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평산행(둘레길 등)/[강화]나들길

[강화나들길 14코스] 강화도령 첫사랑 길 (후기)

약초2 2019. 5. 28. 09:57

강화나들길 열다섯 번째 이야기

 

14코스 강화도령 첫사랑 길

강화도령 첫사랑?

 

1.날짜: 2019년 5월 21일(화)

2.답사코스: 용흥궁→남장대→찬우물→철종외가

3.날씨: 맑고 청명함

 

4.답사시간

-10:50 강화읍사무소 앞 공용주차장 착

-10:58 발

-11:05 용흥궁 착 / -11:09 발(답사 시작)

-11:30 산 입구

-11:47 청하동약수터 착 / -11:52 발

-11:56 거북바위

-11:59 암문

-12:09 남장대 착 / -12:18 발

-12:54 에버리치호텔

-13:46 찬우물약수터 착 / -13:52 발

-14:00 숲길 시작점

-14:16 숲길 끝 지점

-14:48 철종외가 착(답사 종료) / -14:52 발

-이후 대장간마을 버스정류장에서 버스 타고 수협사거리 부근에서 하차하여 도보로 강화읍사무소 앞 공영주차장에 도착하여 차량회수 후 귀가.

 

※ 휴식 포함하여 3시간 39분 걸렸는데 휴식(짧은 과외 포함)을 제외하면 약 3시간 정도 걸릴 것 같다.

 

5. 답사 후기

 

강화나들길 제14코스 강화도령 첫사랑 길

용흥궁 ~ 철종외가

 

강화도령 첫사랑 길은 원범이 강화도에서의 귀양살이 중 강화도 처녀 봉이와 나누었던 풋풋한 사랑의 흔적을 찾아가는 도보 여행길

거리: 11.7km / 소요시간: 3시간 30분 / 난이도: 중

용흥궁-(2.2km)-청하동약수터-(1.0km)-남장대-(5.4km)-찬우물약수터-(3.1km)-철종외가

 




[코스정보]

 

오색 깃발 휘날리며 자신을 모시러 온 영의정을 보고 땅에 엎드려 사또님 살려달라고 울먹인 천애 고아 강화도령 원범이 강화도 처녀 봉이와 뛰어놀며 사랑을 나눈 사연이 굽이굽이 묻어나는 길이다.

짧은 학문과 얕은 경륜에 대한 자격지심, 세도 정치가들 때문에 왕 노릇도 제대로 못 한 비운의 왕, 짧은 재위기간 내내 강화도의 산천과 정인 봉이 생각으로 가슴앓이 하다 33세라는 젊은 나이로 병사한 원범이 봉이와 나란히 거닐며 소곤소곤 정담을 나누는 소리가 들리는듯해 발걸음이 조심스럽다. 구중궁궐에 머문들 마음이 지옥인데, 농사짓고 나무나 하면서 무지렁이 총각 원범으로 살았다면 그렇게 단명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내내 떨쳐 버릴 수 없는 애틋한 사랑의 길이다.

 

강화도령 원범이 5년간 살았던 용흥궁을 보고 강화도 처녀 봉이와 처음 만나 사랑을 나눈 청하동 약수터를 지나 강화산성 남쪽 정상부에 있는 남장대를 거쳐 솔숲 우거진 노적봉 입구까지 고즈넉한 숲길이 이어지는 사랑의 길이다.

남장대에 오르면 사방으로 시야가 열려 쉽게 내려가고 싶지 않은 정경이 발아래로 펼쳐진다. 눈이나 비가 오면 남장대 오르는 길이 다소 미끄러울 수 있어 스틱 등 장비를 갖추어야 한다.

[출처: 강화나들길 홈피(www.nadeulgil.org/)]

 

 

일주일 만에 다시 찾은 강화나들길 열다섯 번째 답사, 제14코스 강화도령 첫사랑 길이다. 오늘도 승용차를 이용했다.

 

무료로 주차할 수 있는 용흥궁 주차장을 찾아갔지만 이번에도 승용차는 주차할 곳이 없었다. 넓은 대형버스 주차장은 텅텅 비어 있었다. 좀 더 효율적(탄력적)으로 주차장 운영을 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별 수 없이 강화읍사무소 앞 공영주차장에 주차를 했다. 요금은 30분당 600원인데 글쓴이는 경차라서 300원이다. 주차장 앞 건물은 강화중앙시장 B동 건물이며 건물 내부에 강화관광플랫폼이 있다.

 


심도직물 터


주차를 하고는 시점인 용흥궁으로 가는데 그림 안내판(그날의 함성 독립운동길)이 나오고, 이어 김상용 순절비가 있는 비각이 나온다. 그 뒤에는 이곳이 심도직물회사 터였음을 알려주는 굴뚝과 표지석,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심도직물(心都織物)

 

1947년 김재소(제7대 국회의원)가 설립하여 2005년까지 1200여 명의 근로자가 종사했던 국내 굴지의 주식회사 심도직물 터이다.

강화는 예로부터 부녀자를 중심으로 수공업이 발달하였고 1920년대에 가내공업 형태의 직기가 도입되어 면직물과 견직물의 대량생산이 가능하였다.

1933년 강화에 최초로 근대식 방직 공장인 조양방직이 설립되었다.

1970년대부터 현대화된 공장으로 발전하여 대량생산체계와 수출산업으로서 전성기를 맞이하였으나 산업의 발달과 저가 중국산 면직물의 수입 등으로 섬유공업의 번영은 힘없이 무너졌다. 이곳은 2005년 강화군에서 소도읍 육성사업의 목적으로 용흥궁 공원을 조성하면서 심도직물 건물은 모두 사라지고 공장 굴뚝의 일부만 남아있어 당시 번창했던 강화경제의 명성을 말해주고 있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민주화운동 시발점이기도 하다.

[출처: 현지 안내문]

 

이어 목조문화재(전통가옥) 열린교육장이 나오는데 교육용으로 한옥의 다양한 구조가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는 문화관광해설사가 상주하는 건물에 도착했다.

