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평산행(둘레길 등)/[강화]나들길

[강화나들길 3코스] 고려왕릉 가는 길 (후기)

약초2 2019. 2. 5. 16:17

강화나들길 열 번째 이야기

 

3코스 고려왕릉 가는 길

고려왕릉을 찾아서!

 

1.날짜: 2019년 1월 29일(화)

2.답사코스: 온수공영주차장→곤릉입구→석릉→가릉

3.날씨: 맑고 청명함.

 

4.답사시간

-08:49 온수리 공영주차장 맞은편 CU마트 옆 나들길 도장함 발(답사시작)

-08:57 강화 온수리 성공회

-09:30 길정저수지 제방길과 이규보묘 가는길 갈림길

-09:59 길직1리 다목적회관

-10:17 이규보 묘

-10:31 연등국제선원

-10:42 나들길흙집 착 / -10:54 발 (12분 휴식)

-10:58 다담원

-11:29 길정저수지 방향 만나는 곳

-11:41 곤릉 도로 표지판 있는 곳

-12:06 석릉 착 / -12:29 발 (23분 휴식)

-13:35 진강정

-13:40 강화능내리석실분

-13:44 가릉

-13:57 탑재삼거리 버스정류소

※ 휴식 포함하여 5시간 8분 걸렸는데 휴식 제외하면 4시간 33분 걸렸다.

 

5. 답사 후기

 

일주일 만에 다시 찾은 강화나들길 열 번째 이야기는 제3코스 고려왕릉 가는 길이다.

 

강화나들길 제3코스 고려왕릉 가는 길

온수공영주차장 ~ 가릉

 

거리: 16.2km / 소요시간: 5시간 30분 / 난이도: 하

온수공영주차장-(0.2km)-성공회온수성당-(2.4km)-길정저수지-(2.9km)-이규보묘-(3.8km)-곤릉-(1.9km)-석릉-(5km)-가릉


[코스정보]

 

온수리 공영주차장에서 전등사 내를 도는 코스(1시간 소요)와 온수리 성공회성당으로 바로 걷는 코스가 있다. 길정저수지의 잔물결을 따라 아름드리 당산나무들이 우거진 마을을 지나게 된다. 바람보다 먼저 눕는 파릇파릇하게 자란 논의 정경이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르다. 하늘을 찌르듯 높다랗게 핀 등꽃을 보기 위해 길을 제촉하다 보면 개경으로 돌아가지 못한 슬픔을 간직한 고려 왕릉들이 진강산 자락을 베개로 삼아 누워서 나들길을 걷는 나들이꾼의 발소리를 말없이 반긴다.

 

전등사는 현존하는 한국 사찰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호국불교 근본 도량이다. 시간이 된다면 경내를 둘러보고 북문으로 나오면 마치 깊은 산 속으로 들어온 것 같은 숲길을 지난다. 마을길을 따라 고려 최고의 문장가 이규보 묘를 지나, 우리나라에 단 두기밖에 없는 고려 왕비의 능으로 가는 숲길은 「전국 아름다운 숲길 베스트 10」으로 선정된 가장 인기 있는 코스 중 하나다. 만일 안개가 꼈다면 길정 저수지 쪽으로 가보라. 둑길에 넘실대며, 이리저리 휘돌아 치는 안갯속을 헤치고 둑길은 걸어보라. 「삼포로 가는 길」이 여기던가? 하는 착각을 순간 하게 되는, 전 구간이 노란 양탄자를 펼쳐놓은 평탄한 길이다.

 

[볼거리]

 

▶ 전등사

현존하는 한국 사찰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가졌으며 부처님의 가피로 나라를 지킨 호국불교 근본도량으로 역사와 권위를 간직한 사찰이다. 삼랑성은 단군의 세 아들이 쌓은 고대의 토성이었고, 삼국시대에는 토성 자리에 석성을 쌓아올려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전등사에는 대웅보전, 약사전, 범종 등 보물급 유적을 비롯하여 많은 문화 유적을 간직하고 있다. 대웅전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나부상은 벌거벗은 여인을 묘사하고 있어, 대웅전 중수를 맡은 도편수가 달아난 여인에 대한 배반감으로 조각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 온수리 성공회성당

한국의 전통적인 건축기법에 서양 그리스도교 교회양식을 적용한 동서 절충식의 목조건물이다. 1906년 영국인 주교 조마가(Mark N. Trollope)가 세웠으며 성 안드레 성당으로도 불린다. 본당과 종을 달아놓은 2층 문루로 이루어져 있는데, 본당은 정면 9칸 측면 3칸의 규모이다. 용마루 양 끝에 십자가를 장식해놓았으며, 종루에는 본래 서양식 종이 달려 있었으나 1945년 일제에 징발당한 뒤 1989년 새로 우리나라 전통양식의 종을 제작하여 걸었다.

