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평산행(둘레길 등)/[강화]나들길

[강화나들길 15코스] 고려궁 성곽길 (후기)

약초2 2019. 6. 26. 12:41

강화나들길 열여섯 번째 이야기

 

15코스 고려궁 성곽길

짜집기 3번에 걸쳐 고려궁 성곽길을 가다!

 

1.날짜: 2019년 6월 11일(화) 외 2일

2.답사코스:

▶1차: 강화대로→견자산→동문→고려궁지 (2019.01.08)

▶2차: 용흥궁→고려궁지→북문→용흥궁 (2019.04.16)

▶3차: 남문→남장대→서문→북문→남문→공영주차장 (2019.06.11)

 

3.날씨: 3일 모두 맑고 쾌청함

 

4.답사시간

▶1차: 강화대로→견자산→동문→고려궁지 (2019.01.08)

1코스, 5코스 분기점-(0:09)-견자산-(0:05)-동문-(0:14)-고려궁지

※강화대로(1코스, 5코스 분기점)에서 고려궁지까지 28분 걸렸다.

 

▶2차: 용흥궁→고려궁지→북문→용흥궁 (2019.04.16)

-10:09 고려궁지 발

-10:34 1코스 분기점

-10:44 북문

※고려궁지에서 북문까지 35분 걸렸다.

 

▶3차: 남문→남장대→서문→북문→남문→공영주차장 (2019.06.11)

-10:27 남문 발(답사 시작)

-11:07 남장대 착 / -11:25 발

-11:29 암문

-11:55 연무당 옛터

-11:59 서문

-12:15 정수장 입구

-12:21 은수물 갈림길

-12:23 갈림길 착 / -12:43 발

-12:47 삼각점

-12:58 북문 착(답사 종료)

-이후 30분 걸려 공영주차장 도착하여 차량회수 후 귀가.

※ 휴식 포함하여 2시간 31분 걸렸는데 휴식 제외하면 1시간 53분 걸렸다.

 

※[전체] 2시간 56분, 휴식 포함하면 3시간 34분 걸렸다.

 

5. 답사 후기

 

강화나들길 제15코스 고려궁 성곽길

동문 ~ 남문

 

거리: 11km / 소요시간: 4시간 / 난이도: 상

동문-(2.5km)-북문-(3.4km)-국화저수지-(2.4km)-남장대-(2.7km)-남문

 


15코스(고려궁 성곽길) 개념도 (출처: 강화나들길 홈피)


[코스정보]

 

고려가 몽고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1232년 강화도로 수도를 옮겨 줄기차게 항전했던 39년간의 궁궐과 관아, 민가 등을 에워싸고 있었던 강화산성을 따라 오르락내리락 하며 동문(망한루 望漢樓) ․ 북문(진송루 鎭松樓) ․ 서문(첨화루 瞻華樓) ․ 남문(안파루 晏波樓) 등 네 개의 문을 차례로 만나는 코스이다.

오를 때는 하늘과 맞닿은 산성길 따라 고려시대로, 벗어나면 조선시대로, 다시 오를 때는 고려시대로 송림이 뿜어내는 향기에 머리에서부터 폐 깊숙이까지 상쾌함도 느끼며 걷는 고려와 조선의 길이다.

 

산성길 고갯마루를 넘으며 시름 하나 벗어놓고, 한 구비 돌아서며 마음 하나 비우며 걷는 장엄하고 도도한 길이다.

황금색으로 익어가는 조산평야의 반듯한 논과 멀리 보이는 마을이 더할 수 없이 평화로운 한 폭의 풍경화다. 스케치북에 누구나 똑같이 그릴 수밖에 없는 전형적인 강화의 모습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

비나 눈이 온 뒤에는 미끄러울 수도 있다. 특히 겨울철에는 바람도 불고 미끄러워 옷차림과 스틱 등 장비를 잘 갖추어야 한다.

 

 

이런저런 이유로 한동안 답사를 못했던 강화나들길,

이제야 다시 찾았다. 이번 코스는 제15코스 고려궁 성곽길인데 나들길 열여섯 번째 답사이다.

