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서울·경기 여행

[강화] 자연과 역사, 신화와 전설이 깃든 현존 最古 사찰 전등사

약초2 2019. 4. 11. 23:08

[강화] 전등사

2019년 2월 26일 답사


자연과 역사, 신화와 전설이 깃든 현존 最古 사찰 전등사

 

[전등사의 역사]

 

역사의 섬에 창건된 고찰

 

강화도는 섬 자체가 우리나라 역사의 축소판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선사 시대의 고인돌 유적부터 단군왕검의 얼이 담긴 마니산, 고려 때의 대몽항쟁과 팔만대장경 조성, 서양 세력과 처음으로 전투를 벌였던 ‘병인양요’에 이르기까지 강화도의 역사는 곧 한민족의 역사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지금도 강화도는 역사와 문화의 섬으로 그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강화도에는 전등사를 비롯해 유서 깊은 사찰도 많이 터 잡고 있다. 대표적으로는 호국불교 근본도량인 전등사와 전등사보다 300여 년 후에 세워진 보문사 및 정수사가 손꼽힌다.

 

전등사는 현존하는 한국 사찰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가졌으며, 부처님의 가피로 나라를 지킨 호국불교 근본도량으로 역사와 권위를 간직한 사찰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된 바와 같이 삼랑성은 단군이 세 아들(三郞)을 시켜 쌓았던 고대의 토성이었고, 삼국시대에는 토성 자리에 석성을 쌓아올려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삼랑성 안에 자리 잡은 전등사는 세 발 달린 솥을 거꾸로 엎어놓은 모양을 가진 정족산(鼎足山)과 더불어 강화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문화 유적으로 유명하다.

 

전등사가 창건된 것은 서기 381년(고구려 소수림왕 11년)으로 전해지고 있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처음으로 전래된 것이 서기 372년이므로 지금은 그 소재를 알 수 없는 성문사, 이불란사(375년 창건)에 이어 전등사는 한국 불교 전래 초기에 세워진 이래,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도량임을 알 수 있다.

 

처음 전등사를 창건한 분은 진나라에서 건너온 아도 화상이었다. 당시 아도 화상은 강화도를 거쳐 신라 땅에 불교를 전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아도 화상이 강화도에 머물고 있을 때 지금의 전등사 자리에 절을 지었으니 그때의 이름은 ‘진종사(眞宗寺)’라 하였다.

 

진종사에서 전등사로

 

진종사가 다시 역사의 기록에 등장한 것은 고려 고종 46년 때인 1259년이었다. 이때 고종은 삼랑성 안에 가궐(假闕)을 지었다. 이보다 앞선 1232년, 고려 왕실에서는 몽골의 침략에 대응하기 위해 강화도로 임시 도읍을 정하고 궁궐을 지은 바 있다. 고려의 강화도 도읍은 1232년부터 1270년까지 이어진다. 그 기간 중 전등사 경내에 가궐을 지은 것은 풍수지리설과 더불어 임금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

 

<고려사>에 따르면 “고종 46년(1259년), 임금이 삼랑성 안에 가궐을 짓도록 명했다.”는 사실과 함께 5년 뒤인 원종 5년(1264년), “임금이 대불정오성도량을 열어 4개월 동안 베풀었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대불정오성도량이라 함은 부처님의 가피로 나라의 온갖 재난을 물리치게 하는, 불교 행사를 일컫는다. 원종 임금이 진종사에서 이런 행사를 갖게 한 것은 당시 진종사의 사세(寺勢)가 크게 중흥되었음을 반증하고 있다.

 

고려 때 강화에서 조성된 팔만대장경 역시 부처님의 가피로 나라를 지키겠다는 호국불교 사상의 결정체였다. 고려 조정에서는 대장경을 조성하기 위해 1245년, 선원사를 창건했는데 그 무렵에도 오랜 역사를 가졌던 진종사가 대장경 조성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였을 것이라 추측되고 있다.

