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평산행(둘레길 등)/[강화]나들길

[강화나들길 1코스] 심도역사 문화길 (후기)

약초2 2019. 1. 15. 20:38

강화나들길 여덟 번째 이야기

 

1코스 심도역사 문화길

역사와 문화를 배우는 길을 가다!

 

1.날짜: 2019년 1월 8일(화)

2.답사코스: 강화버스터미널→강화향교→연미정→갑곶돈대

3.날씨: 맑고 쾌청함

 

4.답사시간

-09:19 강화버스터미널 발(답사시작)

-09:49 동문

-10:32 용흥궁

-10:37 성공회 강화성당

-10:58 강화향교

-11:08 은수물약수터

-11:34 북문(진송루)

-11:49 분기점

-13:00 연미정 입구

-13:11 연미정 입구 원위치 착 / -13:46 발

-14:48 6.25참전용사 기념공원

-15:02 갑곶 순교성지 입구

-15:11 구(舊) 강화대교 앞

-15:19 강화전쟁박물관 주차장 착(답사 종료)

※휴식, 과외 포함하여 6시간 걸렸다.

 


갑곶돈대



5.답사 후기

 

일주일 만에 다시 찾은 강화나들길 여덟 번째 이야기는 「제1코스 심도역사 문화길」이다.

 

강화나들길 제1코스 심도역사 문화길

강화버스터미널 ~ 갑곶돈대

 

거리: 18km / 소요시간: 6시간 / 난이도: 중

강화버스터미널-(1.5km)-동문-(0.7km)-성공회강화성당-(0.05km)-용흥궁-(0.3km)-고려궁지-(0.5km)-북관제묘-(0.6km)-강화향교-(0.2km)-은수물-(1.2km)-북문-(0.8km)-북장대-(0.6km)-오읍약수-(5.1km)-연미정-(0.8km)-옥개방죽-(5.35km)-갑곶성지-(0.3km)-갑곶돈대

 


강화나들길 1코스 개념도(강화군청 홈피에서 발췌)


[코스정보]

 

천년을 넘나드는 시간여행의 길이다. 한때 나라의 수도였던 강화는 심도(沁都)라고도 불렀다. 강화의 중심부를 걸으며 강화 타임머신을 타보자. 고려와 조선과 한 민족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공존하는 고장 그리고 하늘과 소통하는 성스러운 지역임을 알게 될 것이다. 고려의 궁궐과 강화 도령도 만나고, 칠백 살이 넘는 품이 넉넉한 은행나무 아래서 잠시 걸음을 멈춰 자신을 돌아보는 것도 기분 좋은 일이다. 몸은 정신을 담는 그릇이라고 하지 않은가!

 

왜 강화를 지붕 없는 역사박물관이라 하는지, 왜 천 년을 넘나드는 시간여행의 길이라 하는지 발로 알아가는 코스다. 강화도령 철종의 잠저, 고려의 왕들이 살았던 고려궁지, 프랑스군이 탈취해간 의궤가 있었던 외규장각, 숙종 때 쌓은 성의 흔적이 남아 있는 산성길, 몽고와 강화조약을 맺었던 연미정, 예성강 임진강 한강이 만나 한 몸을 이루는 곳, 하나하나 열거하기조차 숨이 가쁜 역사와 문화의 길이다. 북장대 너른 터에서 광활하게 펼쳐진 평야도 보고, 하늘과 닿아 있는 염하 건너 송악산도 보고 가자. 특히 겨울철에는 눈이 얼어붙은 구간도 있어 스틱 등 장비를 잘 갖추는 것이 좋다.

 

[볼거리]

 

▶ 용흥궁

강화도령으로 불렸던 조선 철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 14~19세까지 살았던 곳으로 원래는 초가집이었으나 왕이 되어 떠난 후 강화유수 정기세가 현재와 같은 기와집을 세우고 용흥궁이라고 하였다.

 

▶ 고려궁지

고려는 고종 19년(1232년), 몽골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최우의 권유로 도읍을 송도에서 강화로 옮겼다. 이때 옮겨진 도읍 터가 고려궁지로 원종 11년(1270년) 환도할 때까지 39년간 사용되었다. 고려 궁지는 규모는 작으나 송도 궁궐과 비슷하게 만들어졌고, 궁궐 뒷산 이름도 송악이라 하여 개경으로의 환도를 잊지 않으려 했다.

 

▶ 성공회 강화성당

백 년 이상 된 백두산 적송을 바람 따라 움직이는 뗏목을 이용, 두만강을 통해 서해로 끌고 나와 강화읍까지 운반에만 6개월이 걸렸다. 기와를 높이 올린 3칸 자리 솟을대문이 출입문이다.

대문에는 십자가를 형상화한 태극 문양을 그려 넣었고, 내삼문에는 교회의 종탑 대신 사찰의 범종 모양 동종이 있다. 여기에도 태극 문양을 십자가로 변형한 문양을 넣었다. 당시 조선 최고의 궁궐을 지은 도편수는 동서양의 특징을 잘 조화해서 외형은 한국 전통 건축양식과 사찰의 양식을 합하였고 내부는 바실리카양식으로 꾸몄다.

 

▶ 강화북문

강화읍을 에워싸고 있는 산성의 북문이다. 강화산성은 1232년 강화도읍기에 내성으로 축조되었으며, 개경으로 환도할 때 몽골의 요구로 헐렸었다. 조선 전기에 강화성을 다시 쌓았으나 1637년 병자호란 때 청군에 의해 파괴당하였다. 숙종 때 성을 보수하면서 남산까지 포함시켜 넓혔다. 북문은 고려궁지에서 왼쪽길로 올라가면 대산리로 넘어가는 고개에 있다. 문루의 이름은 진송루(鎭松樓)이다.

사적 제132호.

 

▶ 연미정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하여 한줄기는 서해로, 또 한 줄기는 강화해협으로 흘러 그 모양이 마치 제비 꼬리 같다 하여 연미정(燕尾亭)이라 부른 것이며, 높은 석주 위에 세운 팔작집이다.

한양으로 가는 배들은 이 정자 아래에서 만조가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한강으로 올라가곤 하는데 달이 뜨면 그 광경이 더욱 멋져 강화 팔경의 하나이기도 하다. 연미정에는 두 그루의 보호수인 느티나무가 그 자태를 뽐내며 운치를 더해 준다.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4호.(1995년 3월 2일 지정)

[출처: 강화나들길 홈피(www.nadeulgil.org/)]

 

오늘도 승용차를 이용하였다. 1코스 종점인 갑곶돈대에다 차를 세우려고 하는데 갑곶돈대의 위치를 잘 몰라 강화전쟁박물관 주차장으로 들어가 그곳에다 차를 세웠는데 맞은편에 나들길 도장함이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이곳이 갑곶돈대 입구라는 것을 확인하고 집에서 준비한 아침을 먹고 1코스 시점인 강화버스터미널로 가기 위해 청소년수련관 앞으로 걸어갔다.

강화전쟁박물관 주차장에서 청소년수련관 앞 버스정류장까지 약 600m 거리에 10분 정도 걸렸다.

그리곤 5분 정도 기다리니 버스가 온다. 승객은 하나도 없었다. 버스 종점인 버스터미널에서 내려서 화장실이 급해서 급한 것을 해결한 후에 터미널 밖으로 나와 1코스 답사를 시작했다. 그런데 나중에 답사 끝난 후에 알았는데 아뿔싸! 1코스 시점 도장을 안 찍고 출발했던 것이다. 다행히 5코스(고비고개길), 6코스(화남생가 가는 길)가 강화버스터미널에서 시작하기 때문에 그때 찍기로 하고 위안을 삼았다.

 

버스터미널에서 삼거리(버스터미널에서 약530m 거리, 7분)까지는 1코스와 5코스가 겹치는 구간이다. 이곳에 1코스 표지목(1-04)과 5코스(5-03) 표지목이 세워져 있다. 이곳에서 5코스는 남문 방향으로 1코스는 동문 방향으로 진행한다.

 

이곳 삼거리에서 강화나들길 지도에는 좌회전하여 우체국 방향으로 표시가 되어 있는데 표지기(리본)는 직진방향인 산성 길로 안내하고 있다.

그래서 표지기 방향으로 진행했다.

