 4.6m, 세로 7.2m이고 잔존 높이는 1.2m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남쪽으로 본도의 덕산봉수에서 연락을 받아 동쪽으로 하음 봉천산 봉수로 응한다고 되어있다. [안내판에서 발췌] |
화개산 봉수대에서 5분 정도 진행하니 청동기 암각화가 나온다.
안내판의 내용에 따르면 암각화가 새겨진 바위는 변성화강암의 일종으로 11개의 지그재그형 선각과 12개의 바위구멍으로 구성되는 비구상형이며, 기원행위의 결과로 남겨진 청동기시대 후기의 암각화로 추정되며, 한반도 남부지방을 중심으로 분포하였던 것으로 알려졌으나, 최북단인 이곳 화개산에서 발견되었다는 내용이다.
암각화는 선사시대의 신앙과 생활 ․ 사상 등 총체적인 선사문화를 표현하고 있으며 주로 풍요로운 생산을 기원하는 주술적인 내용이 많다고 한다.
청동기 암각화가 있는 곳에서 약 1분 정도 더 가면 정상을 바로 앞에 두고 삼거리가 나온다. 화개산 봉수대에서 200m 온 지점이고, 좌측으로 약수터(0.2km), 효자묘자리(0.15km)가 나온다. 직진하면 곧바로 화개산 정상이다.
직진하여 화개산 정상에 도착했다.(11:38)
화개산 정상에는 정상목, 산불감시초소, 삼각점[교동 21], 팔각정, 망원경, 조망도 등이 설치되어 있다. 11년 전에 본 그 감동 그대로 느낄 순 없었지만 그래도 일망무제 시원한 조망을 즐겼다. 그 당시엔 산불감시초소에도 올라가봤는데 오늘은 감시요원이 근무를 하고 있었다.
정상 조망을 마치고 잠시 직진을 했다.
조금 진행하니 성혈바위가 나온다.
성혈(星穴)바위
성혈(바위구멍그림)이 새겨진 바위는 청동기시대 이후의 유적으로, 하늘에 별자리, 풍요와 다산(多産), 장수, 태양 또는 자연숭배, 마을 제단 등 민간신앙의 일종으로 바위구멍을 통한 주술적 행위의 흔적이다. 주로 고인돌에서 볼 수 있으나 자연암석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이 바위는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오는 높은 지점인 점을 고려해 볼 때 자연숭배 신앙의 흔적으로 보고 있다. [안내판에서 발췌] |
성혈바위를 구경한 후 되짚어(글쓴이는 되짚어 내려왔지만 그냥 직진해도 나중에 만난다) 정상에 도착한 후 곧바로 나오는 삼거리에서 약수터 방향으로 내려갔다.
다소 완만한 내림길인데 주변은 소나무 숲이다. 이내 효자묘가 나온다.
효자묘(孝子墓)에는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고, 쉼터가 조성되어 있다.
효자묘(孝子墓)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삼국시대(고구려, 백제, 신라)의 시대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 시절 병환중인 홀아버지를 모시고 청주골에서 살았던 효성이 지극한 신씨라는 젊은이가 아버지의 공양식 제공을 댓가로 교동현의 군사로 징발된 부유한 집의 자제 대신 화개산성에 모병되어 종사하게 되자 그 아버지는 아들의 안부에 노심초사하여 고목근현(현재의 고읍마을)으로 이사하여 아들과의 약속을 삶의 목표로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있었다.
그 약속은 아들이 전투에서 살아남아 있다면 산성의 북루(北樓)에 해가 지기 전 하얀 적삼을 누대에 달아 아들의 생존을 어버이에게 알리기로 한 것이었다 한다.
그 시절에는 봉화나 수기 신호로 아군이나 내륙과의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던 때라 어느 날 이를 수상히 여긴 수장이 적삼 수기를 못 달게 하였으므로 아들이 죽은 줄 알고 상심한 아버지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한다.
아들을 취조 하던 중 이 사실을 알게 된 수장이 그 어버이의 시신을 산성 내에 안장하고 삼년시묘를 허락하여 종사하게 함은 물론 그 효성을 기리기 위해 수장과 병졸의 아침묘소 참배를 생활화하여 참배 자국이 지워질 날이 없었으며 지금까지도 효(孝)의 근본(根本)으로 그 자취를 보존하고 있다. [안내판에서 발췌] |
쉼터가 잘 조성된 효자묘를 지나 1분 정도를 내려가니 화개산성 안내판이 나온다.
