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평산행(둘레길 등)/[강화]나들길

[강화나들길 2코스] 호국돈대길 (후기)

약초2 2019. 1. 30. 10:37

강화나들길 아홉 번째 이야기

 

2코스 호국돈대길

이 땅을 목숨 바쳐 지킨 선조의 넋을 기리며…

 

1.날짜: 2019년 1월 22일(화)

2.답사코스: 갑곶돈대→광성보→덕진진→초지진

3.날씨: 맑고 청명함

 

4.답사시간

-09:00 갑곶돈대(강화전쟁박물관) 발(답사 시작)

-09:55 용진진

-10:21 용당돈대

-10:52 화도돈대

-11:14 오두돈대

-12:11 광성보

-12:35 용두돈대

-12:55~14:00 점심식사

-14:28 덕진진

-15:32 초지진 착(답사 종료)

-16:20 5번 버스 승차

-16:34 강화전쟁박물관 주차장 착

 

※휴식(점심시간) 포함하여 6시간 32분 걸렸다.

 

5. 답사 후기

 

앞전 화요일(1월15일) 수도권에 미세먼지와 초미세먼지가 심해서 나들길 가는 것을 포기하고 집에서 휴식을 취했다(글쓴이는 매주 화요일에 휴무). 미세먼지는 13일(일요일)부터 15일(화요일)까지 사흘 내내 심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2주 만에 다시 찾았다. 강화나들길 아홉 번째 이야기는 「제2코스 호국돈대길」이다.

 

강화나들길 제2코스 호국돈대길

갑곶돈대 ~ 초지진

 

거리: 17km / 소요시간: 5시간 50분 / 난이도: 하

갑곶돈대-(3km)-용진진-(1.5km)-용당돈대-(2km)-화도돈대-(1.1km)-오두돈대-(3.1km)-광성보-(0.5km)-용두돈대-(3km)-덕진진-(2.8km)-초지진/온수사거리(3Km)

 



[코스정보]

 

오래 전부터 강화도는 나라의 안전을 지켜 주던 소중한 터전이자 외국의 문화가 바닷길을 통해 육지로 들고 나던 관문이었다.

남과 북의 강이 함께 모여 흐르는 바다를 따라 걷다 보면, 외국과의 충돌에 대비하기 위해 섬을 빙 둘러 만든 53개의 돈대를 만나게 된다. 몽골과의 항쟁에서부터 조선조 말 병인양요, 신미양요에 이르는 민족의 자긍심과 국난 극복의 의지가 서린 강화도의 전적지를 살펴보는 길이다. 나라를 지키기 우해 세운 호국성지에 왕의 바람이 올곧게 살아 있으면 좋겠다.

 

한 발짝 한 발짝 내디딜 때마다 쉴 새 없이 마주하는 고려와 조선의 역사와 문화가 가득한 코스다. 그러다 보니 사계절 내내 학생들이 가장 많이 찾는 단골 맞춤형 학습코스이기도 하다.

걷는 중간 중간 만나는 돈대에 들러서 항쟁의 역사를 더듬어 보고,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초개같이 버린 이름도 없는 수많은 용사의 무덤에서 예의도 차리고 가자. 둑길에 무리 지어 피는 타래붓꽃은 나들길만이 줄 수 있는 특별 보너스다. 대부분이 바다를 보며 걷는 상쾌한 둑길이지만, 겨울철에는 바람이 많이 불고 미끄러워 옷차림과 스틱 등 장비를 잘 갖추어야 한다.

 

[볼거리]

 

▶ 갑곶돈대

고려 고종 19년(1232년)부터 원종 11년(1270년)까지 강화도로 도읍을 옮겨 몽골과 줄기차게 싸울 때 외성으로 강화해협을 지키던 중요한 요새였다. 갑곶리 탱자나무(천연기념물 78호)는 사기리의 탱자나무(천연기념물 79호)와 함께 강화도가 우리나라 서해안에서 탱자나무가 자랄 수 있는 북쪽 한계선이 됨을 입증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 용진진

군사적 요새로 조선시대인 1656년(효종 7년)에 축조되었다. 가리산돈대 ․ 강돈대 ․ 용당돈대 등 3개의 돈대를 관할하였으며 돈군과 군보급품을 관리하였다.

용진진은 본래 병마만호(兵馬萬戶)의 관리 아래 있었고 군관 24명, 사병 59명, 진군 18명 등 모두 101명의 병력이 주둔하였으며 포를 놓는 자리인 포좌 4문, 총을 놓는 자리인 총좌 26개소의 시설물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석축 대부분이 없어지고 홍예 2문만이 남아 있었던 것을 1999년에 문루를 복원하였다.

 

▶ 용두돈대

광성보에 소속되어 있으며 해협을 따라 용머리처럼 돌출한 자연 암반위에 만들어진 돈대이다. 외성에서 약 100m의 통로로 연결되어 있다. 19세기 말 외국 함대와 벌인 전투로 성벽이 파괴되었다가, 1977년 강화 국방유적 정화사업 때 복원되었다. 그때 돈대안에 「강화전적지정화기념비」를 세웠는데, 앞면에는 박정희 전대통령의 글씨, 뒷면에는 이은상이 짓고 김충현이 글씨 쓴 비문이 있다. 돈대 앞이 손돌목이다.

 

▶ 손돌목돈대

1866년의 병인양요와 1871년의 신미양요 때 외국 함대들과 치열한 전투가 있었던 곳으로서, 1977년 강화 중요 국방유적 복원정화 사업으로 파괴되었던 성벽을 복원하였다. 돈대 입구에는 북방 한계선 식물인 탱자나무가 자라고 있고 손돌목 돈대에서 동쪽으로 내려다보이는 곳에 용두돈대가 있는데, 그 앞의 염하(강화와 김포의 경계를 이루는 수역)를 뱃사공 손돌이 왕의 오해로 억울하게 죽은 곳이라 하여 손돌목이라고 한다. 염하 건너편 동남쪽에 덕포진이 있는데, 덕포진 언덕 위에 손돌의 묘가 있다.

 

▶ 광성보

1871년 신미양요 때 미국 군대와 48시간의 사투를 벌인 격전지로서 이때 전사한 어재연 장군을 포함한 350명을 기리는 전적비와 49명의 순국영령을 기리기 위한 신미순의총이 있다.

 

▶ 초지진

해상으로부터 침입하는 적을 막기 위하여 조선 효종 7년(1656년)에 구축한 요새이다. 병인양요 ․ 신미양요 ․ 일본군함 운양호 침공 등 근세 외침에 줄기차게 싸운 격전지이다.

말없이 서 있는 커다란 두 그루 소나무와 석축 한 편에는 아직도 당시의 치열했던 전황을 말해주듯 포탄의 흔적이 남아 있다.

민족 시련의 역사적 현장이었던 이곳은 호국정신의 교육장이기도 하다.