 

▶ 이규보 묘

명조 때 문과에 급제했으나 이듬해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천마산으로 들어가 호를 백운거사라 하고 글을 쓰며 지냈다. 그는 그곳에서 「천마산지」등을 썼는데 특히 영웅 서사시 「동명왕 편」은 민족의 영웅 동명왕의 생애와 발자취를 노래한 서사시로서 우리 문학사에 남긴 큰 업적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고려의 이태백」이라고 불렸다.

 

▶ 고려왕릉

현재 강화도에 남아 있는 고려의 능은 석릉곤릉홍릉가릉의 4기뿐인데 규모는 아주 작고 봉분과 망주석과 혼유석 정도의 시설밖에 없으며 호석과 난간석을 갖춘 전형적인 왕릉 구조는 찾아 볼 수가 없다.

[출처: 강화나들길 홈피(www.nadeulgil.org/)]

    


3코스(고려왕릉 가는 길) 시점 도장함(공영주차장 맞은편에 있는 CU편의점 옆에 있다)


오늘도 승용차를 이용했다.

초지대교를 건너 온수리 공영주차장에 도착한 후 집에서 준비한 아침을 먹고, 주차장 건너편에 있는 CU편의점 옆 강화나들길 도장함에서 도장을 찍고 출발했다.(08:49)

    


온수리 성공회 성당 입구의 솟을 대문


곧바로 나오는 발밤이 말뚝 표지판(3-02) 옆에 세워진 녹슨 철 표지판이 서 있는 골목길 앞에서 골목길로(온수시장 방향) 들어선다.

강화남부농협 자재센터의 2층 건물을 지나, 마을 골목길을 진행하는데 강화나들길에서 세운 감사문 안내판(강화나들길을 허락해 주신 마을 주민께 감사드립니다.)이 서 있다. 감사문 안내판은 이후에도 자주 나온다.

이후 벽화가 그려진 집들을 지나면 성공회 온수리성당 앞이다.

 

강화 온수리 성공회 (江華 溫水里 聖公會)

인천광역시 유형 제52호

소재지: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505-3

 

이 교회는 1906년 영국인 주교 조마가(Mark N. Trollope)가 지은 성당 건물로 우리나라의 초기 서양 기독교 교회양식의 건물이다.

성당은 정면 9칸 측면 3칸의 본당과 정면 3칸 측면 1칸의 문루(정면 3칸 중 중앙 1칸을 2층 종루로 삼은 문루로 사용하고 있다)로 이루어진 건물이다. 한국의 전통적인 건축기법을 활용하여 종교적인 성당건축 방법과 공간 구성을 확립한 동서 절충식 강당형의 목조건물이다.

[출처: 현지 안내문]

 

성당 앞에는 사제관 건물이 있는데 입구에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강화 온수리 성공회 사제관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1호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505-7

 

강화 온수리 성공회 사제관은 영국인 선교사들이 1898년 온수리에 선교를 시작한지 8년 후인 1906년에 길강준 신부가 건축한 건물이다. 1933년 한차례 중수가 있었지만 건축 당시의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이 사제관의 평면구성은 전통한옥이지만, 내부는 매우 다양하게 조합되어 영국인 신부의 한국전통주거문화에 대한 적응방식을 이해할 수 있다. 천정은 구조미를 살리기 위해 노출시켜 목재의 질박한 자연미를 표현하였다. 건물 형식은 「ㄷ」자형 기와집 구조이다.

[출처: 현지 안내판]

 

이제 다시 성공회 성당으로 와서 문루에 걸려있는 종(본래 서양식 종이 달려 있었으나 1945년 일제에 징발당한 뒤 1989년 새로 우리나라 전통양식의 종을 제작하여 걸었다)을 바라보며 성당 내부로 들어가 본다. 조광원 노아신부 독립운동 기념비, 김여수마태의 묘, 김여수마태 독립운동 순국비가 우측에 자리 잡고 있고, 좌측에는 비석 3기가 세워져 있다.

 

정면으로 동서 절충식의 목조건물인 본당이 자리 잡고 있는데 정면 9칸 측면 3칸이다. 측면의 중앙에 「大韓聖公會(溫水里) 성안드레성당」이라고 쓴 현판이 걸려있다. 본당 뒤로는 넓은 마당과 그 뒤로 현대식으로 지은 성당 건물이 들어서 있다.

이제 성당 구경을 마치고 양쪽으로 십자가 표시가 되어있는 사각기둥의 도열을 받으며 요철 돌바닥 길을 지나간다.