 

고려궁 성곽길은 남문에서 시작해서 동문에서 끝나는 코스이지만 글쓴이는 뒤죽박죽(15코스가 타 코스와 겹치는 구간이 많아서 겹치는 구간을 또 가기 싫어서) 세 번에 걸쳐서 고려궁 성곽길을 답사했다.

 

▶1차: 강화대로→견자산→동문→고려궁지 (2019.01.08)

1코스(심도역사 문화길)를 답사할 때 했던 구간이다.

 

버스터미널에서 삼거리(버스터미널에서 약 530m 거리, 7분)까지는 1코스와 5코스(고비고개길)가 겹치는 구간이다. 이곳에 1코스 표지목(1-04)과 5코스(5-03) 표지목이 세워져 있다. 이곳에서 5코스는 남문 방향으로, 1코스는 동문 방향으로 진행한다.

 

이곳 삼거리에서 강화나들길 지도에는 좌회전하여 우체국 방향으로 표시가 되어 있는데 표지기(리본)는 직진방향인 산성 길로 안내하고 있다. 그래서 표지기 방향으로 진행했다.

 

볼록하게 튀어나온 강화산성 흙길을 따라 올라가는데 벌목이 되어 있어서 편하게 올라간다. 시야도 시원하게 터져 강화 읍내를 바라보며 완만하게 9분을 올라가니 견자산 정상이다. 정상에는 아무런 표기가 없고 깊이가 얕은 구덩이가 파져 있다. 이곳에 1코스 표지목이 세워져 있는데 누군가가 표지목 중간에 노란색으로 見子山이라고 써 놓았다. 조금 떨어진 좌측에는 나무에 가려져 있는 현충탑이 보인다.

 

이제 견자산에서 내려간다. 5분 정도 내려가니 2차로 도로 건너편에 강화산성 동문이 나타난다.


강화산성의 4개의 대문 중 가장 늦게(2003년) 복원된 동문은 도성(내부) 쪽 현판에는 망한루(望漢樓), 도성 바깥쪽에는 강도동문(江都東門)이라고 쓰여 있다. 망한루의 현판이 도성 안쪽에 위치해 있다는 것이 의아했다.

그런데 나중에 4대문을 다 답사한 결과 門樓(문루)에 걸어놓는 懸板(현판)이 일정한 원칙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강화산성 4대문 비교표


 

도성

바깥 쪽

도성

안 쪽

특기사항

동문

(망한루 望漢樓)

강도동문

江都東門

망한루

望漢樓

 

서문

(첨화루 瞻華樓)

첨화루

瞻華樓

현판에 낙관이 없음

남문

(안파루 晏波樓)

강도남문

江都南門

안파루

晏波樓

江都南門 (김종필 글씨)

북문

(진송루 鎭松樓)

진송루

鎭松樓

글씨가 좌에서 우로 되어 있고,

낙관도 없다.

 

동문은(4대문 모두) 울타리가 없어 사람들이 자유롭게 성루 밑을 지나갈 수 있다.

 

▶ 강화산성 동문

강화읍을 에워싸고 있는 산성의 동문이다. 북쪽의 송악산, 동쪽의 견자산, 남쪽의 남산, 서쪽의 진고개로 연결된다. 고려시대 몽골의 침입에 대항하기 위해 강화로 수도를 옮겼을 때 처음 성을 쌓았다.

조선 전기에 개축하였으며 1637년 병자호란 때 청군에 의해 파괴되었다.

조선 후기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들어왔고, 강화도조약을 맺을 때 일본군이 들어오는 등 역사적 사건의 현장이었다.

2003년에 복원하였다. 문루의 이름은 망한루(望漢樓)이다.

[출처: 강화나들길 홈피(www.nadeulgil.org/)]

 

동문에서 우측으로 강화중학교 담장을 끼고 한동안 진행하다 작별하고 좌측 길로 들어선다.

제법 오래된 듯한 큰 나무(나들길 지도에는 회나무로 표기되어 있는데 글쓴이는 나무 이름을 모르겠다)를 지나면 좌측으로 강화초등학교가 나오고, 우측으로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 건물이 나온다. 그리곤 고려궁지가 나온다.

