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 부여지구 후기 다음으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그 후 …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 정원, 궁남지를 찾아!
부여 왕릉원 주차장에서 궁남지 주차장까지 5.3km 거리에 약 7분 정도 걸린다.
▣ 궁남지에 대하여
궁남지(宮南池)는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117번지 일대에 위치한 백제 사비시대의 궁원지(宮苑池)이다. 별궁 인공 연못으로, 《삼국사기》의 기록을 근거로 궁남지라 부른다. 연못의 동쪽 일대에는 대리석을 팔각형으로 짜 올린 어정, 기와편, 초석(礎石)이 남아 있다. 1964년 대한민국 사적 제135호로 지정되었다.
▶ 조사
궁남지에 대한 조사는 1990년부터 현재까지 9차에 걸쳐 수행되었다. 조사 결과 사비시대에 조성된 인공수로, 목조저수조, 우물지와 도로유구, 수정 경작지, 토기 가마터, 굴립주건물지 등 다양한 유구가 확인되었고, 6~7세기와 3~4세기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목간은 주로 6세기 무렵 조성하여 사용된 인공수로와, 목조저수조 내부의 퇴적된 개흙층에서 출토되었는데, 행정 구역명, 인명, 지명 및 수전을 개간했던 사실이 적혀있다.
▶ 관련 기록
궁남지에 대해서 《삼국사기》〈백제본기〉 무왕 35년(634년)에 '3월에 궁성(宮城) 남쪽에 연못을 파고 물을 20여리나 되는 긴 수로로 끌어들였으며, 물가 주변의 사방에는 버드나무를 심고, 연못 가운데에는 섬을 만들어 방장선산(方丈仙山)을 본떴다'고 되어 있다. 백제 웅진(熊津)시대의 왕궁이었던 공산성(公山城) 안에서는 당시의 것으로 판단되는 연못이 왕궁터로 추정되는 건물터와 함께 발굴된바 있다.
《삼국사기》무왕 37년조에는 "8월에 망해루(望海樓)에서 군신(群臣)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는 기록이 있다. 39년조(年條)에는 "3월에 왕이 왕궁(王宮)의 처첩(妻妾)과 함께 대지에서 배를 띄우고 놀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써 궁남지는 처음 만들어질 때 붙은 이름이 아니고 백제시대에는 단지 대지라고 불렸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뱃놀이를 할 수 있을 만큼 규모가 컸을 것으로 보인다. 규모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으며 현재는 1만평 정도만 남아 있다.
《삼국사기》 의자왕(義慈王) 15년조에 "2월에 태자궁(太子宮)을 지극히 화려하게 수리하고 왕궁 남쪽에 망해정(望海亭)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일본서기》에는 궁남지의 조경(造景) 기술이 일본에 건너가 일본 조경의 시초가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 설화
궁남지는 백제 무왕(武王)의 출생 설화와 관련이 있다. 백제시대 법왕(法王)의 시녀였던 여인이 못가에서 홀로 살던 중 용신(龍神)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이가 서동(薯童)으로 법왕의 뒤를 이은 무왕(武王)이다.
[출처: 위키백과]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 정원인 궁남지는 해마다 연꽃이 필 시기에 가야지 하면서도 이제야 답사하게 되었다.
궁남지 일원에서 열리는 제19회 부여서동연꽃축제가 2021.07.10(토)~18(일)까지 열린 계획이었는데 코로나19로 인해 취소되었다.
궁남지에서 이제 사랑나무로 유명한 가림성으로 향했다.
▶ 궁남지 사진 보기: https://blog.daum.net/joingi61/15965710
가림성의 사랑나무, 그리고 유금필 장군!
궁남지에서 부여 시내로 들어가 점심을 먹고 가림성으로 향했다.
임천면사무소를 지나 산으로 올라간다.
산길은 올라가던 차량은 포장도로에 진입금지라는 표시를 보고는 난감했으나 곧바로 좌측으로 내려가니 넓은 주차장이 있어 그곳에 주차를 하고 계단을 올라간다.
계단을 올라가니 포장도로가 나온다. 이곳에다 주차를 시킨 얌체족(?)도 있었다.
