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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德壽宮)

약초2 2012. 11. 22. 12:23

덕수궁(德壽宮)

 

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99(정동)

사적 124호(1963.01.18 지정)

매주 월요일 휴무

문의: 02-771-9951

 

조선시대의 궁궐로서 경운궁으로 불리다가, 고종황제가 1907년 왕위를 순종황제에게 물려준 뒤에 이곳에서 계속 머물게 되면서 고종황제의 장수를 빈다는 뜻의 덕수궁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덕수궁 자리에는 조선 9대 임금인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집이 있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한양으로 돌아온 선조는 궁궐이 모두 불에 타고 없어서 임시로 월산대군의 집을 거처로 정하고 선조 26년(1593)부터 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근처의 계림군과 심의겸의 집 또한 궁으로 포함하였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즉위 3년(1611)에 이곳을 경운궁으로 고쳐 부르고 1615년 창경궁으로 옮길 때까지 왕궁으로 사용하였다. 그후 선조의 왕비인 인목대비가 경운궁으로 쫓겨나와 있게 되었는데 그 후로 광해군은 이 곳을 서궁으로 낮추어 부르게 하였다. 광해군이 인조반정으로 1623년에 물러나면서 인조는 즉조당과 석어당만을 남기고 나머지 건물들을 옛 주인에게 돌려주거나 없애버렸다. 그 뒤로 고종황제가 러시아공관에서 옮겨오면서 다시 왕궁으로 사용되었는데, 그 때부터 이 궁은 비로소 궁궐다운 건물들을 갖추게 되었다. 1904년의 큰 불로 대부분의 건물들이 불에 타 없어지자 서양식 건물인 석조전들이 지어지면서, 원래 궁궐 공간의 조화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 중 가장 큰 변화는 정문이 바뀐 것이다. 덕수궁의 정문은 남쪽에 있던 인화문이었는데, 다시 지으면서 동쪽에 있던 대안문을 수리하고 이름도 대한문으로 고쳐 정문으로 삼았다. 비록 조선 후기에 궁궐로 갖추어진 곳이지만, 구한말의 역사적 현장이었으며 전통목조건축과 서양식의 건축이 함께 남아있는 곳으로 조선왕조의 궁궐 가운데 특이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덕수궁의 역사(연혁)

 

창건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의주로 피난 갔던 선조가 1년 반 만에 한양으로 돌아왔으나, 한양의 모든 궁궐은 왜군에 의해 불타 없어져 머물 궁궐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당시 황화방(皇華坊)에 위치한 월산대군(月山大君) 후손의 집과 인근의 민가 여러 채를 합하여 임시 행궁(行宮)으로 삼고 '시어소(時御所)'로 머물게 되었으니, 이것이 훗날 덕수궁(경운궁)의 시작이었다.

선조는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궁궐을 재건하려 했으나, 당시의 궁핍한 국가재정 상황 등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 1608년 2월 정릉동 행궁 정전(석어당 추정)에서 승하하고 만다.

 

선조의 뒤를 이어 이곳에서 즉위한 광해군은 1611년 창덕궁을 재건하여, 그해 10월 창덕궁으로 이어(移御)하면서 '경운궁(慶運宮)'이란 이름을 비로소 짓게 된다.

병조판서 이항복을 시켜 경운궁의 담장을 두르고 궁궐로써의 면모를 가다듬는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하지만 광해군은 곧 다시 경운궁으로 돌아와 머물다 1615년 창덕궁으로 아주 이어(移御)를 한다.

 

한편 1623년 인조반정의 성공으로 광해군을 폐위시킨 인조는 광해군에 의해 경운궁에 유폐되어 있던 인목대비로부터 왕으로 인정을 받고, 경운궁 별당(즉조당 추정)에서 즉위한 뒤 인목대비를 모시고 창덕궁으로 이어하게 된다.

이때 인조는 선조가 머물던 즉조당과 석어당 두 곳만 남기고, 나머지 경운궁의 가옥과 대지를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고 경운궁을 아주 떠나게 된다.

이로써 경운궁은 왕이 공식적으로 머물며 국정업무를 보던 궁궐로써 기능을 마감하였다.

 

이후 영조 때(영조 49) '선조가 경운궁(덕수궁)에 거처를 정한 3주갑(180년)과 선조의 기일(승하일)을 맞이해, 영조가 세손(정조)과 함께 경운궁 즉조당에서 추모 사배례(四拜禮)를 올리는' 등 기념의식을 갖기도 하였고, 고종 30년(1893)에 '선조가 경운궁에 거처를 정한 5주갑(300년)을 맞아 고종이 세자(순종)와 함께 경운궁 즉조당에서 추모 사배례(四拜禮)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리고 난 후 1897년 고종이 다시 이곳으로 환어(還御)하기 전까지 비어있게 된다.