 

볼록하게 튀어나온 산성 흙길을 따라 올라가는데 벌목이 되어 있어서 편하게 올라간다. 시야도 시원하게 터져 강화읍내를 바라보며 조금 올라가니 견자산 정상이다. 정상에는 아무런 표기가 없고 깊이가 얕은 구덩이가 파져 있다. 이곳에 1코스 표지목이 세워져 있는데 누군가가 표지목 중간에 노란색으로 見子山이라고 써 놓았다. 조금 떨어진 좌측에는 나무에 가려져 있는 현충탑이 보인다.

         


강화산성 동문


이제 견자산에서 내려간다. 5분 정도 내려가니 2차로 도로 건너편에 강화산성 동문이 나타난다.

 

강화산성 (江華山城) 사적 제132호

 

시대: 고려 후기

문화재 지정: 사적 제132호

건립시기: 고려시대

면적: 789,204㎡

소재지: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국화리 산3번지 일원

요약: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을 에워싸고 있는 고려시대의 산성.

 

▶ 개설

 

강화산성은 고려가 몽골의 침입에 대항하여 개경에서 강화도로 천도한 시기인 강도(江都) 시기(1232~1270년)에 조성된 산성으로, 강화읍과 내가면, 하점면 일대에 걸쳐 있다.

 

▶ 역사적 변천

 

1232년(고종 19) 6월 몽골군 침입에 대항하여 강화로 천도하면서 궁궐을 짓고 도성(都城)을 축조하였다. 다만 이 때 왕궁과 도성 시설을 모두 갖추지는 않고, 1234년 1월부터 송도(松都)의 것과 비슷하게 도성과 궁궐, 각 관청을 건립하였다. 강화산성의 경우 1234년(고종 21)부터 본격적으로 축조하였다. 약 1.2㎞ 규모로 토성(土城)을 축조하였는데, 1259년 고려가 몽골과 강화할 때 몽골에 의해 헐렸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석성(石城)으로 다시 쌓았고, 수차례 보수를 거쳐 현재에 이른다.


▶ 내용

 

몽골의 침입에 대항하여 강화로 천도한 고려 조정은 강화도를 방어 요새로 구축하고자 하였다. 『강도지(江都誌)』에 의하면 강화의 성은 내성, 중성, 외성의 3중 방어 체계로 이루어졌다. 내성은 둘레 약 1.2㎞의 길이로 쌓은 토성으로 1234년(고종 28) 1월부터 축조되었다. 중성은 둘레 약 9㎞의 길이로 쌓은 토성으로 1250년(고종 37) 내성을 지키기 위하여 축조되었다. 외성은 강화도 섬을 두른 토성으로 1233년(고종 29)부터 쌓기 시작하여 1237년에 일차 완성되었다. 이 세 개의 성은 1259년 고려가 몽골과 강화할 때 모두 헐렸다.

 

조선 초에 고려 때의 내성을 축소하여 석성(石城)을 축성하였으니 지금의 강화산성이다. 그러나 강화산성은 1637년(인조 15)에 병자호란이 일어난 뒤 청나라 군사에 의해 다시 파괴되어, 1677년(숙종 3)에 강화유수 허질(許秩)이 고려 때의 내성 규모로 크게 고쳐 쌓았다. 1709년(숙종 35)에 강화유수 박권(朴權)이 중수한 뒤에도 조선 말기까지 계속 보수하였다. 이 때 성벽은 돌로 견고하게 쌓았고 성벽 위에 낮게 쌓은 여장(女墻)도 두었지만 현재는 대부분 무너진 상태이다. 성 안에는 남장대(南將臺)·북장대(北將臺)·서장대(西將臺) 등의 장대와 2개의 수문이 있었다.

 

1970년대 시행된 강화전적지 정화사업을 통하여 1975년에는 남문 안파루(晏波樓), 1977년에 서문 첨화루(瞻華樓)와 북문 진송루(鎭松樓) 등을 복원하였고, 2003년에 동문 망한루(望漢樓)를 복원하였다.


▶ 특징

 

강화산성에는 남문 안파루, 북문 진송루, 서문 첨화루, 동문 망한루가 있으며, 비밀통로인 암문 4개 그리고 수문이 2개 남아있다. 높은 곳에서 망을 보기 위한 장대와 성위에서 몸을 감추기 위한 여장 등의 방어시설도 갖추고 있었으나 여장은 모두 무너졌다. 현재 성의 동쪽 부분은 없어졌으나, 남북쪽 산자락은 복원 정비되어 있다.

 

2000년대 들어 강화산성에 대한 학술연구조사가 활발히 진행되었다. 강화산성 지표조사, 동문지 주변 지표조사, 남장대지 발굴조사, 북장대지 발굴조사 등이 이루어져 강화산성의 역사적 실체에 대해 상당 부분 알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아직까지 강화산성의 초축 규모와 위치 등에 대해서 논란이 있다.


▶ 의의와 평가

 

비록 국난을 피하여 천도를 한 시기이기는 하지만 고려시대 국난 극복의 의지가 담긴 현장으로 의미가 있다. 또한 조선시대 후기에 들어서도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 외세의 침략에 맞선 역사적인 현장이기도 하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강화산성의 4개의 대문 중 가장 늦게(2003년) 복원된 동문은 남쪽의 현판에는 망한루(望漢樓), 북쪽방향에는 강도동문(江都東門)이라고 쓰여 있다.

울타리가 없어 사람들이 자유롭게 성루 밑을 지나갈 수 있다.      



대한성공회 강화성당


동문에서 우측으로 강화중학교 담장을 끼고 한동안 진행하다 작별하고 좌측 길로 들어선다.

제법 오래된 듯한 큰 나무(나들길 지도에는 회나무로 표기되어 있는데 글쓴이는 나무 이름을 모르겠다)를 지나 좌측으로 강화초등학교가 나오고, 우측으로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 건물이 나온다. 그리곤 고려궁지가 나온다.

 

고려궁지(사적 133호)는 15코스(고려궁 성곽길) 때 보기로 하고,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 건물 앞에서 산 쪽으로 직진했다.(알바 시작)

이후 얼마간 진행하니 느티나무 쉼터가 나오는데 이곳에 표지목이 세워져 있다. 그런데 헉! 1코스가 아니고 15코스 표지목이다.

그때서야 과외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되짚어 내려갔다.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 건물 앞에 원위치하여 우측의 강화성당을 거쳐 내려간다. 도로 따라 내려가는데 강화초등학교 담장에 「그땐 그랬지!」라는 유익한 안내판이 많이 걸려 있다.

 

이어 용흥공원 사거리에서 공영주차장을 가로질러 용흥궁에 도착했다.

 

용흥궁 (龍興宮) 유형문화재 제20호

 

문화재 지정: 인천광역시 시도유형문화재 제20호(1995년 3월 1일 지정)

건립시기: 1853년(철종 4)

면적: 90㎡(내전), 95㎡(별전), 6㎡(비각)

소재지: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요약: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주택.

 

▶ 내용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0호. 철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이다.

 

원래는 민가였던 모양이나 철종이 왕위에 오르게 되자 1853년(철종 4) 강화유수 정기세(鄭基世)가 현재와 같은 건물을 세우고 용흥궁이라 이름하였다. 그 뒤 1903년이재순(李載純)이 중건하였다.

 

현존하는 건물은 내전 1동, 외전 1동, 별전 1동, 잠저구기비각(潛邸舊基碑閣) 1동 등이 있다. 이 궁의 건물은 창덕궁의 연경당(演慶堂), 낙선재(樂善齋)와 같이 살림집의 유형에 따라 조형되어 질박한 느낌을 주고 있다.

 

팔작지붕에 홑처마 주심포의 구조로, 내전은 정면 7칸, 측면 5칸이며(건평은 90㎡), 별전은 정면 6칸, 측면 2칸인 ㄱ자형 집(건평 95㎡)이다. 비각은 정방형으로 정면과 측면이 각각 2.5m로, 넓이가 약 6㎡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용흥궁은 강화도령으로 불렸던 조선 철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 14~19세까지 살았던 곳으로 원래는 초가집이었으나 왕이 되어 떠난 후 강화유수 정기세가 현재와 같은 기와집을 세우고 용흥궁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용흥궁에서 나와 바로 이웃하고 있는 대한성공회 강화성당으로 올라갔다.