곧바로 삼거리가 나온다. 우측의 비포장길은 성흥사 가는 길이다. 직진의 포장도로를 따라 조금 올라가니 넓은 공터가 나온다.
이곳에 차량화장실 건물과 사찰(민가 건물)이 있는데 한참 굿을 하고 있어서 무척 요란스러웠다. 굿은 이내 끝났다.
솔바람길 이정표(←0.42km 성흥산성 / ↑0.7km 대조사 . 임천면사무소 1.3km→)도 세워져 있었다.
가림성의 대형안내판도 세워져 있다.
◈ 가림성(扶餘 加林城) -종목: 사적 제4호 -소재지: 충남 부여군 임천면 성흥로 97번길 167(군사리) 사비천도 이전인 서기 501년에 쌓은 백제시대의 산성이다. 해발 268m의 산 정상부에 돌로 쌓은 석성과 그 아래쪽에 흙과 돌로 쌓은 토성이 있다. 석성의 둘레는 1,350m이고 높이는 4m 가량 되는데, 성 내부에는 우물터, 건물터 등이 남아 있으며 동문, 동문과 서문 3개의 문터가 확인되었다. 현재까지 백제 성곽 가운데 쌓은 시기가 가장 확실한 산성이므로 백제시대의 성곽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한 후에는 백제 부흥운동의 거점이 되었다.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이므로 18세기 중엽까지 사용되었다. [출처: 현지 안내판] |
옛날에는 가림성으로 부르고 현재는 성흥산성으로 부른다.
넓은 공터에서 성흥산성으로 올라가는 초입에 이곳에서 촬영한 드라마, 영화를 소개하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는데 「흥부」, 「신의」, 「육룡이 나르샤」, 「대왕 세종」, 「계룡 선녀전」, 「왕은 사랑한다」, 「엽기적인 그녀」, 「서동요」등이 이곳에서 촬영했나 보다.
충혼사를 지나니 계단이 나오는데 좌측으로 커다란 암반이 눈길을 끈다.
암반 우측으로 난 계단을 올라가면 조망이 터지는 곳이 나온다. 이곳이 끝이 아니고 조금 더 올라가니 비로소 성곽이 나오면서 사랑나무 모습도 보였다.
이내 남문지에 올라섰다. 좌측으로 「史蹟 第四號 扶餘 加林城」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표지석이 깨끗한 것으로 보아 최근에 다시 세운 것 같았다.
우측으로 사랑나무가 우뚝하다.
느티나무 앞에는 「임천 가림성 느티나무」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안내판에는 부여군 향토문화유산 제88호이고 수령 약 400여 년으로 추정되며, 나뭇가지가 하트모양처럼 보여 일명 사랑나무로 불린다고 쓰여 있다.
느티나무의 엄청난 크기와 판근(넓게 펼쳐진 돌출된 뿌리)에 놀랐다. 글쓴이는 나무에 관심이 많아 수많은 느티나무를 봐 왔는데 여태껏 본 느티나무 중에서 이곳의 느티나무가 가장 큰 것 같다. 물론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느티나무만도 20개(2021.08.09. 현재)나 된다. 그 중 못 본 느티나무도 부지기수다. 1,000년이 넘은 느티나무도 두 그루(95호 삼척 도계 / 161호 제주 표선)나 된다.
◈ 천연기념물 연번 466호. 부여 가림성(加林城) 느티나무 분류: 천연기념물 지정(등록)일: 2021.08.09 지정 소재지: 충청남도 부여군 성흥로97번길 167(임천면) 시대: 조선시대 부여의 남쪽, 백마강 건너 장암면과 세도면 및 임천면이 있고 강줄기가 감싸듯 휘감으면서 강물이 흘러감. 이 일대에 성흥산(286m)이 있으며, 여기에 백제 동성왕 23년(501)에 산7∼8부 능선을 감싸면서 가림성(사적 제4호)을 쌓았음. 느티나무는 성벽만 남아있는 성흥산 8부 편평한 능선 부근(부여군 임천면 군사리 산1-1, 남문지 인근 약220m)에 위치하고 있음. 규모는 수령 약400년, 수고 22m, 흉고둘레 5.4m으로 넓은 원뿔 모양의 아름다운 느티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으며, 나무 아래서 논산, 강경, 익산, 서천이 한눈에 보임. [출처: 문화재청 홈피] ※향토유적 88호(지정일: 2007.10.01.)에서 천연기념물 연번 466번으로 변경. |
※ 천연기념물 제1호는 1962.12.07. 지정된 대구 도동 측백나무 숲이고,
현재(2021.09.29.) 468호(진주 정촌면 백악기 공룡 • 익룡발자국 화석산지)까지 지정되어 있다.