이곳 벽 쪽에 도장함(14코스 시점 도장)이 있다. 그런데 도장이 떨어져 있었다. 할 수 없이 손에다 잉크를 묻히면서 떨어진 도장을 찍고는 용흥궁 내부로 들어갔다.


용흥궁 (龍興宮) 유형문화재 제20호

 

문화재 지정: 인천광역시 시도유형문화재 제20호(1995년 3월 1일 지정)

건립시기: 1853년(철종 4)

면적: 90㎡(내전), 95㎡(별전), 6㎡(비각)

소재지: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요약: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주택.

 

▶ 내용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0호. 철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이다.

 

원래는 민가였던 모양이나 철종이 왕위에 오르게 되자 1853년(철종 4) 강화유수 정기세(鄭基世)가 현재와 같은 건물을 세우고 용흥궁이라 이름하였다. 그 뒤 1903년 이재순(李載純)이 중건하였다.

 

현존하는 건물은 내전 1동, 외전 1동, 별전 1동, 잠저구기비각(潛邸舊基碑閣) 1동 등이 있다. 이 궁의 건물은 창덕궁의 연경당(演慶堂), 낙선재(樂善齋)와 같이 살림집의 유형에 따라 조형되어 질박한 느낌을 주고 있다.

 

팔작지붕에 홑처마 주심포의 구조로, 내전은 정면 7칸, 측면 5칸이며(건평은 90㎡), 별전은 정면 6칸, 측면 2칸인 ㄱ자형 집(건평 95㎡)이다. 비각은 정방형으로 정면과 측면이 각각 2.5m로, 넓이가 약 6㎡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용흥궁은 강화도령으로 불렸던 조선 철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 14~19세까지 5년간 살았던 곳으로 원래는 초가집이었으나 왕이 되어 떠난 후 강화유수 정기세가 현재와 같은 기와집을 세우고 용흥궁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앞 전 1코스(심도역사 문화길) 답사시에 본 적이 있었으나 이번에 한 번 더 답사를 했다. 앞전에는 그냥 훑어보고 나왔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비각 속에 세워져 있는 비석을 제대로 보았다. 비석에는 「철종조잠저구기(哲宗朝潛邸舊基)」라 쓰여 있다.

 

왕세자와 같이 정상 법통이 아닌 다른 방법이나 사정으로 임금으로 추대된 사람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을 잠저(潛邸)라고 하며, 「궁(宮)」은 왕이나 왕족이 살았던 곳을 단순히 일컫는 말이다. 쉽게 설명하자면 서울의 운현궁은 흥선대원군의 궁도 되지만 그의 아들인 조선 제26대 고종의 잠저이기도 하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잠저로는 태조의 함흥 본궁과 개성 경덕궁, 인조의 저경궁과 어의궁, 영조의 창의궁, 고종의 운현궁 등이 있다.

 

용흥궁에서 나와 바로 이웃하고 있는 대한성공회 강화성당이 있지만 역시 1코스 때 답사했기 때문에 이제 좌측 아래로 내려감으로써 정상적인 답사에 들어갔다.

 

다시 직물공장(심도직물 터) 굴뚝을 지나 김상용 순절비가 있는 비각을 지난다.

 

김상용 순절비

위치: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강화대로 416

문화재 지정: [김상용순절비]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35호(1995.11.14 지정)

 

강화읍 관청리에 있는 이 비는 조선 인조때 문신으로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종묘를 모시고 강화도로 피난했으나 청군이 강화도를 함락하자 강화산성 남문루 위에서 화약을 쌓아놓고 불을 붙여 순국한 선원 김상용 선생의 위국충절을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해 순조 때 유수로 부임한 공의 7대손 김매순이 건립한 순절비이다. 명종 16년에 출생한 김상용 선생은 장렬 김번의 증손이며 병자호란시 청국과의 화의를 극력 반대한 척화파 김상헌의 형으로, 문과에 급제한 후 우의정을 거쳐 인조 15년에 순국하였으며 그 위패는 선원면에 위치한 충렬사에 봉안하였다. 당초 순절비는 구 남문지에 있던 것을 1976년 강화중요국방유적 복원정화사업의 일환으로 현 위치로 옮겨 세우던 중 숙종때 증손인 김창집이 세운 구비가 발견되어 현재 신 ․ 구비를 나란히 세웠다.

 

주차해 둔 강화중앙시장 B동 건물을 지나 도로를 건너 강화중앙시장 A동 건물 옆을 지나간다.

 

예전에 진전(眞殿)의 제사 때 사용한 솔터우물을 지나 기와집으로 된 인천관광공사 강화지사 건물도 지난다.

 

14코스와 5코스가 교차하는 지점을 지나 강화읍 스토리워크길의 남화직물 터를 지나 8분 정도 진행하니 드디어 산길이 시작되는 초입에 도착했다.


청하동 약수터


완만하게 8분을 진행하니 강화읍 생태체험숲 안내판(①건강의 숲)이 나오고, 5분 후 두 번째 강화읍 생태체험숲 안내판(②단풍나무 숲)이 나온다.

 

3분 후 왼쪽의 길(포장도로)과 만나는 삼거리에 도착한다. 이곳에 발밤이 말뚝 표지판(14-10. 시점 1.8km, 종점 8km)이 세워져 있다.

 

이후 계단을 올라가니 넓은 공터에 운동기구와 쉼터가 조성된 청하동약수터이다. 이곳부터 강화산성 능선까지는 15코스(고려궁 성곽길)와 겹치는 구간이다.

 

이곳 남산약수터(안내문에는 이곳이 남산약수터라고 적혀 있다.)는 아쉽게도 식수 부적합 판정을 받았다. 약수터를 둘러싼 3면의 벽에는 벽화가 그려져 있다.


거북바위


청하동약수터(남산약수터)와 작별하고 나무계단을 올라간다.

1분 정도 진행하니 분기점이 나온다. 발밤이 말뚝 표지판이 세워져 있는 이곳에서 좌측으로 진행한다. 길이 다소 넓고 좋은(직진) 곳은 15코스길이다. 발밤이 말뚝 표지판 옆에는 사이좋게 가느다란 사각형의 14코스(강화도령 첫사랑길) 전용 표지판도 세워져 있다.

