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산행/지정명산

아쉬웠던 적상산이야기

약초2 2010. 5. 25. 19:12

 908번째 산행이야기

985번째의 산, 적상산(赤裳山 1,034m) 첫 이야기

 

1.산행날짜: 2010년 5월 24일(월)

2.산행날씨: 약한 비(가스가 끼여 시야 제로)

3.참가인원: 2명

4.산행코스: 안국사→주능선→향로봉→정상→안국사[원점회귀]

5.산행시간: 약2시간 정도

 

 

 상부댐(적상호)이 생기기 전의 등산지도

 

 

 현재의 지도

 

 

6.산행후기

 

오후에는 중부 이남지역은 비가 그친다고 해서 약한 비가 내리는 가운데 한국100대명산 중 아직 미답산(3개 남았다)인 적상산을 가기위해 아침 9시에 자가용을 끌고 산행에 나섰다.

월요일이고 비가 내려서 그런지 1시간 가까이 차량이 정체가 된다. 중부톨게이트를 빠져 나오니 그때서야 정체가 풀린다.

 

결국 오후 1시가 다 돼서야 안국사에 도착한다.

오후에는 비가 그치리라는 일기예보를 믿고 왔건만, 역시! 였다.

계속해서 약한 비가 내리고 주변에는 운무가 끼어 시야가 거의 제로상태이다. 그래도 100대 명산인 적상산 정상을 밟기 위해 산행에 나섰다.

한창 공사중이라서 어수선한 안국사에서 등산로를 따라 조금 올라가니 이내 주능선에 닿는다. 이정표가 세워져 있는데 좌측은 안렴대 가는 길이고 우측은 향로봉 가는 길이다. 그런데 정상 표시가 없다. 순간 어리둥절한다.

가다 보면 정상을 밟겠지 하고는 향로봉 방향(우측)으로 향한다.

안개가 낀 초원능선이 너무나 멋지다. 필자가 가지고 있는 똑딱이 사진기로는 좋은 사진이 나오지 않아 그냥 눈으로만 담고 운치있는 능선길을 진행한다.

 

얼마간 진행을 하니 적상산성이라고 쓴 표지석이 나온다.

이 역시 좋은 사진을 건지지 못할 것 같아 그냥 진행을 한다.

얼마간 같을까 서창으로 갈 수 있는 삼거리가 나온다.

 

「아뿔사! 정상을 그냥 지나쳐 왔구나!」

아까 능선길과 사면길이 있었는데 사면길로 진행을 하니 정상을 놓친것 같다.

「어차피 이따 다시 왔던 길 되짚어 오니까 그때 능선길로 진행을 해서 확인하면 되겠지」하고는 그냥 향로봉을 향해 진행을 한다.

오르내림이 그리 심하지 않아 편안하게 진행을 한다.

향로봉 직전, 역시 완만하게 살짝 올라가니 공터인 향로봉 정상에 닿는다.

덕유산국립공원에서 설치한 안내판이 향로봉임을 알려준다.

주변 역시 심한 가스로 시야가 제로다.

아쉬움을 달래고 이내 내려온다. 북쪽으로는 난간으로 막아놨다.

 

되짚어 내려간다. 다시 서창으로 갈 수 있는 삼거리를 지난다.

잠시 내려갔다가 이내 약한 오름길이 이어진다.

얼마 진행하니 능선길이 나타난다. 이번에는 정상을 확인해야 해서 좁은 등산로인 능선길로 해서 올라간다.

얼마간 올라가니 안테나가 보이기 시작한다.

오늘 가스가 심해서 시야가 거의 제로라서 아까 안테나를 못 본 것이다.

 

안테나(시설물) 주변에 도착한다. 역시 안테나 안쪽으로 철조망이 쳐져 있어서 출입을 할 수가 없다. 주변을 돌아봐도 정상석이 보이지가 않는다. 아니 아무런 표기도 보이지가 않는다.

실망 그 자체다.

「그래도 덕유산국립공원의 적상산 정상인데...!」

시설물이 있는 정상에 아무것도 표기가 없는걸 확인하고는 하산하는데 길이 양쪽으로 나 있다. 직진방향은 길이 조금 넓고, 우측방향은 철조망 사이로 길은 좁은데 표지기 한 장이 보인다.

직진방향으로 해서 간다(안렴대를 보려면 우측으로 갔어야 했다).