※ 문화재청은 문화재 서열화와 논쟁을 없애기 위해 문화재 지정번호 제도를 60년 만에 폐지했다. 그래서 부여 가림성 느티나무 466은 천연기념물 연번이다.
▼ 천연기념물 느티나무 확인하기: https://blog.daum.net/joingi61/15964669
사랑나무는 느티나무인데 도대체 왜? 사랑나무일까? 처음에는 느티나무 한 바퀴을 돌아도 하트 모양을 찾을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기로 하고 위로 올라갔다. 지금은 주변에 한 사람도 없었다.
조금 올라가니 우물터가 있는데 수질검사 결과 먹는 물 수질기준을 초과하여 음용수로 사용하기 부적합해서 음용금지라는 안내문을 설치하고 있었다.
약수터에서 조금 올라가니 「太師庾公之廟重修獻誠碑」와 사당이 나온다. 고려 개국 공신 유금필 장군 사당이다.
사당 앞에는 부여군 향토문화유산 제8호「유태사 묘(庾太師之廟)」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사당은 문이 잠겨 있어 내부를 볼 수가 없고, 대신 언덕이 낮아서 언덕 너머 내부를 보니 「太師庾公之廟」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다.
유태사지묘(庾太師之廟. 향토유적 제8호)는 고려의 개국공신 유금필 장군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유금필 장군은 황해도 평주 출신으로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936년 후백제를 멸망시키는데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그는 후백제를 섬멸한 뒤 남방을 다스릴 때 고려 태조를 만나러 가다가 이곳 임천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이곳 패잔병들의 심한 노략질과 질병 및 흉년이 겹쳐 민심이 흉흉해 지자 군량미를 풀어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고 선정을 베푸니 임천 백성들이 사당을 세워 그의 공덕을 기렸다.
장군이 후삼국 통일 후 6년 뒤(941년) 죽자 태조는 그에게 충절(忠節)의 시호를 내렸고, 태사에 추증되었다. 이어 고려 성종(6대 왕)이 태사유공지묘(太史臾公之廟)라는 어필 현판을 내렸다.
연천 숭의전에 고려 4왕(태조, 현종, 문종, 원종)의 위패[숭의전(崇義殿)]와 고려충신 16명의 위패[배신청(陪臣廳). 숭의전 부속건물]가 모셔져 있다.
※ 고려 16 공신 (복지겸, 홍유, 신숭겸, 유금필, 배현경, 서희, 강감찬, 윤관, 김부식, 김취려, 조충, 김방경, 안우, 이방실, 김득배, 정몽주)
[참고자료]
[탐사기획] 유금필
-우리가 꼭 알아야 할 부여의 역사 인물 기행[14]
백제 최후의 결전장, 임천면 군사리와 장암면 지토리의 접경 지역에 있는 성흥산성이다. 백제 시대 이름은 가림성(加林城). 백제시대부터 가림군(加林郡)이었던 임천은 조선 태종 13년부터 임천군으로 불렸다. 웅진백제 시대인 동성왕 23년(501년) 8월에 웅진성과 사비 일대를 지키기 위하여 금강 하류 요새지였던 성흥산에 성을 쌓았다.
머리띠를 두르듯 봉우리를 중심으로 바깥 부분에 성을 쌓아 ‘테뫼식 산성’으로 불린다. 삼국사기에 관련 기록이 남아 있기에 옛 지명과 축성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중요한 산성이다. 지그재그식으로 성벽을 쌓았고, 전체 길이는 8백미터에 이른다. 높이는 3~4미터 정도. 금강을 따라 평야가 주변에 펼쳐져 있기 때문에 강경을 비롯한 금강 하류 일대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대단히 중요한 군사적인 요충지이다. 통일신라 시대에는 국가에서 제사를 지내는 명산 24곳 중 한 곳이었을만큼 종교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지역으로 인식되었었다.