화개산성 (華蓋山城) 향토유적 제30호
총길이 2,168m에 이르는 포곡식 산성으로 내 ․ 외성을 갖춘 산성이다. 포곡식 산성이란 산기슭에서부터 능선을 따라 계곡을 감싸고 있는 구조를 말하며 화개산성의 남쪽은 산 정상부의 절벽을 성벽으로 이용하였으며, 남북으로 길게 축조되어 있다. 축조시기에 대해 알려진 바는 없으며, 1555년 최세윤이 증축하고, 1591년 이어양이 외성을 철거하여 읍성을 축조하는데 사용하였으며, 1737년에 개축하여 군창(軍倉)을 두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안내판에서 발췌] |
그리곤 이정표(←면사무소 1.4km, 화개산정상 0.2km→, 효자묘자리 50m→)와 화개약수가 나온다.
연산군의 위리안치소를 재현한 조형물이 있는 연산군 유배지
내림길에 고구저수지와 북한 땅이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조망된다. 그리고는 연산군 유배지 갈림길이 나온다. 연산군 유배지는 나들길 코스에서 조금 벗어나 있지만 볼거리가 많아 계단을 타고 내려갔다. 그러면 이내 연산군 유배지이다.
연산군 유배지에는 위리안치소를 재현한 조형물, 연산군 유배지(교동섬 & 연산군 이야기) 안내판, 연산군의 유배행로 안내판, 연산군 위리안치소 안내판 등이 세워져 있으며 바로 옆에 교동도유배문화관 초가집 건물이 세워져 있다.
교동도유배문화관 내부로 들어가면 왕과 왕족의 유배지 「교동」, 교동에 유배된 고려의 왕(희종, 강종, 충정왕, 우왕, 창왕), 교동에 유배된 폐군과 왕족(안평대군, 능창대군), 강화에 유배된 왕족(영창대군), 교동에 유배된 연산군, 교동제비집 안내판, 나들길 안내판 등이 전시되어 있다.
교동도유배문화관 옆에는 화강암으로 만든 대형 표지석(연산군유배지(위리안치))이 세워져 있다.
조선시대 한증막
연산군 위리안치소를 재현한 조형물과 교동도유배문화관 내부를 본 후 되짚어 계단을 올라가 나들길에 합류한 후 좌측으로 산 허리길을 따라 조금 내려가니 아치형 파고라가 나온다. 천화문(天華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이후 1~2분 더 내려가니 한증막(汗蒸幕)이 나온다.
잠시 한증막을 보고, 3~4분 정도 더 내려가니 포장도로가 나온다. 이곳에서 좌측으로 150m 가면 연산군유배지가 나오고, 면사무소까지는 600m 거리이다.
이곳에서 점심을 먹었다. 이곳에 나들길 표지목이 세워져 있는데 종점까지 8.3km(시점까지 6.3km) 남았다고 적혀있다.
대룡시장
점심을 먹고는 포장도로를 따라 진행을 하는데 중간에 도로 공사하는 곳이 나오고 이후 교동면사무소가 나온다.
교동면사무소에는 화개산 등산 안내도가 설치되어 있다.
면사무소 앞 도로에 도로 표지판이 세워져 있는데 서울까지 75km, 강화까지 20km이다.
이후 교동초등학교를 지나 대룡시장에 들어섰다.
대룡시장
대룡시장은 6.25 때 연백군에서 교동도로 잠시 피난 온 주민들이 한강 하구가 분단선이 되어 고향에 다시 돌아갈 수 없게 되자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고향에 있는 연백시장을 본 따 만든 골목시장이다.
대룡시장은 50여 년간 교동도 경제 발전의 중심지였으며 지금은 실향민어르신들이 대부분 돌아가시고 인구가 급격히 줄어들면서 시장의 규모도 상당히 줄어들었다. 그러나 2014년 7월 교동대교의 개통과 함께 1980년대 영화 세트장 같은 대룡시장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기위해 찾아오는 사람들이 늘면서 관광 명소로 떠오르고 있다. [안내판에서 발췌] |
옛 향기 가득한 대룡시장을 천천히 구경하면서 진행했다.
대룡시장 입간판을 벗어나 남산포 방향으로 진행한다.