 

좌측길로 들어선다.

짧은 돌계단을 올라 2분 정도 진행하면 거북바위가 나온다. 거북바위는 나들길 등로 위쪽에 있기 때문에 잘 살펴야 보인다. 아무 생각없이 나들길 등로따라 진행하면 거북바위를 못보고 그냥 지나치게 된다.

 

열아홉 살 원범이 왕이 되어 한양으로 떠나던 날 아침, 뜬 눈으로 밤을 새운 봉이는 이곳에서 봉영단의 행렬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고 이후 봉이는 새벽마다 이 약수터 위 거북바위 앞에 약수를 떠 놓고 무엇인가 간절하게 기도하였다는 얘기가 전해져 온다.[출처: 강화나들길 홈피]


남장대


거북바위에서 완만하게 2분을 진행하면 강화산성 암문이 나온다.

 

▶ 암문

남장대 오르는 성벽에 누(樓)없이 만들어 놓은 문이다. 성곽으로 통하는 문은 여러 곳이 있으나 모두 적이나 일반인들에게 노출된 문이다. 하지만 암문(暗門)은 성(城)의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적이 알지 못하는 출입구를 내어 사람과 가축이 통과하고 양식 등을 나르도록 했다.

전시 상황이 되면 군수물자를 조달하거나 비밀리에 군사를 이동시키는 용도로 사용된다. [출처: 강화나들길 홈피]

 

암문 앞에는 발밤이 말뚝 표지판(14-12. 시점 2.3km, 종점 7.5km)이 두 개, 다른 표지판도 두 개가 세워져 있다.

 

이곳에서 남장대 가는 길은 암문을 통과하지 않고 좌측 산성길을 따라 가면 아주 편했을 것을 암문을 통과하여 성벽을 끼고 남장대로 향했다.

 

암문을 통과했다.

이후 나들길 14코스는 성벽에서 조금 떨어진 길(직진)로 진행된다. 발밤이 말뚝 표지판(14, 15코스 겸용)이 세워져 있다. 나들길로 진행을 하면 반 바퀴 돌아서 남장대에 오르게 되어 있다.

그래서 글쓴이는 왔던 길 되짚어 가는 것이 싫어서 성벽 바깥쪽 길을 선택했다. 성벽 안쪽 길보다는 등로 상태가 나쁘지만 그리 못 갈 등로는 아니었다.

그렇게 성벽을 바라보며 성벽 바깥쪽 길을 6분 정도 완만하게 올라가면 나들길에서 오는 길과 합류되면서 2층의 산불감시초소 옆에 설치된 계단을 올라가 산성 내부로 들어간다.

 

이제 14코스의 최고 하이라이트인 남장대가 코앞이고 이곳부터 펼쳐지는 전망이 가히 환상이다.

 

가장 먼저 군사관련 건물지 푯말이 나타나고, 여기 저기 암반이 드러나 있다. 지나온 길을 잠시 바라보다 발걸음을 옮겼다.

이내 2층 규모의 남장대에 도착했다.

 

▶ 남장대

강화산성 남쪽 정상부에 있는 남장대는 조선 시대 서해안 방어를 담당하던 진무영에 속한 군사시설로 감시와 지휘소 역할을 담당했던 곳이다. 1866년 병인양요 때 허물어진 것을 2010년 복원했다.

남장대에 오르면 사방으로 시야가 탁 트여 강화읍은 물론 멀리 영종도 신도시 그리고 조산평이 한눈에 들어온다. 고려 고종 때 쌓은 강화산성은 이후 여러 차례의 파괴와 개축을 거쳐 1711년 조선 숙종 때 약 7.1km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출처: 강화나들길 홈피]

 

남장대 위로 올라가봤는데 2층으로 올라가는 문이 닫혀 있어서 포기하고 내려왔다.

남장대에서 남문 방향으로 3개의 조망도(남산 전경 안내)가 설치되어 있고, 강화산성 남장대 안내판, 나무 아래에 강화나들길 입간판 표지목(⑭강화도령 첫사랑길)이 나무에 걸쳐 있다.

 

이곳 남장대에서 가장 눈길을 끈 조망은 유도였다. 예전에 김포 문수산에 여러 번 올라가봤지만 흐린 날씨에 유도를 뚜렷하게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곳이 거리가 더 멀어도 시력이 나쁜 글쓴이에게도 이곳에서 유도(중립지역)가 잘 보였다.

이밖에 신 ․ 구 강화대교, 초지대교도 잘 보였다. 한강 너머 북한 땅도 잘 보였다.

 


에버리치호텔(좌측으로 진행해야 한다)


이쯤해서 조망을 멈추고 되짚어 남장대를 거쳐 계단을 타고 내려간다.

분기점에 원위치하여 다시 숲길을 진행한다.

 

3분 후 청하동약수터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고, 다시 1~2분 후 나오는 분기점에서 15코스(노적산 방향)와 작별하고 좌측(사랑의 숲)으로 진행한다. 이곳에도 발밤이 말뚝 표지판(14, 15코스 겸용)과 14코스 전용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이제 주능선에서 내리막길로 들어선다.

5~6분 후 쉼터가 나오는데 이곳에 LOVE 조형물, 마주보고 있는 사람 조형물 등이 설치되어 있다.

 

15분 정도 쉬었다가 출발했다.

3분 후 숲길을 마치고 에버리치호텔에 들어섰다. 숲길 입구에 발밤이 말뚝 표지판(14-14. 시점 3.2km, 종점 6.6km)이 세워져 있다.

 

내려와서 발밤이 말뚝 표지판의 화살표 방향대로 우측으로 향했다.

곧이어 나오는 짧은 다리를 건너니 리본이 안 보인다. 아무리 찾아도 리본은 안보이고 또 길도 없다.

아뿔싸!