[출처: 강화나들길 홈피(www.nadeulgil.org/)]

 

오늘도 승용차를 이용했다. 강화전쟁박물관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집에서 준비한 아침을 먹고, 답사를 시작했다.(09:00)

 

강화전쟁박물관 매표소 건물 앞에 있는 나들길 도장함에서 2코스(호국돈대길) 시점 도장을 찍고 출발했다. 이곳에 있는 갑곶돈대는 앞전 1코스(심도역사 문화길) 때 답사를 했다.

 

갑곶돈대

 

고려 고종 19년(1232년)부터 원종 11년(1270년)까지 강화도로 도읍을 옮겨 몽골과 줄기차게 싸울 때 외성으로 강화해협을 지키던 중요한 요새였다. 갑곶리 탱자나무(천연기념물 78호)는 사기리의 탱자나무(천연기념물 79호)와 함께 강화도가 우리나라 서해안에서 탱자나무가 자랄 수 있는 북쪽 한계선이 됨을 입증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곧바로 나오는 천막 쉼터(상단 천정에 강화나들길 안내판이 걸려 있다)를 지나면 「강화나들길 갑곶돈대 2-A코스 시점」안내판이 나오고, 이어 나오는 파고라(파고라 상단에도 강화나들길 안내판이 걸려 있다)를 통과하여 동락천를 좌측에 두고 진행하다가 갑곶교 앞에서 좌회전하여 다리(갑곶교)를 건너 잠시 2차로 보도길을 진행한다. 길 건너편에 그림이 그려져 있는 반원의 동락양수장 건물이 멋지다.

 

이제 보도길에서 벗어나 해안 쪽 잔디가 깔린 쪽으로 진행한다. 곧바로 소형 태양열전지판과 제주도 470km, 독도, 서울특별시 55km, 전등사 15km, 선원사지 4km 등 모두 8개가 달린 이정표, 강화나들길 발밤이와 글씨가 새긴 조형물 등이 세워져 있는 곳이 나온다. 좌측으로 조금 떨어진 해안에는 철책이 이어지고 있다. 곧바로 「강화나들길 ②호국등대길」푯말도 나온다.

 

푹신한 잔디밭 길을 좌측의 해안 철책, 우측의 2차로 도로와 한동안 나란히 진행한다.

 

발밤이 강화나들길 조형물이 있는 곳에서 9분 정도 진행하니 강화외성 안내판이 처음으로 나온다. 이후 강화외성 안내판은 진행하면서 몇 개 더 나온다.

 

강화외성 (江華外城)

사적 제452호

강화군 강화읍, 선원면, 불은면, 길상면

 

강화외성은 고려 고종이 몽골의 침입으로 강화도로 천도한 뒤 1233년에 강화 동쪽 해안 23km에 걸쳐 축조된 성이다.

조선시대에는 해안방어를 위한 수축이 계속되어 고려부터 조선시대까지의 축성기법의 변화를 살펴 볼 수 있는 유적이다.

특히 오두돈대 주변은 영조18년(1724)에 벽돌로 쌓은 전축성이 남아있어 수원화성과 함께 전축성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출처: 현지 안내판]

 

강화나들길 2코스 호국돈대길은 외성을 따라가는 길이기도 하다. 출발지인 갑곶돈대에서 종착점인 초지진까지 17km를 걷는 내내 강화 외성과 더불어 간다. 강화외성은 단순히 강화를 지키는데 끝나지 않고 나라를 보존하기 위한 방비책이었다. 어찌 생각하면 강화는 우리나라를 지키는 제 일선이었고 그 맨 앞에 외성이 있었던 셈이다.

 

모두 8개의 돈대(갑곶, 좌강, 용당, 화도, 오두, 용두, 손돌목, 덕진)와 외국 군대(프랑스, 미국)에 맞서 치열하게 싸운 광성보, 덕진진, 초지진과 마주친다. 돈대마다 다른 특징을 찾아보는 것도 흥미롭다. 언덕에 있는 돈대에서 바라보는 풍경 또한 뛰어나다. 풍경은 계절마다 다르고, 하루에도 밀물과 썰물 때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갑곶돈대에서 더러미포구까지의 둑길이 온전하게 남은 토성이다. 이마저 나란히 가는 도로의 지반을 높인 까닭에 성 위를 걷고 있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해안으로 내려가서 올려다보면 외성의 진면목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다.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전략적 요충지로써 해안가 철조망은 남북대립의 상징물이며 5진7보53돈대의 옛 군사적 방위시설을 잇는 국방유적인 호국 돈대길을 답사한다.

 

이란?

지방군의 지휘부가 주둔한 진영. 지금으로 치면 대대급의 병력이 머무른 곳.

 

란?

지금으로 치면 중대 병력이 머무른 곳.

 

돈대란?

돈대란 적의 움직임을 살피거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하여 영토 내 접경지역 또는 해안지역의 감시가 쉬운 곳에 마련해 두는 초소이다. 대개 높은 평지에 쌓아두는데, 밖은 성곽으로 높게 하고 안은 낮게 하여 포를 설치해둔다. (소대급 병력이 주둔한 곳)

 

강화외성 안내판 옆에는 「김동수 ․ 김남수 권사, 김영구 성도 순국(殉國)터」라고 쓴 오석의 표지석과 김동수 권사 3형제가 이곳 더리미 해변에서 일본군에게 무참하게 죽게 된 이야기가 적힌 안내문이 세워져 있다. 또한 수준점(해발 8m)과 벤치 2개가 설치되어 있다.

 

이후 5분 정도 더 진행하면 이제 해안철책은 없어지고 더리미선착장 입구가 나온다. 이곳에 화장실 건물이 있어 볼 일을 봤는데 깨끗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길 건너편에는 더리미마을 도로 표지판과 화강암의 대형 표지석(신정2리 더리미 마을)이 세워져 있다.

표지석 하단에는 「옛날에 이 마을 뒤 언덕에 가리정이란 정자가 있어 더할가(加) 자를 더로 풀어서 더리미라고 부른다.」라고 적혀 있다.

더리미마을 입구에는 대형 장어구이집들이 많이 들어서 있다.

 

이제 푹신한 잔디밭 길에서 차도로 나와 도보 길로 9분 정도 진행하다 해안가 길로 진행한다. 곧바로 팔각정이 나오고, 나들길 캐릭터인 발밤이 말뚝 표지판(2-05. 종점 15.2km, 시점 1.7km)도 나온다. 바로 옆에는 나무 의자 뒤에 세워진 호국돈대길 대형 표지판도 나온다.

 

이후 1~2분 뒤 억새와 갈대 표지판이 나란히 붙어 있는 곳이 나온다.

 

억새

벼과의 여러해살이풀이며 산 또는 들에서 자랍니다.(단, 물억새는 강가나 습지에서 자라며 잎이 부드럽습니다.) 잎은 날카로워 손에 상처를 입기 쉬우며 흰색의 잎맥이 있습니다. 키는 1~2m 정도이고 9~10월에 자주빛을 띤 황갈색 또는 은색의 꽃을 피웁니다. 억새의 뿌리는 약재로 사용합니다.