 

고려 왕실에서는 삼랑성 안에 가궐을 지은 후 진종사를 크게 중창시켰으며(1266년), 16년이 지난 1282년(충렬왕 8년)에는 왕비인 정화궁주가 진종사에 경전과 옥등을 시주한 것을 계기로 ‘전등사’라 사찰 명칭을 바꾸었다. 이때는 고려 왕실이 개경으로 환도한 뒤였고, 39년 동안 쓰였던 강화 궁궐터는 몽골군에 의해 폐허로 변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삼랑성 안의 전등사는 꾸준하게 사세를 유지해나갔다. 그만큼 고려 왕실이 전등사에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정족산의 산세가 안온한 명당이라는 것을 뜻한다. 풍수가들 역시 ‘마니산이 할아버지산이라면 정족산은 할머니산으로, 신령스러운 기운이 있어 전란에도 피해를 입지 않는 복지(福地)’임을 강조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전등이란 ‘불법(佛法)의 등불을 전한다’는 뜻으로, 법맥을 받아 잇는 것을 상징하는 말이다. 당시 정화궁주는 인기(印奇) 스님으로 하여금 바다 건너 송나라에서 펴낸 대장경을 구해 전등사에 보관하게 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정화궁주의 옥등 설화보다는 송나라에서 전해진 대장경 때문에 전등사로 개칭되었다고 보는 것이 보다 근거가 있다. 그 대장경 속에는 <경덕전등록> 등의 불전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전등사 대조루를 중건할 때의 모연문을 보면 ‘육조의 의발을 상수(相授)하는 뜻에서 전등사’로 개칭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처럼 전등사는 고려 왕실에서 각별한 관심을 가진 사찰이었던 만큼 그 후에도 충숙왕, 충혜왕, 충정왕 때에 연이어 중수(重修)되었다.

 

조선왕실과 전등사

 

전등사는 조선의 숭유억불 정책에도 불구하고 향화(香華)가 그치지 않았던 가람이다.

 

하지만 여느 고찰과 마찬가지로 전등사도 몇 차례의 화마를 겪었다. 조선 광해군 때인 1614년에도 화재로 인해 건물이 모두 소실되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지경 스님을 중심으로 한 대중이 재건을 시작해 1621년 2월에는 전등사의 옛 모습을 되찾았다. 지금까지 건물의 건축적인 가치는 물론 ‘나부상’으로 더욱 유명한 전등사 대웅전(보물 178호)도 이때 중건되었다.

 

숙종 때인 1678년, 조선왕조실록을 전등사에 보관하기 시작하면서 전등사는 왕실종찰로서 더욱 성장했다.

 

본래 왕실에서는 실록을 4부씩 만들어 궁궐 내의 춘추관과 충주, 성주, 전주 등 네 군데의 사고(史庫)에 보관하도록 했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 모두 소실되고 전주 사고만 무사했다. 이때 전주 사고본이 보존된 것만 해도 우리 역사에서 천만다행한 일이었다. 조정에서는 임진왜란 후 전주 사고본을 4부씩 옮겨 적게 하여 전주 사고본은 강화도 전등사로 옮겼고, 다른 실록은 봉화군 태백산, 영변 묘향산, 평창 오대산에 각각 보관하게 했다.

 

1707년, 강화 유수였던 황흠은 사각(史閣)을 고쳐 짓고, 다시 별관을 지어 취향당이라 이름하였다. 그때부터 정족산 사각은 실록은 물론 왕실의 문서까지 보관하는 보사권봉소로 정해졌다. 이때 왕실의 세보인 선원세보를 비롯해 왕실 문서를 보관하던 건물이 ‘선원각’이었다. 이후 1719년부터 1910년까지 전등사의 가장 어른 스님에게는 도총섭이라는 지위가 주어졌다. 도총섭은 조선시대 최고의 승직을 일컫는 말이다. 1726년에는 영조 임금이 직접 전등사를 방문해 ‘취향당’ 편액을 내렸는가 하면 1749년에는 영조가 시주한 목재를 사용해 전등사의 중수(重修) 불사가 이뤄지기도 했다. 이 때 대조루도 함께 건립되었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전등사는 더욱 빈번하게 왕실의 지원을 받는 사찰로 부각되었다.

 

국난 극복의 호국 도량

 

조선말기로 접어들면서 전등사는 그 지형적 특성으로 인해 국난을 지키는 요충지 구실을 하기도 했다.

