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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도성 순성길 1] 창의문에서 흥인지문까지 1

약초2 2021. 1. 5. 19:35

[한양도성 순성길 1]

창의문(북소문)에서 흥인지문(동대문)까지 답사

2021년 1월 5일(화) 답사

 

▲ 창의문으로 올라가는 길
▲ 창의문으로 올라가기 직전 공터에 정종수 경사 순직비와 흉상이 세워져 있다.

‘김신조 사건 순직’ 정종수 순경 흉상 세웠다

2017년 6월 5일 기사

 

이른바 ‘김신조 사건’으로 불리는 1968년 청와대 습격사건 때 북한 무장공비를 막다가 목숨을 잃은 경찰관의 추모 흉상이 50년 만에 세워졌다.

서울지방경찰청은 5일 오전 서울 청운동 자하문고개 현충시설에서 고 정종수 경사(당시 순경)의 흉상 제막식을 열었다. 흉상은 한국기초조형학회 학회장인 류경원 충북대 교수가 제작했다. 흉상 전면에는 공적 요지와 함께 국가 수호를 위한 경찰의 활약을 현대적인 이미지로 표현한 부조상이 새겨졌다. 서울경찰청과 서울시 재향경우회, 서울북부보훈지청이 공동으로 주관했다.

이날 제막식에는 정 경사의 장남 정창한(61)씨 등 3남2녀를 비롯한 유족 8명이 참석했다. 김정훈 서울경찰청장은 “국가와 국민을 위해 희생한 경찰관이 합당한 예우를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1935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난 정 경사는 종로경찰서 수사과에서 근무하던 68년 1월21일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침투한 북한 124부대원 31명을 막다가 숨졌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인정해 같은 해 2월 1계급 특진과 함께 화랑무공훈장을 추서했다. 그때 함께 순직한 최규식 종로경찰서장은 총경에서 경무관으로 추대되고 69년 청와대 인근에 동상도 세워졌으나 정 경사는 하위직이란 이유로 대상에서 누락됐다.

 

▲ 최규식 경무관 동상

◉ 사건 개요 (1.21사태 또는 김신조 사건으로도 불리고 있음)

 

1968년 1월 21일 일요일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침투한 북한의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 124부대 무장공비 31명과 서울 세검정고개에서 교전하다가 당시 종로경찰서장이던 최규식 총경은 당일, 정종수 순경은 1월 29일 월요일 순직. 이 사건을 계기로 향토예비군을 창설. 무장공비 소탕 작전에서 우리 군 33명도 전사.

 

「게릴라전 특수훈련을 받은 31명은 1968년 1월 13일 북한군 정찰국장 김정태(金正泰)에게 청와대 습격에 관한 구체적인 작전 지시를 받고 18일 자정을 기해 휴전선 군사분계선을 돌파하였다.

 

서부 전선의 미군 담당 군사지역에 잠입하여 하룻밤을 숙영(宿營), 19일 밤 8시 30분경 임진강의 얼음판을 횡단, 당시 경기도 파주군 법원리의 삼봉산(三峰山)에서 2일째 숙영을 한 다음, 20일 앵무봉을 통과하여 비봉·승가사(僧伽寺)로 이어지는 산악길을 타고 이날 밤 10시 서울시내 세검동 파출소 관할 자하문 초소에 이르렀다.

 

자하문 초소에서 경찰관의 첫 검문을 받게 되자, 일당은 “방첩대원들이다.”, “신분증은 볼 필요가 없다.”, “우리 부대로 가자.” 등의 위협적인 언사를 서슴지 않으며 계속 행진하였다. 약 400여m를 더 행진했을 무렵 연락을 받고 출동한 경찰 병력과 첫 접전이 벌어졌다.

 

게릴라들이 먼저 자동소총을 쏘며 수류탄을 투척하였다. 현장을 지휘하던 종로경찰서장 최규식(崔圭植) 총경이 총탄에 맞아 병원으로 이송하였으나 전사하고, 경찰관 2명이 중상을 입었다.

 

이때부터 게릴라들은 현장을 지나가는 버스 안에 수류탄 1발을 투척, 승객에게 부상을 입히는가 하면 자동소총에 실탄과 수류탄을 몸에 지니고 뿔뿔이 흩어져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 서대문구 홍제동 민가에서는 한 시민이 게릴라와 격투를 벌이다가 총격으로 사망하는 등 이날 밤 민간인 5명이 살해되었다.