 

갈대

벼과의 여러해살이풀이며 습지나 강가등지에서 잘 자랍니다. 줄기에 잎이 호생하며 잎맥이 없고 줄기속이 비어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키는 대개 3m 정도이며 9~10월에 갈색의 꽃을 피웁니다. 어린 순은 식용하며 한방에서는 약재로 사용합니다. 이삭의 빗자루와 털은 솜을 대신해서 사용하기도 합니다.

[출처: 현지 안내판]

 

억새와 갈대 표지판이 있는 곳에서 4분 정도 더 가면 도래미마을 안내판이 나온다. 안내판에는 마을의 역사와 유래가 적혀 있는데 그 내용은 강화군 선원면에 위치한 도래미마을은 대몽항쟁 당시 팔만대장경의 판각을 맡았던 선원, 군사요충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 용진진, 화도돈대, 용당돈대, 그리고 장어요리로 유명한 더리미장어마을 등 문화, 역사, 자연이 한데 어우러진 아름다운 농촌마을입니다. 도래미마을이라는 명칭은 :섬 도, :올 래, :아름다울 미 자로 다시 오고 싶은 아름다운 섬이라는 뜻을 지닌 마을 명칭입니다. 라고 적혀 있다.

 

도래미마을은 이곳 표지판이 있는 곳에서 도로로 나가 입간판을 지나 조금 들어가면 나온다.

 

계속해서 해안 방죽길을 진행한다. 6~7분 정도 진행하면 나오는 발밤이 말뚝 표지판(2-11)에 종점 14.4km, 시점 2.5km 라고 적혀 있다.

 

이후 6분 정도 더 가면 종점 13.9km, 시점 3km라고 써진 발밤이 말뚝 표지판이 나온다. 정면으로 좌강돈대가 보이고 좌강돈대 좌측으로 갯벌장어 입간판에 가려져 있는 용진진도 보인다. 이제 해안 방죽길과 작별하고 좌회전하여 2차로 도로로 진행한다. 용진진 앞이다.

 

용진진 (龍津鎭)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42호(1999년 3월 29일 지정)

 

군사적 요새로 조선시대인 1656년(효종 7년)에 축조되었다. 가리산, 좌강, 용당 등 3개의 돈대를 관리하였다.

용진진은 병마만호(兵馬萬戶) 1명, 군관 24명, 사병 59명, 진군 18명 등 모두 102명의 병력이 주둔하였으며 포를 놓는 자리인 포좌 4문, 총을 놓는 자리인 총좌 26개소의 시설물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석축 대부분이 없어지고 홍예문 두 곳만 남아 있었던 것을 1999년에 그 위로 새로이 누각을 복원하였다.

 


용진진



용진진 앞에는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42호로 지정된 용진진(龍津鎭)의 안내판이 세워져 있고, 1999년에 복원한 용진진의 문루인 참경루(斬鯨樓) 옆으로 올라가면 좌강돈대와 연결되어 있어서 좌강돈대를 갈 수 있다.


좌강돈대 (左岡墩臺)

 

용진진의 관할 하에 있던 돈대로 용진진과 성벽으로 연결이 되어있다.

효종 7년(1656)에 쌓았으며 중영우부좌사의 중앙초소로 돈대 면석이 1~2단 남아있던 것을 1999년 용진진과 함께 복원 정비하였다. 평면형태가 원형이며, 서쪽으로 출입문이 만들어져 있고 동쪽으로 포문이 배치되어 있다.

[출처: 현지 안내판]

 

용진진의 문루인 참경루와 좌강돈대까지 보고 내려와 다시 호국돈대길을 답사한다.

7분 정도 진행하니 사각정자 쉼터가 나오고, 3분을 더 가면 도보길과 작별한다. 이곳에 발밤이 말뚝 표지판(2-15)이 세워져 있다.

이제 짧은 나무계단을 올라가면 숲길이 나온다. 2코스 호국돈대길은 숲길이 두 번 나온다.

 

곧바로 2코스 숲길 안내판(숲길 550m)과 그 옆에 함민복 시인의 글(산허리에는 가로지르는 길이 있다. 사람의 허리에도 세월이 지나는 길이 있다.)이 적혀 있는 작은 푯말이 나온다.

 

푹신한 갈비(솔잎)와 낙엽을 밟으며 소나무의 도열을 받으며 숲길을 걷는다.

7분을 그렇게 걸으니 돈대 하나가 정면에 나타난다.

용당돈대다. 좌강돈대, 가리산돈대와 함께 용진진에 소속되어 있는 돈대이다.

 

용당돈대

 

조선 숙종 5년(1679년)에 강화도 해안방어를 목적으로 쌓은 49개 돈대 중 하나로, 가리산돈대, 좌강돈대와 함께 용진진에 소속되어 있다.

평면 형태는 타원형이며 북서와 남동방향은 강화외성과 연결되어 있었다. 이 돈대는 4개의 포좌가 설치되었으며 내부에는 건물지가 남아있다.

[출처: 현지 안내판]

 

용당돈대 내부로 들어가 본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한 그루의 나무이다. 숲 내공이 적고 겨울철이라 나무이름을 잘 모르겠다. 아마 참나무 종류의 나무인 것 같기도 하고, 느티나무 같기도 하고…. 아무튼 잎이 무성할 때 한 번 더 답사해서 숙제를 해결해야 되겠다.

나무와 건물지 임을 알려주는 듯한 바위들이 널려 있다.

 

이제 용당돈대에서 나와 5분 정도 진행하니 나무계단이 나온다.

나무계단을 올라가 내려감으로써 첫 번째 숲길 구간이 끝났다. 이어 발밤이 말뚝 표지판(2-26)이 나온다.

 

2분 후 쉼터가 나오는데 옆에 함민복 시인의 글(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이 적힌 푯말이 세워져 있다.

쉼터가 있는 해안 방죽길에서 3분 정도 진행하니 타래붓꽃 안내판이 나온다.

 

안내판에는 「강화나들길 2코스 내에 많이 분포하고 있는 타래붓꽃은 그 함초름한 꽃봉오리가 마치 먹물을 머금은 붓과 같고, 줄기가 실타래처럼 꼬여 자라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5~6월에 하늘색 꽃이 줄기 끝에 달리고 향기가 있으며 열매는 7~8월에 익습니다.」라고 적혀 있다.

아마 이 구간에 타래붓꽃이 많이 피는 것 같은데 아쉽게도 지금은 볼 수가 없었다. 타래붓꽃 안내판 옆에는 발밤이 말뚝 표지판(2-28. 종점 11.9km, 시점 5km)도 세워져 있다.