 

1866년, 프랑스 함대가 조선에 개항을 요구한다는 명목으로 강화도를 점령했다. 이에 맞서 조정에서는 순무영을 설치하고 양헌수 장군 등을 임명하여 프랑스 함대를 물리치게 했다.

 

이때 양헌수 장군은 휘하 병력을 이끌고 초지진을 건너 정족산성에서 적을 무찔렀다. 조선군을 얕잡아보던 프랑스 함대는 이 전투가 끝난 뒤 크게 전의를 상실하여 조선에서 물러갔다. 프랑스군은 양헌수 부대와 싸우기 직전만 해도 정족산성을 돌파하고 전등사에서 점심을 먹겠노라 공언한 바 있었다.

 

이 전투에서는 조선의 관군뿐만 아니라 경기·황해도 일대의 포수들, 전등사 사부대중들까지 가세하여 나라의 위기를 구하는 데 힘을 모았다. 조정에서는 전투의 승전을 기리기 위해 양헌수 장군 승전비와 비각을 정족산성 동문 내에 세웠다.

 

또한 지금도 전등사 대웅전 내부의 기둥과 벽화에는 여러 사람의 이름을 적은 낙서의 흔적이 남아있다. 병인양요 당시 부처님의 가피로 국난을 극복하려는 병사들의 염원이 그렇게 남게 된 것이다.

 

당시 국정의 실권을 쥐고 있던 대원군은 병인양요 후 전등사에 포량고를 건설하였고, 이듬해인 1872년에는 승군 50명과 총섭 1명을 두게 하여 전등사는 다시금 국난 극복의 호국 도량으로 자리매김되었다.

 

뿐만 아니라 전등사는 호국기도 도량으로 널리 알려져 창건 이래 나라의 역사를 움직였던 인사들이 꾸준하게 찾는 수도권 최고(最古)의 기도 도량으로 손꼽힌다. 현재 전등사에는 대웅보전, 약사전, 범종 등 보물급 유적을 비롯해 국가사적, 인천시 지정 유형문화재 등 무수한 문화 유적을 간직하고 있다.

 





삼랑성이야기

 

단군의 세 아들이 쌓은 삼랑성

 

남한에는 단군과 관련된 유적이 두 곳밖에 없다. 그런데 그 두 곳이 모두 강화도에 있다. 단군께서 나라의 안녕과 백성들의 평안함을 기원하며 하늘에 제사를 드리던 참성단(전국체육대회의 성화를 이곳 참성단에서 밝히는 이유도 단군과 관련된 이유에서다.)과,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고 전해지는 삼랑성이 그것이다.

 

삼랑성의 원래 이름은 발이 세 개 달린 솥을 엎어놓은 모습이라는 정족산성(鼎足山城)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단군의 아들과 관련된 삼랑성이란 이름으로 부르기를 더 좋아한다.

 

그 옛날 단군께서는 세 아들이 있었다. 마니산에 참성단을 쌓은 단군은 정족산에 성을 쌓기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큰 규모의 공사이기에 간단히 되는 것은 아니었다. 단군은 항상 생각을 기울여 끊임없는 꿈만이 젖어 있었다.

 

"정족산에 성을 쌓아 외부에서 침입하는 적을 막아야만 했다. 여러 가지로 생각하였으나 좀처럼 좋은 방법이 없었다. 너희들 좋은 방책은 없겠느냐" 단군은 어느 날 세 왕자에게 의논을 했다. 왕자들은 어이하려는지 자신 있게 답을 한다. "크게 염려하지 마십시오. 저희 세 사람이 힘을 합쳐 반드시 훌륭한 성을 쌓아 보여 드리겠습니다."

 

이에 단군께서는 "성을 쌓으려면 많은 돌과 흙을 운반하지 않으면 안될 터 인데…?" 이에 아들들은 "하늘의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저희가 힘을 합치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 생각 합니다"라고 말하자 "그러면 너희들에게 일임한다."

