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세계유산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 부여 지구 후기 (21.10.18)

약초2 2021. 10. 25. 07:00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 (부여 지구)

관북리유적과 부소산성, 정림사지, 부여 왕릉원, 나성.

 

1.답사 날짜: 2021년 10월 18일 (월)

2.답사 인원: 2명 (여행님)

3.답사 날씨: 맑고 쾌청함.

4.답사 경로: 정림사지관북리유적부소산성부여 왕릉원(구.능산리고분군)→능산리고분군 아트 뮤지엄→능산리사지 터→나성→궁남지→가림성(성흥산성. 사랑나무)→서동요 테마파크

 

5.답사 시간

-09:00~09:23 미륵사지 답사

-09:38~11:10 관북리유적, 백화정, 고란사, 부소산성 답사

-11:26~12:13 부여 왕릉원, 능산리고분군 아트뮤지엄, 나성 답사

-12:32~12:54 궁남지 답사

-14:18~15:15 가림산성(성흥산성, 사랑나무) 답사

-15:50~16:11 서동요 테마파크 둘레길 답사

 

6.답사 후기

 

백제역사유적지구 중, 공주시(공산성, 무령왕릉과 왕릉원)와 익산시(미륵사지, 왕궁리 유적)는 답사를 했고, 이제 마지막으로 부여군(관북리 유적과 부소산성, 부여 왕릉원, 정림사지, 나성)을 답사하기로 하고 10월 18일 5시 30분경에 여행님과 함께 길을 나섰다.

 

정안알밤하행휴게소(천안~논산 고속도로)에서 아침을 먹고 남공주IC에서 나와 40번 국도를 이용하여 부여 정림사지 주차장에 도착을 했다.

 

정림사지 주차장 가기 전에 「북포(北浦)[뒷개]」, 「부여 부소산성」 안내판과 「부소산성 현황도와 전경」 등이 부착되어 있는 안내도가 세워져 있는 곳이 있어서 잠시 갓길에 주차하고 확인했다.

 

북포(뒷개)는 부여읍 쌍북리에 있는 자연마을이자 백마강가에 있었던 옛 포구이름으로 뒷개라는 이름으로도 불리고, 부소산성 북문지에서 시작된 북나성과 북나성의 해자(垓子, 방어용 물길) 역할을 한 가증천이 지나고 있어 사비성 방비의 거점이기도 한 곳이라 한다.

 

길 건너편에는 백제 무왕 6년(605)에 사비에서 웅진으로 통하는 길목을 지키기 위하여 나성과 함께 쌓은 「청산성(靑山城)」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안내판에는 약 300m 정도의 내성과 500m 정도의 외성으로 이루어진 2층 구조의 산성이지만 현재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고 적혀 있다.

 

청산성 안내판 옆에 있는 「백마강길」 이정표에는 청산성까지 0.8km 라고 적혀 있다.

안내판이 세워져 있는 곳에는 부소산성 등산로가 보였다.

 

안내판들을 확인하고 출발했다. 곧바로 좌측으로 백제관광호텔이 나온다. 이후 약 2.5km 거리 5분 정도 진행하니 정림사지박물관 주차장이 나온다.

 

정림사지의 완벽한 복원을 기대하며….

 

▲ 복원된 정림사진 모습(추정. 출처: 정림사지박물관 홈피)

 

▣ 정림사지

-시대: 백제시대

-지정현황: 사적 제301호 (1983.03.26 지정)

-위치: 충남 부여군 부여읍 정림로 83

 

◉ 정림사지는?​

 

정림사지는 부여의 중심부에 위치한 백제시대의 대표적인 절터이며, 주변에는 동쪽으로 금성산, 북쪽으로 부소산에 둘러싸여 있다. 사비시대 수도의 가장 중심적인 위치에 있었던 정림사지는 우뚝 서있는 석탑 표면에 당나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전승 기념의 내용이 새겨져 있다. 이는 백제 왕조의 운명과 직결된 상징적인 공간으로 정림사가 존재하였음을 시사한다.

 

​정림사지는 백제시대의 전형적인 가람배치를 가지고 있다. 중문, 석탑, 금당, 강당을 남북 일직선으로 배치하고, 승방과 회랑으로 둘러싼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정림사의 존속기간에 대한 정확한 근거 자료는 없지만 백제멸망과 함께 소실된 것으로 본다. 이는 정림사지 발굴조사에서 금당터의 붉게 탄 흙층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현재 정림사지에는 국보 제9호의 오층석탑과 보물 제108호의 고려시대 석불좌상이 남아 있으며, 사적 제301호로 지정·관리되고 있다.

 

​​정림사지 History​​

 

정림사지는 1942년 정림사지 인근지역을 공원화하기 위하여 발굴하였다. 당시 이 절터는 폐사지로 평제탑(平濟塔)이라고 불리면서 행사를 치르는 마당이자 장터였다. 하지만 강당지에서 ‘정림사'라는 사찰 이름이 새겨진 기와가 수습되어 정림사지라는 정식 명칭이 부여되었다. 발굴조사 결과 정림사가 1탑 1금당의 백제 양식을 띠고 있다는 것과 고려시대까지 이어져 온 사찰 터임이 밝혀졌다.

 

◉ 정림사지의 세계유산적 가치

 

정림사는 사비 도성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어 당시 매우 중요한 사찰이었으며, 중국을 통해 들어 온 불교문화가 백제 불교문화로 완성되는 증거이기도 하다.

정림사지는 강당을 갖춘 백제식 1탑 1금당 양식으로, 이는 백제 사찰의 특징이며 강당을 배치하는 전통은 이후 고려시대까지 이어 진 다. 정림사에서 현존하는 유일한 백제시대 고유의 석탑인 5층석탑은 목탑의 구조적 특징을 보여준다. 정림사지 석탑을 비롯한 백제의 석탑 건축 기술은 이후 신라에 이어져 한국이 석탑의 나라가 되는 교두보를 제공했다.