    


길정저수지를 좌측에 두고 이규보 묘 가는 길


5분 정도 포장도로를 따라 진행하니 강화군 노인문화센터 건립공사 조감도가 세워져 있는 곳이 나오고 4분을 더 진행하니 발밤이 말뚝 표지판(3-11. 종점 14.2km, 시점 1km)이 나온다. 그 옆에는 시인 함민복의 푯말(농부들은 흙을 향해 허리를 굽히는 게 모든 일의 시작이다.)도 세워져 있다.

 

이후 3분 정도 더 진행하니 200년 된 느티나무 보호수가 나오고, 4분을 더 진행하면 강화학생체육관 건물이 나온다. 체육관 건물 옆에는 강남중학교가 있다.

 

강화학생체육관 건물에서 6분을 진행하니 발밤이 말뚝 표지판(종점 13.2km, 시점 2km)이 나온다. 새롭게 포장된 도로는 여기까지고 이제 비포장도로의 흙길을 걷는다.

이후 비포장 흙길은 포장도로로 바뀌고 2분 후 분기점에 도착했다. 좌측은 길정저수지 제방길, 우측은 이규보 묘 가는 길이다.(09:30)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우측의 이규보 묘로 진행했다.

한동안 길정저수지와 나란히 가는 1차로 포장도로를 따라 진행하다 길정저수지가 시야에서 사라질 무렵 발밤이 말뚝 표지판(3-19. 종점 12.2km, 시점 3km)이 나온다.

    


이규모 묘 입구 모습


이후 12분을 더 진행하면 다시 발밤이 말뚝 표지판(종점 11.2km, 시점 4km)이 나오고, 4분 후 길직1리 다목적회관이 나온다.(09:59)

길직1리 다목적회관의 사각정자 옆 느티나무도 수령이 꽤 오래된 듯 한데 보호수로 지정은 안 돼 있다.

 

길직1리 다목적회관에서 12분을 진행하니 이규보 묘 도로표지판이 나오면서 조금 높은 도로에 올라서니 정면으로 논 건너편으로 야산에 자리 잡은 이규보 묘가 보인다.

 

이규보 묘로 가는 입구의 도로 옆에 발밤이 말뚝 표지판(3-32. 종점 10.2km, 시점 5km)이 세워져 있다.

이후 2분 정도 더 가면 이규보 묘 앞이다. 이곳에도 발밤이 말뚝 표지판(3-33)이 세워져 있다.

 

이규보 묘 (李奎報 墓)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15호

소재지: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길직리 산 115

 

이규보(1168~1241)는 명종 19년(1191) 진사시에 합격한 뒤 당시 실권자인 최충헌에게 기용된 문인으로 문하시랑평장사에 이르렀다.

「동명왕편(東明王篇)」을 통해 고구려인의 큰 포부와 활동을 읊어 민족의식을 크게 떨쳤다. 또 몽고군의 침입을 받게 되자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대장경을 조판할 때 대장각판군신기고문(大藏刻版君臣祈告文)을 지었다. 문집으로 동국이상국집이 있다. 묘역의 석물들은 고려 강도시기의 대표적인 석물이다.

[출처: 현지 안내판]

 

대형 비석이 2개가 있고 좌 ․ 우측으로 건물들이 들어 서 있다. 앞쪽의 무덤은 비석이 없어서 누구의 묘인지 모르겠고 이규보의 묘는 뒤에 있다.

    


펜션 나들길흙집


나들길은 이규보의 묘를 지나 산으로 이어진다.

산길은 그리 오래 이어지지 못하고 이내 포장도로로 떨어진다.

이규보 묘에서 8분 정도 진행하면 연등국제선원이 나오고, 다시 산길이 이어진다.

 

발밤이 말뚝 표지판(3-37. 종점 9.2km, 시점 6km)을 지나 3~4분 정도 진행하면 산길은 끝이 나고 펜션 나들길흙집이 나온다.

아담하게 잘 꾸며져 있는 이곳 벤치에 앉아 12분 정도 휴식을 했다.



석릉의 뒷 모습


그리곤 4분 후 다담원이 나오는데 줄이 입구를 막고 있어서 다른 곳으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표지기(리본)가 안 보인다. 표지기는 다담원 내부에 있어서 줄을 넘어서 건물 내부로 진입을 했다.

 

마당을 가로 질러 다시 산길로 들어선다.

중턱에 올라가니 새로 조성된 멋진 묘역이 있는데 비석이 없어서 누구의 묘인지 확인 못하고 나들길로 내려갔다.