 

성공회 강화성당 (聖公會 江華聖堂)

 

문화재 지정: 사적 제424호

건립시기: 1900년

성격: 성공회 성당

면적: 6,452㎡

소재지: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250

요약: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에 있는 대한성공회 성당.

 

▶ 내용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11호. 대한성공회의 초대 주교인 코프(Corfe, C. J.)에 의하여 1900년(광무 4)에 건립되었다.

 

대한성공회의 역사는 1889년 코프가 초대 한국 주교로 영국에서 서품을 받음으로써 시작되는데, 그 당시 우리나라에는 한 사람의 신자도 없었고, 한국인에게 처음 세례를 베푼 것은 주교 축성이 있은 지 7년 뒤인 1896년 6월 13일 강화에서였다.

 

대한성공회에서는 이러한 인연으로 강화에 제일 먼저 성당을 건립한 것인데, 대한성공회에서는 가장 오래된 역사를 지니게 되었고, 현존하는 한옥 교회건물로서도 가장 오래된 것이다. 서유럽의 바실리카(Basilica)양식과 동양의 불교사찰양식을 과감하게 조합시켜 건립하였다.

 

교회의 내부공간은 바실리카양식을 따랐고, 외관 및 외부공간은 불교사찰의 형태를 따랐다. 목재는 압록강에서 운반해서 사용하였으며, 경복궁 공사에 참여했던 대궐 목수가 건축을 맡았다.

 

경사지의 대지를 축성하여 입구 계단, 외삼문ㆍ내삼문ㆍ성당ㆍ사제관을 동남향 종축으로 배치한 외부공간의 구성이 불교사찰의 구릉지가람(丘陵地伽藍)과 비슷하며, 성당 앞마당에는 큰 보리수나무 두 그루가 서 있다.

 

외삼문 솟을대문은 팔작지붕으로 담장과 연결되어 있으며, 동쪽 칸에는 초대 사제(司祭)의 묘비가 서 있다. 내삼문은 평대문에 역시 팔작지붕이고, 서쪽 칸은 종각으로 쓰이고 있으며, 성당은 정면 4칸, 측면 10칸의 바실리카식 평면구성이다.

 

성당 내외부에는 서양식 장식이 거의 없는 순수한 한식 목조건축이면서도 교회기능에 충실한 내부공간을 연출함으로써, 초기 성공회 선교사들의 토착화 의지가 나타나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기독교 역사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는 성당건물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강화향교


성공회 강화성당을 구경하고 주차장으로 내려온 후 다시 되짚어 올라간다. 좌측에 강화성당, 우측에 강화초등학교를 지나 고려궁지 입구 삼거리에서 좌측으로 진행한다.

이내 688년 된 은행나무 보호수(1982.10.15 지정)를 만난다. 이곳에 표지목(1-11. 종점 13.5km, 시점 2km)이 세워져 있다.

그리곤 10분 후 강화향교에 도착했는데 중간에 있을 북관제묘(강화읍 관청리 706번지)를 확인하지 못하고 지나쳤다.

 

관제묘는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관우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데 강화에 세 곳(관제묘(南關帝廟) 관제묘(東關帝廟) 관제묘(北關帝廟)의 관제묘가 있다.

아무튼 오늘 답사하지 못한 북관제묘를 포함하여 남, 동관제묘도 나중에 시간 내서 답사하기로 위안을 삼았다.

 

강화향교에 도착하니 제법 큰 규모에 놀랐다. 강화도에서 교동향교(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향교)를 본 후 이번이 두 번째로 본 향교인데 규모가 꽤 컸다.

 

강화향교 (江華鄕校)

1995년 11월 14일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4호로 지정

 

1127년(인종 5) 3월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의 중등교육과 지방민의 교화를 위해 고려산(高麗山) 남쪽 기슭에 창건되었다. 1232년(고종 19)에 지금의 갑곶리[甲串里]로 옮겼다가 몽고군의 침입으로 다시 서도면(西島面)으로 이건하였다. 그 뒤 강화군으로 옮겨왔으며 1624년(인조 2)에 강화유수 심열(沈悅)이 소동문(小東門) 밖의 송악산(松岳山) 옆에다 복원하였다. 1629년에는 강화부윤 이안눌(李安訥)이 명륜당을 중건하였으며, 1688년(숙종 14)에 유수 민시중(閔蓍重)이 남문 근처로 이건하였다. 1731년(영조 7)에는 유수 유척기(兪拓基)가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고 1766년에 유수 이은(李溵)이 중수함과 동시에 소동문 밖에 있던 비석을 현재의 위치로 옮겨 세웠다.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7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성전·명륜당·동무(東廡)·서무(西廡)·제기고(祭器庫)·주방(廚房) 등이 있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으로 된 대성전에는 5성(五聖),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전답과 노비·전적 등을 지급받아 교관이 교생을 가르쳤으나, 현재는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하고 초하루·보름에 분향을 하며, 1명의 전교(典校)와 수명의 장의(掌議)가 운영을 맡고 있다.

 

※ 5성위(공자, 안자, 증자, 자사, 맹자)와 우리나라의 18현(설총, 최치원, 안향, 정몽주, 김광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김인후, 이이, 성혼, 김장생, 조헌, 김집, 송시열, 송준길, 박세채)

 


강화산성 북문


강화향교 옆에는 강화여자중학교와 강화여자고등학교가 있다.

강화향교에서 5분 정도 진행하니 은수물약수터가 나온다. 강화군에서 관리하는 시설물이라서 그런지 관리가 잘 되어 있다.

 

이제 산길이 시작된다. 15코스(고려궁 성곽길)하고 겹치는 구간이다. 15코스하고는 북문을 지나 북장대 가기 직전의 분기점까지 같이 간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중간에 서로 떨어져 있는 구간(능선길로 가나<15코스> 8부 능선길로 가나<1코스> 결국은 만나게 됨)도 있지만 결국은 만나게 된다.

 

은수물약수터에서 완만하게 1~2분 올라가니 표지목(1-21. 종점 12.5km, 시점 3km)이 나타나는데 여태껏 3km 밖에 안 왔다는 것에 조금 실망했다.

 

이후 2분 후 이정표가 나타난다. 은수물에서 300m 왔고, 북문까지 1.05km라고 쓰여 있다.

이제 강화산성길을 따라 진행하게 되는데 허리길로 진행한다. 15코스는 능선길로 진행한다. 조금 진행하다 벤치가 나와 잠시 휴식(5분)하고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후 8분 정도 더 진행하니 포토존(심도역사문화길)이 나오면서 각종 안내판 등이 세워져 있는 북문에 도착했다.

북문(진송루(鎭松樓))은 1977년에 복원했다.

 


연미정


북문에서 성곽 길을 따라 진행한다. 성곽 길은 조망이 터지면서 송해면의 너른 벌판과 바다 건너 개풍군도 잘 보인다.

 

북문에서 12분 정도 완만한 성곽 길을 올라가니 꽤 넓은 공터가 나오는데 이곳에 강화나들길 1코스 표지판과 15코스 표지목이 세워져 있다.

그리곤 2분 후 분기점이 나온다.

분기점에는 이정표 2개, 표지목 1개가 세워져 있다.

이곳에서 15코스와 작별하고 오읍약수터 방향(좌측)으로 내려간다.

 

14분을 내려가니 포장도로가 나오는데 표지목(종점 10.2km, 시점 5.3km)이 세워져 있다. 그런데 내려가는 도중 있어야 할 오읍약수터를 그냥 지나가버렸다.

 

아무튼 도로로 내려와서 다시 산길로 접어들었다.

12시 34분에 표지목(1-60. 종점 8.5km, 시점 7km)를 지나고, 12시 50분에 표지목(1-69. 종점 7.5km, 시점 8km)를 지나 2분 후에 1차로 포장도로에 떨어졌다. 길 건너 아담한 집 담장에 축구공 가지고 있는 아이들 벽화가 그려져 있다.(12:52)

 

이제 산길 구간은 끝이 났고, 포장도로를 따라 8분 정도 진행하니 드디어 연미정 앞이다.

 

연미정은 개인적으로 세 번 와 본적이 있었다. 강화팔경 중 하나인 연미정이 궁금해서 처음 찾았을 때 연미정 앞에 군 초소가 있었고, 연미정은 민간인통제구역 안에 위치하고 있어 먼발치서 구경하다 되돌아온 기억이 생생하다.