 

관람 안내

구분 내용
운영기간 • 휴무일 연중관람 (지정휴일) 1월1일, 설날, 추석
• 하절기(3월~10월): 09:00~18:00
• 동절기(11월~2월): 09:00~17:00
입장료 • 어른 1,500원(단체: 1,200원) 청소년 900원(단체: 700원)
• 어린이 700원(단체: 500원)
• 만6세 이하, 65세 이상, 장애인, 국가유공자, 부여군민 무료
• 단체 30인 이상
주차비용 전 차량 무료
문화해설사 여부 가능
이용문의 부여시설관리공단: 041-832-2721
기타/편의 • 신용카드 이용가능
• 유모차 및 휠체어 대여 가능
• 애완동물 동반 불가

[출처: 부여군청 홈피]

 

글쓴이의 고향은 충남 논산이다. 그래서 중학교 시절 자전거를 타고 이웃 도시인 부여에 자주 왔던 기억이 있다. 부여의 여러 문화재 중 정림사지에 대한 기억은 더욱 더 뚜렷하게 다가왔다.

이번에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 답사라는 명목으로 다시 부여를 찾았는데 세월이 많이 흐른 만큼 정림사지 주변도 몰라보게 변해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띤 정림사지박물관(2006.09.29 개관)은 학창시절에는 없었던 건물이다. 또한 연지(연못)도 없었다. 두 곳의 연지는 1984년에 발굴되었다.

그리고 석조여래좌상은 보호각 없이 홀로 있었는데 어느새(1993년 7월 6일 상량식) 멋들어진 보호각에 자리 잡고 있었다. 석조여래좌상은 그 당시(중학교 시절)에는 소정방상으로 불린 것 같기도 하고….

완전히 새롭게 변한 정림사지였다.

 

정림사지박물관 주차장에서 정림사지 매표소로 향하는 길가 양쪽으로 소나무가 운치 있게 서 있고 학 조형물도 세워져 있다. 일명 오솔길을 걷는다. 그런데 「사비, 빛의 화원」이란 주제로 행사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주변에는 각종 시설물 등이 즐비했다.

 

남문에서 입장권(요금 1,500원)을 구입하고 발열체크와 안심콜을 한 후 입장했다. 넓은 초원에 행사 조형물들이 즐비하게 깔려 있고, 두 개의 연못을 지나니 「사비, 빛의 화원」이라고 쓴 사각형의 대형 조형물이 서 있다. 이어 국보 제9호 정림사지 오층석탑이 나오는데 석탑 주변으로 사각형의 대형 조형물이 여러 개 설치되어 있어서 석탑 뒤에 있는 석불좌상 보호각은 보이지가 않았다.

 

실로 오랜만에 재회하는 오층석탑이다. 부드럽고 온화한 백제의 미를 느끼게 해준다.

처음 오층석탑을 접할 때는 몰랐는데 이번에 답사 후 후기를 쓰면서 인터넷 검색을 하면서 알게 된 사실은 1층 탑신석에 당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이 백제를 평정한 공을 기리는 글이 해서(楷書)로 새겨져(大唐平百濟國碑銘) 있어서 한때 「평제탑(平濟塔)」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고 한다.

 

▣ 정림사지 5층석탑

 

사비시대 수도의 가장 중심적인 위치에 있었던 정림사!

정림사지 5층석탑을 소개합니다.

 

백제의 장인들은 기존의 목조가 가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석재를 택했다. 석탑을 표현함에 있어 목조탑을 재현하기에 그쳤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석재의 가공적 용이함을 위해 규모를 축소하고 세부 형식을 간략화하였고, 정림사지 석탑이 축조 되었다.

 

세부 구성형식이 정형화되지 못한 미륵사지 석탑에 반하여 정림사지 5층 석탑은 정돈된 형식미와 세련되고 완숙한 미를 보여준다. 또한 좁고 낮은 단층기단과 각층우주에 보이는 민흘림, 살짝 들린 옥개석 단부, 낙수면의 내림마루 등에서 목탑적인 기법을 볼 수 있지만 목조의 모방을 벗어나 창의적 변화를 시도하여 완벽한 구조미를 확립하였고, 우리나라 석탑의 시원양식으로서 그 의의가 크다.

 

▲ 정림사지 5층석탑 (출처: 정림사지박물관 홈피)

 

정림사지 5층석탑의 건립연대

 

정림사의 창건연대는 사비천도 이후부터 백제 멸망 전까지인 538~660년에 석탑으로 건립되었는지, 혹은 목탑 이후에 석탑이 건립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탑의 양식으로 보아 미륵사지 석탑에서 진일보한 석탑으로서 전형적인 모습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미륵사지 석탑보다는 다소 늦게 건립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정림사지 5층석탑의 구조

 

여러 장의 돌을 사용하여 단층으로 된 낮은 기단을 만들고 면석의 각 면에는 우주(귀퉁이 기둥돌)와 탱주(지탱하는 돌)를 하나씩 세웠습니다. 1창 탑신의 네 모퉁이에는 별도의 돌로 민흘림의 우주를 만들고 그 사이에 두 장씩 판석을 끼웠다. 탑신 2층부터 몸돌은 윗면으로 갈수록 부재가 줄어 차례로 4개, 2개, 1개의 돌로 만들어져 있다.

 

지붕돌의 아래 면에는 여러 장의 석재로 구성된 2단의 지붕받침을 두었는데, 탑신과 마찬가지로 위층으로 갈수록 석재의 수가 줄어든다.