 

다담원에서 얕은 산길을 거쳐 17분 정도 진행을 하니 효자교가 나온다. 효자교 앞에 발밤이 말뚝 표지판(3-46)이 세워져 있다.

효자교를 건너 3분을 진행하니 삼거리가 나온다.

삼거리에는 각종 광고판과 도로표지판(←화도, 외포리, 길정리 / 서울, 강화, 두운리 →), 발밤이 말뚝 표지판 등이 세워져 있다.

 

삼거리에서 이제 고려왕릉로를 따라 좌측으로 진행한다.

6~7분 정도 진행하니 삼거리가 나오는데 표지판(←강화나들길, ↑X 나들길 아님)과 발밤이 말뚝 표지판(종점 7.2km, 시점 8km)이 세워져 있다. X표 쳐져 있는 표지판을 보고는 수많은 나들길 답사 선배님들이 우회전해서 많이 갔나보다 하고 생각을 해봤다.

 

계속 직진했다. 4분 후 길정저수지 쪽에서 오는 길과 만나는 지점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고려왕릉로를 버리고 우측의 약간 좁은 흙길로 진행한다. 입구 우측에 「펜션. 쉴만한물가」라고 써진 작은 입간판이 세워져 있다.

 

6분 후 삼거리가 나오는데 이곳에도 아까처럼 우회전 방향으로 나들길 아님이라고 써진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발밤이 말뚝 표지판(3-52. 종점 6.2km, 시점 9km)도 세워져 있다.

 

5분 후 차가 다닐 수 있는 1차로 포장도로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곳에 「곤릉→」도로 표지판이 설치되어 있는 것이다.

 

아뿔싸!

그러면 곤릉을 지나쳤다는 예기인데…

도대체 어떻게, 어디서 지나쳤을까?…

명색이 3코스 고려왕릉 가는 길인데 고려왕릉의 첫 번째 목적지인 곤릉을 놓치다니, 이것 참! 난감했다.

 

곤릉 입구의 도로에서 되짚어 가자니 곤릉 입구도 정확히 모르는 시점에서 되짚어 갈 수도 없는 노릇이라 숙제로 남겨두고 우회전하여 도로 따라 진행했다. 뒤편에는 권능교회가 보였다.

 

이제 포장도로에서 산길을 들어선다.

곤릉 도로 표지판이 있는 곳에서 13분을 진행하니 말라버린 약수터와 약수터 옆에 화남 고재형 선생이 쓴 심도기행의 일부 중 하나인 진강산 귀운(鎭江山 歸雲) 시가 적힌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계속해서 산길로 6분을 진행하니 「강화 석릉 ←50m」 표지판 2개가 나타난다.

완만하게 20m 올라가면 또 표지판「강화 석릉 30m→」이 나온다. 이곳에 발밤이 말뚝 표지판(3-56. 종점 4.9km, 시점 10.3km)도 세워져 있다.

 

이후 3분을 완만하게 올라가면 석릉 앞이다.

심도기행을 쓴 화남 고재형 선생의 석릉(碩陵) 시가 써진 표지판이 세워져 있고, 안내문(강화나들길 X 되돌아가세요.)과 그 옆에 강화나들길 표지판「③ 능묘가는길」이 세워져 있다.

이제 완만한 석축계단 4번을 올라가면 석릉이다.

석릉 우측에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석릉(碩陵)

사적 제369호

소재지: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 길정리 산 182

 

고려 21대 왕인 희종(熙宗. 재위기간 1204~1211)의 무덤이다. 희종은 최충헌의 횡포가 심해지자 그를 제거하려다 실패하고 재위 7년(1211)에 폐위되어 교동도로 유배되었다. 고종 24년(1237) 8월 용유도에서 세상을 떠나 이곳에 안장되었다. 능은 지름 8m의 원형 봉분과 주위에 「ㄷ」자형의 석축으로 낮게 둘러싸여 있으며, 묘비 1개와 문인석 2구가 있다. 2002년에 발굴조사를 통해 창자상감국화문잔탁 등 12~13세기 상감청자 전성기에 만들어진 유물이 출토되었다.

[출처: 현지 안내문]

 

희종은 신종의 첫째 아들로 어머니는 정선태후 김씨이며, 부인은 성평왕후 왕씨이다. 1204년 왕위에 올랐고, 최충헌을 제거하려다 실패하여 희종 7년(1211)에 왕의 자리에서 쫓겨나 강화 교동으로 갔다. 고종 24년(1237) 57세의 나이로 죽자 낙진궁으로 옮겼으며, 10월에 덕정산 남쪽에서 장례를 지내고 석릉이라 하였다. 조선 현종 때 강화유수 조복양이 찾아내어 다시 무덤을 쌓았는데, 그 뒤 석물도 부서지고 무너진 무덤을 1974년 손질하여 고쳤다. 석릉 주변에는 최근에 고려시대 귀족의 무덤이라 생각되는 돌방무덤(석실분)들이 많이 발견되었다.