 

그리곤 12분 정도 진행하니 다시 돈대가 나온다. 돈대 입구에는 발밤이 말뚝 표지판(2-35. 종점 10.9km, 시점 6km)이 세워져 있다.

 

나무계단 5개를 올라가면 돈대 앞이다. 이곳은 다른 돈대와는 다르게 2단 높이의 돌로 쌓여 있어서 바깥에서 내부가 보인다. 입구 쪽으로 가보니 인천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7호로 지정된 화도돈대의 안내판이 세워져 있어 이곳이 화도돈대라는 것을 알았다.

 

화도돈대(花島墩臺) 인천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7호

 

숙종 5년(1679)에 강화도 해안에 쌓은 여러 돈대중 하나다. 해안 절벽 쪽으로 장축을 기대고 있는 면의 길이가 35m이고, 다른 면은 32m로, 한 면이 약간 짧은 방형에 가까운 형태다. 성벽의 석축은 대부분 파괴 되었으나 셩벽의 뿌리는 어느 정도 남아있다. 돈대의 남쪽 아래에는 고려외성을 가로지르는 물길을 건너 화도 수문(水門)이 있다. 2002년 발굴 조사를 거쳐 복원 정비되었다.

[출처: 현지 안내판]

 

화도돈대 입구의 좌측에 나무 한 그루가 외로이 서 있다.

 

화도돈대에서 3분을 진행하니 화도교가 나온다. 해안 쪽으로는 수문이 설치되어 있다.

화도교를 건너면 비석과 비석안내문이 나오는데 안내문에는 화도수문의 개축내용을 기록하고 있는데 오래되어 지저분하고 일부 글씨는 보이지도 않았다.

그리고는 곧바로 해안으로 다시 접어들었는데 2명의 발밤이가 나타난다. 내용은 이곳이 2-A코스 종점이고 2-B코스 시점이 적혀 있다. 멋진 디자인으로 눈길을 사로 잡았다.

 

바로 옆에는 고능리 고잔마을 걷는 길 코스 안내도(고잔마을 걷는길 코스 총 4.3km)가 세워져 있고, 1분이 채 안 걸리는 거리에 강화나들길 2코스 호국돈대길 아치형 파고라가 세워져 있다. 이어져 있는 파이프로 만든 터널을 지나면 아주 멋지게 지어진 쉼터가 나온다.

 

쉼터 앞에는 낚시 하는 사람이 있는데 망둥이를 잡는다고 했다. 그런데 해변에 제법 넓은 갯벌이 형성되어 있는데 낚시 줄이 바닷물까지 꽤나 멀리 나가 있다.

 

쉼터에서 11분을 진행하니 다시 쉼터가 나온다. 행복홀씨 안내판(오두리입구에서 화도돈대까지의 구역을 맡아서 쓰레기 청소, 꽃가꾸기 사업을 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과 사작정자, 벤치 등이 설치되어 있다. 좌측 산 쪽으로 나무에 가려져 있는 돈대가 보인다.

 

이어 도로를 따라 1~2분 정도 진행하다 좌측 오름길로 올라간다. 입구에 발밤이 말뚝 표지판(2-40. 종점 9.9km, 시점 7km)이 세워져 있다.

 

이내 오두돈대에 도착했다.

 

오두돈대(鼇頭墩臺)

소재지: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온면 오두리 산1

 

외적의 침입이나 척후활동을 사전에 관찰하고 대비할 목적으로 접경지역 또는 해안지역에 흙이나 돌로 쌓은 소규모의 방어 시설물을 돈대라고 한다. 강화지역에는 숙종 5년(1679) 강화 전 해안을 하나의 방위체제하에 운영하고자 돈대를 설치 ․ 운영하게 되었다.

오두돈대는 지형 이름에서 나타나듯이 자라의 머리와 같은 지형에 설치되어 있으며, 평면 형태는 원형으로 지름이 32m에 달한다.

돈대 동남쪽으로는 오두정지(鼇頭亭址)와 강화전성이 위치한다.

[출처: 현지 안내문]

 

자라의 머리와 같은 지형에 설치되어서 오두돈대라는 이름을 얻었다는 오두돈대는 지름이 32m의 원형이다.

    


강화외성(전성)과 느티나무 군락


오두돈대에서 3분 정도 진행하니 해변 쪽으로 느티나무 군락지가 있는데 안내판도 세워져 있어서 가까이 가봤다.

 

안내판에는 큰나무(강화전성 느티나무)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모두 18주이다.

이곳의 강화외성은 전성(벽돌로 쌓은 성)으로 무척 유명한 곳이다. 짧은 전성이 끝나는 지점에 새롭게 제작한 강화외성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강화외성 (江華外城)

사적 제452호

 

강화외성은 고려시대 강화도읍기에 강화의 동쪽 해안 23km에 걸쳐 축조된 토성이다.

조선시대에도 해안방어를 위하여 1691년(숙종 17)에 강화외성을 축조 하였고 1718년까지 연장 ․ 증축되었다.

오두돈대 주변의 전성(塼城)은 강화유수 김시혁에 의해 1742년(영조19년)에 시작해서 2년 동안 벽돌로 개축한 성으로, 벽돌을 사용한 수원화성(정조 18년, 1794년)보다 50여년이나 이른 시기에 축조된 것이다.

[출처: 현지 안내판]

 

강화전성에 걸쳐 있는 느티나무 군락은 가을이 되면 단풍들어 멋지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강화전성 입간판과 화강암의 오두리 구석마을 표지석도 세워져 있다.

 

3분 후 강화전성(江華塼城) 안내판이 나온다.

 

강화전성 (江華傳城)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20호

소재지: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오두리 563번지

 

강화전성은 사적 제452호 강화외성의 일부구간으로 돌로 쌓은 기초위에 벽돌을 쌓아 만든 전축성이다.

고려 고종 때(1213, 1259) 흙으로 쌓은 토성(토성)이 흘 내리자, 조선 영조 18년(1742)에 강화유수 김시혁이 나라에 건의하여 2년 동안 전돌로 다시 고쳐 쌓았다고 한다. 현재 전성의 길이는 약 270m이며, 2004년 그 중 70m를 복원하였으나, 재래식 전돌 생산지가 사라져 현재와 같이 정비되었다.

[출처: 현지 안내판]

 

현지 안내판에는 벽돌 전(塼)자를 써야 하는데 전할 전(傳)자를 썼다. 안내판의 오류를 빨리 수정하면 좋겠다.

또한 강화외성 안내판에는 1742년(영조 19년), 강화전성 안내판에는 1742년(영조 18년)이라 적혀 있다. 어느 것이 맞는지 틀린 부분은 수정했으면 좋겠다.

 

해안가로 접어들어 야자수매트와 판석이 깔린 길을 걷는다. 2분 뒤 쉼터가 나온다.

6분 후에 발밤이 말뚝 표지판(2-47. 종점 8.9km, 시점 8km)을 지나니 색 바랜 칠면초 군락지가 나오는데 칠면초 군락지 한가운데 오래된(녹슬어 있음) 철 조각품이 계속해서 나타난다.