옥개석(지붕석)은 얇고 넓으며 전각에 이르러 약간의 반전이 나타나고, 옥개받침(지붕받침)아래에는 사각형의 석재를 놓고 윗면을 비스듬히 다듬어서 간략화된 공포(公布) 형태를 재현하였다. 지붕돌의 윗면에는 한 단의 탑신받침을 놓았으며 상륜부에는 노반석을 두었다. 몸돌에 비해 지붕돌의 폭이 넓고, 작은 석재를 많이 사용하고 축조하여 외견상 목조건물과 유사하다. 안정감 있는 체감률의 격조 높은 탑이다.

 

▲ 정림사지 5층석탑 (출처: 정림사지박물관 홈피)

 

정림사지 5층석탑의 비례

 

탑과 탑을 둘러싼 건물들의 배치와 구성은 매우 정교한 수치에 의해서 구성되었다. 탑이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우리가 자세히 알지 못하는 수리적 원리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탑의 건립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지대석의 크기이다. 지대석의 크기에 의해 모든 탑은 높이와 너비가 결정된다. 정림사지 5층 석탑은 지대석의 넓이가 14척(그 당시에 주로 사용하던 단위 ‘고려척’)이며, 그 절반인 7척이 이 탑의 건립 기본 단위가 되었다.

[출처: 정림사지박물관 홈피]

 

오층석탑을 본 후 뒤쪽으로 이동해 전각 안으로 들어가 봤다. 전각 안에는 보물 제108호인 석불좌상(석조여래좌상)이 있었다.

 

▣ 정림사지 석불좌상

 

사비시대 수도의 가장 중심적인 위치에 있었던 정림사!

정림사지 석불좌상을 소개합니다.

 

정림사지에 남아 있는 석조불상으로 정림사지 오층석탑과 남북축선상에 놓여있다. 지금의 머리와 보관은 제작 당시의 것이 아니라 후대에 다시 만들어 얹은 것이며, 신체는 극심한 파괴와 마멸로 형체만 겨우 남아 있어 세부적인 양식과 수법을 알아보기 어렵지만 어깨가 밋밋하게 내려와 왜소한 모습을 보여 준다.

 

좁아진 어깨와 가슴으로 올라간 왼손의 표현으로 보아 왼손 검지손가락을 오른손으로 감싸쥔 지권인(智卷印)을 표현한 것으로 추정된다. 지권인은 비로자나불의 특징적인 손모양으로, 불법으로서 모든 것을 감싼다는 것을 상징한다.

 

대좌는 상대·중대·하대로 이루어진 8각 대좌로 불상보다 공들여 만든 흔적이 역력하다. 상대는 연꽃이 활짝 핀 모양이며, 중대의 8각 받침돌은 각 면에 큼직한 눈 모양(眼象)을 새 겼다. 하대에는 연꽃이 엎어진 모양과 안상을 3중으로 중첩되게 표현했다.

 

현재 불상이 봉안된 곳은 백제시대 정림사의 강당 자리로 이 곳에서 발견된 명문기와를 통해 이 불상은 고려시대에 절을 고쳐 지을 때 세운 본존불로 추정된다.

 

▲ 정림사지 석불좌상

 

[출처: 정림사지박물관]

 

예전에는 오층석탑과 석조여래좌상만이 정림사지를 지키고 있었는데 지금은 우측으로 정림사지박물관이 오층석탑 주변으로는 행사를 위한 시설물들로 가득 채워져 있어서 개인적으로 어수선한 느낌을 받았다. 야간에 관람을 하면 그야말로 빛의 향연으로 멋지긴 하겠지만….

 

◈ 사비, 빛의 화원

정림사지, 정림사지박물관 야간관람안내

 

▶관람 일정: 2021.10.12.(화)~11.13.(토)

▶관람 시간: 정림사지 17:00~22:00 / 정림사지박물관 17:00~21:00(박물관 입장 마감 20:30) ※월요일은 정림사지박물관 휴관

▶관람 안내:

-매주(금, 토) 사전예약제(49명 입장제한) / 네이버 검색창「사비, 빛의 화원」에서 예약 후 관람 가능

-매주(일~목) 순환식 49명 입장제한. ※코로나19 예방접종 완료자는 자율관광 가능

※행사 기간 동안 행사 일정에 따라 운영되오니 관람에 착오 없으시길 바랍니다.

▶문의: 041-832-2721. 부여군시설관리공단 사적지관리팀

[출처: 정림사지박물관 홈피]

 

정림사지는 옛 백제 고도인 부여 시가지의 중심부에 위치한 백제시대 대표적인 절터이다. 백제가 웅진에서 사비로 도읍을 옮기면서 왕궁, 관청, 주거지 등이 건설되었는데 이 즈음인 6세기에 사찰도 함께 창건되었을 것이며, 금당터의 붉게 탄 소토면으로 보아 백제 멸망 당시 화재로 인하여 이 절도 소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 당시의 절 이름은 알 수 없으나 기와에 기록된 내용을 보아 고려 현종 19년1028에 정림사라는 이름으로 중창 된 것으로 보인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에는 660년 8월 15일 당나라의 소정방이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이라 새긴 글자들이 남아있고, 조선후기 지리지인 『여지도서輿地圖書』 에 관련 기록이 보인다.

[출처: 정림사지박물관 홈피]

 

정림사지는 부여 중심부의 평지에 위치하고 있다. 정림사지는 석탑과 금당이 일직선상에 자리한 1탑 1금당의 전형적인 백제의 가람배치를 보여주는 예이다. 정림사지의 고고학적 연구결과 중문지, 금당지, 강당지, 북 · 동 · 서편의 승방지 뿐만 아니라 회랑지의 존재를 확인하였다.

 

특히, 회랑에 접속된 승방의 배치는 백제 사찰에서 보이는 독특한 특징이었다. 사지에는 8.3m 높이의 5층 석탑이 남아 있다. 정림사지오층석탑은 완벽한 균형과 비례로 안정성과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출처: 정림사지박물관 홈피]

 

석조여래좌상을 본 후 되짚어 나와 주차장에 도착했다.

답사일이 월요일이어서 아쉽게도 정림사지박물관은 구경을 못했다.

