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줄기(기타·섬)/섬 지맥

[스크랩] 강화지맥 5(끝) (로얄호텔→길상산→택이) 후기(2009.01.11)

약초2 2009. 2. 16. 10:10

 

887번째 산행이야기

강화지맥 5번째 마지막이야기

로얄호텔→길상산→택이


1.산행날짜: 2009년 1월 11일(일요일)

2.산행날씨: 무척 추운날씨이나 매우 맑고 깨끗함.

3.참가인원: 2명 (여행님)


4.산행코스: 로얄호텔→길상산→택이


5.산행시간

-10:30 로얄호텔 발

-10:54 헬기장(152m봉) 착 /   -10:59 발

-11:10 삼거리 안부

-11:19 헬기장 착 /   -11:22 발

-11:26 원니스수양관 삼거리(←온수리 1.4km, 정상 0.7km→)

-11:33 헬기장(나무에 가려 조망 별로)

-11:41 길상산 착 /   -11:55 발

-12:03 사거리 안부

-12:05 능선분기점(직진) 착 /   -12:08 발

-12:12 사거리 안부

-12:15 무덤(이곳까지 길이 넓음)

-12:23 안부(좌측으로 진행)

-12:29 빽 지점

-12:32 안부 원위치(우측으로 진행)

-12:47 택이 착(산행종료: 2시간 17분 산행함)

-이후 온수리택시(032-937-6682) 호출하여 로얄호텔로 이동하여 차량회수 한 후

-동검도, 황산도, 초지진, 덕진진, 광성보를 구경하고 귀가


◆로얄호텔-(0:38)-원니스수양관갈림길-(0:15)-길상산-(0:10)-능선분기점-(0:15)-안부분기점-(0:15)-택이

※휴식없이 진행하면 1시간 33분, 실제로는 2시간 17분 걸렸음.

 

 

 


 산행코스

 

6.산행후기

날씨가 무척 추워 꾀가 나기 시작한다.

결국 짧은 1구간이 남은 강화지맥을 하기로 하고 집에서 아침을 먹고 여유있게 승용차를 몰고 산행에 나선다.


초지대교를 거쳐 산행들머리인 로얄호텔에 10시 25분에 도착한다.

산행준비를 마치고 10시 30분에 출발한다.

 

우측의 밭을 통과하여 로얄호텔의 끝 부분에 올라선 후 조금 올라가니 무엇을 조성하려는 지는 몰라도 절개된 지역을 조심스럽게 올라서니 이번에는 벌목된 나무들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어서 힘겹게 벌목한 나무를 헤치며 올라간다.

벌목한 지역의 중앙으로 올라가기가 어려워 좌측의 철조망을 끼고 조금은 수월하게 올라가니 이내 벌목지역에서 벗어난다. 그러나 철조망이 사방을 막고 있어 난감해진다. 잠시 우측으로도 올라가 보았지만 역시 철조망으로 막혀있다. 제법 높게 형성된 철조망 위로는 가시철조망이 쳐져있어 철조망을 넘어간다는 것도 보통문제가 아니다. 그나마 다행스럽게 중간지역에 철조망이 조금 뚫려있는 개구멍이 보여 그곳으로 엎드리면서 겨우 통과한다. 시간이 꽤 지체됐다.


이제 편안하게 진행하니 뚜렷한 등산로가 나타난다. 조금 더 진행을 하니 좌측방향의 로얄호텔에서 올라오는 길에 로얄호텔 이정표가 보인다.

계속해서 편안한 등산로 따라 우측으로 얼마간 진행을 하니 이정표(↓온수리 0.6km, →정상 1.5km)가 나온다. 진행방향은 정상방향의 좌측인데 우측으로 봉우리 하나가 솟아 있어 우측으로 몇 발자국 올라가니 헬기장이 조성되어 있는 공터(152m봉)에 닿는다(로얄호텔에서 24분 걸렸다).


 

 

 헬기장(152m봉) 직전의 이정표

 

 

 헬기장(152m봉)에서 바라본 초지대교

 

152m봉(헬기장)에 도착하니 조망이 무척 좋다. 바로 아래로 넓은 강화의 곡창지대(논 지대)가 보이고  그 사이로 수로가 보인다. 그 뒤로 마니산보다도 더 뾰족한 초피산이 잘 보이고 그 뒤로 두 개의 봉우리로 형성되어 있는 마니산이 아주 가깝게 보인다.

날씨가 무척 추운관계로 멋진 조망을 제공한다. 5분을 구경하고는 이내 내려오면 다시 이정표를 만나고 계속 정상방향으로 내려간다.


헬기장에서 11분을 내려가면 우측으로 하산길이 보이는 삼거리 안부가 나온다. 이제 안부를 거쳐 올라가기 시작한다. 얼마간 올라가니 최근에 설치한 듯한 잘 정비된 등산로를 따라 올라간다. 올라가면 이내 능선길은 편안해진다.