성흥산성은 백제 제24대 왕인 동성왕의 죽음과 관련이 깊다. 삼국사기에는 이 성을 지키던 장군 백가(苩加)가 반란을 일으켜 동성왕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오랫동안 동성왕의 신임을 받던)위사좌평 백가로 하여금 501년 8월 성을 축조하게 한 뒤 지키게 하였는데 (중앙 정치에 멀어질 것을 걱정한) 백가는 병이라 핑계하고 나아가 지키고자 하지 않으므로 왕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다. 그 해 11월 동성왕은 사비원(부여)에서 사냥을 하다가 큰 눈을 만나 (웅진으로 돌아가는) 길이 막히게 되었다. 이때 백가가 왕을 시해하고자 도모하였다. 백가에게 화를 입은 왕은 12월에 죽었다. 뒤를 이어 무령왕이 즉위하자 백가가 가림성에 웅거하여 모반하므로 무령왕이 병마를 거느리고 나아가 한솔·해명에게 명하여 토벌하니 백가가 나와 항복했다. 무령왕은 백가를 참수하여 머리를 백강에 던졌다.’
이 성흥산성 안에 고려의 개국공신 유금필을 모신 유태사지묘(瘐太師之廟)가 있다. 묘(廟)는 무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조상이나 훌륭한 신인(神人)들의 신주(神主)·위판(位版)·영정(影幀)·소상(塑像) 등을 모신 사당을 일컫는다.
고려 태조 왕건이 극진히 아꼈던 명장이었던 유금필 장군은 925년에 정서대장군, 933년에 정남대장군, 935년에는 도통대장군이 되어 왕건이 삼국을 통일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후삼국 통일전쟁에 참가해 수많은 무공을 세워 태조 묘정에 배향된 역사적인 위인이다. 딸이 고려 태조의 제9비 동양원부인이 되었을 정도로 개인적인 관계도 남달랐다.
유금필 장군이 태어난 곳(그는 황해도 평산 사람이다)도 아니고, 죽은 곳도 아닌 부여에 왜 그를 기리는 사우가 있는 것일까. 1929년에 간행된 ‘부여지’의 ‘성흥산성실기’에는 이렇게 실려 있다.
‘백제가 망하자 왕자 풍이 이 성에 들어와 웅거하였으나 일이 끝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그 후 고려 태조 때에 유태사 금필이 진남장군으로 전라도 순천군 산성으로부터 바야흐로 송도(개성)을 향하여 가던 중 임천에 오게 되었다. 유금필 장군은 이 성에 올라 주민 가운데 빈궁한 자를 진휼하였다. 그 후 주민들이 은덕을 잊지 못하여 사당을 세우고 제사하였다.’
성흥산성 사당 앞에 세워져 있는 안내판에도 이와 비슷하게 되어 있다.
‘이곳은 고려 개국공신 유금필 장군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유금필 장군은 황해도 평주 사람으로 932년에 마군장군이 되어 골암진에 침입한 북번을 평정하였으며, 그 뒤 후삼국을 통일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후백제 섬멸 뒤 남방을 다스릴 때 고려 태조를 만나러 가다가 임천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이 곳 패잔병들의 노략질이 심하고 나쁜 병과 흉년까지 겹쳐 민심이 흉흉하게 되었다. 이때 군량을 나누어주고 둔전을 운영하게 하여 민심을 수습하고 선정을 베푸니 임천 백성들이 감사하여 산(生) 사당을 세워 장군의 공덕을 기리고 해마다 제사를 올려왔다. 941년 장군이 죽자 고려 태조가 충절이라는 시호를 내렸고 그 뒤 성종이 《태사유공지모》 라는 어필 현판을 내렸다.’
유금필 장군이 부여에 왔다는 기록은 역사적인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즉, 유금필 장군이 언제, 왜 임천에 왔는지, 와서 무슨 활동을 했는지 등은 분명치 않다. 그러나 다른 곳에는 없는 그를 기리는 사당이 있고, 그와 관련한 이야기가 전해오는 것으로 볼 때 그가 이곳에 왔던 것은 사실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가 부여에 주둔했던 시점은 대략 934~936년 사이로 추정된다. 이유가 있다. 934년(고려 태조 17년) 태조 왕건은 홍성을 장악했다. ‘홍성 싸움’에서는 견훤이 직접 5천명의 군사를 이끌고 왕건과 싸웠으나 3천명이 죽거나 포로로 잡히는 대패를 당하며 후백제의 군세는 급격히 위축된다.