 

▼ 정림사지 사진 보기: https://blog.daum.net/joingi61/15965707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 부여 정림사지 (21.10.18)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 부여 정림사지 사진 2021년 10월 18일(월) 답사

blog.daum.net

 

관북리유적과 부소산성

 

정림사지에서 두 번째 답사지인 「관북리유적과 부소산성」으로 향했다. 정림사지박물관주차장에서 약 1km 거리 3분 정도 걸려 부소산성 주차장에 도착했다. 부소산성 주차장은 여러 곳 있다.

 

▣ 관북리유적과 부소산성

-시대: 백제시대

-지정현황: 사적 제5호 (1963.01.21 지정)

-위치: 충남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 관북리, 구교리 일원

 

◉ 관북리유적과 부소산성은?

 

관북리유적과 부소산성은 백제 사비시기(538~660) 왕궁 유적으로 부여 시가지의 북편에 위치한다. 시가지를 휘감아 도는 백마강을 굽어 보는 위치에 표고106m인 부소산이 솟아 있다. 이 산의 능선과 계곡을 가로지르며 부소산성이 위치하고, 그 남쪽 기슭엔 사비시대의 백제 왕궁터인 관북리유적이 자리잡고 있다.

 

​관북리유적과 부소산성은 1980년부터 본격적인 고고학적 조서가 진행되었다. 30년이 넘는 장기간의 계획적인 고고학적 조사 결과 대형 건물지 등의 왕궁의 주요 시설들과 정교 하게 판축된 토성이 확인되어 백제의 왕성 구조를 대부분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 사비천도 그리고 관북리유적과 부소산성​​

 

웅진(현재의 공주)은 본래 고구려의 위협으로부터 방어하기 좋은 요충지였지만 지역 자체가 협소한 자연지리적 한계를 지니고 있어 한 나라의 수도로 부족한 면이 존재했다. 그래서 새로운 수도 조성의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웅진 남쪽의 사비(현재의 부여)가 주목되었다. 이후 성왕(재위 523~554)은 538년 사비 천도를 단행하였고, 백제는 새로운 수도 사비에서 123년간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게 된다.​

 

​사비시대의 백제는 남조 양나라와의 잦은 교류로 선진적인 문화가 유입되면서 재창조 과정을 거쳐 문화적 역량이 한껏 고조되었다. 백제가 오랜 세월동안 수용하며 발전시킨 문화적 역량은 사비도성 축조를 통해 발휘되었다. 이와 관련된 유적이 바로 왕궁지인 관북리유적, 평시에는 왕궁의 후원으로 전란 시에는 마지막 방어 거점 역할을 하였던 중요한 유적이다.​

 

◉ 관북리유적과 부소산성의 세계유산적 가치

 

관북리유적과 부소산성은 사비시대 백제의 왕성 관련 유적으로 왕궁의 정전으로 추정되는 대형건물지가 관북리유적에서 발견되었다.

이 건물과 남북방향으로 일직선 위에 위치한 서복사지에서는 금동제 허리띠가 출토되었는데, 엄격한 신분제 사회에서 왕만이 소유할 수 있는 물품이므로 이 일대가 왕의 생활공간이었음을 말해준다.

 

관람 안내

구분 내용
운영기간 • 하절기(3월~10월): 09:00~18:00
• 동절기(11월~2월): 09:00~17:00
입장료 • 어른 2,000원(단체: 1,800원) 청소년 1,100원(단체: 1,000원)
• 어린이 1,000원(단체: 900원)
• 만6세 이하, 65세 이상, 장애인, 부여군민 무료
• 낙화암, 고란사 포함
• 단체 30인 이상
주차비용 전 차량 무료
문화해설사 여부 가능
이용문의 • 관광안내: 041-830-2880
• 부소산문: 041-830-2884 / 후문: 041-830-2886
• 구문: 041-830-2885 / 서문: 041-830-2887
기타/편의 • 신용카드 이용가능
• 유모차 및 휠체어 대여 가능
• 애완동물 동반 불가

[출처: 부여군청 홈피]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고란사로 향했다. 가는 길목에는 「관북리유적」이라 하여 건물터, 공방지 등이 발굴되어 안내판 등이 세워져 있다.

 

내동헌(내아), 동헌, 객사 등을 거쳐 예전의 부여박물관에 도착했다. 예전에 중학교 시설 이곳 (구)부여박물관을 제법 많이 방문한 적이 있었다. 지금은 「사비도성가상체험관, 부소갤러리, 부소 문화재 책방(2층)」으로 바꼈다는 것을 오늘 인터넷으로 확인한 후에 알았다. 새로운 국립부여박물관은 금성로 5(지번: 동남리 18-2)로 이전하여 1993.08.06일 개관하였다. 옛날 국립박물관자리에서 약 1.3km(차량으로 약 4분) 거리에 있다.

 

부소산성 구문 매표소에 도착했다. 입장권(2,000원)을 구입하고 고란사로 향했다.

고란사 1.3km, 낙화암 1.1km를 알리는 이정표가 나온다. 계속해서 보도블럭길을 따라 올라간다.

 

소조불상, 연화문수박새, 벽화편 등이 출토된 부소산성 서복사지(충남 기념물 제161호)를 지나니 부소산성 발굴조사 현장이 나온다. 좌 • 우 모두 발굴조사를 하고 있었는데 우측은 가림막으로 가려져 있지만 틈으로 현장을 볼 수가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현장에 있는 것이 목격됐다.

 

이어 연리지(連理枝)가 나오는데 이곳의 연리지는 조금 특이했다. 보통의 연리지는 각각 서로 다른 나무들이 자라다가 중간부위에서 연결이 되는데 비해 이곳의 소나무 연리지는 한 나무인데 나무에서 뻗어 나온 서로 다른 줄기가 연결된 모습이다. 아무튼 특이한 모습이었다.