종점까지 6.8km(시점까지 7.8km)(13:12), 6.3km(시점까지 8.3km)(13:17), 5.5km(시점까지 9.1km)(13:29) 지점을 차례로 지나고, 황금벌판 사이로 난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한동안 진행하니 남산포가 나온다.
삼도수군통어영지(三道水軍統禦營址)
조선 인조7년(1629)에 한성(漢城) 방어를 위하여 남양 화량진에 설치 되어 있던 경기수영을 교동으로 옮긴 다음 인조 11년(1633)에는 3도(경기, 충청, 황해) 수군 통어영을 교동 남산포에 설치하였다. 이곳에는 수군을 훈련하던 훈련장 및 정박 시 배를 묶어두던 계류석(繫留石) 1기가 현존하고 있다. [안내판에서 발췌] |
남산포에는 삼도수군통어영지 안내판과 평화자전거길 안내도가 설치되어 있다. 삼도수군통어영 시절 사용했던 계류석 1기가 현존하고 있다는데 아쉽게 확인을 못하고 남산포와 작별했다.
교동읍성
남산포에서 되짚어 조금 올라간 후 우회전하여 진행했다.
화개산을 바라보며 15분 정도 진행하니 삼거리가 나오고, 삼거리에서 좌측으로 55m 더 진행하니 교동읍성이 나온다.
교동읍성(喬桐邑城)
교동읍성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에 있는 조선시대의 읍성이다. 1995년 3월 1일 인천광역시의 기념물 제23호로 지정되었다.
읍성이란 군이나 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행정적인 기능을 함께 하는 성을 말한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의 교동읍성은 한 도읍 전체를 둘러싸 외부로부터의 침입을 막았으며, 군데군데 문을 내어 바깥과 통하도록 만들었다.
성의 둘레는 약 430m, 높이는 약 6m로, 동·남·북쪽 3곳에 성문을 두었고, 각 문에는 망을 보기 위해 문루를 세웠는데, 동문은 통삼루, 남문은 유량루, 북문은 공북루라고 하였다.
조선 인조 7년(1629)에 처음 쌓았으며, 영조 29년(1753) 고쳐 쌓았고, 고종 21년(1884)에는 성문을 다시 세웠다고 전한다. 고종 27년(1890) 동문과 북문을 다시 세웠다고 하나, 현재는 3문이 모두 남아있지 않다. 동문과 북문은 언제 없어졌는지 확실하지 않으며, 남문인 유량루는 1921년 폭풍으로 무너져 반원 형태의 홍예문이 남아 있다. 2018년 남문인 유량루(庾亮樓) 문루가 복원되었다. 향후에는 웅성과 성벽.치 복원이 될꺼라고 한다. [출처: 위키백과] |
교동읍성을 지나자마자 나오는 가정집 마당에 심어진 감나무가 잎은 다 떨어지고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모습이 보기가 좋았다.
연산군 적거지 표지석과 안내판
이후 3분 정도 진행하니 조선 인조7년(1629)에 남양 화량진에 있는 경기수영을 이곳으로 옮기고. 이후에 교동현이 교동도호부로 승격되어 설치한 관아 건물지가 나온다.
관아와 객사를 비롯하여 내아, 외아 등의 관청건물과 안해루, 삼문루 등의 누각이 설치되어 조선시대 일반적인 지방관아의 형태를 따르고 있었으나, 현재는 안해루에 사용된 높이 2m의 석주 2개만이 남아 있다.
그리곤 곧바로 조선 태종 때 황룡이 출현했다고 전해지는 우물인 황룡우물(黃龍井)이 나오고, 1~2분 뒤 연산군적거지(燕山君謫居址)가 나온다. 이곳에 안내판과 표지석이 세워져있고, 우물도 보인다.
연산군 유배지 향토유적 제28호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 읍내리 270
읍내리 교동읍성 위 둑에 부근당이라는 조그만 당집이 있고 연산군과 그의 부인 신씨의 화상으로 추정되는 탱화가 걸려있다. 유배장소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추정지로 거론되는 세 곳 중 가장 유력하다고 평가되는 이곳에 「연산군적거지(燕山君謫居址)」라고 새긴 화강암 비석을 세웠다. 연산군은 유배된 그 해 겨울 병을 얻어 숨을 거뒀다.