 

대한제국시대, 일제시대의 덕수궁

 

그런 경운궁이 다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것은 1895년 10월 경복궁에서 명성황후가 무참히 살해된 을미사변(乙未事變)이 일어난 후 부터이다. 을미사변으로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1896년 2월 세자(순종)와 함께 러시아공사관으로 급히 피신하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단행하여 무려 1년이 넘게 러시아공사관에서 머물던 고종은 마침내 1897년 2월 경운궁으로 환궁(還宮)하게 된다.

 

당시 경운궁 주변 정동 일대는 러시아,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서양세력들의 근거지였던 만큼, 이를 이용해 일본을 견제하려는 의도도 있었던 듯하다.

같은 해(1897년) 8월 고종은 연호(年號)를 광무(光武)로 반포(頒布)하고, 10월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정한 뒤 원구단(圓丘壇)에서 황제 즉위식을 갖는다. 이처럼 경운궁의 또 다른 역사는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선포와 더불어 열강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시작되었다.

 

경운궁은 고종이 본격적으로 임어하게 되면서 그에 걸맞은 궁궐의 격식을 갖추어 나갔지만, 1904년 4월 함녕전에서 비롯된 대화재로 인해 경운궁은 또 한 번 큰 시련을 겪는다.

중화전을 비롯한 석어당, 즉조당, 함녕전, 궐내각사(闕內各司) 등 중심부에 있던 건물들이 모두 잿더미가 되고, 경운궁(덕수궁)은 이전의 모습을 크게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현재 석조전을 제외한 덕수궁의 모든 건물들은 이 이후에 재건되었으며, 그 규모도 대폭 축소되고 만다.

 

그러던 중 1905년 경운궁 중명전(重明殿)에서 소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고, 이에 고종은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1907년 7월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 이준, 이위종을 황제의 특사자격으로 비밀리에 파견하게 된다.

하지만 결국 이로 인해 1907년 8월 일제는 고종을 황제의 자리에서 강제 퇴위시키고, 순종이 경운궁 돈덕전(惇德殿)에서 황제에 오르게 된다. 황제에 오른 순종은 그 해 11월 창덕궁으로 이어(移御)했으며, 이로써 경운궁도 마침내 궁궐로써 그 기능과 생명을 다하게 된다.

 

이때 순종은 경운궁에 계신 태황제(太皇帝) 고종에게 '덕수(德壽)'라는 궁호(宮號)를 올리는데, 오늘날 덕수궁(德壽宮)이란 이름은 이렇게 얻게 되었다. 한편 덕수(德壽)란 궁호는 왕위를 물려준 '선왕의 덕과 장수를 기린다'는 뜻으로, 특정 고유명사로서가 아니라 물러난 선왕에게 올리는 궁호의 보통명사격인 셈이다. 1919년 고종이 함녕전에서 갑자기 승하하자, 덕수궁은 주인이 없는 궁궐이 되어 일제에 의해 조직적으로 훼손되기 시작한다.

 

따라서 덕수궁은 그 틈바구니 속에서 전통적인 궁궐제도에 입각한 배치형식이나 자연 지세에 따른 자유로운 배치가 파괴되기에 이르렀다. (1910년도의 덕수궁 배치도 참고)

당시 덕수궁의 전각을 살펴보면 크게 세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궁궐의 중심부가 밀집된 동남쪽에는 대한문을 비롯 중화전·함녕전·즉조당·석어당·준명당·정관헌 등 당시 정전·편전·침전·궐내각사 등이 있었으며, 궁궐서쪽으로는 미국 영사관과 러시아 공사관 사이에 서양식 2층 건물인 중명전 일대와 환벽정 등이 있어, 접견실·연회장 등으로 주로 쓰였다. 북쪽으로는 선원전(璿源殿)과 혼전(魂殿)이 있던 지금의 舊경기여고터, 덕수초등학교 위치로 왕실의 제사가 치러지던 곳이 그것이다.

 

그밖에 덕수궁의 북쪽과 남쪽 담장에 구름다리(雲橋)가 각각 설치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철거되었다. 북쪽의 구름다리는 러시아 공사관 언덕 위에서 경희궁으로 이어져 있었고, 남쪽의 구름다리는 중화전 남쪽 옛 영복당 자리에서 옛 법원자리로 옮겨온 의정부(議政府)와 연결하기 위한 통로였다.

고종이 승하한 뒤 3년 만에 일제는 현재의 덕수궁 돌담길을 뚫고 도로의 개설, 학교, 방송국 등을 지어 덕수궁을 절단한다. 이로써 덕수궁의 면적은 더욱 축소되고 그 모습을 잃어간다.

 

아울러 대부분의 건물을 철거 또는 방매(放賣)하였으며, 훼철된 덕수궁을 1933년 10월 공원(公園)으로 만들어 일반에게 공개하게 된다.

이와 같이 일제침략기를 거치면서 덕수궁은 대한제국기의 원형을 거의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이때에 잔존하게 된 전각들은 대략 다음과 같다.