조금 더 진행하니 헬기장이 나오는데 이곳에서도 역시 초피산과 마니산이 잘 보이고 지나온 정족산이 잘 보인다. 멀리 초지대교도 보이기 시작한다.

 

 

헬기장에서 바라본 정족산의 모습

 

 

 헬기장에서 바라본 초피산과 마니산의 모습

 

계속해서 편안한 능선길을 따라 4분을 진행하니 우측으로 원니스수양관으로 하산할 수 있는 삼거리가 나오는데 이곳에도 새롭게 이정표(←온수리 1.4km, 정상 0.7km→)가 세워져 있다.


7분을 더 진행하니 또 헬기장이 나오는데 이번에는 나무에 가려 조망이 별로이다. 8분을 더 진행하니 길상산 정상목이 반기는 길상산 정상에 닿는다(11:41. 산행시작한지 1시간 11분 지난 시간이다).

 

 

 길상산 정상

 

 

 길상산 정상의 삼각점과 삼각점 안내문

 

 

 길상산 정상 모습

 

 

 길상산 정상모습

 

새롭게 정비한 길상산(374m) 정상은 예쁜 정상목군 삼각점(0908-H, 336FOB)과 이등삼각점(1981재설)이 설치되어 있고, 삼각점 안내문(동경 126°29′32″ 북위 37°36′27″ 높이 약374m. 2002.10 국립지리원장 031-210-2651~2)과 이정표(←온수리 2.1km, ↑장흥리 2.8km)가 설치되어 있다. 또한 조망데크도 설치되어 있는 것처럼 이곳에서의 조망도 무척 좋다. 벤치도 3개씩이나 설치되어 있다.


잠시 쉬고 있는데 장흥리 쪽에서 한 팀이 올라오고 있다. 오늘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다.


 

 

 정상에서 200m 내려온 분기점에서 바라본 초지대교의 모습

 

11:55분에 출발한다.

길상산 정상은 능선분기점으로 삼거리를 형성하고 있는데 직진하면 가천의대 쪽으로 가는 길이다. 강화지맥길을 가야하기에 장흥리 방향(택이 방향)의 좌측으로 내려간다.


정상에서 200m 내려가니 이정표(↓정상 0.2km, →장흥리 2.6km)가 나오고 커다란 바위가 있는 분기점에 닿는다. 이곳에서의 조망도 좋은데 초지대교가 무척 가깝게 보인다.


방향을 틀어 장흥리 방향인 우측으로 급하게 내려간다.

12:03분에 사거리안부를 넘어서고 2분을 진행하니 능선분기점 봉우리인데 직진하여 진행을 한다.


4분을 내려가니 넓은 길의 사거리안부에 닿는데 이제부터는 한동안 넓은 길따라 편안하게 완만한 능선길을 룰루랄라 진행한다. 3분을 진행하니 무덤이 나오는데 넓은 길(자동차도 다닐 정도임)은 이곳까지이다.

이제 다소 좁아진 등산로이지만 등산로는 무척 뚜렷하다.

다시 넓은 길의 아주 편안한 산책길 같은 길을 매우 완만하게 내려간다. 조금 내려가니 안부인데 이곳에 우정산악회의 표지기가 좌측방향으로 유도하면서 계속 표지기가 붙어있다.

별 생각없이 표지기 지시대로 좌측의 사면길로 진행한다. 6분을 진행하니 우측으로 마을이 보여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잠시 지형도를 살펴보니 이 길로 가면 택이로 가는 길이 아님을 확인하고는 빽하여 다시 안부에 원 위치한다.


12:32분에 원 위치한 안부에서 우측으로 내려간다.

조금 내려가니 다시 삼거리가 나오는데 우측길이 뚜렷하고 좌측 길은 뚜렷하지는 않지만 전형적인 솔숲능선이라 솔숲능선인 직진(좌측)길로 진행한다.

15분을 진행하니 2차로 도로에 도착하여 강화지맥을 마쳤는데 이 길도 택이로 가는 길이 아니었다. 마지막 분기점에서 뚜렷한 우측 길로 갔어야 하지 않았나 싶다(미확인).


어쨌든 5번에 걸친 강화지맥을 무사히 즐겁게 마쳤다.

이제 강화도의 산 중에 진강산, 국수산 만 답사하면 한 번씩은 다 답사한 셈이다.


산행을 마치고 동검도 쪽으로 조금 내려가니 삼거리가 나온다.

이곳에서 몇 번의 히치하이크를 시도하니 번번이 실패한다. 산행할 때는 몰랐는데 날씨도 무척 추워 도저히 더는 기다릴 수가 없어 온수리택시를 호출하니 이내 도착하여 요금 8천원을 주고 로얄호텔에 되돌아와 차량을 회수하여 동검도를 구경하기 위해 해안도로 쪽으로 드라이브를 한다.


해안가로 진행하다 선두리 어시장을 구경하고는 동검도 가기 전에 현수막에 「회+매운탕+돌솥밥 \11,000」라고 쓰여 있어 점심도 아직 못 먹었기에 그곳으로 가서 약간 늦은 점심을 맛있게 먹고는 동검도에 들어갔다.