 

고려궁지(사적 133호)는 15코스(고려궁 성곽길) 때 보기로 하고,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 건물 앞에서 산 쪽으로 직진했다.(알바 시작)

이후 얼마간 진행하니 느티나무 쉼터가 나오는데 이곳에 표지목이 세워져 있다. 그런데 헉! 1코스가 아니고 15코스 표지목이다.

그때서야 과외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되짚어 내려갔다.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 건물 앞에 원위치하여 우측의 강화성당을 거쳐 내려간다. 도로 따라 내려가는데 강화초등학교 담장에 「그땐 그랬지!」라는 유익한 안내판이 많이 걸려 있다.

 

이어 용흥공원 사거리에서 공영주차장을 가로질러 용흥궁에 도착했다.

 

용흥궁은 강화도령으로 불렸던 조선 철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 14~19세까지 살았던 곳으로 원래는 초가집이었으나 왕이 되어 떠난 후 강화유수 정기세가 현재와 같은 기와집을 세우고 용흥궁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용흥궁에서 나와 바로 이웃하고 있는 대한성공회 강화성당으로 올라갔다.

 

성공회 강화성당 (聖公會 江華聖堂)

 

문화재 지정: 사적 제424호

건립시기: 1900년

성격: 성공회 성당

면적: 6,452㎡

소재지: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250

요약: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에 있는 대한성공회 성당.

 

▶ 내용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11호. 대한성공회의 초대 주교인 코프(Corfe, C. J.)에 의하여 1900년(광무 4)에 건립되었다.

 

대한성공회의 역사는 1889년 코프가 초대 한국 주교로 영국에서 서품을 받음으로써 시작되는데, 그 당시 우리나라에는 한 사람의 신자도 없었고, 한국인에게 처음 세례를 베푼 것은 주교 축성이 있은 지 7년 뒤인 1896년 6월 13일 강화에서였다.

 

대한성공회에서는 이러한 인연으로 강화에 제일 먼저 성당을 건립한 것인데, 대한성공회에서는 가장 오래된 역사를 지니게 되었고, 현존하는 한옥 교회건물로서도 가장 오래된 것이다. 서유럽의 바실리카(Basilica)양식과 동양의 불교사찰양식을 과감하게 조합시켜 건립하였다.

 

교회의 내부공간은 바실리카양식을 따랐고, 외관 및 외부공간은 불교사찰의 형태를 따랐다. 목재는 압록강에서 운반해서 사용하였으며, 경복궁 공사에 참여했던 대궐 목수가 건축을 맡았다.

 

경사지의 대지를 축성하여 입구 계단, 외삼문ㆍ내삼문ㆍ성당ㆍ사제관을 동남향 종축으로 배치한 외부공간의 구성이 불교사찰의 구릉지가람(丘陵地伽藍)과 비슷하며, 성당 앞마당에는 큰 보리수나무 두 그루가 서 있다.

 

외삼문 솟을대문은 팔작지붕으로 담장과 연결되어 있으며, 동쪽 칸에는 초대 사제(司祭)의 묘비가 서 있다. 내삼문은 평대문에 역시 팔작지붕이고, 서쪽 칸은 종각으로 쓰이고 있으며, 성당은 정면 4칸, 측면 10칸의 바실리카식 평면구성이다.

 

성당 내외부에는 서양식 장식이 거의 없는 순수한 한식 목조건축이면서도 교회기능에 충실한 내부공간을 연출함으로써, 초기 성공회 선교사들의 토착화 의지가 나타나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기독교 역사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는 성당건물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성공회 강화성당을 구경하고 주차장으로 내려온 후 다시 되짚어 올라간다. 좌측에 강화성당, 우측에 강화초등학교를 지나 고려궁지 입구 삼거리에서 좌측으로 진행한다. (이후는 1코스)

 

▶2차: 용흥궁→고려궁지→북문→용흥궁 (2019.04.16)

15코스 고려궁 성곽길의 2차 답사는 벚꽃 철에 답사했다.

그래서 강화도의 벚꽃 명소인 고려궁지~북문 사이의 벚꽃길강남영상미디어고등학교를 답사했다.

 

고려궁지 앞 무료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는 고려궁지를 답사했다.

고려궁지를 23분(09:46~10:09) 답사한 후(고려궁지 보충설명은 6. 참고자료 고려궁지에서 확인) 고려궁 성곽길 답사에 나섰다.