 

그 후 두 번째 가서야 연미정을 답사할 수 있었다. 그때 민간인 통제구역은 연미정 뒤로 설정되어 있었다.

 

이번이 네 번째 답사인데 오늘 와 보니 정비가 참 잘 되어 있었다.

연미정 포토존이 설치되어 있고, 그 옆 잔디밭에 황형택지(黃衡宅址) 안내문(향토유적 3호)과 「장무공황형장군택지비」라고 써진 대형비석이 세워져 있다.

그리고 조금 올라가면 포토존(왕은 사랑한다) 안내판과 그 옆에 연미조범(鷰尾漕帆) 안내판이 나오고 조금 더 계단을 올라가면 월곶돈대 입구가 나온다. 입구 우측에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이제 입구를 들어가 조금 올라가면 연미정 정자가 나오고, 보호수 느티나무 두 그루가 보인다.

 

새롭게 세운 연미정(인천 유형문화재 제24호) 안내판과 그 옆에는 황형장군 비석이 세워져 있다.

 

연미정 (燕尾亭)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4호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월곶리에 있는 고려시대의 누정.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4호.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건물. 월곶리는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하는 지점으로서 물길의 하나는 조강을 거쳐 서해로, 또 하나는 갑곶(甲串)의 앞을 지나 염하 수로를 통해 인천 쪽으로 흐르는데, 그 모양이 제비꼬리와 같다 하여 정자 이름을 연미정이라 지었다고 전한다.

 

이곳은 강화십경의 하나로 손꼽히는 자리로서 절경을 이루고 있으며, 연미정에 오르면 북으로 개풍군과 파주시, 동으로 김포시가 한눈에 들어온다. 옛날에는 서해로부터 서울로 가는 배가 이 정자 밑에 닻을 내려 조류(潮流)를 기다려 한강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정자는 높다란 주초석(柱礎石) 위에 세워져 있으며, 정자 양쪽에는 수백 년 묵은 느티나무 두 그루가 웅장한 자태로 정취를 더해주고 있다. 정자는 고려시대에 지어졌다고 하며, 1244년(고종 31)에 시랑 이종주(李宗胄)에게 명하여 구재생도(九齋生徒)를 이곳에 모아놓고 하과(夏課: 여름철에 50일 동안 절에 들어가 공부하던 일)를 시켜 55명을 뽑았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삼포왜란 때 전라좌도방어사로 큰 공을 세운 황형(黃衡)에게 정자를 하사하였으며, 현재도 황씨문중의 소유로 되어 있다. 이곳은 민간인통제구역 이북에 속하여 있기 때문에 일반인의 출입에 제한이 있었으나 현재 민간인통제구역에서 해제되어 일반인들이 자유롭게 관람하고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연미정 (燕尾亭)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4호

이곳은 한강이 서해로 흘러들면서 물길이 양쪽으로 갈라지는 모습이 제비꼬리와 같다하여 정자의 이름을 연미정이라 하였다. 강화 8경의 하나로 손꼽히는 절경을 이루는 곳으로 옛날에는 서해로부터 서울로 가는 배가 이 정자 밑에 닻을 내리고 물때를 기다려 한강으로 들어갔다. 건립연대는 정확하지 않지만, 고려 고종(1244)이 구재학당(九齊學堂)의 학생들을 이곳에 모아 면학케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정묘호란 때 인조가 청나라와 굴욕적인 형제관계의 강화조약을 맺었던 곳이기도 하다. 이후 영조20년(1744)에 중건되었고, 조선 고종 28년(1891)에 중수한 후 여러 차례 보수 되었다.

[출처: 현지 안내문]

 

500년 된 느티나무(보호수. 2000.11.27일 지정) 두 그루가 해안 쪽에 있다.

이곳에서의 조망은 가히 환상적이다.

북으로 개풍군과 파주시, 동으로 김포시가 한눈에 들어온다.

 

이제 연미정에서의 조망을 마치고 되짚어 나와 최근에 복원된 조해루(朝海樓)를 구경한다. 연미정을 둘러싸고 있는 월곶돈대의 남쪽 문인 조해루는 출입금지 되어 있어서 성 밖에서 만 구경할 수 있었다.

 

2003년 사적 제452호로 지정된 강화외성은 1233년 고려시대에 몽골의 침입을 막기 위해 적북돈대(민통선 안에 있어서 일반인은 볼 수 없음)에서 초지진까지 쌓은 성으로 둘레는 23km에 이른다.

 

강화외성 내 문루(門樓)인 조해루는 최근에 다시 축성하였으며 조선 숙종 시절인 1679년에 지어져 강화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검문하는 검문소 역할을 하던 곳이다.

 

강화 외성 (江華外城) 사적 제452호(2003년 10월 25일 지정)

 

강화 외성(江華 外城)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선원면, 불은면, 길상면 일원에 위치한 성곽이다.

 

1999년 3월 29일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7호로 지정되었다가 2003년 10월 21일에 지정 해제되고, 2003년 10월 25일 사적 제452호로 승격되었다. 그러다가 2014년 4월 18일 강화 외성의 성곽과 진해루지(鎭海樓址)로 확인된 구역을 추가 지정하였다.

 

▶ 개요

 

강화외성은 고려 제23대 고종이 1232년 몽고의 침입으로 강화도로 천도한 후 고종 20년 (1233년)에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해안 방어를 목적으로 적북돈대로부터 초지진까지 23km에 걸쳐 축조된 성이다.

 

강화외성은 고려 23대 고종이 1232년 몽고의 침입으로 강화도로 천도한 뒤 고종 20년(1233) 해안 방어를 위해 적북돈대로부터 초지진까지 23km에 걸쳐 쌓은 성이다.

 

강화성은 내성·중성·외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내성은 주위 약 1,200m로 지금의 강화읍성이다. 외성은 동쪽 해안을 따라 쌓았는데 몽고군이 바다를 건너 공격하지 못하게 한 가장 중요한 방어시설이다.

 

『고려사』에 의하면 고려 고종 24년(1237)에 강화외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조선시대에도 비상시에 국왕의 피난처인 도성(都城)의 외성(外城)으로 광해군 10년(1618)에 보수하여 사용하였다. 그러다가 숙종때 병자호란기(1636)에 허물어진 외성을 돌을 이용하여 다시 쌓았고 돈대(墩臺)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영조때 강화유수 김시혁(金始爀)이 비가 오면 성의 흙이 흘러내려 나라에 건의하여 영조 19년(1743)에서 이듬해에 걸쳐 벽돌을 이용하여 다시 쌓았다고 한다.

 

2001년 동양고고학연구소에서 실시한 오두돈 주변의 전축성 구간에 대한 지표조사 결과에 의하면, 뻘층을 기초로 머리돌을 올리고 그 위에 대형석재로 석벽의 중심을 삼고 그 위에 머리돌을 올리고 다시 전돌을 여러 단 쌓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성은 높이 20척, 폭 5척이며, 6개의 문루(조해루·복파루·진해루·참경루·공조루·안해루)와 암문 6개소, 수문 17개소를 설치하였다고 한다.

 

강화외성은 고려 후기∼17세기 후반 도성의 구조와 축성기법 연구에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특히, 이 성은 벽돌로 개축한 전축성(塼築城)이 오두돈 주변(남측)에 남아 있어 수원 화성(사적 제3호)과 더불어 전축성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준다.

[출처; 위키백과]

 

조해루 앞에는 월곶진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주차장을 지나면 입구에 표지목(1-73. 종점 6.5km, 시점 9km)도 세워져 있다.

 

점심시간이 돼서 배도 고프고 한데 연미정 주변에는 식당이 없다. 그래서 조그마한 마트로 들어가서 그곳에서 컵라면과 커피를 먹었다. 30분 정도 걸렸다.

 

컵라면(선택의 여지가 없고, 그나마 컵라면[컵라면도 신라면 밖에는 없음]이라도 먹을 수 있어서 다행)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연미정에서 출발했다.

조해루 옆 해안철책 가까이에 300년 된 회화나무와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6.25 참전용사 기념공원


강화 외성의 복원은 조해루까지 이고 이후로는 철책이 자리하고 있다.