교동도는 연산군을 비롯하여 광해군, 세종의 3남 안평대군, 선조의 첫째 서자 임해군, 인조의 동생 능창대군, 인조의 5남 숭선군, 철종의 사촌 익평군, 흥선대원군의 손자 이준용 등이 교동도로 유배당했거나 풀려나거나 사사된 곳이다. |
연산군적거지에서 5분 정도 진행하니 방조제길이 나온다. 전망대를 설치하는 현장을 지나자 월선포로 향하는 해안길이 시작되는데 양쪽으로 설치된 보호난간 뒤로 억새풀이 있어서 너무나 운치가 있다. 또한 바다를 끼고 진행을 해서 바다를 바라보는 풍경도 멋졌다.
그러한 멋진 나들길이 한동안(12분) 이어진다.
월선포 끝 지점에 설치한 월선포 포토존
좌측으로 교동대교, 우측으로 별립산(400m)이 잘 보인다.
잠시 쉬어가라고 쉼터가 나온다. 쉼터에는 벤치, 팔각정, 각종 안내판 등이 세워져 있다.
잠시 쉬다가 진행하는데 다시 해안길이 이어지는데 바로 앞전에 걸었던 길 보다는 조금 못한 길이지만 그래도 바다 풍광을 보면서 약 17분 정도 진행을 하니 월선포 입구(끝부분)가 나온다.
월선포 포토존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교동대교와 강화도 본섬의 별립산(400m)이 멋지게 보인다.
이후 2분 정도 더 가니 차량을 세워둔 주차장이다.
이렇게 해서 교동도 첫 코스를 즐겁게 답사를 마쳤다.
※휴식 포함하여 5시간 9분, 휴식없이 약 4시간 50분 정도 걸린 것 같다.
6.참고자료
① 강화의 섬
인천광역시 강화도와 북한과 맞닿은 교동도는 한반도의 대표적인 평화 해역이다. 최근 발생한 천안함 폭침과 연평해전 그리고 연평도 포격까지 서해5도서는 긴장의 바다 그 자체다. 하지만 북한과 가장 가까운 강화도와 교동도에서는 한국전쟁 정전협정 이후 단 한차례의 국지전도 총격 사건도 발생하지 않은 한반도 유일의 평화 해역이다. 통일과 평화의 바닷길이 열리는 곳이 바로 강화군도다. 2014년 교동도가 다리로 강화도와 연결되면서, 교동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으며, 석모도, 볼음도, 주문도, 아차도, 미법도 등 인근 섬에 대한 생태적 가치 또한 조명받고 있다. 강화군은 강화본도 권역, 석모권역, 교동권역, 서도권역으로 나뉠 수 있다. 이 중 강화도를 포함한 유인도는 모두 12개이며, 무인도는 20개다. 강화권역에는 연륙, 연도교된 유인도는 강화도·동검도·황산도 3개 있다. 그리고 교동도에는 상여바위라는 단 한 개의 무인도만 남아있다. 삼산면 석모도에 있는 유인도로는 옛날 무역선를 서쪽에서 검문했던 서검도와 미륵의 섬으로 알려진 미법도가 있다. 그리고 납도·괴리섬·기장섬(과거에는 유인도)·돌섬·죽도·대송도·소송도·동그란섬 등 8개의 무인도가 있다. 서도면에는 주문도·볼음도·아차도·말도 등 유인도가 4개 있으며, 응봉도·용알·용란도·은염도·분지도·석도·수섬·우도(군사구역상의 서해5도 중 하나)·함박도·부념도 등 강화군 중 가장 많은 10개의 무인도를 거느리고 있다.
교동도는 둘레 37.5km, 면적 47.16㎢로 삼각주 형태를 띠고 있고, 우리나라에서 14번째로 큰 섬이다. 교동도는 2014년 7월 개통한 연도교로 인해 가장 급격하게 변화를 겪고 있는 섬이다. 1970년대를 연상케하는 대룡시장과 마을은 마치 시간 여행을 하는 것처럼 흥미롭게 다가온다. 교동도는 선사시대부터 우리 선조들이 살았으며, 고대 해양 왕국을 세웠던 민족의 성지, 향교의 고장, 중국 무역의 전초기지였다. 고대 성곽의 흔적은 아직도 화개산(269m) 여기저기에서 발견되고 있지만, 현재는 등산로를 방해하는 돌뿌리로 전락해 방치되고 있어 안타까움을 주고 있다. 현대에 들어 한국전쟁 이후 군사분계선인 휴전선으로 같은 문화권이었던 황해도 연백을 갈 수 없지만, 연백과 교동은 하루 두 번 물이 빠질 때면 서로 형제임을 증명하듯, 하나의 길로 열린다.