    


가릉


가릉


햇살 좋은 석릉에서 23분간 휴식하다 이제 되짚어 내려와 3분 후 강화 석릉 30m 전 지점을 지나고, 2분 더 진행하여 강화 석릉 200m 전 지점을 지났다.

그리고 3분 후 사거리안부에 도착했는데 이곳에 이정표(←길정리<곤릉>, ↑어두마을, →진강산, ↓석릉)와 발밤이 말뚝 표지판, 강화 석릉 350m 표지판, 벤치 2개가 세워져 있다.

 

우회전(진강산 방향)하여 4분을 완만하게 올라가니 발밤이 말뚝 표지판(3-58)과 함민복 시인의 시어가 적힌 푯말(산이여, 당신 품에 안겼다가 떠나갑니다.)이 나온다.

 

1분 후 다시 사거리안부에 도착했는데 이곳은 골이 깊게 파여 있었다. 좌측으로 골이 깊게 파인 곳을 내려간다.

 

이후 7~8분 정도를 내려가니 발밤이 말뚝 표지판(3-61. 종점 3.8km, 시점 11.4km)이 나오고 평지길이 이어진다. 그리곤 4~5분 정도 더 진행하니 카톨릭대학교에서 설치한 출입금지 안내판이 나온다. 출입금지 안내판은 이후에도 여러 차례 나온다.

 

좌측으로 카톨릭대학교를 끼고 계속 내려간다.

출입금지 안내판이 처음 나온 곳에서 7분을 완만하게 내려가니 초록색의 철문이 나온다. 철문이 잠겨 있어도 우측으로 길이 나 있어서 진행할 수 있다. 철문 앞에는 폭 2m 정도로 결빙이 되어 있어서 조심스럽게 얼음판을 지나갔다.

 

이제 길이 넓어지면서 진행하는데 2분이 채 되지 않은 지점에 발밤이 말뚝 표지판(3-64. 종점 3.2km, 시점 12km)이 나온다. 이후 소나무 숲을 지나는데 리기다소나무도 눈에 자주 띈다.

 

개인이 만든 듯한 쉼터가 나오는데 이곳에도 발밤이 말뚝 표지판(3-66)이 세워져 있다.

 

7분 후 발밤이 말뚝 표지판(3-68. 종점 2.1km, 시점 13.1km)이 나오고, 8분을 더 진행하니 리기다소나무에 함민복 시인의 푯말(사랑은 곡선이다. 곡선의 씨앗은 하트♥다.)이 걸려 있다.

 

6분 후 다시 발밤이 말뚝 표지판(3-70. 종점 1.2km, 시점 14km)이 나온다. 그리고 1분이 채 걸리지 않은 거리에 쉼터(팔각정)가 나온다.

 

팔각정에는 진강정(鎭江亭) 현판이 걸려 있고, 내부에는 진강귀운(鎭江歸雲. 황범주 作), 진강산의 유래, 벌대총(伐大驄. 황범주 作) 등 3개의 푯말이 걸려 있다. 이중 진강산의 유래를 보면 「진강산 기슭에는 고려 희종의 능인 석릉을 비롯하여 가릉 ․ 곤릉 등이 있어 옛 도읍지의 면모를 엿볼 수 있으며, 고려시대 이래로 유명한 진강목장이 있던 곳으로 조선조 효종 임금이 타시던 명마 벌대총의 전설이 서려 있는 곳이다.」라고 쓰여 있는데 가릉과 석릉은 진강산(441m) 자락이 맞다. 하지만 곤릉은 덕정산(320m) 자락에 묻혀 있다.

 

진강정에서 3분을 진행하면 이정표(←정상 2.2km, 주차장 0.8km→)가 나오고, 2분 후 강화 능내리 석실분이 나온다.

 

강화 능내리 석실분 [ 江華 陵內里 石室墳 ]

인천 강화군 양도면 능내리에 있는 고려의 석실분.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28호.

 

시대 : 고려

성격 : 석실분

건립시기·연도 : 고려후기(1232∼1270)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 능내리 산16-1

문화재 지정번호 : 인천광역시 시도기념물 제28호

문화재 지정일 : 1995년 03월 01일

정의 :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 능내리에 있는 고려시대의 석실분(石室墳).