좌측 해안 쪽의 철책을 보면서 옥개방죽을 지난다. 이후 1시간을 진행하니 6 ․ 25 참전용사 기념공원이 나온다. 처음에는 참전국의 참전 내용이 적힌 기역자 안내판이 좌우로 세워져 있고, 그곳을 지나면 한반도 조형물이 나온다. 그리곤 강화 6 ․ 25 참전용사기념비가 나온다. 그 옆에는 기념비 안내판도 세워져 있다. 여기까지 보고 보도로 내려갔는데 다시 기념공원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보도에서 수해 때문에 설치한 파란색의 커다란 파이프를 건너 기념공원 안으로 들어갔다.

좌측에는 6 ․ 25 참전용사 기념공원 목재 세로간판이 세워져 있고, 우측에는 마네킹 헌병이 악수를 하자고 손을 내밀고 있다.

열려있는 철문 내부의 초소 2층에도 마네킹 병사가 보초를 서면서 이곳을 바라보고 있다.

 


전쟁기념관 주차장에 설치된 강화나들길 1코스 종점, 2코스 시점 도장함


이후 6분 정도 진행하니 표지목(1-93. 종점 1.4km, 시점 14.1km)이 나온다. 그리고 5분 후에 갑곶 순교성지 입구가 나온다. 입구에는 대형 표지석(갑곶 순교성지)이 세워져 있다. 바로 위쪽에는 강화대교(4차로) 교각이다.

 

강화대교 (江華大橋)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갑곶리와 경기도 김포시 월곶면 포내리를 연결하는 다리이다.

 

1993년 8월에 착공하여 1997년 12월에 준공되었으며 연장은 780m, 폭은 19.5m(4차로)이다. 본 교량의 개통으로 1969년 준공되어 사용하던 노후된 기존의 옛 강화대교는 폐쇄되었다.

 

갑곶순교성지 [甲串殉敎聖地]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갑곶리에 있는 천주교도의 순교성지이다.

 

미국이 1866년의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빌미삼아 1871년 군함을 앞세우고 강화도 해역을 침범한 신미양요(辛未洋擾)가 일어난 후 대원군은 더욱 심하게 천주교를 박해하게 된다. 미국 군함이 물러간 후 고종은 철저하게 천주교인을 잡아 처벌하라는 교서를 내리게 되는데 이때 미국 함대에 왕래했던 박상손(朴常孫), 우윤집(禹允集), 최순복(崔順福) 등이 제일 먼저 잡혀 갑곶진두(갑곶나루터)에서 목이 잘려 효수되었다.

 

천주교 인천교구는 문헌상에 나와 있던 갑곶진두의 정확한 위치를 찾아 그 터를 매입한 후 2000년에 순교성지로 조성하였고, 2001년 9월에는 순교자들의 행적을 증언한 박순집의 묘를 이장하였다. 박순집은 참수 희생자는 아니지만 목숨을 걸고 순교자들의 시신을 안장하고, 순교자의 행적을 증언하였으며 성직자들을 보호한 인물이다. 갑곶순교성지는 순교자묘역과 박순집의 묘, 예배당, 야외제대, 십자가의 길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순교성지 내부로 들어간다. 곧바로 우측으로 화장실 건물 4동이 나란히 설치되어 있는 곳을 지나, 우측 공터 끝쪽에 통제영학당지가 나오는데 안내판과 통제영학당 옛터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통제영학당지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49호)

소재지: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갑곶리 1045-1

 

통제영학당은 조선 고종 때인 1893년에 설치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해군사관학교로 현재 터만 남아있다. 개항과 더불어 해양방어의 일환으로 군함의 건조와 구입을 추진하였으나 인재부족, 재정궁핍, 청나라와 일본의 방해 등으로 효과를 거두지 못하자 그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고자 이곳에 건물을 신축하였다. 그러나 동학농민전쟁과 청일전쟁 등으로 인해 교육이 순조롭지 못하다가 1896년 5월 영국군 교관들이 귀국하자 폐교되었다. [출처: 현지 안내판]

 

※한국최초, 인천최고 100선

42.조선수사해방학당(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세운 해군사관학교)

 

통제영학당 옛터

 

<개화>와<쇄국>의 혼란스런 시대 상황을 겪으며 오로지 조국의 바다를 지킬 구국의 인재를 양성하고자 최초의 근대식 해군사관학교인 <통제영학당>이 이터에 뿌리내렸다.

 

바야흐로 빛나는 대한민국해군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자긍심을 고취하고자 여기 표지석을 세운다.

2009년 4월 13일

대한민국 해군참모총장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상과 성모상을 지나면 다시 예수상이 또 나온다. 이후 아치형 파고라가 나오는데 그 옆에 표지목(1-95. 종점 0.7km, 시점 14.8km)이 세워져 있다.

 

아치형 파고라를 지나면 팔 벌리고 있는 제법 큰 예수상이 나온다. 그리곤 지그재그 계단이 나온다.

완만하게 만들어진 지그재그 계단을 올라가면 예전의 강화대교 입구가 나온다.

 

구강화대교(舊江華大橋)

 

인천 강화군 강화읍 갑곶리(甲串里)와 경기 김포시 월곶면(月串面) 포내리(浦內里)를 잇는 다리이다. 길이 694m. 너비 10m(차도 2차선 7m, 보도 3m). 1965년 7월 착공하여 1969년 12월에 완공되었다. 육지와 섬을 잇는 다리로서는 경남 충무교, 전남 완도교에 이어 3번째이다. 1997년 신 강화대교가 개통되면서 폐쇄되어 이용할 수 없다.

 

강화대교 입구가 갑곶 순교성지 끝 지점이다.

이제 포장도로를 따라 완만하게 내려가면 우측으로 「갑곶 순교성지」대형 표지석(화강암)이 세워져 있는데 이곳이 갑곶 순교성지 정문이다.

이후 조금 내려가면 강화전쟁박물관 주차장이다.(15:19)

 

이로써 1코스 심도역사 문화길 답사를 무사히 마쳤다. 휴식, 과외 포함하여 6시간 걸렸다.

 


갑곶돈대


이후

강화전쟁박물관 입장료(900원)을 내고 강화전쟁박물관 답사에 나섰다.

매표소 옆에 세계금속활자발상 중흥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또한 그 옆에는 한국 최초, 인천 최고 100선이라 하여 상정고금예문(강화도에서 간행된 세계 최초의 금속 활자 책)에 대한 내용을 적은 안내판도 세워져 있다.

 

1234년(고종 21)에 펴낸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책으로 강도시대(강도시대)에 팔만대장경 간행 등 정신력의 결집으로 외적을 물리치고자 하였음.

고려 인종 때 최윤의 등 17명이 왕명으로 고금의예의를 수집, 고증하여 50권으로 엮은 전례서 [현지 안내판에서 발췌]

 

그 뒤로는 67개의 비석이 있는데 조선시대 선정을 베푼 유수, 판관, 경력, 군수 등의 영세 불망비 및 선정비와 자연보호의 일환으로 세운 금표, 삼충신(강흥업, 구원일, 황선신)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삼충사적비 등이 있다. 안내판도 세워져 있다.

 

이어 계단을 올라가면 강화전쟁박물관인데 가장 나중에 보기로 하고 그 앞에 있는 탱자나무를 보기위해 이동했다.

 

천연기념물 제78호인 강화 갑곶리 탱자나무는 우리나라 서해안에서 탱자나무가 자랄 수 있는 북쪽 한계선이 됨을 입증하는 귀중한 자료이다.(자세한 내용은 6. 참고자료 ① 강화 갑곶리 탱자나무에서 확인)

 

탱자나무를 본 후 이섭정(利涉亭)에 올라가 본다.

그리곤 갑곶돈대로 이동하여 갑곶돈대를 구경한다.

 

갑곶돈대

사적 제306호(1984년 8월 13일 지정)

 

강화 갑곶돈대(江華 甲串墩)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에 있는 조선시대의 돈대이다. 1984년 8월 13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306호 갑곶돈으로 지정되었으나, 2011년 강화 갑곶돈대로 변경되었다.

 

▶ 개요

 

돈대는 작은 규모의 보루를 만들고 대포를 배치하여 지키는 곳이다.

 

갑곶돈대은 고려가 1232년부터 1270년까지 도읍을 강화도로 옮겨 몽고와의 전쟁에서 강화해협을 지키던 중요한 요새로, 대포 8문이 배치된 포대이다.