 

고려궁지에서 완만하게 6분을 올라가니 느티나무 쉼터가 나온다. 바로 옆에는 「북산도시숲」 대형 안내판과 발밤이 말뚝 표지판(15-37. 시점 9.4km)이 세워져 있다.

 

다시 오름길을 올라가는데 세월은 흘러 이제 나뭇가지에 새순이 돋아나서 초록색의 잎이 반긴다. 나무계단을 올라가니 삼거리가 나오는데 이곳에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좌측으로 가면 북문, 직진하면 북장대 가는 길이다.

지나온 고려궁지까지 500m, 앞으로 가야 할 북장대까지는 500m 거리이다.

 

직진하여 북장대 방향으로 완만하게 올라간다. 다시 나무계단이 나온다. 그리곤 이내 안내판[강화읍 생태체험숲 안내(⑧바위정원)]이 세워져 있는 쉼터가 나온다. 이곳 역시 삼거리인데 우측으로 가야 북장대 가는 길이라 우측으로 진행했다.

 

지압로를 지나니 막혔던 시야가 뻥 뚫리면서 산성이 나타났다. 이후 산성길을 따라 조금 내려가니 사각정자가 나오고, 이후 산성길은 완만한 오름길이 이어지면서 국가지점번호(다사 1098 7325)가 세워져 있는 봉우리에 올라섰다.

 

2~3분 후 다시 국가지점번호(다사 1091 7334)가 나온다. 강화산성은 S라인을 이루면서 이어지고 있다.

 

드디어 1코스 분기점(우측은 오읍약수터로 가는 길)에 도착했다.

고려궁지에서 25분 걸렸다. 이후 북문까지는 1코스 때 답사를 했지만 어프로치 때문에 북문까지 가야하기에 이제 북문을 향해 출발했다.

 

1코스 분기점에서 3분 정도 완만하게 올라가면 넓은 공터가 나오는데 이곳에 강화나들길 1코스 표지판과 15코스 표지목이 세워져 있다. 이곳부터는 강화산성이 북문을 지나 군부대(?) 가기 전까지 복원되어 있다.

 

이제 온전한 강화산성을 따라 경치도 즐기면서 내려간다. 1코스 분기점에서 10분 걸려 북문에 도착했다.

 

북문(진송루(鎭松樓))은 1977년에 복원했다. 화장실 건물과 포토존(심도역사문화길), 각종 안내판 등이 세워져 있다.

이곳부터 고려궁지까지가 강화에서 자랑하는 북문벚꽃길이다.

북문벚꽃길은 비록 거리를 짧아도 제법 운치가 있는 벚꽃길이다.

 

▶3차: 남문→남장대→서문→북문→남문→공영주차장 (2019.06.11)

이제 고려궁성곽길의 마지막 코스로 남문에서 북문 사이의 구간이 남았는데 고민 끝에 북문에서 시작하지 않고 남문에서 시작했다.

남문 부근의 공영주차장에서 시작해서 원점회귀가 가능해서 남문에서 시작한 것이다.

 

공영주차장에서 주차를 하고는 남문에 도착했다.

 

▶ 강화산성 남문

강화산성은 고려 고종 때 몽골의 침입으로 강화로 천도 하였을 때 처음 성을 쌓았다. 이 성이 병자호란 때 파손되자 숙종 때 보수하면서 현재의 규모로 확장하였다. 1955년 무너진 것을 1975년 강화지역 국방유적지 정화사업 때 복원하였다.

바깥쪽에는 강도남문(江都南門. 당시 국무총리였던 김종필씨의 글씨)이라고 쓴 편액이, 안쪽에는 안파루(晏波樓)라고 쓴 편액이 걸려있다.

[출처: 강화나들길 홈피(www.nadeulgil.org/)]



강화산성 남문


나들길은 남문에서 도로를 따라 가다가 선화골약수터를 거쳐 산성에 오른 후 다시 청하동약수터와 암문을 거쳐 빙 돌아서 남장대에 오른 후 산성을 버리고 국화저수지를 거쳐 서문으로 이어지게 되어 있는데(서문 이후로는 산성길로 이어짐), 글쓴이는 오로지 성곽길을 따라 답사했다.