지난 4월29일 인천시, 남구, 남동구, 연수구, 서구, 옹진군 등에서 모인 40여명의 공무원들이 교동도를 찾았다. 이날 방문은 <해양환경도시재창조 공무원 직무교육> 체험 학습을 위해서다.
교동도를 한눈에 볼 수 있는 화개산에 올랐다. 교동면사무소부터 정상까지 이어진 등산은 이곳에서 살며 (사)새우리누리평화운동을 이끌고 있는 김영애 대표가 동행했다. 같은 날 오후 1시, 점심을 교동도 특산 젓국갈비로 배를 채운 교육생들이 교동면사무소에 모였다. 등산을 시작한지, 오래지 않아 조선시대 선조들이 즐겨 사용했다고 전해오는 돌 한증막을 마주할 수 있었다. 현재는 원형복원과 관광객들을 맞이할 정자를 세우며, 단장이 한창이었다.
정상까지 가는 동안 눈에 띄는 것은 바로 성곽의 흔적과 성곽에 사용된 돌무더기다. 화개산 전체에서 발견되고 있다. 산을 오르다가 먼저 마주한 것은 바로 청동기시대의 성혈(星穴)바위다. 성혈(바위구멍그림)이 새겨진 바위는 청동기시대 이후의 유적이다. 하늘에 별자리, 풍요와 다산, 장수, 태양 또는 자연숭배, 마을 제단 등 민간 신앙의 일종으로 바위구멍을 통한 주술적 행위의 흔적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 김영애 대표의 설명이다. 이와 함께 주로 한반도 남부지방에서만 발견됐던 청동기시대의 암각화가 정상에서도 발견돼 학계의 큰 관심을 끌고 있다. 섬에서 발견된 것은 거의 처음이라는 설명이다.
정상에 오르니 석모도·주문도·볼음도·기장도·아차도·서검도·미법도·말도·함박도 등 30여개의 강화군도가 한 눈에 들어온다. 정상에서 바라본 북녘 땅 황해도 연백군 모습을 손에 잡힐 듯 관찰할 수 있다. 교동도와 황해도 연백군은 불과 3㎞도 채 떨어지지 않는 곳이다. 개풍군과는 8.5㎞이다. 특히 황해도 연백평야와는 간조시 갯벌이 드러나 서로 연결되는 곳이다. 민족 통일의 바닷길이 하루 열리는 곳이 바로 교동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분단의 아픈 현실 앞에 교동도 해안선 35.9㎞ 중 60%이상 정도의 해안선에 철조망이 둘러쳐 통일을 기다리는 바닷길을 가로 막고 있다.
또 하나의 장관은 교동평야와 거미줄처럼 촘촘한 농수로의 모습이다. 교동 평야는 중세부터 시작된 우리나라 매립의 역사와 그 맥을 같이한다. 인천시역사자료관에 따르면 현재의 교동도는 하나의 섬으로 이뤄진 큰 도서이지만, 조선시대 이전까지는 화개산, 율두산, 수정산을 중심으로 6개 이상의 섬으로 이뤄진 군도였다. 교동도를 포함해 강화 지역의 간척 사업은 몽골의 침입으로 인해 1232년(원종 11년)에 일어난 고려왕조의 강화도 천도가 그 직접적 계기가 됐다. 천도 당시 강화로 이주한 것은 고려 왕실 뿐 아니라 개경의 귀족을 비롯해 관료들, 그리고 이들의 가족, 개경 주변 연백, 해주, 파주 등에서 피난을 온 난민 수가 십 만명 이상에 달했던 것으로 문헌에 나오고 있다. 이렇듯 교동도의 농경지는 모두 갯벌을 매립해 조성된 것이다. 과거 교동도는 교통과 군사적 요충지였다. 40여년간의 강화 본도에서의 대몽항쟁을 간접적으로 지원해준 왕도 사수의 교두보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고립된 섬 특성상 식량의 자급자족과 더불어 강화 본도의 식량 지원이 필요했을 것이다. 고려 선조들은 갯벌을 매립, 개간에 들어갔고 식량 확보에 나선 것으로 주민들은 보고 있다.