○ 대한문 · 포덕문 · 건극문 · 용강문 · 생양문 · 광명문 · 중화문

○ 중화전 · 준명당 · 즉조당 · 석어당 · 함녕전 동행각 일부 · 덕홍전 · 구여당(함녕전 뒤쪽의 2층집) · 정관헌 · 석조전

 

이 외에 궁성 밖 서쪽 정동 10번지에 광무 8년 4월에 경운궁에 불이 났을 때 고종이 피하였던 수옥헌(嗽玉軒)이 있다. 1905년 11월 17일 한일조약을 체결한 장소이고 1907년 7월 고종이 헤이그 밀사를 파견하였던 곳이기도 하다. 후에 중명전(重明殿)으로 개칭되었고, 순종의 이어소(移御所)로 사용되다가 구미인(歐美人)의 클럽으로, 개인회사의 사옥으로 사용되기도 했던 건물이다. 복원공사를 거쳐 지금은 전시관으로 일반에 개방되고 있다.

중명전과 러시아 영사관 사이에 환벽정이 있었다. 순종이 태어난 건물이 있고 명성황후의 혼전이던 경효전(景孝殿)과 순명황후의 혼전(魂殿)인 의효전(懿孝殿)도 있었다. 의효전은 창덕궁으로 옮겼다.

 

일제강점 이후에 궁의 서쪽 선원전(璿源殿)의 터를 일부 통과하는 도로를 열었다. 지금의 미국대사 관저와의 사잇길이 이것이다. 도로 서쪽에 떨어져 나가게 된 엄비(嚴妃)의 혼전(魂殿)을 헐고 그로부터 북쪽으로 전일의 경기여자고등학교 교사를 지었다. 이듬해인 1923년에는 그 맞은 편, 즉 도로의 동편 제사 준비소 터에다 지금의 덕수초등학교의 교사를 지었다. 1927년에는 그 동쪽 언덕 위를 밀어내고 사단법인 경성방송국의 청사를 지었다.

 

엄비의 혼전 부근에는 그가 소유하던 과수원이 있고 제사의 준비소에는 희생(犧牲)의 도살장 제수용구(祭需用具)를 두는 건물들이 있었고 방송국의 동남방에는 귀족들의 자제들을 교육시키던 수학원의 목조건물이 있었는데 정동 3번지로 지금의 성공회 교회당이 있는 일대가 그 터전이다.

 

그러나 광무 11년의 고종 폐위(廢位) 및 융희 4년(1910) 한일합병으로 국세가 크게 기울어짐과 함께 궁궐 안의 많은 전각 문루 등이 차례로 헐리어 1935년경에 와서는 대한문(大漢門), 건극문(建極門), 포덕문(布德門), 생양문(生陽門), 용강문(用康門) 등의 궁장(宮墻) 문 안으로 중화전, 함녕전, 덕홍전, 석어당, 즉조전, 정관헌, 준명당, 양심당, 구여당, 석조전 등의 일부 건물만이 여기 저기 남게 되었다.

 

그리고 전각(殿閣), 문루(門樓) 등이 헐린 사이사이에는 화단(花壇)과 초장(草場)을 만들고 잔디와 작약(芍藥), 모란 등을 심어 새로운 경관(景觀)을 이루며 이 동안 1913년 봄에는 경성일보 사장 요시노가 벚나무 500그루를 진상하여 심기도 하였다. 그리고 1933년부터는 궁내를 일반에게 공개 관람하게 하니, 이제는 시민들의 소풍 산책하는 고궁으로 화하였다.

 

또 종래 황실의 귀빈 접대시 사용되던 석조전은 일제 미술품의 진열 전시장으로 바뀌어지며, 1936년 3월에는 다시 석조전 서쪽으로 미술관 신축공사를 착수하여 1938년 8월에는 연건평 1,000여평의 미술관을 건립하고 창경궁박물관 소장의 미술품, 고고학자료 등을 옮겨 수장 전시하여 일반의 인기를 모으기도 하였다. 또 일반 공개가 시작됨과 함께 여기저기에 매점, 휴게실 등이 생기니 고궁의 인상은 차츰 희미하여지게 되었다. 또 1921년에는 창덕궁 화원에 새 선원전(璿源殿)이 이루어짐과 함께 중화전에 봉안(奉安)되었던 고종의 어진(御眞)도 옮겨가니 덕수궁과 고종과의 깊은 관계도 옛날 일이 되고 말았다.

 

대한제국기 덕수궁을 둘러싼 정동 일대 모습

 

일본이 강압적으로 조선과 먼저 수호조약을 체결하자 구미제국들도 차례로 수호조약을 체결하여 조선의 문호가 대외적으로 개방되었고, 그리하여 서울의 정동을 비롯한 주요한 곳에 서구공사관이 자리를 잡았고 앞 다투어 양옥건물이 세워지게 되었다.