935년 신라 경순왕의 항복에 이어 936년 논산에서 후백제군을 대파한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하고 명실상부한 고려왕국을 만드는 데 성공한다. 전투의 중요성이나 홍성, 논산 등 전투의 양상을 볼 때 바로 이 시기에 유금필 장군은 충남 서부의 전략적 요충지인 성흥산성 일대에 주둔했을 가능성이 높다.
차를 세우고 가파른 길을 숨을 헐떡이며 올라 산성에 오르니 사방이 탁 트여 강경 들판과 서해로 흘러드는 금강의 물줄기가 한 눈에 들어온다. 높이는 2백61미터 밖에 안 되지만 평지에 돌출해 있어서인지 제법 높다는 느낌이 들었다. 적의 움직임을 그대로 볼 수 있기에 역시 천혜의 요새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몇 년 전에 왔을 때는 정비가 잘 되어 있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정상 평지가 제법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SBS 드라마 ‘서동요’ 촬영지였던 ‘사랑나무’의 기운은 더욱 성성해 보였다. ‘사랑나무’에 손을 대고 가족의 안녕과 부여의 발전을 기원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사랑나무’에서 유태사묘로 가는 길에 있는 우물은 겉모양은 멀쩡했으나 먹을 수 있는 상태는 아니었다. 어쩌면 백제시대 때부터 있었던 우물이라고 생각하니 우물 곁에서 정담을 나누는 백제 군사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유금필 장군의 사당은 평지를 약간 지나 올라가는 오르막에 있었다. 담장이 허물어져 공사를 하고 있었다. 울타리를 살짝 넘어 들어가 안을 들여다보니 사당 안도 공사 중이라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1976년 이전까지는 산성 아래에 사는 무당이 이 사당을 관리했다. 그 이후부터는 무송 유씨 종친회가 이곳을 시조묘로 여기고 해마다 음력 3월 18일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원래 사당 안에는 유금필 장군의 목상이 모셔져 있었다. ‘호서읍지’(1871년)에는 이와 관련해 ‘성흥산성 안에는 목상이 설치된 사당이 있다. 이 목상은 속전에 고려 명장 유금필이 이 성을 지켰기에 모셨다. 이 같은 내용의 사적은 없으며 전설로 전하는 것 뿐이다.’라고 나와 있다. 고려 시대 이후 이곳 주민들에게 유금필 장군이 일종의 ‘신(神)’으로 추앙 받았다는 징표이다.
목상은 다섯 기가 있었다. 유금필과 부인, 아들, 딸 두 명이었다. 얼굴만 조각하고 몸은 그대로 두었다. 남자는 푸른색 옷을, 여자는 빨간 색 옷을 입혔고, 높은 단 위에 일렬로 봉안했다. 남자 신상은 검은색으로 된 모자를 쓰고 있다. 여자 목상은 검은 머리에 얼굴에 하얀 분을 바르고 양 볼에 붉은 연지를 찍었다. 그러나 2008년쯤 누군가가 침입해 이 목상들을 훔쳐 갔다고 한다. 사당 옆에는 무송 유씨 종친회에서 세운 ‘이곳이 유금필 장군이 머무른 장군당터이다.’라는 비가 세워져 있다.
취재 과정에서 새로이 확인한 사실이 하나 있다. 유금필 장군을 모시는 사당이 성흥산성 말고 장암면 장하리에도 있었다는 것이다. 장하리에는 태성산(台城山·110m)이 마을의 진산이다. 태성산은 백제시대에 도읍의 1차 방어선이었던 성흥산성에서 부여읍내로 가는 중간 기착지에 해당한다. 군사적인 측면에서 중요도가 크다는 이야기이다. 이 태성산 봉우리에 ‘태사각’이라는 사당이 있었다. 1970년대까지 마을 주민들은 이곳에서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당제를 지냈다. 해마다 음력 정월 첫 번째 ‘정일(丁日)’을 택하여 지낸 정기적이고 공식적인 행사로 인근 마을 주민들도 참가할 만큼 마을 축제였다는 것이다.