 

내용 : 1995년 3월 1일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28호로 지정되었다. 석실분은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며 석실 내부는 화강암을 잘 다듬어 축조하였다. 석실의 크기는 남북 장축 방향 270㎝, 너비 195㎝의 장방형으로 축조되어 있다. 고분 앞 양편에는 망주석으로 추정되는 사각 석주가 남아 있으며, 사각 석주의 3면에는 내용을 알 수 없는 문양이 양각되어 있다.

 

고려시대 지배계층의 무덤으로 알려진 이 고분은 과거 도굴로 인하여 석실이 노출되어 있어 보존·정비의 필요성이 꾸준히 제기됨에 따라 이를 위한 발굴을 2006년 말에서 2007년 초에 이르기까지 실시하게 되었다. 석실 내에는 유물 파편만 출토되었지만 봉분구조물과 석실, 건물지가 양호하게 남아 있어 고려시대 지배계급 묘제의 전형을 보여주는 사례로 확인되었다.

 

석실은 4m 범위의 풍화암반층을 파낸 후 잘 다듬어진 화강암으로 길이 2.6×1.9×2.1m 규모로 축조한 후, 천장은 3×1.1m 크기의 판석 3매로 덮고 입구는 2m 크기의 화강암 판재로 폐쇄한 구조이다. 시신을 안치하는 석실 내부 바닥 중앙에는 2.2×1.1m 크기의 석제관대를 설치하고 내부에 회를 채워 넣었다.

 

석실상부 봉분에는 호석(추정 12각형) 및 그 외부에 돌린 난간과 난간지대석, 그리고 동북과 서북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석수(동물상) 2기가 확인되었다. 석실 남편에는 제사를 지내기 위한 건물터가, 그 아래로는 길이 27m 규모의 축대가 남아 있다. 또한 석실 정중앙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네 방향에서 진단구(제사용 매납유물)로 판단되는 도기항아리가 출토된 바, 이 시기 왕릉급 고분에서 처음 발견되는 사례로 진단구와 토기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

 

석실내 출토유물로는 청자편, 각종 금은제장식 파편, 유리그릇편·구슬류, 상부원보(祥符元寶, 송(宋) 진종(眞宗) 1008∼1016 제작) 1점, 은제못, 금박장식 관재 등 소량이지만 다양하게 출토되었다. 특히 봉황머리를 나타낸 은제장식편의 경우 문양이 있는 곳에만 도금처리하여 장식적 효과가 뛰어나도록 한 것이 특징적이다.

 

의의와 평가 : 강화능내리석실분 발굴조사는 고려 강도시대(江都, 1232∼1270) 왕릉인 석릉(碩陵: 희종 1237년 몰), 가릉(嘉陵: 원종비 순경태후 1244년 몰), 곤릉(坤陵: 강종비 원덕태후 1239년 몰)에 이은 국립문화재연구소의 네 번째 왕릉급 조사였다. 이 발굴조사<2007년 발굴조사를 통해 2008년 정비>를 통해 봉분을 구성하는 난간과 지대석의 구조 및 석수의 위치가 드러났고, 석실의 입구부와 묘도(墓道)에 대한 구조 및 축조방법을 명확하게 파악하는 성과를 거뒀다. 따라서 향후 고려시대 묘제연구 및 복원·정비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할 것으로 판단된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강화능내리석실분 [江華陵內里石室墳]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강화 능내리 석실분을 구경하고 앞 쪽으로 이동하면 고려 원종(재위 1259~1274)의 왕비 순경태후의 무덤인 가릉이 있다.

 

가릉 (嘉陵)

 

사적 제370호

소재지: 인천 강화군 양도면 능내리 산16-2

 

고려 24대 원종(재위 1259∼1274)의 왕비 순경태후의 무덤이다. 순경태후는 장익공 김약선의 딸로서 고종 22년(1235) 원종이 태자가 되자 태자비인 경목현비가 되었으며, 다음해에 충렬왕을 낳았다. 지금의 자리에는 고종 31년(1244) 무렵에 사망한 뒤 모신 것으로 짐작한다. 고려 원종 3년(1262) 정순왕후로 추대되고 충렬왕이 즉위(1274)하여 순경태후로 높여졌다. 무덤 주변의 석조물은 부서져 없어졌고, 봉분도 무너진 것을 1974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손질하여 고쳤다.

 

그런데 가릉은 다른 왕릉과는 다르게 입구를 유리문으로 만들어서 내부를 보게끔 되어 있었다. 이런 모습을 하고 있는 왕릉은 처음 보았다.

 

가릉 앞 좌측에는 함민복 시인의 시어 「길들은 다 일가친척이다」라고 써진 푯말과 발밤이 말뚝 표지판이 세워져 있는데 4코스 1번 표지판이다. 4코스(해가 지는 마을길)는 가릉주차장에서 시작해서 이곳을 거쳐 망양돈대까지 이어지는 코스다. 또한 이정표도 세워져 있는데 능내리석실분은 70m, 가릉주차장은 425m로 표기되어 있다.