동검도는 사실 구경할 것이 없다. 그래도 궁금해서 들어가 봤다. 외통수 길이라 왔던 길 그대로 되짚어 와야 하는데 산 정상부 쪽으로 포장도로가 되어 있어서 그쪽으로도 가보니 군부대 정문이 나온다. 군부대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되짚어 나와 동검도를 빠져나와 다시 해안도로따라 조금 진행하니 이번엔 황산도가 나온다. 이번에도 황산도로 들어간다. 역시 별 볼일이 없다. 이곳에도 어시장 비슷하게 형성되어있다.


황산도를 빠져나와 초지대교 삼거리를 지나 초지진에 도착한다.

매표(700원)하고는 날씨가 무척 추워 오래 구경할 수가 없을뿐더러 아주 단순한 곳이라 초지진 구경하는데 몇 분 걸리지 않았다. 입장료가 아까운 생각이 든다.

 

 

 초지진

 

초지진(사적 제225호)

길상면 초지리 624 일원

외세의 침략에 치열한 격전을 벌인 적진지

이곳은 해상으로부터 침입하는 외적을 막기 우하여 조선 효종 7년(1656)에 구축한 요새다. 고종 3년(1866) 9월 천주교 탄압을 구실로 침입한 프랑스(로즈) 극동함대 및 고종 8년(1871) 4월에 통상을 강요하며 내침한 미국(로저스) 아세아 함대, 고종 12년(1875) 8월 침공한 일본 군함 운양호와 치열한 격전을 벌인 격전지이다. 일본군함 운양호의 침공은 고종 13년(1876)에 강압에 의해 강화도조약(병자수호조약)을 맺어 인천, 원산, 부산항을 개항하게 되고 또한 우리나라의 주권을 상실하는 계기가 되었다.


 

 초지진의 포탄흔적이 있는 소나무

 

초지진을 구경하고는 이번엔 덕진진을 향해 출발한다.

따뜻한 차 안에서 몸 좀 녹힐가 싶었더니 이내 덕진진이다.

이곳에서도 700원의 입장료를 내고는 구경하는데 이곳 덕진진은 그래도 구경할 만하다.

 

 

 덕진진의 성문인 공조루의 모습

 

덕진진(사적 제226호)

불은면 덕성리 846 일원

해협의 관문을 지키는 강화도 제1의 포대 덕진진

덕진진은 강화도 12진 ․ 보의 하나이며, 조선시대 강화해협을 지키는 요충지였다.

덕진돈대, 남장포대 등이 모두 덕진진에 소속되어 있었다.

덕진진은 효종7년(1656년)에 설치되었으며 후에 돈대(1679)와 포대(1811년)가 각각 설치되었다. 병인양요(1866) 때는 양헌수 장군의 부대가 밤을 틈타 이 진을 통하여 정족산성에 들어가 프랑스 군대를 격파했다.

덕진진의 성문인 공조루는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만 남아있던 것을 1977년에 복원했다.

 

 

 덕진진의 남장포대

 

 

 덕진진 경고비

 

 

덕진진의 성문인 공조루와 덕진돈대, 남장포대 등을 구경하고는 이내 주차장으로 들어와 마지막 행선지인 광성보로 향한다.

역시 따뜻한 차 안에서 몸이 녹기도 전에 광성보에 도착한다.

이곳은 입장료가 1,100원이다. 아직 공사 중이라고 현수막이 걸려있어 조금은 찝찝했지만 그래도 발걸음을 했으니 구경하러 들어간다.

 

 

 광성보

 

광성보(사적 제227호)

불은면 덕성리 833 일원

강화해협을 지키는 천연의 요새

20여 만 평의 자연공원으로 이루어진 광성보는 고려시대의 성을 1618년(조선 광해군 10년)에 외성을 보수하고 광성보를 설치했다. 이곳은 신미양요의 가장 격렬했던 격전지로서 1871년 4월 미국의 로저스가 통상을 표방하면서 아세아 함대를 이끌고 1230명의 병력으로 침략하였을 때 상륙부대가 초지진, 덕진진을 점령한 후 광성보에 이르러 백병전을 전개하였다. 당시 지휘관인 어재연장군이하 전용사가 용감하게 싸워 장렬히 순국한 곳이다.

광성보 내에는 경치가 수려한 용두돈대가 있는데 돈대의 불쑥 솟아나온 모양이 용머리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광성보

 

 

 손돌목 안내문

 

 

 그림같이 아름다운 용두돈대

 

 용두돈대 내부 모습

 

광성보의 용두돈대가 그 중 볼만했다. 역시 그림처럼 아름다운 곳이기도 하다. 여름철이면 쉬고 가기 좋겠다 하는 생각도 해본다.

손돌목의 유래처럼 신기하게 용두돈대 부근 만이 물살이 무척 센 것이 신기하다.