장하리 마을 주민인 강상모씨는 “태사각에는 유금필 장군과 부인 두 명 등 목상 세 개가 모셔져 있었다. 높이는 50센티 정도였다. 진주 강씨들이 장정마을에 터를 잡기 시작한 것이 17세기 이후인데 태사각은 그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안다. 태사각은 1980년대 초반쯤 화재가 나 불에 탔다. 그 이후 내가 임시로 움막 형태의 집을 지어놓았다”라고 증언했다. 강상모씨가 알려준 조그만 산길을 따라 태성산 정상에 올랐다. 건너편을 바라보니 백마강 줄기가 바로 눈앞에 보였다. 군사기지가 있을만한 곳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태사각이 있던 터는 돌을 쌓아 울타리를 만든 곳에 조그만 벽돌 슬레트 움막이 있었다.
충절공 유금필. 그는 ‘백제’라는 관점에서 보면 후백제를 멸망에 이르게 한 주역 가운데 한 명이다. 길환 등 후백제의 장군들도 여럿 죽였다. 그가 새로이 등장한 권력인 ‘고려’의 개국공신이라는 ‘신권력의 핵심’이라는 점을 감안해도 그를 모신 사당이 성흥산성 외에 장하리에도 있었다는 사실은 그를 추모하는 마음이 부여 일대에 널리 퍼져 있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유금필 장군이 당시 어떤 형태로 선정을 펼쳤는지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분명치 않으나 전설대로 가난과 전란에 찌든 임천 일대 주민들에게 실질적인 구휼 활동을 펼쳤을 가능성이 높다. 유금필 장군의 사당을 돌아보며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떠올랐다.
[출처 : e부여신문(http://www.21cbuyeo.co.kr)]
※[참고자료] 단 한 번의 패배도 하지 않은
한국사 역사상 최고의 불패 장군의 미친 전적 TOP 4
4. 고려 유금필 (10승 무패)
3. 조선 태조 이성계 (11승 무패)
2. 고구려 광개토대왕[고담덕] (15승 무패)
1. 조선 충무공 이순신 (23승 무패)
유금필 장군 사당 옆에는 무송 유씨 후손들이 세운 비석이 있다.
이제 사당에서 조금 더 올라가니 시야가 확 터지면서 넓은 초원지대가 펼쳐진다.
이내 2층의 정자가 나오는데 위로 올라가니 내부 쪽에 현판이 걸려 있는데 「聖興樓」라로 써져 있다. 부여 출신 전(前) 국무총리 김종필의 글씨다.
성흥루에서 내려와 조금 더 올라가니 정점(제일 높은 곳)에 산불감시초소가 있다. 이곳에 사람 2명이 있는데 관광객 같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없어졌다. 그래서 사랑나무에 대해 물어볼 사람도 없고 해서 벤치에 앉아 잠시 검색을 해봤다. 나뭇가지가 하트 반쪽을 하고 있는 사진을 보고서야 알게 됐다.
다시 느티나무로 향했다. 그런데 글쓴이가 올라올때는 사람 한 명 없었는데 어느 순간 10여 명이 느티나무(사랑나무)에서 하트모양의 나뭇가지를 배경으로 사진 촬영을 하고 있었다.
글쓴이도 줄서서 사진 두 어장 찍고 내려갔다.
내려가는 길에 충혼사(忠魂祠)에 잠시 들렸지만 역시나 문이 잠겨 있었다.
차량을 회수한 후 부여의 마지막 목적지인 서동요 테마파크로 향했다.
우리나라에서 조성된 가장 큰 석조불상인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국보 제323호)과 비슷한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보물 제217호)을 못보고 온 것이 아쉬웠다.
▼ 성흥산 사랑나무(느티나무)와 유금필 장군 사당 사진 보기: https://blog.daum.net/joingi61/15965711
월요일엔 집에서 쉬어야 하는데…
서동요테마파크 둘레길
부여의 마지막 일정으로 서동요 테마파크에 갔는데 아뿔싸! 월요일이라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대신 출렁다리가 있어서 둘레길의 일부인 출렁다리를 다녀옴으로 대신했다.