 

강화갯벌 안내판(강화 갯벌은 강화의 남부지역과 석모도, 볼음도 등 주변의 섬 사이에 자리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 보존상태가 양호한 몇 남지 않은 갯벌로 경제적 생산성은 물론 자연 정화능력, 해양 생태계의 보물창고입니다. 강화 갯벌 및 저어새 번식지는 1억3천6백만평으로 단일 문화재 지정구역으로는 가장 넓으며, 세계적으로도 가장 우수한 갯벌로 갯벌보존과 저어새의 서식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천연기념물로 지정 보호되어 있습니다.)에서 3분 정도 더 가니 다시 발밤이 말뚝 표지판(2-54. 종점 7.9km, 시점 9km)이 나온다.

 

4분 후 아치형 파고라가 나오고, 1~2분 후 덕성리 광성마을 표지석(화강암)이 나온다. 그리고 1분 후 광성보 앞 삼거리에 도착했는데 이곳에 충장공 어재연 장군상이 세워져 있다.

 

광성보 방향으로 좌회전하면 강기운 의교비(姜奇云 義橋碑)가 나온다. 안내판(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출신으로 일제강점기 때 본인의 재산을 털어 이곳에, 위로는 사람들이 통행할 수 있는 도로를 만들고 아래로 바닷물의 역류를 막을 수 있는 수문을 만들었다. 이에 마을사람들이 감사의 뜻을 모아 공적비를 세웠다. 수문은 1990년대 까지 사용되었다 한다.)도 세워져 있다. 이곳에도 발밤이 말뚝 표지판(종점 6.4km, 시점 10.5km)이 세워져 있다.

    


광성보


우측으로 식당가를 지나면 곧바로 넓은 광성보 주차장이다.

광성보 2-B코스 종점 발밤이 안내판(맞은편에는 광성보 2-C코스 시점 발밤이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평화역사 이야기여행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대형 광성보 안내판도 세워져 있다.

 

광성보 [廣城堡](사적 227호)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佛恩面) 광성나루(광성진)에 있던 성보(城堡).

 

사적 제227호. 강화해협을 지키는 중요한 요새로, 강화 12진보(鎭堡)의 하나이다. 고려가 몽골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강화도로 천도 한 후에 돌과 흙을 섞어 해협을 따라 길게 쌓은 성이다.

 

조선시대 광해군 때 헐어진 데를 다시 고쳐 쌓았으며, 1658년(효종 9)에 강화유수 서원이 광성보를 설치하였다. 그 후 숙종 때(1679)에 이르러 완전한 석성(石城)으로 축조하였다.

 

1871년 신미양요 때 가장 치열했던 격전지이다. 그 해 통상을 요구하며 강화해협을 거슬러 올라오는 미국 극동함대를 초지진·덕진진·덕포진(김포) 등의 포대에서 일제사격을 가하여 물리쳤다. 그러나 4월 23일 미국 해병대가 초지진에 상륙하고, 24일에는 덕진진을 점령한 뒤, 여세를 몰아 광성보로 쳐들어왔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열세한 무기로 분전하다가 포로 되기를 거부, 몇 명의 중상자를 제외하고 전원이 순국하였다.

 

이 때 파괴된 문루와 돈대(墩臺)를 1976년에 복원하였으며, 당시 전사한 무명용사들의 무덤과 어재연(魚在淵) 장군의 전적비 등을 보수·정비하였다.

 

광성보의 문루인 안해루가 정면으로 우람하게 서 있다.

안해루 좌측에는 광성돈대가 있다.

     

광성돈대 (廣城墩臺)

 

광성돈대는 광성보에 소속된 3개 돈대중 하나로서 숙종 5년(1679) 함경도 ․ 황해도 ․ 강원도의 승군 8,000명과 어영군 4,300명이 40일 만에 완공하였다 한다.

1977년 포좌 4개소와 포 3문(門)이 복원 설치되었다.

대포(大砲)는 홍이포(紅夷砲)라고도 하며 사정거리 700m로서 포알은 화약의 폭발하는 힘으로 날아가나 포알 자체는 폭발하지 않아 위력은 약하다. 병자호란에도 사용하였다고 전한다.

소포(小砲)는 사정거리 300m로서 포알은 대포와 같다. 대포는 조준이 안 되나 소포는 조준이 된다.

작은 것은 불랑기라 하며 프랑스군이 쓰던 것이라 한다.

[출처: 현지 안내판]

 

광성돈대 내부에는 대포(홍이포), 소포, 불랑기가 전시되어 있다.

 

광성돈대에서 나와 손돌목돈대, 용두돈대 등을 보려고 올라간다.

좌 ․ 우측의 멋진 소나무의 도열을 받으며 보도블록 길을 올라가면 신미양요순국무명용사비 쌍충비각이 나온다.

 

용두돈대 가는 길 우측 사면에는 무덤 7기가 조성된 신미 순의총(辛未 殉義塚)이 있다. 안내판(신미 순의총은 조선 고종8년<1871, 신미양요> 광성보 일대에서 미해군과 격전을 벌이다 전사한 무명용사들의 무덤이다. 전사자들 중에는 어재연, 어재순 형제는 충북 음성군 대소면 성본리에 안장하고, 남은 군졸 51인은 신원을 알 수 없어 7기의 분묘에 합장하여 이곳에 안장하였다. 광성보 전투에서 조선군은 최후의 한명까지도 포로가 되기를 거부하며 비겁하게 물러서지 않았으니, 외세의 침략에 대항하여 나라를 지키려했던 우리 민족의 호국 정신을 잘 보여주는 곳이다.)이 세워져 있다.

    


손돌목돈대


신미 순의총을 거쳐 우측으로 올라가니 손돌목돈대가 나온다.

       

손돌목 돈대 (孫突項 墩臺)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조선 숙종5년(1679)에 축조된 돈대로 원래 돈대 중앙에 3칸의 무기고가 있었고, 포좌 3개가 있었다. 돈대 넓이는 778㎡에 성곽 길이가 108m이다.

고종 8년(1871) 신미양요 때 미국 해군과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졌던 현장이다.

[출처: 현지 안내판]

 

손돌목돈대를 뒤로 하고 내려가면 발밤이 말뚝 표지판(2-63. 종점 5.4km, 시점 11.5km)이 나오고, 손돌목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용두돈대 앞이 손돌목인데 손돌목은 안면도, 염창동과 함께 난파 위험지역으로 꼽히며, 물살이 빠른 곳이다. 태조 4년(1395)에 조운선 16척, 태종 3년(1403) 30척, 태종14년(1414) 60척이 침몰한 기록이 있다.