잘못 들어섰구나! 하며 되짚어 올라가 아까 숲길에서 내려온 곳에 설치되어 있는 발밤이 말뚝 표지판을 다시 제대로 보니 발밤이 말뚝 표지판에 있는 종점 화살표는 방향이 맞는데 시점 화살표 방향이 잘못됐다. 에버리치호텔에 내려와서 발밤이 말뚝 표지판을 봤기 때문에 시점 화살표를 본 것이다. 종점 화살표를 봤어야 했는데… 인근에 리본은 없었고 좌측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매달려 있었다. 신경 써야 보인다.


찬우물 약수터


과외 받은 것을 금방 눈치 채서 다행이었다.

이제 좌측으로 진행한다. 에버리치호텔을 빠져나와 포장도로를 따라 내려간다.

이번에도 과외를 받았는데 아무 생각없이 큰 도로가 나오는 사거리(남산유스호스텔입구 버스정류장)까지 갔었다. 그런데 리본은 동서남북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 되짚어 조금 올라간 작은 사거리가 분기점이었던 것이다.

 

이곳에서 진행방향 우측으로 진행한다.

1차로의 포장도로를 따라 3분 정도 진행을 하니 다시 방향이 꺾인다.

 

건영3차 빌라(4층)을 끼고 좌측으로 2분 정도 내려가면 2차로의 포장도로가 나온다.

 

2차로의 포장도로를 건너 조금 진행하다가 좌측으로 들어간다. 길 건너편에는 명진컨벤션웨딩부페 건물이 있다. 이곳에도 발밤이 말뚝 표지판(시점 4.4km, 종점 5.4km)이 세워져 있다.

 

시멘트포장길을 따라 진행을 한다. 강화군외식업지부를 지나 좌우로 논이 있는 지역을 3분 진행하면 다시 삼거리가 나온다. 발밤이 말뚝 표지판(14-22)이 세워져 있다.

 

우측으로 방향을 꺾어 계속해서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진행한다. 좌측 수로 건너편에는 음식점, 우측에는 넓은 논들이 이어지고 있다. 정면으로는 꽤 높은 산이 보이는데 아마 혈구산(466m)인 것 같다.

 

그런 길을 약 5분 정도 진행하니 다시 차가 다니는 삼거리가 나온다.

좌측으로 조금 가서 다리를 건넌다. 이곳에도 다리 입구에 발밤이 말뚝 표지판(시점 5km, 종점 4.8km)이 세워져 있다.

 

다리를 건너니 「나무들의 집」건물이 나온다.

이 동네에는 집집마다 심어놓은 수국이 만개해서 보기가 좋았다.

 

다리를 건너 1차로의 도로를 10분 진행하니 2차로의 차가 다니는 도로가 나온다. 삼거리인데 좌측으로 진행한다. 정면에 제이에스밸브공장 간판이 있다. 이곳에도 발밤이 말뚝 표지판(14-25. 시점 5.7km, 종점 4.1km)이 세워져 있다.

 

이내 2차로의 도로를 건너면 보도길과 찻길이 나오는데 찻길로 진행한다. 이곳에 14-26 발밤이 말뚝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우측은 무성한 숲을 이루고 있는 산자락이고 좌측은 쉼터로 운동기구 등이 설치되어 있다.

흙먼지 에어크린 기계가 나오고, 혈구산 대형 등산로 안내도가 나온다. 이곳이 혈구산 등산로 초입인 찬우물약수터이다. 곧바로 약수터가 나온다.

 

찬우물약수터 주변에는 식당, 화장실, 넓은 주차장 등의 편의시설이 들어서 있다. 몇 몇 주민들의 노점도 눈에 띈다. 하나 있는 식당은 정기휴무(화요일)일이라고 한다. 이곳 약수터는 식수 적합 판정을 받았는지 두 사람이 약수 물을 받고 있었다.

이밖에 발밤이 말뚝 표지판(14-28. 시점 6.2km, 종점 3.6km), 강화도령 첫사랑길 대형 지도, 강화도령 첫사랑길 대형 하트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


철종외가


찬우물약수터에서 조금 진행하면 4차로의 도로가 나온다. 이곳에서 우측으로 조금 가면 횡단보도가 나온다. 이곳으로 가도 된다.

하지만 나들길은 좌측으로 진행해서 조금 진행하면 나오는 횡단보도를 건너 왔던 길 되짚어(우측으로) 조금 가면 좌측 숲길로 이어지는 길이 나온다. 이곳에 발밤이 말뚝 표지판(시점 6.7km, 종점 3.1km)과 강화도령 첫사랑길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다시 숲길을 진행한다.

이곳은 잣나무숲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다. 그런 운치 있는 숲길을 완만하게 6분을 올라가면 능선이다. 14-30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능선에 올라선 후 우측으로 30초 정도 진행하면 삼거리가 나오는데 좌측으로 진행한다.

7분 후 숲 지대를 빠져 나오면 공터에 양봉시설물 등이 즐비한 곳에 이르고, 2분을 더 가면 포장도로에 떨어진다. 이곳에도 발밤이 말뚝 표지판(시점 7.4km, 종점 2.4km)이 세워져 있다.

 

이후 1~2분 정도 진행하면 삼거리가 나온다. 우측으로 2분 진행하면 다시 삼거리가 나온다. 14-33 표지판이 있다. 이번에도 우측으로 2분 정도 진행하면 차가 다니는 2차로 포장도로를 만난다. 선원초교 앞이다. 이곳에도 발밤이 말뚝 표지판(시점 7.7km, 종점 2.1km)이 세워져 있다.

 

좌측으로 꺾어 2차로 포장도로를 따라 진행한다. 선원초교를 바라보며 도로를 건너 1~2분 뒤 나오는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진행한다.

 

소나무 숲이 있는 소트리팜 철 담장을 지나고 잠시 좌우로 소나무의 사열을 받다가 이내 소나무는 없어지고 삼거리가 나온다.

 

이곳에도 발밤이 말뚝 표지판(시점 8.3km, 종점 1.5km)이 세워져 있다. 좌측으로 진행한다. 1~2분 뒤 나오는 삼거리에서 이번에는 우측으로 진행한다.