 

길이 매우 뚜렷하고 넓다. 낙엽도 수북이 쌓여 있다. 계속 내리막길이 이어진다. 한동안 내려가니 우측으로 희미하게 건물이 보인다. 안국사 지붕이다.

「아뿔사! 잘못 내려왔구나!」

이미 후회해도 소용 없는일, 어차피 시야가 제로라서 안렴대 가봐야 별볼일 없을것 같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고 내려간다. 그런데 사방이 철조망으로 처져 있다. 다행히 좌측으로는 열려 있어서 그쪽으로 내려가니 이내 포장도로에 떨어지고, 조금 더 진행하니 안국사 일주문이 나온다.

이내 주차장에 도착을 한다.

 

아까 산행한 후에 안국사를 보기로 했으므로 다시 계단을 올라가 안국사를 구경을 한다.

안국사는 공사 중이라 어수선하다.

대웅전은 보이지가 않고 극락전이 보인다.

예전에 도승 큰형님이 가르쳐줬는데 대웅전과 극락전의 차이를?

아무튼 지금은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나중에 알아보기로 하고, 마저 답사를 마치고 귀경길에 오른다.

 

 

 안국사 극락전 내부

 

 

 안국사(빌려왔음)

 

 

※안국사에는 대웅전이 없고 그 대신 극락전이 있는데 궁금해서 검색을 해봤다.

 

극락전과 대웅전의 차이?

 

대웅전(大雄殿)

대웅전은 '석가모니부처님을 봉안한 전각'.

대웅이란 말의 뜻은 범어 마하비라를 한역으로 법화경에 석가모니부처님을 위대한 영웅, 즉 '대웅'이라는 말에서 유래.

위대한 깨달음을 성취한 훌륭한 분이라는 의미로 보면 됩니다.

 

석가모니불상의 수인(손모양)은 항마촉지인(降摩觸地印)으로 깨달음을 얻을 당시 번뇌의 상징인 마구니를 항복시키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협시보살로는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이 모셔져 있다.

석가모니부처님의 왼쪽에 문수보살로 부처님의 지혜(智慧)를 상징하고, 여의주나 칼, 청련화(靑蓮花)를 들거나 청사자를 탄 모습으로 표현하고, 또 보현보살은 오른쪽에서 부처님을 모시며 부처님의 행원을 상징합니다. 흔히 연꽃을 들고 코끼리를 탄 모습으로 나타냅니다.

 

극락보전(極樂寶殿)

극락전 혹은 극락보전은 '서방정토 극락세계의 교주이시며 중생들의 왕생극락을 인도하시는 아미타부처님을 주불로 하는 법당'으로 미타삼부경에서 유래한 것으로 사찰에 따라서는 '무량수전(無量壽殿)', '수광전'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수명장수의 성격을 갖고 있는 무량수불을 모시지만 아미타불의 한 속성이기 때문에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 경우는 정토신앙 계통의 종파나 화엄종 등 사찰의 주불전이 될 때입니다.

 

주불전이 아닌 경우에는 '미타전' 또는 '아미타전(阿彌陀殿)'이라 합니다.

아미타부처님은 법장비구로 수행하던 시절에 48대원을 세워 온갖 괴로움을 없애고 모든 것이 아름답기 그지 없는 서방의 극락정토를 건설하셨다고 합니다.

그때 세웠던 서원에 따라 누구나 일념으로 ‘아미타불’이란 명호만 부르면 극락왕생 시켜준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미타부처님은 석가모니부처님 다음으로 많이 모셔져 있습니다.

 

아미타부처님의 수인은 '설법인'을 취하고 있는데 이를 다른 말로 미타정인(彌陀定印)이라 하며 중생의 근기에 따라 아홉가지 다른 수인인 '구품인'을 취합니다.

아미타부처님의 협시보살로는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 혹은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地藏菩薩)이 모셔집니다.

 

 

 

지그재그 도로를 내려가니 전망대 표기가 있어서 우측으로 전망대로 향한다.

전망대에 도착한 후 전망대에 올라가본다. 다리가 약간 떨린다.

 

올라와보니 조망도가 있는데 역시 약한 비가 내리고 가스가 끼어 조망은 제로다. 이내 내려가 귀경길에 오른다.

가로수가 온통 단풍나무 일색이다. 가을에 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터널을 지나고 머루와인터널 앞에 이르러 머루와인터널을 구경하려고 주차장에 도착해서 터널에 가보니 문이 잠겨져 있다.

매주 월요일은 휴무라고 쓰여 있다.