미국공사관은 덕수궁 후문 쪽에 자리 잡고 있다. 1882년 한미수호조약이 체결된 후 1884년 최초의 주한공사 루시우스 H 푸트장군이 부임해오자 당시 정5품 한림 민계호(閔啓鎬)의 저택을 미화 2천달러(한화 1만냥)에 구입하여 공사관 겸 저택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러시아공사관은 현 정동교회 건너편(정동 15-1번지, 1977년 사적253호 지정)에 1890년(고종27) 건축되어 고종황제가 경운궁으로 환궁할 때까지 (1986년2월1일부터 다음해 2월20일까지) 머물렀다.

 

영국공사관은 덕수궁 북쪽 현재의 위치(정동 4번지)에 1890년 세워졌다.

프랑스공사관은 1886년6월 한불수호통상조약이 조인되고 그 이듬해 박동 독일공관 서편에 인접한 한옥을 사용하였으나(수표교 북방도로 현 관수동 126번지) 협소한 것을 이유로 1888년 11월 러시아공관과 정동교회가 인접한 지역(현 창덕여중 자리)에 새로 공관기지를 선정 구매하여 1889년 10월 이사하였으나 1905년 을사조약의 체결로 공사를 철수하였다.

1901년(광무5)에는 각 외국 공관에 정동 황궁(皇宮) 근처에 고층건물을 짓지 말도록 통보하기도 하였다.

 

구미열강의 공사관 뿐만 아니라 구미인들이 세운 양옥건물들도 줄을 이어 세워졌다.

덕수궁 서남쪽에 있는 정동교회(정동32-2번지)는 감리교선교사 아펜젤러가 조선에 입국하여 감리교의 신앙을 전파하기 위하여 1885년 7월 한국인 가옥을 구입하여 예배처로 삼은 것에서 비롯되어 1895년 한옥을 개조하여 새 교회당건물을 세웠다. 1890년 조선에 전파되어 온 성공회성당(정동 3번지)은 1914년 서울 도시계획에 의해 현재의 태평로 일대가 확장되면서 영국인 건축가에 의해 설계되어 1926년 5월 완공되었다.

 

외국인 상대의 서구식 호텔인 손탁호텔이 1900년 정동(정동 32번지)에 세워졌다. 이 호텔은 1885년에 초대 노국공사(露國公使) 웨베르(Waber)와 함께 내한(來韓)한 손탁양이 1895년에 고종으로부터 정동에 있는 한 가옥을 하사 받아 외인(外人)의 집회소로 사용하다가, 1902년 10월에 이 구식가옥을 헐어서 2층 양관을 신축하였다. 2층은 귀빈실, 하층은 보통실과 식당을 두었다고 한다. 이 호텔 건물은 1918년에 이화학교에서 매수하여 기숙사로 사용하다가 그것을 헐고 1923년 프라이 홀을 지었다.

 

일제시대의 덕수궁을 둘러싼 정동일대 모습

 

일제강점이후에는 궁의 서쪽 선원전의 터를 일부 통과하는 도로가 열였다. 지금의 미대사관저와의 사잇길이 그것이다. 선원전을 헐고 그로부터 북쪽으로 전일의 경기여고 교사를 지었다. 이듬해 1923년에는 그 맞은편 제사 준비소 터에 지금의 덕수초등학교의 교사를 지었고, 1927년에는 그 동쪽 언덕 위를 밀어내고 사단법인 경성방송국의 청사를 지었다.

 

이화학당(梨花學堂)은 중학과(中學科)와 대학과(大學科)의 창설로 학교체제가 완비되어갈 무렵 학생수가 증가하여 기왕에 있던 메인홀(Main Hall)만으로는 학생을 완전히 수용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학당장 프라이(Lulu E. Frey)는 새로운 건물을 짓기 위하여 정동 30번지를 구입하였는데, 이 터는 1896년에 설치되었다가 한일합방이 되던 1910년에 폐쇄된 원호국 시종원(侍從院)이 있던 곳이다. 프라이는 미쓰 홀부룩(Miss Holbrook)이 희사한 기금으로 1914년 착공하여 1915년 3월 준공하였다. 원래 홀부룩의 기금은 그의 동생인 사라 심프슨(Sarah J. Simpson)이 세상을 떠날 때 위탁한 것이기 때문에 이 건물을 심프슨기념관(Simpson Memorial Hall) 이라 하였다.

또한 학당장 월터는 독자적인 유치원 건물의 필요성을 느껴 미국의 에드가 후퍼부인(Mrs. Edgar Hooper)으로부터 기부금 1만원을 받아 이명원(李命遠)으로 하여금 유치원 건물을 짓게 하였다.

 

1921년 5월 우선 60평의 교사를 건립하고 동년 10월에 40평의 교사를 동년에 증축하여 총 건평 100평의 유치원 전용건물(에드가 후퍼기념관 : Ralph Edgar Hooper Memorial Kindergarten Building)이 완성되었다 한다.