 

연리지가 있는 곳에서 조금 더 가니 낙화암과 고란사 갈림길이 나온다.

먼저 낙화암 쪽(좌측)으로 내려갔다.

 

이내 충남 문화재자료 제108호인 백화정(百花亭)이 나온다.

백화정은 낙화암(타사암) 위에 있는 정자로 나당연합군의 공격으로 사비성이 함락될 때 이곳에서 목숨을 버린 궁인들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1929년에 세운 것으로 전한다.

 

암반위에 설치된 백화정에서 내려와 전망대로 향했다.

전망대에는 낙화암에 대한 설명이 적힌 안내판과 백마강에서 찍은 사진이 세워져 있다.

 

낙화암(落花岩)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0호)
 
낙화암(落花岩)은 충청남도 부여군 부소산에 있는 바위이다.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의 문화재자료 제110호로 지정되었다.
 
◉ 개요: 백제 의자왕 20년(660년) 나(羅)·당(唐) 연합군의 공격으로 백제의 수도 사비성이 함락될 때, 백제의 3천 궁녀가 이곳에서 백마강(白馬江)을 향해 몸을 던졌다는 전설에서 유래한 바위이다. 그러나 실제로 백마강(白馬江)을 향해 삼천 궁녀가 뛰어들었다고 장담할 수 없다. 낙화암은 삼천 궁녀가 다 올라갈 수 없을 만큼 좁다
 
낙화암 절벽 위에는 1929년에 궁녀들을 추모하기 위해 육각형의 《백화정》 정자를 건립하였다. 아래에는 송시열(1607-1689)의 글씨로 전하는 '낙화암'(落花岩)이라고 조각된 글씨가 새겨져 있다.
[출처: 위키백과]

 

전망대 데크에서는 백마강(白馬江. 충청남도 부여 부근을 흐르는 금강의 명칭)이 잘 보인다.

 

잠시 백마강을 구경한 후 되짚어 올라간다. 다시 나타난 삼거리에서 좌회전하여 고란사로 향했다.

 

제법 내려가니 고란사(皐蘭寺)가 나온다. 고란사도 중학교 시절에 왔던 기억이 있다. 그때는 고란초도 많이 있었고(아쉽게도 지금은 사람의 손길이 닿을 수 없는 곳에만 조금 있다고 한다.) 고란약수도 물맛이 좋았었다.

 

연등터널을 지나면 고란사(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98호) 경내이다. 법당(極樂寶殿) 앞에 「부여 고란사 목조 아미타여래 좌상 및 보살 좌상(충청남도 문화재 자료 제418호)」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종각을 지나 삼성각 좌측으로 고란약수터가 있다. 약수터 앞에는 2018년 4월 20일 촬영한 고란초 사진이 걸려 있다. 또한 「고란약수와 고란초 이야기」 안내판도 세워져 있다.

 

여행님이 건네준 고란약수 한 잔 마시고 고란사와 작별했다.

고란사에서 선착장 가는 길 쪽에 화장실과 추억의 사진관 건물이 있어서 잠시 들려봤다. 추억의 사진관에는 예전 흑백사진들이 전시되고 있었다.

 

고란사와 작별하고 되짚어 올라간다. 다시 문화재 복구 현장을 지난다.

그리고는 앞전에 왔던 길로 되짚어 내려가지 않고 좌측 길로 내려가 삼충사를 구경했다.

 

삼충사는 문화재자료 제115호로써 백제의 충신인 성충, 흥수, 계백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1957년에 세운 사당이다. 사당 안에는 세 충신의 영정이 걸려 있다. 다른 곳과는 달리 문이 개방되어 있어서 들어가 볼 수가 있었다.

 

삼충사에서 나와 사비문(泗沘門)을 통과했다. 밖으로 나오니 정문 쪽 현판에는 부소산문(扶蘇山門)이라 쓰여 있다.

이곳에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 관북리유적과 부소산성」이라고 써진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 대형 표지석 8개 모두가 똑같은 형식으로 되어 있다. 단 그곳이 어디냐에 따라 그곳 지명 만 들어갈 뿐이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설치비용도 생각해야겠지만 나름대로 그 지역의 특색을 살려 표지석을 세웠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어 제3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우수상을 받았다는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산 모양의 표지석(부소산성 숲)이 반긴다.

 

조금 더 내려가면 나오는 주차장에서 차량을 회수한 후 다음 목적지인 부여 왕릉원(구.능산리고분군)으로 향했다.

 

▼ 관북리유적과 부소산성 사진 보기: https://blog.daum.net/joingi61/15965708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 관북리유적과 부소산성 (21.10.18)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 부여 관북리유적과 부소산성 2021년 10월 18일(월) 답사

blog.daum.net

 

부여 왕릉원, 나성

 

부소산성 주차장에서 약 2.9km 거리에 5분 정도 걸려 「부여 왕릉원(구. 능산리고분군)」 주차장에 도착했다.

 

주차장 맞은편에는 숭목전(崇穆殿. 2019.09.25. 준공)이 있어 잠시 가봤지만 문이 굳게 잠겨 있었다.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구. 송산리고분군)에 있는 숭덕전(崇德殿)은 위패를 모신 사당문은 비롯 잠겨 있었지만 들어갈 수 있어서 건물은 볼 수가 있었다.

 

숭덕전(2017.09.28. 준공)은 백제국 시조 온조왕을 비롯하여 웅진백제시대(475~538)의 문주왕, 삼근왕, 동성왕, 무령왕의 위패를 모신 전당이다. 매년 백제문화제가 열리는 첫날에 웅진백제대왕 추모제가 열린다.

 

이밖에 백제 온조왕의 위패를 모시는 곳은 남한산성의 「숭렬전(崇烈殿)」이 있고, 천안시 직산읍(군서리 166)에 온조왕 사당(2015.05.07. 준공)이 있다.