 

손돌은 몽골의 침입으로 고려 고종이 강화도로 피난할 때 뱃길을 잡은 뱃사공인데 험한 물길에 불안을 느낀 왕이 그의 목을 베었는데, 손돌은 죽음에 직면하면서도 물 위에 작은 바가지를 띄우고 그것을 따라가면 강화도에 무사히 도착할 것이라고 말한 뒤 죽음을 받아들였다.

마침내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한 왕은 자신이 경솔하였음을 깨닫고 후하게 장사를 치른 뒤 사당을 세워 억울하게 죽은 손돌의 넋을 위로하였다 한다.

손돌의 묘는 염하 건너 덕포진 언덕 위에 있다.

    


용두돈대


손돌목 안내판 옆에는 광성포대 안내판도 세워져 있다. 바로 아래에 광성포대가 있다.

 

광성포대 (廣城砲臺)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佛恩面) 덕성리(德城里) 산 123

 

광성포대는 조선후기 강화도 해안수비를 위해 설치된 방어시설 가운데 하나이다. 국방 강화책으로 숙종은 강화도내에 내성, 외성, 12진보, 54돈대 등을 축조하여 요새화를 이루었으나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거치면서 화력을 증가시키는 일이 시급한 과제로 등장함에 따라 고종 11년 용진진, 광성진, 덕진진, 초지진에 포대를 설치하였다.

광성포대는 손돌목돈대 주변 3곳에 설치되었으며 각각 9좌, 4좌, 3좌의 포좌를 갖추고 있었으며 이중 가장 규모가 큰 중앙포대는 길이 80m, 포좌의 크기 약 6m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1875년 운양호사건을 계기로 외세에 문호를 개항함에 따라 파괴되었던 것을 2004년 발굴조사를 실시 유적이 확인되어 복원정비를 하였다.

[출처: 현지 안내문]

 

안내판이 서 있는 곳에서 계단을 내려가면 광성포대가 나오는데 그곳으로 강화나들길이 이어지고 있었다. 글쓴이는 광성보의 모든 유적들은 본 후 되짚어 정문으로 나가서 강화나들길이 이어지는 줄 알았다. 그래서 점심식사도 광성보를 먼저 답사한 후에 하기로 했던 것이다.

 

결국 광성포대 입구에서 포대 쪽으로 내려가지 않고 아직 보지 못한 용두돈대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물론 용두돈대는 예전에 몇 번 와 본적이 있는 곳이기는 하지만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했다.

  

광성포대에서 좌측으로 내려가면 용두돈대가 나온다.

 

용두돈대 (龍頭墩臺)

 

용두돈대는 강화해협을 지키던 천연 요새로서 손돌목돈대에 속해 있는 외곽 초소겸 포대이다. 고종8년(1871) 포대가 설치되면서 정비된 곳으로 1977년 강화전적지 정화보수사업을 하면서 용두돈대라고 부르게 되었다. 병인 신미양요 때 치열한 포격전이 벌어졌던 현장이며, 1977년 성벽을 복원하면서 강화전적지 정화기념비를 세웠다.

[현지 안내판 내용]

 

용두돈대에서 바라본 염하는 오늘도 여전히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염하는 과거 삼남지방의 세곡을 수운을 통해 서울로 운반하는 중요한 길목이었는데, 밀물과 썰물 때 조류가 대단히 빨라 선박 통행에 많은 지장을 주었다.

 

용두돈대 (龍頭墩臺)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佛恩面) 덕성리(德城里)에 있는 강화 53돈대의 하나. 광성보에 소속되어 있으며 해협을 따라 용머리처럼 돌출한 자연 암반을 이용하여 축조하였다.

 

고려시대부터 천연의 요새로 중요시되었으며 1679년(숙종 5)에 돈대가 세워졌다. 1866년의 병인양요(丙寅洋擾)와 1871년의 신미양요(辛未洋擾)를 치르면서 외국 함대들과 벌인 치열한 전투로 성벽이 크게 파괴되었으나, 1977년 강화 중요 국방유적 복원정화사업으로 다시 복원하였다. 당시 돈대 안에 강화전적지정화기념비를 세웠는데, 앞면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글씨, 뒷면에는 이은상이 짓고 김충현이 글씨를 쓴 비문이 새겨져있다. 돈대 앞을 흐르는 염하(강화와 김포의 경계를 이루는 수역)는 손돌풍으로 잘 알려져 있는 손돌목이다. 염하 건너편 덕포진 언덕 위에는 손돌풍 전설의 주인공 손돌의 묘가 있다.

 

용두돈대에는 강화 전적지 정화기념비(앞면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글씨, 뒷면에는 이은상이 짓고 김충현이 글씨를 썼다.)가 세워져 있다.

 

돈대 모양이 좀 특이한(곡선) 용두돈대를 뒤로 하고 다시 광성포대로 향했다.

광성포대를 지나면 2코스 두 번째 숲길이 나온다. 당연히 2코스 숲길 안내판(모두 500m 거리인데 초지진 방면 460m, 광성보 방면 40m)이 세워져 있다. 약간의 오름을 오른 후 평지 길을 진행하니 2차로 도로가 나온다. 이곳에 발밤이 말뚝 표지판(2-66)이 세워져 있다. 



덕진진


2차로 도로에서 되짚어 광성보 근처까지 간 후 그곳에서 점심(샤브샤브 칼국수 식당)을 먹고 다시 광성포대 가는 길 입구에 원위치 했다. 원위치 하는데 까지 1시간 5분 걸렸다.

 

2차로 도로에서 좌회전하여 진행한다. 이곳은 현재 땅 다듬기 공사를 하고 있다.

이후 2~3분 후 발밤이 말뚝 표지판(2-68. 종점 4.4km, 시점 12.5km)이 나오고, 1분 정도 더 진행하니 드디어 초지대교가 보이기 시작한다.

 

양쪽으로 보호난간이 설치돼있는 운치 있는 길을 한동안 진행하면, 이제 보호난간은 없어지고 해안 제방(폭 좁은 시멘트 길)길을 진행한다. 계속해서 초지대교를 보며 진행한다.

 

발밤이 말뚝 표지판(2-75. 종점 3.4km, 시점 13.5km)이 세워진 곳에서 우회전하여 진행한다.

이제 해안제방길이 시멘트길 에서 넓은 돌이 깔린 길로 변한다. 중간에 해안 쪽으로 뻗은 나무에 키 작은 글쓴이가 머리를 부딪쳤다. 아무 생각 없이 걷다 일어난 참변(?)인데 나무줄기에다 「머리 조심」이라는 안내판이라도 걸어놨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곤 4분 후 덕진진에 도착했다.