▣ 서동요테마파크
드라마 서동요 오픈세트장으로 백제, 신라왕궁, 왕궁촌, 태학사 등이 있고 세트장을 둘러싼 출렁다리와 데크길도 있다.
▼ 서동요 테마파크 둘레길(출렁다리) 사진 보기: https://blog.daum.net/joingi61/15965712
7.참고자료
(1) 부여 연혁
부여는 약 2,500여년 전(前)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송국리 문화가 개화(開花)했던 유서 깊은 도시(都市)다. 이후 백제 26대 성왕은 국가중흥의 원대한 뜻을 품고 풍요로우면서도 국가정책의 융통성이 많은 사비(부여)로 도읍을 옮겼다. 123년간 국력신장과 활발한 외교활동을 펼쳐 '검소하나 누추하지 않았고, 화려하나 사치스럽지 않았던' 고대문화를 꽃 피웠던 역사문화의 고장이다.
백제의 마지막 수도로서 사비(泗沘:일명 소부리)라 불렀으며, 538년(성왕 16) 웅진(熊津:현재의 公州)으로부터 이곳으로 천도하였다. 그 후 660년(의자왕 20)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국이 멸망하면서 신라에 예속되었고, 경덕대왕대(742~765)에 부여현(扶餘縣)으로 개칭되었다.
고려시대에는 1018년(현종 9) 공주와 병합하여 감무를 두고 다스리다가 조선시대에는 1413년(태종 13) 독립하여 부여현이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때 홍산현(鴻山縣)·임천군 전역과 석성현(石城縣)·공주군 일부를 편입해서 16개 면으로 부여군이 형성되었으며, 1960년 1월 1일 부여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현재 부여읍(扶餘邑)과 규암면(窺岩面), 은산면(恩山面), 외산면(外山面), 내산면(內山面), 구룡면(九龍面), 홍산면(鴻山面), 옥산면(玉山面), 남면(南面), 충화면(忠化面), 양화면(良化面), 임천면(林川面), 장암면(場岩面), 세도면(世道面), 석성면(石城面), 초촌면(草村面) 등 1읍 15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백제시대 : 6대왕(26대 성왕 16년~31대 의자왕 20년)123년간 (AD 538~660년)왕도
-통일신라 : 부여군 설치(동시에 한산현, 가림군, 석산현 설치)
-고려시대 : 감무설치(4현-부여, 가림, 석성, 홍산)
-조선시대 : 1군 3현(임천군, 부여현, 홍산현, 석성현)
-일제강점기 : 1914.3.1 부여군으로 통합(16면)
-대한민국 : 1960.1.1 부여읍 승격(1읍15면)
※ 인구는 2020년 12월 말 현재 65,354명으로 면적은 624.5㎢ 로 도내에서 공주시,서산시, 당진시, 천안시에 이어 다섯 번째로 넓다.
[출처: 부여군청 홈피]
(2) 부여10경
① 부소산 낙화암
② 정림사지 5층석탑
③ 궁남지 사계
④ 백제왕릉원 (※ 명칭을 부여왕릉원으로 고쳐야 한다.)