 

세 왕자는 재빨리 다음날 아침부터 성 쌓기를 시작하였다. 시작하고 보니 뜻밖에 응원하는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전국 각처에서 구름같이 큰 남자들이 공사장으로 모여들었다. "단군의 왕자들이 스스로 축성하기 시작했다는 말을 듣고 재빨리 달려왔습니다." 입에서 입으로 동일한 말을 하면서 나타난 사람들은 가지런히 체격 좋은 사람들과 근력이 두드러진 장사들이었다. 주변에 있는 산으로 나갔으리라 생각했는데 큰 바위를 주먹으로 두드려 쪼개 내여 적당한 돌을 만들어 이쪽 산으로 던지는 것이었다. 그 돌은 하나하나가 들어맞는 중량으로 보이는 즉시 성벽이 되어 진다. 공사는 점점 박차를 가해 진척되었는데 겨우 한 달도 못되어 난공사인 산성이 이루어 졌다.

 

이에 단군은 "어찌되었던지 참으로 훌륭히 쌓아 올렸다. 이로써 베개를 높이하고 잘 수 있겠다. 너희들의 충성은 후세 자손들까지 반드시 말로 이어질 것이다. " 단군은 공사에 관계한 장사들에게 두터운 인사를 베풀고 세 왕자에게는 정족산의 봉우리를 각각 하나씩 안겨주고 성을 지키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세 왕자들은 축성하고 각기 세 봉우리를 지킴으로써 이 성을 삼랑성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강화도 남단 정족산 산등성이를 따라 단군의 세 아들 부소(扶蘇).부우(扶虞).부여(扶餘)가 쌓았다는 삼랑성(三郞城)이 있는데 전등사(傳燈寺)는 이 성의 동북쪽에 위치해 있다. 현재 이 성의 문(동문, 남문)들이 전등사의 출입구로 사용되고 있다.

[보문사 홈피에서 발췌]








[전설 속 전등사]

 

은행나무

 

전등사에는 두 그루는 커다란 은행나무가 있다. 수령이 5백 년이 넘는 나무들이다. 한 나무는 노승나무, 다른 한 나무는 동승나무로 불리는가 하면 암컷, 수컷으로 불리기도 한다. 은행나무는 암컷과 수컷이 서로 마주보고 있어야 열매를 맺는다. 그런데 전등사 은행나무는 꽃은 피어도 열매가 맺지 않는다고 한다. 이 신기한 나무들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강화도령 철종 임금 때의 일이다. 조정에서는 전등사에 은행을 스무 가마나 바치라고 요구한다. 전등사 은행나무는 기껏해야 열 가마밖에 열매를 맺지 않는데 스무 가마를 요구하니 관리들의 횡포가 이만저만 심한 게 아니었다.

 

이 지시를 듣게 된 동승이 노스님께 고했다.

“스님! 정말 관가에서 너무들 하는 것 아닙니까요?”

“허허, 참으로 난감한 일이다. 얘야, 그렇다고 그 사람들을 미워해선 안 되느니라. 참아야 하느니…….”

노스님은 이렇게 타일렀지만 자신도 깊은 고민에 빠졌다.

은행 스무 가마를 내놓을 수도 없었고 관리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더욱 더 불교를 탄압할 것이 분명했다. 노스님은 하는 수 없이 백련사에 있는 추송 스님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추송 스님은 도력이 높기로 소문이 난 분이었다.

며칠 후 추송 스님이 전등사에 나타났다.

곧 전등사 일대에 ‘전등사 은행나무에서 은행이 두 배나 더 열리게 하는 기도가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추송 스님의 3일 기도를 지켜보았다. 그 중에는 관리들도 섞여있었다.

“어떻게 은행이 두 배나 많이 열린단 말인가?”

“맞아! 추송 스님이 제 아무리 정성을 드려도 소용없는 짓이겠지.”

사람들은 저마다 이렇게 수군거렸다.

 

이윽고 기도가 끝나는 날이었다.

갑자기 추송 스님의 기도를 지켜보던 관리들의 눈이 얻어맞은 것처럼 퉁퉁 부어버렸다.

“이제 두 그루의 나무에서는 더 이상 은행이 열리지 않을 것이오.”

추송 스님이 기도를 끝내고 사람들에게 말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바로 그때 때 아닌 먹구름이 전등사를 뒤덮더니 비가 무섭게 내렸다.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며 일제히 땅에 엎드렸다.