 

남문에서 성곽따라 오르니 이내 조망이 터지는데 화창한 날씨 덕에 좋은 조망을 즐기면서 완만하게 올라간다.

남문에서 30분 걸려 최고의 전망대인 남장대에 도착했다. 남장대는 14코스 때 올라오고 이번이 두 번째인데 앞전에도 날씨가 좋아 조망이 훌륭했는데 오늘은 날씨가 앞전보다도 더욱 좋아서 꽤 멀리 떨어져 있는 산도 보였다. 북한산도 멋지게 보였다.

 

▶ 남장대

강화산성 남쪽 정상부에 있는 남장대는 조선시대 서해안 방어를 담당하던 진무영에 속한 군사시설로 감시와 지휘소 역할을 담당했던 곳이다.

1866년 병인양요 때 허물어진 것을 2010년 복원했다.

남장대에 오르면 사방으로 시야가 탁 트여 강화읍은 물론 멀리 영종도 신도시 그리고 조산평이 한눈에 들어온다. 고려 고종 때 쌓은 강화산성은 이후 여러 차례의 파괴와 개축을 거쳐 1711년 조선 숙종 때 약 7.1km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출처: 강화나들길 홈피(www.nadeulgil.org/)]

 

남장대에서 18분간 쉬다가 다시 출발했다. 역시 산성길로 진행했다.

4분 걸려 암문을 지나니 이제 아직 복원되지 않은 산성길로 급한 내리막을 내려가면 서문이 가까워지면서 복원한 산성이 나온다.

 

이내 연무당 옛터가 나온다.

연무당은 1876년 일본의 강압으로 부산과 인천. 원산까지 개항을 하게 된 강화도 조약이 체결된 곳이다.



강화산성 서문 근처 모습


연무당 옛터에서 도로를 건너면 서문이 나온다.

 

▶ 강화산성 서문

강화산성 서문은 강화읍 관청리와 국화리 경계에 있으며 성문 안쪽에 연무당 옛터를 알리는 비석이 있다. 1977년대 강화지역 국방유적지 정화사업을 하여 복구가 시작되었고, 2011년 현재 북쪽과 남쪽으로 연결되는 석성이 모두 복원되었다.

바깥쪽에 첨화루(瞻華樓)라고 쓴 편액이 걸려있다.

[출처: 강화나들길 홈피(www.nadeulgil.org/)]

 

서문에서 조금 올라가면 정수장 철조망이 나오고 이후 철조망이 끝나면서 계단을 내려가면 정수장 앞 도로가 나온다. 서문에서 정수장 입구까지 16분 걸렸다.



정수장 입구


잠시 1차로 도로를 걷다가 이내 숲으로 들어간다. 이곳에 강화나들길 이정표와 발밤이 말뚝 표지판(15-29. 종점 3.3km, 시점 7km)이 세워져 있다.

 

강화산성이 자연스럽게 방화선 역할을 하는 구간을 지나간다. 정수장 입구에서 6분을 진행하니 은수물 갈림길이 나온다. 이제는 1코스와 겹치는 구간이라 실질적으로 15코스 고려궁 성곽길을 모두 답사하게 되었는데 결국 남문의 공영주차장에 주차되어 있는 차량을 회수해야 하기에 북문까지 가기로 했다.

 

은수물 갈림길에서 2분 정도 진행하면 능선(산성)길과 허리길로 갈 수 있는 갈림길이 나오는데 산성길로 진행했다.

산성길로 4분을 진행하니 삼각점이 나온다. 삼각점이 박혀 있는 곳에서 조금 더 가야 제일 높은 곳이다.

 

삼각점과 가장 높은 곳을 지나 평평한 산성을 조금 진행하니 산성길을 막혀 있고 길은 우측 산허리길로 이어지고 있다.

산성길로 해서 북문을 가려고 했으나 도저히 길이 안 보여서 할 수 없이 정상적인 나들길로 진행하면서 능선 쪽을 바라보니 철조망이 보이고 건물도 보인다. 아마 군부대가 있는 것 같다.

 

결국 얼마 걸리지 않아 북문에 도착했다.

 

▶ 강화산성 북문

강화읍을 에워싸고 있는 산성의 북문이다.