⑤ 천정대 백제보
⑥ 백마강 수상관광
⑦ 백제문화단지
⑧ 만수산 무량사
⑨ 서동요 테마파크
⑩ 성흥산 사랑나무
(3) 사적
1호: 경주 포석정지 (1963.01.21. 지정)
2호: 김해 봉황동 유적 (1963.01.21. 지정)
3호: 수원 화성 (1963.01.21. 지정)
4호: 부여 가림성 (1963.01.21. 지정)
5호: 부여 부소산성 (1963.01.21. 지정)
6호: 경주 황룡사지 (1963.01.21. 지정)
7호: 경주 망덕사지 (1963.01.21. 지정)
8호: 경주 사천왕사지 (1963.01.21. 지정)
9호: 서울 한양도성 (1963.01.21. 지정)
10호: 서울 풍납동 토성 (1963.01.21. 지정)
11호: 공주 공산성 (1963.01.21. 지정)
12호: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 (1963.01.21. 지정)
13호: 부여 왕릉원 (1963.01.21. 지정)
14호: 경주 흥륜사지 (1963.01.21. 지정)
15호: 경주 월성 (1963.01.21. 지정)
16호: 경주 남고루 (1963.01.21. 지정)
17호: 경주 동궁과 월지 (1963.01.21. 지정)
18호: 경주 계림 (1963.01.21. 지정)
19호: 경주 무열왕릉 (1963.01.21. 지정)
20호: 경주 김유신묘 (1963.01.21. 지정)
21호: 경주 남산신성 (1963.01.21. 지정)
22호: 경주 경덕왕릉 (1963.01.21. 지정)
23호: 경주 진덕여왕릉 (1963.01.21. 지정)
24호: 경주 부산성 (1963.01.21. 지정)
25호: 경주 원성왕릉 (1963.01.21. 지정)
26호: 경주 구정동 방향분 (1963.01.21. 지정)
27호: 경주 성덕왕릉 (1963.01.21. 지정)
28호: 경주 헌덕왕릉 (1963.01.21. 지정)
29호: 경주 흥덕왕릉 (1963.01.21. 지정)
30호: 경주 감은사지 (1963.01.21. 지정)
31호: 서울 독립문 (1963.01.21. 지정)
32호: 서울 영은문 주초 (1963.01.21. 지정)
33호: 부여 청마산성 (1963.01.21. 지정)
34호: 평창 오대산사고 (1963.01.21. 지정)
35호: 경주 금척리 고분군 (1963.01.21. 지정)
36호: 부여 군수리 사지 (1963.01.21. 지정)
37호: 경주 장항리 사지 (1963.01.21. 지정)
38호: 경주 원원사지 (1963.01.21. 지정)
39호: 경주 명활성 (1963.01.21. 지정)
40호: 경주, 울산 북구 관문성 (1963.01.21. 지정)
41호: 영주 소수서원 (1963.01.21. 지정)
42호: 고양 행주산성 (1963.01.21. 지정)
이후 생략
519호: 태안 안흥진성 (2020.11.02. 지정)
(4)느티나무 천연기념물 목록 (2021.08.09. 현재)
순서 | 번호 | 소재지 | 추정 나이 |
특기사항 |
1 | 95 | 삼척시 도계읍 도계리 | 1,000 | 긴잎느티나무 |
2 | 108 | 함평군 대동면 향교리 | 350 | 느티나무,팽나무,개어서나무 숲 |
3 | 161 |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 | 1,000 | 느티나무 및 팽나무 군 |
4 | 192 | 청송군 파천면 신기리 | 350 | |
5 | 273 | 영주시 안정면 단촌리 | 700 | |
6 | 274 | 영주시 순흥면 태장리 | 600 | |
7 | 275 | 안동시 녹전면 사신리 | 600 | |
8 | 278 | 양주시 남면 황방리 | 850 | |
9 | 279 | 원주시 흥업면 대안리 | 350 | |
10 | 280 | 김제시 봉남면 행촌리 | 600 | |
11 | 281 | 남원시 보절면 진기리 | 600 | |
12 | 283 | 영암군 군서면 월곡리 | 516 | |
13 | 284 | 담양군 대전면 대치리 | 600 | |
14 | 382 | 괴산군 장연면 오가리 | 800 | |
15 | 396 | 장수군 천천면 봉덕리 | 500 | |
16 | 407 | 함양군 함양읍 운임리 학사루 | 500 | |
17 | 478 | 장성군 북하면 단전리 | 400 | 가장 크고 수형이 아름다움 |
18 | 493 | 의령군 유곡면 세간리 현고수 | 520 | |
19 | 545 | 대전 서구 괴곡동 | 700 | 2013.07.17. 지정 |
20 | 466 | 부여군 성흥로 97번길 167 | 400 | 2021.08.09. 지정 |
※ 문화재청은 문화재 서열화와 논쟁을 없애기 위해 문화재 지정번호 제도를 60년 만에 폐지했다. 그래서 20번 466호는 천연기념물 연번이다.
8.답사 경비
①통행료: 약 10,000
②주유비: 약 60,000
③식대: 21,500 + 14,000 + 14,000 = 49,500
④입장권: 4,500 (정림사지 1,500 / 부소산성 2,000 / 부여 왕릉원 1,000)
⑤간식비: 10,000
⑥합계: 13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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