 

적상산 머루와인터널

 

'와인'이라고 하면 포도주를 생각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요즘 우리나라에서는 와인의 변신이 놀랍다. 포도뿐만 아니라 감, 사과, 복분자, 인삼 등 수많은 과일들이 와인의 재료로 등장한다. 그러나 그 맛에서는 전통의 와인과 차이가 있는 것이 사실. 단, 머루와인만은 예외다. 포도와 가장 비슷하면서도 감미로운 맛과 향이 일품인 머루와인을 찾아 전북 무주로 떠나보자.

 

▲길잡이: 대전-통영 고속국도 무주IC→무주읍 방면 19번국도→무주1교차로에서 우측 727번지방도→북창리에서 우측 산성교 건너 안국사 방면 직진→국립공원 관리사무소 적상분소 지나 500m→머루와인터널.

 

▲문의: 머루와인터널 063-322-4720, 063-322-5931

※매주 월요일은 관람할 수 없다.

 

머루와인을 맛보려면 적상산으로 가야 한다. 이곳에 다양한 종류의 머루와인을 보관하는 터널이 있다. 적상산은 덕유산과 함께 널리 알려진 무주의 명산이다. 해발고도 1034m의 제법 높은 산으로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는 사고와 고려시대에 세워진 안국사 등의 사찰을 품고 있다.

 

터널은 국립공원 관리사무소 적상분소 너머에 있다. 안국사로 오르는 길이다. 자동차가 적상산 거의 정상부에 자리한 안국사까지 갈 수 있도록 길이 닦여 있다. 하지만 겨울철에는 거의 통제가 된다. 적상산 기후는 덕유산과 같다고 보면 되는데, 눈이 많은 편이고 이 때문에 길은 자연스레 눈에 파묻혀 버린다. 안국사로 오르는 길이 워낙 가파른 탓에 차량 운행이 도저히 불가능하다. 겨울철 이외의 계절에는 대형버스도 진입이 가능하다.

 

머루와인터널 앞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조금 가면 왼쪽에 터널이 보인다. 입구에 '머루와인 비밀의 문'이라고 적혀 있다. 이 터널은 무주양수발전소 건설을 위하여 작업용 터널로 사용하던 곳이다. 적상산에는 880m 지점에 호수와 양수발전소가 있다. 터널은 이 호수를 만들기 위해 뚫은 것이다. 사면이 능선으로 둘러싸인 곳에 댐을 짓고 산밑으로 흐르는 상곡천의 물을 끌어올려 채워 넣었다. 호수에는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는데, 이곳에서 보는 풍경이 장관이다. 적상산의 너른 품 뒤로 멀리 덕유산 향적봉이 잡힌다.

 

터널로 들어서자 바깥에 비해 따뜻한 느낌이다.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다. 섭씨 13~17도의 온도를 항상 유지하기 때문에 와인의 맛이 변함이 없다. 터널은 길이 579m, 폭 4.5m, 높이 4.7m다. 터널 전부를 개방하고 있지는 않다. 사람의 출입이 잦아질 경우 온도의 변화 등 변수가 생길 위험이 있으므로 약 150m 깊이까지만 출입을 허락하고 있다.

 

이곳에는 칠연양조, 샤또무주, 산립조합, 덕유양조 등 4개 와이너리에서 제조한 약 2만 병의 머루와인이 저장되어 있다. 무주는 국내 최대의 머루 재배단지로 연간 600여 톤을 생산하는 곳이다. 대부분 해발 500~900m 고원에서 재배하는데, 이로 인해 항산화물질인 폴리페놀성분이 다른 곳에 비해 높다.

 

무주에서는 머루농가 110여 가구와 4개의 와인업체가 손잡고 무주산머루클러스터사업단을 운영하고 있다. 각 와이너리는 붉은진주, 샤또무주, 루시올뱅, 구천동머루와인을 생산하고 있다. 제품마다 단맛, 신맛, 쓴맛, 떫은맛의 정도가 다르다. 터널 끝에 시음장이 있는데 종류별로 시음해 볼 수 있다. 입맛에 맞는 와인은 그 자리에서 구매 가능하다. 시음장 앞에는 카페처럼 테이블이 여럿 놓여 있다. 터널 천정에 은은하게 조명을 달아 놓아 분위기가 있다.