고려가 개경으로 환도할 때 몽골의 요구로 헐리고, 조선 전기에 강화산성을 다시 쌓았으나 1637년 병자호란 때 청군에 의해 파괴당하였다. 숙종 때 성을 보수하면서 남산까지 포함해 넓혔다.

문루의 이름은 진송루(鎭松樓)이다.

[출처: 강화나들길 홈피(www.nadeulgil.org/)]

 

이후 30분 걸려 공영주차장에 도착하여 차량회수 후 귀가했다.



강화산성 북문



6. 참고자료

 

고려궁지(사적 제133호)

 

유수부 동헌(인천 유형문화재 제25호), 이방청(인천 유형문화재 제26호), 강화 동종, 외규장각(2003년 복원) 건물이 있는 고려궁지는 1964년 사적 제133호로 지정되었다.

이밖에 약 400년 된 느티나무(수고 20m, 나무둘레 4.3m)와 416년 된 회화나무(수고 20m, 나무둘레 6m)가 있다.

 

강화 고려궁지(江華 高麗宮址)

사적 133호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북문길 42

 

고려가 대몽항쟁을 위해 고종 19년(1232)에 도읍을 개성에서 강화로 옮긴 후 궁궐을 건립하고 39년간 사용하였으나, 몽골과 화친하여 환도(1270년)할 때 몽골의 요구로 궁궐과 성곽 등을 모두 파괴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왕이 행차 시에 머무는 행궁 외에도 유수부 동헌, 이방청, 외규장각, 장녕전, 만녕전 등을 건립하였으나 이 또한 병자호란과 병인양요 때 대부분 소실되었다.

1964년에 사적 제133호롤 지정되었고, 1977년 강화 전적지정화사업으로 보수 정비되었다.

현재 이곳에는 조선시대 유수부 동헌과 이방청, 외규장각(2003년 복원) 등이 남아 있다.[출처: 현지 안내문]

 

강화산성 [江華山城](사적 132호)

 

고려와 대몽항쟁을 위해 고종 19년(1232년)에 도읍을 강화로 옮기고 궁궐을 지을 때 도성도 함께 쌓았는데 개성성곽과 비슷하게 내성, 중성, 외성으로 이루어졌으며 1232년부터 축조되었다.

외성은 강화 동쪽 해협을 따라 1만 1,232m를 쌓았는데 고려는 1270년 다시 개경으로 천도한 후 몽골의 요청으로 헐어버렸다. 이중 내성에 해당하는 것이 지금의 강화산성이다. 원래는 흙으로 쌓았으나 숙종3년(1677년) 강화유수 허질이 대대적인 개축을 하면서 돌성으로 쌓으며 현재와 같은 석성을 이루었다.

 

성 둘레는 7,122m이며 4개의 대문 4개소의 암문 2개소의 수문, 2개소의 성문장청이 있었다. 동문은 망한루, 서문은 첨화루, 남문은 안파루, 북문은 진송루가 4대문 그것이다.

종목: 사적 제132호

지정(등록)일: 1964년 6월 10일

소유자: 국유, 공유, 사유

관리자: 강화군

소재지: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국화리 산 3번지 일원

시대: 고려시대

크기: 면적 784,170㎢

명칭: 성곽

 

강화읍을 에워싸고 있는 고려시대의 산성이다.

 

몽골의 침입으로 백성과 국토가 수난을 당하자, 당시 실권자인 최우는 1232년 강화도로 수도를 옮겼다. 왕궁과 성·관아 시설은 1234년 본격적인 공사가 시작되었다. 이 때 개경의 궁궐과 비슷하게 지어 산의 이름도 송악이라 지었다.

 

성은 흙으로 쌓았고, 내성·중성·외성으로 이루어져 있고, 내성은 주위 약 1,200m로 지금의 강화성이다. 중성은 내성을 지키기 위해 쌓았으며, 외성은 1233년 강화 동쪽해안을 따라 쌓았다. 이 외성은 몽골군이 바다를 건너 공격하지 못하게 한 가장 중요한 방어시설이자, 정부가 39년간 육지로부터 물자를 지원받았던 곳이기도 하다.