  

◈ 부여 숭목전
 
백제는 온조왕이 건국한 이래 모두 31명의 왕이 통치하였던 나라이다. 도읍의 위치와 시기에 따라 한성백제, 웅진백제, 사비백제로 구분된다. 이 중 사비백제는 성왕이 도읍을 부여로 한 538년부터 660년까지이며, 마지막 왕은 의자왕이다.
숭목전은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을 비롯하여 사비백제의 성왕, 위덕왕, 혜왕, 법왕, 무왕, 의자왕의 위패를 모시고 제례를 거행하는 공간이다.
지금까지는 사비백제 왕족의 무덤인 능산리고분군(왕릉원)에서 매년 대왕제를 거행함에도 불구하고 별도의 제례공간이 마련되어 있지 않아 많은 이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이에 문화유산의 품격을 드높이며 더불어 찬란한 백제문화를 이룩한 사비백제 왕조의 덕을 기리고자 이곳에 숭목전을 건립하게 되었다.
숭목전은 문화유산관광자원개발사업으로 2016년부터 각고의 노력 끝에 2019년에 준공하였으며, 향후 매년 부여군민을 비롯한 백제의 후예가 한마음으로 모여 백제문화제 기간에 제례를 거행하고 덕을 기리고자 한다.
[출처: 현지 안내판]

 

숭목전에서 매표소 쪽으로 향하다 보면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 능산리고분군」이라고 써진 대형 표지석이 있다. 「능산리고분군」에서 「부여 왕릉원」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니 이곳 표지석 이름도 하루빨리 바꿨으면 좋겠다.

 

※참고자료

◈ 명칭 변경

공주 송산리 고분군 → 무령왕릉과 왕릉원

부여 능산리 고분군 → 부여 왕릉원

2021년 9월 9일 인터넷 기사. (17일 관보로 고시)

 

입장권(1,000원)을 구입하고(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은 무료 입장했었다.) 부여 왕릉원에 들어갔다.

 

▣ 능산리고분군

-시대: 백제시대

-지정현황: 사적 제14호 (1963.01.21 지정)

-위치: 충남 부여군 부여읍 왕릉로 61

 

◉ 능산리고분군은?​

 

능산리고분군은 사비도성 바로 밖의 동서로 이어지는 해발 121m의 능산 남사면 산록에 모두 7기의 무덤으로 이루어져 위치한다. 고분들은 사비시대 백제의 왕과 왕족들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의 무덤들은 일찍이 도굴되어 약간의 유물만 수습되었으며, 무덤들 서쪽 편에서는 절터가 발굴되어 백제금동대향로(국보 제287호) 등의 유물들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특히 동하총은 벽화가 남아 있어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풍수지리상으로 명당자리인 이곳은 능산을 주산(主山)으로 좌우에 청룡과 백호에 해당하는 능선이 감싸고 있다. 앞쪽은 능산천 주작(朱雀) 방향에 안산(案山)이 있어 장풍득수(藏風得水)의 형국이다. 또한 그 너머로 백마강이 흘러 더할 나위 없는 명당이라고 할 수 있다.

 

​​능산리고분군 History​​

 

능산리고분군은 일제강점기 때인 1915년에 고분의 존재가 알려지면서 1916년~1917년에 걸쳐 이루어진 조사는 현재 능산리고분군으로 알려진 6기의 고분(1~6호분 또는 중상총, 중하총, 서상총, 서하총, 동상총, 동하총)에 해당된다. 7호분은 1971년 보수공사 때 발견이 되었다.

 

​능산리고분군의 모형관을 짓기 위한 배수로 공사에서 여러 점의 연꽃무늬 수막새가 출토되면서 능산리사지의 조사가 시작되었다. 특히 1993년에 진행한 조사에서는 백제금동대향로(국보 제287호)가 출토되었으며, 1995년에는 목탑지 심초석 하부에서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국보 제288호)이 발견되었다. 이로 인해 사비시대 백제왕실의 무덤이라는 것을 재확인 시켜주었다.

 

◉ 능산리고분군의 세계유산적 가치

 

능산리고분군은 시신을 묻기 위하여 널길을 통해 무덤방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돌로 쌓아 만든 횡혈식석실묘(橫穴式石室墓)로 조성되어 있다. 천장을 어떤 형태로 마무리 했는지에 따라 볼트형과 평천장 구조로 나뉘고, 평천장 구조는 다시 단면의 형태에 따라 육각형과 사각형 구조로 나뉜다. 능산리고분군에는 이 세가지 형식의 고분이 모두 존재하고 있다.

 

관람 안내

구분 내용
운영기간 • 연중무휴 (설날, 추석 당일 휴무)
• 하절기(3월~10월): 09:00~18:00
• 동절기(11월~2월): 09:00~17:00
입장료 • 어른 1,000원(단체: 900원) 청소년 600원(단체: 500원)
• 어린이 400원(단체: 350원)
• 만6세 이하, 65세 이상, 장애인, 국가유공자, 부여군민 무료
• 단체 30인 이상
주차비용 전 차량 무료
문화해설사 여부 가능(인원: 10인 이상, 시간: 10:00~17:00)
이용문의 능산리고분군 매표소: 041-830-2890
기타/편의 • 신용카드 이용가능
• 유모차 대여 불가 / 휠체어 대여 가능
• 애완동물 동반 불가

[출처: 부여군청 홈피]

 

부여 왕릉원(능산리 고분군)에 있는 고분이 모두 왕릉은 아닌 것 같다.

공주에서 천도(538년)이후 관산성 전투에서 신라군에게 죽임을 당한 성왕(재위523~554)과 위덕왕(554~598), 혜왕(598~599), 법왕(599~600), 무왕(600~641), 의자왕(641~660)까지 6명의 임금이 이곳에서 절정기의 백제 예술을 창조했다.