 

애주가들은 그 새를 참지 못하고 구입한 와인을 이곳에서 마시기도 하는데, 남은 것들은 다음을 기약하며 보관하기도 한다. 터널 내에서 구입한 와인 중에서 1/3이상 남은 것들에 한해서 최대 1년6월까지 허용된다. 이보다 적게 남은 것은 변질의 우려가 있다. 보관료는 무료다.

이제 진짜 집으로 향한다.

 

다행히 귀가 길은 차량정체가 없어 일찍 귀가했다.

이로써 100대 명산도 대암산과 무학산, 두 개 만을 남기게 되었다.

 

 

무주 적상산에 대하여

높이는 1,034m이다. 덕유산국립공원 지역에 속하며, 4면이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붉은색 바위지대가 마치 산이 붉은 치마를 입은 것 같다고 하여 적상(赤裳)이라는 이름이 유래하였고, 한국 100경 중 하나로 꼽힌다. 중생대 백악기 신라층군(新羅層群)에 속하는 자색의 퇴적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정상은 해발고도 850~1,000m의 평정봉(平頂峰)으로 주봉(主峰)인 기봉과 향로봉(1,025m)이 마주보고 있고, 정상 일대가 흙으로 덮인 토산(土山)이라서 나무숲이 매우 울창하다.

 

산정이 평탄한 반면 지면에서 산허리까지는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산세가 험준하며 물이 풍부하므로 방어상 유리한 조건을 갖춘 천혜의 자연요새이다. 그 까닭에 적상산성(사적 146)이 축성되었는데, 고려 말 최영 장군이 축조를 건의하였다고 전해진다.

 

산중에는 안국사(安國寺)와 조선시대에 승병을 양성하던 호국사(護國寺) 등의 사찰이 있고, 장도바위·장군바위·처마바위·천일폭포·송대폭포·안렴대 등의 자연명소가 있으며, 장도바위는 최영 장군이 적상산을 오르다가 길이 막히자 장도(長刀)로 내리쳐 길을 내고 올라갔다는 전설이 있다. 정상 분지의 해발 800m 지대에는 산정호수(적상호)가 있는데, 양수발전소에 필요한 물을 담아두기 위해 만든 인공호수이다.

 

 

적상산(赤裳山·해발 1029m)은 사방이 험준한 절벽으로 둘러싸인 천혜의 자연요새로 유명하다. 백두대간 정수리에서 약간 비켜난 적상산은 전북 무주군 적상면의 중앙에 긴 타원형으로 자리 잡고 있다. 형세가 요새로서 최적의 요건을 갖춰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한 사고(史庫)가 있었다. 전란이 발생할 때마다 인근 백성을 보호했던 곳으로 ‘무주의 정신’과 같은 산이다. 가을에는 절벽 주변에 붉게 타오르는 단풍이 마치 여인네 치마 같다 하여 붉을 적(赤), 치마 상(裳)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경관이 빼어나 한국 100경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충절의 얼이 서린 산

 

조선은 건국 후 서울 춘추관을 비롯해 충주, 성주, 전주 4대 사고에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국가 중요 서적을 보관했다. 그러나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한 뒤 전주사고에 보관하던 실록만 유일하게 보존되고 나머지 사고의 실록들은 모두 소실됐다.

 

사고가 평지에 설치돼 수호에 어려움을 겪었던 조선은 이후 오대산(강원 평창), 태백산(경북 봉화), 마니산(강화도), 묘향산(평북 영변) 등 깊은 산속에 외사고를 설치하고 춘추관에 내사고를 두었다. 이후 마니산 사고를 정족산 사고(강화도)로, 묘향산 사고를 적상산 사고(무주)로 옮겨 조선 후기 5대 사고 체제를 확립했다.

무주는 1614년 사고가 설치됨에 따라 무주현에서 무주도호부로 승격된다. 현재 무주군의 면적은 서울보다 좀 더 클 정도로 넓다. 적상산 사고 때문이다.

이 때문에 무주군민들은 충절의 고장이라는 커다란 자긍심을 가지고 있다. 적상산에 대한 사랑이 남다른 것도 이곳에 ‘무주의 정신’이 서려 있다고 믿고 있어서다.

 

1980년대 후반 한국전력이 적상산에 양수발전소를 설치하려 하자 모든 군민이 극렬하게 반대한 것도 이 같은 충절의 정신이 훼손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양수발전소 건설로 인해 적상산 사고와 이를 지키던 승병들이 머물렀던 안국사는 당초 있던 곳에서 위쪽으로 옮겨지는 아픔을 겪었다. 당시 환경운동가로서 양수발전소 건설 반대에 앞장섰던 김세웅(56)씨는 이후 군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로 민선 무주군수에 세 차례나 당선됐다.