교동도에 자리한 국보급 지정 문화재는 ▲연산군적거지(교동면 읍내리, 향토유적 28호) ▲교동봉수대(고구리, 향토유적 29호) ▲고구리 산정지(고구리, 향토유적 30호) ▲교동향교(읍내리, 유형문화재 28호) ▲교동읍성(읍내리, 시지정 기념물 23호)이다. 단, 이들 문화재들은 국가지정문화재가 아닌 향토, 또는 인천시 지정 문화재로 저평가된 것도 문제다. 하루 빨리 우리 고대사와 중세사를 모두 관통하고 있는 역사의 섬 교동도에 대한 학술적 조사와 복원 작업이 진행될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
경기만의 많은 섬 중에 생태적, 문화적 관광 가치가 가장 뛰어나지만, 반면 가장 낙후된 섬은 바로 주문도와 볼음도 같다. 가장 청정 서식하는 조개류 백합과 천연기념물 저어새의 서식지가 바로 볼음도와 주문도 갯벌이기 때문이다. 문화적으로도 많은 전설과 자연사박물관을 연상시킬 만큼 뛰어난 자연 생태계가 있어 생태관광코스 발굴과 행정적 지원, 숙박, 편의 시설 설치 등이 이뤄지면 경쟁력 있는 에코뮤지엄의 적지로 떠오를 가능성이 큰 섬이다. 주문도는 해안선 13㎞로 둘러싸인 작은 농어촌 마을이다. 인구가 300명이 채 되지 않는다. 연평도 등 다른 인천 도서에서도 임경업 장군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데, 주문도(注文島)와 볼음도(乶音島)도 역시 임경업 장군과 인연이 있다는 설이 있다. 임경업 장군이 명나라에 원병 수신사로 출국했는데, 폭풍으로 발이 묶이자 당시 왕이었던 인조에게 이 사실을 문서로 주달했다고 해서 아뢸주(奏)자를 써서 주문도(奏文島)로 쓰였다가, 세월이 흘러가면서 현재의 주문도(注文島)가 됐다는 설이다.
볼음도(乶音島)역시 풍랑에 발이 묶인 임경업 장군이 당시, 볼음도에서 둥근달을 보았다고 해서 발음 그대로 볼음도라 칭하게 됐다고 한다. 재미있는 것은 볼자의 생성 과정이다. 한자에는 '볼'자 없어 보(甫)자 밑에 'ㄹ'의 생김새인 '乙'을 붙여 '볼(乶)'자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주문도 처녀바위에서 내려오는 전설도 이야기가 된다. 주문도 주문도리 남쪽에 분지도라는 무인도가 있다. 생김새로는 도저히 처녀바위가 형상화되지 않는다. 볼음도에는 천연기념물 304호인 은행나무 한 그루가 그 위용을 자랑하며 수려하게 서 있다. 이 은행나무의 수령은 900년에 가깝다. 높이만 30m, 둘레만 해도 9.8m가 넘는다. 볼음도의 자랑은 드넓은 갯벌이다. 그 대표적인 장소가 바로 조개골 해수욕장이다. 미세한 백사장이 특징이며, 길이가 2km에 이르고 여름철이면 피서객이 가장 많이 찾는 해변이기도 하다. 조개골해수욕장은 모래톱이 발달했기 때문에 물이 깨끗하고 수심이 완만해 가족들이 즐기기에 알맞고 간조시에 들어나는 갯벌에 들어가 동죽, 조개, 칠게를 잡는 재미도 느낄 수 있다.
또 볼음도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친환경농업이다. 주민들은 저어새생태마을 조성 사업과 친환경농업을 접목시킬 경우 친환경 관광단지로서의 시너지 효과를 누릴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볼음도는 10년 전부터 우렁이를 이용한 친환경 농법으로 벼농사를 짓고 있다. 우렁이는 잡초와 해충을 잡아먹는다. 또 화학비료도 일절 쓰지 않는다. 볼음도 쌀은 이미 친환경 농산품으로 소비자들로 부터 각광을 받고 있다. 친환경 농업과 저어새생태마을을 이용한다면 관광객들에게 보다 많은 볼거리와 상품을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주민들은 판단하고 있다. 주문도의 대빈창 해수욕장과 뒷장술 해수욕장도 관광객들에게 큰 인기를 끌며, 주민들은 생태관광지 발굴에 나서고 있다.