덕진진의 문루(성문)인 공조루(控潮樓) 옆에는 덕진진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덕진진 [德津鎭](사적 226호)

소재지: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846

 

덕진진은 인천광역시 강화군에 위치하며 조선시대 강화해협을 지키던 요충지로 병자호란 뒤 강화도를 보호하기 위한 방법으로 내성, 외성, 돈대, 진보 등의 12진보를 만들었는데 그 중의 하나이다. 효종 7년(1666) 국방력 강화를 위해 해군주둔지(水營)에 속해 있던 덕진진을 덕포로 옮겼으며, 숙종 5년(1679)에 용두돈대와 덕진돈대를 거느리고 덕진포대와 남장포대를 관할함으로써 강화해협에서 가장 강력한 포대로 알려져 있었고, 강화 12진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곳이었다. 1866년 병인양요 때는 양헌수의 군대가 덕진진을 거쳐 정족산성으로 들어가 프랑스 군대를 격파하였으며, 1871년 신미양요 때는 미국 함대와 가장 치열한 포격전을 벌인 곳이다. 그러나 초지진에 상륙한 미국군대에 의하여 점령당하였다. 이 때 건물에 몸을 숨겨서 적과 싸울 수 있도록 쌓았던 낮은 담은 모두 파괴되었다. 1976년 성곽과 돈대를 고치고 남장포대도 고쳐 쌓았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누각도 다시 세웠고, 당시의 대포를 복원하여 설치하였다. 덕진진의 성문인 공조루는 홍예문만 남아있던 것을 1977년에 복원했다.

 

1977년 복원된 공조루에 들어가면 염하가 눈앞에 펼쳐진다.

이어 성벽을 따라 이어지는 길을 진행하면 강화나들길을 탄생시키게 만든 화남 고재형 선생이 1906년에 쓴 심도기행의 일부인 덕진동(德津洞)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2분 후 빛바랜 흑백사진과 글이 적힌 안내판이 나오는데 신미양요 당시의 사진과 그림인데 덕진돈대를 강제 점령한(1871) 미국 군사들이 주변 지형을 살펴보는 모습, 성조기를 게양하는 모습, 덕진진 앞쪽 해안가에 경비를 서고 있는 해군장교 1명과 수병 5명의 사진이 붙어 있다.

이곳은 덕진진 맞은편 염하강 건너편으로 김포의 덕포진 일대와 손돌의 묘가 있는 언덕이 보인다.



덕진돈대에서 바라본 남장포대의 모습


바로 옆에는 남장포대 안내판도 세워져 있다.

 

남장포대 (南障砲臺)

소재지: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846

 

남장포대는 덕진진에 소속된 포대로 강화의 8개 포대중 하나이다. 대포 10문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고종 8년(1871) 신미양요 때 덕진돈대와 함께 미국 아세아함대와 맹렬한 포격전을 전개하였던 곳이다. 성첩(城堞)과 시설물은 이때 모두 파괴되었는데, 1977년에 다시 복원하였다.

[출처: 현지 안내판]

 

남장포대 안내판에서 내려가면 남장포대이다. 일렬로 10개의 포좌가 있는데 1개의 포좌를 건너 대포들이(총 5개) 전시되어 있다.

 

남장포대를 지나면 곧바로 덕진돈대가 나온다. 입구에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덕진돈대 (德津墩臺)

소재지: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846

 

덕진돈대는 덕진진에 소속된 2개 돈대 중 하나이다. 북쪽의 광성보와 남쪽의 초지진 중간에 위치하여 강화수로의 가장 중요한 요새지이기도 하다. 신미양요(1871) 당시 미국함대와 48시간 동안 치열한 포격전을 전개하였는데 이때 파괴되었던 것을 1977년에 복원하였다.

[출처: 현지 안내판]

 

사각형의 덕진돈대에 들어가면 일망무제의 조망이 펼쳐진다. 지나온 남장포대가 잘 보이고, 염하 건너 덕포진과 평화누리길에서 본 김포함상공원, 초지대교가 잘 보인다.

 

덕진돈대 끝부분에는 경고비 안내판과 경고비가 세워져 있다.

안내판(향토유적 9호)에는 조선 고종 4년(1867) 흥선대원군의 명으로 강화 덕진첨사가 건립한 것으로 개화기에 외국선박의 출입을 통제하겠다는 척화의 의지를 담고 있는 비로써 海門防守他國船愼勿過(해문방수타국선신물과)라고 각인되어 있다고 쓰여 있다.

 

경고비의 크기는 높이 147㎝, 너비 54.5㎝ 두께 28㎝ 이고, 내용은 海門防守他國船愼勿過(해문방수타국선신물과)이다.

 

발밤이 말뚝 표지판(2-79. 종점 2.4km, 시점 14.5km)도 세워져 있다.

    


초지진


이제 온수천이 염하로 흘러들어가는 어귀를 지나 덕진교를 건너 다시 온수천을 끼고 온수천 제방길로 들어선 후 다시 온수천이 염하에 합류하는 어귀에 도착했다. 그러니까 역 디귿자(⊂)로 걸은 것이다.

온수천이 염하로 흘러들어가는 어귀 부분은 양쪽으로 갯벌이 깊게 형성되어 있어서 유역은 넓어도 강폭은 무척 좁다.

 

해안 제방길로 진행한다.

발밤이 말뚝 표지판(종점 1.2km, 시점 15.7km)을 지나, 염하 건너 김포함상공원과 더욱 가까워진 초지대교를 바라보며 계속해서 해안 제방길(시멘트 포장길)을 진행한다.

 

초지진어판장을 지나 2차로 도로로 나가 도보길을 조금 진행하니 초지진이 나온다.

이로써 2코스 호국돈대길을 마쳤다.

 

휴식(점심시간) 포함하여 6시간 32분 걸렸다.

 

초지진 [草芝鎭](사적 225호)

인천 강화군 길상면(吉祥面) 초지리에 해안선을 지키기 위하여 설치한 진.

1971년에 사적 제225호로 지정되었으며, 면적은 4,233㎡이다.

 

1656년(효종 7) 강화유수(江華留守) 홍중보(洪重普)가 처음 설치하였다. 66년(현종 7) 병마만호(兵馬萬戶)를 두었다가 1763년(영조 39)에 첨사(僉使)로 승격시켰는데 이때의 병력은 병마첨절별사(兵馬僉節別使) 1명, 군관 11명, 사병 98명, 돈군(墩軍) 18명, 목자(牧子) 210명, 진선(鎭船) 3척과 무기 다수가 있었다. 1866년(고종 3) 병인양요(丙寅洋擾) 때 이곳에서 프랑스 함대의 로즈 소장과 싸웠으며, 1871년(고종 8)에는 미국 아시아함대의 로저스 중장이 이곳에 침입하였을 때 필사의 방어전을 전개하다 함락된 바 있었고, 1875년(고종 12)에는 일본 군함 운요호(雲揚號)와도 이곳에서 교전하였다.

 

이 초지진은 모두 허물어져 돈(墩)의 터와 성의 기초만 남아 있었던 것을 1973년 초지돈만 복원하였다. 돈에는 3곳의 포좌(砲座)가 있고 총좌(銃座)가 100여 곳 있다. 성은 높이 4m 정도에 장축이 100m쯤 되는 타원형의 돈이다. 돈 안에는 조선말의 대포 1문이 포각 속에 전시되어 있는데, 포각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집 홍살로 되어 있으며, 대포의 길이는 2.32m, 입지름 40cm이다.