 

무주군은 2005년 태권도공원을 유치할 때에도 충절과 호국의 정신이 깃든 곳에 국기인 태권도전당을 건립해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워 경쟁 대상이었던 타 시·도를 제치는 데 성공했다.

 

무주 양수발전소는 건설 당시 반대여론과는 달리 새로운 볼거리를 제공하는 명소가 됐다. 발전시설 위에 조성된 전망대에 서면 무주군 일대를 조망할 수 있다. 해발 800m에 위치한 인공호수인 적상호 경관도 장관이다. 양수발전소는 전기를 적게 쓰는 심야에 하부 저수지의 물을 퍼 올려서 전기소비가 많은 시간에 발전하는 시설이다. 저수량은 348만t으로 약 7시간 동안 발전할 수 있다. 이때 생산되는 전기는 전북 전 지역이 3시간 정도 사용 가능한 양이다. 양수발전소 용량은 30만㎾, 저수지 간 낙차는 389m이다.

 

●8143m 길이 적상산성 지금은 터만 남아…

 

적상산은 중생대 백악기 신라층군(新羅層群)에 속하는 자색의 퇴적암으로 이뤄졌다. 정상은 해발고도 850~1000m의 평정봉(平頂峰)으로 주봉인 기봉과 향로봉이 마주 보고 있다. 그러나 무주군 전 지역이 고원지대이기 때문에 실제 높이보다 낮게 느껴진다. 정상 일대가 흙으로 덮인 토산(土山)으로 단풍나무, 소나무가 어우러진 숲이 울창하다.

 

산꼭대기는 평탄한 반면 지면에서 산허리까지는 높이 400여m의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산세가 험준해 외부에서 접근하기가 매우 힘들다. 무주 남대천의 첫 물줄기가 시작될 만큼 물이 풍부하고 방어상 유리한 조건을 갖춘 천혜의 자연요새다.

 

이 같은 산세의 유리함 때문에 1374년(공민왕 23년) 최영의 요청으로 적상산성(사적 146호)이 축성됐다. 적상산성은 산의 지형을 이용해 만든 성이다. 전체 길이 8143m에 이르고 본래 동·서·남·북 4개 문이 있었으나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거란병과 왜구의 침략 때 인근 여러 군의 백성이 이곳에서 저항했다. 고려시대 거란족이 침입했을 때 인근 수십 군현의 백성들이 도륙됐으나 이곳 사람들은 안전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산중에는 안국사(安國寺)와 조선시대에 승병을 양성하던 호국사(護國寺) 등의 사찰이 있다. 장도바위, 장군바위, 치마바위, 천일폭포, 송대폭보, 안렴대 등 자연명소가 많다. 장도바위는 최영장군이 적상산을 오르다가 길이 막히자 장도로 내리쳐 길을 내고 올라갔다는 전설이 있다.

정상 남쪽 층암절벽 위에 있는 안렴대에 서면 사방이 천길 낭떠러지로 내려다보인다. 안렴대는 거란침입 때 삼도 안렴사가 군사들을 이끌고 이곳으로 들어와 진을 치고 난을 피한 곳이라 하여 붙여졌다.

 

적상산을 오르는 길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진다. 등산을 즐기는 산악인들은 안시내에서 출발해 학송대~안렴대~송신중계탑을 거쳐 정상에 오르거나 서창마을에서 장도바위를 거쳐 정상으로 이어지는 길을 선택한다. 2시간가량 걸린다.

 

그러나 일반인들은 차편으로 포장도로가 개설된 산정호수까지 도착해 안국사~송신중계탑~정상에 이르는 길을 좋아한다. 등산이라기보다 30분 정도 송림과 단풍나무 숲을 즐기는 산책이라는 표현이 적당하다. 차량을 이용해 굽이굽이 산을 돌아 오르는 길은 환상의 드라이브 코스다. 고찰인 안국사도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다. 고려 충렬왕 3년(1277년) 월인화상이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적상산 양수발전소가 건설되면서 호국사지 위치로 옮겨져 복원됐다. 세계 각국의 불상 등을 수집 보관하는 성보박물관은 독보적이다. 중요문화재 제1267호인 영산회상괘불과 유형문화재 제42호인 극락전, 제85호 호국사비 등이 있다.