 

고려 원종 11년(1270) 개경으로 수도를 다시 옮기면서 몽골과 강화조약의 조건으로 성을 모두 헐게 되었다. 조선 전기에 내성이었던 강화성을 축소하여 다시 지었다. 1637년 병자호란 때 청군에 의해 다시 파괴당하였고, 숙종 3년(1677)에 성을 보수하면서 모두 돌로 쌓고 넓혀지었다.

 

남문인 안파루, 북문인 진송루, 서문인 첨화루와 동문인 망한루가 남아있으며, 비밀통로인 암문 4개 그리고 수문이 2개 남아있다. 높은 곳에서 망을 보기 위한 장대와 성위에서 몸을 감추기 위한 여장 등의 방어시설도 갖추고 있었으나 여장은 모두 무너졌다. 현재 성의 동쪽 부분은 없어졌으나, 남북쪽 산자락은 잘 보존되어 있다.

 

조선 후기 병인양요·신미양요와 일본 침략에 의한 강화조약을 체결한 수많은 외세침략의 역사적인 현장이다.

 

[강화산성 보충설명]

 

강화는 삼국시대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군사 요충지로서 주목받았다. 섬 전체가 하나의 요새다. 김포에서 강화대교를 건너 왼쪽 강화역사관과 맞붙은 갑곶진에서 용진진을 지나 오두돈대·강화외성 등 100km 해안선을 따라 구축된 5개의 진과 7개의 보, 그리고 53개의 돈대, 12곳의 성곽 등 관광유적이 널려있다.

 

그 중심에 강화산성이 자리 잡고 있다. 이 산성은 몽고의 침입으로 고려가 서울을 개경에서 강화로 천도(1232년 6월)하면서 축성한 내성·중성·외성 중 내성에 해당된다.

 

초기 내성은 1.2km의 토석잡축성으로 쌓았다. 내성 안에는 궁궐과 관청을 건립하고 그 규모나 배치도 개경을 옮긴 듯 했다. 즉 강화 북산을 개성의 송악으로 바꾸고 신궁을 지어 ‘연경궁’으로 불렀다.

 

내성을 지키기 위해 옥림리 성문고개에서 연화동 남산을 돌아 창성까지 9km 중성을 축성하고 선인문, 태안문 등 8개의 성문을 내고 이름도 개경 것을 그대로 사용했다. 그러나 성문은 지금 모두 멸실됐다. 현재 중성의 위치는 선원면 토성터로 추정하고 있다.

 

외성은 중성을 수비할 목적으로 강화의 동쪽 해안을 따라 대규모로 쌓았다. 총 길이가 1만 1232m였다. 중성과 외성은 모두 토성으로 쌓았다.

 

하지만 강화산성(내성 중성 외성)은 고종 46년(1259) 몽고가 고려와 화친의 조건으로 모두 헐어야 된다는 단서를 내걸었다.

 

몽고의 독촉으로 성곽을 허물던 병사들은 괴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울며 말하기를 “이럴 줄 알았으면 당초에 성을 쌓지 않았던 것만 못하리라” 했다. 성이 무너지는 소리가 큰 우레 같아서 아이들과 여자들 모두 슬피 울었다. “몽고군은 모든 성을 무너뜨리고 난후 곡식과 민가를 불태워 그 흔적이 성안에 헤아릴 수 없었다”고 고려사는 적고 있다.

 

그 후 부서지고 무너진 강화산성의 내성은 조선시대 숙종 3년(1677) 현재의 강화읍 소재지를 감싸며 남산정상을 휘감아 북산 산등성이를 타고 넘는 높이 3~5m의 총길이 7.2km를 이었다. 동서남북에 4대문과 4개소의 암문 및 남장대와 북장대, 서장대를 세우고 2개소의 수문도 설치했다.

 

세월이 흘러 성벽위의 여장(총을 쏠 수 있는 시설물)과 4대문의 문루. 성벽들이 멸실됐다.

 

폭우로 무너진 남문(안파루)은 1974년에 복원하고 강화남문 편액은 김종필 씨가 썼다.

서문은 1977년 다시 보수하였으며 첨화루 현판은 당시 그대로다. 북문은 원래 홍예석축만 있었으나 정조 7년(1783) 진송루라는 문루를 세웠다. 그 문루도 멸실된 것을 1977년 복원했다. 동문(망한루)는 2004년 복원했다.