프라이홀(Frey Hall)은 정동 29번지에 184평의 손탁호텔을 구입하여 이 자리에 새 건물을 건축한 것으로, 1922년 8월 제5대 학당장 월터가 착공하여 1923년 9월 제6대 학당장 아펜젤러 때 완공되어 프라이홀이라 하였다. 이 건물은 1935년 전문학교가 신촌으로 옮긴 뒤 이화여고에서 사용하다가 1975년 화재로 2 · 3층 474평이 소실하였다.

 

조선말에 호조 대신 조세, 국채, 화폐 등 재무 행정을 관장한 관아인 탁지부는 대한제국이 수립되고 나서 세종로에서 덕수궁 옆 중구 정동으로 이전했다. 1894년 갑오개혁 때 호조를 폐지하고 탁지아문(度支衙門)을 설치했는데 1895년에 탁지부로 개칭한 것이다. 탁지부가 이전되어 사용한 건물은 고종이 양위(讓位)하기 전에 의정부 청사로 설계한 것으로 1907년 12월에 준공되었지만 한일신협약이 체결된 이후였으므로 탁지부 청사로 변경했다. 이 건물은 일제 침략기에 고등법원으로 사용되기도 했으나 1970년에 헐렸다.

현재 서울특별시 별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구 서울고등법원 청사는 중구 서소문동 37번지에 위치해 있다. 본래 재판소는 대한제국시대부터 공평동에 있었으나 1927년 6월 정동 언덕의 원래 총독부 분실이 있던 자리에 경성재판소로서 새 청사의 신축을 시작하여 1928년 8월에 준공되기도 하였다.

 

광복이후 현재의 덕수궁

 

광복을 맞으면서, 덕수궁 내의 석조전이 새로운 역사 문화의 장으로 활용되었다. 그 해 10월 해방 기념 미술전람회가 개최되었으며, 그 이듬해 1월에는 미소공동위원회 임시회의가 개최되기도 하였다. 또한 1948년부터 1950년 6.25가 발발할 때까지 UN한국위원단에서 석조전을 사용하였다.

1954년 6월에는 석조전을 국립박물관으로 처음 사용하였으며, 1955년에는 석조전 건물의 일부를 육군 공병단에서 수리 복원하였다.

1961년 10월 정식관리기구인 덕수궁관리사무소가 설치되어 관리를 전담하게 되었다. 그 해 11월 서울특별시 도시계획에 의한 제 1차 도로확장공사로 시청 쪽 담장이 철거되고 철책으로 대체되었다. 그 이듬해에는 7월 덕수궁을 사적 제 124호로 지정하였다. 다시 1968년 5월에는 서울시 도로확장공사로 시청 쪽 도로에 편입되어 설치된 철책을 철거하고 담장을 설치하였다.

 

또한 그 해 7월에는 남대문경찰서 태평로파출소가 덕수궁 동북담모서리에 신축되었으며, 이 공사로 덕수궁 대지 25평이 편입되었다. 7월 15일에는 담장 이전공사로 담장 만을 궁 내부로 이전하고 대한문(大漢門)은 원위치 도로상에 폐쇄 고립됨. 당초 당 궁 총면적 20,114평 중 1,977평이 도시계획 등에 의해 편입되어 18,137평이 보존관리 면적으로 남게 되었다. 그 이듬해에는 덕수궁에서 관리하여오던 미술관을 국립박물관으로 이관하였다.(대통령령 제3525호) 1970년 8월에는 도로상에 폐쇄 고립된 대한문(大漢門) 이설공사를 착공하여 1971년 1월 2일 이설 준공되었다. 1973년부터 86년까지 석조전 서관은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사용되었으며, 98년 8월 석조전 서관이 다시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분관 개관하였다.

 

1992년 12월 덕수궁 관리사무소의 직제가 궁중유물전시관으로 확대 개편되었다. 궁중유물전시관은 덕수궁관리는 물론 5대궁궐 13개능원에 분산 소장되어있던 궁중유물을 한군데 집중 관리하게 되었으며, 석조전에 일반인들을 위한 전시관도 개관하게 되었다.

 

2005년 8월15일 궁중유물전시관은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이전하였고, 덕수궁의 관리는 다시 덕수궁관리소에서 하고 있다.

<덕수궁 홈피[ http://www.deoksugung.go.kr/ ]에서 발췌>

 

 

지정문화재 현황

 

구분

지정번호

명칭

수량

지정일자

국보

229

보루각 자격루

1

1985.03.03

보물

819

덕수궁의 중화전 및 중화문

1

1985.01.08

820

덕수궁 함녕전

1

1985.01.08

1460

흥천사종

1

2006.01.17

사적

124

덕수궁

일원

1962.07.25

 

중요 건물 현황

 

중화전

 

1.중화전(보물 제819호)

규모:409.3㎡

연혁:고종황제께서 1897년에 러시아공사관에서 덕수궁으로 이어하시면서 즉조당을 정전으로 사용하셨으나 협소하였으므로 1902년 새로운 정전으로 중화전을 지으셨다. 본래는 중층건물이었으나 1904년 4월 14일 화재로 소실된 후 현재의 단층 건물로 중건되었다. 앞뜰에 조회 등의 의식이 있을 때 문무백관의 위치를 표시하는 품계석이 좌우에 있으며, 정문으로 중화문이 있다.