 

■ 적상산 사고

 

적상산 사고는 전북 무주군 적상면 북창리 적상산성에 있는 조선 후기 5대 사고 가운데 하나다. 1910년 일제가 폐쇄하기 전까지 300여년간 국가의 귀중한 국사를 보존했던 곳이다. 후금의 위협으로 북방에 있는 묘향산 사고가 망실될 우려가 커지자 적당한 장소로 실록을 옮겨 보관하기 위해 건립됐다.

 

1610년(광해군 2년) 순안어사 최현과 무주현감 이유경의 요청에 의해 조정에서 사관을 적상산에 보내 땅 모양을 살피게 하고 산성을 수리했다. 1614년 실록전을 건립하고 4년 뒤 1618년 9월부터 실록이 봉안되기 시작했다. 1633년(인조 11년)까지 묘향산 사고의 실록을 모두 이곳으로 옮겼다. 1614년에는 선원각을 건립하고 왕실의 족보인 선원록을 보관함으로써 완전한 사고의 역할을 하게 됐다.

 

병자호란 때 5개 사고 중 마니산 사고의 실록이 상실돼 이를 다시 보완하는 작업이 1666년(현종 7년)에 시작됐다. 이때 적상산 사고본을 근거로 등사, 교정작업을 했는데 3도 유생 300명이 동원됐다.

 

적상산 사고 설치를 계기로 수호와 산성수비를 강화하기 위해 승병을 모집하고 수호사찰을 건립하는 등 여러 방안이 마련됐다. 승려 덕웅이 승병 92명을 모집해 산성을 수축하고 사각을 수호했다. 정묘호란 때는 사고를 지킬 사람이 없어 승려 상훈이 서책을 성 밖 석굴로 옮겨 보관하다가 전쟁이 끝난 뒤 사고에 다시 봉안한 것으로 전해진다. 사고 수호가 이같이 어려워지자 1643년 산성 안에 호국사를 창건해 수호사찰로 했다. 한말인 1872년(고종 9년) 실록전과 선원각을 개수했다. 1902년에는 대대적인 개수작업을 벌였다.

 

그러나 일제가 1910년 조선조의 주권을 강탈 후 조선왕조실록 등의 기록물을 서울 규장각으로 옮기면서 적상산 사고는 1911년 폐쇄된다. 이후 적상산 사고본은 한국전쟁이 일어난 1950년 북한으로 반출됐다.

 

현재 적상산 사고는 10여년 전 복원됐다. 당초 사고지는 1992년 양수발전소 상부댐인 적상호 축조로 물에 잠겼다. 현재 위치로 옮겨져 선원각과 실록각 두 건물이 복원됐다.

 

 

한국 100경중 하나로 손꼽히는 적상산은 사면이 절벽으로 둘러싸여 가을 단풍이 붉게 물들면 여인네의 치마와 같다 하여 적상이라는 이름이 붙어졌다. 해발 1,034m의 기봉이 향로봉(1,029m)을 거느리고 천일폭포, 송대폭포, 장도바위, 장군바위, 안렴대 등의 자연명소를 간직한 채 정상 분지의 양수 발전소 상부댐인 산정호수(적상호)와 고색창연한 적산상선, 안국사등 유서 깊은 문화 유적이 운치를 더해 주고 있다. 가을뿐만 아니라 철따라 독특한 개성미를 가득 뿌린다.

적상산에는 장도바위, 장군바위 등 자연 명소와 함께 최영 장군이 건의하여 축조했다는 적상산성(사적 제 146호)이 있다.

 

적상산은 조선왕조실록을 봉안했던 조선 5대 사고지 중 하나였던 만큼, 덕유산 국립공원 전체를 통틀어 소중한 문화유산을 가장 많이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양수발전을 위해 상부댐과 하부댐을 조성하였는데 전력홍보관을 지나 북창마을 통하여 꼬부랑 2차선도로를 승용차로 오르다보면 산 정상부근에서 커다란 호수를 만날 수 있다.

발전소는 1995년 조성되었으며 상부댐에 물이 가득할 때면 색다른 운치를 전해준다.

 

◆ 무주양수발전소 상부댐(산정호수)

 

지난 95년 4월 적상산 기슭 해발 850m에 건설한 댐이다. 발전용량이 60만KWH나 되며 표고 850m인 안국사 터에 상부댐을 건설했으며, 표고 250m인 포내리에 하부댐을 만들어 낙차가 589m에 이른다.

 

하부댐인 괴목천에 물을 저수한 후 전기 수요가 적은 야간에 상부댐으로 물을 끌어올린다.