 

강화산성 옛 정취는 서문과 남문사이의 작은 암문과 첨화루라는 서문, 그리고 성벽은 남산과 북산에 드문드문 허물어졌지만 원형으로 남아있다. 나머지 성벽은 도시개발로 모두 멸실됐고 남문 인근에만 복원돼 있다.

 

남산정상에 있는 남장대는 건물기단 석축 일부가 남아 있다. 북산 정상에 있는 북장대는 조망권이 압도적이다. 서장대는 서문 안쪽에 터만 남았다. 그 아래 비문인 연무당은 1876년 일본의 강압으로 부산과 인천. 원산까지 개항을 하게 된 강화도 조약이 체결된 곳이다.

 

근세에 강화산성은 많은 건물들이 소실됐다. 1866년 10월 16일 프랑스군의 침공으로 성곽과 행궁 등 성안의 건물들이 파괴되고 불탔다. 이때 규장외각에 소장됐던 고문서와 전적이 약탈당했다.

 

강화군에는 고려 무신정권을 탄생시킨 최충헌을 제거하려다 실패한 뒤 강화도에 유배됐던 비운의 왕 ‘희종’의 석릉. 고려 후기 강종의 부인이었던 원덕태후 유 씨의 무덤인 곤릉 등 고려문화의 향기가 가득하다.

 

삼국시대의 쟁탈전, 고려왕조가 몽고에 밀려 39년간 피신했던 곳. 조선인조 때의 정묘호란, 개화기에는 프랑스와 미국의 함대가 넘나들며 위협했고, 현재까지도 수도방위의 중요한 요충지로서 격변기 때마다 강화도는 나라를 수호했던 투쟁의 역사가 배어있는 곳이다.

 

7. 더 많은 사진 보기

 

15코스 고려궁 성곽길(사진 1) http://blog.daum.net/joingi61/15965268

15코스 고려궁 성곽길(사진 2) http://blog.daum.net/joingi61/15965269

15코스 고려궁 성곽길(사진 3) http://blog.daum.net/joingi61/15965270

15코스 고려궁 성곽길(사진 4) http://blog.daum.net/joingi61/15965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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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코스 고려궁 성곽길(4대문 사진 및 비교) http://blog.daum.net/joingi61/15965273

고려궁지 사진 http://blog.daum.net/joingi61/15965248

 


8. 강화나들길 답사 후기 (2018.11.12 ~ ?)

 

코스

답사

순서

답사날짜

답사 후기

1.심도역사문화길

8

19.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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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호국돈대길

9

19.01.22

http://blog.daum.net/joingi61/15965222

3.고려왕릉가는길

10

19.01.29

http://blog.daum.net/joingi61/15965226

4.해가지는마을길

12

19.03.12

http://blog.daum.net/joingi61/15965237

5.고비고개길

 

 

 

6.화남생가가는길

 

 

 

7.낙조보러가는길

 

 

 

8.철새보러가는길

7

19.01.01

http://blog.daum.net/joingi61/15965212

9.다을새길

3

18.11.20

http://blog.daum.net/joingi61/15965198

10.머르메가는길

4

18.11.27

http://blog.daum.net/joingi61/15965201

11.석모도바람길

5

18.12.04

http://blog.daum.net/joingi61/15965204

12.주문도길

1

18.11.12

http://blog.daum.net/joingi61/15965194

13.볼음도길

2

18.11.13

http://blog.daum.net/joingi61/15965195

14.강화도령첫사랑길

15

19.05.21

http://blog.daum.net/joingi61/15965267

15.고려궁성곽길

16

 

 

16.서해황금들녘길

14

19.05.14

http://blog.daum.net/joingi61/15965262

17.고인돌탐방길

 

 

 

18.왕골공예마을가는길

11

19.02.12

http://blog.daum.net/joingi61/15965232

19.석모도상주해안길

6

18.12.25

http://blog.daum.net/joingi61/15965207

20.갯벌보러가는길

13

19.04.30

http://blog.daum.net/joingi61/15965255

 

 

9. 답사 경비


①승용차 이용 기름값(추정): 20,000

②통행료: 1,800

③부식비: 20,000

④합계: 41,8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