 

얼마 후 사람들이 고개를 들었을 땐 추송 스님은 물론 노스님과 동자승까지 모두 사라졌다. 사람들은 보살이 전등사를 구하기 위해 세 명의 스님으로 변해 왔다고 믿게 되었다. 그 때부터 전등사 은행나무는 열매를 맺지 않았다.

 





















나부상

 

전등사의 대표적인 건물인 대웅보전은 그 자체만으로도 조선 중기의 건축 양식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전등사 대웅보전이 세상에 더욱 유명하게 된 것은 대웅보전의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나부상(裸婦像) 때문이다.

 

대체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신 신성한 법당에 웬 벌거벗은 여인인가 하고 궁금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나부가 아니라 원숭이로 간주하는 경우도 있다. 원숭이는 사자나 용과 마찬가지로 불교를 수호하는 짐승으로 중국, 인도, 동남아시아의 사찰에 모셔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등사 대웅전의 조각상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나부상이라는 데 의견이 더 많다.

 

이 나부상과 관련해서는 유명한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전등사는 1600년 이상의 역사를 간직한 가운데 여러 차례 화재를 겪고 이 때문에 대웅보전도 여러 번 중건되었다. 그 중 지금의 나부상이 만들어진 것은 17세기 말로 추측된다. 당시 나라에서 손꼽히는 도편수가 대웅보전 건축을 지휘하고 있었다. 고향에서 멀리 떠나온 그는 공사 도중 사하촌의 한 주막을 드나들며 그곳 주모와 눈이 맞았다. 사랑에 눈이 먼 도편수는 돈이 생길 때마다 주모에게 모조리 건네주었다.

 

“어서 불사 끝내시구 살림 차려요.”

“좋소. 우리 그림 같은 집 한 채 짓고 오순도순 살아봅시다.”

도편수는 주모와 함께 살게 될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대웅보전 불사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공사 막바지에 이른 어느 날 그 주막으로 찾아가보니 여인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며칠 전에 야반도주를 했수. 찾을 생각일랑 아예 마시우.”

이웃집 여자가 말했다.

 

도편수는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다. 여인에 대한 배반감과 분노 때문에 일손이 잡히지 않았고 잠도 오지 않았다. 그래도 도편수는 마음을 다잡고 대웅전 공사를 마무리했다. 공사가 끝나갈 무렵 대웅전의 처마 네 군데에는 벌거벗은 여인이 지붕을 떠받치는 조각이 만들어졌다. 이것이 전등사 대웅보전에 얽힌 전설이다. 이 나부상이 더욱 재미있는 것은 네 가지 조각이 제각각 다른 모습이라는 점이다. 옷을 걸친 것도 있고 왼손이나 오른손으로만 처마를 떠받든 조각도 있으며 두 손 모두 올린 것도 있기 때문이다.

 

이 전등사 대웅전의 나부상은 희랍의 시지프스 신화를 연상케 한다. 그런가 하면 부처님을 모신 성스러운 전각이지만 그런 조각상을 세운 당시 도편수의 익살과 풍자, 그런 파격을 기꺼이 받아들일 줄 아는 전등사 스님들의 자비로운 마음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과연 그 대웅전을 중건했던 도편수나 스님들은 무슨 뜻으로 나부상을 올려놓았던 것일까?

단순히 사랑을 배신하고 욕심에 눈 먼 여인을 징계하고자 하는 뜻만은 아닐 것이다. 도망간 여인이 잘못을 참회하고 세상을 올바르게 살아가라는 염원도 들어있는 것이다. 또 그런 조각상을 보게 될 후대의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자비로운 마음을 본받으라는 뜻도 담겨 있으리라.

 

그렇기에 전등사 대웅보전의 나부상은 보면 볼수록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든다.

 








대웅보전


보물 제178호로 지정된 대웅보전은 규모는 작지만 단정한 결구에 정교한 조각 장식으로 꾸며져서 조선중기 건축물로서는 으뜸으로 손꼽힌다. 특히, 건물 내부 불단위에 꾸며진 닫집의 화려하고 정치한 아름다움은 건축공예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보마다 용틀임으로 장식되면서 용두가 네 귀퉁이에서 돌출해 나오며 천장 주변으로는 연, 모란, 당초가 화려하게 양각되고 중앙 우물 반자 안에는 보상화문이 가득 채워져 있다.