저수지의 유효 저수량인 약 280만톤을 양수하면 6시간동안 발전할 수 있다고 한다.

※ 양수발전 : 발전소의 아래와 위에 저수지를 만들고 발전과 양수를 반복하는 수력발전이다.

 

여름처럼 물이 많을 때나 야간에 풍부하게 남는 전력으로 펌프를 가동하여 아래쪽 저수지의 물을 위쪽 저수지로 퍼 올린다. 그리고 물이 부족해지는 시기나 주간처럼 전력이 많이 필요할 때 방수하여 발전한다.

일반적인 수력발전소의 연간 발전전력량은 연간 강수량과 자연유량(自然流量)에 제한을 받는다. 하지만 양수방식을 사용하면 더 많은 전력을 생산할 수 있다. 양수발전을 위해서는 발전소보다 충분히 높은 위치에 많은 양의 물을 저장할 수 있는 자연호수 또는 인공호수가 있어야 한다.

자연유량으로 대규모의 발전을 할 수 있는 지점은 이미 대부분 개발되었고, 전력의 수요는 날로 증가되고 있다. 따라서 자연유량에 의존하는 방식을 벗어나 양수에 의한 발전이 필요하다.

 

그리고 대형 화력발전소, 원자력발전소에서는 항상 일정한 전력을 생산하는 것이 유리하다.

따라서 야간에는 전력이 남고 주간에는 부족해지는데, 야간의 값싼 잉여전력을 이용하여 양수를 하였다가 주간에 발전하는 것은 매우 합리적이고 유리하다.

양수발전소의 건설은 세계적인 추세이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청평양수발전소(40만㎾), 삼랑진양수발전소(60만㎾), 무주양수발전소(60만㎾), 산청양수발전소(70만㎾), 양양양수발전소(100만㎾), 청송양수발전소(60만㎾)가 있다.

 

◆ 안국사 [安國寺]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 금산사의 말사이다. 《적상지(赤裳誌)》에 따르면 1277년(고려 충렬왕 3) 월인(月印)이 세웠다고 하나 조선 태조(재위:1392∼1398) 때 자초(自超)가 적산산성(사적 146호)을 쌓으며 지었다고도 전한다. 1592년(조선 선조 25) 임진왜란과 1597년 정유재란 때 승병들의 거처로 쓰이기도 했다.

1613년(광해군 5) 증축하고 이듬해 사고(史庫)를 두어 사각(史閣)과 선원각(璿源閣)에 《조선왕조실록》과 《선원록》을 보관하고 덕웅(德雄)을 승장으로 하여 승병 92명을 두고 지키게 하였다.

 

이 때 사찰 이름을 안국사라고 바꿨으며, 1910년에 사고의 책을 규장각으로 옮기자 이철허(李徹虛)가 사고 건물을 경내로 이전하였다. 1968년 유정환(柳正煥)이 이 건물에 천불을 모시고 천불보전이라고 이름을 바꿨고, 1990년 초에 댐 건설로 절 지역이 수몰지구에 포함되자 1991년부터 이전을 시작하여 1993년에 절을 완전히 옮겼다.

 

건물로는 극락전과 천불보전·청하루·지장전·삼성각·범종각 등이 있다. 이 중 극락전은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2호로 지정된 전각으로, 내부에는 본래 1772년(영조 48) 제작된 후불탱화가 있었으나 최근 도난당하였으며 현재의 탱화는 최근에 만든 것들이다. 삼성각 안에는 1899년에 만든 칠성탱화가 있는데, 화기에 따르면 본래 김천 봉곡사(鳳谷寺) 극락암에 있었다.

 

그밖에 유물로는 범종과 괘불·괘불대·부도가 전한다. 범종은 1788년(정조 12)에 제작된 것으로 요사 옆에 걸려 있고, 1997년 8월 보물 제1267호로 지정된 안국사괘불은 1728년(영조 4)에 의겸(義謙)·의윤(義允) 등 비구니 5명이 그린 것이다. 가로 1,075cm, 세로 750cm이며 가뭄 때 이 괘불로 기우제를 지내면 반드시 비가 내린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사찰 입구에 있는 4기의 부도는 모두 석종형 부도로 조선 후기 유물이다.

 

◆ 안렴대(按廉臺)

 

정상 남쪽 1km 정도 떨어진 층암 절벽위에 위치한 안렴대는 사방이 천길 낭떠러지기로 이곳을 오르는 사람들의 마음을 아슬아슬하게 한다.