 

삼국시대 강화를 갑비고차(甲比古次)라 부른데서 갑곶이라 이름이 전해오는 것으로 보기도 하고, 고려 때 몽고군이 이곳을 건너려고 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안타까워하며 ‘우리 군사들이 갑옷만 벗어서 바다를 메워도 건너갈 수 있을 텐데’라 한탄했다는 말에서 유래했다는 전설도 있다.

 

조선 1644년 강화의 요충지마다 군대 주둔지를 설치할 때, 제물진에 소속된 돈대로서 1679년에 완성되었다. 고종 3년(1866) 9월 병인양요 때 프랑스의 극동함대가 600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곳으로 상륙하여 강화성과 문수산성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10월에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은 양헌수 장군의 부대에게 패하여 달아났다.

 

1977년에 옛터에 새로이 옛 모습을 되살려 보수, 복원이 이루어졌다. 지금 돈대 안에 전시된 대포는 조선시대 것으로 바다를 통해 침입하는 왜적의 선박을 포격하던 것이다.

 

갑곶돈대에는 불랑기(佛狼機)와 소포(小砲)가 전시되어 있다. 조망도 무척 좋은데 바로 옆에 있는 구강화대교와 신강화대교는 물론 염하 건너 김포 땅이 잘 보인다. 갑곶돈대를 본 후 되 내려와 전쟁박물관 내부로 들어갔다.

 

갑곶돈대 내에 위치한 전쟁박물관은 역사의 고비 때마다 외세의 침략을 막아낸 강화의 호국정신을 느낄 수 있도록 강화에서 벌어진 전쟁을 주제로 전쟁 관련 유물을 전시한 곳이다.

 

고려의 주권을 지켜낸 강화 천도, 강화 성곽의 건설, 삼별초의 출발지 강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오늘날의 호국 등의 내용이 있다.

 

구경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면 벤치에 앉아 있는 장군 마네킹이 설치되어 있다. 이것까지 보고 주차장으로 돌아와 귀가했다. 

 

6. 참고자료

 

① 강화 갑곶리 탱자나무

 

▶ 요약: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갑곶리에 있는 탱자나무.

▶ 지정번호: 천연기념물 제78호

▶ 지정일: 1962년 12월 3일

▶ 소재지: 인천 강화군 강화읍 갑곶리 1016

▶ 종류/분류: 나무

▶ 크기: 면적 13.2㎡, 높이 4m, 뿌리목 둘레 1m

 

1962년 12월 3일 천연기념물 제78호로 지정되었으며 장동근이 소유, 강화군이 관리하고 있다. 수령 400년 정도의 노거수로서 나무의 크기는 높이 4m, 뿌리목 둘레 1m, 2갈래로 갈라진 부분의 가슴높이 지름이 각각 14cm와 10cm 안팎이다. 가지 길이는 동쪽 1.5m, 서쪽 4.4m, 남쪽 3.3m, 북쪽 2.2m이며, 차지하는 면적은 13.2㎡이다. 주위에는 큰 가죽나무가 자라고 있다.

 

강화도는 고려시대에 몽골군의 침공으로 고종이 천도하고, 조선시대에는 인조가난을 피했던 곳이다. 이들 전란을 계기로 성벽을 강화하고 적군의 접근을 어렵게 하기 위해 성 밖에 탱자나무 울타리를 조성하였다. 강화도는 탱자나무가 자랄 수 있는 북쪽 한계선이어서, 탱자나무를 처음 심었을 때 조정에서는 나무가 자라는 모습을 자세히 보고하게 하였다고 한다. [출처: 두산백과]  


400년 된 갑곶리 탱자나무


② 강화 사기리 탱자나무

 

▶ 요약: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 사기리에 있는 탱자나무.

▶ 지정번호: 천연기념물 제79호

▶ 지정일: 1962년 12월 03일

▶ 소재지: 인천 강화군 화도면 사기리 135-10

▶ 종류/분류: 나무

▶ 크기: 면적 13.2㎡, 높이 3.8m, 뿌리목 지름 53cm

 

1962년 12월 3일 천연기념물 제79호로 지정되었으며 이범하가 소유, 강화군이 관리하고 있다. 수령 400년 정도의 노거수로 높이는 3.8m이다. 땅 위 28cm 되는 곳에서 3갈래로 갈라지며, 다시 여러 개의 가지로 갈라져 있다. 뿌리목의 지름은 53cm, 가지 길이는 동쪽 4.1m, 서쪽 3.2m, 남쪽 2.7m, 북쪽 3.9m이며 나무가 차지하는 면적은 13.2㎡이다.

 

사기리의 길가에 서 있는데,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다. 줄기목 부분이 많이 상하였고 군데군데 가지가 말라 죽었다. 줄기가 옆으로 처지기 때문에 철제 지주로 지탱하고 있다. 갑곶리의 성 밖에 탱자나무를 심던 무렵에 심은 것으로 추정된다. 수령을 500년으로 보기도 한다. [출처: 두산백과]

 

③ 우리 생활 속의 나무, 탱자나무

 

몽고에서 침입해 오는 적을 막기 위해 고려 고종은 강화도에 성을 쌓고 적이 못 들어오게 성 주변에 탱자나무를 많이 심었는데, 지금은 성이 허물어져 흔적만 남아 있지만 그때 심었던 탱자나무는 아직도 살아 있어 1962년에 천연기념물 78호로 지정되었다. 나이가 족히 400살은 되었을 것으로, 나무 높이 4m, 둘레가 1m쯤 된다.

 

충남 서산의 해미 읍성은 일명 탱자성이라고도 불리는데 해풍(바닷바람)을 막고, 성을 은폐함과 동시에 적병이 침입해 들어오는 것을 막으려고 탱자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옛날 사람들은 동네에 전염병이 돌면 가시가 많이 붙은 탱자나무나 음나무 가지를 꺾어다가 안방 문 위에 걸어 놓는 풍습이 있었는데,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시골에서 흔하게 볼 수 있었던 모습들이다.

 

탱자나무가 생울타리용으로 좋은 것 이외에도 아주 귀하게 쓰이는 곳이 있다. 지실 이라고 해서 덜 익은 탱자를 말려서 습진 치료에 쓰고, 껍질만을 벗겨 말린 것은 지각이라 하여 설사를 멎게 하거나 건위제로 좋다고 『동의보감』이나 『본초도감』에 나와 있다. 또한 꽃에는 정유 성분이 많이 들어 있어 화장품을 비롯한 각종 향료를 만드는 재료로도 쓰인다.

 

줄기가 항상 녹색을 띠는 나무는 흔하지 않은데, 탱자나무는 항상 녹색을 띠고 있어 사람들은 상록수로 착각할 수 있으나 가을에 낙엽이 지는 관목이다.

 

귤나무를 접목으로 증식할 때 대부분 탱자나무를 대목으로 쓰는 것이 귤나무 대목보다 유리하기 때문에 그렇게들 많이 하고 있다.

 

묘목 증식은 가을에 노랗게 익은 탱자 속에 들어 있는 종자를 채취해서 겨울 동안 노천 매장했다가 봄에 파종하면 발아가 잘되고 3년쯤 키우면 생울타리용으로 심을 수 있을 정도가 된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탱자나무 (우리 생활 속의 나무, 2008. 3. 25.)

 

④ 강화향교에 위패가 봉안된 위인 명부

 

◎ 중국 5성(五聖)

1.공자(孔子, 大成至聖 文宣王, BC551-BC478)

2.안자(復聖公 顔子, BC521-BC490)

3.증자(宗聖公 曾子, BC505-BC436)

4.자사(術聖公 子思, BC483-BC402)

5.맹자(亞聖公 孟子, BC372경-BC289경)

 

◎ 한국 18현(韓國 十八賢)

1. 설 총(弘儒候 薛聰, 650-740경)

2. 최치원(文昌候 崔致遠, 857-?)