짧은 산행을 마치고 차가운 날씨에 강화의 전적지를 둘러보고는 귀가했다.

오늘도 역시 해피데이!

 

강화지명 유래(강화의 산악)

수원 북 30리에 있는 광교산 한맥이 서남으로 뻗쳐 사근현이 되었고 광주 오봉산(광주서방)에 이르고 이 오봉산 한줄기가 서북으로 돌아 수리산(광주서과천남 25리)이며 오자산(안산서십리)에 이른다. 또 서편으로 소래산 성현, 주안산, 원적, 계 양, 등산(부천계)에 으르러 북쪽으로 달려 북성산이 되고 서편으로 돌아 갈연산(일명개연산) 약산(김포군 대곳면 약암리)에서 서북으로 쇄암진(광성보 맞은쪽)에 이르러 섬이 생기어 광성진(불은면 덕성리)을 건너 대모산(덕성리) (84.2m)이 강화의 모산이다.


대모산 정맥이 서편으로 슬며시 달려 길상면 북부 길직리로 하여 월봉산이 이루어지고 가지로 구비구비 크고 작은 산이 산재하였으니 이를 12직산이라 부르기도 했는데 여러 뫼뿌리가 소라모양으로 구비쳐 돌고 있다. 월봉산 한줄기는 서북으로 돌아 두현(까치골)이 되었고 한갈래는 동북으로 흘러 마봉산(신현리 후산)이 되어 동남으로 오두리 넙성리 신선리등 뫼뿌리를 이루고 까치골 한줄기는 서쪽으로 뻗어 덕정산 큰 줄기가 되어 불은면 서남지대로서 가로질러 뻗어 있다.


덕정산 동남 한줄기는 남쪽으로 달려 길상면 서편에 이르러 모현(장군고개)이 되었고 또 남쪽으로 흘러 정족산(삼랑성)에 이르니 세봉우리가 험준하게 자리 잡았는데 그 모양이 솥밭인양 둘러 있으니 봉우리 동쪽 입구에는 삼랑성 (단군성조후예축성)이 고리와 같이 둘러 있으며, 산허리 분지에 전등사가 자리 잡고 있다. 고을이 동편으로 열리어 튼튼한 요새지로 되어 있어 아름다운 그림모양으로 이 고장에서는 가장 오랜 승경지로 손꼽는다. 이 산 한줄기는 동쪽으로 흘러가 초지리(길상면) 장자평이 이루어 졌고 슬며시 지세가 낮추어져 내진(초지리)에서 남쪽엔 대황산 소황산도(연육되었음)가 있으며 한줄기는 남으로 뻗어 길상산이 불쑥 일어서 있다.


길상산은 곱게 생기어 바위가 드물고 숲이 많으니 사람은 아름다우며 바람이 일어도 조용하다. 한줄기는 동남으로 흘러 택이포(택이)를 건너가면 연륙한 동검도(길상면)(가교)가 있다. 덕정산 정남쪽으로 한줄기는 구불구불 강도6대산의 하나인 진강산이 되었으니 즉 옛 진강현(고려초 양도면 도장리)주산이 자리한 곳이다. 산이 기이한 가운데 장대하고 울창하게 구부려져 있는데 간간이 바위가 우뚝 서 있어 구름과 안개가 오락가락 개이지 않으니 강도 10경의 하나로 손꼽아 이르기를 진강귀운이라 했다.


한줄기는 동남으로 달려 돌아가면 응봉현(매봉재)를 만들어져 남쪽엔 조산평(도장리앞펄)이니 이를 건너면 문산(화도면문산리)에서 마니산에 다다른다. 강도 6대산의 하나인 마니산은 옛날 고가도(격강도서)로서 바다 가운데 우뚝 솟아 있는 산이니 근세(1665년 이강)에 가능포(양도면 능내리) 선두포(길상면 선두리)에 뚝을 쌓은 후로 비로소 강화 본도와 이어 닿았다. 마니산 모습은 전체가 바위로 이루어졌으며 깍아 지른 듯이 가파른 절벽이며 기발한 봉우리에 험준한 산벽은 신선이 깃들인 승경이니 가는 곳마다 아름다운 경관이고 가장 높은곳에 단군성조의 얼이며 발자취가 역연한 것을 엿본다.


그 정상에는 참성단(단군 유적) 망경대가 있어 구름사이로 아득히 넘실대고 정수사, 함허동천, 해산정, 흥왕이궁등 몇곳의 명당에 고적이 있어 손꼽기 어려울 정도이다. 마니산은 돌이 많고 흙이 적은 편이어서 큰 숲은 있을 수가 없으나 골짜기엔 단풍(1653종목) 남(옥매듭, 마디풀) 화(자작나무) 오(부자) 구수(구기자)등이 가장 많다. 가을이 되어 잎새에 서릿발이 내리면 비단으로 수놓은 듯하여 옛부터 마니단풍은 강도팔경에 든다. 한줄기는 동남으로 떨어져 마이봉(동막사곡간)이 되었으니 서편봉우리는 분오리현에 이르고 봉우리 동남편에는 채석광이 있다.