 

더욱 희귀한 것은 물고기를 천장에 양각해 놓아 마치 용궁인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닫집 왼쪽 천장에는 양쪽에 용두장식을 하고 몸체에 용틀임을 한 작은 용가(龍架)의 배 부분에 아홉 개의 방울을 달아 놓고 끈을 달아 불단까지 늘여놓아 이를 잡아 흔들면 아홉 개의 방울이 동시에 울어 구룡토음의 장관을 이루게 했던 적도 있었다.

 

내부에 있는 유물로는 석가여래 삼존과 1880년에 그린 후불탱화, 1544년 정수사에서 개판한<법화경>목판 104매가 보관되어 있다.

 

현재의 건물은 1621년(광해군 13)에 지은 정면 3칸, 측면 3칸 형식의 목조 건물이다. 정면 3칸은 기둥과 기둥 사이를 같은 길이로 나누어 빗살문을 단 형식이다. 좌우 옆면은 벽이나 앞 1칸에만 외짝으로 문이 있다. 기둥은 대체로 굵은 편이며 모퉁이 기둥은 높이를 약간 높여서 처마 끝이 들리도록 했다.

 

대웅보전의 외관상 특징은 우선 비슷한 시기의 다른 건물에 비해 약간의 변화를 보여 주고 있다는 점이다. 곡선이 심한 지붕과 화려한 장식(나부상, 동물 조각, 연꽃 조각 등)이 그런 특징을 잘 보여 준다.

[출처: 보문사 홈페이지]



[전등사의 문화유물]


보물 제178호 대웅보전

보물 제179호 약사전

보물 제393호 범종

보물 제1785호 목조석기여래삼불좌상

보물 제1786호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

보물 제1908호 묘법연화경(법화경)목판

국가사적 제130호 삼랑성

인천유형문화재 제43호 약사전 현왕탱

인천유형문화재 제44호 약사전 후불탱

인천유형문화재 제46호 청동수조

인천유형문화재 제47호 업경대

인천유형문화재 제48호 대웅보전 수미단

인천문화재자료 제7호 대조루

인천문화재자료 제21호 대웅보전 후불탱

인천문화재자료 제22호 강설당 아미타불탱

인천기념물 제36호 양헌수 승전비

인천향토유적 제11호 정족산가궐지

인천향토유적 제12호 선원보각지























[전등사의 스님]

 

아도화상

 

전등사를 창건한 것으로 알려진 아도화상(阿道和尙)은 위나라 사신이었던 아굴마와 고구려 여인 고도녕 사이에서 태어났다. 5세에 출가한 뒤 16세에 위나라 현창화상(玄彰和尙) 밑에서 공부한 뒤 19세에 귀국하였다. 신라로 가서 불교를 홍포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불교를 꺼리는 사람들에 의해 목숨까지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다. 미추왕 3년(264년)에 성국공주(成國公主)의 병을 치료한 뒤 왕의 허락으로 흥륜사(興輪寺)를 창건한 뒤 불법을 펼쳤다. 아도화상을 숨겨주었던 모례의 누이가 출가하여 절을 지어 영흥사(永興寺)라 하였다. 아도화상에 대해서는 기록에 따라 다른데 서축사람이라고도 하고 삼국사기 눌지왕 때 묵호자와 같은 사람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아도화상과 관계가 깊은 절은 경북 선산의 도리사로 눌지왕 2년(418년)때 개창했다고 한다. 또한, 도리사를 개창한 후 황악산을 바라보며 손가락으로 절터를 가리키어 지은 절이 지금의 직지사란 이야기도 있다.