 

1~2분 뒤 나오는 「」삼거리에서 좌측으로 진행한다.

1분 뒤 다시 나오는 삼거리에서 이번에는 우측으로 진행한다.

이곳에는 이미 모내기를 마친 논들이 많았다. 목장을 지나니 발밤이 말뚝 표지판(14-43. 시점 9.2km, 종점 0.6km)이 나온다.

 

이후 4분 정도 진행하니 밭작물 건너편으로 철종외가가 보인다.

조금 더 간 지점에서 좌측으로 들어서면 철종외가다.

철종외가에는 강화도령 첫사랑길 의자형 표지판, 나들길 종점 도장함, 기피제함, 강화나들길 여행시 유의사항 안내판, 강화도령 첫사랑길 대형 지도, 문화해설사 건물 등이 있다.

철종외가 건물 앞에는 안내판도 세워져 있다.

 

철종외가(哲宗外家)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선원면 냉정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건축물이다. 1995년 3월 1일 인천광역시의 문화재자료 제8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철종(재위 1849∼1863)의 외숙인 염보길이 살던 집이다. 철종 4년(1853)에 지은 이 건물은 원래 안채와 사랑채를 좌우로 두고 H자형 배치를 취하고 있었으나, 행랑채 일부가 헐려 지금은 ㄷ자 모양의 몸채만 남아 있다. 사랑채와 안채가 一자형으로 연결되어 있고 안(안채)과 밖(사랑채)의 공간을 작은 담장으로 간단히 분리하였다. 규모는 작으나 예스럽고 우아한 아름다움이 묻어나는 건물이다.

 

[정경연의 풍수기행] 인천 철종 외가

 

철종 외가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선원면 냉정리 246번지에 있다. 사도세자의 증손인 철종이 강화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할아버지 은언군 때부터다. 은언군의 장남 상계군이 홍국영의 모반죄로 몰려 유폐 당한 후 음독자살하였다. 이 사건으로 그 일가족 모두가 강화로 유배되었다. 여기서 부인 송씨와 며느리 신씨는 세례를 받고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이로 인해 신유박해 때 은언군은 부인·며느리와 함께 사약을 받고 사사되었다.

 

강화에는 은언군의 차남인 전계군만 홀로 남게 되었다. 그에게는 부인 최씨와 염씨·이씨 2명의 첩이 있었다. 철종의 어머니 용담염씨(龍潭廉氏)는 강화 출신이다. 전계군은 순조의 특명으로 유배에서 방면되어 도성에서 거주하게 되었다. 이때 철종(1831~1863)이 태어났는데 초명은 원범이었다. 철종이 11세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민지용에 의해 이복형 원경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역모사건이 일어났다. 이 바람에 원경은 사사되고 이씨 소생의 형 경응과 함께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원범의 나이 14살 때였다.

 

이처럼 철종은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강화에서 태어나지 않았다. 어머니 염씨(1793~1863)와 함께 살았기 때문에 천애고아도 아니었다. 또 나무나 하는 무지렁이도 아니었다. 무식한 강화도령으로 알려진 것은 당시 권력자들이 철종의 미천한 신분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철종이 강화에 산 기간은 불과 5년이다. 지금의 강화읍 관청리 소재 용흥궁은 아버지 전계대원군이 유배 당시 살았던 곳이다. 그는 자주 냉정리에 있는 외가에 들렸다. 외가는 매헌서당(梅軒書堂) 현판이 있는 것으로 보아 서당을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외삼촌 염보길에게서 글도 배웠을 것이다. 또 강화집과 외가 중간에 있는 찬우물 가에서 양순이(봉이)를 만나 사랑에 빠지기도 했다.

 

제24대 왕인 헌종이 23세의 젊은 나이로 후사 없이 죽었다. 그러자 후대 왕을 누구로 할 것인가를 놓고 안동김씨와 풍양조씨 집안 간에 각축이 벌어졌다. 풍양조씨는 흥선대원군의 형인 이하전을 염두에 두었다. 그러나 안동김씨는 원범을 택하였다. 왕실의 최고 어른인 대왕대비 순원왕후 김씨는 원범을 자신의 양자로 삼아 왕으로 지명하였다. 철종의 나이 19살 때다. 14살에 강화에 왔으니 5년 만에 왕이 되어 돌아간 것이다. 그렇다면 철종이 살았던 집터 용흥궁과 외가댁이 풍수지리적으로 길지일 수도 있다. 용흥궁은 강화 주산인 송악산의 맥이 성공회강화성당을 거쳐 내려온 곳에 위치한다. 집 뒤가 높고 앞이 평탄한 것으로 보아 용맥의 끝자락에 해당되는 곳이다.

[출처 : 중부일보(http://www.joongboo.com)]

 

이후

철종외가에서 300m 쯤 떨어진 대장간 마을 버스정류장으로 이동하여 버스정류장 내부로 들어갔는데 막 버스가 지나가고 있어서 급하게 정류장 내부에서 나와 손을 흔드니 다행히도 버스는 10~20m 정도 더 지나친 곳에 정차해서 무사히 탑승했다.

 

강화버스터미널 가기 전 시내에서 하차하여 중앙시장 공영주차장까지 이동하여 차량을 회수한 후 귀가했다.


구군복 차림의 철종 어진


6. 참고자료

    

조선왕조 제25대 철종에 대하여

▶생애: 1831.6.17~1863.12.8(33세). 이광의 셋째 아들.

 

▶이름

1.휘: 이원범 → 이변

2.별호: 자(도승(道升)), 호(대용재(大勇齋))

3.묘호: 철종 (哲宗)

4.존호: 희륜정극수덕순성흠명광도돈원창화 (熙倫正極粹德純聖欽命光道敦元彰化)

5.시호: 충경 문현무성헌인영효대왕(忠敬 文顯武成獻仁英孝大王) (조선), 문현무성헌인영효장황제 (文顯武成獻仁英孝成章皇帝)(대한제국)

6.능호: 예릉 (睿陵)

 

▶재위기간: 1849.6.9(19세)~1863.12.8(33세), 14년 6개월

 

▶겹치는 악재

1.증조할아버지인 이선(사도세자)은 뒤주에서 사망

2.할아버지(은언군. 사도세자의 삼남), 할머니는 천주교 신자라 사사됨.