한가지는 서편으로 흘러 응유현(매너미고개)이 되었고 북쪽 한줄기는 화도면 내리 새동(막은골)부근 여러 뫼뿌리가 이루어 졌고 슬며시 한줄기는 북으로 치닿아 선수부락앞 송강돈(소루지)까지 다다른다. 이곳은 진두해(서해빈)동쪽 물가에 이른다. 정북으로 한줄기는 화도면 상방리 뒷산으로 은근히 북향하여 앞에 고창산에 이르고 기북방으로 육지 방향 가능벌(화도면직입대로)이 있어 도로를 병설하여 교통의 중심가교역할을 하게끔 축조하였다.


동북간 한줄기는 조피봉(화도면덕포동전)이 되어 솟아 있어 멀리 조망하면 우뚝하며 뽀족하여 붓과 같아 친근감이 생기고 가까이 보면 웅장하여 험준하기에 큰부처와 같아 두려움이 있다. 굴 하나가 북으로 통하여 크기가 여러 칸이나 된다고 전한다. 중간에는 돌문이 있어 그 끝이 되었으며 높이는 반 길이 되며 넘어가면 어두어서 분간하기 어려우니 횃불을 켜 들어가도 그 굴의 끝은 볼 수 없다고 하였으니 속칭 각시녀와 통했다고 하며 뿔없는 용이 살고 있다는 전설이다.


한편 마니산 남록 한줄기는 미곳의 작은 뫼뿌리가 (화도면 여차리 미루지)되였고 한가지는 달려가듯이 남쪽 바다를 건너 대말곳서(모도 띄엄섬) 소말곳서(모도 서편 운)가 있고 서편으로 장봉도에 이르니 우측으로 달려 한줄기는 서편으로 치닿아 진후산이 되어 있다. 좌편으로 한줄기는 역시 서쪽으로 달려 국사봉(양도면인산리)이 되었노라. 진후산(장봉도재) 한 줄기는 북쪽으로 떨어져 마서(말여)가 되었고 서편으로 떨어져 동서 만두리(만두리 장봉도무인도)라 하는 두 섬이 있다. 강화 주문도 수심서(주문도전)와 마주하였고 국사봉 한줄기는 서남간 바다로 들어가 사도 (죽서 삼산도석포전) 와우서(삼산면대우소우도 보문사전) 비가서(삼산남도어장)가 있다. 진강산 정맥은 서편에 하일현(하우고개)에 이르러 그는 남서로 떨어져 송노곡후산이 되어 진두해 (건평외수면칭)에 끝힌다. 정남 한줄기는 응암현(매바위재)로 하여 난봉(양도면능내리)에서 남으로는 가능평(가능펄)에 이른다. 그 맞은쪽은 화도면 상방문산리가 된다. 매바위재 한가지는 서편으로 떨어져 진평 뒷산이 되고 남쪽으로 탑현(탑재)를 거치면 금사곡뒤로 하여 서편으로 춘곳(방아구지)이 있고 남쪽으로 화도면 상방리 고창산을 마주한다.


서남간 한가지는 가능(원종왕비능)이 있어 구불구불 기복이 있는가 하면 옹일 (양도면 능내리)(일차안산 옹일뿌리) 뒷산에 이르니 그 전면은 가능펄 옥야가 질펀하다. 서북 한줄기는 양도면 삼흥리 서쪽으로 흘러 등산이 되고 또 서북으로 돌아 양도면 건평리 진주봉과 노고산이 이루어 졌고 한가닥은 슬며시 서해 진두해로 떨어져 있다. 그는 이리저리 흐터져 죽서(대섬) 납섬여(납섬)등이 되어 서쪽에는 매음도(삼산면매음리) 해명산에 이른다. 강도 6대산의 하나로 해명산을 일컬어 오는데 장대하고 험준하여 기발한 점이 있고 전부 바위로 구성되어 숲이 드물고 바위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한 가닥은 서편으로 달려 낙가산(일명수도산)이 되었는데 12봉중간에 조거령(사가리 보문사고개)이 있는데 고개 길이 험준하여 정상까지 4km여에 다다른다.