맞은편 우측에는 벤치 2개, 3코스(71번) 발밤이 말뚝 표지판이 있고, 화남 고재형 선생이 쓴 심도기행의 일부 중 하나인 가릉(嘉陵) 시가 적힌 표지판도 세워져 있다.

 

이제 주차장으로 향한다. 3분을 진행하니 발밤이 말뚝 표지판(3-73. 종점 0.6km, 시점 14.6km)이 나온다.

 

이후 7분을 더 진행하니 탑재삼거리 버스정류소에 도착을 했다.

휴식 포함하여 5시간 8분 걸렸는데 휴식 제외하면 4시간 33분 걸렸다.

 

이후

 

탑재삼거리 버스정류소에 도착하기 직전에 버스가 지나가는 걸 봐서 이제 배차시간이 꽤 길겠구나 생각을 했다.

그래서 출발할 때 적어 둔 온수리 개인택시 사무실에 전화를 해서 택시를 이용하여 온수리 공영주차장에 도착한 후 차량을 회수하여 귀가했다.

 

6. 참고자료

 

①강화군 소재 고려왕릉에 대하여

 

(1) 강화 곤릉(江華 坤陵)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에 있는 고려 강종의 부인 원덕태후 유씨의 무덤이다. 1992년 3월 10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371호 곤릉으로 지정되었으나, 2011년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원덕태후는 고종의 어머니로 강종 1년(1212)에 왕비가 되고 연덕궁주라 하였다. 뒷날 원덕태후는 추대되고 1253년에 정강의 시호가 더해졌는데, 언제 사망하였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석물은 없어졌고 봉분과 무덤을 둘러싼 담도 무너졌던 것을 1974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손질하여 고쳤다.

 

사적 승격사유

 

이 유적들은 고려시대 왕릉 또는 왕비릉으로서 묘제상으로는 지정가치가 없으나, 역사성이 인정되고, 고려 공양왕 고릉(사적 제191호)과 고려 고종 홍릉(사적 제224호)이 이미 사적으로 지정된 바 있으므로 경기도 지정문화재(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는 것을 국가지정문화재인 사적으로 승격 지정하고자 함.

 

(2) 강화 석릉(江華 碩陵)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에 있는, 고려 희종(재위 1204∼1211)의 무덤이다. 1992년 3월 10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369호 석릉으로 지정되었으나, 2011년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희종(熙宗)은 신종의 첫째 아들로 어머니는 정선태후 김씨이며, 부인은 성평왕후 왕씨이다. 1204년 왕위에 올랐고, 최충헌을 제거하려다 실패하여 희종 7년(1211)에 왕의 자리에서 쫓겨나 강화 교동으로 갔다. 고종 24년(1237) 57세의 나이로 죽자 낙진궁으로 옮겼으며, 10월에 덕정산 남쪽에서 장례를 지내고 석릉이라 하였다.

 

조선 현종 때 강화유수 조복양이 찾아내어 다시 무덤을 쌓았는데, 그 뒤 석물도 부서지고 무너진 무덤을 1974년 손질하여 고쳤다. 석릉 주변에는 최근에 고려시대 귀족의 무덤이라 생각되는 돌방무덤(석실분)들이 많이 발견되었다.

 

사적 승격사유

 

이 유적들은 고려시대 왕릉 또는 왕비릉으로서 묘제상으로는 지정가치가 없으나, 역사성이 인정되고, 고려 공양왕 고릉(사적 제191호)과 고려 고종홍릉(사적 제224호)이 이미 사적으로 지정된 바 있으므로 경기도 지정문화재(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는 것을 국가지정문화재인 사적으로 승격 지정한다.

 

(3) 강화 가릉(江華 嘉陵)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에 있는, 고려 원종(재위 1259∼1274)의 왕비 순경태후의 무덤이다. 1992년 3월 10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370호 가릉으로 지정되었으나, 2011년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순경태후는 장익공 김약선의 딸로서 고종 22년(1235) 원종이 태자가 되자 태자비인 경목현비가 되었으며, 다음해에 충렬왕을 낳았다. 지금의 자리에는 고종 31년(1244)경 사망한 뒤 모신 것으로 짐작한다. 고려 원종 3년(1262) 정순왕후로 추대되고 충렬왕이 즉위(1274)하여 순경태후로 높여졌다.

 

무덤 주변의 석물은 부서져 없어졌고, 봉분도 무너진 것을 1974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손질하여 고쳤다.