 

앞전에 초지진 내부는 구경을 못해서 오늘 구경하게 되었다.

초지진 내부로 들어가니 우선 초지진의 형태부터 다른 돈대와는 다르게 특이하게 생겼고 한가운데 정자가 있고 그 내부에 대포가 전시되어 있었다.

이곳 역시 조망이 무척 좋은 곳이다.

 

초지진 내부를 구경하고 내려와 버스정류장으로 이동하여 5번 버스를 타고 강화전쟁박물관 주차장에 주차한 차량을 회수한 후 귀가했다.

 

염하 건너 덕포진에서도 그랬고 강화 호국돈대길의 갑곶돈대부터 광성보, 덕진진, 초지진까지 걸음을 마치고 잠시 생각에 빠져본다.

 

조선군은 구식무기로, 강력한 현대식 무기를 장착한 미군에 맞서 싸웠다.

뻔한 결과였다. 상대가 되지 않았고, 처참했다. 학살 수준의 대패였다.

 

그 현실에 직면했을 그 자리의 우리 조선군들, 그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침략자에 대한 분노, 무력감에 대한 참담함, 전장에 몰아놓은 누군가에

대한 원망, 남겨질 가족에 대한 걱정과 회한, 그 수많은 감정이 얽혀 느껴진다.

 

그리고 초토화된 요새에 서서 이 정경을 본 미군들, 그들은 또 어떠했을까?

대승에 자랑스러워했을까?

아니면 이 처참한 정경에 그들도 몸서리치며 고개를 가로 저었을까?

그리고 의문을 품었겠지, 왜 이들은 도망가지 않고 끝까지 싸우다 죽었을까?

이들은 무엇을 위해 싸웠을까?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출처] 2017 여름휴가 1일차, 강화도 호국유적 덕진진과 남장포대|작성자 방랑가족님이 쓴 글을 일부 수정해서 올렸습니다.

 

6. 참고자료

 

① 염하 [鹽河]

 

인천광역시 강화군(강화도)과 경기도 김포시 사이에 있는 남북 방향의 좁은 해협(海峽)이다. 마치 강(江)과 같다 하여 염하(鹽河)라고 부르며 강화해협 또는 김포강화해협이라고도 한다. 폭이 좁은 곳은 200~300m, 넓은 곳은 1km 정도이고, 길이는 약 20km이다.

 

밀물 때의 최대 유속은 약 3.5m/sec로 물살이 거세고 수심이 얕아서 썰물 때에는 곳에 따라 바닥이 드러나기도 한다. 염하의 북쪽으로는 한강과 임진강, 예성강의 강물이 흘러들어 오는데, 염하 북쪽의 월곶과 남쪽 황산도 간에는 물높이(해수면 높이) 차이가 아주 커서 물살이 빨라지게 된다.

 

염하는 예로부터 우리나라 해상교통의 요충지로, 조선시대에 삼남지방에서 서해를 북상해 온 세곡선(稅穀船)이 염하를 통해 한강으로 진입하여 한양으로 들어갔다. 염하는 교통의 요지였을 뿐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외세를 막는 군사적 요충지였는데 개항기 때에는 병인양요(1866년)와 신미양요(1871년)를 치른 격전지였다.

 

염하를 따라 군대 주둔지인 진(鎭)과 보(堡), 초소인 돈대 등 수많은 방어유적이 산재해 있다.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초지진(草芝鎭, 사적 제225호), 덕진진(德津鎭, 사적 제226호), 덕포진(德浦鎭, 사적 제292호), 광성보(廣城堡, 사적 제227호), 갑곶돈(甲串墩 갑곶돈대, 사적 제306호) 등이 있다.

 

염하는 한국전쟁 전까지만 해도 북한 신의주까지 오가던 뱃길이었는데 전쟁 후 뱃길이 봉쇄되었다가 2007년부터 민간어선이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염하를 가로질러 강화대교와 초지대교가 놓여 있다.

 

② 강화 관방유적 5진 7보 53돈대​

 

▶ 강화 5진: 월곶진, 제물진, 용진진, 덕진진, 초지진

▶ 강화 7보: 광성보, 선두보, 장곶보, 정포보, 인화보, 철곶보, 승천보​

 

▶ 강화 53돈대: 가리산돈대, 갈곶돈대, 갑곶돈대, 건평돈대, 검암돈대, 계룡돈대, 광성돈대, 광암돈대, 굴암돈대, 귀등돈대,낙성돈대, 덕진돈대, 동검북돈대, 망양돈대, 망월돈대, 망해돈대, 무태돈대, 미곶돈대, 북일곶돈대, 분오리돈대, 불장돈대, 빙현돈대, 삼암돈대, 석각돈대, 석우돈대, 섬암돈대, 속우돈대, 손돌목돈대, 송강돈대, 송곶돈대, 숙룡돈대, 양암돈대, 염주돈대, 오두돈대, 옥창돈대, 용당돈대, 월곶돈대, 의두돈대, 인화돈대, 작성돈대, 장곶돈대, 장자평돈대, 적북돈대(赤北墩臺), 제승돈대, 좌강돈대, 천진돈대, 철북돈대, 초지돈대, 추루돈대, 택지돈대, 화도돈대, 후애돈대, 휴암돈대.

 

7. 더 많은 사진 보기

 

강화나들길 2코스 호국돈대길(사진 1) http://blog.daum.net/joingi61/15965218

강화나들길 2코스 호국돈대길(사진 2) http://blog.daum.net/joingi61/15965219

강화나들길 2코스 호국돈대길(사진 3) http://blog.daum.net/joingi61/15965220

강화나들길 2코스 호국돈대길(사진 4) http://blog.daum.net/joingi61/15965221

 

8. 강화나들길 답사 후기

 

코스

답사

순서

답사날짜

후기

1.심도역사 문화길

8

2019.01.08

http://blog.daum.net/joingi61/15965217

8.철새 보러 가는 길

7

2019.01.01

http://blog.daum.net/joingi61/15965212

9. 다을새 길

3

2018.11.20

http://blog.daum.net/joingi61/15965198

10. 머르메 가는 길

4

2018.11.27

http://blog.daum.net/joingi61/15965201

11.석모도 바람길

5

2018.12.04

http://blog.daum.net/joingi61/15965204

12.주문도 길

1

2018.11.12

http://blog.daum.net/joingi61/15965194

13.볼음도 길

2

2018.11.13

http://blog.daum.net/joingi61/15965195

19.석모도 상주해안길

6

2018.12.25

http://blog.daum.net/joingi61/15965207

 

9. 답사 경비

 

①승용차 이용 기름값(추정): 10,000

②통행료: 3,600

③버스비: 1,250

합계: 14,8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