그 남쪽 골짜기엔 세란동천이란 그윽한 승경이 있고 그 부근에는 고려시대 병사들이 주둔하였던 진허(고재훈 후산)가 있었으며, 세란사 옛터가 있다. 그 두째 봉우리 서편에는 현재 명구로 알려진 보문사 골짜기가 있고 뒷면의 큰바위는 길길이 깍아 세운듯하나 그 모습이 사람의 눈썹인양 기이하여 서로가 전하기를 미암이라 부른다. (근세 보문사 노승이 착암 탁조한 좌불상) 그 서북간으로 3,4봉이 연이어져 있어 삼산면 서편항포에 다다른다. 낙가산 정맥은 삼산면 석모리 난곳에서 떨어져 서북으로 바다에 들어가서 해란서(괴리섬)가 있고 서북으로는 미법도(민법)가 있는데 서쪽으로 서검도가 있으며 또 푸른 바다 건너 아차도 (서도면) 고치산이 있고 서편으로 대봉산 잠두산이 되어 있다. 한줄기는 남으로 건너 주문도에 이르니 봉구산이고 그 외 줄기는 남으로 뻗쳐 수심서(수섬)이 있고 남으로는 동남 만두리 산이 아득히 마주 하였다. 잠두산 한가지는 서편 바다 저쪽에 망도(보름도) 신선봉이 있고 서편으로 말도 노적산 국수당산하여 그외 바다에서 끝나는 듯 하다가 남으로 모노도(일명 두려도)에 이르렀고 서편에 함박도로 든다.


삼산면 항포 난곳에서부터 한줄기는 남으로 떨어져 소우여 대우여(대송도 소송도)가 있고 또 남쪽을 거치면 극포에서 어유정섬 취봉(수리봉)이 이루어졌고 남으로 탑현(탑재)에 다다른다. 그러므로 진두해 서편에서 끝난다. 덕정산 동북 한줄기는 불은면 인현(두문리북)에서부터 백운산(이규보 구기)에 떨어지고 또 동으로 치닿아 두운리 조경부락 뒷산에서 끝이며 백운산 한 줄기는 동남으로 돌아 절구산이 되고 또 동북으로 돌아 지애(고능지례)의 남북 여러 산이 있다.


서북간 한 가지는 불은면 삼성리 서문현 (습진펄서문터)에서 영청골이 되어 북방으로 뫼뿌리가 되고 곧이어 혈구산이 되었다. 6대산의 하나인 혈구산(일명 혈굴산)은 옛날에 열구현이라 칭하였으니 강도 중앙에 위치한다. 크고 준험하며 돌아가는 곳마다 깊은 골이 그윽하니 봉우리가 많고 골짜기가 깊어 옛 절터가 많은 것이 특이하다. 서편 기슭기엔 큰 석굴이 있어 사람의 힘으로 쪼은 듯이 정밀하고 깨끗한 것으로 절묘하다. 동남으로 한줄기는 선원면 서계 갈지산이 되었고 동으로 돌아들어 냉정현(찬우물고개)이 되었고 또 동으로 치달려 대문현(대문이 고개)(고려중성문 태안문)있는데 정줄기는 곧바로 도문현(도문고개)(신지동)에 이르고 이곳이 고창산이 된다. 또 동편으로 달려 가리산 남북 뫼뿌리에 이르고 대문현 한줄기는 서남으로 슬며시 숨어 있는 듯 금월리, 지산리, 연리등 여러 뫼뿌리가 형성되어 그 분포는 양의 창자모양 구불구불 되어 있다.


또는 남으로 치닿아 지산에 이르러 용진(용진앞) 해상에서 끝이더라. 고창산 한 가닥은 동으로 굴러들어 현당산(신정리)이 되고 냉정현 한 가닥은 북편으로 돌아 창동산(창꼴뒤)이 되었고 동으로 치닿아 화강(꽃뫼) 작은 산 기슭이에서 저천(유다리 남쪽)이 되어 조산평으로하여 들판을 지나서 갑곶강에 이른다. 혈구산 정북의 한줄기는 곧바로 달려 나려령(나루고개)이 되었고 또 하나는 불쑥 솟아 일어나 고려산이 되었다.


또한 서남 한 가지는 양도면 인산리 북쪽 국사봉(려말명신 전신 은거지)이 있다. 또 서쪽으로 치달려 불쑥 일어난 산이 있으니 이가 외포리 북녘에 있는 왕산(박골뒤)에 이른다. 또한번 서편으로는 기봉이 있으니 이가 덕산(구명 봉화대 망산) (황청리 후산)이 되었다. 서편으로 한번 전변하여 국수산(황청리남)이 되었고 서쪽에서 해면으로 끝나있다. 서북간 한줄기는 신전현(황청리 재너머)에서 구불구불 동경산(등경재 황청리)이 되었다. 기타 줄기는 북편으로 돌아 장박암(애기 모암국수산북)에 이르러 지세가 낮추어져 북녘 물가에 이르러 계룡돈(구주평전)을 설치하였다. 덕산 한줄기는 북으로 서초피봉(문필봉 소릉현우)이 되었고 그 서편에 옥구현(옥고개, 옥기지황청리)이 되었다.


초피봉 한줄기는 동쪽으로 흘러 현암산(고천리현천)이 되었으며 북편에는 봉금산(삼량고교서)이 되어 수없는 뫼뿌리에 긴 산기슭 기가 서리서리하여 내가면 중심지대가 되었도다. 강도 6대산의 하나인 고려산은 고려 이래로 읍에서 다스리던 진산인지라 기세가 장엄하고 준발하니 꿈틀꿈틀한데 아름다워 뫼뿌리와 골짜기 등이 경관을 이루었고 역사의 발자취가 수없이 있는 산이다.