출처 : 인천일보(http://www.incheonilbo.com)
② 한국 최초, 인천 최고 100선 목록
1.강화 부근리 고인돌(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탁자식 고인돌)
2.문학산(비류의 전승이 남아있는 인천의 대표적 관방 시설)
3.능허대(삼국시대 대 중국 문물교류의 상징적 장소)
4.전등사(조선왕조실록을 지켜낸 천년고찰)
5.참성단(단군왕검이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고 전해지는 제단)
6.마니산(해발 469m로 인천에서 가장 높은 산)
7.강화도(우리 민족 해안 간척사의 대표적인 공간)
8.7대어향(7대에 걸친 고려 왕실의 고향)
9.상정고금예문(강화도에서 간행된 세계 최초의 금속 활자 책)
10.팔만대장경(강화도에서 판각된 불교경전, 세계기록유산)
11.강화도 고려 왕릉(남한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고려시대의 왕릉)
12.교동향교(우리나라 최초로 공자상을 모셨던 향교)
13.원도사(서해 바다의 여러 신들을 모아 제사 지내던 낙섬의 사당)
14.연평파시(조기잡이의 중심지인 연평도에서 열린 시장)
15.외규장각(강화도에 세웠던 왕실 도서관 「규장각」의 분관
16.학산서원(조선시대 인천 유일의 사설 교육기관)
17.서양인이 기록한 인천(개화기 서양인의 눈에 비친 인천의 생활과 풍습)
18.강화 연무당(최초의 근대식 조약인 강화도조약의 체결지)
19.축구와 야구의 출발지(축구의 도입과 최초의 팀창단 국내 야구 시발지)
20.조약체결지(서구 열강과 맺은 최초의 조약체결지)
21.이화양행(개항 이후 우리나라에 진출했던 최초의 서양 무역회)
22.인천감리서(개항장의 통상사무를 맡아 보았던 행정기관)
23.인천해관(우리나라에서 처음 자주적 관세 업무를 시작한 곳)
24.인천 외국인묘지(근대기 인천에서 생을 마감했던 외국인의 공동묘지)
25.각국조계(우리나라 유일의 각국 외국인 거주 구역)
26.청관(우리나라 최초 ․ 최대의 청국 조계지)
27.세창양행 사택(인천에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주택)
28.우체국의 효시(우리나라 최초의 우체국인 우정총국 인천분국이 있던 도시)
29.대불호텔(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호텔)
30.신상협회(외국 상권에 대항하기 위해 결성한 민족 상인 연합회)
31.내리교회(우리나라 감리교의 출발지)
32.세창양행 광고(한성주보에 실린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상업광고)
33.각국공원(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공원)
34.답동성당(1937년에 증축한 인천 천주교 성당)
35.일본제18은행(근대기 인천에 건립되었던 은행건물 중 가장 오래된 건물
36.성 누가병원(랜디스 박사가 설립한 인천 최초의 서양식 병원)
37.인천전환국(1892년부터 1898년까지 근대식 화폐를 발행했던 기관)
38.담손이 방앗간(스팀 동력기를 사용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정미소)
39.영화학당(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문을 연 서구식 초등교육기관)
40.이운사(우리나라 민간 해운업의 효시)
41.양무호(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군함)
42.조선수사해방학당(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세운 해군사관학교)
43.해성보육원(우리나라 최초의 아동 보육기관)
44.최초의 시외전화(경인간을 잇는 우리나라 최초의 시외 전화)
45.협률사(인천 경동에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조선인 공연장)
46.인천미두취인소(우리나라 최초의 선물거래시장)
47.인천항재판소(인천에 설치되었던 개항장 재판소로 우리나라 법무 행정의 효시)
48.엡윗청년회(우리나라 소년 운동의 선구인 감리교 청년단체)
49.인항어상회사(조선인이 설립한 인천 유일의 어시장)
50.경인선(우리나라 최초로 건설된 철도)