 

사적 승격사유

 

이 유적들은 고려시대 왕릉 또는 왕비릉으로서 묘제상으로는 지정가치가 없으나, 역사성이 인정되고, 고려 공양왕 고릉(사적 제191호)과 고려 고종홍릉(사적 제224호)이 이미 사적으로 지정된 바 있으므로 경기도 지정문화재(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는 것을 국가지정문화재인 사적으로 승격 지정하고자 함.

 

(4) 강화 홍릉(江華 洪陵)은 고려의 제23대 왕인 고종의 능이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국화리에 있다. 1971년 12월 28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224호로 지정되었다.

 

1259년(고종 46년) 음력 6월 30일 고려의 제23대 왕 고종이 류경의 집에서 사망하자, 이 해 음력 9월 18일 당시 태손이던 충렬왕이 고종을 강화의 홍릉에 장사지냈다. 당시 고종의 아들인 원종은 원나라에 체류중이던 관계로, 고종의 장례에는 참석하지 못하고 3일간 상복을 입었다.

 

대부분의 고려 왕릉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있으나, 고종이 사망하던 시기는 고려가 도읍을 개경에서 강화로 옮기고 몽고에 맞서던 대몽 항쟁기였던 관계로 그 무덤이 현재의 대한민국에 자리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대한민국에 소재한 고려의 왕릉은 홍릉을 비롯하여 희종의 석릉, 원덕태후 류씨의 곤릉, 순경태후 김씨의 가릉 및 고양시의 공양왕릉(고릉)[단 공양왕릉은 경기도 고양시와 강원도 삼척시 등 총 2곳에 있다. 이는 당시의 불안했던 정치적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평가가 있다.] 등 총 5기이다.

 

홍릉은 3단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아랫단에 정자각이, 2단에 사람 형상의 조각이, 3단에 왕릉이 배치된 형태였다. 그 외에도 1919년의 조사 때 난간을 둘러싼 돌 및 동물 형상의 돌조각 등도 있었다고 하나, 현재 남아있는 것은 사람모양의 돌조각 2개 및 무덤뿐이다. 총 면적은 298㎡이며, 1971년 12월 28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224호로 지정되었다. 한편 대한민국 문화재청에서 2011년 7월 28일에 고시하여 지정한 홍릉의 정식 명칭은 강화 홍릉(江華 洪陵)이다.

[출처: 위키백과]

 

남북 분단의 현실에서 고려시대 왕실의 묘제에 대하여 직접 접할 수 있는 남한 내 문화유산으로 의미가 있다. 최근 인천광역시에서는 강화 곤릉을 포함한 강화 소재 고려 왕릉군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

 

7. 더 많은 사진 보기

 

강화나들길 3코스 고려왕릉 가는 길(사진 1) http://blog.daum.net/joingi61/15965223

강화나들길 3코스 고려왕릉 가는 길(사진 2) http://blog.daum.net/joingi61/15965224

강화나들길 3코스 고려왕릉 가는 길(사진 3) http://blog.daum.net/joingi61/15965225

 

8. 강화나들길 답사 후기 (2018.11.12 ~ ?)

 

코스

답사

순서

답사날짜

답사 후기

1.심도역사문화길

8

19.01.08

http://blog.daum.net/joingi61/15965217

2.호국돈대길

9

19.01.22

http://blog.daum.net/joingi61/15965222

3.고려왕릉가는길

10

19.01.29

 

4.해가지는마을길

 

 

 

5.고비고개길

 

 

 

6.화남생가가는길

 

 

 

7.낙조보러가는길

 

 

 

8.철새보러가는길

7

19.01.01

http://blog.daum.net/joingi61/15965212

9.다을새길

3

18.11.20

http://blog.daum.net/joingi61/15965198

10.머르메가는길

4

18.11.27

http://blog.daum.net/joingi61/15965201

11.석모도바람길

5

18.12.04

http://blog.daum.net/joingi61/15965204

12.주문도길

1

18.11.12

http://blog.daum.net/joingi61/15965194

13.볼음도길

2

18.11.13

http://blog.daum.net/joingi61/15965195

14.강화도령첫사랑길

 

 

 

15.고려궁성곽길

 

 

 

16.서해황금들녘길

 

 

 

17.고인돌탐방길

 

 

 

18.왕골공예마을가는길

 

 

 

19.석모도상주해안길

6

18.12.25

http://blog.daum.net/joingi61/15965207

20.갯벌보러가는길

 

 

 


9. 답사 경비

 

①승용차 이용 기름값(추정): 10,000

②통행료: 3,600

③식대: 14,000

④택시비: 9,000 (온수 개인택시: 032-937-2244 / 4422)

⑤합계: 36,6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