 

서운스님

 

전등사 남문 종해루를 지나 조금 올라가면 왼쪽 언덕으로 부도전이 나온다. 이곳에는 서운 큰스님을 비롯해 그 동안 전등사를 거쳐 간 스님들의 부도가 세워져 있다. 서운 큰스님은 1903년, 경북 칠곡군에서 태어났다. 부잣집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스님의 속명은 김한기였다. 한기는 어려서부터 무엇 한 가지 부러울 게 없이 지냈으며, 공부 역시 마음껏 할 수 있었다. 한기 소년은 일찌감치 서울의 보성고보에 진학하여 신학문을 배웠으며, 유교경전과 노장철학에도 통달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불교에도 깊은 인연이 있어 각황사(지금의 조계사) 학생회에 참여하여 당시 교학의 으뜸이었던 박한영, 한용운 스님 등에게 불교의 교의와 선지를 익혔다. 그리하여 김한기는 서양 철학은 물론 불교와 유교까지 통달하여 친구들로부터 ‘걸어다니는 철학사전’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였다. 그는 보성고보를 졸업할 무렵 “이제 내가 더 배워야 할 것은 부처님 경전 밖에 없다.”고 선언할 만큼 불교에 깊이 심취했다. 하지만 그는 출가를 하는 대신 고시 공부에 전념해 공직자가 되었다. 그러면서도 속인 신분으로 파계사 성전암에서 참선 수행을 마치고 문득 한 소식을 전했다.

 

내가 청산과 백운 사이에 이르니 그림자와 실체도 없고 모양까지 없도다.

 

이 게송에 탄복한 제산 대선사는 그에게 ‘득장(得杖)’이라는 호를 내렸고, 쌍계사 조실이었던 설석우 대조사는 ‘백룡(白龍)’이라는 거사호를 내렸다. 뿐만 아니라 김적음 대선사와 박금봉 대선사 등도 스님의 선기를 크게 인정했다.

 

그의 직위는 계속 올라 마흔일곱 살이 되던 1950년에는 ‘서울전매서장’이라는 직책을 맡게 되었다. 6·25 전쟁이 터졌을 때 그는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하고 서울에 남아 있었다. 하지만 9·28 수복 후에는 ‘인민군에게 부역했다’는 엉뚱한 누명을 쓰고 헌병대로 끌려가 한 달 동안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결국 철저한 조사 끝에 무혐의로 석방되기는 했으나 집에 돌아와 보니 외동딸이 스물다섯 살의 나이로 죽은 뒤였다. 외동딸 혜숙은 아버지가 죄 없이 헌병대로 끌려가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아 병을 얻고 끝내 이승을 떠났던 것이다. 속세의 삶에 더 이상 미련이 없었던 그는 제산 스님을 은사로 득도를 했다. 출가하기엔 너무도 늦은 나이, 늦깎이 중의 늦깎이로 출가한 그는 상주 갑상사 등에서 피나는 정진을 거듭한다. 하지만 서운 스님에게는 많은 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불교정화운동이 일어났으니 속히 상경하시오.” 동산·효봉 큰스님이 서운 스님을 불러올려 종단의 중책을 맡긴 것이다. 마흔일곱 살까지 국가의 최고 행정을 맡았던 서운 스님인지라 불교 정화운동의 회오리를 누구보다 능숙하게 처리할 수 있었다. 그 때문에 서운 스님은 늦깎이임에도 불구하고 총무원장을 세 번이나 역임했고, 동국학원 이사장을 두 번이나 맡으며 한국 불교를 크게 중흥시켰다.

 

1983년부터 스님은 전등사에 주석하시면서 참선 수행에만 전념한다. 그리고 1995년 11월 15일 여느 날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먼 산을 한 번 쳐다보고는 자리에 누우신 스님이 제자들에게 운을 뗐다. “나는 오늘 갈 것이다. 오고 감이 없는 곳에서 새로운 삶을 살 것이다. 내가 죽거든 내 몸에서 사리를 수습하지 말 것이며 다비식도 조촐하게 해라. 낡은 몸을 태우는 일에 돈을 낭비하는 것은 불조를 욕되게 하는 짓이다.” 이렇게 당부한 서운 스님은 다음과 같은 열반송을 남겼다.

 

비록 형상 없지만 두드리면 곧 신령스러움이 있고 삼독으로 화탕지옥에서 평생을 지냈다.

이제 몸 버리고 고향에 돌아가니 차가운 달, 빈 산이 진리의 몸이로다.

 

공교롭게도 스님은 출가일과 득도일, 열반일이 똑같았다. 스님은 세수 아흔셋, 법랍 마흔다섯 해로 열반에 드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