부여 왕릉원은 멸망 후 당나라에 끌려간 의자왕과 익산 쌍릉에 부부묘를 조성한 것으로 알려진 무왕 외에 4명의 임금이 묻힌 곳으로 추정됐다.

그렇다면 왕뿐만이 아니라 왕의 가족이나 백제 귀족도 여기에 묻혔을 것이 틀림없다. 이곳에 모두 16기의 무덤이 있기에.

 

부여 왕릉원의 특징이 탐방로 따라 바닥에 대리석을 깔아 그림과 설명이 깃들여져 있었다.

 

가장 먼저 능산리 고분군 배치도가 나온다. 이어 백제 사비시대 성왕 538년~의자왕 660년의 기록이 나온다.

 

그리고는 능산리 고분군(부여 왕릉원)이 나오는데 아쉽게도 이곳은 원천적으로 봉쇄를 했다. 철 담장이 쳐져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공주의 무령왕릉과 왕릉원과 많이 비교가 됐다.

 

바닥의 대리석에는 능산리 1호분에 대한 그림과 설명이 적혀 있고, 2호분, 3~7호분에 대한 설명이 적힌 대리석이 차례로 나온다.

능산리 고분군의 7기는 철장을 두고 봐야 했다.

마지막 대리석 바닥은 백제 금동 대향로(국보 제287호) 그림이다. 400m 더 가면 발굴지가 나온다고 적혀 있다.

 

잔디를 깍은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잔디에서 심한 약품 냄새가 코를 진동한다.

고분군 언덕에서 내려간다.

 

이어 나오는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향했다. 위쪽으로는 또 다른 고분군인 서고분군이 자리하고 있다.

 

조금 올라가니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과 그의 아들 부여융을 기리는 단비와 가묘가 세워져 있다.

 

의자(義慈)는 휘(諱)로서, 그는 왕의 시호가 없다. 무왕의 맏아들로 태어나 632년(무왕33) 태자로 책봉되었다. 효성과 형제애가 지극하여 해동증자(海東曾子)라 일컬었다. 642년 친히 신라를 공격하여 미후성(獼猴城) 등 40여 성을 빼앗았고, 이어 윤충(允忠)으로 대야성(大耶城:경남 합천)을 함락시켜 성주인 품석(品釋)을 죽이는 등 신라에 큰 타격을 주었다. 이듬해에도 당항성(黨項城:남양)을 빼앗아 신라가 당(唐)나라로 가는 입조(入朝)의 길을 막는 등 국위의 만회에 힘썼다.

 

그러나 만년에는 사치와 향락에 빠져 성충(成忠) ·흥수(興首) 등 충신의 간(諫)을 듣지 않고 국정을 돌보지 않다가 660년 나 ·당(羅唐) 연합군의 침공을 맞게 되었다. 계백(階伯)의 황산벌싸움을 마지막으로 백제의 방어선이 모두 무너져 수도 사비성(泗沘城:충남 부여)이 나 ·당 연합군에 포위되자 의자왕은 태자와 함께 웅진성(熊津城:충남 공주)에 피신하였으나 끝내 항복하였다. 그는 태자 등 1만 2000여 명과 함께 소정방(蘇定方)에게 끌려 당나라에 압송되었다가 그곳에서 병사하였다.

 

백제국 의자대왕 단비에서 내려가면 1호분인 동하총의 모습을 본떠 만든 실물크기의 모형이 나온다. 내부에는 벽화가 그려져 있다.

 

모형 능산리벽화고분 앞에도 모형 고분이 또 한 기 있고 조금 더 가면 아트뮤지엄이 나오지만 우측으로 넓게 펼쳐진 능산리사지로 향했다.

 

능산리사지 뒤로는 부여 나성이 길게 늘어서 있다.

능산리사지는 백제 위덕왕 14년(567)에 부왕인 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백제 왕실 사찰이다.

1992년부터 2000년까지 6차례에 걸친 발굴을 통해 1탑 1금당의 전형적인 백제시대 사찰이었음을 확인했다.

특히 이곳에서 백제의 공예 수준을 말해주는 백제금동대향로(국보 287호)와 절이 세워진 연대를 알 수 있는 부여능산리사지석조사리감(국보 288호)이 출토되었다.

금동대향로는 출토 당시 진흙 펄에 묻혀 있었다고 한다. 실물은 국립부여박물관에 가면 볼 수 있다.

 

◈ 부여 능산리 사지(扶餘 陵山里 寺址)

부여 능산리 사지(扶餘 陵山里 寺址)는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에 있는 백제시대의 절터이다. 2001년 9월 29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434호로 지정되었다.

 
능산리 절터는 부여 능산리 고분군(사적 제14호)과 부여 나성(사적 제58호) 사이에 위치한 백제시대 절터유적으로, 1992년부터 2000년까지 6차례에 걸친 발굴조사 결과 중문, 목탑, 금당, 강당이 남북 일직선상에 배치된 이른바 일탑일금당(一塔一金堂)의 전형적인 백제 가람형식을 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1993년 이 절터 내의 공방(工房)으로 생각되는 건물터에서 '백제금동대향로(국보 제287호)'가 출토되어 백제의 높은 금속공예기술 수준과 예술 역량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이 향로와 함께 출토된 '백제창왕명사리감(국보 제288호)'에는 사리를 모신 때와 공양자 및 절이 세워진 연대를 알 수 있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매우 귀중한 유물로 평가된다.
 
사리감에 새겨진 기록으로 보아 이 절은 왕실에서 지은 국가 사찰로 왕릉으로 추정되는 능산리고분군에 축원을 빌기 위한 사찰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창건연대와 더불어 삼국시대의 역사학과 건축공학, 고고학, 미술사학의 연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출처: 위키백과]

 

드넓은 능산리사지 절터를 보노라면 과연 내 생애에 능산리사지가 복원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또한 부여 왕릉원의 무덤에서 도굴한 유적 등을 세상에 공개해서 무덤 주인이 하루빨리 알려지면 좋겠다.