고려때 거란의 침입이 있었을 때 삼도 안렴사가 군사들을 이끌고 이곳으로 들어와 진을 치고 난을 피한 곳이기도 하며 병자호란 때 적상산 사고실록을 안렴대 바위 밑에 있는 석실로 옮겨 난을 피한 유서 깊은 사적지로도 유명한 곳이다.

안렴대라는 이름도 이러한 역사를 바탕으로 붙여진 것이다.

 

※ 안렴사 : 고려말까지 있던던 지방관리로 처음에는 안찰사(按察使)라 하다가 안렴사로 되었으며 다시 제찰사(提察使)로 바뀌었다가 다시 안렴사로 환원되는 과정을 밟았지만 제도로서는 고려말까지 계속되었다.

 

이들은 각 도의 주현을 순안(巡按)하면서 ①수령의 현부(賢否)를 살펴 출척 (黜陟)하는 일, ②민생의 질고(疾苦)를 묻는 일, ③형옥의 심치(審治), ④조부(租賦)의 수납, ⑤군사적 기능 등을 맡아보았던 것이 확인된다.

 

이들은 각 주현(州縣)의 수령을 통할하여 중앙정부와 연결하는 중간기구의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상급 행정관이면서도 그 관품이 보통 5품내지 6품으로 낮았고, 전임관이 아니라 행정기구를 갖추지 못했으며, 또한 임기가 6개월로 매우 짧았다가 후에 1년으로 연장되었다.

 

◆ 적상산성 및 서문

 

적상산성은 절벽으로 이루어진 산 위의 분지를 에워싼 대표적인 방어산성이다.

고려 후기 거란이 침입한 후 최영은 이곳에 산성을 쌓게 하고 창고 짓기를 건의했으며, 조선 세종 때의 체찰사 최윤덕도 반드시 보존할 곳이라고 건의한 바 있다.고려 때 거란과 왜구의 침입에 이미 산성을 이용하여 인근 여러 고을의 백성이 피난한 사실에서 이 산성은 고려 후기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조선 광해군 2년(1610) 이곳에 조선시대 5개의 역사책보관소 중의 하나인 적상산사고를 설치하고 『조선왕조실록』과 『왕실족보』를 보관하였다.

 

실록전, 사각(史閣), 선원각, 군기고, 대별관, 호국사를 세웠고 임진왜란 이후 진(鎭)을 두어 산성을 수축하고 운영했다.

현재 성벽은 무너져 숲 사이에서 겨우 그 모습을 찾을 수 있고, 사각과 기타의 건물들도 그 터만이 남아 있다. 최근에 성 안에 저수지를 만들어 놓았다

이 산성에는 규장각에 소장된 "적상산성 조진성책"의 기록에 의하면 동서남북 4곳에 문이 있었으며 특히 북문과 서문에는 2층3간의 문루까지 솟아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겨우 북문터와 서문터만이 희미한 그림자로 남아있을 뿐이다.

 

서문은 사적지 146호로 일명 용담문이라고 하였으며 성문밖에는 서창과 고경사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서창은 미창과 군기창이 있었으나 지형이 험하여 성내까지 운반이 어려워 조정에 상소하여 성내 사고지 옆으로 옮겼다고 전하며, 지금도 마을 이름을 서창이라고 한다.

 

◆ 장도(長刀)바위

 

장도바위는 고려말에 최영장군이 민란을 평정하고 개선하던 중 이곳에 이르러 산의 아름다움에 이끌려 산 정상으로 오르다가 정상이 얼마 남지 않은 곳에 절벽같은 바위에 길을 막고 있어 앞으로 갈 수 없게 되자 허리에 차고 있던 장도(長刀)로 바위를 힘껏 내리치니 순간 바위가 양쪽으로 갈라지면서 길이 열렸다고 하여 장도바위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장도바위 위에는 암반 위에 떨어짐 방지용 밧줄을 설치해 놓았으며 난간을 지나면 곧바로 적상산성사문지의 서문에 도착한다.

 

◆ 서창(西倉), 서창마을

 

서창(西倉)은 적상산성 서문밖에 병기(兵器)를 보관하던 창고가 있었는데 적상산성을 기준으로 서쪽에 있어 이를 서창이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이 창고가 있던 마을을 서창마을이라고 하는데 예전에는 거리도 가깝고 경사가 완만해 적성산을 오르는 주요통로였으며 지금은 등산객이 주로 찾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