3. 안유(향)(文成公 安裕, 1243-1306)

4. 정몽주(文忠公 鄭夢周, 1337-1392)

5. 김굉필(文敬公 金宏弼, 1454-1504)

6. 정여창(文獻公 鄭汝昌, 1450-1504)

7. 조광조(文正公 趙光祖, 1482-1519)

8. 이언적(文元公 李彦迪, 1491-1553)

9. 이 황(文純公 李滉, 1501-1570)

10.김인후(文正公 金麟厚, 1510-1560)

11.이 이(文成公 李珥, 1536-1584)

12.성 혼(文簡公 成渾, 1535-1598)

13.김장생(文元公 金長生, 1548-1631)

14.조 헌(文烈公 趙憲, 1544-1592)

15.김 집(文敬公 金集, 1574-1656)

16.송시열(文正公 宋時烈, 1607-1689)

17.송준길(文正公 宋俊吉, 1606-1672)

18.박세채(文純公 朴世采, 1631-1695)

 



⑤ 강화 관방유적 5진 7보 53돈대​

 

▶ 강화 5진: 월곶진, 제물진, 용진진, 덕진진, 초지진

▶ 강화 7보: 광성보, 선두보, 장곶보, 정포보, 인화보, 철곶보, 승천보​

 

▶ 강화 53돈대: 가리산돈대, 갈곶돈대, 갑곶돈대, 건평돈대, 검암돈대, 계룡돈대, 광성돈대, 광암돈대, 굴암돈대, 귀등돈대,낙성돈대, 덕진돈대, 동검북돈대, 망양돈대, 망월돈대, 망해돈대, 무태돈대, 미곶돈대, 북일곶돈대, 분오리돈대, 불장돈대, 빙현돈대, 삼암돈대, 석각돈대, 석우돈대, 섬암돈대, 속우돈대, 손돌목돈대, 송강돈대, 송곶돈대, 숙룡돈대, 양암돈대, 염주돈대, 오두돈대, 옥창돈대, 용당돈대, 월곶돈대, 의두돈대, 인화돈대, 작성돈대, 장곶돈대, 장자평돈대, 적북돈대(赤北墩臺), 제승돈대, 좌강돈대, 천진돈대, 철북돈대, 초지돈대, 추루돈대, 택지돈대, 화도돈대, 후애돈대, 휴암돈대.

 

⑥ 강화 외성 신문보도[오마이뉴스] 자료[2014.10.11. 이승숙]

 

힘들여 쌓은 강화 외성… 왜 스스로 허물었을까

-강화도 동쪽 해안을 지켜준 강화 외성

 

강화도를 중요시하면서 요새화 시킨 것은 고려시대부터 시작된다. 강력한 지도자의 등장으로 중국 대륙을 통일한 몽골은 주변 지역을 위협했다. 고려 역시 몽골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몽골의 사신 '저고여'가 본국으로 돌아가던 중 압록강 인근에서 피살되자 몽골은 이것을 기회로 고려를 침공했다. 고려는 대항하였으나 수도 개경이 포위되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화의를 성립하게 된다.

 

몽골이 철군하자 고려 조정은 장기 항전을 위해 강화도로 천도하고, 새로운 수도를 보호하기 위해 내성, 외성, 중성을 쌓았다. <고려사>에는 고종 24년(1237)에 외성을 쌓고 37년(1250)에 중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고려사절요>에는 고종 22년(1235) 12월에 당시 최고 실권자였던 최우가 주와 현에서 공역을 담당하는 사람들을 징발해서 강화 연안의 제방을 더 높게 쌓은 것으로 되어 있다.

 

몽골은 여러 차례에 걸쳐 고려에 쳐들어온다. 그러나 강화도에 있던 고려의 중심 세력들을 굴복 시킬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고려와 몽골은 화의를 맺는다. 몽골은 강화도가 눈엣가시처럼 생각이 되었는지 화의의 조건으로 강화 천도 시절의 궁궐과 성들을 다 부수기를 요구했다.

 

고려는 몽골의 요구대로 강화도의 궁궐과 성들을 허물었다. 몽골의 사절들은 빨리 부수기를 독촉했다. 성을 허물어뜨리는 소리가 천둥처럼 울렸고 병사들의 한탄과 고통스런 울음 또한 그에 버금갈 만큼 컸다.

 

사적 제 452호로 지정되어 보호를 받고 있는 외성은 강화의 동쪽 해안을 따라 쌓은 성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길이가 약 3만7076척(약 12킬로미터)에 달하며 흙으로 쌓은 성이었다고 나와 있다. 그러나 몽골의 요구에 의해 성을 파괴한 후로 흔적만 남아있던 것을 조선시대에 와서 강화도의 중요성이 대두되면서 다시 쌓았다.

 

조선의 숙종 임금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 강화도를 요새로 만들었다. 즉위 초 병조판서를 보내 지형을 살펴보게 한 뒤 고려시대 외성의 흔적을 토대로 강화 해안의 돌출부에 48개의 돈대를 설치했다.

 

숙종은 강화도를 하나의 큰 성으로 만들고자 했다. 강화 전 해안에 돈대가 설치되자 각 돈대를 연결하는 토성을 쌓도록 했다. 그래서 해안 방어상 중요한 위치에 있던 강화해협의 적북돈대에서 초지까지 약 40리에 이르는 토성을 쌓았다.

 

우리가 지금까지 보거나 들어서 알고 있는 성은 돌로 쌓은 것들이 대부분이다. 성의 높이가 높을 뿐만 아니라 돌 한 개의 크기 또한 커서 그 규모에 경탄을 하게 된다. 그러나 강화의 외성을 볼 때는 잠시 석성(石城)은 잊도록 하자. 돌로 쌓은 성에 비교하면서 강화 외성을 보면 실망스러울 수 있기 때문이다.

 

강화 외성은 흙으로 쌓은 성이었다. 그렇다 보니 오랜 세월 동안 비바람에 무너져 내려서 지금 남아있는 토성 구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더구나 토성을 따라 도로가 나면서 성은 더 왜소해졌다. 도로를 만들 때 흙을 돋워서 키를 높이다 보니 외성과 도로의 높이가 거의 비슷해져 버렸다. 그래서 일부러 일러주지 않으면 외성의 존재 자체를 모르고 지나칠 수도 있다.

 

갑곶돈대에서 더리미까지 흙으로 쌓은 외성이 남아있는데, 그곳은 '외성탐방로'로 지정해놓아서 성 위를 걸을 수 있다. 그러나 차도와 나란히 있는 탐방로를 따라 걸어서는 성의 면모를 제대로 느낄 수가 없다.

 

외성은 성 아래로 내려가서 밑에서 위로 올려다봐야 비로소 성의 진면목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다. 그 옛날 바다 건너 김포에서 강화를 바라보자면 해안을 따라 쌓은 외성 때문에 안이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의 모습만 보고 섣불리 강화외성을 판단하지는 말 일이다.

 

외성은 해안을 따라가며 쌓았기 때문에 밀물과 썰물의 흐름에 따라 무너지고 깎여 나가는 곳이 생겼다. 처음에는 흙으로 쌓았지만 돌로 쌓아도 마찬가지였다. 허물어지고 무너질 때마다 다시 쌓기를 반복하면서 근세에까지 유지되었다.

 

영조 때 강화유수였던 김시혁은 토성인 외성을 벽돌을 이용한 전성으로 쌓자고 주장했다. 영조 19년인 1743년에 중국 연경의 전성을 모방하여 구운 벽돌로 외성을 쌓게 되었다. 벽돌을 이용한 외성의 개축공사는 1744년 7월에 끝났다. 그러나 다음 해의 장마 때 성곽의 일부가 무너져 내리자 다시 돌로 성을 쌓았고, 이후 강화 외성은 벽돌을 구워 쌓은 전성과 석성의 혼합된 상태가 되었다.

 

외성의 유지와 보수에는 많은 노력이 들었던 것 같다. 정조 3년인 1779년에 강화유수가 왕에게 보고한 내용 중에 이러한 고충이 담겨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벽돌로 쌓은 성은 곧 무너져 갑곶 주변의 수 리 밖에는 남아 있는 것이 없사옵니다. 그동안 벽돌을 돌로 바꾸어 쌓고 있는데 1년에 3백보로 한정되어 있습니다. 지금까지 해마다 이렇게 축조했지만 50리 중 겨우 그 절반을 축조했고 옥포의 석성은 또 무너졌사옵니다. 지금의 이 성역은 빙빙 도는 고리와 같아서 민력이 항상 수고롭기만 할 뿐 편할 날이 없습니다."