3.아버지(전계대원군. 이광)는 유배지를 떠돌며 강화도 유배지에서 농사짓다 죽음.

4.이복형(이원경)은 왕으로 추대됐다 사사됨.

5.25대 왕이 된 이원범이 왕이 된 후에는 안동김씨의 그늘에 눌려 14년 6개월 왕하고 31세에 죽으며 정실, 후실에서 낳은 왕자와 옹주 6명 모두를 요절하는 것을 보게 됨.

 

철종(哲宗, 1831년 7월 25일(음력 6월 17일) ~ 1864년 1월 16일(1863년 음력 12월 8일))은 조선의 제25대 왕(재위: 1849년 7월 28일(음력 6월 9일)[1] ~ 1864년 1월 16일(1863년 음력 12월 8일)[2])이자 대한제국 추존황제이다.

 

추존 군주 장조의황제의 서자였던 은언군의 서손자이자 전계대원군 이광의 셋째 아들이다. 한성부에서 태어났으나 은언군과 상계군 사건과 이복 형 원경의 옥사로 교동도와 강화도로 유배지가 옮겨진 뒤 왕족으로서의 예우를 박탈당하고 평민처럼 생활하였다. 그 뒤 농업과 나무꾼, 행상으로 살던 중 순원왕후의 명으로 덕완군에 봉해진 뒤, 종숙부 순조의 양자 자격으로 왕위를 이었다.

 

초명은 이원범(李元範), 휘는 이변(李昪),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도승(道升), 별칭은 강화도령, 호는 대용재(大勇齋)이며, 사후 시호는 철종희륜정극수덕순성문현무성헌인영효대왕(哲宗熙倫正極粹德純聖文顯武成獻仁英孝大王)이며 이후 대한제국이 성립된 1908년(융희 1년)에 장황제(章皇帝)로 추존하여 정식 시호는 철종희륜정극수덕순성흠명광도돈원창화문현무성헌인영효장황제(哲宗熙倫正極粹德純聖欽明光道敦元彰化文顯武成獻仁英孝章皇帝)이다. 그가 서출인데다가 강화도로 유배간 후 나무꾼으로 있다가 왕실의 정통성을 지키기 위해 안동김씨 세력들에 의해 왕이 되었다 하여 재위기간 중 반가에서는 그를 강화도령이라 조롱하였고 이는 곧 그의 별명으로 굳어지기도 했다.

 

1858년 그에게는 유일한 적장자 이융준이 태어났지만 6개월 만에 사망한다. 후궁들에게서 본 서자들은 태어나자마자 바로 사망하였고, 이듬해 태어난 서녀 영혜옹주는 14세에 사망하여 그의 후손은 단절되었다.

[출처: 위키백과]

 

철종이 왕이 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당시 순조, 익종(문조), 헌종과 가장 촌수가 가까우면서(종법상 헌종과 7촌) 아직 장가를 가지 않은 종친이기 때문이다. 이는 양자를 들이는 데 있어 당시의 관습이다. 흥선군 이하응은 할아버지 은신군과 아버지 남연군이 모두 양자로 계보를 이었기 때문에 족보상으로는 헌종과 11촌이 되며,(사도세자의 후손으로 보면 철종과 같은 촌수) 헌종 승하 당시 결혼하여 아들(이재면)을 두고 있는 상태였다. (오히려 이재면이 왕위 계승에 가까웠다). 이하전은 족보상 헌종과 27촌이다. 고종이 왕위에 오를 때에도 큰아들 이재면은 결혼한 상태이기 때문에 결혼 전인 둘째 이명복이 익종의 양자로 들어가 왕위를 잇게 된다. [출처: 위키백과]


철종 가계도

[출처: http://blog.daum.net/zabda/18303624 ]


② 문벌정치에 희생된 비운의 왕 - 철종 (哲宗)

 

반란에 휘둘린 불행한 집안

 

조선 말기는 사회적으로도 격변기였고 왕실 내부에서도 복잡한 양상이 전개되었던 때였다. 역사학자들은 이 시기를 ‘민란의 시대’라고 한다.

 

이 시기를 살았던 조선조 제25대 왕 철종(哲宗, 1831~63, 재위1849~63)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우리의 관심을 끈다. 비록 33세의 나이에 요절했지만 14년 동안이나 왕위를 누렸으니 비운의 왕이라 부를 수는 없겠다. 그러나 그를 비운의 왕이라 하는 이유를 다음 이야기를 통해서 알 수 있다.

 

1849년 헌종(憲宗)은 젊은 나이에 후사 없이 죽었다. 왕이 아직 23세의 나이였기에 비록 왕자는 없었지만 후사를 염려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는데, 왕이 갑작스레 죽자 세도를 부리던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세력은 허둥댔다. 젊은 대비인 김씨와 왕비인 조씨는 신경을 곤두세우고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그도 그럴 것이 죽은 왕의 6촌 안에 드는 왕족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먼 일가라고 할 수 있는 7촌 이상의 왕족은 몇 명 있었다. 후계의 왕은 원래 항렬로 따져 동생 또는 조카뻘로 왕통을 잇는 게 원칙이었다.

 

그런데도 안동 김씨들은 조씨들을 누르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계산을 한 뒤, 강화도에 살던 헌종의 7촌 아저씨뻘인 원범(元範)을 왕위에 추대했다. 철종은 종묘에서 조카뻘 되는 헌종에게 절을 하는 꼴을 보이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를 통틀어 이렇게 법도에 어긋나게 왕통이 이어진 것은 이때가 세조 다음으로 두 번째였다. 안동 김씨 세력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왕가의 법도를 깡그리 무시했다. 봉건왕조의 처지에서 볼 때에 이런 처사는 조정의 기강이 극도로 문란했음을 뜻한다. 이때 철종의 나이가 19세였다.