51.성공회 강화성당(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건립한 한옥형태의 성공회 성당)
52.제물포구락부(각국공원에 건립된 인천 거주 외국인들의 사교클럽)
53.예포(월미도에 설치한 예식용 대포)
54.동양연초주식회사(인천 최초의 담배회사)
55.하와이 이민(우리나라 최초의 공식 이민)
56.팔미도등대(우리나라 최초의 등대, 대한민국 자유수호의 상징)
57.제녕학교(민간인이 운영했던 인천 최초의 학교)
58.광제호(무선 전신 시설이 설치된 우리나라 최초의 군함)
59.대한천일은행 인천지점(우리나라 민족계 은행이 최초로 개설한 지점)
60.사이다(인천에서 생산된 우리나라 최초의 탄산음료)
61.아라뱃길(한강과 서해바다를 직접 연결하는 인공 운하)
62.인천전기(주)(인천 최초의 전기공급회사)
63.붉은 벽돌 쌀 창고(인천 최초의 현대적 창고영업의 시작)
64.오포(응봉산 정상에서 포를 쏘아 정오를 알렸던 시보)
65.인천공립보통학교(일제강점기 인천의 조선인을 위한 대표적인 초등교육기관)
66.주안염전(우리나라 최초의 천일염 생산지)
67.홍예문(해안 조계지와 내륙을 이었던 무지개 모양의 돌문)
68.송현배수지 제수변실(우물을 대신한 인천 최초 상수도 시설)
69.상계월보(인천 최초의 경제 월간지)
70.짜장면과 짬뽕(인천에서 시작된 한국을 대표하는 중국음식)
71.비누(애경사에서 최초로 생산했던 위생용품)
72.인천도로원표(국도 42호선, 6호선, 46호선의 기점을 알려주는 표지석돌)
73.수준원점(우리나라 해발 고도 측량의 기준점)
74.이중 갑문식 「독」(간만의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건설한 인공 항만)
75.조선인촌주식회사(동구 금곡동에 있었던 일제강점기 최대 규모의 성냥 공장)
76.경인기차통학생친목회(일제강점기 철도로 통학했던 조선인 학생들의 친목회)
77.인천의 양조공장(인천의 3대 산업 중의 하나였던 양조업)
78.월미도 조탕(우리나라 최초, 유일의 조탕 해수탕의 원조)
79.웃터골(우리나라 최초의 공설운동장)
80.인천부립도서관(인천 최초이자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로 문을 연 공립도서관)
81.훈맹정음(인천 출신 송암 박두성 선생이 만든 최초의 한글 점자)
82.인천기상대(우리나라 최초로 천문 관측을 했던 기상대)
83.수인선(1937년 수원과 인천을 연결한 협궤철도)
84.경인공업지역(병참기지로 출발한 우리나라 최초의 산업단지)
85.애스컴(일본의 무기공장이었던 부평에 들어선 미군의 군수보급 기지)
86.인천시립박물관(우리나라 최초의 공립박물관)
87.대중일보(인천 최초의 한글판 일간지)
88.인천상륙작전(6.25전쟁의 반전의 발판을 마련했던 작전돌)
89.새나라 자동차(현대식 조립 라인에서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자동차)
90.극동방송(우리나라 최초로 해외 송출을 시작했던 복음 방송)
91.인천판유리(우리나라 최초의 판유리 생산 공장)
92.한국화약(우리 손으로 처음 다이너마이트를 생산한 화약 산업 현장)
93.부평 지하도상가(우리나라 최대의 지하쇼핑센터)
94.경인고속도로(우리나라 최초의 고속도로)
95.쫄면(인천에서 시작된 대표적인 면 요리)
96.인천국제공항(2001년 3월 29일 개항한 우리나라 최대의 국제공항)
97.인천경제자유구역(동북아 경제중심 실현전략의 거점)
98.인천대교(국내에서 가장 긴 다리, 동북아 경제 성장의 인프라)
99.녹색기후기금(우리나라에 최초로 유치한 UN기구)
100.동북아무역타워(인천에서 가장 높은 건물(305m))
7.더 많은 사진 보기
강화나들길 9코스 다을새 길(사진 1) http://blog.daum.net/joingi61/15965196 |
강화나들길 9코스 다을새 길(사진 2) http://blog.daum.net/joingi61/15965197 |
8. 강화나들길 답사 후기
코스 | 답사 순서 | 답사날짜 | 후기 |
12.주문도 길 | 1 | 2018.11.12 | |
13.볼음도 길 | 2 | 2018.11.13 |
9.답사 경비
①승용차 이용 기름값(추정): 22,000
②통행료: 3,600
③합계: 2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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