산 위에는 우물이 5개소가 있고 풍혈(굴착하면 대풍이 일어)이 있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동편에는 국정동천이 있어 국정사(청련사)가 자리하고 그 북변 골짜기에 오류동천(오류천상위)이 있어 대곡(큰골) 남쪽엔 역시 수석등 아름다워 기이하며 백련사, 적석사등승경이 많이 있다. 이 산악 사면에는 지석묘가 30여개소가 있다. 1930년 전후하여 고고학자에 의하여 개굴한 즉 매양 석함이 있었는데 함속에는 옛 검 한 개가 있었는데 혹은 하나의 큰 철 못이 있었다고 전한다. 속칭 고려 고종이 강화로 천도하였을 때 몽고인이 강화지세를 살피고 시기하여 반드시 천혜의 요새지라 하여 성벽을 헐고 육지로 나오라고 강권하니 마침내 성곽을 헐고 개성으로 환도하였고 또 강화도의 산세를 꺼리어 그 산맥을 눌러 놓고자 하여 이내 산 정상에 있는 5개의 우물에 못을 박아 이를 눌러 놓았다 하며 또 고려산 서방에 큰칼과 못을 박아 놓았다 하며 또 큰돌로 이를 눌렀다 하니 이 산은 고구려 때 장사 연개소문의 탄생지인지라 이 영산을 투기하여 이러한 행위를 하였다 하는데 진시황이 역산에 장도를 묻었다는 고사를 모방하였다. 이러한 미신적 악습이 있었는데 당시 몽고의 적병들의 소위인 것이다.


그 주맥은 동으로 뻗어 용장현(국화리 하단)을 거쳐 강화읍의 주산 송악산(북산)에 이르는데 동남으로 한줄기는 혈구산 동쪽으로 흘러 노적봉(선행리 후산)이 되었고 동으로 흘러 화산(남산)에 다다른다. 송악산(북산) 주맥은 북으로 달려 염상곡(염산골) 뒤 산을 거쳐 이리저리 흘러 대조동(월곶리 대무꼴) 근방에 몇 개의 산이 이루어 졌다.


이는 곧바로 연화봉(고려릉소)으로 달려갔고 한줄기는 동남으로 돌아 적북돈(월곶리)을 끼고 연미정(월곶리)에 이르러 해면에 든다. 북산(송악산) 한줄기는 동편으로 자문현(자문고개)를 지나 학미산이 되어 옥포(월곶리 옥개)에 이른다. 한줄기는 동남으로 떨어져 견자산(강화읍중동)이 되었고 또 동으로 흘러 만석산(월곶리)과 장령(용정리) 여러 뫼뿌리가 되어 해면에서 끝났다. 고려산 한줄기는 동북으로 떨어져 불쑥 솟은 증산 (부근리서강 시루미산)이 있고 또 동북으로 평야를 금성산(양오리장정산)이 되었고 돌고 돌아 무수한 뫼뿌리가 이루어졌는데 숭능교 (송해면 숭뢰리입구)를 거쳐 동북으로 뻗어 염하에서 끝났다.


고려산 정북 일대는 백련사(고려산 동록부근리)를 거쳐 응봉현(부근리)을 지었고 북쪽으로 달리면 솟아있는 봉천산(일명 봉두산)이 되었고 서편으로 돌면 변립산(하점평야서산)이 되었다. 고려산 서편 한줄기는 곧바로 달려 적석사(일명적연사)와 뒷산 낙조봉이 있고 서편으로는 주적산(고려저수지)이 되었고 한 가지는 서로 달려 미곶(상망월 미꾸지) 뫼뿌리가 되었고 한줄기는 남으로 뚝 떨어져 복개산(내가면오상리)이 되었고 오미천(오상리끝)이 보인다.


봉천산 정맥은 동쪽으로 뻗어 양오리 (송해면) 두양봉이 되었으며 북녘에 백마산 풍류산, 옥려봉(당산리 후산)이 이루어졌고 정맥 한가지는 서쪽을 향하여 구불구불 많은 뫼뿌리가 형성되자 또 한 줄기는 동북으로 늘어져 벽력봉(양사면 철산리 서)이 되어 해변에서 끝치었다. 정남의 한가지는 와우형(황소누운 형세)으로 각곡(하점면 신봉리 고현지)이 있고 그 동편으로 안곡(안정골)이 되었고 동으로는 매마루가 되어 남편 언덕을 말한다.