 

철종의 증조부는 저 유명한 사도세자이다. 사도세자는 아들 다섯을 두고 죽었다. 그 다섯 아들 중 혜경궁 홍씨에게서 난 첫째 아들은 일찍 죽었고 둘째 아들인 정조가 왕위에 올랐다. 그 아래 세 아들은 모두 후궁에게서 태어났다.

 

정조가 세손으로 있을 당시, 사도세자의 죽음을 방조한 세력들은 어떤 방법으로든지 정조를 세손의 자리에서 몰아내려고 했다. 정조가 왕위에 오르면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에 대한 복수의 칼을 들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다.

 

이때 세손 반대세력이 새 왕자를 추대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이 일이 발각되어 막내아들 은전군(恩全君) 찬은 정조의 명에 의해 자결했고, 은언군(恩彦君) 인과 은신군(恩信君) 진(흥선대원군의 할아버지)은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은신군은 제주도에 유배 도중 그곳에서 병사했고, 은언군은 강화도로 유배지를 옮기게 되었다. 이때부터 은언군의 후손들은 강화도와 깊은 인연을 맺게 되었다.

 

은언군은 아들 셋을 두었는데 큰아들 또한 음모에 걸려 죽었고, 둘째 아들 당(瑭)과 셋째 아들 광(㼅)이 살아남아 강화도에서 유배생활을 계속했다. 그런데 1812년 홍경래의 주도로 관서농민전쟁이 일어났을 때에 이들은 또 한번 역모에 휘말렸다. 곧 서울에 있는 박종일(朴鍾一) · 이진채(李振菜) 일파가 당과 광을 추대하여 변란을 꾸민 것이다.

 

이때 변란세력들은 형제간에 왕위다툼이 벌어질 것이니 동생 광을 죽여 없애자는 공론을 꾸미기도 했다. 이 광이 바로 철종의 아버지이다. 이 변란이 진행될 때에 철종은 태어나지도 않았다. 이 일이 발각되어 두 형제는 죽음을 당할 뻔했으나 사촌뻘 되는 순조의 간곡한 배려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 뒤 이들 형제는 귀양살이에서 풀려나 자유민이 되었다. 철종의 아버지인 광은 서울에 돌아와 경행방(慶幸坊)에서 살았다. 왕족으로 여러 번 역모에 걸리기도 하고 귀양살이도 했으니 재산이 남아 있지 않았고, 일정한 생업도 가지지 못했으니 생활이 말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 가정에 또 한 차례의 불행이 몰아쳤다. 1844년(헌종10), 광의 큰아들, 곧 철종의 맏형인 명(明)을 추대하고 헌종을 몰아내려는 민진용(閔晉鏞) 일파의 음모 사건이 발각된 것이다. 이때는 광이 죽은 지 3년이 되던 해였으며, 명의 나이 18세였고 철종의 나이 14세였다.

 

이때 명은 죽음을 당했고 경응(景應, 둘째 아들)과 원범(철종)은 또다시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고아인 이들 형제는 강화도에서 땔나무를 하며 푸성귀로 연명하며 생활했다. 때로는 강화도의 유력자이며 종친인 이시원(李是遠, 한말 명문장가인 이건창의 할아버지) 같은 인사들의 도움을 받기도 했으나 생활이 말이 아니었다. 철종은 여느 초동들과 어울려 지게목발을 두들기며 나무를 했고, 공부를 변변히 못하고 자랐다. 그러나 자연 속에서 노동을 하며 자라 몸은 튼튼했다.

 

철종의 윗대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철종이 태어나 왕위에 오른 것이 얼마나 기구한 내력을 지니고 있었는지 알 것이다. 조정에서 많은 벼슬아치들이 강화도로 들이닥쳐 원범을 모셨다. 원범을 연에 태운 행렬이 이어지자 강화도 사람들은 자신들의 눈을 의심할 정도로 놀랐다.

 

‘강화도령’은 왕권을 몰랐을까

 

강화도에서 5년 동안 자란 철종이 궁중으로 들어오자마자, 안동 김씨 세력은 허겁지겁 창덕궁에서 즉위식을 치르고 순원대비에게 수렴청정을 맡겼다. 순원대비는 바로 안동 김씨 문벌정치를 이룩한 김조순의 딸이요, 순조의 왕비이다. 철종이 즉위한 다음 해 3월에 순원대비는 재빨리 자기의 친정 조카뻘인 처녀를 골라 철종의 왕비로 삼았다. 헌종의 왕비인 조씨 세력이 왕비자리를 넘볼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 서둘러 왕비를 책봉한 것이다. 이것으로 철종이 안동 김씨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꼭두각시 놀음의 첫발을 디딘 꼴이 되었다.

 

무식꾼인 철종은 궁중에서 온갖 법도를 배워야 했다. 일정한 시간에 글을 익혀 왕도를 배워야 했고, 만조백관을 거느리고 정책을 논해야 했다. 그는 거추장스런 곤룡포 따위의 의관을 걸치고, 걸음걸이는 위엄 있게, 말씨는 왕답게, 눈빛은 빛나게 갖기 위해 쉴 틈 없이 긴장해야 했다.

 

그러나 그가 정사를 제대로 알 턱이 없었다. 어느 자리에 어떤 사람이 적합한지, 어느 고을 수령에 누가 마땅한지 인사정책을 적절히 행사할 수가 없었다. 장인 김문근(金汶根)은 이런 왕을 떡 주무르듯 주물러 댔다. 실제 왕권을 행사한 자들은 김문근과 그 일파였다.

 

그런데 철종은 과연 왕권이 무엇인지 왕위가 어떤 자리인지 몰랐을까? 더욱이 14년이나 왕위에 있었는데도 말이다. 여러 기록을 종합해 보면 철종이 결코 왕권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증거들이 나타난다. 그 예를 들어 보자.