 

 

중화문

 

2.중화문(보물 제819호)

규모:83.31㎡

연혁:1902년 건립된 중화전의 정문으로 1904년 화재로 소실된 후 중건되었으며 좌우에 행각이 있었으나 없어지고 동측에 일부만 남아있다.

 

3.함녕전(보물 제820호)

규모:343.77㎡

연혁:1897년 건립되었으며 고종황제의 침전으로 사용되었다. 1904년 4월 14일 함녕전 온돌수리공사중 일어난 화재로 함녕전은 물론 덕수궁 내 주요 전각들이 모두 소실되는 큰 화재가 있었는데 이 건물은 같은 해 12월에 중건하였다. 1919년 1월 21일 고종황제가 이곳에서 승하하셨다.

 

 

현재 석조전은 공사중!

 

 

 

4.석조전

규모:3,986.65㎡

연혁:조선시대 궁중건물 중에서는 최초로 유럽풍의 석조로 건립된 건물이며 영국인 "하딩"이 설계하였으며 영국인 "데빗손" 감독 하에 1900년 기공되어 1910년에 준공되었으며, 특별한 건물명칭은 없이 "석조전"으로만 전해 온다. 고종(高宗)황제는 이곳에서 고관대신과 외국 사절들을 접견하거나 침전으로 사용하였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기 이전까지는 현대미술품을 진열하였으며 1946년~1948년까지 미·소 공동위원회가 사용했고 1948년~1950년 동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유엔한국위원단이 이곳을 사무실로 사용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 시 건물일부가 파괴되어 1955년 육군공병단에 의해 수리되었으며 그 후 국립중앙박물관 궁중유물전시관으로 사용하기도하였다.

 

 

석조전서관

 

5.석조전서관

규모:3,428.47㎡

연혁:1936년 8월 21일 기공하여 1938년 6월 5일 준공하였으며 이왕가 미술관으로 사용되었다. 현재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덕수궁 미술관으로 사용 중이다.

 

 

정관헌

 

정관헌

 

 

 

 

6.정관헌

규모:269.55㎡

연혁:1900년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동서양 절충식 건물은 고종황제께서 다과회를 개최하고 음악을 감상하시던 곳이며 한때 이곳에 태조(太祖)의 어진(御眞)을 봉안하였다.

설계는 사바찐이 하였으며, 규모는 정면 7칸, 측면 5칸으로 내·외진으로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내진 공간 위에는 팔작지붕이 덮여있고 외진공간은 차양칸처럼 된 특이한 형태이다.

외진에 두른 철제 난간에는 사슴, 소나무, 당초, 박쥐 등 전통문양을 넣었다.

 

7.석어당

규모:229.19㎡

연혁:창건 연대는 확실치 않고 1904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같은 해에 중건하였다. 덕수궁의 유일한 목조중층 건물로 선조(宣祖)께서 임진왜란 중 의주로 몽진하셨다가 환도한 후 이곳에서 거처하셨고 1608년 2월 선조가 승하한 곳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인목 왕후가 광해군에 의해 유폐되었던 곳이기도 하며, 인조반정이 성공한 뒤 광해군(光海君)을 석어당 뜰아래 꿇어앉히고 인목왕후가 죄를 책한 곳 이기도하다. 단청을 하지 않은 "백골집"으로 아래층은 정면 8칸, 측면 4칸이며 상층은 정면 6칸, 측면 1칸으로 겹처마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8.덕홍전

규모:127.54㎡

연혁:함녕전을 침전으로 사용할때 일반 빈객들을 접견하기 위하여 1906년 건립한 후 1911년에 개조하였다.

용도는 주로 외국사신이나, 대신들을 만나던 접견실로 쓰였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4칸이며 겹처마 팔작지붕의 단층 건물이다. 측면에는 좌우 툇간이 있어서 전체의 평면은 정사각형에 가깝다. 이 건물 주위에는 행각들이 있었으나 지금은 남행각만이 함녕전 남행각에 연접되어있다.

 

9.준명당

규모:231.43㎡

연혁:이 건물의 창건 연대는 미상이나 고종(高宗)때에 중건된 것으로 추측되는 목조건물로 즉조당과는 복도로 연결되어 있다. 고종이 신하나 외국 사신을 접견하던 곳으로, 함녕전이 지어지기 전까지 고종의 침전으로 쓰였다. 정면 6칸, 측면 5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집이며 높은 기단위에 세워졌다. 좌우 툇간에 쪽마루를 두고 있다. 1916년 4월에는 덕혜옹주 교육을 위해 이곳에 유치원을 개설하기도 하였다.