 

성을 쌓고 보수하는 공사가 얼마나 힘들고 어려웠으면 왕에게 이런 탄원을 했을까. 한 곳을 보수하면 또 다른 곳이 무너지고 허물어졌으니, 이는 마치 둥근 원을 빙글빙글 도는 것과 같이 끝이 없는 일이라고 그는 말했다. 백성들의 고충이 말할 수 없이 컸음을 이를 통해 알 수 있다.

 

오두돈대 옆에는 구운 벽돌로 쌓은 외성이 남아 있는데 이는 지금으로부터 270년도 더 전인 영조 임금 때 쌓은 것이다. 뒤를 이은 정조는 수원의 화성을 벽돌로 쌓았다. 강화 전성을 쌓으면서 축적된 기술력으로 마침내 50년 뒤 수원의 화성을 완성 시킨 것이리라.

 

바닷물이 밀려들어오고 물러남에 따라 벽돌로 쌓은 전성도 견디지를 못하고 더러 허물어지고 무너져 내렸다. 그러나 성 위에 뿌리를 내린 나무 덕분에 일부나마 남을 수 있었다. 나무가 자라면서 성의 벽돌들을 품어 버렸다. 그래서 오두돈대 옆 전성 구간에 가보면 돌출된 나무뿌리 속에 벽돌이 박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마치 앙코르와트의 석조유적들처럼 강화의 벽돌로 쌓은 외성도 시간과 함께 나무와 하나가 되어 버렸다.

 

무너지고 허물어져 내리면 다시 쌓고 또 쌓았던 강화 외성이다. 그렇게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800년 이상을 버티어 왔다. 비록 웅대하지는 않지만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기리고 보존할 가치가 충분하다.

 

나들길 2코스 호국돈대길은 외성을 따라가는 길이기도 하다. 출발지인 갑곶돈대에서 종착점인 초지진까지 17킬로미터를 걷는 내내 강화 외성과 더불어 간다. 강화외성은 단순히 강화를 지키는 데 끝나지 않고 나라를 보존하기 위한 방비책이었다. 어찌 생각하면 강화는 우리나라를 지키는 제일선이었고 그 맨 앞에 외성이 있었던 셈이다.

 

비록 무너지고 허물어져서 흔적만 남아있는 강화외성이지만 그 시절에는 얼마나 장대했을까. 또 성을 쌓고 방비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했을 것인가. 역사란 보이지 않는 것과의 대화라고 하는데, 강화외성을 보면서 옛날을 떠올려볼 수 있다. 바닷물에 쓸려 나가면 연구하고 보완해 나가던 옛 사람들의 지혜와 수고로움을 외성에서 느낄 수 있다.

 

어찌 생각하면 현재에도 외성을 수리하고 보완하면서 쌓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현대의 외성은 과거처럼 흙이나 돌로 쌓지 않는다. 강화 해안을 따라가며 쳐놓은 철책이 바로 현대의 외성이 아닐까.

 

과거의 성이 밖에 있는 적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라면 현대의 철책은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목적 외에 안에 있는 사람들도 철책 밖으로 넘어갈 수 없다. 철책은 네 발 달린 생명체의 출입을 금지한다. 두 발 뿐인 새들은 자유로이 하늘을 날아 드나들 수 있지만 네 발 동물들은 그것을 통과하지 못한다. 두 발과 두 손을 가진 사람은 더더욱 철책을 넘어갈 수 없다.

 

강화의 동쪽 해안을 따라가며 있던 외성은 그 존재만으로도 적의 침입을 막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그처럼 현대의 외성인 철책 역시 날카로운 가시를 촘촘하게 달고 적의 접근을 완강하게 불허한다. 강화도의 외성은 형태만 달리 했을 뿐 지금도 여전히 건재한다.

 

⑦ 강화도에 대하여

 

강화도는 남북 28km, 동서 16km, 면적 302.14㎢로서 제주도, 거제도, 진도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4번째로 큰 섬이다.

 

강화도는 원래 두 개의 섬, 즉 원래의 강화도(江華島)와 마니산을 중심으로 한 고가도(古加島)로 나누어져 있었으나, 고려시대부터의 간척사업으로 하나의 섬이 되었다.

 

강화는 한강, 임진강, 예성강 등 3개의 강이 합류하는 지점의 바다 입구에 위치하고 있다.

 

지형은 마니산과 정족산의 큰 산이 있지만 대부분은 평야지대로 일찍이 농업이 발달하였다.

 

강화도는 섬 자체가 우리나라 역사의 축소판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선사시대의 고인돌 유적부터 단군왕검의 얼이 담긴 마니산, 고려 때의 대몽항쟁과 팔만대장경 조성, 서양세력과 처음으로 전투를 벌였던 병인양요에 이르기까지 강화도의 역사는 곧 우리 한민족의 역사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지금도 강화도는 역사와 문화의 섬으로 그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강화군은 멀리 국조 단군성조의 개국과 그 역사를 함께하며 도서 특유의 지정학적 숙명으로 고금을 통해 왕실의 흥망성쇄가 곧 강화군의 역사를 이룬 것이라고 하겠다.

 

강화의 옛 이름은 갑비고차(甲比古次)라고 불리었고, 고구려시대에 이르러 군제를 두어 혈구군이라 칭했으며 그 후 국력이 강성하자 신라때에 이르러 해구군으로 개칭하고 태수를 주재시켰다. 고려조에 이르러 태조 22년에 현으로 개편되고 이어 현재 지명인 강화현으로 불리었다.

 

강화는 국가에 커다란 변란이 있을 때 마다 제2의 서울로서 임무가 주어졌으며, 외적이 침입할 때 마다 조정에서는 강화로 천도함으로서 강화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강화는 근 40년간이나 사실상의 고려조의 왕도 역할을 하게 되었고 그 후에도 수차례 천도가 있었던바 처음으로 강화에 천도한 것은 고려 23대 고종이었다. 그해 대륙에서 득세한 신흥세력인 몽고군이 송경(지금의 개성)에 침범하자 당시의 권신 최우의 권유로 8월에 천도하였고, 그 다음대의 원종도 강화에 머물러 39년간 강화는 사실상 고려의 수도이었다.

 

1995년 3월 1일 강화군은 인천광역시에 통합되었다. 개국의 성지인 강화군은 국조단군의 홍익인간 이념과 외침에 맞서 끝까지 항쟁하였던 호국의 고장으로 지역 곳곳마다 산재되어 있는 문화유적의 발굴보전과 산과 바다 등 자연경관을 최대한 활용한 역사문화 관광도시로 개발하여 21세기를 선도할 수도권 제일의 관광지 조성을 위하여 나날이 변모해가고 있다.

 

<강화팔경>

1. 전등사: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635

2. 보문사: 인천광역시 강화군 삼산면 매음리 629

3. 연미정: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월곶리 242

4. 갑곶돈대: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갑곶리 1020번지 일대

5. 마니산: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 일원

6. 광성보: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833

7. 초지진: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초지리 624

8. 적석사: 인천광역시 강화군 내가면 고천리 210-3

 

7. 더 많은 사진 보기

 

강화나들길 1코스 심도역사 문화길(사진 1) http://blog.daum.net/joingi61/15965213

강화나들길 1코스 심도역사 문화길(사진 2) http://blog.daum.net/joingi61/15965214

강화나들길 1코스 심도역사 문화길(사진 3) http://blog.daum.net/joingi61/15965215

강화나들길 1코스 심도역사 문화길(사진 4) http://blog.daum.net/joingi61/15965216

 

8. 강화나들길 답사 후기

 

코스

답사

순서

답사날짜

후기

8.철새 보러 가는 길

7

2019.01.01

http://blog.daum.net/joingi61/15965212

9. 다을새 길

3

2018.11.20

http://blog.daum.net/joingi61/15965198

10. 머르메 가는 길

4

2018.11.27

http://blog.daum.net/joingi61/15965201

11.석모도 바람길

5

2018.12.04

http://blog.daum.net/joingi61/15965204

12.주문도 길

1

2018.11.12

http://blog.daum.net/joingi61/15965194

13.볼음도 길

2

2018.11.13

http://blog.daum.net/joingi61/15965195

19.석모도 상주해안길

6

2018.12.25

http://blog.daum.net/joingi61/15965207

 

9. 답사 경비

 

①승용차 이용 기름값(추정): 16,000

②통행료: 3,600

③식대(컵라면, 커피): 5,000

④버스비: 1,250

⑤전쟁박물관 입장료: 900

⑥합계: 26,750