강도 6대산의 하나로 별립산을 꼽는데 거의 암석으로 이루어졌는데 산이 건장하고 험준하며 아름다운 점이 있어 범이 업들여 있는 형국이다. 서북간으로는 존호봉(범이쭈그린 모양)이 있고 정맥 기타는 북편으로 흘러 송산(양사면 인화리) 12곡이 형성되어 분봉(분봉우리) 증봉(시루미산)등이 소의 천엽모습으로 구불구불 돌아갔으며 북녘으로는 교산(양사면 교산리)의 여러기슭이가 형성되어 해상에서 끝나있다. 정맥 한줄기는 서편으로 달려 창교(하점면 창후리)서쪽 관모봉(관모뿌리)이 되었다. 기외 산맥이 멀리 해면을 건너 서편에 상주산이 있고 서로 떨어져 해변에 들어가 유도(기장섬)가 되었으며 또 한줄기는 북으로 떨어져 해면에 들어 응암서(매바위 교동부 산전 전방)가 되어있다. 존호봉(양사 인화리 단산)은 한줄기가 서북으로 해상을 건너 교동면 호두포(교동면 읍내리-명동자)에 이른다. 우측으로 한 가닥은 서로 달려 마재산 월래산 (교동 동방)이 되었고 우측 한줄기는 서남간으로 뻗어 왕봉산(교동 동방)이 되어 곧 진산으로서 화개산(일명 규산)이 되었다.


화개산은 아름답고 예쁘고 살쪄있어 뚜껑을 편것과 비슷하니 한줄기는 서남으로 뻗어 부소산(교동 서남방) 진망산(교동 난정리)이 되었고 서편으로는 빈장산, 수정산(교동 서산)이 되어 있고 북편의 들판을 지나면 선월산(북방)이있고 동북으로 은은히 기복하여 율두산(교동 동북간)이 자리하고 북녘으로는 인현(교동 인사리)이 있어 해상에서 끝난다. 강화의 산악으로는 아름답고 웅장한 산이 곳곳에 있는데 거의 해면에 접하여 전망이 광활하고 다도해가 기라성 같이 수놓은듯하며 거름마다 명승고적이 있고 쾌적한 풍광이니 또한 그윽한 향훈이 서려있다.

 

이 고장은 역사의 고도이며 우리나라 산역사의 축소판이다. 상고시대엔 국조 단군께서 마니산 정상에 제천단을 축성하시고 국태민안을 기원하시며 서해 창파를 굽어보시고 방호의 신념을 굳건히 하였다하며 6차에 걸친 몽고군의 침입으로 개경에서 이곳으로 환도하여 39년간을 항쟁과 무마(撫摩)로 이나라의 명맥을 지켜온 우리들의 조상 고려인의 굳센 민족의식에는 감탄하지 않을수 없다. 이고장에서 8만대장경 판각이며 고려청자 금속활자 등으로 고려문화가 꽃피어 있었다. 그 뿐인가 고구려시대의 전설을 간직한 사찰이며 고려고종이 강도에 환도와 더불어 송경의 가람이 옮겨졌다는 설과 함께 고대의 절터는 가는곳 마다 초계석이 이끼에 감추어져 있으니 무너진 연대는 알길이 없네 그 뿐인가 읍터 진터엔 돌무더기가 그옛날을 말하여주노라, 높고 얕은 뫼뿌리엔 성터가 있는데 세월과 더불어 무너지고 흐트러져 있으니 뼈저린 노력의 결정인데…. 조상들의 피어린 발자국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네.

 

방위태세를 갖추어 서울을 지키려고 이곳에 철옹성 같은 돈을 53개소를 쌓았건만 도폐되고 양식을 저버린 자에 의하여 훼철(毁撤)되어 기지조차 불분명한 상태이나 지형을 살펴보니 선현들의 통찰력에는 감개무량한 바 있다. 또는 고려시대 축조한 토성이라지만 외성, 중성, 내성에는 요소마다 문루를 세우고 홍예문을 만들어 행인에게 편의를 준 그 설계에는 경탄을 아끼지 않는다. 명구(名區)에는 능소와 그 명장유학들의 봉분이 있어 지난날의 행적을 되새기게 한다. 이러한 사화(史話)를 근거하여 이곳이 비록 섬이라지만 일목일초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전설이 깃들어 있네. 두루 살피면 살필수록 특이한 이적(異蹟)이 무한한 회의를 짜아 내니 모두 우리 조상들의 얼과 넋이 서려 있다고 생각하니 인고의 그날이 눈앞을 스친다.

(강화지명고[강화문화원 발행] 발췌)


7.특기사항

①강화지맥을 총 5회에 걸쳐 진행하여 마무리했다. 구간마다 짧게 산행하고 강화 명승지를 구경했다. 마지막 구간도 산행마치고 동검도, 황산도, 초지진, 덕진진, 광성보를 구경하고는 귀가했다.

②날씨가 무척 쌀쌀하고 추운날씨이지만 하늘이 깨끗해서 조망이 좋았다.

③자가용 승용차를 이용했다.

④택이로 하산한 후 몇 번의 히치하이크를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하여 온수리택시를 호출하여 차량을 회수했다(요금 \8,000).

⑤1/25,000 지형도 2매: 신도(信島), 영종(永宗).


출처 : 조인기의 산과 여행이야기
글쓴이 : 약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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