 

1860년대에 들어 전국 각지에서 농민항쟁이 일어났다. 이것을 과거에는 ‘삼남민란’이라고 불렀다. 농민들이 삼정의 문란과 같은 봉건적 굴레를 스스로 벗기 위해 일어난 것이기는 하지만, 몇몇 세도가의 발호, 수령의 부정이 민란의 직접적인 동기였다. 철종은 윤음(綸音, 임금의 말씀)을 내려 그 수습책을 각 도에서 건의하라고 타일렀다. 그런데 그 윤음 속에는 척족세력 등 몇몇 문벌가와 독점적 권력을 누리는 세도가가 그 지탄의 대상임을 은근한 표현을 빌려서 깔아 놓았다. 비록 승지가 대필했다고 치더라도 당시 조정의 정황으로 보아 이런 표현을 쓰는 데에는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다.

 

그가 삼정의 문란을 개선하기 위해 여러모로 노심초사한 모습이 드러난다. 이를 고치기 위해서는 삼정의 개선책만이 아니라 문벌정치의 뿌리를 뽑아야 하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강한 문벌세력 앞에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아마 철종은 세도가의 첩자들이 온 궁중에 득실거리는 사정을 알고 있었고, 자칫하면 목숨이 위태로운 사정이라는 것도 감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가장 가까운 왕비조차 믿을 수 없었을 테니 모든 정사에 싫증이 날 수밖에 없었다. 맛있는 음식과 비단 이불이 그의 마음을 기쁘게 했을까? 만사에 힘겨운 그의 발걸음이 저절로 궁녀들의 방으로 향했다. 어여쁜 여자를 끼고 있는 동안에는 잠시나마 시름을 잊을 수 있었다. 그는 여색에 깊이 빠져 몸이 쇠약해졌다. 강화도 자연 속에서 발달한 근육이 궁중에 들어와 제대로 몸도 놀리지 못하고 여색에 깊이 빠졌으니 약질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철종은 여섯 왕자와 공주 중 하나만 남고 몇 살을 못 넘기고 모두 죽어 가는 모습을 보면서 인생의 무상을 느꼈을 것이다.

 

그가 요절한 뒤에 실록의 사관은 그를 여느 왕보다도 극찬하고 있다. 그가 태어나던 날, 순원왕후가 꿈을 꾸었는데, 그녀의 아버지인 김조순이 꿈에 나타나 한 아이를 맡기며 이 아이를 잘 기르라고 해서 이 꿈 이야기를 고이 간직해 두었다고 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녀가 철종을 맞이해 보니 바로 꿈에 본 그 아이였다고 했다. 조작이 정도를 지나쳤다.

 

또한 철종은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했고, 4세 때부터 글을 배워 한 가지를 들으면 열 가지를 알았다고 했다. 그리고 철종이 강화도에 들어가면서 큰 풍랑을 만났을 때 두려운 기색 한 점 없이 오히려 권솔들을 위로했다고 적고 있다.

 

문벌정치의 꼭두각시였던 사관들이 철종에 대한 칭송으로 자신들의 죄악을 덮어 버리려고 한 것은 아니었을까? 어쨌든 그는 조상 때부터 위태위태하게 살아왔고, 33세의 짧은 생애 동안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가장 높은 자리까지 누렸으면서도 제대로 운신 한 번 해 보지 못했다.

 

따라서 비극의 왕, 외로운 왕, 또는 허수아비 왕이라는 별명이 그에게 붙여지게 된 것이다. 철종을 이렇게 꼭두각시로 만든 안동 김씨 세력은 끝내 철종의 뒤를 이은 고종 임금 때 흥선대원군의 철퇴를 맞고 주저앉게 된다. 철종의 등장은 조선왕조를 비치는 해가 석양으로 기울고 있음을 의미한 것이다.

 

나라가 잘되려면 권력이 바른길로 나와야 하는데 철종의 경우는 잘못된 길로 간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출처: 이이화의 인물한국사]

 

7. 더 많은 사진 보기

 

14코스 강화도령 첫사랑 길(사진 1) http://blog.daum.net/joingi61/15965263

14코스 강화도령 첫사랑 길(사진 2) http://blog.daum.net/joingi61/15965264

14코스 강화도령 첫사랑 길(사진 3) http://blog.daum.net/joingi61/15965265

14코스 강화도령 첫사랑 길(사진 4) http://blog.daum.net/joingi61/15965266

 


8. 강화나들길 답사 후기 (2018.11.12 ~ ?)

 

코스

답사

순서

답사날짜

답사 후기

1.심도역사문화길

8

19.01.08

http://blog.daum.net/joingi61/15965217

2.호국돈대길

9

19.01.22

http://blog.daum.net/joingi61/15965222

3.고려왕릉가는길

10

19.01.29

http://blog.daum.net/joingi61/15965226

4.해가지는마을길

12

19.03.12

http://blog.daum.net/joingi61/15965237

5.고비고개길

 

 

 

6.화남생가가는길

 

 

 

7.낙조보러가는길

 

 

 

8.철새보러가는길

7

19.01.01

http://blog.daum.net/joingi61/15965212

9.다을새길

3

18.11.20

http://blog.daum.net/joingi61/15965198

10.머르메가는길

4

18.11.27

http://blog.daum.net/joingi61/15965201

11.석모도바람길

5

18.12.04

http://blog.daum.net/joingi61/15965204

12.주문도길

1

18.11.12

http://blog.daum.net/joingi61/15965194

13.볼음도길

2

18.11.13

http://blog.daum.net/joingi61/15965195

14.강화도령첫사랑길

15

19.05.21

 

15.고려궁성곽길

 

 

 

16.서해황금들녘길

14

19.05.14

http://blog.daum.net/joingi61/15965262

17.고인돌탐방길

 

 

 

18.왕골공예마을가는길

11

19.02.12

http://blog.daum.net/joingi61/15965232

19.석모도상주해안길

6

18.12.25

http://blog.daum.net/joingi61/15965207

20.갯벌보러가는길

13

19.04.30

http://blog.daum.net/joingi61/15965255


9. 답사 경비


①승용차 이용 기름값(추정): 18,000

②통행료: 2,400

③버스비: 1,250

④합계: 21,6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