 

10.즉조당

규모:131.93㎡

연혁: 준명당(俊明堂)과 복도로 연결되어 있는 이 건물은 15대 광해군(光海君)과 16대 인조가 즉위한 곳이다. 1897년 고종의 경운궁 환궁 직후 정전으로 이용되기도 하여 한때 명칭이 태극전, 중화전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1902년 새로운 정전이 세워지자 다시 즉조당으로 불리게 되었다. 1904년 화재로 손실된 것을 그해에 다시 석어당, 함녕전과 같이 중건한 것이다. 고종의 후비인 순헌귀비 엄씨가 1907년부터 1911년 7월 승하할 때까지 이곳에서 거처하셨다.

정면 7칸, 측면 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11.귀빈실

규모:103.14㎡

연혁:함녕전 남행각의 일부로 원래의 모습이 많이 변형되어 있다.

 

 

대한문

 

12.대한문

규모:123.04㎡

연혁: 덕수궁(德壽宮)의 정문으로 원래는 대안문(大安門)이던 것을 1906년 7월 15일 수리 시 대한문이라 개칭하였다. 서울시 도시계획에 의한 제2차 도로확장 공사 때에 담장만을 궁내로 이전하여 도로상의 한복판에 분리 폐쇄되어 있다가 1970년 8월 21일 현 위치로 이설 공사를 착공하여 1971년 1월 2일 준공을 보았다. 2005년에 해체 보수공사를 하였다.

 

 

광명문

 

13.광명문

규모:56.53㎡

연혁:1897년에 건립하였으나 1904년에 소실되었다가 중건된 목조건물로 당초 함녕전의 정문이었으나 1938년 미술관 개관 시 흥천사종과 보루각 자격루를 진열하기 위하여 현 위치로 이전한 것이다.

 

 

국보 제229호 보루각 자격루

 

 

 

14.보루각 자격루(국보 제229호)

연혁:1536년 (중종 31)에 만들어진 물시계

물을 보내는 파수호(播水壺)가 3개, 물받이인 수수통(受水筒)이 2개 남아 있는데, 시계가 처음 만들어진 것은 1434년(세종 16) 장영실(蔣英實)에 의해서였다. 장영실의 물시계는 정해진 시각이 되면 격발장치를 건드려 쇠알이 굴러가서 여러 운동을 하게 만든 것이다. 종·북·징이 울리고 인형이 나타나는 장치는 정교한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장영실에 의해 처음 만들어진 물시계는 경복궁에 보관되었는데 남아 있지 않고 중종 때 이를 본떠서 다시 만든 것이 창경궁 보루각에 보관되었다가, 일부가 지금까지 전해 오는 것이다.

대파수호와 수수통은 청동으로 만들어져 있다. 수수통에는 하늘로 솟아오르는 용의 모양을 양각해 놓았는데 중종 때 이를 만든 우찬성 유부(柳溥), 공조참판 최세절(崔世節) 등 참여자 이름이 적혀 있다.

 

15.흥천사종(보물 제1460호)

규모:높이:2.82m,직경:.7m,두께:3㎝

연혁:이 종은 1462년 7월 이태조(李太組)의 후비 신덕황후를 추모하기 위하여 만든 것이다. 이 종은 신덕왕후 능의 근처 흥천사에 있었으나 흥천사가 중종 5년(1510년)에 화재로 소실되어 영조 23년(1747년)에 경복궁(景福宮) 정문인 광화문으로 옮겼다. 한일합방 후 일인들이 이 종을 창경궁으로 옮겼다가 후에 덕수궁 현 위치에 다시 옮겼다.

 

16.중명전

규모:784.49㎡

연혁:중명전은 러시아의 건축가 사바찐(Seredin Sabatin)의 설계로 1897년부터 1901년에 걸쳐 황실도서관으로 건립된 지하1층, 지상2층의 벽돌조 건물로 처음에는 수옥헌(漱玉軒)이라 불렀다.

1904년 4월 14일 경운궁 대화재로 인해 고종황제의 편전이자 외국사절들의 알현실로 사용되었으며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이 체결된 근대사의 중요한 유적이다.

또한 1907년 4월 20일 이곳에서 고종황제로부터 친서를 받은 이준은 이상설 · 이위종과 함께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는 네델란드 헤이그에서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알리고 대한제국의 주권회복을 호소하였으나 이것이 빌미가 되어 일제에 의해 고종황제는 강제 퇴위 당하였다.

건축학적으로는 우리나라 근대건축의 가장 초창기 풍모를 간직하고 있으며 1925년 3월 12일 일어난 화재로 외벽만 남기고 내부는 대부분 소실되어 원형을 잃었다.

해방이후 여러 차례 건물의 용도와 소유주가 변경되었으며 2006년 9월 20일 문화재청으로 소유권이 이전되었고, 2007년 2월 7일 사적 제124호인 덕수궁에 포함되어 사적으로 추가 지정되었다. 2009년 복원이 완료되어 2010년부터 전시관으로 일반에 개방되고 있다.