 

군경합동수색진은 일당 가운데 김신조(金新朝)를 발견, 생포하는 한편, 이들에 대한 소탕전에서 그날 밤 게릴라 5명을 사살한 데 이어, 경기도 일원에 걸쳐 군경합동수색전을 전개, 31일까지 28명을 사살하였다. 나머지 1명은 도주한 것으로 간주되어 작전은 종료되었다.

 

 

 

▲ 창의문으로 올라가기 직전 좌측에 청계천 발원지 표석이 세워져 있다.
▲ 창의문 우측 계단으로 올라가면 북악산 탐방로가 나온다.
▲ 그러나 글쓴이는 2020년 11월 1일에 개방된 신설 탐방로를 이용하기 위해 창의문을 통과했다.
▲ 창의문(북소문) 내부 모습
▲ 창의문(북소문)

서울 한양도성 [사적 제10호]

 

한양도성은 조선왕조 도읍지인 한성부의 도심의 경계를 표시하고 그 권위를 드러내며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축조된 성이다.

태조 5년(1396), 백악(북악산)·낙타(낙산)·목멱(남산)·인왕의 내사산(內四山) 능선을 따라 축조한 이후 여러 차례 개축하였다. 평균 높이 약 5~8m, 전체 길이 약 18.6km에 이르는 한양도성은 현존하는 전 세계의 도성 중 가장 오랫동안(1396~1910, 514년) 도성 기능을 수행하였다.

 

한양도성에는 4대문과 4소문을 두었다.

4대문은 북쪽에서부터 시계방향으로 숙정문·흥인지문·숭례문·돈의문이며 4소문은 서북에서부터 시계방향으로 창의문·혜화문·광희문·소의문이다. 이 중 돈의문과 소의문은 멸실되었다. 또한 도성 밖으로 물길을 잇기 위해 흥인지문 남쪽에 오간수문과 이간수문을 두었다.

 

한양도성은 순성길을 따라 하루에 돌아볼 수 있지만, 내사산을 중심으로 한 백악·낙산·남산(목멱산)·인왕산 구간과 도성이 멸실된 흥인지문·숭례문 구간 등 6구간으로 나누어 걷기를 추천한다.

[출처: 서울시 서울한양도성 홈피 http://seoulcitywall.seoul.go.kr/main/index.do ]

 

백악 구간

 

▶구간 : 창의문~혜화문

▶거리 : 4.7km

▶소요시간 : 약 3시간

 

창의문에서 백악을 넘어 혜화문에 이르는 구간이다. 백악(북악산, 342m)은 옛 서울의 주산으로 내사산 중 가장 높다. 공극산(拱極山), 면악(面岳)이라고도 하였으며 산세가 ‘반쯤 핀 모란꽃’에 비유될 만큼 아름답다. 한양도성은 백악을 기점으로 축조되었다. 1968년 1·21 사태 이후 40년 가까이 출입이 제한되다가 2007년부터 시민에게 개방되었다.

 

■ 창의문-창의문 안내소-백악 돌고래 쉼터-백악 쉼터-백악마루-1·21 사태 소나무-청운대-암문-백악 곡성-백악 촛대바위-숙정문-말바위 안내소-우수조망명소-와룡공원-암문-서울과학고등학교-경신고등학교-혜성교회-두산빌라-혜화동 전시안내센터(옛 서울시장공관)-혜화문

 

■ 탐방시간

 

구분

겨울(4개월)

(11~2월)

봄, 가을(4개월)

(3~4월/9~10월)

여름(4개월)

(5~8월)

개방시간

09:00~17:00

(15시까지 입산)

07:00~18:00

(16시까지 입산)

07:00~19:00

(17시까지 입산)

 

■ 탐방 절차 간소화 → 신분확인 절차 생략

■ 365일 연중무휴

[출처: 서울시 서울한양도성 홈피 http://seoulcitywall.seoul.go.kr/main/index.do ]

 

 

▲ 창의문을 통과하여 1번 출입문으로 향했다
▲ 1번 출입문으로 가는 도중에 갈림길이 많이 나오지만 종이 이정표가 전봇대에 붙어 있듯이 자세히 좌우를 살피면 쉽게 갈 수 있다.
▲ 이곳 삼거리에서는 우측으로 올라간다.
▲ 드디어 도착한 1번 출입문 입구. 창의문에서 10분 걸렸다.
▲ 1번 출입문으로 한양도성(북악산 구간)을 올랐다.
▲ 새벽에 눈이 조금 와서 탐방로 바닥에 눈이 조금 깔려 있었으나 걷는데 지장이 없었다.
예전에 경계를 서던 곳인데 막아두지 않아서 가깝게 가서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