백마강 건너편에 백제문화단지가 있는데 이곳에서 능산리사지 조형물을 볼 수가 있다고 한다. 아쉽게도 글쓴이는 백제문화단지를 못보고 귀경했다.

 

능산리사지에서 이제 능산리고분군 아트 뮤지엄에 들어갔다,

봉분 속에 위치한 아트 뮤지엄은 백제 사비기 왕릉군인 <부여 능산리 고분군>과 위덕왕(567년)대에 아버지 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창건한 왕실 사찰의 터 <부여 능산리 사지>, 백제의 수도 사비의 외곽 방어시설이자 도성의 안팎을 구분하는 <부여 나성>을 테마로 만들어진 ICT 뮤지엄이다.

이곳에서는 사비기 백제인들의 사후세계에 대한 염원과 장묘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기술과 예술이 융합된 다채로운 방식의 ICT 콘텐츠로 만날 수 있다.

 

아트 뮤지엄에서 다시 나성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능산리사지 옆에 병풍처럼 둘러 쌓인 성곽이 부여 나성이다.

 

▣ 나성

-시대: 삼국시대

-지정현황: 사적 제58호 (1963.01.21 지정)

-위치: 충남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 산15-1

 

◉ 나성은?​

 

한반도 고대 삼국 중 최초로 축조된 나성은 중요한 외곽방어시설로 백제의 수도 사비를 보호하기 위해 쌓은 8km의 성이다. 도시의 북단에 위치한 부소산성에서 시작하여 도시의 북쪽과 동쪽을 감싸고 있는데, 부여의 서쪽과 남쪽은 금강이 자연적인 방어벽 기능을 하였고 강의 범람을 통하여 형성된 자연 제방이 성벽의 역할을 대신하였다.

 

​나성은 방어 기능을 가질 뿐만 아니라 수도의 안과 밖을 구분하는 상징성을 아울러 가지고 있는데, 경외(京外) 매장(埋葬)의 원리에 따라 사비시대의 왕릉원인 능산리고분군이 나성의 바로 바깥에 위치한 상황을 볼 때 나성의 상징성은 두드러진다.

 

◉ 나성 History​​

 

사비는 5부(部)와 5항(巷)으로 구획된 정연한 도시 체계를 갖춘 수도를 방어하면서 그 안팎을 구분하기 위한 목적으로 나성을 쌓았다. 나성 바깥에는 청마산성, 석성산성, 가림성, 증산성 등의 산성(山城)들이 수도의 동서남북을 외곽에서 방어하는 수도방어체계를 구축하였다. 즉 이들 산성이 사비의 1차 방어선을 형성하였고, 나성이 2차 방어선, 부소산성이 최후의 보루로 고안된 방어체계를 구비한 것이다.

 

​성곽을 처음 건설한지 1,500여 년이 흐른 현재까지도 성곽의 대부분이 남아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 나성은 1991년부터 현재까지 계속하여 과학적인 발굴조사가 진행되면서 그 전모가 드러나고 있다.

 

◉ 나성의 세계유산적 가치

 

동아시아 수도 대부분은 도성을 구비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인데, 나성은 그 전모가 온전히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동아시아 도성이라는 점에서 세계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 나성은 산지와 평지를 연결하여 수도의 외곽을 둘러싸는 새로운 형태의 성곽으로 지형에 따라 특이한 축성 방식을 채용하고 있다. 즉 구릉 구간은 성벽 중심 부분은 흙을 다져 쌓아 올린 후, 성벽 바깥쪽은 돌을 쌓아 마감함으로써 성벽의 내구력을 강화했고 저습한 평지를 통과하는 구간은 지엽부설(枝葉敷設)공법과 나무 말뚝을 박아 지반을 보강하는 등 독특한 축조 공법이 적용되었다. 나성의 건설에는 중국과의 교류를 통하여 혁신적인 도시계획과 선진적인 건축기술을 수용한 후 백제화의 과정을 거쳐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로 환류 시킨 백제인들의 문명교류사적 역할이 담겨있다.

 

관람 안내

구분 내용
운영기간 연중무휴
이용문의 능산리고분군 매표소: 041-830-2890

[출처: 부여군청 홈피]

 

나성 앞에 가면 「부여 나성」, 「백제역사유적지구」,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 나성」이라고 써진 안내판과 표지석이 나란히 세워져 있다.

한반도에서 최초로 축조된 외곽성, 6km가 넘는 나성도 끊어진 부분을 하루빨리 복원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서석교를 건너 주차장에 복귀했다.

이로써 백제문화유적지구 8군데 모두 답사를 마쳤다.

 

1.공산성의 문화재 보수가 빨리 마무리되길 바라며

2.무령왕릉과 왕릉원에서 도굴해간 유품이 하루빨리 세상에 나와 이름 모르는 무덤의 주인이 나타나기를 빌며

3.미륵사지의 완벽한 부활을 꿈꾸며

4.왕궁리유적의 복원을 바라며

5.정림사지의 완벽한 복원을 기대하며

6.관북리유적과 부소산성은 지금도 발굴이 진행 중이지만 하루빨리 마무리되기를

7.부여 왕릉원도 도굴해간 유적이 하루빨리 세상에 빛을 봐서 무덤 주인이 나타나기를 바라며 능산리사지도 하루빨리 복원했으면

8.부여 나성도 끊어진 성곽은 물론 제대로 복원이 하루빨리 됐으면 좋겠다.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 8곳의 대형 표지석이 모두 획일적으로 통일시킨 것이 개인적으로 아쉬웠다. 각각의 특색을 내세워 설치했으면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부여 왕릉원과 나성 사진 보기: https://blog.daum.net/joingi61/15965709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 부여 왕릉원, 나성 (21.10.18)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 부여 왕릉원, 나성 2021년 10월 18일(월) 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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