 

문화와 역사가 살아 숨 쉬는 서울의 전통문화 행사

왕궁수문장 교대의식

 

일시 : 연중 상설(월요일 휴무)

행사 장소 : 덕수궁 대한문

행사 시간 :

교대의식-1회/11:00, 2회/14:00, 3회/15:30

○순라의식-11:25~12:25(덕수궁 대한문 - 청계천 - 보신각)

15:40~16:10(덕수궁 대한문 - 세종로 - 광화문 광장)

※ 행사 시간 및 순라의식 구간 등은 사정에 의해 변경될 수 있습니다.

 

왕궁수문장 교대의식

 

왕궁수문장 교대의식이라는 용어는 조선시대 「경국대전(經國大典)」등의 자료에는 보이지 않으나, 궁궐 문을 지키는 수문장의 직품과 수문장이 속한 관청인 수문장청의 직제 형태 등이 나타나 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조선시대에는 궁성문 개폐의식, 궁성 수위의식, 행순(순라의식) 등이 있었고, 이 자료들을 바탕으로 그 명칭을 왕궁수문장 교대의식이라 칭하여 1996년부터 재현하고 있습니다.

조선시대 궁성에는 궁궐문을 책임지는 관청인 수문장청이 설치되어 종6춤의 수문장을 비롯하여 참하와 수문군이 궐내외의 수위(守衛)를 담당하였고, 이들은 도성 문의 개폐와 통행인을 검사하고 단속하는 임무를 담당하였습니다.

 

왕궁수문장 교대의식의 구성

 

 

 

수문장 : 종6품의 무관(무관)으로 수문군을 통괄하는 수문장청의 책임자

참하 : 종9품의 무관으로, 왕궁수문장 교대의식을 지휘하는 역할

수문군 : 궁궐문을 수비하는 일반 병사

승정원 주서 : 정7품의 문관이며, 교대의식을 감독

액정서 사약 : 종6품의 내관이며 약시함(궁궐문 열쇠 보관함)을 인계하고 교대의식을 감독

취라척 : 교대의식과 수문군의 행진 때 군악을 연주

엄고수 : 교대의식의 진행 절차를 엄고(북)로 알리는 역할

 

부대행사

 

개식 타고 : 왕궁수문장 교대의식의 시작을 알리는 개식 타고 체험

전통 복식 체험 : 관람객 누구나 한국 전통 복식 무료 체험

포토존 : 수문장과 함께 기념 사진 촬영

수문군 속으로 : 왕궁수문장 교대의식 행사 중에 사회자, 진행요원의 안내에 따라 행사장에 도열해 있는 수문군들과 함께 기념 사진 촬영

나도 수문장이다 : 관람객이 수문장 역할로 직접 출연하여 왕궁수문장 교대의식을 지휘할 수 있는 체험 행사

 

-접수는 왕궁수문장 교대의식 홈페이지에서 사전 예약

-매일 2회 행사(14:00)에만 운영

-기상 상황 등에 의해 사전 통보 없이 취소될 수 있음

 

http://www.royalguard.or.kr/를 방문하시면 왕궁수문장 교대의식의 자세한 정보와 이벤트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왕궁수문장 교대의식 절차

 

군호응대(암호확인) : 매일 바뀌는 암호를 확인하는 절차

초엄-약시함(열쇠보관함) 인계 : 초엄에는 궁궐문의 열쇠함을 인계

중엄-교대명령 확인 : 중엄에는 양 교대군이 교대 명령을 확인

삼엄-임무교대 : 삼엄에는 임무를 교대하는 의식인 면간교대 진행

 

순라의식

 

순라의식은 도성을 순찰하는 의식입니다.

교대한 부대는 궁궐의 외곽경비 임무를 행하는 순라를 실시합니다.

 

 

 

 

 

 

 

 

 

 

 

 

 

 

 

 

 

 

왕궁수문장 교대의식

 

 

덕수궁은 일반 성인 1,000원의 입장료가 있습니다.

 

관람권

 

하마비

 

늦가을 덕수궁 단풍나무

 

늦가을 덕수궁의 단풍나무

 

너무 멋집니다!

 

덕수궁 미술관 전시 안내판

 

멋진 은행나무

 

은행나무

 

석조전 아래의 침상원

 

단풍나무

 

단풍나무

 

화려한 단풍나무

 

화려한 단풍나무

 

연못

 

연못을 향하여!

 

거목 지정현황

 

96호로 지정된 회화나무(수령 약 326년 되었다)

 

 

거목으로 지정된(97호) 회화나무

 

 

덕수궁 위치

 

덕수궁 위치

 

참고자료: 조선의 마지막 궁궐, 덕수궁 바로가기 [ http://tour.junggu.seoul.kr/tour/h02_culture/h21_top_03_2.js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